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를랑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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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를랑겐은 독일 바이에른주에 위치한 도시로, 미텔프랑켄 분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레그니츠 강 유역에 위치한다. 14세기부터 시의회가 존재했으며, 1812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통합되었다. 지멘스,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가 주요 기업 및 기관이며, 베르크키르바이 축제와 같은 문화 행사도 열린다. 에를랑겐은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로, 다양한 교통 수단을 갖추고 있으며, 뉘른베르크 S-반과 경전철 시스템이 운행될 예정이다. 또한, 환경 보호를 중시하여 태양광 발전 확대에 힘쓰고 있으며, 다양한 자연 보호 구역과 경관 보호 구역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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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를랑겐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독일어 이름 | 에를랑 |
| 방언 | 에를랑 |
| 유형 | 대도시 |
| 행정 | |
| 국가 | 독일 |
| 주 | 바이에른주 |
| 지역 | 미텔프랑켄 |
| 군 | 군 독립시 |
| 해발 고도 | 279 |
| 면적 | 76.95 |
| 우편 번호 | 91052 91054 91056 91058 |
| 지역 번호 | 09131 0911 (휘텐도르프 지역) 09132 (노이제스 지역) 09135 (데히젠도르프 지역) |
| 차량 번호판 | ER |
| 지방 자치체 코드 | 09 5 62 000 |
| 하위 행정 구역 | 9개 구역 |
| 시장 | 플로리안 야니크 |
| 시장 직함 | 오버뷔르거마이스터 (Oberbürgermeister, 시장) |
| 소속 정당 | SPD |
| 웹사이트 | 에를랑겐 공식 웹사이트 |
| 인구 통계 | |
| 인구 | formatnum:244,425명 |
| 인구 조사 기준일 | Population GER-BY|09562000|DATE |
| 기타 정보 | |
| 대도시권 | 뉘른베르크 대도시권 |
2. 지리
에를랑겐은 미텔프랑켄 분지 가장자리의 레그니츠 강 범람원에 위치하며, 강은 도시를 거의 같은 크기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도시 서쪽에는 마인-도나우 운하가 레그니츠 강과 평행하게 놓여 있다.
중앙 유럽에 위치한 에를랑겐은 서늘한 온대 기후대에 속하며, 대륙성 기후나 해양성 기후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지만 연간 강수량 645mm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기후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가을과 겨울에는 레그니츠 강 계곡에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8] 2020년에는 97건의 번개가 발생했다.
에를랑겐의 기후는 뉘른베르크 공항에서 측정한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 평균 최고 기온 (°C) | 1.9°C | 4.3°C | 8.9°C | 13.6°C | 18.8°C | 22°C | 23.7°C | 23.3°C | 20°C | 14.2°C | 7°C | 3°C | 13.4°C |
| 평균 기온 (°C) | -1.1°C | 0.5°C | 4°C | 8.2°C | 13°C | 16.3°C | 18.1°C | 17.7°C | 14.3°C | 9.4°C | 3.9°C | 0.3°C | 8.7°C |
| 평균 최저 기온 (°C) | -4°C | -3.3°C | -1°C | 2.7°C | 7.2°C | 10.6°C | 10.6°C | 12.1°C | 8.5°C | 4.6°C | 0.8°C | -2.4°C | 4°C |
| 강수량 (mm) | 45mm | 39mm | 46mm | 48mm | 64mm | 75mm | 69mm | 67mm | 51mm | 45mm | 44mm | 52mm | 645mm |
2. 1. 위치
에를랑겐은 미텔프랑켄 분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레그니츠 강의 범람원에 위치하고 있다. 강은 도시를 거의 같은 크기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도시 서쪽에는 마인-도나우 운하가 레그니츠 강과 평행하게 놓여 있다. 내 시가지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온 슈바바흐 강이, 시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온 Mittlere Aurach|미텔레 아우라흐de가 레그니츠 강으로 흘러든다.에를랑겐과 인근 대도시와의 위치와 거리는 다음과 같다. 거리는 도시의 핵심부 간의 직선 거리이다.
| 슈바인푸르트 (100 km) | 밤베르크 (40 km) | 바이로이트 (90 km) |
|---|---|---|
|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220 km) | 체코 국경 | |
|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 (80 km) | 뉘른베르크 (20 km) | 레겐스부르크 (120 km) |
2. 2. 인접 시정촌
에를랑겐 시와 인접한 자치구 또는 비자치 지역은 다음과 같다. 북쪽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자치구 및 비자치 지역 |
|---|
| 비법정 구역 마르크(Mark) |
| 뫼렌도르프 |
| 부벤로이트 |
| 마를로프슈타인 |
| 슈파르도르프 |
| 부켄호프 |
| 부켄호퍼 포르스트(Buckenhofer Forst) 산림 지역 (이상 모두 에를랑겐-회히슈타트 군 소속) |
| 뉘른베르크 |
| 퓌르트 |
| 오버미헬바흐 (퓌르트 군 소속) |
| 헤르초겐아우라흐 |
| 헤스도르프 (이상 모두 에를랑겐-회히슈타트 군 소속) |
2. 3. 도시 구성
에를랑겐은 공식적으로 9개의 구(Stadtteil)와 40개의 통계 구역(statistischer Bezirk)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도 시역은 등기부·측량법상 관련한 12개의 게마르쿵(Gemarkung, 영역)으로 나뉘는데, 그 경계는 통계 구역의 경계와는 상당히 다르다. 게마르쿵과 통계 구역의 일부는 과거 독립된 촌락이었으며, 새로운 주택지도 포함되어 구역명으로 그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경계는 공적으로 정해진 경계와 다른 경우가 많다.[5][6][7]2. 3. 1. 구 및 통계 구역
에를랑겐은 공식적으로 9개의 구와 40개의 통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39개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5] 도시 지역은 12개의 토지대장 및 토지법 관련 구역(게마르쿵겐)으로 세분화되어 있으며, 이들의 경계는 통계 구역의 경계와 크게 다르다. 구 및 통계 구는 부분적으로 이전의 독립적인 자치 단체였지만,[6][7] 구 이름으로도 명명된 새로운 정착지도 포함한다. 전통적이고 주관적으로 인식되는 이웃의 경계는 종종 공식적인 경계와 다르다.
| 구역 | 통계 구역 |
|---|---|
| 중앙 | |
| 레그니츠 | |
| 북 | |
| 동 | |
| 남 | |
| 동남 | |
| 서남 | |
| 서 | |
| 서북 |
2. 3. 2. 게마르쿵 (Gemarkung)
| 게마르쿵 | 게마르쿵 | 게마르쿵 |
|---|---|---|
| 뷔헨바흐 | 프라우엔아우라흐 | 코스바흐 |
| 브루크 | 그로스데크젠도르프 | 크리겐브룬 |
| 엘터스도르프 | 휘텐도르프 | 묀아우 |
| 에를랑겐 | 클로스터발트 | 테넨로에 |
2. 3. 3. 역사적 도시 구역
역사적인 구역의 일부 명칭은 공식 지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지역 | 명칭 |
|---|---|
| 브루크 | 브루커 베르크지들룽(Brucker Werksiedlung), 에르바-지들룽(Erba-Siedlung) (암 앙거) |
| 부르크베르크 근처 | 에센바흐 (슈바바흐 북쪽), 베르커 (레그니츠 동쪽) |
| 그로스덱센도르프 | 호이슈테크 |
| 엘터스도르프 | 쾨니히스뮐레 |
| 프라우엔아우라흐 | 파프리카-지들룽, 샬러스호프 |
| 뷔헨바흐 | 지들룽 존넨블릭, 슈타트란트지들룽 |
| 알터랑겐 | 성 요한 |
| 동부 시내 중심가 | 촐하우스 |
2. 4. 기후
중앙 유럽에 위치한 에를랑겐은 서늘한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이곳은 대륙성 기후나 해양성 기후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지만, 연간 강수량 645mm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기후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가을과 겨울에는 레그니츠 강 계곡에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8] 2020년에는 97건의 번개가 발생했다.에를랑겐의 기후는 뉘른베르크 공항에서 측정한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 평균 최고 기온 (°C) | 1.9°C | 4.3°C | 8.9°C | 13.6°C | 18.8°C | 22°C | 23.7°C | 23.3°C | 20°C | 14.2°C | 7°C | 3°C | 13.4°C |
| 평균 기온 (°C) | -1.1°C | 0.5°C | 4°C | 8.2°C | 13°C | 16.3°C | 18.1°C | 17.7°C | 14.3°C | 9.4°C | 3.9°C | 0.3°C | 8.7°C |
| 평균 최저 기온 (°C) | -4°C | -3.3°C | -1°C | 2.7°C | 7.2°C | 10.6°C | 10.6°C | 12.1°C | 8.5°C | 4.6°C | 0.8°C | -2.4°C | 4°C |
| 강수량 (mm) | 45mm | 39mm | 46mm | 48mm | 64mm | 75mm | 69mm | 67mm | 51mm | 45mm | 44mm | 52mm | 645mm |
에를랑겐은 1002년 문서에 "빌라 에를랑곤"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16] 이 이름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지역 연구에서는 오리나무와 초원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16]
3. 역사
101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2세는 에를랑겐을 포함한 성 마틴 부속 시설을 밤베르크 주교령에 기증했다.[19] 1361년, 카를 4세는 에를랑겐 마을을 매입하여 보헤미아 왕국의 봉토인 보헤미아 팔라티네이트에 편입시켰다.[20] 1374년, 카를 4세는 에를랑겐 주민에게 7년간 면세 혜택을 주고, 그 돈을 "마을 개선"에 사용하도록 했으며,[16] 시장 권리도 부여했다. 1398년, 바츨라프 4세는 주조소를 건설하고 에를랑겐에 공식적으로 읍의 지위를 부여했다.[20]
1402년, 에를랑겐은 누렘베르크 부르크라프 요한 3세에게 매각되었고, 이후 프랑켄 부르크라프 재산 분할 과정에서 미래의 바이로이트 후국에 속하게 되었다.[22] 후스 전쟁 (1431년), 제1차 변경백 전쟁, 제2차 변경백 전쟁을 거치면서 에를랑겐은 여러 차례 파괴와 약탈을 겪었다. 1528년 종교 개혁이 도입되었다.[22]
1945년 4월 16일, 미군이 진주했을 때 독일군 지역 사령관 베르너 로를레베르크 중위는 전투 없이 도시를 넘겨주어 무의미한 전투를 피했다. 로를레베르크는 같은 날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은 독일군에 의한 사살인지, 항복 메시지 전달 후 자살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에를랑겐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로를레베르크 광장이 있다.[35]
1972년 지역 개혁으로 에를랑겐은 주변 지역과 통합되었고, 1974년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 대도시가 되었다. 2002년 에를랑겐은 천년 기념일을 축하했다.[35]
3. 1. 개요
에를랑겐은 바이에른 주에 있는 도시로, 레그니츠 강 계곡에 자리 잡고 있어 선사 시대부터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슈파르도르프에서는 약 25,000년 전 그라베트 문화의 긁개가 발견되었고,[9] 신석기 시대 말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골호 문화 시대에는 무덤 경계로 사용된 암각화가 있는 사암판인 "에를랑거 자이헨슈타인"이 만들어졌다.[10][11] 할슈타트 문화 시대의 "코스바허 제단"은 4개의 직립된 인물 기둥과 중앙 기둥이 있는 사각형 돌 세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건물은 에를랑겐에서, 중앙 기둥은 에를랑겐 시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3][14][15]
3. 1. 1. 초기 역사

바이에른의 선사 시대에 레그니츠 강 계곡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슈파르도르프에서는 황토 퇴적층에서 칼날 모양의 스크레이퍼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약 25,000년 전의 그라베트 문화로 추정된다.[9] 이 지역의 비교적 척박한 토양으로 인해 농업과 정착지는 신석기 시대 말(기원전 2800~2200년)에만 감지될 수 있었다.[9] 도시 북쪽의 마르크-포르스트에 있는 "에를랑거 자이헨슈타인" (에를랑겐 표지석, 암각화가 있는 사암판)도 이 시대에 기원한다.[10] 이 석판은 나중에 골호 문화 시대(기원전 1200~800년)에 무덤 경계로 재사용되었다.[11]
1913년에 조사된 코스바흐의 고분에서는 골호 문화뿐만 아니라 할슈타트 문화와 라텐 문화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12] 언덕 옆에는 할슈타트 시대 후기(기원전 500년경)에 만들어진 소위 "코스바허 제단"[13]이 있었다. 이 제단은 이러한 형태로는 독특하며, 모서리에 4개의 직립된 인물 기둥과 중앙 아래에 하나가 있는 사각형 돌 세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적의 재건물은 이 지역에서 방문할 수 있으며, 중앙 기둥은 에를랑겐 시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4][15]
3. 1. 2. 30년 전쟁과 위그노 도시 건설
30년 전쟁 이후 에를랑겐은 비교적 빠르게 재건되었다. 1655년 12월 2일, 교구 교회는 성 삼위일체 교회라는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1685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 칙령은 1598년부터 칼뱅주의 신자들(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었다. 칙령 폐지로 인해 약 18만 명의 위그노 난민이 발생하여, 주로 네덜란드 공화국, 영국 제도,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및 일부 독일 공국에 정착했다. 소수의 종교 난민은 나중에 러시아, 네덜란드 및 영국의 식민지로 이주했다.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30년 전쟁의 여파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던 자신의 공국에 난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그는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근대 무역 정착을 통해 경제를 증진시키려 했다. 그는 칼뱅주의자들을 자신의 국가에 받아들이고 종교를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도록 보장한 독일 최초의 루터교 군주 중 한 명이었다. 1686년 5월 17일, 첫 번째 위그노 6명이 에를랑겐에 도착했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약 1,500명이 뒤따랐다. 또한 수백 명의 발도파가 왔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1688년에 떠났다.
