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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 (조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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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마르는 1160년경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와 알라니아의 부르두칸 사이에서 태어났다. 118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지아의 단독 군주가 되었으며,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여성 통치자였다. 타마르는 귀족 세력과의 갈등, 두 번의 결혼, 외교 정책과 군사 작전을 통해 조지아의 세력을 확장했으며, 특히 1204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붕괴를 틈타 트레비존드 제국 건국을 지원했다. 그녀의 치세는 조지아 문화의 황금기로 평가받으며, 쇼타 루스타벨리의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타마르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현대 조지아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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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 (조지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바르지아 프레스코에 묘사된 타마르
바르지아의 성모 승천 교회 프레스코
군주 칭호조지아 여왕
재위 기간1184년 3월 27일 – 1213년 1월 18일
대관식1178년 (공동 통치)
1184년 (여왕 즉위)
겔라티 수도원
전임자게오르게 3세
후임자게오르게 4세
배우자유리 보골류프스키 (1185–1187)
다비트 소슬란 (1191–1207)
자녀게오르게 4세
루수단
왕가바그라티오니 왕조
아버지게오르게 3세
어머니알라니아의 부르두칸
출생일기원후 1160년경
사망일1213년 1월 18일 (52–53세)
사망 장소아가라니 성
종교조지아 정교회
서명Tamar signature.svg
헬르트바Khelrtva
이름
통치 스타일
추가 정보(더 보기...)

2. 유년기와 왕위 등극

타마르는 1160년경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와 알라니아 왕의 딸인 왕비 부르두칸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마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기원했으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따르는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86]

타마르의 유년기는 귀족 세력의 반란과 왕위 계승 다툼으로 점철된 격동기였다. 1177년 타마르의 아버지 게오르게 3세는 귀족 파벌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반란자들은 게오르게 3세를 폐위시키고, 다비트 5세의 아들이자 게오르게 3세의 조카인 뎀나를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뎀나의 왕위 계승권은 귀족들이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구실로 이용되었다.[87]

게오르게 3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을 처벌했다. 이바네 오르벨리는 처형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조지아 밖으로 추방되었다. 뎀나 왕자는 거세되고 장님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죽었다.[88] 게오르게 3세는 왕위 계승 분쟁을 막기 위해 1178년에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89] 그와 동시에, 게오르게 3세는 중앙집권적인 귀족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상류층 귀족들과 비주류 계층 사람들을 요직에 임명했다.[90]

3. 통치 초기와 첫 번째 결혼

타마르 통치 시대의 조지아 왕국 최대 영토, 조공국 및 세력권.


타마르는 조지아의 왕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와 알라니아 왕의 딸인 왕비 부르두칸 사이에서 1160년경에 태어났다. 1178년 아버지 기오르기 3세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고, 1184년에 기오르기 3세가 사망하자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타마르 여왕의 결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왕조의 명령과 당시의 시대 정신에 따라, 귀족들은 군대를 이끌고 왕위를 계승할 상속자를 얻기 위해 타마르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3][11] 귀족들의 선택은 블라디미르-수즈달의 공작 안드레이 1세 보고류브스키의 아들이자 북 코카서스의 킵차크족 사이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유리 보고류브스키였다. 1185년 타마르는 유리와 결혼했다.

유리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어려운 사람이었고 곧 타마르와 갈등을 빚었다.[3][11] 결국 타마르는 1187년 유리와 이혼하고 그를 추방했다. 타마르는 점차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대하고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궁정의 고위직에 임명했는데, 특히 므카르그르젤리 가문이 두드러졌다.[13]

사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유통되는 50 라리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3. 1. 귀족 세력과의 갈등

타마르는 1184년 아버지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가 사망한 후 6년 동안 공동 통치자로서 함께 통치하다가, 단독 군주가 되어 서부 조지아 쿠타이시 근처의 겔라티 수도원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올렸다. 타마르는 비교적 강력한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대귀족들이 조장한 구심력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10] 조지아는 이전에 여성 통치자를 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의 일부는 타마르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젊음과 약점을 이용하여 스스로 더 큰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다.[10] 타마르의 영향력 있는 고모 루수단과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 4세의 적극적인 참여는 타마르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12] 그러나 젊은 여왕은 귀족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그녀는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의 지지를 보상하기 위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해야 했고, 이로써 그는 성직 및 세속 계층의 수장이 되었다.[13]

