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청소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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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틀러 청소년단(Hitlerjugend, HJ)은 나치당이 1922년 창설한 청소년 조직으로, 10세에서 18세 사이의 독일 소년, 소녀를 대상으로 나치 이념을 주입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1930년대에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여 독일 내 유일한 청소년 단체로 자리 잡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전쟁 이후 해체되었으며, 지도부는 전범 혐의로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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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 독일 시대 히틀러 유겐트의 국가 지도자였던 독일 정치인으로, 나치즘에 심취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합법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시키고 빈의 가우라이터 겸 제국총독으로 활동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히틀러 청소년단 - 프리츠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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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청소년단 | |
---|---|
개요 | |
명칭 | 히틀러 유겐트 |
독일어 명칭 | Hitlerjugend, Bund deutscher Arbeiterjugend (히틀러 청소년단, 독일 노동자 청소년 연맹) |
약칭 | HJ |
지도 이념 | 민족사회주의 |
결성일 | 1926년 7월 4일 |
해산일 | 1945년 10월 10일 |
유형 | 청소년 조직 |
지위 | 해산, 불법 |
목적 | 세뇌 |
본부 | 베를린, 요나스 백화점 |
위치 | 나치 독일 |
회원수 | 800만 명 (1940년) |
사용 언어 | 독일어 |
지도자 직책 | 제국 청소년 지도자 |
지도자 | 발두어 폰 시라흐 (최장기 재임), 아르투어 악스만 (마지막) |
부지도자 직책 | 참모장 |
모체 조직 | 나치당 |
자매 조직 | 독일 청소년단 독일 소녀 연맹 |
이전 명칭 | 독일 노동자 청소년 히틀러 유겐트 연맹 |
구호 | 피와 명예 (Blut und Ehre) |
조직 구조 | |
하위 조직 | 독일 청소년단 (Deutsches Jungvolk) 독일 소녀 연맹 (Bund Deutscher Mädel) |
지휘 체계 | 나치당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운영됨. |
역할 및 활동 | |
주요 활동 | 나치즘 이념 교육 군사 훈련 정치 집회 참여 전쟁 지원 활동 |
강제 가입 | 1939년부터 의무화 |
교육 과정 | 신체 훈련, 사격술, 제식 훈련 등 |
선전 활동 | 나치즘 선전 영화 상영, 포스터 배포 등 |
역사적 맥락 | |
설립 배경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청소년 단체들의 난립 |
나치당의 청소년 정책 | 청소년들을 나치즘 이념으로 무장시켜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 |
전쟁 중 역할 | 소년병으로 참전 군수품 생산 지원 방공호 건설 지원 |
종전 후 | 해체 주요 간부들은 전범으로 처벌 |
논란 | |
비판 | 아동 학대 전쟁 범죄 연루 전체주의 교육 |
관련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년병 투입 |
기타 | |
관련 인물 | 아돌프 히틀러 발두어 폰 시라흐 아르투어 악스만 |
관련 용어 | 나치즘, 전체주의, 소년병 |
사운드 |
2. 역사
히틀러 청소년단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의 다양한 청소년 운동 분위기 속에서 나치당의 청소년 조직으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여러 경쟁 단체 중 하나였으나, 1926년 '히틀러 유겐트'라는 이름으로 재편되고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나치는 헤르바르트 노르쿠스와 같은 희생자를 선전에 이용하고, 다른 청소년 단체들을 강제로 흡수하거나 해체했으며, 1936년에는 법적으로 가입을 의무화하여 독일 내 유일한 합법 청소년 조직으로 만들었다.[7] 이 과정에서 회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제3제국의 중요한 사회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 청소년단은 단순한 청소년 단체를 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보조 인력 공급원으로 활용되었다. 초기에는 후방 지원 임무를 맡았으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점차 군사 훈련을 받고 대공포 부대 등에 배치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와 같이 소년병으로 구성된 전투 부대까지 창설되어 직접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패망 후 히틀러 청소년단은 연합군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발두어 폰 쉬라흐를 비롯한 성인 지도부는 뉘른베르크 재판 등에서 처벌받았다. 히틀러 청소년단 자체는 범죄 단체로 규정되지 않았으나, 나치 체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단원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남긴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2. 1. 기원
1922년, 뮌헨에 기반을 둔 나치당은 공식 청소년 단체인 Jugendbund der NSDAP|유겐트분트 데어 엔에스데아페|나치당 청년동맹de을 설립했다.[7] 이는 1922년 3월 8일 Völkischer Beobachter|푈키셔 베오바흐터|민족 관찰자de에 발표되었고, 창립 회의는 같은 해 5월 13일에 열렸다. 같은 해 뮌헨에서는 Jungsturm Adolf Hitler|융슈투름 아돌프 히틀러|아돌프 히틀러 청년 돌격대de도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나치당의 준군사 조직인 Sturmabteilung|슈투름압타일룽|돌격대de(SA)의 미래 대원을 훈련하고 모집하는 역할을 담당했다.히틀러 청소년단(HJ)이 비교적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사회에 이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이고 규율 잡힌 조직 개념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독일 전역에는 다양한 목적의 청소년 운동이 존재했으며, 일부는 종교적, 일부는 이념적 성격을 띠었다. 특히 청년 보수주의나 청년 개신교 운동처럼 정치적 성향을 가진 단체들이 두드러졌다.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청소년 운동은 빠르게 히틀러 중심의 정치 단체로 변모해갔다.