얼마나 많은 난민을 예상할 수 있을지 예상하기도 전에, 변경백은 알트슈타트 에를랑겐이라는 작은 마을 남쪽에 법적으로 독립된 정착지인 에를랑겐 노이슈타트(Erlangen Neustadt)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국가 경제를 증진하려는 합리적인 동기는 절대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도시 건설자로서의 부에 대한 희망과 결합되었다.
새로운 도시는 뉘른베르크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무역 및 여행 경로 중 하나에 편리하게 위치해 있었다. 특정 무역에 필요한 운하를 위해 인근 레그니츠에서 물을 끌어오려고 했지만, 모래 땅 때문에 실패했다.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세분화되고 고도로 정교한 도시의 계획은 변경백의 건축가 요한 모리츠 리히터에 의해 "황금비율"과 이상적인 기준을 사용하여 설계되었다. 직사각형 배치는 대칭축으로 설계되고 두 개의 불균등한 광장을 가진 주요 거리와 내부 코어를 둘러싸고 있으며, 직각으로 설계된 닫힌 모서리가 경첩처럼 작용하여 전체 레이아웃에 강도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그랑드 루"로 특징지어진다. 계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개별 건물의 디자인이 아니라 전체 도시의 통일성이었다. 오늘날에도 역사적인 중심지는 거리가 보이는 면에 지붕면이 있는 2층 및 3층 건물로 이루어진 이 통일적이고 비교적 장식 없는 정면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도시의 건설은 1686년 7월 14일 위그노 교회의 초석을 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첫 해에 계획된 200채의 집 중 약 50채가 완공되었다. 위그노의 유입은 그들의 난민 정신이 1715년까지 이민자 정신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 해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의 평화 조약이 프랑스로의 귀환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변경백이 1688년부터 1697년까지 프랑스에 대항한 팔츠 계승 전쟁의 지휘관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정신의 변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추가 확장이 정체되었다. 1700년에야 그는 변경백의 궁전 건설과 에를랑겐을 왕실 소재지이자 6개의 지방 수도 중 하나로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29] 1706년 8월 14일 대화재로 에를랑겐 구시가지가 거의 전소된 후, 새로운 도시의 모델을 따라 곧게 뻗은 거리와 광장 정면, 2층으로 된 다소 개별적으로 설계된 주택 유형으로 재건되었다. 에를랑겐에서는 이는 유럽의 이상적인 도시 역사에서 아마도 유일할 두 개의 인접한 계획 도시의 특별한 경우를 초래했다. 실제로 더 오래되었고 1812년까지 독립적으로 관리되었던 에를랑겐 구시가는 건축사적으로 에를랑겐 신도시에 비해 더 젊다.[30]
1701년 건설자 크리스티안-에를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신도시는 위그노뿐만 아니라 위그노와 동일한 특권을 부여받은 루터교 신자와 독일 개혁교회의 목적지가 되었다. 1698년, 약 1,000명의 위그노와 317명의 독일인이 에를랑겐에 살았다. 그러나 이민으로 인해 위그노는 곧 독일 도시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이 되었다. 프랑스의 영향력은 이후 몇 년 동안 더욱 감소했다. 1822년, 위그노 교회에서 마지막 프랑스어 예배가 열렸다.
3. 1. 3. 바이에른 왕국 시대
1792년 에를랑겐은 바이로이트 후국과 함께 프로이센 왕국 영토가 되었다.[31][161]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는 프랑스가 뷔르템베르크를 점령한 후 에를랑겐으로 후퇴했다. 나폴레옹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리하자 두 공국은 프랑스 통치하에 놓여 한 개의 주로 병합되었다. 1810년 바이로이트 공국은 동맹국인 바이에른 왕국에 에 매각되었다.[31][161] 1812년 구시가지와 당시까지 크리스티안-에를랑으로 불리던 신시가지가 통합되어 에를랑겐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도시와 인프라는 급속도로 확충되었다. 특히 루트비히 운하|루트비히-도나우-마인 운하de의 개통, 철도 연결, 주둔군 및 대학교는 도시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818년 바이에른 지방 자치 개혁을 통해 시는 자체 행정부를 갖게 되었고, 나중에 "지구로부터 자유로운" 지위를 얻었다. 1862년 에를랑겐 지구청이 설립되었고, 여기서 행정구역 에를랑겐이 출현했다.
3. 1. 4.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시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높은 인플레이션, 배상금 지불,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NSDAP, DNVP, KPD 등 반민주적인 정당들이 에를랑겐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산업화로 인해 양극화된 사회가 형성되었다. 시의회, 주 의회, 국회 선거에서 사민당(SPD)은 초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40%의 과반수를 유지했다. 반면, 중산층, 대학교, 공무원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중도 및 우익 정당들이 있었다. NSDAP는 1924년부터 시의회에 참여했다. 5년 후, 에를랑겐 대학교는 학생 대표가 당에 의해 통제된 최초의 독일 대학교가 되었으며, 이는 민족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정서의 중심지가 되었다.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국가 사회주의의 지적 선구자가 되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대량 실업으로 정치적 상황은 1930년부터 악화되었다. 좌익과 우익 노동조합 모두 행진을 조직하고 거리 싸움을 일으켰다. NSDAP의 지지율이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1933년 3월 독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3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평균 18.3%).[32]
나치당(NSDAP)의 권력 장악 이후, 유대인 상점 보이콧, 유대인 교수이자 에를랑겐 명예 시민인 야코프 헤르츠를 기리는 기념비 훼손 및 파괴, 서적 소각이 에를랑겐에서도 일어났다. 나치당이 통제하는 시의회는 히틀러, 힌덴부르크, 가울라이터(나치당 지역 지도자) 슈트라이허를 명예 시민으로 임명했고, 주요 거리는 아돌프 히틀러 거리("Adolf-Hitler-Straße")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제국 학살의 밤 동안, 에를랑겐(42~48명), 바이어스도르프(3명), 포르트(7명)에서 온 유대인 가족들은 당시 시청(팔레 드 슈터르하임) 안뜰에 모여 모욕을 당했고, 그들의 아파트와 상점은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그 후 여성과 아이들은 뵈름뮐레(에를랑겐의 레그니츠 강에 있는 섬)로, 남자들은 지방 법원 감옥으로, 그리고 뉘른베르크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이민을 통해 독일을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대부분 살해되었다. 1944년, 비록 "혼혈 유대인"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찰서장의 보호를 받으며 도시에 남아 있었지만, 이 도시는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로 선언되었다.[33]
학계가 NS(나치) 정치를 광범위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적극적인 저항이 없었다. 요양원과 간호 병원(오늘날 클리닉 암 유로파카날의 일부)에서는, 국가 사회주의 안락사 살인(Aktion T4)을 위한 강제 불임 수술과 환자 선별이 이루어졌다.
1940년부터 전쟁 포로와 강제 노동자들이 에를랑겐 무기 공장에 투입되었다. 1944년에는 이미 에를랑겐 인구의 10%를 차지했다. 그들의 막사 수용과 대우는 비인간적이었다.
1983년, 에를랑겐은 바이에른에서 도시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국가 사회주의 역사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최초의 도시 중 하나였다.[34] 같은 해, 아돌프 히틀러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는 그들의 죽음으로 자동적으로 효력이 만료되었지만, 거리의 상징적인 제스처로서 공식적으로 명예 시민 자격을 박탈당했다.
3. 1.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를랑겐은 폭격으로 도시의 4.8%가 파괴되었고, 445채의 아파트가 완전히 파괴되었다.[35] 1945년 4월 16일, 미군이 진주했을 때 독일군 지역 사령관 베르너 로를레베르크 중위는 전투 없이 도시를 넘겨주어 도시 내에서 무의미하고 큰 피해를 가져올 전투를 피했다. 로를레베르크는 국가 사회주의 정권의 지지자로 여겨졌으나, 같은 날 탈레르뮐레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독일군에 의한 사살인지, 항복 메시지 전달 후 자살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에를랑겐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로를레베르크 광장이 있다.[35]
도시가 항복한 후, 미군 탱크는 마지막으로 보존된 도시 문(1717년에 건설된 뉘른베르크 문)을 심각하게 훼손했고, 곧 폭파되었다. 이는 좁은 통로 때문에 바로크 양식의 문이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주요 도로에 사는 상인들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도시 문들은 이미 19세기에 철거되었다.[35]
1972년 지역 및 지역 개혁 동안 에를랑겐 지역은 회흐슈타트 안 데어 아이슈 지역과 통합되었다. 에를랑겐 자체는 독립적인 도시로 남아 새로운 행정 구역의 소재지가 되었다. 주변 공동체의 통합을 통해 도시는 상당히 확장되어 1974년에는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 대도시가 되었다. 2002년 에를랑겐은 천년 기념일을 축하했다.[35]
2009년 5월 25일, 에를랑겐은 연방 정부로부터 Ort der Vielfalt (독일어로 "다양성의 장소"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지방 자치 단체의 노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작된 이니셔티브의 일환이었다. 에를랑겐은 경제와 생태 사이의 균형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정책으로 1990년과 1991년에 "자연 및 환경 보호를 위한 연방 수도"라는 칭호를 받았다. 1990년에는 최초의 독일 수상자이자 유엔 환경 기구 명예의 전당에 포함된 최초의 지역 당국이 되었다. 인구 대비 의료 및 의료 기술 시설 및 회사의 평균 이상 비율로 인해 지그프리트 발라이스 시장은 1996년 취임 당시 에를랑겐을 "의료 연구, 생산 및 서비스의 연방 수도"로 발전시키겠다는 비전을 개발했다.[36]
3. 2. 에를랑겐 대학교의 역사
1868년 징병제 도입과 함께 군 복무와 학업을 병행할 수 있게 되면서 에를랑겐 대학교는 중요한 위치적 요소가 되었다. 1868년 3월 12일 제6 헌터 대대가 에를랑겐으로 이동하면서 바이에른 육군은 여러 시립 건물에 주둔했고, 오늘날의 테아터플라츠 광장을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또한, 메일발트 숲에는 사격 훈련장이 설치되었다.[38]
1877년 비스마르크슈트라세에 첫 헌터 병영이 완공되었고, 1년 후 헌터 대대는 헤세 대공의 왕립 바이에른 제5 보병 연대 제3 대대로 교체되었다. 1890년에는 제19 보병 연대 전체가 주둔하면서 보병 병영과 훈련장이 건설되었다. 1893년에는 훈련장 북서쪽 모퉁이에 "병영 막사"가 설치되어 1897년부터 수비대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901년 10월 1일에는 제10 야전 포병 연대가 에를랑겐으로 이동하여 포병 병영이 건설되었다. 당시 에를랑겐에는 약 24,600명의 주민과 1,160명의 학생, 그리고 2,200명의 군인이 주둔했는데, 이는 1870년/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군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결과였다.[38]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에를랑겐 연대 2개는 제5 왕립 바이에른 사단 소속으로 서부 전선에서만 전투를 벌여 3,0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했다. 전쟁 후에도 에를랑겐은 수비 도시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대가 10만 명으로 감축되면서 Reichswehr의 제21 (바이에른) 보병 연대 훈련 대대만이 도시에 남았다.[38]
나치 독일 시대에는 1935년 징병제 재도입과 독일 재무장으로 에를랑겐의 군사 시설이 크게 확장되었다. 다양한 보병 부대가 주둔했던 라인란트 병영, 1937년 10월부터 제25 기갑 연대가 주둔했던 탱크 병영, 급식 사무소, 탄약 및 장비 창고, 뉘른베르크 라이히스발트 (숲), 텐넨로헤 근처에 훈련 구역이 건설되었다.[38]
3. 3. 시정촌 합병
다음은 에를랑겐시에 편입된 이전의 독립적인 지역 사회 및 지구이다.
