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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돌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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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돌격대는 1944년 동부 전선 강화를 위해 나치당의 지휘 아래 조직된 독일의 민병대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마르틴 보어만이 600만 명을 모집하려 했으나 목표에 미치지 못했고, 하인리히 힘러는 전국 조직으로 만들고 군사 훈련과 장비를 담당했다. 조직은 나치당의 구조를 따랐으며, 군복무 부적합자와 징집 면제자들로 채워졌다. 국민돌격대는 기본적인 군사 훈련과 장비를 갖추고, 베를린 전투 등에서 실전에 투입되었지만, 훈련 부족과 장비 열악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다. 또한 잔혹 행위에 가담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나치 지도부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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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돌격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폴크스슈투름 행진, 행진하는 대부분의 남자는 판처파우스트 발사기를 들고 있으며, 맨 아래 남자는 MG34를 들고 있다, 1944년 11월
폴크스슈투름 행진, 대부분의 남성이 판처파우스트 발사기를 들고 있으며, 하단의 남성은 MG34를 들고 있다 (1944년 11월)
명칭폴크스슈투름 (Volkssturm)
로마자 표기Polkeusyusyuteureum
한자 표기국민돌격대 (國民突擊隊)
IPA폴크스슈투름[ˈfɔlks.ʃtʊɐ̯m]
성격민병대
소속 국가나치 독일
지휘 체계나치당
군사 훈련 및 장비 담당하인리히 힘러
행정 및 사상 교육 담당마르틴 보어만
창설일1944년 9월 25일
해산일1945년 5월 8일
대상16세에서 60세 사이의 독일 국민
주요 참전베를린 전투
휘장
폴크스슈투름 완장
대원용 완장

2. 기원과 조직

1944년 9월 당시 포스터


국민돌격대는 1944년 독일 국방군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병력이 부족해지자,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정받았던 남자들까지 징집 대상이 되었다. 문서상으로는 1925년부터 존재했지만, 마르틴 보어만이 600만 명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야 실제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목표했던 600만 명에는 미치지 못했다.

''국민돌격대''(Volkssturm) 창설에 관한 법령 공포, 1944년 10월 20일, 첫 페이지
두 번째 페이지


1944년 10월 21일, 친위대 선전대 사진; 선 맨 왼쪽과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만 제복을 입은 구성원인 것으로 보이며, 맨 오른쪽은 질서경찰(Ordnungspolizei) 장교이다.


이 사진은 구성원 간의 나이 차이를 보여주며, 왼쪽에는 50세 이상의 남성이, 오른쪽에는 15~16세 소년이 있다.


요제프 괴벨스 등은 국민돌격대를 저항 의지의 분출로 묘사했다.[5][6] 역사학자 다니엘 블라트만은 국민돌격대가 사회적 지위나 연령 차이를 넘어 인종을 기반으로 모든 사람을 통합하는 ''국민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화신"으로 묘사되었다고 썼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복과 무기 부족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1] 냉소적인 노인들은 "우리 늙은 원숭이는 총통의 최신 무기다"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히틀러와 보어만은 병력 수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사기에도 신경을 썼다. 초기 계획 단계에서 사기가 부족하면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를 위해 나치 지역당이 국민돌격대를 직접 지휘했고, 하인리히 힘러는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국민돌격대는 당의 관리를 받았지만, 군사 행동 시에는 국방군의 지휘를 받았다.

나치 지역당 지도자인 관구장은 지휘, 입대자 관리, 지역 부대 조직을 책임졌다. 가장 큰 부대 단위는 나치 지역당을 구성하는 작은 구역(Kreis) 단위에 대응했던 것으로 보이며, 기본 부대 단위는 642명으로 조직된 대대였다.