1923년 11월 실패한 맥주 홀 폭동 이후 나치 관련 청소년 단체들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많은 구성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24년 4월, 해산되었던 Jugendbund der NSDAPde는 Grossdeutsche Jugendbewegung|그로스도이체 유겐트베베궁|대독일 청년 운동de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 7월 4일, 나치당이 재조직된 지 1년 후, Grossdeutsche Jugendbewegungde는 공식적으로 Hitler Jugend Bund der deutschen Arbeiterjugend|히틀러 유겐트 분트 도이처 아르바이터유겐트|독일 노동자 청소년 히틀러 청소년 연맹de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재조직 과정은 작센주 플라우엔 출신의 법대생 쿠르트 그루버가 주도했다. 게르하르트 로스바흐가 이끌던 경쟁 단체인 Schilljugend|실유겐트|실 청년단de과의 짧은 경쟁 끝에 그루버의 조직이 나치당의 공식 청소년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Hitler-Jugend|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청소년단de라는 이름은 한스 세베루스 지글러의 제안으로 채택되었다.
1928년 이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 청소년 운동을 지원하며 분산되어 있던 청소년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같은 해 히틀러 청소년단은 10세부터 14세까지의 남자 부문인 Deutsche Knabenschaft|도이체 크나벤샤프트|독일 소년단de을 결성했으며, 이는 1931년에 Deutsches Jungvolk in der Hitler-Jugend|도이체스 융폴크 인 데어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청소년단 내 독일 소년단de(DJ)으로 개명되었다. 1929년 당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2천 명의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또한, 14세부터 18세까지의 소녀들을 위한 Schwesternschaft der Hitler-Jugend|슈베스터른샤프트 데어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청소년단 자매단de도 같은 해에 결성되어, 1930년에 독일 소녀 연맹(Bund Deutscher Mädel, BDM)으로 개명되었다. 더 어린 소녀들을 위한 Jungmädelgruppe|융메델그루페|독일 유년 소녀단de은 1931년에 추가되었다.
1930년까지 히틀러 청소년단은 14세 이상 소년 25,000명 이상을 확보하며 조직을 확장했다. 1931년부터 발두어 폰 쉬라흐가 당의 청소년 전국 지도자로 임명되어 히틀러 청소년단의 성장을 이끌었다. 같은 해 10월 30일,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히틀러 청소년단은 공식적으로 돌격대(SA)의 일부가 되어 에른스트 룀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다.
2. 2. 발전과 확장

히틀러 청소년단의 일원이었던 열다섯 살 헤르바르트 노르쿠스가 공산당원들의 습격으로 사망한 사건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치는 희생된 여러 청소년 단원 중 가장 어렸던 노르쿠스를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7]
히틀러 청소년단(HJ)의 전신은 1922년 3월 뮌헨에 기반을 둔 나치당이 설립한 공식 청소년 단체인 Jugendbund der NSDAP|유겐트분트 데어 엔에스데아페de(나치당 청년단)이다. 이 단체의 설립은 1922년 3월 8일 푈키셔 베오바흐터|푈키셔 베오바흐터de(민족 관찰자)에 발표되었고, 5월 13일에 창립 회의가 열렸다. 같은 해 Jungsturm Adolf Hitler|융슈투름 아돌프 히틀러de(아돌프 히틀러 청년 돌격대)도 설립되었는데, 이 단체는 돌격대(SA)의 미래 대원을 훈련하고 모집하는 역할을 했다. Jugendbund der NSDAP|유겐트분트 데어 엔에스데아페de의 입대 자격은 14세부터 18세까지의 남자였으며, 14~16세는 Jungmannschaften|융만샤프텐de(청년 팀), 그 이상은 Jungsturm Adolf Hitler|융슈투름 아돌프 히틀러de로 구분되었다. 조직 관리는 돌격대(SA)가 맡았고, 아돌프 렌크가 지도자였다.
히틀러 청소년단이 비교적 쉽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사회에 이미 정치 중심의 규율화된 청소년 조직 개념이 익숙했다는 점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독일 전역에는 다양한 청소년 운동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종교적, 이념적, 정치적 목적(청년 보수주의자, 청년 개신교도 등)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기존 청소년 운동들은 빠르게 히틀러 중심의 정치 단체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다.
1923년 11월 실패한 맥주 홀 폭동으로 히틀러가 수감되면서 나치 청소년 단체들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으나, 많은 구성원들은 지하에서 가명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해산된 조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독일 각지에서 지방 청년 조직들이 생겨났는데, 렌크와 쿠르트 그루버의 Grossdeutsche Jugendbewegung|그로스도이체 유겐트베베궁de(대독일 청년 운동)이나 Schilljugend|실유겐트de(실 청년단) 등이 대표적이다. 1924년 4월, 해산되었던 Jugendbund der NSDAP|유겐트분트 데어 엔에스데아페de는 Grossdeutsche Jugendbewegung|그로스도이체 유겐트베베궁de으로 이름을 변경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 7월 4일, 나치당 재조직 1년 후, Grossdeutsche Jugendbewegung|그로스도이체 유겐트베베궁de는 작센주 플라우엔 출신의 법대생 쿠르트 그루버의 주도로 공식적으로 Hitler Jugend Bund der deutschen Arbeiterjugend|히틀러 유겐트 분트 데어 도이첸 아르바이터유겐트de(독일 노동자 청소년 히틀러 청소년 연맹)으로 이름을 변경하며 이후 히틀러 청소년단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루버는 게르하르트 로스바흐의 Schilljugend|실유겐트de와의 짧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조직을 나치당의 공식 청소년 조직으로 만들었다. Hitler-Jugend|히틀러-유겐트de(히틀러 청소년)라는 명칭은 한스 세베루스 지글러의 제안으로 채택되었다.
조직은 점차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1928년 이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지원 하에 각지의 청소년 단체들이 통합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세에서 14세까지의 남자 부문인 Deutsche Knabenschaft|도이체 크나벤샤프트de(독일 소년단)가 결성되었고, 이는 1931년에 Deutsches Jungvolk in der Hitler-Jugend|도이체스 융폴크 인 데어 히틀러-유겐트de(히틀러 유겐트 내 독일 소년단, 약칭 DJ)로 개명되었다. 1929년 당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2천 명의 히틀러 유겐트 대원이 행진했으며, 같은 해 14세부터 18세까지의 여자 부문인 Schwesternschaft der Hitler-Jugend|슈베스터른샤프트 데어 히틀러-유겐트de가 결성되었다. 이 여자 부문은 1930년에 독일 소녀 연맹(BDM, Bund Deutscher Mädel|분트 도이처 메델de)으로 개명되었고, 1931년에는 더 어린 소녀들을 위한 Jungmädelgruppe|융메델그루페de(독일 유녀단)가 추가되었다.