1972년 시정 개혁 동안의 편입은 1974년에 에를랑겐이 10만 명의 인구 한계를 초과하고 공식적으로 도시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43]
3. 4. 인구
에를랑겐은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수백 명만이 거주하는 작은 정착지였다. 잦은 전쟁, 역병, 기아로 인해 인구 증가가 더뎠다. 특히 30년 전쟁으로 1634년에는 완전히 황폐화되기도 했다. 1655년이 되어서야 인구가 500명으로 회복되었고, 1708년에는 영방 제6의 주요 도시로 승격되었다. 1760년에는 인구가 8,000명을 넘었으나, 1770년부터 1772년까지의 흉작으로 1774년에는 7,724명으로 감소했다. 1800년에는 인구 1만 명을 달성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1812년에는 8,592명으로 줄었다.19세기 동안 인구는 다시 증가하여 1890년에는 17,559명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합병을 거치면서 1925년에는 3만 명, 1956년에는 6만 명으로 늘어났다. 1972년 군 및 지역 재편에 따라 1974년에는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 대도시가 되었다.
에를랑겐시에 합병된, 한때 독립되어 있던 시정촌은 다음과 같다:
- 1919년 5월 1일: 지크리츠호프(슈파르도르프)
- 1920년 4월 1일: 알트에를랑겐(코스바흐)
- 1923년 8월 1일: 뷔헨바흐, 소집락 노이뮐레
- 1924년 9월 15일: 브루크
- 1960년: 엘터스도르프의 일부
- 1967년 1월 1일: 코스바흐(호이스링겐과 슈토이다흐 포함)
- 1972년 7월 1일: 엘터스도르프, 프라우엔아우라흐, 그로스데크젠도르프, 휘텐도르프, 크리겐부룬, 테넨로에
- 1977년 7월 1일: 쾨니히스뮐레(퓌르트시)
특히 1972년의 시정촌 재편은, 에를랑겐이 1974년에 인구 10만 명을 넘어 공식적으로 대도시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4. 1. 역사적 인구
중세와 근세 초기 에를랑겐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만이 살았습니다. 잦은 전쟁, 전염병, 기근으로 인구 증가는 매우 더뎠습니다. 30년 전쟁의 여파로 1634년에는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1655년에는 인구가 500명으로 다시 늘어나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습니다. 1708년 3월 8일 에를랑겐은 여섯 번째 주도로 선포되었습니다.[47] 1760년까지 인구는 8,000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1770년~1772년의 기근으로 인해 1774년에는 인구가 7,224명으로 감소했습니다. 1800년에 약 10,000명으로 증가한 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에를랑겐의 인구는 다시 감소하여 1812년에는 8,592명이 되었습니다.19세기 동안 인구는 1890년 17,559명으로 두 배가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합병으로 인해 도시 인구는 1925년까지 30,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다시 증가하여 1956년에는 60,000명에 달했습니다. 1972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1974년에는 도시 인구가 100,000명을 넘어서면서 에를랑겐은 대도시가 되었습니다.[48]
도시 주택 수요 증가로 인해 2000년대에 인구가 더욱 증가했으며, 현재의 도시 지역 내에서 2030년대에는 115,000명이 넘는 주민이 거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49]
| 연도 | 인구 | 연도 | 인구 | 연도 | 인구 | 연도 | 인구 | 연도 | 인구 |
|---|---|---|---|---|---|---|---|---|---|
| 1495 | 460 | 1820 | 9,271 | 1905 | 23,737 | 1975 | 100,671 | 2014 | 108,191 |
| 1557 | 410 | 1830 | 9,831 | 1910 | 24,877 | 1980 | 101,845 | 2015 | 108,227 |
| 1619 | 520 | 1840 | 10,630 | 1916 | 19,688 | 1985 | 99,628 | 2016 | 111,056 |
| 1634 | 0 | 1852 | 10,910 | 1917 | 19,599 | 1987 | 99,808 | 2017 | 111,959 |
| 1655 | 500 | 1861 | 10,896 | 1919 | 23,521 | 1990 | 101,017 | 2018 | 112,806 |
| 1690 | 1100 | 1864 | 11,202 | 1925 | 29,597 | 1995 | 101,361 | 2019 | 114,200 |
| 1708 | 2500 | 1867 | 11,546 | 1933 | 32,348 | 2000 | 100,064 | 2020 | 114,257 |
| 1723 | 3930 | 1871 | 12,510 | 1939 | 34,066 | 2005 | 102,896 |
3. 4. 2. 외국인 거주자
에를랑겐은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수백 명만이 거주하는 작은 정착지였다. 잦은 전쟁, 역병, 기아로 인해 인구 증가가 더뎠다. 특히 30년 전쟁으로 1634년에는 완전히 황폐화되기도 했다. 1655년이 되어서야 인구가 500명으로 회복되었고, 1708년에는 영방 제6의 주요 도시로 승격되었다. 1760년에는 인구가 8,000명을 넘었으나, 1770년부터 1772년까지의 흉작으로 1774년에는 7,724명으로 감소했다. 1800년에는 인구 1만 명을 달성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1812년에는 8,592명으로 줄었다.19세기 동안 인구는 다시 증가하여 1890년에는 17,559명이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합병을 거치면서 1925년에는 3만 명, 1956년에는 6만 명으로 늘어났다. 1972년 군 및 지역 재편에 따라 1974년에는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 대도시가 되었다.
4. 종교
2016년을 기준으로 에를랑겐 주민의 28.6%는 개신교, 28.1%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 나머지 43.3%는 다른 종교를 믿거나 무교(nondenominational)였다.[50]


4. 1. 개신교 교회
에를랑겐의 인구는 처음에는 뷔르츠부르크 교구에, 이후 밤베르크 대교구에 속했다.[51] 1528년, 시장과 의회에서 최초의 루터교 사제를 임명하고 종교 개혁이 도입되면서[52] 에를랑겐은 오랫동안 개신교 도시로 남았다. 1686년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가 프랑스 종교 난민을 위해 세운 신도시에는 개신교 신자들만 있었다. 프랑스 개혁 교회는 1686년부터 존재했으며, 독일어 사용 스위스와 팔라티네이트에서 온 개신교 난민들이 정착한 후 1693년에 독일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었다.1802년 에를랑겐의 개신교 교회는 프로이센 왕립 교황청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안스바흐에서 바이에른으로 도시가 이전된 후에는, 처음에는 루터교와 개혁 교회 공동체로 구성된 바이에른 왕국 개신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동시에 에를랑겐은 모든 교회를 통합하는 교구청의 소재지가 되었다.
1853년 바이에른의 개혁 교회는 자체 종교 회의를 받았고, 1919년에는 바이에른 복음주의 교회에서 정식으로 분리되었다. 그 이후로 바이에른에는 두 개의 개신교 지방 교회가 있었는데, 하나는 바이에른 복음주의 루터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1949년부터 "바이에른 복음주의 개혁 교회"로 불린 "라인 우익 바이에른 개혁 종교 회의"였다. 후자는 오랫동안 에를랑겐에 의장단의 소재지를 두었다. 독일 개혁 교회와 이전 프랑스 개혁 교회가 통일되면서 1920년부터 에를랑겐에는 하나의 개혁 교회만 있었지만, 여러 루터교 교회가 있었다. 루터교 교회는 여전히 오늘날 두 종교를 위해 교구청으로 설립되었고 1919년부터는 루터교 교회만을 섬기는 에를랑겐 교구청에 속해 있다. 그것은 뉘른베르크 교회 구역의 일부이다.
개혁 교회 에를랑겐은 그동안 독일 복음주의 개혁 교회의 일부가 되었다.[53] 여기서는 종교 회의 협회 XI에 속한다.[54]
루터교에서는 자체 예배와 봉사를 제공하는 지역 교회 공동체가 특별한 형태의 교회로 존재한다. ELIA 교회는 1993년부터 존재한다.[55] 이것은 브루크 교회 내에서 카리스마 운동에 대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ELIA는 "Erlanger Laien im Aufbruch" (에를랑겐의 움직이는 평신도)의 약자였지만, 오늘날 교회는 ELIA를 "Engagiert, Lebensnah, Innovativ, Ansteckend" (헌신적, 삶에 밀착, 혁신적, 전염성)로 해석한다.[56] 교회는 협약에 의해 국립 교회에 묶여 있지만, 교회 자체처럼 재정을 조달하고 조직한다. 2002년 ELIA는 LebensArt 교회 예배 프로젝트로 EKD로부터 "Fantasie des Glaubens" (믿음의 환상) 상을 수상했다.[57]
2016년 12월 31일 현재, 인구의 28.6%가 개신교, 28.1%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다. 43.3%는 다른 종교를 믿거나 무종교이다.
4. 2. 가톨릭 교회
에를랑겐은 처음에는 뷔르츠부르크 주교구에 속했으며, 1017년부터는 밤베르크 대주교구에 속했다. 1528년 종교 개혁으로 오랫동안 복음주의 도시였다. 1686년 프랑스 종교 망명자를 위해 건설된 신도시는 개혁파 도시가 되었고, 1693년에는 독일 개혁파 교회도 조직되었다.에를랑겐의 복음주의 교회는 1802년 프로이센 종무국의 하부 조직이 되었다가 바이에른 왕국으로 이관되면서 바이에른 복음 루터교 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1853년 바이에른의 개혁파 교회는 자체 교회 회의를 개최했고, 1919년에 바이에른 복음주의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바이에른 복음 루터교 교회"와 "바이에른 복음주의 개혁파 교회" 두 개의 복음주의 지방 교회가 존재한다. 1920년 이후 에를랑겐에는 개혁파 교회는 하나만 남았지만, 루터교 교회는 많이 존재하며 현재 에를랑겐 교구 감독관구에 속한다.
에를랑겐 개혁파 교회는 복음주의 개혁파 교회 바이에른 및 북서 독일 복음주의 개혁파 교회 회의의 일부이다. 루터교 교회에는 독자적인 ELIA 조직이 1993년부터 존재한다[175]。 ELIA는 "Engagiert, Lebensnah, Innovativ, Ansteckend (진지하게 몰두하고, 생활에 밀착하며, 혁신적이고, 전파하는)"의 의미를 가지며, 지방 교회와 연결되어 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이 외에도 에를랑겐에는 자유 복음주의 교회, 복음주의 자유 교회 (침례교)가 있으며, 1984년에는 자유 교회 핑스텐게마인데 연합 및 핑스텐 운동에 속하는 "게마인데 암 베터크로이츠"가 결성되었다.
