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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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시몬 옴은 1789년 독일에서 태어난 물리학자이다. 옴은 옴의 법칙을 발견하여 전기 회로 이론 발전에 기여했으며, 옴의 음향 법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에를랑겐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 철학을 공부하고,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827년 옴의 법칙을 담은 저서를 출판했으나, 초기에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옴은 뉘른베르크와 뮌헨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854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기 저항의 단위는 옴(Ω)으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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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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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게오르크 지몬 옴 |
출생일 | 1789년 3월 16일 |
출생지 | 에를랑겐, 바이에른 공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854년 7월 6일 |
사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연방 |
국적 | 바이에른 왕국 |
로마자 표기 | Georg Simon Ohm |
학력 | |
모교 | 에를랑겐 대학교 |
박사 지도교수 | 카를 크리스티안 폰 랑스도르프 |
경력 | |
직장 | 뮌헨 대학교 |
분야 | 물리학 수학 |
업적 | |
알려진 업적 | 옴의 법칙 옴의 음향 법칙 옴 |
수상 | |
수상 | 코플리 메달 (1841년) |
가족 | |
친척 | 마르틴 옴 (형) |
2. 생애
독일 에를랑겐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교육을 받았으며, 1805년 에를랑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 물리, 철학을 공부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스위스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나,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1811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밤베르크, 쾰른, 베를린 등 여러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특히 쾰른 예수회 김나지움 재직 시절 물리 실험에 몰두했으며, 이 시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1827년 옴의 법칙을 담은 중요한 저서를 출간했다.
1833년에는 뉘른베르크의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839년부터는 학장을 역임했다. 1849년 뮌헨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실험물리학 교수로 활동했다.
1854년 7월 6일, 옴은 뮌헨에서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뮌헨 구 남부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1789년 ~ 1805년)
게오르크 시몬 옴은 1789년 3월 16일[4] 독일 에를랑겐(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에서 개신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물쇠 제조공인 요한 볼프강 옴이었고, 어머니는 에를랑겐 출신 재봉사의 딸인 마리아 엘리자베트 베크였다.[4] 옴의 부모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독학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은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아들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4] 그는 아들들에게 직접 수학, 물리학, 화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쳤다.[4]옴의 집안에는 총 7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게오르크 시몬을 포함하여 단 3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형제는 훗날 저명한 수학자가 된 남동생 마르틴 옴과 여동생 엘리자베트 바바라였다.[4] 옴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났다.[4]
어린 시절부터 게오르크와 마르틴은 아버지에게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게오르크 시몬은 11세부터 15세까지 에를랑겐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그곳에서는 과학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4] 이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받았던 영감 넘치는 교육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4] 에를랑겐 대학교의 교수였던 카를 크리스티안 폰 랑스도르프는 이러한 옴 형제의 학문적 배경을 언급하며 베르누이 가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했다.[4]
2. 2. 학창 시절 (1805년 ~ 1811년)
만 16세인 1805년, 옴은 독일 에를랑겐에 위치한 에를랑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 물리,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안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옴이 교육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걱정하여 그를 스위스로 보냈고, 1806년 9월 옴은 스위스 고트슈타트의 한 사립학교에서 수학 교사 자리를 얻어 학비를 벌기 시작했다.1809년 초, 옴이 존경하던 카를 크리스티안 폰 랑스도르프 교수가 에를랑겐 대학교를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옴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랑스도르프 교수와 함께 수학 공부를 이어가고 싶어했지만, 랑스도르프 교수는 옴에게 혼자서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했다. 그는 오일러, 라플라스, 라크루아와 같은 저명한 수학자들의 저서를 읽으며 깊이 연구하라고 조언했다. 옴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 1809년 3월, 고트슈타트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스위스 뇌샤텔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2년 동안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랑스도르프 교수의 조언에 따라 꾸준히 수학을 독학했다.
1811년 4월, 옴은 다시 에를랑겐 대학교로 돌아왔고, 같은 해 10월 빛과 색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 3. 교직 생활 (1811년 ~ 1833년)
1811년 10월 25일, 에를랑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옴은 바로 모교의 수학 강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3학기 동안 강사로 일한 후, 낮은 급여와 불투명한 장래 때문에 대학 강단에서의 길을 포기했다.1813년 1월, 바이에른 정부의 제안으로 밤베르크에 있는 직업학교(독: Realschule)에서 수학 및 물리학 교사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직책에 만족하지 못한 옴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자 기하학에 관한 기초 교과서를 집필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 학교는 1816년 2월 문을 닫았고, 바이에른 정부는 옴을 밤베르크의 다른 학교로 보내 수학 교육을 돕도록 했다.