1930년까지 Hitlerjugend|히틀러유겐트de(HJ)는 14세 이상 소년 25,000명 이상을 확보했다. 1931년 10월 30일, HJ는 히틀러의 포고령을 통해 공식적으로 돌격대(SA)의 일부가 되어 에른스트 룀의 지휘 아래 놓였다.
연도 | 회원 수 |
---|---|
1923년 | 1,200명 이상 |
1925년 | 5,000명 이상 |
1930년 | 26,000명 (또는 18,000명) |
1932년 말 | 107,956명 |
1933년 말 | 2,300,000명 |
1936년 12월 | 5,000,000명 이상 |
1940년 | 8,000,000명 |
1931년부터 발두어 폰 쉬라흐가 당의 청소년 전국 지도자(Reichsjugendführer|라이히스유겐트퓌러de)가 되어 조직을 본격적으로 육성했다. 총선에서는 고령 유권자를 돕거나 투표소에서 나치 후보 투표를 유도하는 활동도 했다. 1932년 4월,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는 광범위한 정치적 폭력을 막기 위해 히틀러 청소년단 운동을 금지했으나, 같은 해 6월 후임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은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금지령을 해제했다.
1933년 히틀러 내각 성립 후, 쉬라흐가 초대 제국 청소년 지도자로 공식 임명되면서 대대적인 확장이 시작되었다. 쉬라흐의 지휘 아래 모든 경쟁 청소년 단체가 흡수되거나 해체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회원 수는 그해 말까지 2,300,000명으로 급증했는데, 이는 주로 다른 청소년 단체들의 강제 통합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60만 명 규모의 루터교 청소년 단체인 Evangelische Jugend|에방겔리셰 유겐트de(복음주의 청소년)가 1934년 2월 18일에 통합되었다.[7] 가톨릭 청년단 등 종교 단체 소속 청소년 수십만 명도 히틀러 유겐트로 옮겨갔으나, 청년단 자체는 잠시 종교 지도자 아래 활동하기도 했다.
1936년 12월, Gesetz über die Hitlerjugend|게제츠 위버 디 히틀러유겐트de(히틀러 청소년단 법)이 제정되어 히틀러 청소년단은 독일 내 유일한 합법 청소년 단체가 되었고, "독일 제국 내 모든 독일 청소년은 히틀러 청소년단 내에서 조직된다"고 명시하며 사실상 아리아인 청소년의 가입을 의무화했다. 이 법적 의무는 1939년 3월 Jugenddienstpflicht|유겐트딘스트플리히트de(청소년 봉사 의무) 법령으로 재확인되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세부터 18세까지의 모든 독일 청소년을 히틀러 청소년단에 강제 징집하도록 했다. 가입을 거부하는 부모는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이로써 1936년 말 회원 수는 5백만 명을 넘어섰고, 1940년에는 8백만 명에 달했다.
1939년 의무 가입 법제화 이전에도 청소년들은 가입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압력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가입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나는 왜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하지 않는가?"와 같은 제목의 에세이를 쓰게 하거나 교사와 동료들의 조롱 대상이 되었으며, 아비투어 졸업장 취득이나 대학 입학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고용주가 비회원의 견습 채용을 거부했으며, 1936년부터는 히틀러 청소년단이 모든 청소년 스포츠 시설을 독점하여 비회원의 참여를 사실상 봉쇄했다. 히틀러는 1938년 연설에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일 청소년을 나치즘으로 완전히 동화시킬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 소년 소녀들은 열 살의 나이로 우리 조직에 들어오고, 종종 처음으로 신선한 공기를 쐬게 됩니다. 4년 동안 영 폴크를 거친 후, 그들은 히틀러 청소년단으로 가서 4년을 더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한 국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노동 봉사로 가서 거기서 6, 7개월 동안 다듬어집니다... 그리고 계급 의식이나 사회적 지위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국방군이 처리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의 획일적인 통제에 불만을 느끼고 탈퇴하는 소년들도 있었으나, 직업이나 대학 진학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 가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장미( Weiße Rose|바이세 로제de ) 저항 운동의 한스 숄처럼 회원 중에도 나치 이데올로기에 사적으로 반대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
1940년, 아르투어 아크스만이 쉬라흐의 뒤를 이어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가 되면서, 조직은 전쟁 수행을 위한 인력 지원 역할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소방, 우편, 라디오 등 다양한 분야에 대원들이 동원되었고, 1943년 이후 전황이 악화되자 국민돌격대에 병합되어 병력으로 직접 투입되기도 했다.
드문 불만 사례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히틀러 청소년단은 제3제국 내 모든 대중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인 단체 중 하나였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2주 전, 당시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였던 발두어 폰 시라흐는 빌헬름 카이텔 장군과 히틀러 청소년단 전체가 "방어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7]
1940년 5월 1일 아르투어 악스만이 쉬라흐의 부관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8일 쉬라흐의 뒤를 이어 히틀러 청소년단의 Reichsjugendführer|라이히스유겐트퓌러deu(제국 청소년 지도자)가 되었다. 악스만은 히틀러 청소년단을 전쟁 임무 수행을 위한 보조 부대로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히틀러 청소년단은 독일 소방대에 적극 참여하여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독일 도시들의 복구를 도왔다. 또한 제국 우체국, 제국 철도 서비스 및 기타 정부 기관 업무를 지원했으며, 군대를 돕고 대공포 부대에서도 복무했다.