타마르는 또한 아버지의 임명자들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조지 3세가 반항적인 귀족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비천한 출신의 조지아 킵차크족 출신 쿠바사르라는 경찰청장이 있었다.[11] 조지 3세의 몇 안 되는 무관직 시종 중 이 운명을 면한 사람 중 한 명은 재무 쿠틀루 아르슬란이었는데, 그는 이제 새로운 평의회인 ''카라비''를 만들어 왕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귀족 및 부유한 시민들의 그룹을 이끌었다. 이 평의회의 구성원만이 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13] 이 "봉건 입헌주의" 시도는 타마르가 쿠틀루 아르슬란을 체포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복종시킨 후 무산되었다.[11] 그러나 귀족 엘리트의 권력을 줄이려는 타마르의 첫 번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교회 시노드를 이용하여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을 해임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귀족 평의회인 다르바지는 왕실 칙령을 승인할 권리를 주장했다.[13]

4. 두 번째 결혼

1189년 타마르는 알라니아 왕자 다비트 소슬란과 재혼했다.[95] 바쿠시티는 다비트 소슬란을 11세기 초반의 조지아 왕 게오르게 1세의 후손이라고 기술했다.[95] 다비트는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 타마르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고, 유리에게 합류하여 모략을 일삼던 반란 귀족들을 물리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6]

타마르와 다비트는 두 자녀를 두었다. 1191년 여왕은 아들 게오르게(훗날 게오르게 4세)를 낳았고, 왕국은 이를 널리 알리고 축하 행사를 열었다. 딸 루수단은 1193년에 태어났으며, 훗날 오빠의 뒤를 이어 조지아의 군주가 되었다.[18]

예술 작품, 헌장, 동전에서도 나타나는 국서(國婿) 다비트의 지위는 왕의 위엄에 남성적인 면모도 필요하다는 점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타마르와 왕위를 공유하고 타마르에게서 권력을 얻는 하급 통치자에 머물렀다.[96][97] 타마르는 "왕중 왕"(''메페타 메페'')이라고 불렸다. 조지아어에서 문법상 성별이 없는 ''메페''("왕")는 남성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으며 "주권자"로 번역될 수 있다.[98][99]

5. 외교 정책과 군사 작전

타마르는 선왕들의 팽창주의 정책을 계승하여 주변 무슬림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1190년대 초,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와 시르반샤의 내정에 간섭하여 시르반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1195년 샴코르 전투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 아부 바크르를 격파하고[92], 그의 수도를 한때 조지아의 보호하에 두었다.[100][101] 비록 아부 바크르는 1년 후 통치를 재개했지만, 이후 조지아의 추가적인 공격을 거의 막아내지 못했다.[22][23]

아르메니아 해방은 조지아 외교 정책의 중요한 과제였다. 타마르의 군대는 자카레와 이바네 므카르그르젤리 형제가 이끌었으며, 아라라트 평원의 요새와 도시들을 점령하며 무슬림 통치자들로부터 영토를 되찾았다.

룸 셀주크 술탄 술레이만 2세는 조지아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봉신 에미르들을 소집하여 조지아를 공격했지만, 1203년 또는 1204년 바시안 전투에서 다비드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 군에게 패배했다.[103][104] 타마르의 연대기 작가는 조지아 군이 바르지아의 동굴 도시에 집결했고, 여왕이 교회 발코니에서 군대에 연설했다고 기록했다.[24] 1203년부터 1205년 사이에 조지아는 드빈을 점령하고[25] 아흘라트샤의 영토에 두 번 진입하여 카르스 에미르, 아흘라트샤, 에르주룸과 에르진잔 에미르들을 정복했다.