2. 1. 조직 구조

국민돌격대의 조직은 나치당의 지역 조직 구조를 따랐다. 각 독일의 행정 구역(Districts of Germany)의 군(Kreis, 미국의 카운티와 유사)마다 하나의 대대(Bataillon)가 편성되었다. 대대는 642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기본 부대 단위였다.[9]

  • 지역 조직:

단위구성설명
대대 (Bataillon)각 군(Kreis)마다 1개 대대당시 독일에는 920개의 Kreis가 있었음
중대 (Company)각 오르츠그루페(Ortsgruppe)마다 1개 중대Ortsgruppe는 미국의 선거구와 비슷
소대 (Platoon)각 첼레(Zelle)마다 1개 소대Zelle는 미국의 Precinct와 비슷
분대 (Squad)각 블록(Block)마다 1개 분대



부대는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 장애인, 노인 등 이전에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던 사람들로 주로 구성되었다.[9] 각 관구장과 크라이슬라이터는 국민돌격대 참모장을 두었다.

국민돌격대의 세부적인 편제는 다음과 같다.

국민돌격대의 계급장. 왼쪽부터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대대중대소대분대



다음은 각 대관구별 국민돌격대 대대 목록이다.

대관구대대 및 중대
바덴제1대대: 1~405개 중대
바이로이트제2대대: 1~416개 중대
베를린제3대대: 1~990개 중대
단치히-동프로이센제4대대: 1~500개 중대
뒤셀도르프제5대대: 1~73개 중대
에센제6대대: 1~413개 중대
프랑켄제7대대: 1~181개 중대
할레-메르제부르크제8대대: 1~507개 중대
함부르크제9대대: 1~190개 중대
헤센-나사우제10대대: 1~54개 중대
케른텐제11대대: 1~701개 중대
쾰른-아헨제12대대: 1~246개 중대
쿨헤센제13대대: 1~602개 중대
마그데부르크-안할트제14대대: 1~?개 중대
마인 프랑켄제15대대: 1~159개 중대
마르크-브란덴부르크제16대대: 1~558개 중대
메클렌부르크제17대대: 1~58개 중대
모젤란트제18대대: 1~312개 중대
뮌헨-오버바이에른제19대대: 1~363개 중대
니더도나우제20대대: 1~377개 중대
니더슐레지엔제21대대: 1~651개 중대
오버도나우제22대대: 1~173개 중대
오버슐레지엔제23대대: 1~482개 중대
동 하노버제24대대: 1~177개 중대
동프로이센제25대대: 1~985개 중대
포메른제26대대: 1~269개 중대
작센제27대대: 1~715개 중대
잘츠부르크제28대대: 1~?개 중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제29대대: 1~413개 중대
슈바벤제30대대: 1~?개 중대
슈타이어마르크제31대대: 1~815개 중대
주데텐제32대대: 1~645개 중대
남 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제33대대: 1~701개 중대
튀링겐제34대대: 1~446개 중대
티롤-포어아를베르크제35대대: 1~?개 중대
바르테란트제36대대: 1~169개 중대
베저-엠스제37대대: 1~251개 중대
북 베스트팔렌제38대대: 1~454개 중대
남 베스트팔렌제39대대: 1~300개 중대
베스트마르크제40대대: 1~403개 중대
제41대대: 1~366개 중대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제42대대: 1~?개 중대
국외 조직제43대대: 1~610개 중대


3. 복장과 계급

국민돌격대의 "복장"은 은색 계급장을 옷깃에 달고 "Deutscher Volkssturm Wehrmacht"(독일 국민돌격대 국방군) 문구가 적힌 검정 완장을 차는 것이 전부였다. 계급장 문양은 나치당의 유사 군사 조직에서 유래했다.

대부분의 국민돌격대 대원들은 제복을 갖추지 못했고 지급받지도 못했기에, 일반적으로 작업복(철도 노동자, 경찰, 소방관 등 포함), 히틀러 유겐트 제복,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낡은 제복 또는 그 일부, 또는 사복을 입었으며 개인 소지품 가방, 담요, 취사 도구 등을 휴대했다.[1]

국민돌격대의 간소한 준군사 계급은 다음과 같다.