1942년, 히틀러는 국방군 장교가 지휘하는 "히틀러 청소년단 방어 훈련소" 설립을 명령했다. 나치 지도부는 막대한 군사적 손실로 부족해진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히틀러 청소년단을 군사 예비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43년 초, 악스만은 Reichsführer-SS|라이히스퓌러-SSdeu(친위대 전국 지도자) 힘러에게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사단 창설을 처음 제안했다. 1926년생 단원들로 구성된 전투 사단 창설 계획은 히틀러에게 전달되어 1943년 2월 승인되었고, 고틀로프 베르거가 모병을 담당했다. SS 라이프슈탄다르테(LSSAH) 사단 출신의 프리츠 비트가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창설된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12. SS-Panzer-Division „Hitlerjugend“)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중 캉 북쪽에서 영국군 및 캐나다군과 교전했다. 노르망디 침공을 저지하려는 전투에 2만 명 이상의 독일 청소년이 동원되었다. 초기 전투에서 캐나다군 전차 28대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노르망디 전역이 끝나기 전에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이후 몇 달간 이 사단은 잔혹성과 광신적인 전투 태도로 악명을 얻었다. 비트 사단장이 연합군 함포 사격으로 전사하자, SS-Brigadeführer|브리가데퓌러deu(여단 지도자) 쿠르트 마이어가 지휘권을 인수하여 33세의 나이로 사단장이 되었다. (마이어는 이후 영국 및 캐나다 전쟁 포로 64명 사살을 명령한 혐의로 전범으로 기소되어 캐나다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동부 전선의 바그라티온 작전과 르부프-산도미에르 공세, 서부 전선의 코브라 작전 등으로 독일군의 사상자가 급증하자,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은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징집되었다. 1945년에는 Volkssturm|폴크스슈투름deu(국민돌격대)이 12세의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까지 징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악스만이 이끌던 히틀러 청소년단은 독일 방어선의 마지막 주요 부분을 담당했으며,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부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 도시 방어 사령관 헬무트 바이트링 장군은 악스만에게 히틀러 청소년단 전투 부대 해산을 명령했으나, 혼란 속에서 이 명령은 실행되지 못했다. 남아있던 청소년 여단 병력은 진격해오는 소련군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단 두 명만이 생존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에는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이 포로를 사살하거나 처형에 가담하는 등 여러 전쟁 범죄에 연루된 사례들이 보고되었다.
===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12. SS-Panzer-Division "Hitlerjugend")는 주로 16세에서 17세 사이의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로 구성된 소년병 부대였다. 이들은 제1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에서 차출된 장교 및 부사관들과 함께 편성되었다. 부족한 장교는 국방군에서 파견받았으며, 부사관은 성적이 우수하고 급진적인 유겐트 병사 중에서 선발하여 승진시켰다. 미성년 병사에게는 성인 병사에게 지급되는 담배 대신 초콜릿 등이 지급되었다.
처음에는 1943년 장갑척탄병 사단으로 창설되었으나 곧 기갑사단으로 강화되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교들 아래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연합군은 이들을 "베이비 사단" 또는 "밀크 사단"이라 부르며 선전했으나, 1944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 상륙 다음 날부터 캉 점령을 시도하던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프리츠 비트 사단장과 그가 전사한 후 지휘를 맡은 쿠르트 마이어의 지휘 아래 약 2개월간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캉 공방전에서 대부분의 중장비를 상실했고, 마이어 사단장은 철수 중 포로가 되었다. 이후 제대로 된 재편성 및 보충 없이 아르덴 공세에 투입되었다. 1945년에는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헝가리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공세 작전인 봄의 각성 작전에 참가했으나 거의 궤멸되었다. 남은 소수의 병력은 오스트리아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2. 4. 종전 이후

히틀러 유겐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나치 해체 과정의 일환으로 연합군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일부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은 전쟁 범죄 혐의를 받았지만, 대부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기소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히틀러 유겐트 자체가 범죄 단체로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성인 지도부는 젊은이들의 정신을 타락시킨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히틀러 유겐트의 많은 성인 지도자들이 연합군 당국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발두어 폰 쉬라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는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로서의 활동보다는, 빈의 Gauleiter|가울라이터de로서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때문이었다. 1940년부터는 아르투어 악스만이 히틀러 유겐트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악스만은 1949년 5월, 3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전쟁 범죄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후 1958년, 서베를린 법원은 악스만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청소년들에게 국가사회주의를 주입한 혐의로 유죄를 인정하여 (당시 약 8,300USD 또는 3,000GBP)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는 베를린에 있는 그의 재산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 재판에서도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무죄로 결론 내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태어난 독일 청소년들은 냉전 시대에 성인이 되었다. 1936년 이후 히틀러 유겐트 가입이 의무화되었기 때문에, 전후 서독과 동독의 많은 고위 지도자들이 히틀러 유겐트 단원 출신이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개인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단원 경력 때문에 정치인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때 나치 독일의 중요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역사가 게르하르트 렘펠은 히틀러 유겐트가 없었다면 나치 독일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단원들이 '제3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탄력성'을 형성했으며, '지배 정당의 대열을 보충하고 대중의 반발을 억제함으로써 정치 체제를 유지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렘펠은 또한 히틀러 유겐트에서 활동했던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범죄적인 대의를 위해 봉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생 그 무게를 짊어졌다고 지적했다. 일부는 '자유의 상실'을 기억하며 히틀러 유겐트 활동이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빼앗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역사가 마이클 케이터는 히틀러 유겐트 출신 다수가 조부모가 될 때까지 과거 경험에 대해 침묵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들이 결국 '수백만 명을 억압하고, 불구로 만들고, 살해한 독재 정권'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되돌아볼 수 있었지만, 정직한 평가는 과거 정권에 대한 기여가 '자신들의 영혼을 손상시켰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패배한 후, 히틀러 유겐트는 다른 모든 NSDAP 조직과 마찬가지로 1945년 10월 10일 연합 통제 위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이후 독일 형법에 따라 금지되었다.