4. 3. 유대교
1408년에 유대인이 처음으로 에를랑겐에서 기록되었고, 1478년에는 랍비도 기록되었다. 1515년 3월 26일, 변경백령의 영방 회의는 유대인 추방을 결의했고, 에를랑겐의 유대인 공동체도 이로 인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은 1711년에 노이슈타트의 위그노 주민에게 유대인의 정착과 영업을 약속했지만, 에를랑겐의 유대인 생활은 인접 마을인 브루크, 바이어스도르프, 뷔헨바흐로 한정되었다.[58]- 브루크에서는 1431년에 유대인, 1604년에 "유덴하우스"(유대인의 관)가 기록되었다. 이 유덴하우스는 6가구(1619년)에 불과한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회당으로 이용했다. 1707년에 새로운 회당이 건설되었고, 1811년에는 공동체 구성원이 184명(당시 주민의 약 15%)이었다.[58]
- 바이어스도르프에서는 1473년에 처음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기록되었고, 1530년에는 회당이 존재했다. 30년 전쟁으로 파괴된 후 1651년에 재건되었으며, 1619년에 9가구, 1771년에 83가구가 이 공동체에 속해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령에서 두 번째로 큰 공동체가 되었고, 영방의 랍비 관구 본부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1827년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440명(인구의 30%)으로 정점에 달했다.[58]
- 뷔헨바흐에는 1681년에 밤베르크 대성당 참사원 수석이 유대인을 거주하게 하여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811년에는 구성원 74명, 1813년에 회당이 건설되었다. 1833년에는 103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58]
1861년 바이에른 영방 의회는 바이에른에서의 유대인의 일반적인 자유를 인정하여 유대인이 에를랑겐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 마을에서 많은 유대인 가구가 에를랑겐으로 이주했고, 브루크, 바이어스도르프, 뷔헨바흐의 공동체는 축소되었다. 1873년 3월 15일, 에를랑겐에 독자적인 종교 단체가 설립되었고, 1891년에 독자적인 묘지를 조성했다. 에를랑겐의 교단에는 의사이자 명예 시민인 야코프 헤르츠나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1975년 5월 5일에 처음으로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나 1933년 9월 15일에 파괴되었고, 1983년에 새로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58]
국가 사회주의 독재 체제 하에서 에를랑겐의 유대인은 1938년까지 44명으로 감소했다. "수정의 밤"에는 에를랑겐의 예배소가 파괴되었고, 바이어스도르프의 회당은 철거되었다. 1943년 10월 20일, 에를랑겐에서 마지막 유대인 주민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에를랑겐의 유대교단에 속했던 77명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58]
1945년 8월 16일, 1943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던 로자 레비가 딸과 함께 에를랑겐으로 돌아왔다. 홀로코스트를 살아남은 로테 안스바허(2010년 12월 19일 사망)는 1980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162] 1980년에 창설된 "구 유대인 주민의 대표" 칭호를 받은 일제 슈폰젤(1924년 - 2010년)은 생존한 에를랑겐 유대인과 그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 홀로코스트 관련 역사를 연구했다. 1970년대까지 유대인의 수는 계속 증가했고, 슐로모 레빈은 새로운 교단 창설을 계획했으나 1980년 12월 19일에 아내와 함께 살해되었다.[180] 1997년 12월 1일, 에를랑겐에 이스라엘 문화 협회가 설립되어 2000년 시점에 300명이 소속되었다. 2000년 4월 2일, 하우프트 거리에 새로운 예배소가 마련되었고, 2010년 6월 13일에는 라츠베르거 거리 8a번지에 회당이 개소했다.[58]
4. 4. 이슬람교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에를랑겐은 30년 전쟁 이후에도 개신교 영토로 남았다. "크리스티안 에를랑" 즉, 노이슈타트 건설과 함께 새로운 도시 건설에 기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가톨릭 신자들이 이주할 수 있었다. 1711년, 변경백은 그들에게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보장하는 최소한의 종교적 권리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여했다. 세례, 결혼, 장례는 개신교 의식에 따라 거행되어야 했고, 아이들은 개신교 종교로 교육받아야 했다. 가톨릭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1730년경부터 더 많은 종교적 권리를 요구했다. 변경백 프리드리히가 여러 번 약속했던 기도실 건설은 시 당국과 개신교 또는 프랑스 개혁파 성직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프리드리히 대왕의 즉위는 계몽 절대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프리드리히의 관용 정책의 영향으로 변경백 통치자의 입장은 점차 변화했다. 1781년 프랑켄 기사단 관할구의 행정권이 에를랑겐으로 이관되자, 변경백 알렉산더는 가톨릭 귀족들에게 개인 예배를 허가했다. 이 권리는 그들의 하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 1783년 1월 16일, 알렉산더는 에를랑겐에 가톨릭 개인 예배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784년 4월 11일, 구 시청의 대강당에서 250년 만에 미사가 다시 거행되었다. 같은 해, 기도실 건설 허가가 내려졌다.[59]
4. 5. 기타 종교
1980년부터 튀르크-이슬람 문화 협회 에를랑겐(DITIB)이 설립되었다. 이후, 이슬람 학생 협회 에를랑겐(1984년)이나 이슬람 신앙회(1995년)와 같은 다른 단체도 설립되었다. 이 3개의 단체는 1999년 12월부터 이슬람 종교 조직 에를랑겐 e.V.를 공동으로 설립하여 주(州) 학교에서 이슬람교 종교 교육 실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01년, 바이에른 주 공립학교 중 에를랑겐의 페스탈로치 기초 과정 학교에서 "독일어에 의한 이슬람교 종교에 관한 지식" 교육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독일 최초의 진정한 "이슬람 교육"은 브루커 라헤 기초 과정 학교에서 진행되었다.[60]
1993년부터는 튀르크 사회 봉사 협회도 운영되고 있다.
5. 정치
에를랑겐은 연방 하원에 선거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CSU 소속의 슈테판 뮐러가 대표로 있다.
1895년 재건축으로 기존 기도실의 확장 가능성은 고갈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주와 통합으로 에를랑겐의 가톨릭 신자 수가 증가하여, 오늘날에는 개신교가 약간 우세하다. 1928년부터 70년 동안 에를랑겐의 교구 수는 1개에서 12개로 증가했다.[61][62]
새로 설립된 교구는 다음과 같다:
- 1928년, 도시 남동부에 위치한 성 보니파스
- 1967년, 브루크의 하일리히 크로이츠
- 1968년, 세발두스지들룽과 뢰텔하임파크 일부 지역의 성 세발트
- 1970년, 알터랑겐의 성 하인리히
- 1973년, 지글리츠호프의 성 테레지아
- 1979년, 테넨로헤의 하일리게 파밀리에
- 1998년, 뷔헨바흐의 성 사도
시 구역으로 통합된 교구는 다음과 같다:
- 1923년, 뷔헨바흐의 성 식스투스 (프라우아우라흐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분교 포함)
- 1924년, 브루크의 성 페터와 파울
- 1972년, 엘터스도르프의 성 쿠니군트
- 1972년, 데흐센도르프의 우리 리베 프라우
1937년부터 에를랑겐은 교구청의 소재지였으며, 1974년 11월 1일 주 영토 개혁 과정에서 재편되었다. 에를랑겐 교구 외에도 에를랑겐-회히슈타트 및 포르히하임 지역의 인근 교회가 포함된다.[63]
1432년 에를랑겐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이 언급되었고, 1478년에는 랍비가 언급되었다.[64] 1515년 3월 26일, 변경백의 의회는 유대인 추방을 결정했는데, 이는 에를랑겐 유대인 공동체의 종말을 의미했을 것이다. 1711년,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는 노이슈타트의 위그노 거주민들에게 그들이 도시에 정착하거나 거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유대인의 삶은 에를랑겐의 이웃 공동체인 브루크, 바이어스도르프, 뷔헨바흐로 제한되었다.
- 1431년부터 유대인들이 브루크에 살았고, 1604년에는 "유덴하우스(Jews' house)"가 언급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6가구(1619년)로 구성된 작은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회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1707년에 새로운 회당이 세워졌다.
- 바이어스도르프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1473년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지만, 유대인 묘지의 가장 오래된 묘비가 14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그 시작은 더 일찍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15년 변경백령에서 유대인 추방 이후 바이어스도르프에는 단 한 가족의 유대인이 살았지만, 1530년에 회당이 존재했다. 30년 전쟁으로 파괴된 후, 회당은 1651년에 재건되었다. 1827년 유대인 공동체는 440명의 구성원으로 최대 인원에 도달했다.
- 뷔헨바흐에서는 밤베르크 대성당 주임 사제가 1681년에 유대인들의 정착을 허용했다. 1813년에는 회당을 지었다.

1861년 바이에른 의회는 바이에른의 유대인에게 일반적인 거주 이전의 자유를 도입하여 유대인들이 에를랑겐에 정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15일에 독립적인 종교 회중이 되었고, 1891년, 공동체는 자체 묘지를 헌당했다. 에를랑겐 공동체는 의사이자 명예 시민인 야코프 헤르츠와 수학자 에미 뇌터와 같은 저명한 인물을 포함했다. 야코프 헤르츠를 기리는 기념비가 1875년 5월 5일에 세워졌지만 1933년 9월 15일에 파괴되었다. 1983년부터 석비는 다음과 같은 비문으로 이 과정을 기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도시의 시민인 야코프 헤르츠를 생각하며, 이 도시의 시민들이 기념비를 세웠지만 파괴했습니다.''
나치 시대 동안, 에를랑겐 유대인의 수는 감소했다. 수정의 밤 동안, 에를랑겐 기도실이 파괴되었고, 바이어스도르프의 회당이 철거되었다. 1943년 10월 20일, 에를랑겐의 마지막 유대인 거주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에를랑겐 유대인 공동체의 77명의 구성원이 그곳에서 사망했다.
1980년, 로테 안스바허(2010년 12월 19일 사망)는 에를랑겐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영구적으로 돌아왔다.[33] 1980년에 명예 "전 유대인 시민 대표"라는 직책이 만들어졌다. 이 직책에서 일제 스폰셀(1924–2010)은 생존한 에를랑겐 유대인과 그들의 가족과의 접촉을 확립하고 유지하며,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들의 역사와 운명을 조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80년 12월 19일, 슐로모 레빈은 극우 테러 단체 베어스포츠그루페 호프만의 일원에게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5] 1997년 12월 1일, 에를랑겐에 이스라엘 종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2000년 4월 2일, 회중은 하웁트슈트라세에 새로운 기도실을 헌당했다. 2010년 6월 13일, 라트스베르거 거리 8b에 새로운 회당이 문을 열었다.
1981년부터 에를랑겐에는 ''튀르키쉬-이슬라미셔 쿨투어페라인 에를랑겐''(DITIB, 튀르키예-이슬람 문화 협회 에를랑겐)이 존재해 왔다.[66] 1999년 12월부터 ''이슬람 종교 공동체 에를랑겐 e. V.''을 결성하여 공립학교에서 이슬람 종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2001년 바이에른에서 처음으로 에를랑겐 페스탈로치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이슬람 종교 수업" 과목이 공립학교에서 도입되었다. 교육 과목으로서의 적절한 "이슬람 수업"은 독일 전체에서 처음으로 브루커 라헤 초등학교에서 도입되었다. 1993년부터 튀르키예 사회 봉사 협회도 존재한다.[67]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1903년 이래로 에를랑겐에 존재해왔다. 1995년에는 브루크에 있는 새로운 지역 사회 센터로 이전했다. 2003년에는 또 다른 교단 (''ERlebt'')이 설립되어 힌덴부르크슈트라세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후자는 2007년 10월 브루크에 새로운 교단 회관을 설립했다.[68] 재림교인들은 에를랑겐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의 사회적 헌신은 스카우트 활동(''"Erlanger Markgrafen"'')이나 지역 사회 회관에서 진행되는 공개 헌혈 캠페인 등에서 볼 수 있다. 두 교단 모두 동유럽 전역의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는 연례 캠페인 "Kinder helfen Kindern" (''어린이가 어린이를 돕는다'')을 진행한다.[69] "Christen für Kultur e. V." (''문화를 위한 기독교인'') 협회는 1999년 에를랑겐의 재림교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1923년 3월 22일에 에를랑겐에서 첫 번째 집회를 열었지만, 정치적 허가를 얻지 못했다. 1933년 4월에 금지된 후 더욱 강력한 억압을 받게 되었으며, 1942년 1월 20일에 에를랑겐 거주 신자 구스타프 하이어가 나치의 하르트하임 처형장에서 살해되었다. 브루크의 구스타프-하이어 거리는 2000년에 그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1948년에 교단이 재편성되었고, 1975년에 두 개의 교회로 분리되었다. 1980년에 브루크의 여호와의 증인은 자체 집회소(왕국회관)를 건설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도 자체 조직, 자체 지도자 아래 에를랑겐에서 활동하고 있다. 몰몬교 센터는 알트 에를랑겐에 있다.