1206년 조지아 군은 카르스와 아라크세스 강변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1209년, 조지아는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아이유브 왕조에 도전하며 남부 아르메니아 해방 전쟁을 이끌었다. 조지아 군이 클라트를 포위하자, 아이유브 술탄 알 아딜 1세는 대규모 무슬림 군대를 소집하여 지원했다. 포위 중 조지아 장군 이바네 므카르그르젤리가 아이유브 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바네는 30년 휴전과 교환 조건으로 풀려났고, 이는 아이유브 왕조에 대한 조지아의 즉각적인 위협을 종식시켰다.[26] 반 호 지역은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조에 남게 되었다.[28]

1209년, 므카르그르젤리 형제는 아르다빌을 약탈했는데, 이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지역 무슬림 통치자의 아니 공격과 기독교 주민 학살에 대한 복수였다.[27] 므카르그르젤리 형제는 나흐치반과 줄파를 거쳐 이란 북부의 마란드, 타브리즈, 가즈빈까지 진격하며 여러 정착지를 약탈했다.[27]

5. 1. 트라페준타 제국 건국 지원

1204년,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이 붕괴하자, 타마르는 비잔티움 황족인 알렉시오스 1세와 다비트 형제를 지원하여 트라페준타 제국 건국을 도왔다.[78]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타마르의 친척으로, 조지아 왕실에서 자란 망명 비잔티움 왕자들이었다.[29]

타마르의 공식 역사가는 조지아의 트라페준타 원정 목적이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4세 앙겔루스가 조지아 여왕이 안티오크와 아토스 산에 보낼 헌금을 강탈한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설명했다.[30] 그러나, 타마르의 폰티크 원정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항하는 서유럽제4차 십자군 전쟁을 기회로 활용해 조지아 서남쪽의 바로 인접한 영토에 콤네노이에 의해 건국된 우방국을 두려는 그녀의 열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30]

5. 2. 중동 지역에서의 활동

타마르는 국제 무대에서 조지아의 위상을 높이고 중동 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고자 했다.[110][111] 조지아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남캅카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지중해 동부 전역에는 조지아인 수도원 공동체들이 있었다. 타마르의 공식 연대기는 이집트에서 불가리아와 키프로스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수도원을 후원하고 기독교를 보호한 타마르의 업적을 찬양한다.[112]

조지아 왕실은 특히 성지에 있는 조지아 수도원들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12세기경 예루살렘에는 8개의 조지아 수도원이 있었다.[113] 살라딘의 전기 작가 바하 아드-딘 이븐 샤드다드의 기록에 따르면, 1187년 아이유브 왕조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타마르는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에 있는 조지아 수도원의 재산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살라딘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타마르의 노력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타마르 사후 아크레의 주교가 된 자크 드 비트리는 조지아인들이 다른 기독교 순례자들과 달리 깃발을 휘날리며 예루살렘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븐 샤드다드는 또한 타마르가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성십자가의 유물을 얻기 위해 비잔티움 황제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살라딘에게 200000USD 금화를 제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110][112]

6. 황금 시대

타마르의 치세는 조지아 역사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다.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고, 봉건제가 발전했다.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여 경제가 번영했으며,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아 국고가 풍족해졌다.

타마르(왼쪽)와 게오르게 3세(오른쪽).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안식 교회에 있는 잔존하는 가장 오래된 타마르의 초상화. 1184~1186년경.


타마르는 6년 동안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 지냈으며, 1184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단독 군주가 되어 서부 조지아 쿠타이시 근처의 겔라티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그녀는 비교적 강력한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대귀족들이 조장한 구심력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타마르의 즉위에 상당한 반대가 있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반발로 촉발되었고, 새로운 군주의 약점인 성별에 대한 반발로 더욱 부추겨졌다.[10] 조지아는 이전에 여성 통치자를 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의 일부는 타마르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젊음을 이용하여 스스로 더 큰 자율성을 확보하려 했다.[10] 타마르의 영향력 있는 고모 루수단과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 4세의 적극적인 참여는 타마르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12] 그러나 젊은 여왕은 귀족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그녀는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의 지지를 보상하기 위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해야 했고, 이로써 그는 성직 및 세속 계층의 수장이 되었다.[13]

타마르는 또한 아버지의 임명자들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조지 3세가 반항적인 귀족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비천한 출신의 조지아 킵차크족 출신 쿠바사르라는 경찰청장이 있었다.[11] 재무 쿠틀루 아르슬란이 주도한 "봉건 입헌주의" 시도는 타마르가 쿠틀루 아르슬란을 체포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복종시킨 후 무산되었다.[11] 그러나 귀족 엘리트의 권력을 줄이려는 타마르의 첫 번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교회 시노드를 이용하여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을 해임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귀족 평의회인 다르바지는 왕실 칙령을 승인할 권리를 주장했다.[13]