3. 조직
히틀러 청소년단은 성인 지도자의 지휘 아래 군단 형태로 조직되었으며, 일반 단원은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년들로 구성되었다. 조직은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한 '세포(Zelle)' 단위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각 세포에서는 성인 지도자가 주관하는 주간 회의를 통해 다양한 나치즘 이념 교육이 이루어졌다. 지역 지도자들은 여러 세포를 모아 집회나 야외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했으며, 가장 큰 규모의 집회는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나치당 전당대회 기간에 개최되어 독일 전역의 단원들이 모였다.
히틀러 청소년단과 독일 소녀 연맹(BDM)은 나치 당국에 의해 순수한 아리아인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조직 내에서의 혼전 성관계를 암묵적으로 장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실제로 1936년 뉘른베르크 집회에 참석했던 약 10만 명의 히틀러 청소년단 및 BDM 단원 중,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녀 900명 이상이 임신한 상태로 귀가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이는 혼전 성관계를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고 공중 보건상의 위험 요소로 간주했던 나치당의 일반적인 입장과는 모순되는 현상이었다.
히틀러 청소년단은 미래의 나치당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예비 학교 성격의 훈련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또한, 장차 국방군(Wehrmacht) 장교가 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여러 특수 군단도 두었다. 이 군단들은 단원들이 배치될 특정 군대에 필요한 기초적인 전문 훈련을 제공했는데, 예를 들어 해군 히틀러 청소년단(Marine-HJde)은 크릭스마리네(Kriegsmarine)의 보조 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외에도 Deutsche Arbeiter Jugend – HJde(독일 노동자 청년 - HY)라는 조직은 미래의 노동 지도자와 기술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만자(卍) 문양이 있는 떠오르는 해를 상징으로 사용했다. 한편, Landjahr Lagerde(국가 봉사 캠프) 프로그램은 선발된 BDM 단원들에게 농촌 환경에서 높은 도덕적 기준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히틀러 청소년단 활동의 핵심은 육체 단련, 준군사 훈련, 그리고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일원으로서 조국애를 함양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캠프나 하이킹 등 1935년에 금지된 보이스카우트 운동과 유사한 활동을 했으나, 점차 군사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무기 사용법 훈련이나 기초 전술 학습 등 군사 훈련에 중점을 둔 활동이 늘어났는데, 이는 청소년들에게 나치 독일을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고, 나치가 내세운 이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인종 차별을 포함한 나치의 이데올로기 교육도 강도 높게 이루어졌다.
1936년 히틀러 청소년단 법이 제정되면서 10세부터 18세(여성의 경우 21세까지 BDM 소속)까지의 모든 청소년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조직 규모는 급격히 팽창하여 1939년에는 단원 수가 80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독일 전체 인구 약 7,000만 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규모였다. 제복으로는 갈색 카라 없는 셔츠가 지정되었으나, 국가에서 지급되지 않아 단원들이 자비로 구매해야 했다.
전쟁 말기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에는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들이 국민돌격대(Volkssturm)에 편입되어 직접 전투에 동원되기도 했다.
히틀러 청소년단은 여러 종류의 월간 및 주간 간행물을 발행하여 조직의 이념을 선전하고 활동을 홍보했다. 주요 간행물로는 Hitler-Jugend-Zeitung|히틀러-유겐트-차이퉁de(히틀러 청소년단 신문), Sturmjugend|슈투름유겐트de(돌격 청년), Junge Front|융에 프론트de(젊은 전선), Deutschen Jugendnachrichten|도이첸 유겐트나흐리히텐de(독일 청소년 뉴스), Wille und Macht|빌레 운트 마흐트de(의지와 권력)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Das Junge Deutschland|다스 융에 도이칠란트de(젊은 독일), BDM 단원을 위한 Das deutsche Mädel|다스 도이체 메델de(독일 소녀), Junge Dorfgemeinschaft|융에 도르프게마인샤프트de(젊은 마을 사람) 등의 간행물이 있었다.
4. 이념과 교육
히틀러 청소년단의 일원이었던 열다섯 살의 헤르바르트 노르쿠스가 공산주의 청년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나치 선전에 의해 영웅적 순교로 미화되었다. 나치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하도록 유도했다.[7]
히틀러 청소년단 구성원들은 나치 독일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력으로 간주되었으며, 나치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세뇌되었다. 이들은 아리아인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신화를 주입받고,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열등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또한,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원인을 유대인과 같은 '내부의 적'에게 돌리도록 배웠다. 히틀러 청소년단은 기존의 교회 청소년 단체를 해체하고, 종교 수업과 성경 공부를 감시하며, 교회 출석을 방해하는 등 종교 활동을 억압하는 데 동원되었다.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은 독일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약화시키고, 나치즘에 기반한 새로운 가치관을 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회적, 지적 계급 차이를 없애고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주의 독재 체제에 완전히 종속되도록 훈련받았다. 나치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역사가 리처드 에반스(Richard Evans)는 "그들이 부른 노래는 나치 노래였고, 그들이 읽은 책은 나치 책이었다"고 지적했다. 전 히틀러 청소년단원 프란츠 야게만(Franz Jagemann)은 단원 개개인이 죽더라도 "독일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주입되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 청소년단은 1935년에 금지된 보이스카우트 운동의 활동 방식, 예를 들어 캠핑이나 하이킹 등을 일부 차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활동의 내용과 목적은 군사적인 방향으로 크게 변질되었다. 무기 사용법 숙달, 장애물 코스 통과, 기본적인 전투 전술 훈련 등 군사 훈련과 유사한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히틀러 청소년단을 전투 의욕이 높은 병사로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학문적 소양보다는 신체 단련과 군사 훈련이 훨씬 강조되었다. 스포츠 활동 역시 단순히 건강 증진을 넘어 청소년들을 전투에 대비시키고 나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히틀러가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제시한 원칙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1936년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는 나치 독일과 같은 현대 독재 정권이 스포츠를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독재자들은 스포츠를 발견했다. [...] 중년 및 노년층은 기존 체제에 익숙하기 때문에, 독재자들은 청소년들을 새로운 세계관과 체제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들은 스포츠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의 손에 든 무기이자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스포츠는 국가주의화되었고, 스포츠 자체를 위한 이상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체육계를 이끄는 이들의 실질적인 관심사는 대포의 먹이를 대량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1937년에는 히틀러 청소년단 사격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에르빈 롬멜 장군의 제안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롬멜은 히틀러 청소년단 회의를 순회하며 군사 강연을 했고, 당시 청소년단 지도자였던 발두어 폰 시라흐에게 히틀러 청소년단을 '청소년 군대'로 만들도록 압력을 가했다. 1938년 5월 17일, 시라흐는 "청소년에게 맹목적인 복종,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 무조건적인 동지애, 절대적인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위한 진정한 교육"이라고 연설했다. 1938년 한 해 동안 약 150만 명의 히틀러 청소년단원이 소총 사격 훈련을 받았다. 1939년 초부터는 OKW가 히틀러 청소년단의 사격 활동과 군사 야외 훈련을 직접 감독하기 시작했으며, 그해 말까지 51,500명 이상의 소년들이 HJ 사격 훈장을 받았다.
