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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희 (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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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두희는 1941년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해군 법무관을 거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된 이후, 대검찰청 중수부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차관,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검찰총장 재임 3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퇴임 후에는 이회창 후보의 외곽 조직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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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희 (법조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김두희
원어명금두희
로마자 표기Kim Doo-hee
출생일1941년 1월 10일
출생지대한민국
국적대한민국
학력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직업법조인
배우자조정진
경력
주요 경력제24대 대한민국 검찰총장
제43대 법무부 장관
상훈
훈장황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2. 생애

김두희는 1966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된 후,[2] 대검찰청 중수부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차관,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1992년 제24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에 취임했다.[7]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되었다.[13]

김상희 (법조인)는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의 사촌 동생이며, 홍석현 회장의 5촌 당고모가 김상희 (법조인)의 모친이다.[15]

1993년 공직자 재산 공개 당시 김두희는 총 777,782,456원을 신고했다.[16] 재산 내역은 다음과 같다.

소유자구분상세 내역금액(원)
본인아파트서울 서초구 방배동 55평형323,000,000
본인자동차쏘나타3,600,000
본인예금대한투자신탁104,955,530
하나은행40,000,000
국민은행3,139,500
외환은행3,266,040
본인주식한일은행 2000주20,000,000
주식회사 진도 918주9,180,000
본인회원권관악컨트리크럽21,500,000
한원컨트리클럽13,500,000
방배스포츠플라자7,500,000
천마산스키장4,000,000
무주리조트 콘도14,000,000
배우자예금대한투자신탁79,910,480
제일은행13,152,812
자동차쏘나타 골드9,000,000
아버지토지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등선산 9곳21,857,280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5곳11,692,890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4곳11,819,530
주택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대지, 건물49,420,500
예금상업증권11,966,486
아버지예금제일은행1,321,318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정락 변호사 등과 함께 이회창 후보 지지 외곽 조직인 부국산악회를 결성했다.[20][21]

2. 1. 출생과 성장

김두희는 1941년 필봉산이 있는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에서 태어났다.[2]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958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62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1975년 국방대학원에서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2년 2월 서울대학교 법학사 학위 취득을 앞두고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2]

2. 2. 학력

1941년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에 있는 필봉산에서 태어난[2] 김두희는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58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수료하고, 1975년 국방대학원을 2년 과정으로 수료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사 학위 취득을 앞둔 1962년 2월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2]

2. 3. 법조 경력

김두희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해군 법무관을 거쳐 1966년 12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2] 초임 검사 시절부터 뛰어난 업무 능력과 판단력을 보였다.[3] 대검찰청 중수부장 재직 시에는 4대 재벌 토지매입 부정 사건을 처리했다.[3]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할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후배 검사가 인사를 오자 "미안하다. 검찰의 아픔을 같이 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며 후배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4] 검찰 인사를 앞두고 안기부에서 박주선 검사가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외곽 조직에 드나들었다는 첩보를 청와대에 올렸고, 박 검사를 좌천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나 김두희는 박 검사에게서 사실이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오히려 좋은 보직을 주었다.

법무부 차관으로 재직하던 1989년 12월 29일, 헌법재판소 전원합의부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과 제5항에 대한 위헌심판 변론에 피청구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그는 "국가보안법은 사상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표출된 행위가 반국가단체 등을 이롭게 하는 경우에만 처벌하므로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에 부합한다"고 주장했으나, 헌법재판소는 위헌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5]

법무부 검찰국장 재직 시절, 김성기 법무부 장관이 '어금니'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로 입이 무겁고 과묵하며 소신파로 알려졌다.[6] 1992년 12월 7일 제24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에 취임하면서 "검찰은 대통령 선거를 맞아 불법행위를 엄단하여 차기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 확보에 앞장설 것이며, 엄정공평과 불편부당의 검찰 정신을 구현하여 국민의 신뢰를 받도록 노력하겠다"는 취임사를 밝혔다.[7]