국민돌격대 계급번역군 계급 대우
Bataillonsführer대대지도자소령 상당
Kompanieführer중대지도자대위 상당
Zugführer대열지도자소위 상당
Gruppenführer집단지도자중사 상당
Volkssturmmann국민돌격대원사병 상당


4. 훈련과 장비

''국민돌격대'' 대원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기본적인 군사 훈련만 받았다. 여기에는 짧은 교육과 Karabiner 98k 소총, ''판저파우스트''와 같은 기본적인 무기 사용법에 대한 훈련이 포함되었다.[2] 지속적인 전투와 무기 부족으로 인해 무기 훈련은 최소한으로 이루어졌다. 교관이 부족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징집되어 무기 훈련을 하기도 했다. 종종 ''국민돌격대'' 대원들은 실제 전투에서야 비로소 무기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1945년 2~3월, 판저파우스트 대전차 무기 사용법을 훈련받는 ''국민돌격대'' 대원들


1945년 3월, 여성 민간인에게 ''판저파우스트'' 사용법을 설명하는 ''국민돌격대'' 병사


군용 약모와 작업복을 착용하고 육군 하사관에게 사격 동작 훈련을 받는 국민돌격대원. 손에 든 소총에는 Kar98k, Gew98, 체코슬로바키아제 Kar98k 단축형이 혼재되어 있다


표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대는 이용 가능한 장비만 지급받았다. ''국민돌격대'' 대원들은 개인적인 유니폼과 취사 도구 등을 가져와야 했다. 이로 인해 부대는 매우 초라한 모습을 보였고, 민간 사기를 높이는 대신 종종 독일의 절박한 상황을 상기시켰다.[1] 무장 역시 무작위로 이루어졌다. 일부 Karabiner 98k가 있었지만, 대원들은 구형 Gewehr 98, Steyr-Mannlicher M1895, 19세기 Gewehr 71, Steyr-Mannlicher M1888, Dreyse M1907 권총 등을 지급받았다. 또한, 독일군이 전쟁 중에 노획한 소련, 영국,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및 기타 국가의 무기도 사용되었다. 독일군은 MP 3008 기관단총 및 ''Volkssturmgewehr'' 소총과 같은 저렴한 ''국민돌격대'' 무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국민돌격대'' 병력은 명목상 ''국방군(Wehrmacht)''과 SS로부터 가능한 때와 장소에서 보급을 받았다.[3] 1945년 1월 말까지, ''국민돌격대''는 겨우 40,500정의 소총과 2,900정의 기관총을 확보했을 뿐이었다.[4]

MG34 기관총을 든 실레지아 국민돌격대원


대원 복장의 예. 육군 M40형 코트와 M43형 약모에 잡낭만 착용한 경장비. 대원용 완장만 있고 계급장 등 휘장류는 부착하지 않음. 간이형 소총 VK-98과 M39 알류탄 수류탄을 소지.


대전 말기에는 무기 부족이 심각하여, 대전차 공격용으로 대량 생산된 일회용 판저파우스트 외에는 소총은 물론 권총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구형 무기, 노획 무기, 개인 소유의 사냥총까지 징발했지만 모두에게 지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총을 지급받더라도 탄약이 제대로 없어, 소총 한 정당 총탄이 30발 정도 지급되면 다행이었다. 보급은 거의 없었다. 카르카노 M1891 소총의 경우, 극심한 무기 부족으로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부대뿐만 아니라 독일 본토의 국민돌격대에도 지급되었지만, 탄약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VK98과 같은 간이 전시 생산형 소총도 지급되었으나, 수량을 맞추기 위해 생산된 탓에 장탄수 등 기본적인 사양조차 개체차가 크고 품질도 안정되지 않았다.

물자 부족으로 철모 등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고, 제복은 국방군에서 제공되는 군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노획된 외국군의 헬멧, 히틀러 유겐트나 토트 기관 등의 당 조직 및 독일 국영 철도의 제복, 작업복,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의 구식 군장을 개조하거나, 사복에 완장을 착용한 경우도 있었다.