히틀러 청소년단에서는 동시대의 지도자들로부터 신체 단련, 준군사 훈련, 애국심 등을 집단 활동을 통해 교육받았다. 1936년 히틀러 청소년단 법에 따라 만 10세부터 18세까지의 모든 독일 청소년(소녀들은 독일 소녀 동맹에 소속)의 가입이 의무화되었고, 1939년에는 단원 수가 80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당시 독일 전체 인구는 약 7천만 명).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에는 국민돌격대에 편입되어 전투에 동원되기도 했다. 단원들은 갈색 카라 없는 셔츠 형태의 제복을 착용해야 했으나, 제복이 지급되지 않아 각자 비용을 부담하여 구매해야 했다.
5. 제복과 상징
히틀러 청소년단의 제복은 초기에 돌격대(SA)의 것을 사용했으나, 1925년부터는 단원 전용 제복이 새로 지급되었다. 이 제복은 SA와 마찬가지로 갈색을 기본으로 한 셔츠형 제복이었지만, 디자인은 SA와 달랐고 새로운 장식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단원 전용 완장이 지급되면서 히틀러 청소년단이 SA 조직에서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원들의 여름 제복은 검은색 반바지와 주머니가 달린 베이지색 또는 갈색 셔츠로 구성되었다. 칼라 아래에는 구슬로 고정된 검은색 네커치프(스카프)를 착용했는데, 종종 셔츠 깃 안으로 넣어 입었다. 머리에는 초기 베레모나 배 모양의 약모를 착용했으나, 1934년에 폐지되고 이후 육군 형태의 제모가 채택되었다.
동계용 제복은 친위대(SS)의 근무복과 유사한 디자인으로, 상의는 갈색, 승마 바지는 검은색이었다.
견장에는 각 단원이 소속된 부대 번호와 조직명이 수놓아졌다. 상급 지도대장(Höhere Führerschaftde) 이하 계급은 견장 단추에 소속된 "수행대(Gefolgschaft|게폴크샤프트de, 중대급)"의 번호가 새겨졌고, 견장 본체에는 "대기단(Bann|반de, 대대급)"의 번호가 수놓아졌다. 기수단장(Bannführer|반퓌러de) 이상부터는 견장에 참나무 잎 모노그램이 부착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학교(Adolf-Hitler-Schulen, AHS) 학생의 견장에는 'AHS' 문자가, 위생대(Sanitätsdienst|자니테츠딘스트de) 소속 단원의 견장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ᛉ(알기즈) 룬 문자가 수놓아졌다.
히틀러 청소년단에서는 모든 단원이 계급에 상관없이 같은 제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이는 단원들의 사회적, 계급적 차이를 없애고 민족 공동체(Volksgemeinschaft)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히틀러 청소년단과 그 하부 조직인 독일 소년단(Deutsches Jungvolk, DJ)이 사용한 상징 중 하나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소윌로 룬(ᛋ)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이 룬은 '승리'를 상징했다. 또 다른 깃발은 빨간색-흰색-빨간색 줄무늬 바탕에 흰색 마름모꼴이 있고 그 안에 검은색 갈고리 십자가가 그려진 형태였다. 정식 단원이 되면 입대 시 "Blut und Ehre|블루트 운트 에레de(피와 명예)"라는 문구가 새겨진 칼을 받았다.
단원에게는 다양한 휘장과 배지가 주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히틀러 청소년단 명예장(Hitlerjugend Ehrenabzeichende)'과 '히틀러 청소년단 기능장(Hitlerjugend-Leistungsabzeichende)' 등이 있다.
'''계급'''
Reichsjugendführer|라이히스유겐트퓌러de(국가 청소년 지도자)는 히틀러 유겐트의 최고 계급으로, 조직 전체를 지휘하는 나치당 관리가 맡았다. 이 계급은 발두어 폰 쉬라흐와 아르투어 아크스만 두 사람만이 역임했다.