문민정부 출범 이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김두희는 1993년 5월 3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국가보안법과 안기부 개편 문제에 대해 "공안 수요가 줄어들면 여유 인력을 우리 사회의 구조적, 지능적 범죄수사 분야로 충당하겠다"고 답변했다.[8] 1993년 11월 4일에는 "1961년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사건은 교원노조가 4.19 직후 반공법과 집시법 폐지를 주장하다 검거돼 군사정변 이후 상당수가 해직되고 일부는 특수범죄로 처벌받은 사건"이라며 "특별한 재심 사유가 없는 한 다시 수사에 착수할 수 없다"고 했다.[9] 1994년 8월 29일에는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과 관련하여 "사제와 대학총장이란 특수신분을 가진 박홍 총장이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익명으로 밝히는 점을 감안해 불고지죄로 처벌하기는 곤란하다"고 하면서[10] "주사파를 비롯한 좌익사상 오염원과 배후 조종자들에 대해서는 중형을 구형하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에 대해 가석방과 사면 대상에서 제외하여 정치적 고려에 따른 구속, 석방의 악순환을 차단하겠다"고 말했다.[11] 문민정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367명이라는 지적에 대해 1994년 10월 31일, "국가보안법은 반국가적 활동을 막는 방어적 법이며 북한의 대남 전술을 고려할 때 폐지나 골격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12]

검찰총장 취임 3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김두희는 "부정부패 척결과 국가기강 확립이라는 새 정부의 당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13] 그러나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의원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요구하자 거부 의사를 밝혔고, 이에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은 탄핵을 주장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김두희의 사촌 동생인 김상희 (법조인)가 구속했다.[14]

1993년 5월 검찰 내부의 슬롯머신 사건 비호세력 파문과 관련하여 박종철 (법조인) 검찰총장과 함께 김두희가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다.[17]

1994년 8월 29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하여 "주사파의 뿌리는 1986년 결성된 지하조직 구국학생연맹으로 파악된다"는 내용이 담긴 〈주사파의 실상과 대책〉을 공개했다.[18]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정치권 등에서 전달돼오는 검사의 인사청탁 메모를 보면서 "검사들이 자존심도 없나"라고 한탄했다.[19]

3. 주요 사건 및 논란

김두희는 초임 검사 시절부터 뛰어난 업무 능력과 판단력으로 윗사람들의 총애를 받았다.[3] 대검찰청 중수부장 재직 시에는 4대 재벌 토지매입 부정 사건을 처리하기도 했다.[3]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된 후배 검사가 이임 인사를 왔을 때 "미안하다 검찰의 아픔을 같이 하지 못한게 안타깝다"며 후배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4] 서울지검장 시절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외곽조직 관련 첩보로 인해 한직으로 내쫓길 위기에 처한 박주선 검사에게 "그런 사실이 없다"는 확인을 받고 오히려 좋은 보직을 주기도 했다.

1992년 검찰총장에 취임하면서 "검찰은 이번 대통령 선거를 맞아 특히 선거운동 및 투,개표과정의 불법행위를 엄단해 차기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 확보에 앞장설 것"이라며 "엄정공평과 불편부당의 검찰 정신을 구현해 국민의 신뢰를 받도록 노력하자"는 취임사를 밝혔다.[7] 검찰총장 취임 3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김두희는 "부정부패 척결과 국가기강확립이라는 새 정부의 당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13] 그러나 법무부 장관 재직 시 정치권 등에서 전달되어 오는 검사의 인사청탁 메모를 보면서 "검사들이 자존심도 없나"라고 한탄하기도 했다.[19]

1993년 5월 발생한 검찰 내부의 정덕진 형제가 연루된 슬롯머신 사건 비호세력 파문과 관련하여 당시 박종철 (법조인) 검찰총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다.[17]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정락 변호사 등과 함께 이회창 후보의 외곽 조직인 부국산악회를 조직하여 이회창 후보를 보좌했다.[20][21]

3. 1. 국가보안법 관련 논란

1989년 12월 29일 헌법재판소 전원합의부(주심 이시윤 재판관) 대심판정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과 제5항에 대한 위헌심판 변론에서 법무부 차관이었던 김두희는 피청구인 자격으로 출석하여 "국가보안법은 마음 속에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 표출된 행위가 반국가단체 등을 이롭게 하는 경우에 한하여 처벌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의 정신에 부합하는 법률"이라고 진술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위헌 취지의 결정을 하였다.[5]

