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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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비야는 일본 도쿄의 지명으로, 과거 히비야 만이었던 지역을 매립하여 조성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무가 저택이 밀집한 지역이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히비야 공원과 로쿠메이칸, 제국 호텔 등이 건설되면서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는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닛세이 극장 등 극장과 영화관, 히비야 공원,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와 같은 주요 시설이 위치해 있으며,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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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원
이 지역 외곽은 바다를 매립한 곳이며, 히비야(Hibiya)의 "히비"는 대나무로 만든 김 양식 시설에서 유래되었고, 그 이름 또한 "히비"이다. 이는 이 단어를 사실상 일본 고유어를 음성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아테지로 만든다.[1]
히비야는 원래 히비야 만이라고 불리는 바다의 만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을 거점으로 삼은 후, 이 만을 매립하여 무가 저택이 늘어선 거리로 변모시켰다.[1]
3. 역사
메이지 유신 이후, 히비야는 도쿄의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1883년에는 로쿠메이칸이, 1884년에는 사교 클럽인 도쿄 클럽이 건설되어,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거리가 되었다. 1903년에는 히비야 공원이 완성되었고, 제국 호텔(도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1905년 9월 5일, 히비야 공원은 러일 전쟁을 종결한 포츠머스 조약의 조건에 반대하는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2] 193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전기 신호등이 히비야 교차로에 설치되는 등, 히비야는 근대화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90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제국 호텔이 건설된 후 다수의 호텔 외에도 대기업의 본사 건물이 이어져 일본을 대표하는 비즈니스 거리가 되었다. 2018년에는 대규모 복합 상업 빌딩인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가 탄생했다.
현재 한큐 한신 도호 그룹(구:한큐 도호 그룹)의 핵심 기업인 영화·연극 회사 도호의 창업지이며, 현재도 도호 히비야 빌딩이 본사 소재지이다. 이 외에도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TOHO 시네마즈 본사, TOHO 시네마즈 히비야(도쿄 미드타운 히비야), 제국 극장 등이 위치하여 도호의 본거지이다. 닛세이 극장도 이곳에 있으며, 과거에는 일본 극장, 히비야 영화 극장, 유라쿠자 등도 존재했다. 이처럼 히비야 일대는 도호의 중요 시설과 극장이 다수 밀집된 영화·연극의 거리이기도 하다.
히비야 공원 안에는 시정회관, 히비야 공회당, 히비야 야외 음악당, 히비야 도서 문화관과 같은 문화 시설이 있으며, 여러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다. 2003년부터 매년 10월 히비야 공원 가드닝 쇼가 개최되고 있다.


3. 1. 중세
중세 에도성 (현재 오타 도칸 등이 건설)의 동쪽에는 만(灣)이 있었고, '''히비야 만(灣)'''이라고 불렸다. 히비야 만의 북쪽 끝은 옛 에도성 오테문 부근이었고, 만의 서쪽 기슭은 현재의 가스미가세키, 만의 동쪽 기슭은 현재의 JR 유라쿠초역 부근이었다.[4] 이 만은 얕은 여울이 되어 갈라진 틈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히비야"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4]
중세 시대에 이 만의 서쪽 기슭인 현재의 가스미가세키에서 도라노몬 부근에 집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4] '''히비야 촌'''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1526년(다이에이 6년)에 오다와라 호조 씨는 우시고메 助五郎에게 "'''히비야 촌'''의 진부, 동 소옥부"의 면제를 허가했고, 전국 시대에는 우시고메 씨가 히비야의 영주가 되었다.[4]
3. 2. 에도 시대
1590년(덴쇼 1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에 들어왔을 당시, 에도성은 동쪽이 바다와 접해 있었고 배후에는 황무지인 무사시노 대지가 있어 요새로서는 적합했지만, 무가 저택이나 백성을 수용할 평지가 부족했다.[5] 이에야스는 주거용 토지를 확보하는 "도시 건설"과 식량 확보를 위한 "항로 건설"을 해야 했다.[5] 1592년(분로쿠 원년), 에도성 축성 공사에 따른 해자 굴착 흙을 사용해 에도성 동부에 펼쳐진 히비야 만의 북부(현재의 마루노우치나 야에스)를 매립했다.[5] 1603년(게이초 8년)부터는 에도성 북부의 대지를 깎아낸 토사 등을 사용해 히비야 만의 남부 일대(현재의 니혼바시, 교바시, 신바시, 쓰키지)를 매립했다.[5] 이 매립·조성 공사로 에도성 주변의 거리 풍경이 점차 정비되고, 막부의 기반도 점차 굳건해지게 되었다.[5]
이렇게 한적한 만, 얕은 여울, 어촌이었던 곳은 에도 시대에 정연한 무가 저택이 늘어선 거리 풍경으로 변모해 갔다. 히비야는 에도 성곽의 안쪽이 되었고, 성곽 남쪽을 방비하는 역할을 하는 소토사쿠라다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그 대부분이 대규모 번의 저택 등 무가 저택에 의해 점유되었다.