Kar98k 소총을 장비하고 사복 소매에 완장을 부착한 국민돌격대원


부대가 훈련을 마치고 무장을 받으면, 대원들은 관례에 따라 히틀러에게 선서를 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십 대 청소년과 중년 남성들은 별도의 훈련소로 보내졌으며, 일부는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 열흘에서 14일 정도의 짧은 훈련만 받았다.[4]

5. 한계와 문제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부터 노인, 10대 초반의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어 징집된 병사(대원)의 질은 일반 부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차가 컸고, 사기도 좋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4]

게다가, 대전 말기에는 무기 부족이 심각하여, 대전차 공격용으로 대량 생산된 일회용 판저파우스트 외에는 소총은 물론 권총조차 전 대전의 것을 긁어모아도 모두에게 지급되지 않아 노획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개인 소유의 사냥총까지 징발하는 실정이었다. 총을 지급받더라도 탄약이 제대로 없어, 소총 한 정당 총탄이 30발 정도 지급되면 다행이었다. 당연히, 보급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카르카노 M1891이 극심한 무기 부족으로 인해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부대뿐만 아니라, 독일 본토의 국민돌격대에도 지급되었지만, 후자의 경우 탄약 공급이 어려웠다.[4] 지급되는 총기조차 VK98과 같은 간이 전시 생산형도 있었다. 어쨌든 수를 맞추는 것을 목적으로 생산된 물건이므로 장탄수 등 기본적인 사양조차 개체차가 크고, 그 질도 안정되지 않았다.[4]

무기와 함께 물자도 부족했기 때문에 철모 등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고, 제복에 이르러서는 국방군에서 제공되는 군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노획된 외국군의 헬멧, 히틀러 유겐트나 토트 기관 등의 당 조직 및 독일 국영 철도의 제복, 작업복,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의 구식 군장을 유용・개조하거나, 사복에 완장을 착용한 것까지 나오는 실정이었다 (자체 준비로 간주되어 "야전에 적합한 복장이면 무엇이든 좋다"고 했다).[4]

장비가 빈약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지휘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민돌격대는 전력으로는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정도의 존재였다. 또한, 연합군과의 전투와 그 후의 패잔병 사냥으로, 많은 일반 시민이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4] 불충분한 장비를 갖춘 노병이 눈에 띄는 국민돌격대에 대해, 국방군에서는 다양한 멸칭이 붙었다.[4]