문민정부 출범 후 법무부 장관에 기용된 김두희는 1993년 5월 3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국가보안법과 안기부 개편 문제가 나오자 "공안 수요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되면 여유 인력을 우리 사회의 구조적 지능적 범죄수사분야로 충당하겠다"고 답변했다.[8] 11월 4일에는 "1961년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사건은 교원노조가 4.19 직후 반공법과 집시법 폐지를 주장하다 검거돼 군사정변 이후 상당수가 해직되고 일부는 특수범죄로 처벌받은 사건으로 알고 있다"며 "특별한 재심 사유가 없는 한 다시 수사에 착수할 수 없다"고 했다.[9]

1994년 8월 29일에는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과 관련하여 "야당에 주사파가 750명 있다고 했다가 여당을 포함한 숫자 또는 각계를 망라한 숫자라는 등 여러 가지 말을 해왔다"며 수사 촉구에 대해 "사제와 대학총장이란 특수신분을 가진 박홍 총장이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익명으로 밝히는 점을 감안해 불고지죄로 처벌하기는 곤란하다"고 하면서, "주사파를 비롯한 좌익사상 오염원과 배후 조종자들에 대해서는 중형 구형으로 사회로부터 상당기간 격리시키겠다",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에 대해 가석방과 사면 등 대상에서 제외하여 정치적 고려에 따른 구속, 석방의 악순환을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또 "주사파가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86년 1월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경우는 800여명이며 1987년 6.29 선언 이후 현재까지 11번의 특별사면 복권 조치 과정에서 주사파 일부 학생이 포함됐다"고 말했다.[10][11]

1994년 10월 31일, 문민정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367명이라는 지적에 대해 "국가보안법은 반국가적 활동을 막는 방어적 법이며 최근 북한의 대남 전술로 볼 때 폐지나 골격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검찰의 독립과 중립성 확보를 위한 제도와 관행 등 모든 면에서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발전시키겠다"고 했다.[12]

같은 해 8월 29일 국회 법사위 현안보고에서는 "주사파의 뿌리는 1986년 결성된 지하조직 구국학생연맹으로 파악된다. 1985년 10월부터 서울법대, 서울공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구국의 소리’방송에서 보내는 ‘정치사상강좌’ ‘정치철학강좌’ 등을 집중적으로 듣고 북한의 대남(對南)혁명노선인 민족해방인민 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학습하면서 주사파의 실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긴〈주사파의 실상과 대책〉을 공개했다.[18]

3. 2. 12.12 군사반란 관련 논란

1993년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인 민주당 의원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 군사반란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 요구에 대해 김두희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로 인해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 탄핵 주장이 제기되었다.[14] 김두희의 사촌 동생인 김상희 (법조인)는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했다.[14] 김상희 (법조인)는 법무부 차관 재직 시절 "첫 번째 할아버지의 손자가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이고, 두 번째 할아버지의 손자가 저이며, 세 번째 할아버지의 외손자가 홍석현 회장이고, 홍석현 회장 모친이 나의 5촌 당고모"라고 밝혔다.[15]

3. 3. 기타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에 있는 필봉산에서 1941년에 태어난 김두희는 초임 검사 시절부터 업무 능력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윗사람의 총애를 받았다.[2][3]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할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후배 검사가 이임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미안하다 검찰의 아픔을 같이 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며 후배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4] 서울지검장 시절, 검찰 인사를 앞두고 안기부에서 “박주선 검사가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외곽조직인 연청 사무실에 드나든 장면이 목격됐다”는 첩보가 청와대에 올라갔고, 박 검사를 “한직으로 내쫓으라”는 지시가 검찰 쪽에 전달됐다. 그러나 김 전 장관은 박 검사를 불러 “그런 사실이 없다”는 확인을 받고 “자네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한 뒤 되레 박 검사에게 좋은 보직을 줬다.