3. 3. 막부 말기 ~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0년(덴쇼 18년) 에도성을 거점으로 삼은 이후 히비야 만의 매립이 진행되어, 무가 저택이 늘어선 거리로 변모해 갔다.[5] 히비야는 에도 성곽 안쪽에 위치하여 성곽 남쪽을 방비하는 역할을 하는 소토사쿠라다의 일부가 되었고, 대부분이 대규모 번의 저택 등 무가 저택으로 채워졌다.
1868년(게이오 4년)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는 마치부교쇼를 폐지하고 시정 재판소를 설치했다가,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는 조서가 내려지자 시정 재판소를 폐지하고 도쿄부를 설치했다.[6]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하기 번 모리 씨 등의 다이묘 카미야시키가 있던 곳에 "육군 조련소"가 설치되었고, 1885년(메이지 18년)에 "히비야 연병장"으로 개칭되었다.[6] 이 무렵 주변 개발이 진행되면서, 1886년(메이지 19년)에 연병장은 아오야마로 이전했다.[6] 1888년(메이지 21년) 연병장 부지 및 주변 도로 정비를 통해 공원을 설치하는 것이 제안되었고, 이듬해 1889년(메이지 22년) "도쿄 시구 개정 설계"가 고시되어 히비야 공원 정비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히비야 공원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 정비되었다.
1883년에 '''로쿠메이칸'''이 건설되었고, 1884년에 사교 클럽인 '''도쿄 클럽'''도 창설되어,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거리, 영어가 사용되는 외교의 거리, 상류 계급의 사교의 거리로 발전했다.[7] 1903년에는 히비야 공원이 완성되었고, 그 한 구석에 당시로서는 드문 서양식 레스토랑인 히비야 마쓰모토 로가 개업했다. 하이카라를 좋아하는 모보와 모가 사이에서는 "마쓰모토 로에서 카레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 크게 유행했고, 많은 유명 인사가 단골이 되어 수많은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7]
도심이면서 트인 곳인 히비야 공원은 집회를 열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었고, 1905년(메이지 38년)에는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국민 집회가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을 때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1908년(메이지 38년)에는 러일 전쟁 승전 축하회가 열렸다.[8]
1911년에는 제국 극장이 개업했고, 192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제국 호텔도 건설되었다(1923년 준공).[7]
1932년에 고바야시 이치조가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을 설립했다. 1934년에 히비야 영화관을 설립했고, 1935년에 유라쿠자를 건설했다.[9][10]
1930년에는 히비야 거리와 하루미 거리가 교차하는 히비야 교차점에 "일본 최초의 전기식 신호등"이 설치되었다.[6]
1963년에는 아사리 케이타나 이시하라 신타로 등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일본생명보험 사장 히로세 겐의 노력으로 닛세이 극장이 완성되었고, 극단 사계가 공연을 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이시하라 신타로도 연극 작품을 쓰고 극단을 이끌고 당 극장에서 상연하게 되면서, 히비야는 예술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되었다.