타마르 여왕의 결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왕조적 명령과 당시의 시대 정신에 따라, 귀족들은 군대를 이끌고 왕위를 계승할 상속자를 얻기 위해 타마르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3][11] 므카르그르젤리와 아불라산 가문이 타마르의 궁정에서 영향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였고, 아불라산 가문이 승리하여 타마르의 고모 루수단과 봉건 영주 회의에서 그들의 선택을 승인했다.[13] 그들의 선택은 살해된 블라디미르-수즈달의 공작 안드레이 1세 보고류브스키의 아들이자 북 코카서스의 킵차크족 사이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유리 보고류브스키였다. 그는 1185년에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조지아로 보내졌다.[14]

유리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어려운 사람이었고 곧 타마르와 충돌했다.[3][11] 팽팽한 부부 관계는 타마르가 여왕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점점 더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 왕실 궁정에서의 파벌 싸움과 평행을 이루었다.[15] 타마르의 운명이 전환되는 시점은 여왕이 재상으로 자신의 지지자인 안톤 그놀리스타비스제로 교체한 강력한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미하일의 죽음과 함께였다.[15] 타마르는 점차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대하고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궁정의 고위직에 임명했는데, 특히 므카르그르젤리 가문이 두드러졌다.[13]

타마르 시대의 조지아의 정치적, 문화적 업적은 길고 복잡한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타마르는 자신의 업적을 증조부 다비드 4세(1089–1125년 재위)의 개혁과, 11세기 초 조지아 왕국과 공국의 정치적 통합의 주역이 된 다비드 3세와 바그라트 3세의 노력에 힘입었다.[35] 타마르의 통치 말년까지 조지아 국가는 중세 시대에 권력과 위신의 정점에 도달했다. 타마르의 영토는 북쪽의 대(大) 코카서스 산맥에서 남쪽의 에르주룸, 북서쪽의 지기에서 남동쪽의 간자 인근까지 뻗어 있었으며, 북부 및 중앙 아르메니아의 충성스러운 자카리드 정권, 시르반의 종속국, 트라페주스의 동맹을 포함하는 범(汎) 코카서스 제국을 형성했다. 동시대의 조지아 역사가들은 타마르를 "폰토스 해[즉, 흑해]에서 구르간 해[즉, 카스피해], 스페리에서 데르벤드까지, 그리고 하자르와 스키타이까지의 모든 코카서스 지역"의 지배자로 칭송했다.[36][37] 왕실의 칭호도 그에 맞춰 확대되었다.

여왕은 전제적인 권력을 얻지 못했고 귀족 회의는 계속 기능을 했다. 그러나 타마르 자신의 위신과 조지아판 봉건제인 ''파트론크'모바''의 확대로 인해 강력한 왕가 출신 공자들이 왕국을 분열시키는 것을 막았다. 이 시기는 조지아 봉건제의 정점을 찍었다.[41] 이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에 봉건적 관행을 이식하려는 시도는 저항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212년, 조지아 북동부 국경의 프코비와 디도 산악 부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는 3개월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이바네 므카르그르젤리가 진압했다.[42]

조지아의 통제하에 있던 상업 중심지의 번창으로 산업과 상업은 국가와 궁정에 새로운 부를 가져왔다. 주변국에서 징수된 조공과 전쟁 전리품이 왕실 금고에 더해져 "농민은 귀족 같고, 귀족은 공작 같고, 공작은 왕 같다"는 말이 생겨났다.[43][44]

타마르 여왕의 치세 하에 조지아의 봉건 영주들이 입법권 이양을 요구했다. 협상 끝에 여왕에게 입법권과 행정권이 남겨졌지만, 국사는 봉건 영주들로 구성된 회의(다르바지)와 협의하여 해결하기로 했다. 봉건 영주들의 세력 확대로 주민들의 불만이 발생하여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여왕은 이를 진압했다.