히틀러 유겐트 계급 | 히틀러 유겐트 휘장 | 번역 | 육군 동급 계급 |
---|---|---|---|
Reichsjugendführung|라이히스유겐트퓌룽de | |||
Reichsjugendführer|라이히스유겐트퓌러de | 국가 청소년 지도자 | Generalfeldmarschall|게네랄펠트마르샬de (원수) | |
Höhere Führerschaft|회에레 퓌러샤프트de (상위 지도자 부대) | |||
Stabsführer|슈타브스퓌러de | 참모 지도자 | Generaloberst|게네랄오버스트de (상급대장) | |
Obergebietsführer|오버게비츠퓌러de | 상위 지구 지도자 | General der Waffengattung|게네랄 데어 바펜가퉁de (병과대장) | |
Gebietsführer|게비츠퓌러de | 지구 지도자 | Generalleutnant|게네랄로이트난트de (중장) | |
Hauptbannführer|하웁트반퓌러de | 수석 부대 지도자 | Generalmajor|게네랄마요어de (소장) | |
Führerschaft|퓌러샤프트de (지도자 부대) | |||
Oberbannführer|오버반퓌러de | 상위 부대 지도자 | 없음 | |
Bannführer|반퓌러de | 부대 지도자 | Oberst|오버스트de (대령) | |
Oberstammführer|오버슈탐퓌러de | 상위 부대 지도자 | Oberstleutnant|오버스트로이트난트de (중령) | |
Stammführer|슈탐퓌러de | 부대 지도자 | Major|마요어de (소령) | |
Höhere Gefolgschaftsführung|회에레 게폴크샤프츠퓌룽de (상위 분대 지도자) | |||
Hauptgefolgschaftsführer|하웁트게폴크샤프츠퓌러de | 수석 분대 지도자 | Hauptmann|하웁트만de/Rittmeister|리트마이스터de (대위) | |
Obergefolgschaftsführer|오버게폴크샤프츠퓌러de | 상위 분대 지도자 | Oberleutnant|오버로이트난트de (중위) | |
Gefolgschaftsführer|게폴크샤프츠퓌러de | 분대 지도자 | Leutnant|로이트난트de (소위) | |
Gefolgschaftsführung|게폴크샤프츠퓌룽de (분대 지도자) | |||
Oberscharführer|오버샤르퓌러de | 상급 분대장 | Stabsfeldwebel|슈타브스펠트베벨de (참모상사) | |
Scharführer|샤르퓌러de | 분대장 | Oberfeldwebel|오버펠트베벨de (상급상사) | |
Oberkameradschaftsführer|오버카메라트샤프츠퓌러de | 상위 동료 부대 지도자 | Feldwebel|펠트베벨de (상사) | |
Kameradschaftsführer|카메라트샤프츠퓌러de | 동료 부대 지도자 | Unterfeldwebel|운터펠트베벨de (하사) | |
Oberrottenführer|오버로텐퓌러de | 선임 분대 지도자 | Obergefreiter|오버게프라이터de (상급병) | |
Rottenführer|로텐퓌러de | 분대 지도자 | Gefreiter|게프라이터de (일등병) | |
Hitlerjungen|히틀러융엔de (히틀러 소년단) | |||
Hitlerjunge|히틀러융에de | 히틀러 소년단 | Schütze|쉬체de (이등병) |
'''부대 색상'''
각 부대는 고유의 색상을 가졌다.
- 진홍색 (karmesinrotde): 지구 및 Reichsjugendführer|라이히스유겐트퓌러de 참모
- 주홍색 (hochrotde): 일반 HJ
- 연한 파란색 (hellblaude): 비행가 HJ (Flieger-HJde)
- 분홍색 (rosade): 자동차 HJ (Motor-HJde)
- 노란색 (gelbde): 통신 HJ (Nachrichten-HJde)
- 녹색 (gründe): HJ 농업 봉사 (HJ-Landdienstde)
- 흰색 (weißde): NSDAP 교육 기관
- HJ-순찰 서비스 (Hj-Streifendienstde, 1943년 이후)
- 해군-HJ (Marine-HJde)
- 기마-HJ (Reiter-HJde)
- HJ-산악 하이킹 그룹 (HJ-Bergfahrtengruppende)
- HJ-소방대 (HJ-Ferwehrscharende)
- HJ-야전 위생병 (HJ-Feldscherede)
- BDM-건강 관리 소녀 (BDM-Gesundheitsdienstmädelde, 독일 소녀 연맹)
- 산악-HJ (Gebirgsjäger-HJde)
'''관련 이미지'''
6. 계급
Reichsjugendführer|국가 청소년 지도자de는 히틀러 유겐트의 최고 계급이었으며, 조직 전체를 지휘하는 나치당 관리가 맡았다. 국가 청소년 지도자 계급은 발두어 폰 쉬라흐(Baldur von Schirach)와 아르투어 아크스만(Artur Axmann) 두 사람만이 역임했다.
단원들의 여름 제복은 검은 반바지와 주머니가 달린 베이지색 셔츠로 구성되었으며, 칼라 아래에 넣는 경우가 많은 옷깃 아래에 구슬로 고정된 검은색 네커치프를 착용했다. 머리 장비는 원래 베레모로 구성되었지만, 1934년에 히틀러 유겐트에서 폐지되었다. 히틀러 유겐트가 사용한 한 가지 깃발/기호는 독일 소년단(Deutsches Jungvolk, DJ)과 동일했으며, 검은색 배경에 흰색 ''소윌로'' 룬이 새겨져 "승리"를 상징했다. 또 다른 깃발은 흰색 다이아몬드 안에 검은색 갈고리 십자가가 있는 빨간색-흰색-빨간색 줄무늬 깃발이었다. 정식 단원은 입대 시 "Blut und Ehre|피와 명예de"라는 문구가 새겨진 칼을 받았다.