  • "보조 예비역 보충대" (Ersatz-Reserve-Ersatz)
  • "늦깎이 히틀러 유겐트" (HJ-Spätlese)[7]
  • "국민의 바람" (Volkswind) - Volkssturm의 경우, Sturm은 군역의 일종인 "시민군" 또는 "국민군"을 나타내지만, Sturm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폭풍이라는 의미도 있다.
  • "불구자 친위대" (Krüppelgarde)
  • "보복 무기 3호" (V3) - V1 비행 폭탄과 V2 로켓에 이은 비책이라는 비꼬는 표현이지만, 실제 병기로 V3포도 존재했다.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와 같은 선전가들은 ''국민돌격대''(Volkssturm)를 열정과 저항 의지의 분출로 묘사했다.[8] 역사학자 다니엘 블라트만(Daniel Blatman)은 ''국민돌격대''가 "모든 사회적 지위, 출신 또는 연령의 차이가 사라지고 인종을 기반으로 모든 사람을 통합"하는 더 위대한 ''국민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화신"으로 묘사되었다고 썼다. "함께 성장하고 나란히 살았던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지역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함께 무기를 들었던 서비스 프레임워크였다."[9] 어떤 면에서 ''국민돌격대''는 1943년 2월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의 정점에 달했고, 그 형성은 1944년 11월 뉴스릴 에피소드인 ''독일 주간 뉴스''에서 "크게 선전되었다". ''국민돌격대''의 창설과 함께 다양한 나치 언론 매체에서 전해지는 최종 승리의 일관된 메시지는 민간인들에게 심리적인 결집점을 제공했다. 그러나, 사기에 약간의 영향을 미쳤지만, 신병들의 눈에 띄는 제복과 무기 부족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죽음, 초월, 기념에 대한 나치 주제는 전투를 장려하기 위해 충분히 활용되었다. 많은 독일 민간인들은 이것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절박한 시도임을 깨달았다. 냉소적인 노인들은 "우리 늙은 원숭이는 ''총통''(Führer)의 최신 무기다"(독일어에서는 운율이 맞음: ''"Wir alten Affen sind des Führers neue Waffen"'')라고 말했다. ''국민돌격대''에 대한 인기 있는 농담은 "왜 ''국민돌격대''가 독일의 가장 소중한 자원인가? 왜냐하면 그 구성원들은 머리카락에 은, 입에 금, 뼈에 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병대 부대가 효과적이려면 수적 강세뿐만 아니라 광신(fanaticism)도 필요했다. ''국민돌격대'' 계획의 초기 단계에서 사기가 부족한 부대는 전투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광신을 조성하기 위해 ''국민돌격대'' 부대는 지역 나치당 관리, 즉 ''가울라이터(Gauleiter)''와 ''크라이슬라이터(Kreisleiter)''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6. 실전 사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부대는 주로 베를린 전투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도시의 많은 지역에서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특히 부대에 치명적이었지만, 많은 대원들은 소련군에게 붙잡히는 것에 대한 공포로 죽을 때까지 싸웠다. 베를린 지역에서 약 6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고, 92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이 중 일부 무기를 갖춘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I 30개 대대가 전방으로 배치되었고, 무기가 없는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II는 시내에 남았다. 베를린을 방어하기 위해 남겨진 몇 안 되는 실질적인 전투 부대 중 하나는 LVI 기갑군단이었는데, 이들은 도시의 남동쪽 구역을 점령했으며, 나머지 도시는 SS의 잔당,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히틀러 유겐트 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6,250대의 전차와 4만 대 이상의 포병을 갖춘 25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감소한 Wehrmacht|베어마흐트de의 잔여 병력은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한편, 히틀러는 Führerbunker|퓌러벙커de 거주민들에게 모든 지각된 "배신"을 비난했다. 불필요한 죽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기꺼이 맞이하려 하지 않은 많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의 노년층은 접근하는 소련군으로부터 숨을 곳을 찾았다.

베를린 전투에서 주목할 만하고 특이한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부대 중 하나는 3/115 지멘스슈타트 대대였다. 이 부대는 77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50대인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공장에서 일하는 비교적 건강한 노동자였고, 숙련된 장교들이 지휘했다. 대부분의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부대와는 달리, 꽤 잘 갖춰져 있었고 훈련도 잘 받았다. 3개 소총 중대, 지원 중대 (2개의 보병 지원포, 4개의 보병 박격포, 중기관총), 중화기 중대 (4개의 소련 M-20 곡사포와 프랑스제 드 방지 220mm 박격포)로 편성되었다. 4월 21일 프리드리히스펠데에서 처음으로 소련군과 교전했고, 다음 이틀 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5월 2일까지 버텼고, 그때는 겨우 50개의 소총과 2개의 경기관총만 남았다. 생존자들은 다른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후퇴했다. 이 대대 소속 26명에게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연합군의 폭격과 소련군의 포격으로 베를린은 폐허가 되었고,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저항은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둔 고도로 훈련된, 전투에 단련된 소련군과의 싸움으로 축소되었는데, 그들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와 같은 저항군을 Wehrmacht|베어마흐트de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잠재적 유격대를 바라보았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테러리스트로 간주했다. 붉은 군대 군인들은 베를린에서 끝까지 싸우는 히틀러 유겐트 부대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 대원들을 독일의 총동원 노력의 일환으로 "총원"이라고 불렀다.