1989년 12월 29일 법무부 차관으로 재직하던 중 헌법재판소 전원합의부(주심 이시윤 재판관) 대심판정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과 제5항에 대한 위헌심판 변론에서 피청구인 자격으로 출석하여 "국가보안법은 마음 속에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 표출된 행위가 반국가단체 등을 이롭게 하는 경우에 한하여 처벌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의 정신에 부합하는 법률"이라고 진술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위헌 취지의 결정을 하였다.[5] 김성기 법무부 장관이 '어금니'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로 입이 무겁고 과묵하며 소신파로 알려졌다.[6]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법무부 장관에 기용된 김두희는 1993년 5월 3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국가보안법과 안기부 개편 문제가 나오자 "공안 수요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되면 여유 인력을 우리 사회의 구조적 지능적 범죄수사분야로 충당하겠다"고 답변했다.[8] 1993년 11월 4일에는 "1961년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사건은 교원노조가 4.19 직후 반공법과 집시법 폐지를 주장하다 검거돼 군사정변이후 상당수가 해직되고 일부는 특수범죄로 처벌받은 사건으로 알고 있다"며 "특별한 재심 사유가 없는 한 다시 수사에 착수할 수 없다"고 했다.[9] 1994년 8월 29일에는 "야당에 주사파가 750명 있다고 했다가 여당을 포함한 숫자 또는 각계를 망라한 숫자라는 등 여러 가지 말을 해왔다"며 박홍 서강대 총장에 대한 수사 촉구와 관련하여 "사제와 대학총장이란 특수신분을 가진 박홍 총장이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익명으로 밝히는 점을 감안해 불고지죄로 처벌하기는 곤란하다"고 하면서[10] "주사파를 비롯한 좌익사상 오염원과 배후 조종자들에 대해서는 중형 구형으로 사회로부터 상당기간 격리시키겠다"며 "개전의 정이 없는 자들에 대해 가석방과 사면 등 대상에서 제외하여 정치적 고려에 따른 구속, 석방의 악순환을 차단하겠다 주사파가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86년 1월이후 현재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경우는 8백여명이며 1987년 6.29 선언 이후 현재까지 11번의 특별사면 복권 조치 과정에서 주사파 일부 학생이 포함됐다"고 말했다.[11] 문민정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가 367명이라는 지적에 대해 1994년 10월 31일에 "국가보안법은 반국가적 활동을 막는 방어적 법이며 최근 북한의 대남 전술로 볼 때 폐지나 골격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 검찰의 독립과 중립성 확보를 위한 제도와 관행 등 모든 면에서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발전시키겠다"고 했다.[12]

검찰총장 취임 3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김두희는 "부정부패 척결과 국가기강확립이라는 새 정부의 당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13]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인 민주당 의원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 요구가 있자 거부 의사를 밝혀 야당인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으로부터 탄핵 주장이 제기되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김두희의 사촌 동생인 김상희 (법조인)가 구속했다.[14] 김상희 (법조인)는 법무부 차관에 재직할 때 "첫번째 할아버지의 손자가 김두희 전 법무부장관이고, 두번째 할아버지의 손자가 저이며, 세번째 할아버지의 외손자가 홍석현 회장, 홍석현 회장 모친이 나의 5촌 당고모"이라고 밝혔다.[15]

1993년 3월 공직자 재산 공개를 하였다.[16] 1994년 8월 29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하여 현안보고를 하면서 "주사파의 뿌리는 1986년 결성된 지하조직 구국학생연맹으로 파악된다. 1985년 10월부터 서울법대, 서울공대의 운동권 학생들이 ‘구국의 소리’방송에서 보내는 ‘정치사상강좌’ ‘정치철학강좌’ 등을 집중적으로 듣고 북한의 대남(對南)혁명노선인 민족해방인민 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학습하면서 주사파의 실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긴〈주사파의 실상과 대책〉을 공개했다.[18]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정치권 등에서 전달돼오는 검사의 인사청탁 메모를 보면서 "검사들이 자존심도 없나"라고 한탄했다.[19]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정락 변호사 등과 함께 이회창 후보의 외곽 조직인 부국산악회를 조직하여 이회창 후보를 보좌했다.[20][21]

