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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리드 다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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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드프리드 다넬스는 벨기에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로, 1979년부터 2010년까지 메헬렌-브뤼셀 대교구장이자 추기경을 역임했다. 그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된 후, 브뤼헤 주교 신학교와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77년 앤트워프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메헬렌-브뤼셀 대교구장으로 승진하여 벨기에의 수도 대주교, 가톨릭 주교회의 의장, 루뱅 가톨릭 대학교 총장 등을 겸임했다. 다넬스는 교황청 내에서 신앙교리성 등 여러 부서에서 활동했고, 주교 시노드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그는 해방 신학, 동성애, 안락사, 종교 간 대화 등 다양한 사회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으며, 벨기에 왕실과의 관계도 깊었다. 다넬스는 2010년 은퇴 후 2019년 선종했으며, 틸뷔르흐 대학교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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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리드 다넬스
기본 정보
블로트프로세시에서 갓프리트 다넬스
이름갓프리트 마리아 쥘 다넬스
출생1933년 6월 4일
출생지카네헴, 틸트, 벨기에
사망2019년 3월 14일
사망지메헬렌, 벨기에
국적벨기에
직업신학자
종교로마 가톨릭
교회 경력
직위추기경, 메헬렌-브뤼셀 대주교 명예 대주교
관구메헬렌-브뤼셀
교구성 룸볼트 대성당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
산타 아나스타시아 알 팔라티노 대성당
착좌1979년 12월 19일
임기 종료2010년 1월 18일
임명1979년 12월 19일
이전레오 요제프 수에넨스
계승앙드레-조제프 레오나르
서품1957년 8월 17일
서품자에밀-요제프 드 스메트
주교 서임1977년 12월 18일
주교 서임자레오 요제프 수에넨스
추기경 서임1983년 2월 2일
추기경 서임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계급추기경 사제
기타 직책산타나스타시아 알 팔라티노 추기경 사제
이전 직책안트베르펜 주교 (1977–1979)
벨기에 군종교구 주교 (1980–2010)
학력
모교뢰번 가톨릭 대학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기타
서명
문장

2. 초기 생애와 교육

(내용 없음)

2. 1. 출생과 가족

서플란데르 카네겜에서 태어났으며, 6명의 형제자매 중 장남이었다.[1]

2. 2. 신학 공부

고등학교 교사였던 다니엘 빌리에 신부의 영향으로 사제직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었다.[1] 고등학교 졸업 후, 브뤼헤의 주교 신학교 대신 루뱅 가톨릭 대학교의 고등 철학 연구소로 진학하여 3년간 신토마스주의 철학을 공부했다(1951–1954). 다넬스는 루뱅에서의 경험을 통해 지적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2]

루뱅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로마로 건너가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며 벨기에 교황청 칼리지에서 생활했다(1954–1959). 그는 로마에서의 수업 질이 루뱅보다 다소 낮다고 느꼈지만, 문화적으로는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3] 다넬스는 1956년 6월에 학사 학위를, 1958년에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61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4]

학생 시절 그의 성적은 매우 우수했으며, 특히 교회법 과목에서 A−를 받았고 석사 학위는 magna cum laude로 마쳤다.[5]

3. 사제 서품

그는 학업을 마치기 전인 1957년 8월 17일, 부모님의 결혼 25주년에 맞춰 브뤼헤 주교인 에밀 요제프 드 스메트 주교에 의해 카네헴 교구 교회에서 거행된 예식에서 성직 임명을 받았다.[6]

4. 교수 및 사목 활동

고드프리드 다넬스는 사제 서품 이후 브뤼헤의 주교 신학교에서 교수이자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며 학문적 경력을 시작했다.[7] 그는 전례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에 참여했으며,[8][9] 이후 루뱅 가톨릭 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겨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10][11][12]

4. 1. 브뤼헤 신학교 교수

1959년, 데 스메트 주교는 다넬스를 브뤼헤 주교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 겸 전례 및 영성 교수로 임명했다. 1960년에는 프란스 네이린크의 성사 강좌도 맡게 되었다.[7]