보홀트 근처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하는 국민돌격대원 2명, 1945년 3월 28일


베를린과 같은 곳에서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는 동안, 파르침과 메클렌부르크와 같은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는 히틀러 유겐트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의 군사 사령관 역할을 하는 옛 엘리트들이 나타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 전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마지막 4개월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에게 무의미한 행위였으며, 나치 지도부의 완강한 최후의 저항 주장은 추가로 123만 명(추정)의 사망자를 낳았으며, 그 중 절반은 독일군, 나머지 절반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원이었다.

많은 작은 마을에서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의 지도자들이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을 때—그들의 고향 지역의 "완전한 파괴"를 피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그들은 당 활동가들에 의해 재판을 받고 "즉결 처형"되었다. 1945년 봄, 수천 명의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원들이 프랑켄에서 나치당 광신자들에 의해 이와 같이 살해되었다.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는 육군, 해군, 공군, 무장친위대와 함께 막대한 희생을 냈다. 베를린 전투에서는 대원들이 정규군 못지않게 선전했지만,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의 지휘관은 능력보다는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전장에서는 사수 명령이 남발되었고, 그 결과 많은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병이 전사했다.

7. 아돌프 히틀러 의용군

1945년 3월 28일, 아돌프 히틀러는 신설 부대 편성을 명령했다. 요제프 괴벨스의 3월 30일 통달에 따르면, 이 부대는 "당 활동가, 국민돌격대 지원자, 노동청 지원자"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조직 지도자 겸 독일 노동전선 지도자 로베르트 라이의 지휘 아래 '''아돌프 히틀러 의용군(Freikorps Adolf Hitler)'''으로 편성되었다. 각 대관구에는 1,000명 규모의 "대관구군(Gauschwarm)"이 설치되었으며, 의용군 지원자는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정치적 훈련도 받았다.

"Kreisschwärme(관구군대)"와 "Einzelschwärme(독립군대)"로 나뉜 "Gauschwärme(대관구군대)"는 각각 각 대관구의 국방군 훈련 기지에 배치되었다. 부대 제복에는 "Freikorps Adolf Hitler"라고 각인된 완장을 사용했으며, 무장은 소총, 대전차포, 수류탄 등이었다. 또한, 부대에 어느 정도의 기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전거가 배치되었다.

부대 행동은 기본적으로 국방군과의 공동 작전이었으며, 보충도 국방군에서 공급되었다. 국방군에서는 이들 부대를 전차 구축 부대(Panzerjagdkommandos) 또는 전차 구축단(Panzerjagdverbände)이라고 불렀다.

아돌프 히틀러 의용군은 베를린 전투에서 제12군의 일익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8. 잔혹 행위 가담

몇 차례에 걸쳐, 국민돌격대 대원들은 잔혹 행위에 가담했다. 1945년 1월, 예사우, 제라펜, 쉬펜바일, 게르다우엔, 헬겐바일 등 여러 소규모 강제 수용소에서 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강제로 대피 및 이송되었고, 그 중 다수가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에서 이동 중에 사망했다. 팔름니켄에 도착했을 때, 원래 여정을 시작한 5,000명 중 약 2,500~3,000명의 수감자들이 한 공장에 수용되었다. 시장이자 지역 나치 당 간부였던 쿠르트 프리드리히스는 SS에게 붉은 군대가 멀지 않으니 이 수감자들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지역 국민돌격대 지도자 한스 페이에르아벤트는 고통받는 수감자들을 마을 밖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카틴 숲과 같은 학살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페이에르아벤트는 지역 나치 당원들을 감시하기 위해 국민돌격대 경비병을 배치했지만, 프리드리히스가 히틀러 유겐트를 무장시키고 지역 SD 요원들을 소집하면서 이 노력은 무의미해졌고, 결국 국민돌격대에게 수감자 대피를 돕도록 명령했다. 1945년 1월 30일, 국민돌격대가 프리드리히스의 지휘 하에 떠난 후, 페이에르아벤트는 자살했고, 이후 1월 30일에서 2월 1일 사이에 수감자들은 남은 SS 경비병, 히틀러 유겐트, 그리고 지역 국민돌격대 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1945년 2월–3월 동안 슈타이어마르크 가우에서 수감자들이 발진티푸스에 걸리자, SS 대원,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 부대는 체계적으로 그들을 살해했다. 로벤 지역의 크라이슬라이터 오토 크리스탄들의 명령에 따라, 인근 그라츠와 아이제네르츠의 국민돌격대 부대는 게슈타포와 우크라이나 무장친위대 병사들이 6,000명에서 8,000명 사이의 수감자들을—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로 이동하는 중—그 지역에서 대피시키는 것을 도왔고, 그들 중 다수는 탈진으로 쓰러져 이동 중에 살해되었다.