이후 옴은 완성된 기하학 원고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에게 보냈다. 국왕은 옴의 책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1817년 9월 11일 쾰른의 예수회 김나지움(Jesuiten-Gymnasium, 또는 드라이쾨니히스김나지움) 교사직을 제안했다. 과학 교육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 학교에서 옴은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특히 잘 갖춰진 물리 실험실 덕분에 본격적인 물리학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자물쇠 제조공의 아들로서 기계 장치에 대한 실무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1826년에는 베를린의 사관학교(독: Kriegsschule)에서 교관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1827년, 옴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연구 결과를 담은 저서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디 갈바니셰 케테, 마테마티슈 베아르바이터트deu (수학적으로 연구한 갈바니 전지 회로)를 베를린에서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기 회로 내 기전력은 전류와 저항의 곱과 같다는 법칙, 즉 오늘날 옴의 법칙으로 알려진 내용을 제안했다. 그러나 쾰른의 학교 측은 그의 연구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옴은 결국 교직을 사임했다. 이후 그는 뉘른베르크의 공과학교(Technische Hochschule Nürnberg)에 지원하여 채용되었다. (1833년 부임)
2. 4. 대학교수 시절과 사망 (1833년 ~ 1854년)
1833년 뉘른베르크의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Technische Hochschule Nürnberg) 교수가 되었으며 1839년부터는 학장을 지냈다. 1849년엔 뮌헨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Beiträge zur Molecular-Physik|분자 물리학de을 출판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후속 권들을 더 집필할 계획을 밝혔으나, 책의 독창적인 발견 일부가 이미 스웨덴 과학자에 의해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추가 출판을 중단했다.[5] 1852년 뮌헨 대학교의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15]1854년 7월 6일, 옴은 뮌헨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15] 뮌헨 구시가지 남부 공동묘지(Alter Südfriedhofde)에 안장되었다. 그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에 따르면, 일부 편지에는 Gott befohlen, G S Ohm,|하느님께 맡깁니다de이라는 서명을 남기기도 했다.[6] [7]
3. 옴의 법칙 발견
옴의 법칙은 옴이 1827년에 출판한 저서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수학적으로 연구한 갈바니 전지 회로de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8][9] 이 책에서 그는 회로의 어떤 부분 양 끝 사이에 작용하는 기전력은 전류의 세기와 그 회로 부분의 전기 저항의 곱과 같다는 법칙을 설명했다.[8][9]
흥미롭게도 전류가 전위차에 비례한다는 이 법칙 자체는 영국의 과학자 헨리 캐번디시가 1781년에 먼저 발견했지만, 그는 생전에 자신의 발견을 발표하지 않았다. 옴이 독자적으로 법칙을 재발견하여 발표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1879년에야 캐번디시의 업적이 알려졌기 때문에, 이 법칙은 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8]
옴은 자신의 이론을 근접 작용의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원격 작용 이론과 대비되는 것이었다.[10] 그는 전기가 인접한 입자들 사이에서 전달된다고 믿었다. 그의 연구는 전류 이론과 응용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15] 발표 당시에는 학계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그의 연구는 회로 이론이라는 학문의 초기 시작을 알렸으나, 이 분야가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 말이었다.[12]
초기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결국 인정받아, 1841년 영국 왕립 학회로부터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으며,[16] 1842년에는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오늘날 전기 저항의 SI 단위는 그의 공로를 기려 옴(기호 Ω)으로 명명되어 사용되고 있다.[15]
3. 1. 옴의 법칙 이전의 연구
옴은 1825년에 발표한 첫 논문에서 전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전선에서 발생하는 전자기력이 감소하는 현상을 조사했다.[14] 이듬해인 1826년에는 조제프 푸리에의 열전도 연구를 모델 삼아 회로 내의 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옴은 실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갈바니 전기에 대한 다른 연구자들의 결과를 설명하는 데 기여하는 법칙을 제안했다.[14]이러한 초기 연구들은 1827년 베를린에서 출판된 그의 주요 저서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de'' (수학적으로 연구한 갈바니 전지 회로)로 이어졌다. 이 책은 이전 2년간 여러 저널에 발표했던 연구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전류 이론 및 응용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5] 이 저서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옴의 법칙이다.[8][9]
옴은 자신의 이론을 근접 작용 이론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원격 작용 개념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그는 전기가 서로 인접한 입자들 사이에서 전달된다고 믿었다.[10] 이러한 그의 과학적 접근 방식은 푸리에나 나비에와 같은 동시대 과학자들과 차이를 보였다.[10][18] 옴이 옴의 법칙을 형성하는 데 사용한 개념적 틀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11][19]
옴의 연구는 회로 이론이라는 학문 분야의 초기 단초를 제공했지만,[12] 그의 이론과 연구는 발표 당시 학계로부터 즉각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15]
3. 2. 옴의 법칙 발표와 초기 반응