다넬스는 전례 관련 문헌 연구를 통해 로마에서 교육받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전례학자로 발전했다. 그의 논문이 실린 ''전례 사전''은 그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8] 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문서 중 하나인 ''거룩한 공의회''[8] 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 공의회에는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는 브뤼헤 교구를 넘어 벨기에 전체, 나아가 해외에서도 ''거룩한 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실행하는 데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이미 시도되었던 전례 실험들을 통해 예견된 개혁 방향에 깊이 공감하고 매료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저술과 강연에서 급진적인 전례 혁명을 주장하기보다는, 꾸준하고 신중한 혁신을 선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로마, 특히 자코모 레르카로 추기경 측으로부터 그가 글을 기고하던 전례 저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압박을 느끼기도 했다.[9]

1967년 여름, 브뤼헤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 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이후 브뤼헤 교구 사제들의 평생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12] 1969년 7월 8일에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 신학부 조교수로 임명되어, 주교 서품 직후인 1978년 1월 31일까지[10] 재직했다. 루뱅 시절 동안 그는 신학과 인문학의 상호 연관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11] 이는 그의 학문적 저술과 사목 활동 전반에 걸쳐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5. 주교 임명

1977년 11월 4일, 다넬스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앤트워프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다음 해 12월 18일 레오 조셉 쇠넨스 추기경으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다. 공동 서품자는 그의 전임자인 쥘 빅토르 데임과 브뤼헤의 데 스메트 주교였다. 다넬스 자신이 전례학자로서 개발에 참여했던 네덜란드어 의식으로 거행된 서품식은 당시 앤트워프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복원 중이었기 때문에 앤트워프 성 야고보 성당에서 열렸다.[13]

서품 3일 후,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 주교에 대한 제안을 "개인적으로" 편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며, 사람들과 직접 만나 상의하기 위해 교구를 순회했다. 그는 기독교 인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언론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이는 그의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그는 전통적인 입장을 지켰으며, 로마의 입장을 신중하게 고려했다. 주교 임명 초기부터 그는 많은 사제들이 사목 활동을 그만두는 문제에 직면했지만, 사제들이 독신으로 남아야 한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요구를 강하게 지지했다. 1978년 7월, 그는 로마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위원이 되었는데, 마침 신학자 에드워드 실러벡스가 교리성에서 조사를 받던 시기였다. 뢰번 신학부의 강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러벡스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14]

전임자의 격려와 도움을 받아 다넬스는 많은 벨기에 정치인들을 포함하는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이후 활동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15]

6. 대주교 및 추기경

다넬스는 1979년 메헬렌-브뤼셀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벨기에 교회를 이끌었으며,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16][17]

6. 1. 대주교 승진

다넬스는 1979년 12월 19일 메헬렌-브뤼셀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벨기에의 수도 대주교이자 벨기에 가톨릭 주교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루벤 가톨릭 대학교와 루뱅 가톨릭 대학교의 총장을 맡게 되었다. 또한 국가 가톨릭 군종교구의 수장으로서 처음에는 대리 주교로, 1987년부터는 주교로서 직무를 수행했다.[1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메헬렌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전통에 따라, 1983년 2월 2일 교황 회의에서 다넬스를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다.[17]

6. 2. 추기경 서임

다넬스는 1979년 12월 19일 메헬렌-브뤼셀 대교구로 승진했다. 이로써 그는 벨기에의 수도 대주교, 벨기에 가톨릭 주교회의 의장, 루벤 가톨릭 대학교와 루뱅 가톨릭 대학교의 총장, 그리고 처음에는 대리 주교, 1987년부터는 주교로서 국가 가톨릭 군종교구의 수장이 되었다.[1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메헬렌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전통에 따라, 1983년 2월 2일 교황 회의에서 그를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다.[17]

6. 3. 교황청 내 활동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메헬렌-브뤼셀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전통에 따라, 1983년 2월 2일 교황 회의에서 다넬스를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다.[17]

6. 4. 벨기에 왕실과의 관계

다넬스 추기경은 메헬렌-브뤼셀 대교구의 대주교로서 벨기에 왕실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여러 왕실 주요 행사를 주관했다.

