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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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흡은 유방을 따라 진나라와의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208년 제양 공격, 이유의 군 격파에 기여했으며, 이후 임평군에 봉해졌다. 한나라 건국 후 건무후 작위를 받고 기도위가 되었으며, 롱서에서 장평을 격파하고 농서 6현을 평정했다. 팽성 전투 패배 후에도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공을 세웠고, 백등산 포위전에서 거기장군이 되었다. 그는 90명의 머리를 베고 142명을 사로잡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고후 5년에 사망하여 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근흡을 부관과 함께 유방을 따라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했다. 근흡의 아들 근정이 뒤를 이었으나, 조세 과다 징수로 봉국이 폐지되었고, 현손의 아들이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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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흡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근흡 |
| 한자 표기 | 靳歙 |
| 로마자 표기 | Gin Heup |
| 중국어 표기 (병음) | Jìn Xī |
| 생애 | |
| 출생 | 미상 |
| 사망 | 고후 5년 (기원전 183년) |
| 사인 | 미상 |
| 묘지 | 미상 |
| 관직 및 봉작 | |
| 초기 관직 | 중견 |
| 주요 관직 | 기마도위, 차기장군 |
| 봉작 | 임평군, 건무후, 신무후 |
| 시호 | 숙후 |
| 가족 관계 | |
| 자녀 | 근정 |
| 기타 | |
| 활동 시기 | 전한 초기 |
2. 생애
근흡은 중연(中涓)으로 유방(고제)을 따라 진나라와의 싸움에 참전했다.[2] 기원전 208년 제양(濟陽)을 공격하고, 같은 해 8월 이유(李由)의 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3] 기원전 207년 3월 호(扈)의 남쪽, 개봉 북동쪽에서 진나라 군과 싸워 기병 천 명의 장수 한 명을 베었고, 이후 남전(藍田) 북쪽 전투에도 참전했다.[4] 이 공으로 임평군(臨平君)에 봉해졌다.
기원전 206년 정월,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건무후(建武侯) 작위를 받고 기두위에 임명되었다.[2][10] 기원전 205년 11월, 별동대로 롱서(隴西)에서 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격파하고 농서 6현을 평정했다.[5] 이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와 싸웠으나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옹구(雍丘)로 돌아와 농성했다. 이후 왕무(王武) 등을 무찌르고, 형열(邢說)을 치남에서 격파하여 형열과 도위 둘, 사마와 후 열두 명을 사로잡았다.[10]
기원전 204년, 하내(河內)의 여러 지역에서 공을 세우고 조나라와의 싸움에 들어가 한단을 항복시키고 평양을 함락했다.[10] 오창(敖倉)으로 돌아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적의 양도를 끊고 항관(項冠)을 무찔러 노(魯)를 함락했다. 서초 경내 깊숙이 들어가 증(鄫) · 담(郯) · 하비(下邳) · 기(蘄) · 죽읍(竹邑)을 쳤다.[10] 기원전 202년, 유고, 노관과 함께 항우에게 항복하지 않은 임강왕 공위를 공격하여 강릉을 점령하고 공위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냈다.[10][13] 진하(陳下)에서 초왕 한신을 사로잡는 데에도 참여했다.[10] 기원전 201년 식읍 4600호를 받고 신무후(信武侯)에 봉해졌다.[10][12]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여 시작된[13] 대나라 공격에 기두위로 종군했고, 백등산 포위전에서 공을 세워 거기장군이 되었다.[10] 진희의 난과 영포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다.[10] 일생동안 90명의 머리를 베었고, 14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도로 14군을 무찌르고, 59성을 항복시켰고, 1군 1국 23현을 평정했다.[10]
고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었고, 시호를 숙(肅)이라 했다.[10]
2. 1. 초기 활동
근흡은 중연(中涓)으로 유방(고제)을 따라 진나라와의 싸움에 참전했다.[2] 기원전 208년 제양(濟陽)을 공격하고, 같은 해 8월 이유(李由)의 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3] 기원전 207년 3월 호(扈)의 남쪽, 개봉 북동쪽에서 진나라 군과 싸워 기병 천 명의 장수 한 명을 베었고, 이후 남전(藍田) 북쪽 전투에도 참전했다.[4] 이 공으로 임평군(臨平君)에 봉해졌다.기원전 206년 정월,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건무후(建武侯) 작위를 받고 기두위에 임명되었다.[2][10] 기원전 205년 11월, 별동대로 롱서(隴西)에서 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격파하고 농서 6현을 평정했다.[5] 이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와 싸웠으나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옹구(雍丘)로 돌아와 농성했다. 이후 왕무(王武) 등을 무찌르고, 형열(邢說)을 치남에서 격파하여 형열과 도위 둘, 사마와 후 열두 명을 사로잡았다.[10]