이러한 종교 단체 외에, 에를랑겐에는 그 외의 자유 교회와 종교 조직이 존재한다.
에를랑겐의 인구는 비교적 정치적으로 활발하며, 최근 몇 년 동안 높은 수의 주민투표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는 모두 법적 구속력을 갖기 위한 필요한 투표율을 달성했다:[73]
- 1998년: 에를랑겐 시립 공사 매각 (결과: 매각 반대)
- 1998년: 뢰텔하임파크 관통 도로 (결과: 도로 찬성)
- 2000년: 테아터플라츠 지하 주차장 (결과: 지하 주차장 반대)
- 2004년: 에를랑겐 아르카덴(쇼핑 센터 건설) (결과: 아르카덴 찬성)
- 2005년: 에를랑겐 온천 사유화 (결과: 사유화 반대)
- 2005년: 구시가지 택시 승강장 이전 (결과: 이전 찬성)
- 2005년: 에를랑겐 아르카덴(시민 청원 및 시의회 청원, 결과: 시의회 청원 찬성)
- 2011년: G6 테넨로헤 산업 단지 (시의회 청원, 결과: 산업 단지 반대)[74]
- 2016년: 슈타트-움란트-반 (StUB) (시민 청원, 결과: StUB 프로젝트 철수 반대)[75]
- 2017년: 국가 정원 박람회 2024 (결과: 거부됨); ERBA 철거 (결과: 승인됨)[76]
- 2018년: 웨스트 III 주거 지역 예비 조사 계속 (결과: 거부됨)[77]
5. 1. 시의회
시의회는 상급 시장과 50명의 시의원으로 구성된다. 2020년에 실시된 시의원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5. 2. 시장
플로리안 야니크는 2014년부터 에를랑겐의 시장(Oberbürgermeister, 최고 시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시의회는 최소 한 명의 부시장을 선출하며, 세 번째 시장을 선출할 수도 있다. 현재 부시장은 수잔네 렌더-카센스(녹색 연합)와 엘리자베스 프로이 (FDP)이다.1818년 이후 역대 시장은 다음과 같다:
| 재임 기간 | 이름 | 정당 |
|---|---|---|
| 1818–1827 | 요한 지크문트 린드너 | |
| 1828–1855 | 요한 볼프강 페르디난트 라머스 | |
| 1855–1865 | 카를 볼프강 크노흐 | |
| 1866–1872 |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파펠리에 | |
| 1872–1877 | 요한 에드문트 라이히홀트 | |
| 1878–1880 | 프리드리히 샤르프 | |
| 1881–1892 | 게오르크 리터 폰 슈 | |
| 1892–1929 | 테오도어 클리펠 | |
| 1929–1934 | 한스 플리얼 | |
| 1934–1944 | 알프레드 그로스 | NSDAP |
| 1944–1945 | 헤르베르트 올리 | NSDAP |
| 1945–1946 | 안톤 하머바허 | SPD |
| 1946–1959 | 미하엘 푀슈케 | SPD |
| 1959–1972 | 하인리히 라데스 | CSU |
| 1972–1996 | 디트마르 할베크 | SPD |
| 1996–2014 | 지크프리트 발라이스 | CSU |
| 2014–현재 | 플로리안 야니크 | SPD |


에를랑겐 구시가지에서는 14세기부터 의회가 존재했다. 시의 수장은 4주마다 교체되는 2명의 뷔르거마이스터(시장)였다. 1715년부터는 시장이 4명이 되었다.
신시가지에서는 처음에는 개혁파 장로회가 행정을 운영했다. 1697년에는 4명의 시장이 있었는데, 임기는 1년이었으며 3명은 프랑스인, 1명은 독일인이었다. 1701년부터는 4명의 시장과 임기 2년의 의회가 행정을 운영했다. 이후 정치 체제는 여러 번 변경되었다.
1812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통합된 후에는 바이에른 자치체 칙령이 적용되었다. 시는 1818년부터 초대 시장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1918년부터 그 직함은 "오버뷔르거마이스터"(상급 시장)가 되었다. 1952년 바이에른 시정촌법에 따른 초대 시장 이후, 공식적인 직함은 계속 상급 시장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상급 시장은 다음과 같다:
- 1945년 - 1946년: 안톤 함머바허 (SPD)
- 1946년 - 1959년: 미하엘 페슈케 (SPD)
- 1959년 - 1972년: 하인리히 라데스 (CSU)
- 1972년 - 1996년: 디트마르 하르베크 (SPD)
- 1996년 - 2014년: 지크프리트 발라이스 (CSU)
- 2014년 - : 플로리안 야니크 (SPD)
5. 3. 주민 투표
에를랑겐 주민들은 정치에 비교적 적극적이며, 과거 여러 차례의 주민 투표에서 직접 민주주의 기회를 활용해 왔다. 이 주민 투표들은 모두 법적 구속력을 얻기 위한 투표율을 충족했다.[73]
5. 4. 문장
1977년부터 에를랑겐시는 도시 문장과 더불어 "에를랑겐 - 전통에 의해 열린 도시"라는 모토를 그래픽적으로 구현한 시그넷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그넷은 뮌헨의 디자이너 발터 타펠마이어가 1976년에 제작했으며, "에를랑겐 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정사각형 평면 위에 24개의 개별 사각형이 5개의 수직 및 수평 열로 배열되어 오른쪽 측면 중앙에 빈 공간이 남도록 배치되어 있다. 시그넷은 바로크 양식의 계획 도시의 평면도를 상징하며, 비어있는 사각형은 도시의 개방성을 나타낸다. 도시 백과사전에 따르면, 시그넷과 모토는 "독일 국내 및 해외에서 온 난민과 이민자들의 반복적인 수용과 그들이 지역 사회 발전에 미친 중요한 영향"을 상기시킨다.[63]
2007년에는 시장의 제안에 따라 대표적인 목적으로 문장을 부활시키는 방안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는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거부되었고, 이후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다.[85]
도안은 다음과 같다.[189]
- 상하 이분할, 상부는 다시 좌우 이분할.
- * 왼쪽 상단은 은색 바탕에 왼쪽(오른쪽)을 향하고 금색 왕관을 쓰고, 금색 부리와 발톱을 가진, 붉은색 혀를 내민 붉은 독수리이다. 금색 클로버 모양의 날개 깃과 은색과 검은색으로 사분할된 심장 방패를 가진다.
- * 오른쪽 상단은 은색 바탕에 금색 왕관을 쓰고, 금색 부리와 발톱을 가진, 붉은 혀를 내민 검은 독수리이다. 금색 목걸이와 클로버 모양의 날개 깃을 가지고, 가슴에 금색 대문자로 E S라고 쓰여 있다.
- * 하단은 은색 흉벽에서 나타나는 두 갈래 꼬리를 가지고, 금색 왕관을 쓰고, 붉은 혀를 내민 금색 사자이다.
문장 하단의 사자는 에를랑겐 구시가지를 상징한다. 룩셈부르크 = 보헤미아의 사자는 1389년부터 시의 인장에 등장한다. 상반부는 신시가지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독수리이다. 이 디자인은 1707년부터 신시가지의 문장을 장식하고 있다. E S 문자는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의 부인 엘리자베트 조피를 나타낸다.
시의 깃발은 흰색 - 빨간색이다.
에를랑겐 시는 문장 외에도 1976년 뮌헨의 디자이너 발터 타펠마이어가 디자인한 마크를 1977년부터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마크에는 "Stadt Erlangen"(에를랑겐 시)라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디자인을 통해 모토인 "에를랑겐 -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그래픽으로 대체하고 있다. 5열 × 5행의 격자 모양의 정방형 위에 24개의 정방형이 배치되어 있으며, 가운데 행의 가장 오른쪽만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이 시의 마크는 바로크 시대의 계획 도시의 토지 구획을 상징하며, 부족한 사각형은 이 도시의 개방성을 표현하고 있다. 도시의 모토는 1974년 공모전에서 선정되었다. 에를랑겐 도시 사전은 마크와 모토에 대해 "국내외 난민과 이주민을 반복적으로 수용해 온 것과 그것이 지역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90]
2007년에는 상급 시장의 제안에 따라 마크를 문장으로 다시 교체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조사에서 주민 다수가 이를 거부하여 최종적으로는 실시되지 않았다.
5. 5. 자매 도시
에를랑겐은 다음 도시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87][191]| 국가 | 도시 | 주 | 체결년도 |
|---|---|---|---|
| 에스킬스투나 | 세데르만란드 주 | 1961 | |
| 렌 | 일레빌렌 주 | 1964 | |
| 블라디미르 | 블라디미르 주 | 1983, 1987 | |
| 예나 | 튀링겐 주 | 1987 | |
| 스토크온트렌트 | 스태퍼드셔 | 1989 | |
| 산카를로스 | 리오산후안 주 | 1989 | |
| 베식타쉬 | 이스탄불 주 | 2003 | |
| 리버사이드 | 캘리포니아 주 | 2013 | |
| 볼차노 |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주 | 2018 |
이 외에도 파트너 협정을 맺고 있다:
| 국가 | 도시 | 주 | 관계 | 체결년도 |
|---|---|---|---|---|
| 벤초네 |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 | 파트너 협정 | ||
| 선전시 | 광둥 성 | 우호 지구 | 1997 | |
| 리치먼드 | 버지니아 주 | 협력 협정 | 1998 | |
| 쿠미아나 | 피에몬테 주 | 우호 도시 | 2001 | |
| 아지만 | 아랍에미리트 | 협력 협정 | 2005 | |
| Umhausen|움하우젠de | 티롤 주 | 파트너 협정 | 2006 |
6. 경제
2016년 에를랑겐은 시 경계 내에서 100.3억유로의 국내총생산(GDP)을 기록하여 독일 도시 순위에서 36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1인당 GDP는 91,531 유로 (바이에른: 44,215 유로 / 독일 38,180 유로)로 독일의 모든 독립시 중 네 번째로 높았다. 2016년에는 약 113,200명이 이 도시에서 고용되었다.[88] 2018년 12월 실업률은 3.4%로 바이에른 평균 2.7%보다 높았다.[89]
에를랑겐의 경제는 지멘스(Siemens AG)와 그 계열사, 그리고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의 활동에 의해 형성된다. 이 도시는 비즈니스 입지로서 독일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016년 스위스 회사 Prognos가 수행한 독일의 모든 402개 독립시 및 구의 경쟁력 분석에서 이 도시는 6위(2013년: 3위)를 차지했다. 특히 성장 측면에서 평균 이상의 가치를 달성했다.[90]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은 에를랑겐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에 본사를 둔 지멘스 & 할스케(S&H)와 지멘스-슈케르트 베르케(SSW)는 붕괴가 예상되기 전부터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귄터 샤브로브스키를 중심으로 한 호프 그룹은 에를랑겐에서 새로운 위치를 찾았다. 지멘스-라이니거-베르케의 형태로 이미 에를랑겐에 지멘스 부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6월 25일 두 명의 선발 팀으로 시작하여, 1946년 초에는 이미 200명의 SSW 직원이 에를랑겐에서 근무했다. 1948~1953년에는 한스 헤르틀라인의 설계에 따라 "라즈베리 팰리스"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지멘스 행정 건물이 세워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한스 마우러가 설계한 "유리 궁전"(1959–1962) 및 지멘스 연구 센터(1959–1968)와 같은 추가 사무실 건물이 건설되었다.
1966년 SSW, SRW 및 S&H의 3개 지멘스 회사가 지멘스 AG로 합병되면서 경제적 부흥이 다시 일어났다. 1985년부터 1995년 사이에만 이 회사는 에를랑겐 부지에 을 투자했다. 직원 수는 1986년에 31,000명으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뉘른베르크-모렌브룬과 포르히하임으로의 이전으로 인해 현재 직원 수는 약 24,000명이다(2011년 9월 30일 기준). 에를랑겐에는 지멘스 헬시니어스(의료 기술) 부문 외에도 산업(자동화 및 구동 기술), 에너지(발전, 전력 전송 및 배전) 및 인프라 & 도시 부문(모빌리티, 철도 기술, 스마트 그리드 기술)과 다수의 직원 부서가 있다.