그가 주관한 주요 왕실 인물의 장례식은 다음과 같다.

연도인물
1983년레오폴 3세 국왕
1993년보두앵 1세 국왕
2002년릴리안 공주, 레티 공녀
2014년파비올라 왕비



또한 다음과 같은 왕실 결혼식을 주례했다.

연도부부
1984년아스트리드 공주와 로렌츠 대공(오스트리아-에스테)
1999년필리프 왕자(당시 브라반트 공작)와 마틸드 여공자(우데켐 다코즈 가문)
2003년로랑 왕자와 클레어 쿰스
2008년마리 크리스틴 대공녀(오스트리아)와 로돌프 림부르크-스티룸 백작
2014년아메데오 왕자(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와 엘리자베타 로스보흐 폰 볼켄슈타인 귀족



다넬스 추기경은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히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는 자주 만나고 매우 존경했던 보두앵 국왕과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7. 주요 활동 및 입장

고드프리드 다넬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여러 사회적, 종교적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여러 차례 주교 시노드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계승과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 방안 모색에 관심을 보였다.

해방 신학에 대해서는 그 정치적 함의를 경계하면서도, 신앙교리성의 일방적인 지침 발표 절차를 비판하고 가난과 억압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벨기에의 낙태 합법화 논란 당시에는 국왕의 양심적 거부권 행사와 관련하여 중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본인은 이를 부인했으며, 낙태 자체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진보적 성향의 주교 모임으로 알려진 장크트갈렌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동성애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고 동성 간 파트너십의 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이를 '결혼'으로 칭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안락사에 대해서는 벨기에의 법 자유화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종교 간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성공회, 테제 공동체 등 다른 기독교 교파 및 공동체와의 관계 증진에 힘썼으며, 평화를 위한 종교인 세계회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외교적으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내 수녀원 문제 해결, 팍스 크리스티 국제 회장 역임, 콩고 민주 공화국의 민주화 지원, 중국과 가톨릭교회 간의 관계 개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벨기에 교회 내 아동 성추행 문제 처리 과정에서 미온적인 대처로 큰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로제 방헬루베 주교의 성 학대 사건을 인지하고도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침묵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7. 1. 주교 시노드

다넬스는 여러 주교 시노드에 참여[27]했으며, 특히 다음과 같은 시노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네덜란드 특별 시노드 (1980년 1월 14일-31일): "네덜란드에서의 사목 상황"을 주제로 열린 이 시노드에서 다넬스는 추기경 요하네스 빌레브란츠와 함께 공동 의장을 맡았다. 시노드의 주요 목표는 당시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 내에 존재하던 심각한 분열과 로마 교황청과의 간극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모든 참석자가 최종 문서에 서명했지만, 네덜란드 현지에서는 결과가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네덜란드 주교들 사이의 갈등 및 일부 주교와 신자들 간의 갈등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28]

  • 제5차 정기 시노드 (1980년 9월 26일-10월 25일): "그리스도교 가정"을 주제로 한 이 시노드에서 다넬스는 주목받는 연설을 했다. 그는 스스로 '내 최고의 시노드 연설'이라고 칭한 이 연설에서 ''인간 생명'' 회칙의 근본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혼 후 재혼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법과 하느님의 자비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러한 발언은 큰 반향을 일으켜, 시노드 마지막 날인 10월 24일 주교 시노드 일반 사무국 위원 선거에서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121표)과 바실 흄 추기경(110표)보다 많은 124표를 얻어 선출되었다.[29]

  • 제2차 특별 시노드 (1985년 11월 24일-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결 2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이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속도를 늦출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다넬스는 이 시노드의 ''총 보고자''(Rapporteur)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신학 교수였던 발터 카스퍼의 도움을 받아 최종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교황의 칭찬을 받으며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30] 그러나 보고서의 결론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여러 결정 사항을 로마 교황청에 위임함으로써 교회 내 중앙 집권적 경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31]