6. 1. 문화 발전

타마르 시대는 조지아 문화의 황금기였다. 기독교와 세속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비잔티움과 이란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조지아 문화가 발전했다.[125]

이 시기 조지아의 군주권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강화되었고, 그 지위는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조지아 정교회 건축 양식은 재설계되었으며, 대규모 돔형 성당들이 연이어 건설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권 개념은 타마르 여왕의 독보적인 통치권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현존하는 다섯 개의 기념 교회에 그려진 타마르 여왕의 초상화는 비잔티움의 도상학을 따르면서도, 조지아적인 특징과 페르시아의 이상적인 여성미를 강조했다.[126]

타마르 여왕의 지령으로 복사된 바니 복음서 원고


조지아와 중동의 긴밀한 관계는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혼합된 당대 전설이 새겨진 조지아 주화에서도 나타난다. 1200년경 주조된 동전 앞면에는 타마르의 이름이 비잔틴 양식으로 다양하게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타마르를 "메시아의 투사"로 칭송하는 아랍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127]

타마르의 모노그램이 새겨진 조지아 및 아랍어 문자가 새겨진 구리 동전 (1200년).


당대 조지아 연대기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미덕과 교부 문학이 계속 번성했지만, 독창적인 세속 문학은 쇠퇴했다. 이러한 경향은 쇼타 루스타벨리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베프키스트카오사니)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이 서사시는 기사도 정신을 찬양하며 오늘날 조지아에서 가장 훌륭한 토착 문학 작품으로 칭송받는다.[92][111][128]

7. 죽음과 묘소

세계문화유산인 겔라티 수도원은 타마르 여왕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타마르는 남편 다비트 소슬란보다 오래 살았으며, 아들 게오르게섭정으로 임명한 후 트빌리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참혹한 질병"으로 사망했다. 타마르의 역사가는 여왕이 고리 근교의 나차르메게비 궁전에서 국정을 논의하던 중 갑자기 병에 걸렸다고 전한다. 그녀는 트빌리시와 아그라니 궁전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고, 백성들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시신은 므츠헤타의 대성당을 거쳐 조지아 왕가의 묘지인 겔라티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타마르가 1213년에 사망했다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1207년 또는 1210년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자료도 있다.[129][130]

타마르가 죽은 후, 그녀의 묘소에 대한 많은 전설들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는 타마르가 겔라티의 비밀 니체에 묻혀 적들로부터 묘혈을 보호받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타마르의 유해가 성지에 있는 어느 곳으로 이장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3세기 프랑스 기사 구일라우에 데 보리스는 팔레스타인에서 브장송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지아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사라센의 도시들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친인 "강력한 여왕 타마르"(reine puissante Thamar프랑스어)의 시신을 성묘 교회 근처에 묻었다고 했다.[131][132]

20세기에 타마르의 묘소 탐구는 대중의 관심과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조지아 작가 그리골 로바키제는 1918년 에세이에서 "여태까지, 아무도 타마르의 묘소가 어디있는지 몰랐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없다. 그녀의 묘소는 조지아인들의 마음 속에 있다. 조지아인의 인식 속에 있는 한, 그 곳은 무덤이 아니며 활짝 펴서 시들지 않은 꽃인 타마르 대왕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꽃병이다."라고 하였다.[133] 정교회 아카데미는 타마르의 묘소가 여전히 겔라티에 있다고 보지만, 1920년 에크브티메 타카이슈빌리의 고고학적 연구를 포함한 여러 연구에서도 묘소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134]

8. 유산과 대중 문화

타마르 여왕은 조지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조지아의 황금시대를 이끈 통치자로 기억된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타마르는 조지아의 국가적 상징이자 영웅으로 숭배되어 왔다.

쇼타 루스타벨리를 포함한 여러 중세 조지아 시인들은 타마르에게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창작했다. 특히 루스타벨리의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는 타마르 여왕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타마르를 찬양하는 ''타마리아니'', ''압둘-메시아''와 같은 작품들이 창작되었으며, 연대기에는 "과부의 보호자", "세 번 축복받은 자"로 칭송되며 그녀의 미덕이 강조되었다.[18] 타마르는 생전에 바니 복음서 발문에서 성인으로 언급되기도 했다.[54]

시간이 지나면서 타마르의 이미지는 전설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변화했다. 민요, 시, 이야기에서 그녀는 이상적인 통치자이자, 때로는 이교의 신이나 기독교 성인의 속성이 투영된 성녀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오세티야 전설에서는 타마르가 햇빛을 통해 아들을 잉태하며, 조지아 산악 지대의 신화에서는 겨울을 다스리는 신과 동일시되기도 한다.[59]