에를랑겐은 진보와 혁신을 장려하고 투자를 유치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85/86년에는 퓌르트(Fürth)와 뉘른베르크(Nuremberg) 시와 함께 ''혁신 및 스타트업 센터 뉘른베르크-퓌르트-에를랑겐 GmbH (IGZ)''가 테넨로헤(Tennenlohe)에 설립되었다.[103] 2003년에는 의료 기술, 제약 연구, 생명 공학 및 유전 공학 분야의 스타트업과 혁신 기업을 지원하는 의료 기술 혁신 센터(IZMP)가 IGZ에 추가되었다.[104]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발트크랑켄하우스, 클리니쿰 암 오이로파카날, 지멘스 헬시니어스 사업부 및 100개 이상의 중소기업 간의 협력을 통해 의학, 의료 기술 및 제약 산업 분야의 역량 센터가 설립되었다. 직원 4명 중 거의 1명이 의료 기술 및 헬스케어 부문에서 근무하고 있다.[106] 에를랑겐시는 독일 의료 연구, 생산 및 서비스의 수도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에 주변 지역을 포함시키기 위해 메디컬 밸리 유럽 대도시권 뉘른베르크가 설립되었다.
6. 1. 주요 기업


에를랑겐의 경제는 지멘스 AG와 그 관련 회사, 그리고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에 의해 형성되어 있다.
1686년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에 의해 신시가지가 건설되기 전까지 에를랑겐의 경제는 농업 중심이었다. 레그니츠 강과 슈바바흐 강은 관개 농업과 목축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고, 강 자체는 어업 기회를 제공했다. 농업 외에도 지역 수요를 충족하는 소규모 산업이 존재했다. 1619년에는 이발사, 통 제조공, 유리 장인, 열쇠 장인, 대장장이, 가구 장인, 수레 제조공, 벽돌공이 각각 1명, 정육점, 제분공, 구두 장인이 각각 2명, 목수가 3명, 빵집, 재봉사, 석공이 각각 5명, 직조공이 8명, 그 외에 많은 하숙집과 맥주 제조공이 있었다.
30년 전쟁 이후,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은 경제 부흥을 위해 위그노를 모집하여 정착시켰다. 이로 인해 양말 제조업, 모자 공장, 장갑 공장, 가죽 무두질 공장이 발전했다. 초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주도했지만, 점차 독일인들이 참여하면서 산업이 독일화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보호 무역주의 정책으로 인해 에를랑겐의 산업은 쇠퇴했다. 양말 제조업은 1887년에 중단되었고, 면화 인쇄나 모자 제조도 사라졌다. 가죽 무두질과 장갑 제조만이 20세기까지 존속했다.
19세기 중반, 에를랑겐 경제는 농업, 상업, 수공업 외에 공업이 부상하면서 서서히 안정되었다. 특히 맥주 생산이 중요했는데, 1860년 말에는 뮌헨의 3배에 달하는 맥주를 수출했다. 그러나 1880년대 초 냉장고의 발명으로 맥주 산업은 쇠퇴했다. 맥주 외에도 빗 제조가 중요해졌다. 에를랑겐 최초의 증기 기관을 이용한 요한 게오르크 뷔킹 회사는 1845년에 약 120만 개의 빗을 생산하여 독일, 유럽, 북미 시장을 석권했다. 에밀 쿨렌츠라이의 브러시 공장도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전에는 400명 이상을 고용했다.
1880년 면사 방적 공장(Baumwollspinnerei AG) 설립은 에를랑겐에 새로운 산업 분야를 열었다. 여러 차례 합병을 통해 1927년 에를랑겐-밤베르크 면사 방적 회사(ERBA)가 설립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5,000명이 일했다.
에를랑겐의 미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대학의 기계 기술자 에르빈 모리츠 라이니거였다. 1876년부터 광학 기기와 정밀 기계를 제조했고, 1886년 라이니거, 게베르트 & 샬 회사를 설립하여 대학 의학부와 협력했다. 1895년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의 뢴트겐 장치 개발 후, 라이니거는 에를랑겐 공장에서 뢴트겐 장치를 제조하기로 합의했다. 1925년 지멘스 & 할스케 AG가 이 회사를 인수하여 의료 기술 부문을 개설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2,000명 이상이 지멘스-라이니거-베르케 AG 에를랑겐 공장에서 일했다. 1947년부터 이 도시는 현재의 지멘스 헬시니어스의 본사가 되었다.
1908년부터는 연필깎이 제조가 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며 중요해졌다. 1919년 기업가 파울 고센은 바이아스도르프에 전자 계측기 제조 업체 파울 고센 Co. K.-G.를 설립하고 이듬해 본사를 에를랑겐으로 이전했다. 이 회사는 광학식 노출계 OMBRUX 등을 제조했으며, 1963년 지멘스 AG에 인수되었다.
주요 기업 목록
| 기업명 | 주요 사업 분야 | 설립 연도 | 비고 |
|---|---|---|---|
| 지멘스 헬시니어스 | 의료 기술 | 1947년 (전신: 라이니거, 게베르트 & 샬) | 지멘스 사업부, 본사 |
| 지멘스 | 발전, 전력 전송, 자동화, 구동 기술, 철도 기술 등 | 1966년 (3개 회사 합병) | 에를랑겐에 주요 사업부 위치 |
| AREVA GmbH | 원자력 | 지멘스와 아레바의 원자력 부문 합병, 본사 | |
| 솔라 밀레니엄 | 태양광 발전소 건설 | 1998년 | 2011년 파산 |
| 푸블리시스 | 광고 서비스 | 에를랑겐 지사는 2019년 해체 | |
| KUM GmbH & Co KG | 학교 및 사무용품 | 연필깎이 제조로 시작 | |
| 발레오 지멘스 e오토모티브 | 전기 자동차 부품 | 2016년 | 합작 회사, 본사 |
7. 교통
에를랑겐은 뉘른베르크와 밤베르크를 잇는 가도에 위치하여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1686년 신도시 건설로 교통이 활발해졌고, 1708년에는 도로 포장이 시작되었다. 1900년 이후 자동차가 득세하면서 1912년에는 뉘른베르크행 버스 노선이 개통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동차 대중화가 시작되면서 프랑켄 고속도로(A73호선)가 건설되는 등 도시 경관이 크게 변화했다.
환경 운동이 일어나면서 코스바허 댐에 의한 레그니츠그룬트 횡단 도로와 같은 건설 계획이 실현되지 않게 되었고, 대신 공공 근교 교통과 자전거 도로가 확충되었다. 시내에는 보행자 전용 구역이 설치되어 자동차 진입이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도로 건설 프로젝트는 계속되었는데, 예를 들어 알레 암 레터하임파르크는 4차선 확장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8년 주민 투표를 통해 확장이 결정되었다. 남부 우회도로는 부켄호프 숲과 조류 보호 구역을 통과해야 하는 문제로 인해 2012년 환경 보호를 이유로 계획 승인 절차가 중지되어 부결되었다.[197]
현재 에를랑겐은 2개의 연방 아우토반과 1개의 연방도로에 인접해 있다.
| 종류 | 노선 |
|---|---|
| 아우토반 | * A3호선 (아르넘) - 뒤셀도르프 - 쾰른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 뷔르츠부르크 - 에를랑겐 - 뉘른베르크 - 레겐스부르크 - 파사우 - (린츠) |
| 연방도로 | 바트브람슈테트 - 함부르크 - 브라운슈바이크 - 에르푸르트 - 일메나우 - 코부르크 - 밤베르크 - (추가로 A73호선으로) - 에를랑겐 - 뉘른베르크 - 피쉬바흐 |
7. 1. 대중 교통
에를랑겐은 연방 고속도로 3호선, 연방 고속도로 73호선, 연방 도로 4호선에 위치해 있다.도시는 광범위한 버스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에를랑겐 시립 시설은 대중교통에 천연가스 버스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미세 입자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120] 또한, 사회민주당(SPD)과 기독교사회연합(CSU) 정치인 모두 시의 차량에 전기 버스를 도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20][121] 그러나 뉘른베르크와 퓌르트가 이미 이러한 차량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를랑겐이 이를 따르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122][123]
에를랑겐시 시설국 AG(ESTW) 및 프랑켄 승합차 교통(OVF)의 다수의 시내 및 광역 버스 노선이 대중 근교 여객 교통(ÖPNV)을 담당하고 있다. 이 버스 노선은 모두 뉘른베르크 광역 교통 연합(VGN)에 통합되어 있으며, 뉘른베르크 권역의 근교 열차, 시전철, 지하철, 나아가 타 도시의 버스 사업자와 공통 요금 체계로 이용할 수 있다. 이 버스 노선은 거의 모두가 시 중심부(슈타트첸트룸)를 통과하고 있다. 광역 버스의 대부분이 역 서쪽에 있는 중앙 승합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역의 지붕이 있는 동쪽에는 주요 시내 버스 노선이 정차하는 하우프트반호프(중앙역) 정류장과 바로 근처의 후겐노텐플라츠(위그노 광장) 정류장이 있다. 또 다른 중요한 환승 지점은 귈터할렌(화물 창고) 거리와 귈터반호프(화물역) 거리의 교차점이다. 하우프트포스트(중앙 우체국) 정류장은 2007년 9월 8일, 이곳에 건설된 쇼핑 센터를 기념하여 아르카덴 정류장으로 개명되었다.

10년이 끝나갈 무렵 개통될 예정인 ''슈타트-움란트-반(StUB)''[118]이라는 경전철 시스템을 계획하고 있다.[119] 에를랑겐은 뉘른베르크 S-반 1호선이 운행된다.
에를랑겐의 철도 교통 시스템 구상은 수년 만에 다시 부상했다. 1961년 노인키르헨 암 브란트로의 운행이 중단되고 1984년 헤르초게나우라흐로의 철도 노선이 폐지된 후, 1980년대 중반부터 에를랑겐에서는 환경 친화적인 교외 교통 시스템 건설이 숙고되었다. 도시형 철도(S반)의 모델은 1990년대 초에 모든 기능을 집약한 레기오날슈타트반의 컨셉으로 더욱 발전되었으며, 여기서는 "슈타트-움란트-반"(직역: 도시 교외 철도), 또는 이를 줄여서 StUB라고 부른다. 1992년부터 지멘스 트랜스포테이션 시스템즈가 기술 및 자금 양면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에를랑겐 시, 에를랑겐-회히슈타트 군, 포르히하임 군은 예측되는 비용-성과 분석 및 실현 가능성 검토 등을 근거로 1995년에 StUB망의 건설 및 영업을 기본적으로 가결했다. 기본적인 노선망은 남쪽과 동서로 뻗는 T자형으로, 뉘른베르크-톤, 헤르초게나우라흐, 그리고 노인키르헨 암 브란트 경유 에켄탈로 향하는 3개 노선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기점은 에를랑겐의 슈타트첸트룸이 예상된다. 승객은 톤에서 뉘른베르크 노면 전차망에, 에켄탈에서 그레펜베르크 철도에, 에를랑겐의 슈타트첸트룸에서 뉘른베르크 S-반 및 지역·광역 철도에 접속한다. 포르히하임과 회히슈타트 안 데어 아이슈를 잇는 헴호펜 철도에 접속하는 헴호펜으로 향하는 노선을 포함하는 확장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포르히하임에서 에버만슈타트로 향하는 비젠트탈을 통과하는 철도도 최대 철도망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1993년의 실현 가능성 검토에서는 StUB 프로젝트의 총 비용을 약 , 기본 노선망의 궤도 정비에만 약 로 산정했다. 바이에른의 경제성은 이 프로젝트를 주 및 연방 지원 프로그램에 수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자금 지원 없이는 StUB의 실현을 전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를랑겐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이 테마가 정기적으로 공적·정치적 논쟁의 일부가 되었다.
2010년경부터, 특히 헤르초게나우라흐 시와 뉘른베르크 시의 주도로 StUB의 계획이 다시 집중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2012년 봄까지 표준화된 평가와, 지역에 최적화된 버스망 (RoBus)과의 비교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르면, StUB를 위한 인프라 정비에 필요한 투자액은 약 2.81억유로, RoBus를 위한 그것은 약 1240만유로였다.[203] 두 시책 모두, 적격 부분의 80%까지가 보조되는 국가의 고액 보조금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StUB에서는, 기타 주변 정비의 재원에, 3.65억유로에서 4.07억유로가 필요했다.[204][205]
정책 결정자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관련 자치단체(에를랑겐 시, 뉘른베르크 시, 에를랑겐-회히슈타트 군)가 공공 근교 여객 교통의 운영자로서 부담해야 하는 유지 관리비였다. 그 액수는, StUB의 경우, 버스에 의한 대안에 비해 약 10배인 1100만유로였다.