  • 유럽 특별 시노드 (1999년 10월 1일-23일): "예수 그리스도, 그의 교회 안에서 살아 계시며, 유럽의 희망의 근원"이라는 주제로 열린 시노드였다. 다넬스는 연설을 통해 일부 로마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문화적 비관론을 비판했다. 그의 연설은 많은 공의회 참석자들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교황은 이례적으로 다넬스에게 할당된 시간을 넘겨 연설을 계속하도록 허락했다.[32]

  • 제3차 특별 시노드 (2014년 10월 5일-19일): 공식 주제는 "복음화의 맥락에서 가족의 사목적 과제"였으나, 일반적으로 "가족에 관한 시노드"로 알려졌다. 다넬스는 이 시노드에서 짧은 발언을 했지만,[33] 교황 프란치스코의 개인적인 초청으로 시노드에 참석했다는 점 자체가 주목받았다.[34]

7. 2. 해방 신학

다넬스는 해방 신학이 지닌 정치적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4년 8월 6일, 신앙교리성이 위원이었던 그와 상의 없이 "해방 신학의 특정 측면에 관한 지침"인 ''Libertatis nuntius''를 발표하자, 그는 이 결정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다넬스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절차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해당 지침이 자유의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지적으로 접근하면서 가난과 정치적, 군사적 억압이 실제로 야기하는 고통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친구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해방 신학과 관련하여 비난받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후속 지침 ''Libertatis conscientia''("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지침")이 해방 신학을 최종적으로 단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만족감을 표했다.[35]

7. 3. 벨기에 낙태 합법화 논란

1990년 3월과 4월, 벨기에에서는 로제 랄르망과 루시엔 에르만-미히엘센스가 초안을 작성하고 의회에서 통과시킨 낙태 자유화 법안에 대해 보두앵 1세 국왕이 서명을 거부하면서 헌정 위기가 발생했다.[36] 당시 빌프리드 마르텡스 총리와 함께 국왕의 서명 거부를 예상했던 다넬스 추기경은 1989년 봄, 마르텡스 총리에게 이러한 위기 발생 시 중재 역할을 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36]

다넬스는 국왕이 겪고 있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자주 논의했으나, 국왕의 결정 '이후'에 중재했다는 사실은 부인했다.[37] 필리프 모로와 마르크 에이스켄스 두 국무장관의 발언은 다넬스가 중재에 나섰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직접적으로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38] ["우리는 추기경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개입을 언급했다" (On évoquait une discrète et prudente intervention du cardinalfra)],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Maar geen enkel resultaatnld)][38] 이들의 발언은 다넬스와 국왕 사이의 이전 대화를 암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 언론(VTM 방송)에서는 다넬스가 국왕에게 법안 서명을 조언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넬스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나는 결코 그[국왕]를 설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Ik heb alvast nooit geprobeerd hem om te pratennld)라고 단호하게 부인했다.[25] 그는 헌정 위기 전후로 국왕과 나눈 대화 내용을 "사적인 대화"[40]로 간주하고 존중했으며, 보두앵 1세 사후에도 그 비밀을 지켰다. 따라서 서명을 조언했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하다.

법안이 벨기에 관보에 공포된 직후, 다넬스를 포함한 벨기에 주교단은 성명을 통해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도, 해당 법안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명확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41] 다넬스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나거나 사랑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의 낙태를 장려하는 사회는 인간화 역할을 포기하고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정죄한다"는 신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42]

7. 4. 장크트갈렌 그룹

1999년 1월 3일, 다넬스는 장크트갈렌 그룹의 회원이 되었으며, 이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7. 5. 동성애와 동성결혼

다넬스는 항상 동성애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으며, 동성 간의 파트너십에 대한 안정적인 관계를 위한 법적 지위에 찬성했다. 그는 2003년 4월 11일 당시 총리였던 가이 베르호프스타트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베르호프스타트가 이끌던 베르호프스타트 1차 내각은 이를 승인했다.[44] 그러나 그는 그러한 법적 지위를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에 항상 반대했다. 그는 약 10년 뒤 신문 인터뷰에서 이러한 견해를 다시 한번 밝혔다.[45]