3. 4. 근현대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도쿠가와 바쿠후는 에도성 밖에서 일했으며, 에도성 주변 지역은 개발되고 매립되었다. 이후 어촌은 많은 다이묘가 거주하는 도시 지역이 되었다.[1]
1905년 9월 5일, 히비야 공원은 러일 전쟁 (1904−1905)을 종결한 포츠머스 조약의 조건에 의해 촉발되어 도시 전체로 확산된 히비야 폭동의 최초 발생지였다.[2]
메이지 유신 이후 히비야는 도쿄의 현대적인 도시가 되었고, 제국 호텔(도쿄 최초의 서양식 호텔), 로쿠메이칸, 도쿄 시청, 도쿄 클럽을 포함한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전기 신호등이 히비야 교차로에 나타났다. 한때 유행했던 이 지역은 비즈니스 거리로 변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을 거점으로 삼은 이후 히비야 만의 매립이 진행되어, 무가 저택이 늘어선 거리로 변모해 갔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도쿄부청이나 로쿠메이칸, 도쿄 클럽이 들어서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거리이자 상류 계급의 사교장으로 발전했으며, 190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제국 호텔이 건설된 후 다수의 호텔 외에도 대기업의 본사 건물이 이어져 일본을 대표하는 비즈니스 거리가 되었다. 제국 호텔은 현재도 호텔계의 3대 명가 중 하나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868년 (게이오 4년) 5월, 신정부는 마치부교쇼를 폐지하고 시정 재판소를 설치하여 마치부교쇼의 요리키·도신에게 종전대로 직무를 계속하도록 명령했고, 7월에 에도를 도쿄로 하는 조서가 발해지자 시정 재판소를 폐지하고 도쿄부를 설치했다. 부청사에는 사치바시 내(현재의 우치사이와이초)에 있던 옛 야마토 고리야마 번 야나기사와가의 카미야시키(현재의 지요다구 우치사이와이초 1-2)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시정 재판소 즉 마치부교쇼의 건물에서 업무를 계속했으며, 9월에 야나기사와가의 카미야시키에서 업무를 시작했다.[6]
1871년 (메이지 4년)에 하기 번 모리 씨 등 다이묘 카미야시키가 있던 곳에 "육군 조련소"가 설치되었고, 1885년(메이지 18년)에 "히비야 연병장"으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 주변 개발이 진행되면서, 그 연병장은 1886년(메이지 19년)에 아오야마로 이전했고, 1888년(메이지 21년) 연병장 부지 및 주변 도로를 정비해 공원을 설치하는 것이 제안되어 심의 결과, 이듬해 1889년 (메이지 22년) "도쿄 시구 개정 설계"가 고시되었고, 주변 도로(현 "히비야 거리" 등) 정비와 함께 히비야 공원 정비가 정식으로 결정되었으며, 히비야 공원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 정비되어 갔다.
1883년에 '''로쿠메이칸'''이 건설되었고, 1884년에 사교 클럽인 '''도쿄 클럽'''도 창설,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거리, 영어가 사용되는 외교의 거리, 상류 계급의 사교의 거리로 발전했다. 1903년에 히비야 공원이 완성되었고, 그 한 구석에 당시로서는 드문 서양식 레스토랑인 히비야 마쓰모토 로가 개업해, 세련된 가게로 평판을 얻어 하이카라를 좋아하는 모보와 모가 사이에서는 "마쓰모토 로에서 카레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 크게 유행했고, 많은 유명 인사가 단골이 되어 수많은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7]
도심이면서 트인 곳인 히비야 공원은 집회를 열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었고, 1905년(메이지 38년)에는,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국민 집회가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을 때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1908년 (메이지 38년)에는 러일 전쟁 승전 축하회가 열려 만세를 연호하는 소리가 공원 안팎으로 울려 퍼졌다.[8] 히비야는 도쿄부청이 설치되어 도쿄부정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국정의 중심지인 가스미가세키나 나가타초와도 인접해 있어, 원래 정치와 밀접한 곳이었지만, 히비야 공원에서 정치적인 집회가 열리면서 더욱 정치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 되었다.
1911년에는 제국 극장이 개업했다.
192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제국 호텔도 건설되었고(1923년 준공, 그 건물의 현관 부분은 옛 제국 호텔 "라이트 관"으로 아이치현의 박물관 메이지 촌으로 이전), 현재도 "호텔계의 어삼가"의 한 축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32년에 한신 급행 전철 사장 고바야시 이치조가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을 설립. 1934년에 유라쿠초 1초메에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히비야 영화관을 설립했고, 1935년에 유라쿠자를 건설했다.[9][10]
1930년에는 히비야 거리와 하루미 거리가 교차하는 히비야 교차점에 "일본 최초의 전기식 신호등"이 설치되었고, 히비야의 간선 도로에는 도덴의 노선망이 촘촘히 깔리는 등, 교통면에서도 일찍부터 발달한 거리였다. 도로 교통량이 더욱 증대된 것과 1964년에 히비야선이 다니는 지하철 히비야역이 개업하고 1971년에 동역에 지요다선이 환승하게 된 것을 이유로 도덴은 1971년에 자취를 감췄다. 이듬해 72년에는 동역에 도영 지하철 6호선(후에 미타선으로 개칭)이 환승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접근성은 더욱 좋아졌다.
1963년에는 아사리 케이타나 이시하라 신타로 등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일본생명보험 사장 히로세 겐의 노력으로 유라쿠초 1초메에 닛세이 극장이 완성되었고, 아직 상설 극장을 갖지 못했던 극단 사계가 공연을 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아쿠타가와 상 수상 후 아직 작품 수가 적었던 이시하라 신타로도 연극 작품을 쓰고 극단을 이끌고 당 극장에서 상연하게 되면서, 히비야는 예술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되었다.