계급 구분 | 계급명 | 휘장 | 번역 | 해당 육군 계급 |
---|---|---|---|---|
전국 지도자 Reichsleiterde | Reichsjugendführerde | 전국 청소년 지도자 | 원수 | |
상급 지도단장 Höheres Führerkorpsde | Stabsführerde | 참모장 | 상급 대장 | |
Obergebietsführerde | 상급 지역 지도자 | 병과 대장 | ||
Gebietsführerde | 지역 지도자 | 중장 | ||
Hauptbannführerde | 고급 기수단장 | 소장 | ||
지도단장 Führerkorpsde | Oberbannführerde | 상급 기수단장 | 대령 | |
Bannführerde | 기수단장 | |||
Oberstammführerde | 상급 단장 | 중령 | ||
Stammführerde | 단장 | 소령 | ||
상급 지도대장 Höhere Führerschaftde | Hauptgefolgschaftsführerde | 고급 수행대장 | 대위 | |
Obergefolgschaftsführerde | 상급 수행대장 | 중위 | ||
Gefolgschaftsführerde | 수행대장 | 소위 | ||
지도대장 Führerschaftde | Oberscharführerde | 상급 소대장 | 상급 상사 | |
Scharführerde | 소대장 | 상사 | ||
Oberkameradschaftsführerde | 상급 동포대장 | 하사 | ||
Kameradschaftsführerde | 동포대장 | 병장 | ||
Oberrottenführerde | 상급 반장 | 병장근무 상등병 | ||
Rottenführerde | 반장 | 상등병 | ||
히틀러 청년 Hitlerjungende | Hitlerjungende | 히틀러 청년단원 | 병 |
'''부대 색상'''
병과색 | 병과 | 병과색 | 병과 |
---|---|---|---|
카민 레드 (karmesinrotde) | 전국 청년 지도부 지역 청년 지도부 참모 | 브라이트 레드 (Hochrotde) | 일반 청년단원 |
라이트 블루 (hellblaude) | 청년단 항공대 (Flieger-HJde) | 핑크 (rosade) | 청년단 기계화대 (Motor-HJde) |
옐로우 (gelbde) | 청년단 통신대 (Nachrichten-HJde) | 그린 (gründe) | 청년단 경작대 (HJ-Landdienstde) |
화이트 (Weissde) | 당 교육 지도 학생 초계 부대 (Hj-Streifendienstde, 1943년 발족) |
'''기타 부대 분류:'''
- 해군-HJ (Marine-HJde)
- 기마-HJ (Reiter-HJde)
- HJ-산악 하이킹 그룹 (HJ-Bergfahrtengruppende)
- HJ-소방대 (HJ-Ferwehrscharende)
- HJ-야전 외과 의사 (HJ-Feldscherede)
- BDM-건강 관리 소녀 (BDM-Gesundheitsdienstmädelde)
- 산악-HJ (Gebirgsjäger-HJde)
7. 한일 관계
1936년 11월 25일 독일-일본 방공 협정 체결 이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간의 청소년 교류가 이루어졌다.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발두어 폰 쉬라흐의 제안으로 1938년 8월부터 11월까지 히틀러 유겐트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했다.[1]
방일 기간 동안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은 메이지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도쿄 육군 유년 학교 등을 방문했다.[1] 일본에서는 이들을 환영하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기타하라 하쿠슈 작사, 다카시나 데쓰오 작곡의 '만세 히틀러 유겐트: 독일 청소년단 환영의 노래'[2]가 만들어져 후지와라 요시에의 노래로 일본 빅터에서 레코드로 발매되었고,[3] 도이 반스이 작사, 도쿄 음악 학교 작곡의 '히틀러 유겐트 환영의 노래'[4]도 준비되었다. 이러한 국가적인 환대는 당시 일본 내 친독일 분위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각지의 학생, 청소년 단체 직원, 젊은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대일본 연합 청년단'(현재의 일본 청년 단체 협의회) 대표단이 독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나치 당 대회를 참관하고 히틀러와 회견하는 등 동맹국 독일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활동을 했다.[5]
7. 1. 방일 목적
1936년 11월 25일 독일-일본 방공 협정 체결 이후,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발두어 폰 쉬라흐는 일본과 독일 청소년 간 상호 방문을 제안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수락하여 1938년 8월부터 11월까지 히틀러 유겐트의 방일이 이루어졌다.[1]히틀러 유겐트가 타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으며, 일본 방문 역시 이러한 일반적인 목적과 더불어 독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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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교류 목적[4] | 나치 독일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완화하고, 타국 청년들에게 나치 체제를 선전하며 이해시키기 위함 |
공산주의 청년을 중심으로 한 반파시즘 운동에 대항하기 위함 | |
타국의 문화를 접함으로써 독일 민족과 나치 체제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고 자국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함 | |
방일 특수 목적 | 일본에 체류 중인 독일인 교사에게 독일 본국의 교육 상황을 전달하기 위함 |
1940년 도쿄 올림픽 개최 준비 상황을 파악하고, 양국 간 스포츠 교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함 | |
외교관 양성을 위한 실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함 |
한편, 일본 측에서도 히틀러 유겐트의 방일을 받아들인 배경과 목적이 있었다.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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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일본 방공 협정을 바탕으로 양국 간 군사적,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함 |
동양 문화의 주도자이자 아시아의 중심 세력으로서 일본의 위상을 독일에 알리고, 특히 중일 전쟁에 대한 독일의 이해와 지지를 얻기 위함 |
일본 국내의 다양한 청소년 단체들의 연계를 강화하고, 국가 통제 하에 조직력을 높이기 위함 |
일본 고유의 국체와 민족 전통을 독일에 과시하고, 강력한 국민 정신이 확립되었음을 선전하기 위함 |
이러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독일과 일본 청소년 간의 교류가 성사되었으며, 이는 양국의 군국주의적, 파시즘적 협력 관계를 청소년 교류를 통해 선전하고 강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방일 기간 동안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은 메이지 신궁,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도쿄 육군 유년 학교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으며,[1] 일본에서는 이들을 환영하는 노래가 만들어지는 등[2][3][4] 국가적인 환대 분위기가 조성되어 친독일 감정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일본 청년단 대표단도 독일로 파견되어 나치 당 대회를 참관하고 히틀러와 회견하는 등 상호 교류가 이루어졌다.[5]
참조
[1]
문서
平井正, p124-126
[2]
간행물
戦時体制下日本青年団の国際連携 : ヒトラー・ユーゲントと朝鮮連合青年団の間 (1)
https://hdl.handle.n[...]
東京都立大学
2022-12-15
[3]
웹사이트
萬歳ヒットラー・ユーゲント
https://dl.ndl.go.jp[...]
2022-12-15
[4]
간행물
ヒットラー・ユーゲント歡迎の歌 (Willkommen! Willkommen! OH! Hitler Jugend!)
大日本青少年団
1938-09
[5]
문서
平井正, p125-127
[6]
서적
나치 시대의 일상사
개마고원
[7]
문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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