19세기 낭만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에 들어, 조지아는 러시아와 서구 문학에서 동양적인 경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고, 타마르는 "코카서스 세미라미스"로 불리기도 했다.[65] 러시아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낭만적인 시 〈타마라〉에서 타마르를 파괴적인 유혹자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66] 반면 조지아 문학에서 타마르는 온화하고 성스러운 여성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지아 낭만주의자들은 타마르 시대를 조지아 번영의 정점으로 보았고,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68]

오늘날 타마르는 조지아의 국가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녀의 초상은 50라리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68]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I에서는 조지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조지아 정교회는 타마르를 성인으로 추대했으며, 그녀의 축일은 5월 1일[73][74](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14일)과 성 유향을 바르는 여인들의 주일에 기념된다.[75]

8. 1. 중세 시대의 타마르

쇼타 루스타벨리가 타마르 여왕에게 자신의 시를 바치는 모습, 헝가리 예술가 미하이 지치의 그림 (1880년대).


수세기에 걸쳐 타마르 여왕은 조지아 역사 판테온에서 지배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녀의 치세를 "황금기"로 구축하는 것은 통치 자체에서 시작되었으며 타마르는 이 시대의 초점이 되었다.[54] 쇼타 루스타벨리를 포함한 여러 중세 조지아 시인들은 타마르를 그들의 작품의 영감으로 꼽았다. 루스타벨리가 여왕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있다. 노련한 왕 로스토반이 딸 티나틴에게 왕관을 씌우는 루스타벨리의 시의 극적인 장면은 기오르기 3세가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것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루스타벨리는 이에 대해 "암사자든 수사자든 똑같이 훌륭하다"라고 언급한다.[55]

여왕은 찬사인 차흐루카제의 ''타마리아니''와 이오아네 샤브텔리의 ''압둘-메시아''와 같은 여러 동시대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56] 그녀는 연대기에 찬양되었으며, 특히 그녀의 통치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기록인 ''여왕 중의 여왕 타마르의 생애''와 ''통치자들의 역사와 찬사''는 조지아 문학에서 타마르의 성화에 대한 주요 자료가 되었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를 "과부의 보호자"이자 "세 번 축복받은 자"로 칭송하며, 타마르의 여성으로서의 미덕, 즉 아름다움, 겸손함, 자비심, 충실함, 순수함을 강조했다.[18] 타마르가 훨씬 나중에 조지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그녀는 심지어 그녀의 생전에 바니 복음서의 사본에 첨부된 이중 언어 그리스어-조지아어 발문에서 성인으로 명명되었다.[54]

타마르의 이상화는 그녀의 직계 후계자 아래에서 일어난 사건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타마르의 죽음 후 20년 이내에 호라즘과 몽골의 침략은 조지아의 부상을 갑작스럽게 종식시켰다.[57] 이후의 민족 부흥기는 타마르의 치세의 업적에 필적하기에는 너무 덧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이상화된 여왕과 실제 인물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타마르 숭배에 기여했다.[58]

대중의 기억 속에서 타마르의 이미지는 전설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을 얻었다. 다양한 민요, 시, 이야기는 그녀를 이상적인 통치자, 때로는 이교 신과 기독교 성인의 속성이 투영된 성녀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오래된 오세티야 전설에서 타마르 여왕은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을 통해 아들을 잉태한다. 조지아 산에서 유래한 또 다른 신화는 타마르를 겨울을 다스리는 이교 신인 피림제와 동일시한다.[59] 마찬가지로 프샤비의 고지대에서는 타마르의 이미지가 치유와 여성 생식력을 담당하는 이교 여신과 융합되었다.[60]

타마르는 가끔 군대를 동반했고 일부 군사 작전을 계획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다.[3] 그러나 그녀의 치세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기억은 타마르의 또 다른 대중적 이미지인 모델 여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또한 16세기의 인기 있는 러시아 이야기인 가상의 조지아 여왕이 이란과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차르 여왕 디나라의 이야기''에도 반영되었다.[61] 전 러시아의 차르 이반 뇌제는 카잔 점령 전에 타마르의 전투 사례를 통해 군대를 격려하며 그녀를 "지성과 용기를 갖춘 가장 현명한 이베리아 여왕"으로 묘사했다.[62][63]

