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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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및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동래에서 태어나 휘문의숙, 경성공업학교, 일본 니혼 대학을 졸업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조선노동공제회 간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으나, 1945년 해방 후에는 우익으로 전향하여 한국민주당 조직부장, 민중동맹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북한에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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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금릉 대학 동문 - 조동호
조동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으로, 여운형과 함께 중국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선공산당 설립 참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 휘문고등보통학교 동문 -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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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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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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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약수 |
한글 | 김약수 |
한자 | 金若水 |
가타카나 | 기무 야쿠스 |
히라가나 | きん じゃくすい |
출생일 | 1890년 10월 21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기장군 읍내면 동부동 (現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
사망일 | 1964년 1월 10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직업 | 정치가 |
부모 | 김은홍(부) |
정치 경력 | |
정당 | 무소속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 |
경력 | 조선공산당 당무위원 겸 상임위원 대한민국 한국민주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대한민국 조선공화당 국회의원 대한민국 조선공화당 최고위원 대한민국 민주국민당 국회의원 대한민국 민주국민당 당무위원 겸 상임고문 대한민국 무소속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 |
학력 | |
학력 | 중화민국 장쑤 성 난징 진링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관련 인물 | |
친척 | 김두봉 (조카), 박차정 (조카) |
2. 생애
김약수는 경상남도 기장군(동래군을 거쳐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출신으로, 동래군 기장 사립 보명학교, 휘문의숙, 경성공업학교, 일본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했다.[1][3]
1918년 김원봉, 이여성 등과 함께 중화민국 금릉대학(현 난징 대학)에 유학했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으로 돌아왔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를 설립해 간부로 활동했지만 곧 체포되었다. 1921년 일본 대학에 입학하여 박열 등과 흑도회를 결성하고, 사회주의 잡지 『대중시보』를 간행하며 일본 사회주의 동맹에도 가입했다. 1922년 북성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조선에서 건설사를 조직했다. 같은 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재달과 접촉해 다시 구금되었다.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설립하고, 코민테른 간부에 취임하여 북풍회를 형성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설립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10년 가까이 감옥에서 보냈다.[1]
해방 후, 김약수는 좌파 노선에서 이탈하여 한국민주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0월 김규식을 총재로 하는 민중동맹에 참가해 상임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12월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관선 의원으로 지명되었지만, 1947년 5월 조선공화당을 창립하여 서기장에 취임했다. 1948년 제1대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국회 부의장을 맡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남로당 국회 프락치(공작원)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출옥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으로 넘어갔다. 1956년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을 역임했지만[4], 1959년 반당, 반혁명 분자로 숙청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1]
2. 1. 생애 초기
김약수는 경상남도 기장군(동래군을 거쳐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읍내면 동부동에서 김은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두전이었다.[1][3] 어릴 적 이름은 김두전, 또는 김두희였다.[1]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을 거쳐 경성공업학교로 진학했다. 경성공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일본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대학 졸업 후 귀국, 고향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기장광복회 회장을 맡았다.[1]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김원봉(약산)과 이여성(천장)과 가깝게 지냈다. 1918년 고향 기장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갔다.[1] 이때 김원봉과 함께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개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작명을 할 줄 알았던 김원봉 인척의 도움으로 이름을 약수와 약산으로 각각 바꾸었다고 한다.
1918년 중국 난징에 도착한 김약수는 금릉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 후, 김원봉과 함께 서간도로 건너가 군대를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잡지를 발간하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김약수는 군대 양성을 위한 둔전과 비용 마련을 위해 만주 지린성으로 떠났다. 그러나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대중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20년 김원봉, 이여성과 작별하고 귀국했다.[1] 김원봉은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하였고, 이여성은 ML계, 김약수는 북풍회 계열로 각각 다른 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2. 2. 독립운동
1918년 김원봉, 이여성 등과 함께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현 난징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던 중, 서간도로 건너가 군대를 조직하고 상해에서 잡지를 발간하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1] 이때 김원봉과 함께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각각 약수와 약산으로 개명하였다.김약수는 군대 양성을 위한 둔전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 길림성으로 떠났으나,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대중을 기초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20년 귀국했다. 김원봉은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여성은 ML계로, 김약수는 북풍회 계열로 각각 다른 길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상무간사에 위촉되었고,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박열, 조봉암, 김사국 등과 함께 흑도회를 조직하였다.[1] 1922년 2월 귀국 후, 흑도회 내 무정부주의자들과 결별하고 북성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이념 보급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1924년 11월 조선 내 북성회 본부인 북풍회를 결성하였는데, "북풍이 한 번 불게 되면 빈대나 모든 기생충이 날아가 버린다."는 속언에서 따온 이름이었다.[1] 북풍회는 분열되어 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결집시켜 국내 최대의 역량을 가진 사회주의 운동단체로 성장하였다.
1925년 전국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여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당 인사부 책을 맡았지만, 당내 주도권을 놓고 화요회계와 갈등을 겪다가 그해 10월 비판받고 제명당하였다. 곧이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김약수와 주요 간부들의 구속으로 1930년대 북풍회는 조직 활동에 차질을 빚다가 와해되었다. 석방 후 1931년 5월 북풍회계의 송태우와 함께 잡지 "비판"을 발간하였다. 그 뒤 이인의 식객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 예비검문·검속을 받았다. 1942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제로부터 임전보국단 가입을 권고받았으나 거절했다는 이유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
2. 3. 광복 이후 활동
해방 직후 김약수는 여운형 계열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에 의해 건준이 좌경화되자 이에 반발하여 사퇴하였다.[5]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자, 그는 박헌영을 강하게 비판하며 인공내각 수립에 반대했다.[5] 1945년 9월, 좌익 진영에서 전향하여 우익 진영인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 조직부장을 맡았다.1945년 12월,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6]
이후 한민당의 정치 노선에 싫증을 느껴 1946년 10월 한민당을 탈당했다. 김규식을 총재로 하는 민족자주연맹 창립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직을 맡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12월 제2차 미소공위 결렬로 실패하고 해체되었으며, 이후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김약수는 현실적인 노선으로 선회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2.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5.10 총선거 때 경상남도 동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5월 30일 국회 개회 시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1]1949년 2월 초, 김약수는 70명의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미군 철군을 요구하는 '의원청원서'와 '정부불신임표결 건의서'를 작성하여 모든 장관들의 사임을 요구하는 등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그는 국회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었으나, 좌익으로 몰려 이승만 대통령의 미움을 샀다.[1]
1949년 6월,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기소되었다. 첫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 석방되었으나, 이후 15회나 공판을 받게 하여 김약수 등 국회의원 6명을 비롯한 10여 명 모두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들은 항소하여 서울고등법원에 계류 중이었으나, 6.25 전쟁 발발로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북한으로 넘어갔다.[1]
2. 5. 월북과 사망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으로 넘어갔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반김일성운동을 하다 1959년 반당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고 숙청, 평안북도 산골로 추방되어 고생하다가 사망했다.[1]3.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8년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조선공화당 | 17,455표 (66.28%) | 1위 | 당선 | 초선 |
참조
[1]
웹사이트
김약수(金若水)
https://encykorea.ak[...]
2023-05-15
[2]
웹사이트
조선어학자 김두봉 선생 조카 박차정
http://www.yangsanil[...]
2023-09-15
[3]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3-05-15
[4]
서적
現代朝鮮人名辞典 1962年版
世界ジャーナル社
1962-08-01
[5]
문서
[6]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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