2012년 9월 21일, 에를랑겐-회히슈타트 군의 군 의회는 과반수로, 뉘른베르크-암-베크펠트 - 에를랑겐 - 헤르초게나우라흐/우텐로이트 노선에 의한 슈타트-움란트-반의 추진 동의를 가결했다. 같은 해 9월 27일에 에를랑겐 시 의회도 이를 가결했다. 뉘른베르크 시와 헤르초게나우라흐 시는 이미 이전부터 유사한 결정을 내렸다.[207]
에를랑겐의 광역 버스 정류장은 중앙역 바로 뒤에 있는 파르크플라츠 거리를 중심으로 존재한다. 에를랑겐에서 남부 독일의 20개 지역으로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7. 2. 철도
에를랑겐은 뉘른베르크-밤베르크 철도 상에 위치한다. 1980년대에 헤르초게나우라흐로 연결되는 철도는 폐쇄되었다. 에를랑겐 중앙역은 인터시티 익스프레스 열차가 정차하는 유일한 역이며, 지역 열차(S반)는 에를랑겐-브뤼크역, 에를랑겐-엘터스도르프역, 에를랑겐-파울-고센-슈트라세역 등 주요 철도 노선을 따라 있는 세 개의 다른 역에도 정차한다.
1844년 8월 25일, 루트비히 남북선의 뉘른베르크-밤베르크 구간 개통과 함께 에를랑겐은 철도로 연결되었다. 이는 지역을 넘어선 철도 교통 발전에 큰 도약을 가져왔다. 1886년 11월 17일에는 에를랑겐-그레펜베르크 간 지역 노선이, 1894년 4월 16일에는 에를랑겐-브루크-헤르초게나우라흐 간 노선이 개통되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 뉘른베르크-밤베르크 선은 급속히 확장되어 에를랑겐은 ICE 네트워크에 편입되었다. 2010년 말에는 에를랑겐을 경유하여 밤베르크와 뉘른베르크를 연결하는 S반이 개통되어 20분에서 40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다. S1호선은 에를랑겐 시내에 에를랑겐, 에를랑겐-브루크, 에를랑겐-엘터스도르프, 에를랑겐-파울-고센-슈트라세 역을 두고 있으며, 마지막 역은 2015년 12월 시간표 개정에 따른 S반 확충으로 개통되었다. 2017년 말, 에를랑겐은 독일 통일 교통 프로젝트 No. 8에 의해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ICE 고속 철도 노선과도 연결되었다.[198]
그러나 두 개의 지선은 도로 교통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1963년 2월 16일 그레펜베르크행 마지막 열차가 운행되었고, 1984년 9월 28일 헤르초게나우라흐행 여객 운행이 중단되었다. 화물 운송은 프란켄 II 발전소 석탄 수송 중단 이후에도 프라우엔아우라흐역을 경유, 에를랑겐 항구 부지(쓰레기 환적지)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7. 3. 자전거
1970년대 초반, 당시 시장이었던 디트마어 할베크의 자전거 친화적인 교통 정책은 오늘날 에를랑겐에서 자전거가 교통 수단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124] 그는 보행자 도로에 자전거 전용 도로를 도입하는 데 특히 힘썼다. 자전거는 에를랑겐 시민들에게 흔한 교통 수단이며,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자전거 이용자를 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과거 에를랑겐은 뮌스터와 독일에서 가장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8. 문화 및 관광 명소
에를랑겐에는 다양한 문화 및 관광 명소가 있다.
-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Friedrich-Alexander-Universität): 1742년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프리드리히에 의해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이다.
- 에를랑겐 시립 박물관(Stadtmuseum Erlangen): 옛 구시청사에 위치하며 에를랑겐의 역사를 보여준다.
- 에를랑겐 식물원(Botanischer Garten Erlangen): 대학교에서 관리하는 식물원이다.
- 중앙 묘지(Zentralfriedhof): 약 9,000개의 묘가 있는 에를랑겐에서 가장 큰 묘지이다.
주요 행사:
- 베르크키르히바이(Bergkirchweih):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작은 연례 맥주 축제이다. 오순절 전후 12일 동안 열리며, 현지인들은 "다섯 번째 계절"이라고 부른다.[107] 매년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다.[107]
- 에를랑겐 민속 페스트: 1998년부터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민속 무용 축제이다.
- 기타 행사:
| 월 | 행사명 | 비고 |
|---|---|---|
| 매월 | Poetry slam영어 | 2007년부터 E-Werk에서 개최[232] |
| 1월 | 에를랑겐 슈필러타게 | 1987년부터 E-Werk에서 개최 |
| 2월 | 청소년 연구 및 학생 실험 지역 콩쿠르 | 1989년부터 하일리히-란데스-할레에서 개최[233] |
| 4월 말 | 위켄드 오브 피어 | 괴기 영화 영화제 |
| 홀수 해 5월/6월 |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 | 뉘른베르크, 퓌르트, 슈바바흐와 공동 개최, 1979년부터 |
| 짝수 해 6월 | 국제 코믹 살롱 | 1984년부터 |
| 7월 | 국제 연극 페스티벌 "젊은 예술가를 위한 아레나" | |
| 7월 |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의 성관 정원 축제 | |
| 8월 | 마르크트 광장 축제 | 수공예, 예술, 풍속 |
| 8월 | 에를랑겐 시인 축제 | 1980년부터 |
| 10월 | "학문의 긴 밤" | 2003년부터 격년 개최 |
| 12월 | 슈로스 광장(성관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과 노이슈타트의 키르헨 광장(교회 광장)에서의 역사적인 크리스마스 마켓 |
관광 명소:
- 에를랑겐 신시(新市): 바로크 양식의 계획도시로, 곧은 도로와 광장, 통일된 파사드를 가진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변경백의 성관: 슐로스 운트 마르크트 광장(성관=시장 광장), 슐로스가르텐(성관 정원), 오랑주리, 구 콩코르디엔 교회, 위그노 분수,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의 기마상이 있다.

- 에글로프슈타인 궁전: 1718년 건설되었으며, 화려한 회벽칠 천장이 특징이다.
- 구 수도탑(아펠 거리 12번지): 1705년 신시에서 최초의 탑으로 건설되었다.
- 마르틴-루터 광장의 구 시청사: 1733~1734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에를랑겐 시립 박물관(Stadtmuseum Erlangen)으로 이용되고 있다.
- 부르크베르크 예배당: 에를랑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 부르크베르크의 플라텐호이센: 시인 August von Platen-Hallermünde|아우구스트 폰 플라텐-할러뮌데de가 1824년 여름에 시극을 완성한 곳이다.
- 부르크베르크: 옛 맥주 창고가 있다.
- 구 시벽: 흔적이 남아있다.
- 레뵈니히 궁전: 18세기 중반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대학 도서관 구관: 1910~1913년에 유겐트 양식으로 건설되었으며, 귀중한 수고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8. 1. 극장 및 영화관
- 에를랑겐 시는 시립 극장 "다스 테아터 에를랑겐"(Das Theater Erlangen)을 운영하고 있다. 메인 무대는 변방백 극장으로, 남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크 극장이다.

변방백 극장 - 이 외에 "테아터 인 데어 갈라제"(Theater in der Garage)가 시립 극장에 속해 있다.
- 또한, 민영 소극장 "피프티-피프티"(Fifty-Fifty)와 극단 "슈투디오뷔네 에를랑겐"(Studiobühne Erlangen)이 있다.
- 더불어 대학의 연극·미디어학 연구소의 실험 극장이 있다.
- 자유 연극은 작업 공동체 "프라이에스 테아터 에를랑겐"(Freies Theater Erlangen)에 통합되어, 시의 문화 정책에 대한 대표 기관이 되고 있다.
- 에를랑겐은 매년 개최되는 국제 연극제 "젊은 예술가의 아레나"의 개최지이다.
- 에를랑겐에는 4개의 영화관이 있다: 노이어 마르크트의 시네스타-키노(CineStar-Kinos), 하우프트 거리의 람리히트슈필레(Lamm-Lichtspiele), 문화 센터 E-베르크(E-Werk), 키노 만하탄(Kino Manhattan)이다.
- 1997년부터 2011년까지, 바로크 양식의 변방백 극장은 1년에 한 번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프로그램은 다채로운 고전적(때로는 새로운) 무성 영화 작품이었다. 다른 무성 영화제와 달리, 여기서는 주로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함께 상영이 이루어졌다. 몇몇 남아있는 오리지널 작품 외에도, 현대 작곡가들이 만든 고품질의 새로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 4일간의 페스티벌은 비엔날레로 구상되었지만, 그 사이 해에는 하루 동안 고전 무성 영화를 상영하는 "막간"이 마련되었다. 정규 페스티벌 프로그램에는 영화 외에도 전시회, 연주가, 작곡가, 영화 전문가와 청중 간의 대화, 거의 24시간 운영되는 라이브 연주가 있는 필름 카페 등이 열렸다. 2012년 이후, 무성 영화 음악의 날은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되고 있다.
8. 2. 박물관 및 미술관
에를랑겐 시립 박물관(Stadtmuseum Erlangen)은 옛 구시청사에 위치해 있으며, 에를랑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의 골동품, 선사 시대, 원시 시대 컬렉션도 이곳에서 관람할 수 있다.
시내에는 두 곳의 미술관이 더 있다. 에를랑겐 예술 궁전(구 시립 갤러리)은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슈투터하임 궁전 안에 있다. 2007년 미술관 건물이라고 불리는 곳의 대규모 개수를 위해 이전했으나, 2010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이름을 바꾸었다. 2015년부터 아멜리 다이스가 예술 궁전과 에를랑겐 시립 컬렉션의 책임을 맡고 있다. 또 다른 미술관은 에를랑겐 아르카덴 바로 옆에 있는 뢰베니히 궁전의 미술관이다.
게바트 거리/에케 루이트폴트 거리의 무제움스빈켈이라고 불리는 구역에는 구 지멘스 UB-Med 부지에 2014년 지멘스 헬시네어스 박물관(지멘스의 의료 기술에 관한 기업 박물관)이 새로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에르빈 모리츠 라이닝거의 슐로스 광장 작업장(1877년)부터 지멘스 헬스케어(2014년)까지 지멘스 의료 공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195]
8. 3. 주요 행사
에를랑겐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행사들이 열린다.- 베르크키르히바이(Bergkirchweih):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작은 연례 맥주 축제이다. 오순절 전후 12일 동안(부활절 이후 49일) 열리며, 현지인들은 이 기간을 "다섯 번째 계절"이라고 부른다.[107] 맥주는 "베르크"의 나무 아래 테이블에서 1리터 석기 항아리에 담겨 제공된다.[108] 매년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으며, 카니발 놀이기구와 프랑켄 요리 푸드 스톨이 있다.[107] 현지인들은 이 축제를 "Berchkärwa" 또는 "Berch"라고 부르며, "Gehma auf'n Berch!"("산에 가자!")와 같이 사용한다.
- 에를랑겐 민속 페스트: 1998년부터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민속 무용 축제이다. 워크숍에서 여러 나라의 춤을 배우고, 라이브 연주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탄츠네히텐"(댄스 밤)이 열린다. 4월 말부터 5월 초에 개최되며, "탄츠 인 덴 마이"(5월의 춤)를 포함한다.
