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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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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화주의는 1880년대 일본 메이지 정부가 구미 열강에 근대화를 인정받기 위해 문화, 제도, 풍속을 유럽식으로 바꾸려 했던 정책과 관련된 사상 및 움직임을 의미한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를 중심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록메이칸 건설, 관청 집중 계획, 문화 개량 운동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 탄압, 마츠카타 재정의 디플레이션 속에서 '귀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1887년 가장무도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면서 쇠퇴했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 역시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이는 근대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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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주의
개요
정의'오우카슈기(欧化主義)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문명개화를 모토로 유럽의 사상, 학문, 문화,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방하려는 사상적 경향을 말함.'
배경'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봉건적인 사회 체제를 벗어나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서양 문명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 이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오우카슈기는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핵심적인 사상적 흐름으로 작용함.'
특징'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문화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음.'
'서양의 사상, 학문, 문화, 기술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함.'
'일본 사회의 근대화와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전통 문화의 경시와 서양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라는 비판도 존재함.'
역사적 배경
메이지 유신'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와 서양 문명 수용의 중요한 계기가 됨.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목표로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개혁을 추진함.'
이와쿠라 사절단'1871년 ~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를 단장으로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양 각국을 순방하며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옴. 이들의 보고는 일본 사회에 서양 문명에 대한 동경과 모방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침.'
문명개화론'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사상가들은 문명개화론을 주창하며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역설함. 이들의 사상은 오우카슈기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함.'
주요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계몽 사상가로, 문명개화론을 주창하며 서양 문명의 수용을 강조함. 저서로는 학문의 권장 등이 있음.'
모리 아리노리'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서양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근대 교육 발전에 기여함.'
니시 아마네'철학자로, 서양 철학을 일본에 소개하고 계몽 사상 보급에 힘씀.'
영향
정치'입헌군주제 도입, 서양식 법률 제정 등 정치 시스템의 근대화에 기여함.'
경제'산업 혁명 추진, 서양식 기업 경영 방식 도입 등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함.'
사회'서양식 교육 제도 도입, 서양식 의복 및 생활 양식 보급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옴.'
문화'서양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서양 문화가 유입되고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침.'
비판
전통 문화 경시'오우카슈기는 서양 문명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인해 일본의 전통 문화가 경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음.'
문화적 종속'서양 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일본 문화의 주체성을 훼손하고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됨.'
사회적 불평등 심화'서양 문명의 수용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소외 계층이 발생했다는 비판도 존재함.'
같이 보기
관련 개념문명개화
화혼양재
탈아입구
반대 개념구화주의

2. 일본의 구화주의

일본에서는 1880년대에 메이지 정부가 문화, 제도, 풍속, 습관을 유럽풍으로 바꾸어 구미 제국에 일본이 근대화했음을 인정받으려 했던 문명개화 정책(구미화 정책)과 이와 관련하여 활발하게 일어난 사상·풍속의 움직임을 말한다.[1]

자유민권운동 탄압과 마츠카타 재정의 심각한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이러한 구화 움직임은 '귀족주의적 구화' 또는 '위로부터의 구화'로 간주되어 좌우 반체제파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1] 자유민권파는 록메이칸을 민중에게서 거둔 세금을 낭비하는 재정난의 온상이라고 비난했다.[1]

1887년 4월 4일 히사노미야 내친왕(메이지 천황과 후궁 소노 사치코의 딸)이 사망했음에도, 같은 달 4월 20일 수상관저에서 가장무도회를 개최하고 26일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저택에서 천람가부키가 열린 것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1] 가장무도회에서 정부 고관들의 부녀자 폭행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1] 그러나 이는 영국 공사의 요청으로 회장을 빌려준 것뿐이었고, 폭행 소문은 근거 없는 중상이었지만, 보수파와 민권파는 이토 내각을 공격하기 위한 재료로 활용했다.[1] 이 때의 이토 히로부미 및 이토 내각의 위기 상황을 '메이지 20년의 위기'라고도 한다.[1]

이러한 사태에 이토 히로부미는 다니 다테키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경질하고 오쿠마 시게노부구로다 기요타카를 입각시켜 사태 수습을 꾀했다.[1]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어, 겉모습만 서구화하는 구화 정책에 의존하지 않아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지위는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1]

2. 1. 메이지 정부의 문명개화 정책

메이지 정부는 안세이 5개국 조약 등 구미 열강과 체결했던 불평등 조약의 조약 개정을 실현하기 위해 문명개화 정책(구미화 정책)을 추진했다.[1] 이는 일본근대화되었음을 구미 제국에 인정받기 위한 정책이었다.[1]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를 중심으로, 헌법 등의 법전 편찬과 더불어 일본의 문화를 유럽풍으로 바꾸어 국제법의 적용 대상으로서 간주하는 문명국의 일원임을 인정받으려 했다.[1]

1883년에 완성된 록메이칸은 문명개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였다.[1] 이노우에 가오루는 록메이칸에서 화족, 정부 고관, 외교단을 모아 야회 등의 행사를 개최했다.[1] 히비야에는 프로이센풍의 대규모 관청가를 건설하는 구상도 세워졌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관청 집중 계획).[1]

록메이칸에서의 무도회


문화면에서도 "개량"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1] 1883년에는 야타베 료키치, 도야마 마사카즈가 "로마자회"를, 시부사와 에이이치, 모리 아리노리가 "연극 개량회"를 결성했다.[1] 또한 구미를 모방하여 학회를 창설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졌으며, 야마다 미묘 등은 언문일치 운동을 전개했다.[1]

2. 2. 구화주의에 대한 반발

자유민권운동 탄압과 마츠카타 재정에 의한 심각한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구화주의는 '귀족주의적', '위로부터의 구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우사의 도쿠토미 소호 등은 '아래로부터의 구화'를 주장하며 '귀족적 구화주의'를 비판했다.[1] 정교사의 미야케 세쓰레이를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자들은 조약 개정 교섭에 반대하며 정부를 공격했다.[1]

1887년 4월 20일 수상관저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서 정부 고관들에 의한 부녀자 폭행 소문이 퍼지면서 이토 내각이 위기를 겪었다. 이를 '메이지 20년의 위기'라고도 한다.[1]

이후 구로다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유임된 오쿠마 시게노부현양사의 쿠루시마 츠네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고 조약 개정에 실패하면서 구화주의는 쇠퇴하고, 대외경파의 지지를 받은 국수주의가 대두되었다.[1]
미야케 세쓰레이

3. 러시아의 구화주의

표트르 1세러시아 황제로서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다.[1] 이 정책은 유럽화보다는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다.[1] 그러나 표트르 1세의 정책은 승려 등을 제외하고 턱수염을 유럽식으로 다듬게 하거나 프랑스 또는 독일풍 복장을 강요하는 등 극단적인 면도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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