옴은 1825년 첫 논문에서 전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전자기력이 감소하는 현상을 다루었고, 1826년에는 조제프 푸리에의 열전도 연구를 모델 삼아 회로 내 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14]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1827년 베를린에서 그의 전기 이론을 집대성한 저서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de (''수학적으로 연구한 갈바니 전지 회로'')를 출판했다.[8][9] 이 책은 이후 전류 이론과 응용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5]이 저서에서 옴은 회로의 특정 부분 양단에 작용하는 기전력이 전류의 세기와 그 부분의 전기 저항의 곱과 같다는 옴의 법칙을 명확하게 제시했다.[8][9] 이 책은 이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수학적 배경 설명으로 시작한다.[15]
옴은 자신의 이론을 근접 작용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원격 작용 개념에 반대했다. 그는 전기의 전달이 그가 직접 사용한 용어인 "인접 입자"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믿었으며, 이는 조제프 푸리에나 클로드 루이 나비에와 같은 동시대 과학자들의 접근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10][18] 토마스 아치볼드(Thomas Archibald)는 옴이 법칙을 공식화할 때 사용한 개념적 틀에 대해 연구했다.[11][19]
그러나 옴의 이러한 중요한 연구는 발표 당시 학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냉담한 반응에 부딪혔다.[15] 옴의 연구는 회로 이론 분야의 초기 시작을 알렸지만, 이 분야가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 말이었다.[12]
한편, 전류가 전위차에 비례한다는 법칙 자체는 1781년 헨리 캐번디시가 먼저 발견했었다. 하지만 캐번디시는 생전에 이 발견을 발표하지 않았고, 옴이 독자적으로 법칙을 재발견하여 발표한 지 한참 후인 1879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법칙에는 옴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18]
3. 3. 옴의 법칙의 재조명과 의의
옴은 1827년 자신의 주요 저서인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디 갈바니셰 케테, 마테마티슈 베아르바이터트de (''수학적으로 연구한 갈바니 전지 회로'')에서 처음으로 옴의 법칙을 발표했다.[8][9][15] 이 책에서 그는 회로의 특정 부분 양 끝 사이에 작용하는 기전력은 전류의 세기와 그 부분의 전기 저항의 곱과 같다는, 오늘날 옴의 법칙으로 알려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8][9] 옴은 자신의 이론을 근접 작용 이론으로 제시하며, 전기가 '인접 입자' 사이에서 전달된다고 믿었다.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원격 작용 개념과는 다른 접근이었다.[10] 이러한 그의 과학적 접근 방식은 조제프 푸리에나 클로드 루이 나비에와 같은 동시대 과학자들과 차이를 보였다.[10][18]옴의 연구는 후대의 전류 전기 이론과 그 응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15] 발표 당시에는 학계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으며, 특히 그의 모국인 독일 내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전류와 전위차가 비례한다는 관계 자체는 1781년 영국의 헨리 캐번디시가 먼저 발견했으나, 그는 생전에 이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캐번디시의 발견은 옴이 독자적으로 법칙을 재발견하고 발표한 지 한참 후인 1879년에야 알려졌기 때문에, 이 법칙은 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8]
초기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옴의 업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의 과학자 찰스 휘트스톤은 옴이 물리학 분야에 도입한 명확한 정의와 실험적 결과에 주목했다.[17] 마침내 1841년, 영국 왕립 학회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권위 있는 코플리 메달을 수여했다.[16][20] 이듬해인 1842년에는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21] 1845년에는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옴의 연구는 회로 이론이라는 학문 분야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세기 후반 전기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그의 법칙은 전기 회로를 이해하고 설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원리로 자리 잡았다.[12] 옴의 법칙은 전류, 전압, 저항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전기 공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오늘날 전기 저항의 SI 단위는 그의 이름을 기려 옴(기호 Ω)으로 사용되고 있다.[15]
4. 옴의 음향 법칙
소리의 인식과 관련하여 옴의 음향 법칙(때때로 음향 위상 법칙이라고도 함)을 제시했다. 이 법칙은 음악적 소리가 귀에 의해 배음의 조합으로 인식된다는 설명이지만,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는 한계가 있다.[13]
4. 1. 옴의 음향 법칙의 내용
옴의 음향 법칙은 음악적 소리가 귀에 의해 여러 개의 구성 요소인 순수한 배음의 조합으로 인지된다는 법칙이다.[13] 이 법칙은 때때로 음향 위상 법칙 또는 간단히 옴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즉, 음악 등에서 들리는 음색은 이 법칙에 따라 여러 배음이 합쳐진 결과로 귀가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 법칙이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4. 2. 한계점
옴의 음향 법칙은 음악과 같은 소리의 음색이 여러 개의 순수한 배음 조합으로 귀에 인식된다는 법칙이다. 하지만 이 법칙은 완벽하게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13]5. 저서
게오르크 옴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1827년 베를린에서 출판한 『수학적으로 다룬 갈바니 전지』(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de)이다. 이 책은 옴의 법칙의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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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 | {{lang|de|Grundlinien zu einer zweckmäßigen Behandlung der Geometrie als höheren Bildungsmittels an vorbereitenden Lehranstalte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