- 기타 행사:
| 월 | 행사명 | 비고 |
|---|---|---|
| 매월 | Poetry slam영어 | 2007년부터 E-Werk에서 개최[232] |
| 1월 | 에를랑겐 슈필러타게 | 1987년부터 E-Werk에서 개최 |
| 2월 | 청소년 연구 및 학생 실험 지역 콩쿠르 | 1989년부터 하일리히-란데스-할레에서 개최[233] |
| 4월 말 | 위켄드 오브 피어 | 괴기 영화 영화제 |
| 홀수 해 5월/6월 |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 | 뉘른베르크, 퓌르트, 슈바바흐와 공동 개최, 1979년부터 |
| 짝수 해 6월 | 국제 코믹 살롱 | 1984년부터 |
| 7월 | 국제 연극 페스티벌 "젊은 예술가를 위한 아레나" | |
| 7월 |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의 성관 정원 축제 | |
| 8월 | 마르크트 광장 축제 | 수공예, 예술, 풍속 |
| 8월 | 에를랑겐 시인 축제 | 1980년부터 |
| 10월 | "학문의 긴 밤" | 2003년부터 격년 개최 |
| 12월 | 슈로스 광장(성관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과 노이슈타트의 키르헨 광장(교회 광장)에서의 역사적인 크리스마스 마켓 |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 국제 코믹 살롱, 에를랑겐 시인 축제는 2000년경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새로운 스폰서십과 시의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8. 4. 관광 명소
- 현재의 시가지, 과거의 에를랑겐 신시(新市)는 바로크 양식의 계획·이상 도시로서 건설되었으며, 곧은 도로와 광장의 배열, 3~4층 건물에 동일한 면을 향한 통일된 파사드가 유지되어 있어 보존 상태가 좋은 독일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 변경백의 성관, 슐로스 운트 마르크트 광장(성관=시장 광장), 슐로스가르텐(성관 정원)과 그 안에 세워진 오랑주리, 구 콩코르디엔 교회(현재의 지리학회), 위그노 분수,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변경백의 기마상이 있다.
- 변경백 극장은 남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크 극장이다.
- 슈투터하임 궁전 안에는 시립 도서관과 시립 갤러리가 있다.
- 에글로프슈타인 궁전은 1718년에 당시 도시 변두리에 에글로프슈타인 남작 카를 막시밀리안을 위해 건설되었다. 특히 도메니코 카데나치가 제작한 화려한 회벽칠 천장을 가진 페스트잘(축전 홀)이 볼만하다. 1749년에 시가 이 건물을 획득한 후, 주로 대학이 소유하며 구빈원, 담배 공장, 학교 등으로 사용되었다. 1998년 개수 후에는 시민 대학이 이용하고 있으며, 이 건물 안에는 시인이자 오리엔트 학 교수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가 살았다.
- 구 수도탑(아펠 거리 12번지)은 1705년에 신시에서 최초의 탑으로 건설되었다. 원래는 7층 건물로, 식물원, 분수, 오랑주리의 분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818년부터 대학 소유가 되어 성관 정원에 면한 연구 시설에 물을 공급했다. 1876년에 노후화로 3층이 철거되었다. 1839년부터 1897년까지 두 개의 공간이 대학의 감금실로 이용되었으며, 이 중 1실은 현재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마르틴-루터 광장의 구 시청사는 1706년에 옛 시청사가 구 시가지의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1733년부터 1734년에 걸쳐 마르티-루터 광장의 동쪽 중앙 정면에 건설되었다. 1812년에 신시와 시청 기능이 통합된 후, 이 건물은 1964년 이후 시립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1988년에 개수되었다.
- 간소하고 작은 부르크베르크 예배당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5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1709년까지 시나 교회의 역사에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은둔자의 초암이었으며, 시벽 밖에서 노인 요양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이 주변은 노인 요양 시설이 있다.
- 부르크베르크의 플라텐호이센(직역: 플라텐의 작은 집)에서는 시인 August von Platen-Hallermünde|아우구스트 폰 플라텐-할러뮌데de가 1824년 여름에 시극 "Der Schatz des Rhampsinit"를 완성했다.

- 부르크베르크에는 옛 맥주 창고가 있다.
- 구 시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1945년에 미군 전차가 통과할 때 뉘른베르거 문이 손상되어 폭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 레뵈니히 궁전은 18세기 중반에 요아힘 크리스토프 헤르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되었으며, 1817년부터 레뵈니히 가문의 거주지 겸 담배 공장으로 이용되었다. 1941년까지 이 가족의 소유였지만, 그 후 우체국으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미술관이 되었다.
- 1910년부터 1913년에 유겐트 양식으로 건설된 대학 도서관 구관에는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프리드리히의 사립 도서관이 있었다. 이 도서관은 귀중한 수고본, 변경백의 컬렉션, 동전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9. 스포츠
HC 에를랑겐은 최상위 리그에서 활동하는 에를랑겐의 주요 스포츠 클럽이다. 에를랑겐에는 분데스리가 수준의 핸드볼 경기를 치를 만한 경기장이 없어 2014년부터 뉘른베르크 아레나에서 홈 경기를 치르고 있다.
이 도시에는 FSV 에를랑겐-브루크, BSC 에를랑겐, SC 엘터스도르프 등 여러 개의 하위 리그 축구 팀이 있다.
과거 군사 기지에는 에를랑겐 화이트삭스가 사용하는 야구장이 있다. 에를랑겐 샤크스는 지역 미식축구 팀으로, 샤크스와 화이트삭스는 슈필페어아이니궁 에를랑겐의 다른 팀들이 사용하는 인접한 잔디밭에서 경기를 한다.
SSG 81 에를랑겐은 TB 1888과 SGS의 각 수영 부문이 합병하여 설립된 클럽으로, 오랫동안 성공을 거두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비요른 치칼스키와 벤크트 치칼스키 형제, 2003년에 3개의 세계 챔피언이 된 뉘른베르크의 하나 슈토크바우어 등이 이 클럽 출신이다.
TB 1888의 육상 부문도 성공적이었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10미터 허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플로리안 슈바르트호프가 이 클럽에서 육성되었다.
에를랑겐에는 핸드볼의 오랜 전통이 있다. 1990년대에는 CSG 에를랑겐과 HG 에를랑겐이 분데스리가 2부 남부 지구에서 플레이했다. 2001년에 두 클럽이 합병하여 HC 에를랑겐이 결성되었고, 2014년에 처음으로 핸드볼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코스바흐 지구에는 라이트클럽 에를랑겐 e.V.(에를랑겐 승마 클럽)의 마구간과 마장이 있다.
탄츠=투르니어=에를랑겐(댄스 클럽)은 1949년에 설립된 바이에른주에서 가장 오래된 댄스 스포츠 클럽 중 하나이다.
1890년 1월 15일에 설립된 독일 알펜 협회(DAV)의 에를랑겐 지부[228]는 회원 수 9,432명(2018년 12월 31일 기준)[229]으로 이 도시 최대의 스포츠 클럽이다.
10. 환경 보호
에를랑겐은 1970년대 초 독일에서 환경 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환경 보호와 자연 보존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여러 국내외 수상을 통해 입증되었다. 1988년에는 "1987/88 유럽 환경의 해 파트너"로 선정되었으며, 1990년과 1991년에는 "연방 자연 및 환경 보호 수도"로 선정되었다. 2007년에는 시에서 "Natürlich ERLANGEN" (Natürlich ERLANGEN|자연/유기적 에를랑겐de)이라는 모토로 환경의 해를 선포했다.[213][214][215]
주요 초점 중 하나는 태양광 발전을 확대하는 것이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에를랑겐의 태양광 발전 시스템 설치 용량은 20배 이상 증가하여 16,700kW에 달했으며, 이는 에를랑겐의 연간 전력 요구량의 2.0% 이상을 충당한다.[216] 에를랑겐은 이른바 Solarbundesliga (연방 태양광 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도시 간 경쟁에서 에를랑겐은 2012년에 3위를 차지했으며, 유럽 태양광 리그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217]
2007년부터 에를랑겐은 독일 최초로 모든 학교에 자체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설치한 도시가 되었다. 학교의 태양광 시스템 데이터는 인터넷의 기후 보호 학교 아틀라스에 제시된다.[218] 2011년에는 설치된 태양광 시스템을 입력할 수 있는 태양 도시 지도가 인터넷에 구축되었다.[219]
1970년대 초, 당시 상급 시장 디트마르 하르베크의 자전거를 배려한 교통 정책에 따라 모든 교통 수단에서 자전거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의 특별한 착안점은 보도 위에 자전거 레인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자전거는 시민 전체에 보급된 교통 수단이다. 과거에는 에를랑겐과 뮌스터가 "독일에서 가장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공공 근교 교통에 천연가스 버스를 채택함으로써 에를랑겐 시설국은 이산화 탄소 및 미세 입자 배출량 감소에도 기여하고 있다.
도심 지역에는 두 곳이 자연 보호 구역(NSG)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바이에른 자연 보호법 제7조에 따라 동식물에 대한 최고 수준의 보호를 받는다.
- 1964년에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브루커 라체 습지 생물 서식지는 1984년에 원래 76ha에서 110ha로 확장되었다.[113] 자연 보호 구역 남쪽에는 바이에른 산림 관리청에서 운영하는 9개의 산림 체험 센터 중 하나인 테넨로헤 산림 체험 센터가 있다.[114]
- 2000년 10월에 지정된 25ha 규모의 모래 생물 서식지인 엑세르치어플라츠 자연 보호 구역은 프랑코니아 모래 축의 일부이다.[115]
자연 보호 구역 외에도 에를랑겐에는 총 3538ha, 즉 도시 전체 면적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21개의 경관 보호 구역이 있다. 이러한 경관 보호 구역은 자연 보호 구역과 달리 특별한 경관과 레크리에이션적 가치를 보호하고 효율적인 자연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둔다.[116][117]
| 보호 구역 | 면적(ha) | 특징 | 지정 연도 |
|---|---|---|---|
| 뷔헨바흐의 홀츠베크 | 뷔헨바흐와 뫼나우 숲 지역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길, 함몰된 차선 가장자리에 종이 풍부하고 영양분이 적은 초원 식물 | ||
| "리비에라" (슈바바흐(레드니츠) 강변) | 석회암 초원 | 2000년 초 | |
| 후트그라벤 빈켈펠더 및 볼프스만텔 | 186 | 칼크로이트 서쪽 경사면 분지에서 발원, 엘터스도르프 서쪽 레그니츠로 합류 | 1983년 |
| 빔바흐탈 | 뷔헨바흐 남서부 | 1983년 | |
| 그뤼나우 지역 | 56 | ||
| 대주교 연못(데흐젠도르퍼 바이허) 주변 | 169 | ||
| 뫼나우 | 570 | ||
| 데흐젠도르프 로헤 | 70 | ||
| 제바흐그룬트 | 112 | ||
| 무어바흐 계곡 | 50 | ||
| 레그니츠 계곡 | 883 | ||
| 얼음 구덩이가 있는 마일발트 숲 | 224 | ||
| 슈바바흐 계곡 | 66 | ||
| 코스바흐 연못과 슈타인포르스트 도랑 | 157 | 라인-마인-다뉴브 운하 동쪽, 영구적인 숲 지대 | |
| 리터스바흐 개울 | 66 | ||
| A3 고속도로 양쪽 보존 지구 | 47 | ||
| 수도원 숲 | 197 | ||
| 아우라흐 계곡 | 182 | ||
| 뢰머로이트와 주변 지역 | 110 | ||
| 바흐그라벤 도랑 | 9 | ||
| 브루커 라체 | 331 |
개발을 면한 레그니츠 강의 초원은 가을이나 늦겨울에 자주 발생하는 홍수를 안전하게 흘려보내기 위해 유지되고 있다. 넓은 레그니츠 강 초원을 이용하여 황새의 큰 군서지가 형성되어 있다. 브루크, 엘터스도르프, 프라우엔아우라하에서는 그 둥지를 항상 볼 수 있다. 수년 전부터, 내 시가지에 인접한 슈타인바흐 양조장의 굴뚝에서 황새 한 쌍이 포란을 하고 있다.
브루크 구역 근처의 아우라하 강 초원에서는, 역사적인 양수 수차가 2004년에 재가동되었다. 그 외에도 약 10기의 양수 수차가 에를랑겐 북부의 뫼렌도르프에 존재한다. 이것들은 15세기부터 거의 개량되지 않고, 완전히 목조인 물레방아는 한때 레그니츠 강의 물을 대량으로 퍼 올려서 퓌르트나 포르히하임까지 공급했다. 방앗간 물레방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목제 구조물은 현재, 여름 초에 자원 봉사자의 협력으로 조립되어, 시즌 말에 해체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일부는, 지역 황새의 식량 기반이 되고 있는 포이흐트비오토프(습한 비오토프)의 관개에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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