기원전 204년, 하내(河內)의 여러 지역에서 공을 세우고 조나라와의 싸움에 들어가 한단을 항복시키고 평양을 함락했다.[10] 오창(敖倉)으로 돌아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적의 양도를 끊고 항관(項冠)을 무찔러 노(魯)를 함락했다. 서초 경내 깊숙이 들어가 증(鄫) · 담(郯) · 하비(下邳) · 기(蘄) · 죽읍(竹邑)을 쳤다.[10] 기원전 202년, 유고, 노관과 함께 항우에게 항복하지 않은 임강왕 공위를 공격하여 강릉을 점령하고 공위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냈다.[10][13] 진하(陳下)에서 초왕 한신을 사로잡는 데에도 참여했다.[10] 기원전 201년 식읍 4600호를 받고 신무후(信武侯)에 봉해졌다.[10][12]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여 시작된[13] 대나라 공격에 기두위로 종군했고, 백등산 포위전에서 공을 세워 거기장군이 되었다.[10] 진희의 난과 영포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다.[10] 일생동안 90명의 머리를 베었고, 14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도로 14군을 무찌르고, 59성을 항복시켰고, 1군 1국 23현을 평정했다.[10]
고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었고, 시호를 숙(肅)이라 했다.[10]
2. 2. 한나라 건국과 주요 전투
근흡은 중연(中涓)으로 유방을 따라 진나라와의 싸움에 참전했다.[2] 기원전 208년 제양(濟陽)을 공격하고, 같은 해 8월 이유(李由) 군 격파에 기여했다.[3] 기원전 207년 3월 호(瓠)의 남쪽, 개봉의 북동쪽에서 진나라 군과 싸워 공을 세워 임평군(臨平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9월 람전 북쪽의 전투에 참전했다.[4]기원전 206년 정월, 유방이 한왕에 봉해지자 건무후(建武侯) 작위를 받고 기두위에 봉해졌다.[2][10] 이후 옹나라 공격에서 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농서에서 무찌르고 농서의 여섯 현을 평정했다.[10] 기원전 205년 11월 별동대로서 롱서·북지 방면으로 침공하여 장평 군을 롱서에서 격파하고 롱서 6현을 평정했다.[5]
동쪽으로 가 초나라를 치고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옹구(雍丘)로 돌아와 농성했다.[10] 이후 옹구를 떠나 왕무(王武) 등을 무찌르고 양(梁) 지역을 공격했다. 한나라 군 본대와 헤어져 형열(邢說)을 제남에서 격파하고 형열과 도위 둘, 사마와 후 열두 명을 사로잡고 4180명을 항복시켰다. 또 형양 동쪽에서 초나라를 물리쳐 식읍이 4200호가 되었다.[10]
기원전 204년 식읍 4200호를 하사받았고, 한단을 공략했다.[10] 평양을 함락시키고, 업을 항복시켰으며, 조가·한단을 공격해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한단군 6현을 항복시켰다.[10] 오창으로 돌아와 성고의 남쪽에서 항우 군대를 깨뜨리고, 초나라의 식량을 끊었다. 형양에서 군사를 내어 상읍에 이르러, 항관(項冠)을 노(魯) 부근에서 격파했다. 기원전 202년 유고, 노관과 함께 공위를 공격하고 강릉을 점령, 주국 · 대사마 등의 항복을 받았으며 공위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냈다.[10][11] 진하(陳下)에서 초왕 한신을 사로잡는 데에도 따라가, 기원전 201년 식읍이 4600호로 정해졌고 신무후에 봉해졌다.[10][12]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여 시작된 대나라 공격에서는 기두위로 종군했고, 백등산 포위전에서 공이 있어 거기장군이 되었으며 양, 조, 제, 연, 초 다섯 제후국의 전차와 기병을 주관했다. 또 진희의 승상 후창(侯敞)을 무찔렀고 곡역을 항복시켰다. 영포의 난 진압에서도 공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식읍이 늘어 5,300호로 정해졌다.[10]
근흡은 일생동안 90명의 머리를 베었고, 14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도로 14군을 무찔렀고, 59성을 항복시켰고, 1군 1국 23현을 평정했고 왕 1명과 주국 1명, 이천석 이하 5백석까지는 39명을 거두어들였다.[10] 기원전 183년에 죽었고, 시호를 숙(肅)이라 했다.[10]
2. 3. 한신 제거와 이후 활동
근흡은 중연(中涓)으로 고제를 따라 진나라와의 싸움에 참전하여 제양(濟陽) 공격, 이유(李由) 군 격파, 개봉 동쪽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워 임평군(臨平君)에 봉해졌다.[3][4] 이후 남전(藍田) 북쪽에서 진나라 군을 무찌르고 패상(覇上)까지 진격했다.[4] 기원전 206년, 고제가 한왕에 봉해지자 건무후(建武侯) 작위와 기도위(騎都尉)에 봉해졌다.[10][2]옹나라 공격에서 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농서에서 격파하고 농서 6개 현을 평정했다.[5]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고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옹구(雍丘)를 지키면서 한나라를 배반한 왕무(王武) 등을 무찔렀다.[10] 형열(邢說)을 치남에서 격파하고 형열과 도위 등 고위 관료들을 사로잡고 병사들을 항복시켰으며, 형양 동쪽에서 초나라 군대를 물리쳐 식읍 4200호를 받았다.[10]
