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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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비는 남흉노의 인물로, 195년 우현왕에 임명되었다.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할 때 도움을 주었으나 이각과 곽사의 공격에 패배했다. 이후 조조를 따라 허창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216년 조조가 호저천을 억류한 후 남흉노를 감독했다. 거비는 선비족 탁발과 싸웠으며, 그의 아들들은 독고부와 철불부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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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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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비 (去卑) | |
성씨 | 흉노 (匈奴) |
시대 | 후한 |
활동 시기 | 2세기 ~ 3세기 |
주요 활동 | 남흉노의 우두머리 |
생애 | |
초기 활동 | 거비는 남흉노의 어부라(於扶羅)의 아들이며, 강거(康居)에 볼모로 보내졌다. 어부라가 죽자 그의 동생 호도아시축취(呼廚泉)가 뒤를 이었다. |
분열 | 조조가 호도아시축취를 업(鄴)으로 데려가고, 유표를 시켜 남흉노를 다스리게 하자 남흉노는 분열되었다. 좌현왕은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북으로 달아났으며, 호도아시축취의 종제인 거비를 새로운 선우로 옹립했다. |
조조와의 관계 | 거비는 스스로 선우가 되어 부루 등과 함께 평양(平陽)에 주둔하며 조조에게 대항했다. 조조는 하후연을 보내 거비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조조는 호도아시축취를 여전히 억류하고 거비를 남흉노의 우두머리로 삼아 부족을 다스리게 했다. |
사망 및 영향 | 거비가 죽자 조조는 호도아시축취를 좌국성(左國城)으로 돌려보내 남흉노를 다스리게 했다. 이로써 남흉노는 다시 통합되었다. |
2. 생애
거비는 유맹과 유고성원 두 아들을 두었다. 250년대에 장군 등애가 보낸 상소에 따르면, 거비가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그의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 유맹은 결국 칭호를 받았지만, 나중에 서진에 반란을 일으켰고 272년에 살해되었다. 유맹의 아들인 유부륜(劉副崙)은 탁발로 도망쳤고, 그와 그의 후손들은 지배 가문과 통혼하여 독고씨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유고성원은 유맹의 백성을 접수했고, 유고성원의 아들인 유호는 철불 부족의 창시자가 되었다. 407년, 유호의 후손인 혁련발발은 오호 십육국 시대의 하나인 하를 건국했다.
거비의 조상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1]
- 《북사》(파륙한상전)에 따르면, 거비는 강거의 동생이다.
- 《신당서》(재상세계오하)에 따르면, 거비는 한나라 왕족 출신으로 흉노 귀족이 된 유진백(劉進伯)의 후손인 울리(烏利)의 아들이다.
2. 1. 초기 활동
《위서》에 따르면 거비는 남흉노의 황족 란씨의 일원이었다. 《북사》는 그가 선우인 강거의 형제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훨씬 후대의 의심스러운 《구당서》의 기록에서는 그를 한나라 왕족 출신으로 흉노 귀족이 된 유진백(劉進伯)의 후손인 울리(烏利)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호저천이 195년에 선우로 즉위하자, 거비는 "우현왕"(; 《위서》에서는 "좌현왕"으로 알려짐)의 칭호를 받았다.같은 해에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했을 때, 그의 신하인 동승은 이각과 곽사의 추격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거비와 백파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거비 등은 처음에는 그들을 격파했지만, 이각이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큰 패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안읍(安邑; 현재의 산시성 하현)으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196년에 헌제는 낙양에 도착하여 군벌인 조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거비는 수도를 허창으로 옮기는 데 조조를 따라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216년, 조조는 호저천을 업현에 억류하고 남흉노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오늘날 산시성의 태원군을 중심으로 오부(五部)로 재편했다. 그는 호저천을 대신하여 거비를 남흉노를 감독하도록 임명했으며, 선우 칭호는 호저천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고, 이후 새로운 선우는 임명되지 않았다. 오부를 감독하는 동안, 거비는 산시성 북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선비족인 탁발과 싸웠다. 그는 그의 형제인 판류희를 탁발을 공격하도록 보냈지만, 그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흥평 2년(195년), 조카인 지지시축후선우 어부라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호주천이 선우가 되자, 그의 숙부인 거비는 우현왕이 되었다. 11월,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할 때, 이를 호위하던 양봉·동승 등은 백파적 수령인 호재·이락·한섬 및 남흉노의 우현왕 거비를 불러들여, 닥쳐오는 이각·곽사 등을 격퇴하여 수급 수천을 얻었다. 12월, 다시 이각 등에게 추격당하여, 양봉 등은 패배한다. 그 후, 거가는 어떻게든 안읍까지 도망쳤다. 이 사이에, 거비의 부대원들에 의해 채염이 납치되었다고 전해진다.[1]
건안 원년(196년) 1월, 헌제는 안읍에서 천하에 대사를 내리고, 건안으로 개원했다. 7월, 겨우 거가는 낙양에 도착했다. 그 후, 거비 등은 천자를 옹립한 조조의 허창으로의 천도에도 수행한 후, 귀국했다.[1]
건안 21년(216년) 7월, 선우 호주천이 한나라에 입조하자, 위공에 취임한 조조는 그를 업에 억류하고, 대신 거비에게 남흉노 제부를 감독하게 했다.[1]
2. 2. 조조와의 관계
195년,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할 때, 헌제의 신하 동승은 이각과 곽사의 추격군을 물리치기 위해 거비와 백파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거비 등은 처음에는 그들을 격파했지만, 이각이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큰 패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안읍(安邑; 현재의 산시성 하현)으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거비의 부대원들이 채염을 납치했다고 전해진다.[1]196년, 헌제는 낙양에 도착하여 조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거비는 조조를 따라 수도를 허창으로 옮기는 데 동행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216년, 조조는 호저천을 업현에 억류하고 남흉노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산시성의 태원군을 중심으로 오부(五部)로 재편했다. 조조는 호저천을 대신하여 거비에게 남흉노를 감독하도록 임명했으며, 선우 칭호는 호저천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고, 이후 새로운 선우는 임명되지 않았다.