4. 경력

wikitext

연도직책
1965년해군 법무관, 통제부(현 진해기지사령부) 법무관실 실장
1966년 2월 ~ 1969년 11월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67년 5월법무부 법무관실 검사
1973년 7월대검찰청 검찰연구관
1974년 9월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75년 9월국방대학원 파견
1975년 10월광주고등검찰청 검사
1976년 7월법무부 검찰2과 과장
1979년 3월부산지방검찰청 특수1부 부장
1980년 6월법무부 검찰1과 과장
1980년 10월 ~ 1981년 12월청와대 사정비서관
1981년 12월 ~ 1982년 6월서울고등검찰청 차장
1982년 6월 ~ 1983년 8월대검찰청 형사2부 부장
1983년 8월 ~ 1985년 3월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
1985년 3월 ~ 1987년 6월법무부 검찰국 국장
1987년 6월 ~ 1989년 3월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1989년 3월 ~ 1991년 4월제31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
1991년 4월 ~ 1992년 12월제23대 대한민국의 대검찰청 차장검사
1992년 12월 ~ 1993년 3월제24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
1993년 3월 8일 ~ 1994년 12월 23일제43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1995년 9월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28395#home 변호사 김두희 법률사무소]
1996년 10월 ~사단법인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
1996년 11월 ~ 2005년 8월성균관대학교 이사
1999년 1월 ~ 2007년 4월유민문화재단 감사
2001년 4월 ~ 2007년 4월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2003년 12월 ~ 2015년 12월중부재단 이사
2007년 10월 ~서암학술장학재단 이사
2009년 7월 ~ 2013년 7월세종재단 비상근이사
2012년 3월 21일 ~ 2013년 3월 21일한국컴퓨터 사외이사
2013년 3월 21일 ~ 2014년 3월 21일한국컴퓨터 사외이사 재선임[22]
2014년 3월 13일 ~한국기원 고문[23]
(사)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


5. 재산

1993년 3월 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김두희는 본인 명의의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아파트 55평형(3.23억), 쏘나타 자동차(360만), 예금(대한투자신탁 1.0495553억, 하나은행 4000만, 국민은행 313.95만, 외환은행 326.604만), 주식(한일은행 2000주 2000만, 주식회사 진도 918주 918만), 회원권(관악컨트리클럽 2150만, 한원컨트리클럽 1350만, 방배스포츠플라자 750만, 천마산스키장 400만, 무주리조트 콘도 1400만)을 신고했다.[16]

아내 조정진 명의로는 예금(대한투자신탁 7991.048000000001만, 제일은행 1315.2812000000001만), 쏘나타 골드 자동차(900만)를 신고했다. 아버지 김용탁 명의로는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등선산 등 9곳 206953m2(2185.728만), 밭(생초면 5곳, 2108m2, 1169.289만), 논(생초면 4곳, 1181.953만), 주택(생초면 대지 2134m2, 4694.8만, 건물 141m2 247.25만), 예금(상업증권 1196.6486만, 제일은행 132.1318만)을 신고하여 총액 7.77782456억이었다.[16]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명의품목세부 내역가액 (원)
본인김두희아파트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55평형3.23억
본인김두희자동차쏘나타360만
본인김두희예금대한투자신탁1.0495553억
하나은행4000만
국민은행313.95만
외환은행326.604만
본인김두희주식한일은행 2000주2000만
주식회사 진도 918주918만
본인김두희회원권관악컨트리클럽2150만
한원컨트리클럽1350만
방배스포츠플라자750만
천마산스키장400만
무주리조트 콘도1400만
배우자조정진rowspan="3"|대한투자신탁7991.048000000001만
제일은행1315.2812000000001만
쏘나타 골드900만
부친김용탁rowspan="6"|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등선산 등 9곳 (206953m2)2185.728만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5곳 (2108m2)1169.289만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4곳1181.953만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대지 (2134m2)4694.8만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건물 (141m2)247.25만
상업증권1196.6486만
총액7.77782456억


참조

[1] 뉴스 경향신문 1993-03-09
[2]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ww.nongmin.[...] 2018-12-21
[3] 뉴스 동아일보 1989-03-27
[4]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4-11-24
[5]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89-12-30
[6] 뉴스 한겨레 1992-12-01
[7] 뉴스 한겨레 1992-12-08
[8] 뉴스 매일경제 1993-05-04
[9] 뉴스 동아일보 1993-11-04
[10]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94-08-30
[11]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매일경제 1994-08-30
[12]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94-11-01
[13] 뉴스 동아일보 1993-03-09
[14] 뉴스 https://news.naver.c[...]
[15] 뉴스 https://news.naver.c[...]
[16]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93-03-19
[17]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sisaon.co[...] 2018-12-21
[18] 웹사이트 http://monthly.chosu[...]
[19] 뉴스 https://news.naver.c[...]
[20] 뉴스 https://news.naver.c[...]
[21] 뉴스 https://news.naver.c[...]
[22] 뉴스 https://news.naver.c[...]
[23] 웹사이트 http://sports.kh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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