[교회는] 동성애자들 사이에 일종의 '결혼'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일종의' 결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진정한 결혼이 아니므로, 사전에 다른 단어를 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합법적이고, 법이 합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교회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7. 6. 안락사

벨기에가 안락사 관련 법을 자유화하기 오래 전부터[46], 다넬스는 1994년 1월 31일 기자 회견에서 벨기에 주교들의 이 문제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47]

이 문제는 2008년 봄, 유명한 벨기에 작가 휴고 클라우스가 3월 19일 안락사를 선택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3일 후 다넬스는 부활절 전야 미사에서 클라우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설교했다. 이 설교는 클라우스의 선택에 대한 비판으로 널리 해석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48]

얼마 지나지 않은 2008년 4월 13일, 다넬스는 가톨릭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 기구(Katholieke Televisie- en Radio-Omroep)의 방송 "Het Braambos"에서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안락사 법 자유화 여부가 "스스로를 완전히 통제하는 사람들, 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문명과, 여전히 신과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를 위한 자리가 있는 문명 사이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를 "전형적인 진화의 잉여물이며, 르네상스 시대에 깨어나는 것을 기뻐했지만 지금은 거의 암적인 비율로 커져서 광란하는 의식의 암적인 성장"이라고 표현했다.

7. 7. 종교 간 대화

다넬스는 대주교가 된 초기부터 1920년대 메르시에 추기경이 시작한 "메헬렌"과 성공회 간의 좋은 관계를 이어 발전시켰다.[49]

마찬가지로 다넬스는 대주교가 된 초기부터 거의 매년 테제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는 1986년 10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테제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바티칸과 중재했다. 그는 로제 수사를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가톨릭 대학교는 1990년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로제 수사 사망 후에도 그는 테제와의 관계를 계속 발전시켰고, 2008년 12월 29일부터 2009년 1월 2일까지 브뤼셀에서 제31회 유럽 테제 모임을 주최했다.[50]

다넬스는 평화를 위한 종교인 세계회의의 회원이었으며, 2004년까지 이 회의에 참여했다. 2002년 여름부터 그는 또한 이 기구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유럽 종교 지도자 협의회에서 활동했으며, 21세기 첫 10년 동안 계속 관여했다.[51]

7. 8. 외교 활동

다넬스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내 카르멜회 수녀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에 참여했다. 이 문제는 1985년 베렌프리트 판 스트라텐 신부가 임시로 사용하던 구 극장 건물을 정식 수녀원으로 개조하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다넬스는 1989년 바티칸이 이 문제를 결정하고 수녀들이 이주하기로 약속할 때까지 협상에 관여했다.[52] (그러나 수녀들은 1993년까지 해당 장소에 머물렀으며, 아우슈비츠 십자가를 남겨두었다.)[53]

1990년부터 1999년까지 국제 가톨릭 평화 운동 단체인 ''팍스 크리스티''의 국제 회장을 역임했다.[54]

또한, 다넬스는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려 노력한 로랑 몽셍고 파시냐 주교(훗날 추기경)의 활동을 꾸준히 지지했다. 그는 벨기에, 바티칸, 킨샤사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1993년 2월 2일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몽셍고 주교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데 기여하고 직접 축사를 하기도 했다.[55]

다넬스는 중국과 가톨릭교회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오랫동안 노력했다. 1985년 11월, 루뱅 가톨릭 대학교의 초청으로 벨기에를 방문한 중국 공식 주교 대표단을 메헬렌의 자택으로 초대해 오찬을 함께했다. 이후 답방 초청이 있었으나, 중국 내 공식 가톨릭 교회와 지하 가톨릭 교회 간의 문제로 인해 방문을 연기해야 했다. 마침내 2005년 3월 중국 방문이 성사되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4월 2일)으로 인해 일정을 단축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4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회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려 한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다넬스에게 이러한 노력을 계속할 것을 격려했으며, 다넬스는 2008년 3월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사회 과학원에서 연설하고 여러 가톨릭 농촌 공동체를 방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56]

7. 9. 벨기에 교회 내 아동 성추행 문제

뒤트루 사건 이후 당국이 학대 피해자 신고를 독려하면서 교회 내 성 학대 문제가 처음으로 공론화되었다.[57]

아르튀르 뤼이스테르만 겐트 주교가 벨기에 교회 내 성적 학대 피해자를 위한 연락 창구를 처음으로 공식 조직했으며,[58] 이는 1999년 11월 4일 다넬스가 의장으로 있던 벨기에 주교회의가 설립한 '사목 관계에서의 성적 학대 관련 불만 사항 위원회'의 모델이 되었다.