2. 3. 오부 감독 및 선비족과의 전쟁
labels=no|c=右賢王중국어 거비는 195년에 호저천이 선우로 즉위하자 "우현왕"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할 때, 그의 신하 동승은 이각과 곽사의 추격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거비와 백파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거비 등은 처음에는 그들을 격파했지만, 이각이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큰 패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안읍(安邑; 현재의 산시성 하현)으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196년에 헌제는 낙양에 도착하여 군벌 조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거비는 수도를 허창으로 옮기는 데 조조를 따라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216년, 조조는 호저천을 업현에 억류하고 남흉노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오늘날 산시성의 태원군을 중심으로 오부(五部)로 재편했다. 그는 호저천을 대신하여 거비를 남흉노 감독으로 임명했으며, 선우 칭호는 호저천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고 이후 새로운 선우는 임명되지 않았다. 오부를 감독하는 동안, 거비는 산시성 북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선비족인 탁발과 싸웠다. 그는 그의 형제 판류희를 탁발 공격에 보냈지만, 그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3. 후대
유맹(劉猛)은 아버지 거비의 뒤를 이어 우현왕이 되었으나, 후에 진(晉)에게 암살당했다. 유맹의 아들 유부륜(劉副侖)은 부락을 이끌고 선비족 탁발부(拓跋部)에 투항하여 독고부(獨孤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유맹이 죽은 뒤 그의 동생 고승원이 우현왕을 계승하여 철불부(鐵弗部)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승원의 아들 유호는 철불 부족을 세웠고, 유호의 후손 혁련발발은 하나라를 건국했다.[1]
3. 1. 독고부
거비의 아들 유맹(劉猛)은 우현왕 지위를 계승했으나, 후에 진(晉)에게 암살당했다. 유맹의 손자 유부륜(劉副侖)은 부락을 이끌고 선비(鮮卑) 탁발부(拓跋部)에 가입하여 독고부(獨孤部)의 시조가 되었다.거비의 또 다른 아들 고승원은 유맹이 피살된 후 우현왕을 계승하여 철불부(鐵弗部)의 지도자가 되었다.
3. 2. 철불부
유맹(劉猛)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고승원이 우현왕을 계승하여 철불부(鐵弗部)의 지도자가 되었다.[1] 거비는 유맹과 유고성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유고성원은 유맹의 백성을 접수했고, 고성원의 아들인 유호는 철불 부족의 창시자가 되었다.[1] 407년, 유호의 후손인 혁련발발은 오호 십육국 시대의 하나인 하를 건국했다.[1]4. 평가 및 영향
거비는 남흉노의 황족 란씨 출신으로, 위서에 따르면 선우인 강거의 형제였다.[1] 195년, 호저천이 선우로 즉위하면서 거비는 "우현왕"(右賢王|여우셴왕중국어) 칭호를 받았다.[1] 같은 해,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할 때 동승의 요청으로 백파적과 함께 헌제를 도왔다.[1]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이각과 곽사의 추격군에 패배하기도 했다.[1]
196년, 헌제가 조조의 보호를 받게 되자 거비는 조조를 따라 허창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1] 216년, 조조는 호저천을 업현에 억류하고 남흉노를 다섯 부로 재편했는데, 거비는 호저천을 대신하여 남흉노를 감독하게 되었다.[1] 거비는 산시성 북쪽에서 세력을 키우던 선비족 탁발과 싸웠으나, 그의 형제 판류희는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1]
거비는 유맹과 유고성원 두 아들을 두었다.[1] 거비 사후, 유맹은 칭호를 받았으나 서진에 반란을 일으켜 272년에 살해되었다.[1] 유맹의 아들 유부륜(劉副崙)은 탁발로 도망쳐 독고씨가 되었고, 유고성원은 유맹의 백성을 접수했으며, 그의 아들 유호는 철불 부족의 창시자가 되었다.[1] 407년, 유호의 후손 혁련발발은 오호 십육국 시대의 하나인 하를 건국했다.[1]
참조
[1]
논문
Han and Xiongnu: A Reexamination of Cultural and Political Relations (II)
[2]
서적
後漢書
[3]
서적
新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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