1945년 4월 초 연합군이 V-2 로켓이 생산되던 미텔베르크 시설에 접근했을 때, 미텔바우-도라 강제 수용소에서 온 강제 노동자들은 군,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에서 차출된 경비병들에 의해 서부 하르츠에서 강제로 이동되었다. 마그데부르크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미에스테 마을에서, 경비병들은 천 명의 수감자들을 헛간에 가두고 지역 나치 당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이 사건은 가르데레겐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시기, 로어 작센의 첼레 마을에서 SS, SA, 지역 경찰,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 대원들은 폭탄 공격을 받은 수송 열차에서 탈출해 인근 숲으로 도망간 수감자들을 "사냥하고 사살"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국민돌격대 대원들은—정규군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독일 군인들이 소련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여 붉은 군대가 아닌 미국과 영국에 항복했다고 밝혔다.

9. 평가

Volkssturmde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냉소적이었다. 많은 독일 민간인들은 국민돌격대가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절박한 시도임을 알고 있었다. 일부 노인들은 "우리 늙은 원숭이는 Führerde의 최신 무기다"(Wir alten Affen sind des Führers neue Waffende)라고 말했는데, 이는 독일어에서 운율이 맞는 표현이다.[1] 또한 "국민돌격대가 왜 독일의 가장 소중한 자원인가? 구성원들이 머리카락에는 은, 입에는 금, 뼈에는 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농담도 있었다.[1]

국민돌격대가 효과적이려면 병력 수뿐만 아니라 광신(fanaticism)도 필요했다.[2] 초기 단계부터 사기가 낮은 부대는 전투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광신을 조성하기 위해 국민돌격대 부대는 지역 나치당 관리, 즉 가울라이터(Gauleiter)de와 크라이슬라이터(Kreisleiter)de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3] 부대는 작전에 투입될 때 독일 국방군 (1935~1945)(Heer)de의 지휘를 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아들 비토리오 무솔리니(Vittorio Mussolini)를 통해 3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국민돌격대에 추가할 것을 제안했지만, 실제로 시행되었다는 증거는 없다.[4]

베를린 등에서는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기도 했지만, 파르침과 메클렌부르크 등에서는 히틀러 유겐트와 국민돌격대의 군사 지휘관 역할을 하는 옛 엘리트들이 방어 전투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5]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마지막 4개월은 국민돌격대에게 무의미한 행위였으며, 나치 지도부의 완강한 저항 주장은 추가로 123만 명(추정)의 사망자를 낳았고, 그 중 절반은 독일군, 나머지 절반은 국민돌격대원이었다.[6]

많은 소도시에서 국민돌격대 지도자들이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하자, 당 활동가들은 이들을 재판에 넘기고 "즉결 처형"했다.[9] 1945년 봄, 프랑켄에서 수천 명의 국민돌격대원들이 나치당 광신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징집된 국민돌격대원의 자질은 일반 부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차가 컸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부터 노인, 10대 초반의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었고, 사기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대전 말기에는 무기 부족이 심각하여 소총은 물론 권총조차도 이전 전쟁의 것을 긁어모아도 모두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노획한 무기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개인 소유의 사냥총까지 징발했지만, 총을 지급받더라도 탄약이 제대로 없어 소총 한 정당 총탄 30발 정도가 고작이었다. 보급도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카르카노 M1891이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부대뿐만 아니라 독일 본토의 국민돌격대에도 지급되었지만, 탄약 공급이 어려웠다.