1998년 초, 메헬렌-브뤼셀 대교구 소속 사제가 1968년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사실이 알려졌다. 다넬스는 벨기에 추기경으로서는 처음으로 세속 법정에 자진 출두하여 증언했으며, 학대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초기에 벨기에 가톨릭교회가 피해자 보호에 실패한 민사적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고 12500EUR 상당의 벌금을 부과했으나, 항소심에서 이 판결은 파기되고 해당 사제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59]

1999년 12월에는 필리프 국왕 부부의 결혼식 합창 지휘자로 알려진 로베르 보르르망 사제에 대한 소송이 시작되자, 다넬스는 그의 사목 임무를 정지시키고 정부 급여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60] 보르르망은 초기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혐의가 거짓으로 밝혀져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61]

가장 큰 논란은 1973년부터 1986년까지 조카를 성적으로 학대한 로제 방헬루베 브뤼헤 주교 사건에서 불거졌다. 다넬스와 갈등 관계에 있던 릭 데빌레 신부는 2010년 4월 23일 사건이 공개된 후, 1990년대 중반 이미 다넬스에게 방헬루베 문제를 경고했다고 주장했다.[63] 다넬스는 2010년에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밝혔다.[64] 그러나 다넬스는 사건이 공론화되기 직전인 2010년 4월 초, 방헬루베 본인으로부터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사실을 직접 들어 이미 그의 범죄를 인지하고 있었다.[64]

사건 공개 전 몇 주간 다넬스의 대처는 국내외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4월 8일, 다넬스는 방헬루베의 요청으로 피해자 및 그 가족과의 만남에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다넬스는 피해자에게 방헬루베가 은퇴할 때까지 공개적인 문제 제기를 미뤄달라고 조언했다.[65] 다넬스 측 대변인은 이 만남에 대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으며, 침묵을 지키라는 제안은 "즉흥적인 발상"이었다고 해명했다.[66] 다넬스는 이 대화 내용을 다른 벨기에 주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후 또 다른 만남에서는 방헬루베가 다넬스가 보는 앞에서 피해자에게 사과했으나 거부당했다.

4월 19일 밤부터 20일 사이, 모든 벨기에 주교들에게 방헬루베의 비위를 고발하는 이메일이 발송되었다. 이는 4월 22일 방헬루베의 사임과 4월 23일 교황청의 즉각적인 사임 수리로 이어졌으며, 다넬스의 후임자인 앙드레-뮤티엔 레오나르 대주교가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발표했다. 방헬루베는 4월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공개 사과했다.[67]

방헬루베의 사임 이후 몇 주간, 아동 정신과 의사 피터 아드리아엔센스가 위원장을 맡아 '아드리아엔센스 위원회'로 불리게 된 '사목 관계에서의 성적 학대 관련 불만 위원회'에는 475건 이상의 성적 학대 관련 신고가 접수되었다. 6월 24일, 검찰은 '켈크 작전'(Operatie Kelk|오페라치 켈크nl, "성배 작전")을 통해 대주교 관저, 다넬스의 개인 아파트, 아드리아엔센스 위원회 사무실, 성 룸볼드 대성당 (메르시에 추기경과 쇠넨스 추기경의 무덤까지 파헤쳐짐) 등을 압수수색하여 공소시효가 남은 성적 학대 사건 관련 문서를 찾으려 했다.[68] 7월 6일, 다넬스는 연방 사법 경찰에 의해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았다.[69] 이 압수수색은 이후 불법으로 판결되어 압수된 모든 문서는 반환되었다.[70] 2010년 8월 28일, ''데 스탄다르트''와 ''헤트 니우우스블라트''가 다넬스와 피해자 가족 간의 만남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그의 평판은 더욱 손상되었다. 녹취록은 피해자가 다넬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으며 그의 태도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었다.[71]