타마르의 성화


타마르는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 타마르 여왕(წმიდა კეთილმსახური მეფე თამარი, 'ts'mida k'etilmsakhuri mepe tamari'; 또한 "신앙심 깊은 타마라"로 숭배됨)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그녀의 축일은 5월 1일[73][74] (율리우스력 기준이며,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14일)과 성 유향을 바르는 여인들의 주일에 기념된다.[75] 안티오키아 정교회는 성 타마르 축일을 4월 22일에 지킨다.[76]

8. 2. 현대의 타마르

현대 조지아인들은 타마르 여왕을 국가적 영웅으로 존경하며, 그녀의 이미지는 문학, 예술,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지아의 50라리 지폐에는 타마르 여왕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으며,[68]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I에서는 조지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타마르 여왕에 대한 현대적 인식은 19세기 낭만주의와 당시 조지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성장하는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64] 19세기 러시아와 서방 문학에서 조지아는 "동양적 경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타마르 여왕의 이미지는 동양에 대한 개념과 그 안의 여성들의 특징을 반영했다.[64] 티롤의 작가 야코프 필리프 팔머라이어는 타마르를 "코카서스 세미라미스"라고 묘사했다.[65] 러시아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낭만적인 시 〈타마라〉(Тамараru; 1841)에서 타마르 여왕의 이름을 부여한 세이렌과 같은 산악 공주에 대한 오래된 조지아 전설을 활용했다. 레르몬토프가 조지아 여왕을 파괴적인 유혹자로 묘사한 것은 역사적 배경이 없었지만, 타마르의 성적 매력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66] 크누트 함순의 1903년 희곡 ''타마르 여왕''은 "중세 의상을 입은 현대 여성"을 묘사했고, "1890년대의 새로운 여성에 대한 논평"으로 읽혔다.[67]

조지아 문학에서 타마르는 러시아 및 서유럽의 시각과는 다르게 낭만적으로 묘사되었다. 조지아 낭만주의자들은 타마르를 영원히 전쟁 중에 있는 나라를 다스린 온화하고 성스러운 여성으로 묘사했다. 베타니아 수도원에서 타마르의 동시대 13세기 벽화가 재발견되면서 이러한 정서는 더욱 영감을 받았다. 조지아 문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조지아 통치와 국가 기관 탄압에 반발하여 타마르 시대를 그들의 현실과 대비하여,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린 과거를 한탄했다. 그리하여 타마르는 조지아 번영의 의인화가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68]

제2차 세계 대전 중, 협력자 조지아 군단의 세 개 대대가 타마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유리 공자와 타마르의 결혼은 현대 조지아에서 두 개의 공명적인 산문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샬바 다디아니의 희곡은 "불운한 러시아인"(უბედური რუსი; 1916–1926)이라는 제목으로 소비에트 연방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69] 소련 공산당의 압력하에 다디아니는 제목과 줄거리를 수정해야 했다.[70] 2002년, 라샤 부가제가 쓴 풍자 단편 소설 "첫 번째 러시아인"(პირველი რუსი)은 타마르와 유리의 좌절된 결혼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미디어, 조지아 국회 및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청에서 격렬한 논쟁을 포함한 전국적인 논란을 촉발했다.[71]

9. 가계

타마르는 조지아의 왕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와 알라니아 왕의 딸인 왕비 부르두칸 사이에서 1160년경에 태어났다. 타마르에게는 루수단이라는 여동생이 있었지만, 동시대 기록에는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았다.[85] 타마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기원했으며, 성경에 나오는 이름과 유사하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조지아 바그라티오니 왕조가 선호했다.[86]

타마르는 1189년오세트인 다비드 소슬란과 결혼하여 아들 게오르게 4세(재위: 1212년 - 1223년)와 딸 루수단(재위: 1223년 - 1245년)을 낳았다.[18]

타마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150]

관계이름
증조부데메트레 1세
조부게오르게 3세
부왕게오르게 3세
모후부르두칸
배우자다비드 소슬란
아들게오르게 4세
루수단



사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유통되는 50 라리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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