물자도 부족하여 철모 등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제복은 국방군에서 제공되는 군장만으로는 부족하여 노획한 외국군 헬멧, 히틀러 유겐트나 토트 기관 등의 당 조직 및 독일 국영 철도 제복, 작업복,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의 구식 군장을 개조하거나, 사복에 완장을 착용한 경우까지 있었다. ("야전에 적합한 복장이면 무엇이든 좋다"고 했다.)

장비가 빈약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지휘관이 많았기 때문에 국민돌격대는 전력으로서 큰 의미가 없었다. 연합군과의 전투와 패잔병 사냥으로 많은 일반 시민이 희생되었다.

국민돌격대는 육군, 해군, 공군, 무장친위대와 함께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베를린 공방전에서는 정규군 못지않게 선전했지만, 지휘관은 능력보다는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결정되었다. 전장에서는 사수 명령이 남발되었고, 많은 국민돌격병이 전사했다.

국방군은 장비가 부족한 국민돌격대를 멸시하여 다음과 같은 멸칭을 붙였다.


  • "보조 예비역 보충대" (Ersatz-Reserve-Ersatz)
  • "늦깎이 히틀러 유겐트de" (HJ-Spätlese)
  • "국민의 바람" (Volkswind) - Volkssturmde의 Sturmde은 "시민군" 또는 "국민군"을 뜻하지만, Sturmde 자체는 폭풍이라는 의미도 있다.
  • "불구자 친위대" (Krüppelgarde)
  • "보복 무기 3호de" (V3) - V1 비행 폭탄과 V2 로켓에 이은 비책이라는 비꼬는 표현이지만, 실제 병기로 V3포도 있었다.

10. 주요 참전 인물


  • 오토 딕스, 독일 화가
  • 게르하르트 드라브쉬, 독일 작가, 1945년 동부 전선에서 사망
  • 마르틴 하이데거, 독일 철학자[1]
  • 오토 헤르초크, 철십자 기사 십자장 수훈
  • 한스 모드로, 동독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총리[2]
  • 에른스트 티부르지, 철십자 기사 십자장 수훈[3]
  • 구스타프 안톤 폰 비터스하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장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반의 실패로 해임되었으며, 사병으로 ''국민돌격대''에서 복무했다.

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그레고어 도르프마이스터는 1958년 '만프레드 그레고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국민돌격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Die Brücke를 출판했다. 이 소설은 다음 해 영화로 각색되었고, 2008년에는 텔레비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 2004년 영화 몰락에는 십 대들로 구성된 국민돌격대 부대가 전투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 십 대들로 구성된 국민돌격대 부대는 2019년 ''Das Erste'' 시리즈 전쟁 속의 샤리테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묘사되었으며,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된다.
  • 국민돌격대 부대는 타이카 와이티티의 2019년 영화 조조 래빗의 전투 장면에서 등장한다.
  • 십 대들로 구성된 국민돌격대 부대는 2014년 영화 퓨리의 전투 장면에서 묘사된다.

참조

[1] 문서 カーショー(2021年), 137頁
[2] 서적 WWIIドイツの特殊作戦 恐るべき無法と無謀の集大成 光人社 2011
[3] 문서 カーショー(2021年), 77頁
[4] 문서 カーショー(2021年), 162頁
[5] 뉴스 ドイツ週間ニュース 741号 https://archive.org/[...] 1944-11-16
[6] 문서 カーショー(2021年), 208-209頁
[7] 서적 ヒトラー・ジョーク 河出書房新社 1980
[8] 서적 Ritterkreuzträger 1939-1945 2005
[9] 서적 Destined to Witness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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