2010년 12월 21일, 다넬스는 성적 학대 문제를 조사하는 국회 위원회에 출석하여, 성적 학대를 은폐하거나 부인하거나 용인하는 정책은 결코 없었으며,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교회가 이에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72]

그러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다넬스는 방헬루베 사건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광범위한 비판에 직면했다. 대중은 그가 더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하기를 기대했으나, 방헬루베의 자백을 듣고도 즉각적인 사임을 설득하거나 관련 위원회 및 후임자와 문제를 공유하지 않는 등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8. 은퇴와 선종

2008년 6월 4일, 다넬스는 의무 은퇴 연령에 도달했다. 그의 후임자를 결정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교황 대사 카를-요제프 라우버가 로마로 보낸 두 차례의 후보 명단('테르나')이 모두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2010년 1월 18일, 로마는 자체 후보인 앙드레-뮤티앙 레오나르를 메헬렌-브뤼셀 대교구장으로 임명하여 다넬스를 교체했다.

다넬스는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그는 콘클라베 전 추기경들의 토론에 대해 2005년보다 훨씬 솔직했으며, 동료 의식의 필요성이 주요 주제였기에 "추기경으로서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토론"이었다고 평가했다.[78] [79] 콘클라베에서는 다넬스가 성 갈렌 그룹의 일원으로서 지지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 프란치스코로 선출되었다.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베무스 파팜 선포 후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발코니에 함께 나오도록 다넬스를 초대했다.[24] 또한, 교황 즉위식에서는 원로 사제인 파울루 에바리스투 아르스 추기경이 불참함에 따라 다넬스가 새 교황을 위한 공식 기도를 낭독했다.[80] 그는 이 콘클라베의 결과를 een persoonlijke verrijzeniservaring|개인적인 부활 경험nl이라고 묘사했다.[81]

다넬스는 2019년 3월 14일 메헬렌에서 선종했다.[82][83] 그의 장례 미사는 2019년 3월 22일 메헬렌의 성 룸볼트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필리프 국왕과 마틸드 왕비를 비롯한 왕족과 여러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그는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84][85]

9. 수상 및 영예


  • 2002년 9월 2일, 틸뷔르흐 가톨릭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86]
  • 2003년 3월 3일,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87]
  • 2003년 12월 20일, 벨기에 방송사 CAnvas, 신문 ''De STAndaard'', 라디오 1 방송국이 공동으로 수여하는 "Castar" 상을 받았다. 이 상은 문화, 사회, 정치, 사회경제 분야에서 긍정적이고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한 인물에게 수여된다.[88]
  • 2005년,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들 조사에서 90위에 선정되었다.
  • 그의 75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루벤 가톨릭 대학교 신학부는 그를 기리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89]
  • 2010년 6월 18일, 메헬렌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90]

10. 기타

그의 모국어는 네덜란드어(표준 네덜란드어와는 차이가 있는 카네겜 방언 포함)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라틴어도 사용할 수 있었다.[3]

다넬스는 일생 동안 두 차례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었다. 1971년 봄, 과도한 업무와 눈 수술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울증을 앓았다. 당시 주교의 강권으로 고향인 카네겜에서 오랜 기간 요양한 후에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92] 이후 1996년 3월 4일에는 정기 건강 검진 과정에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심장 주변 혈관 협착증이 발견되어, 당일 바로 우회 수술을 받았다.[93]

마리아 신심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 5월에는 심장 수술에서 회복 중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한스윅 행렬에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하기도 했다.[94]

모든 형태의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며, 그의 예술적 취향은 폭넓었다. 특히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세 명의 B"라고 불리는 바흐, 베토벤과 더불어 현대 음악 그룹인 비틀즈를 높이 평가했다.[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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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간행물 A Conversation with Godfried Cardinal Danneels https://www.imagejou[...]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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