4. 주요 시설
히비야는 도쿄도 지요다구에 있는 지역으로, 여러 주요 시설들이 있다.
제국 호텔은 호텔계의 3대 명가 중 하나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18년에는 대규모 복합 상업 빌딩인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가 문을 열었다.
4. 1. 히비야 공원
도쿄도 지요다구 남동부, 구 고지마치 구역의 평지에 있다. 16ha에 달하는 히비야 공원은 넓은 녹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황거와도 가깝다.[3] 도심부에 위치해 있어 간선도로와 철도 노선이 다수 지나가며, 지하철 히비야역에는 도쿄 메트로 히비야선, 도쿄 메트로 지요다선, 도에이 미타선이 운행되고 있다.[3]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을 거점으로 삼은 이후 히비야 만의 매립이 진행되어, 무가 저택이 늘어선 거리로 변모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도쿄부청이나 로쿠메이칸, 도쿄 클럽이 들어서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거리이자 상류 계급의 사교장으로 발전했으며, 1900년대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제국 호텔이 건설된 후 다수의 호텔 외에도 대기업의 본사 건물이 이어져 일본을 대표하는 비즈니스 거리가 되었다.
도심의 대규모 공원인 히비야 공원 안에는 시정회관 및 히비야 공회당, 야외 음악의 성지인 대·소의 히비야 야외 음악당 (야온), 히비야 도서 문화관 (구: 도쿄도립 히비야 도서관)과 같은 문화 시설이 있으며, 이벤트도 다수 개최되고 있다. 2003년부터 매년 10월 히비야 공원 가드닝 쇼가 개최되고 있다.
히비야 공원은 가스미가세키와 나가타초에 가까워 데모 활동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히비야 방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1905년 9월 5일, 히비야 공원은 러일 전쟁 (1904−1905)을 종결한 포츠머스 조약의 조건에 의해 촉발되어 도시 전체로 확산된 히비야 폭동의 최초 발생지였다.[2]
4. 2. 극장 및 영화관
현재 한큐 한신 도호 그룹(구 한큐 도호 그룹)의 핵심 기업이자 영화·연극 회사인 도호의 창업지이며, 현재도 도호 히비야 빌딩이 본사 소재지이다. 이 외에도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도쿄 다카라즈카 빌딩)과 TOHO 시네마즈 본사, TOHO 시네마즈의 플래그십 스토어인 TOHO 시네마즈 히비야(도쿄 미드타운 히비야)가 있다. 인근에는 제국 극장 (테게키) 등이 위치하여 도호의 본거지이다. 도호 계열 외의 닛세이 극장도 이곳에 있으며, 과거에는 일본 극장 (니치게키)과 히비야 영화 극장, 유라쿠자 등도 존재했다. 이처럼 히비야 일대는 도호의 중요 시설과 극장이 다수 밀집된 영화·연극의 거리이기도 하다.4. 3. 기타 시설
도쿄도 지요다구 남동부에 있는 히비야 공원 안에는 시정회관, 히비야 공회당, 야외 음악의 성지인 대·소 히비야 야외 음악당 (야온), 히비야 도서 문화관 (구 도쿄도립 히비야 도서관)과 같은 문화 시설이 있으며, 여러 이벤트도 개최되고 있다. 2003년부터 매년 10월 히비야 공원 가드닝 쇼가 개최되고 있다.[3]5. 교통
도쿄도 지요다구 남동부, 구 고지마치 구역의 평지에 있으며, 도심부에 위치해 있어 간선도로와 철도 노선이 다수 지나간다. 히비야역에는 도쿄 메트로 히비야선, 도쿄 메트로 지요다선, 도에이 미타선이 운행되고 있다.[3]
참조
[1]
서적
Tokyo Urbanism: From Hinterland to Kaiwai
World Scientific
2024
[2]
서적
A modern history of Japan : from Tokugawa times to the present
OUP
[3]
웹사이트
乗換案内、日比谷駅
https://www.jorudan.[...]
[4]
문서
日本歴史地名大系 「日比谷」
[5]
논문
遠藤毅「東京沿海部における埋め立ての歴史」地学雑誌 Journal of Geography 113(4)
https://www.jstage.j[...]
[6]
웹사이트
東京都公文書館「資料解説~東京府庁の始まり」
https://www.soumu.me[...]
[7]
웹사이트
松本楼
https://matsumotoro.[...]
[8]
웹사이트
日露戦争の戦勝祝賀会
https://jaa2100.org/[...]
ジャパンアーカイブズ
[9]
웹사이트
東宝、沿革
https://www.toho.co.[...]
[10]
웹사이트
ホームメイト・リサーチ「東宝」
https://www.bigco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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