하내군의 여러 지역에서 전공을 세웠고, 조나라와의 싸움에서 한단을 항복시키고 평양을 함락시켰으며 업을 항복시켰다. 조가, 한단 공격에 종군하여 조나라를 격파했다.[10] 오창에서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적의 양도를 끊고 항관(項冠)을 무찔러 노(魯)를 함락시켰다. 서초 경내 깊숙이 들어가 증(鄫) · 담(郯) · 하비(下邳) · 기(蘄) · 죽읍(竹邑)을 공격했다.[10]
고제 5년, 유고, 노관과 함께 항우에게 항복하지 않은 임강왕 공위를 공격, 강릉을 점령하고 주국, 대사마 등의 항복을 받았다. 임강왕[11] 공위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압송했다.[10] 진하(陳下)에서 초왕 한신을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워 고제 6년 식읍 4600호를 받고 신무후에 봉해졌다.[10][12]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하여 대나라 공격에 기도위로 종군했고, 백등산 포위전에서 공을 세워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13] 양, 조, 제, 연, 초 다섯 제후국의 전차와 기병을 주관했다. 진희의 승상 후창(侯敞)을 격파하고 곡역을 항복시켰으며, 영포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워 식읍이 5,300호로 늘었다.[10]
근흡은 일생동안 90명의 머리를 베었고, 14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도로 14군을 무찔렀고, 59성을 항복시켰고, 1군 1국 23현을 평정했다. 왕 1명, 주국 1명, 이천석 이하 5백석까지 39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10] 고후 5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숙(肅)이라 했다.[10]
2. 4. 사망과 평가
근흡은 고제를 따라 진나라와의 싸움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기원전 206년 한왕에 봉해진 고제를 따라 건무후, 기도위에 봉해졌다.[10] 흉노를 막기위해 배치된 한왕 신이 고제를 배반하고 흉노에 투항하여 시작된[13] 대나라 공격에 기도위로 종군했고, 백등산 포위전에서 공이 있어 거기장군이 되었으며 양, 조, 제, 연, 초 다섯 제후국의 전차와 기병을 주관했다.[10]근흡은 일생동안 90명의 머리를 베었고, 14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도로 14군을 무찔렀고, 59성을 항복시켰고, 1군 1국 23현을 평정했다. 또 왕 1명과 주국 1명, 이천석 이하 5백석까지는 39명을 거두어들였다.[10] 고후 5년(기원전 183년)에 죽었고, 시호를 숙(肅)이라 했다.[10]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부관과 근흡을 함께 언급하며 "이 두 사람은 고조 유방을 따라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군을 공격하여 장수를 베고 군대를 격파하여 성을 함락시킨 것이 수십 번에 달했지만, 위험과 치욕을 겪지 않았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다[9]"라고 평가했다.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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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흡이 죽은 후, 아들 이후(夷侯) 근정이 이었다. 18년 후, 봉국에서 조세를 너무 많이 거둔 죄를 물어 지위를 빼앗기고 봉국이 폐지되었다.
원강 4년(기원전 62년) 근흡의 현손의 아들인 장안상조(長安上造) 근안한이 조서를 받고 가문을 일으켰다.
4. 평가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부관과 근흡을 함께 언급하며 "이 두 사람은 고조 유방을 따라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군을 공격하여 장수를 베고 군대를 격파하여 성을 함락시킨 것이 수십 번에 달했지만, 위험과 치욕을 겪지 않았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다[9]"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Qin, Former Han and Xin Periods, 221 BC - AD 24
[2]
문서
小竹『史記』
[3]
문서
陳 (2012)
[4]
문서
陳 (2012)
[5]
문서
陳 (2019)
[6]
서적
史記列伝 二
https://dl.ndl.go.jp[...]
冨山房
[7]
문서
小竹『史記』
[8]
문서
三家注・傅靳蒯成列伝
[9]
문서
小竹『史記』
[10]
위키문헌
사기 권98 부근괴성열전
:zh:史記/卷098
[11]
문서
사기와 한서의 자기 열전에는 강릉왕(江陵王)이라 한다
[12]
위키문헌
위와 같음,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제2
:zh:史記/卷018
[13]
위키문헌
위와 같음, 권93 한신노관열전제33
:zh:史記/卷093
[14]
문서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15]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16]
문서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7]
문서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18]
문서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19]
문서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20]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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