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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도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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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도쿠시는 헤이안 시대 말기에 활동한 여성으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딸이자 다카쿠라 천황의 중궁이었다. 1171년 다카쿠라 천황의 입내를 거쳐 중궁이 되었으며, 안토쿠 천황을 낳았다. 헤이시 정권의 붕괴와 함께 단노우라 전투에서 살아남아 출가하여 직여각니가 되었고, 교토 오하라의 잣코인에서 은거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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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도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타이라노 토쿠코 (平徳子)
다른 이름겐레이몬인 (建礼門院)
출생1155년
사망1214년 1월 25일
사망 장소헤이안쿄 (교토)
능묘오하라 서릉
가문
씨족헤이시 (간무 헤이시, 이세 헤이시)
아버지타이라노 키요모리
어머니타이라노 토키코
혼인과 자녀
배우자타카쿠라 천황
자녀안토쿠 천황
경력
입궁조안 원년 음력 12월 14일 (1172년 1월 11일)
중궁 책봉조안 2년 음력 2월 10일 (1172년 3월 6일)
황후 책봉조안 2년 3월 6일 ~ 1182년 1월 1일
여원 호칭요와 원년 음력 11월 25일 (1182년 1월 1일), 겐레이몬인
기타
계명지키죠가쿠
궁정 여방겐레이몬인 우쿄다이부

2. 생애

큐쥬 2년(1155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그의 정실(계실) 도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22] 아버지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에서 승리하여 무사로서 처음으로 공경이 되었으며,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여 조정 내에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조안 원년(1171년), 다카쿠라 천황이 원복(元服)을 하자 도쿠시의 입내(入內) 이야기가 나왔다. 1172년 도쿠코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이자 이복 사촌인 다카쿠라 천황과 결혼했다.[4] 이 결혼은 두 사람의 아버지 간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다.

12월 2일, 도쿠시는 종삼위로 서임되었고,[23][24] 12월 14일에는 뇨고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조안 2년(1172년) 2월 10일에 입후하여 중궁이 되었다.[27]

도쿠코는 아이를 쉽게 갖지 못했으나, 고시라카와 천황의 여러 황자와 황녀들을 양육하였다. 1178년에는 임신하여 도키히토 친왕을 출산하였고, 이듬해 도키히토 친왕은 황태자가 되었다.

1179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쿠데타로 고시라카와 법황이 유폐되고, 다카쿠라 천황이 양위하여 안토쿠 천황이 즉위하면서 도쿠코는 국모가 되었다.[7]

1180년, 다이라노 기요모리다카쿠라 천황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도키히토 친왕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다.[6] 다카쿠라 상황의 비가 된 도쿠코는 겐레이몬인(建礼門院)이라는 이름을 받았다.[6]

thumb의 입구 중 하나인 ''겐레이몬''(建礼門)]]

지요 5년(1181년) 1월 14일, 다카쿠라 상황이 21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했다.[38] 다카쿠라 상황의 붕어로 고시라카와 인세(院政)의 부활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헤이시(平氏)는 국정에 관여할 수단을 잃었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열병에 걸려 윤2월 4일에 사망했다.

1183년 5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에게 구리카라 고개의 전투에서 헤이시 군이 대패하면서 군사적 균형이 무너졌다. 7월 25일, 무네모리는 로쿠하라에 불을 지르고 안토쿠 천황, 도쿠코, 고노에 모토미치 등 일족과 함께 서둘러 도망쳤다.[47] 서쪽으로 피신한 헤이시는 1185년 3월 24일, 단노우라 전투에서 멸망했다.

도쿠코는 안토쿠 천황도키코가 물에 뛰어든 후 자신도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겐지 측에 구조되었다. 살아남은 도쿠코는 다이라노 무네모리, 다이라노 도키타다 등과 함께 교토로 호송되었다. 무네모리는 참수되고, 도키타다는 유배되었지만, 도쿠코는 죄를 묻지 않았다.[48]

분지 1년(1185년) 5월 1일, 겐레이몬인(建礼門院)은 엔랴쿠지의 분원인 교토 히가시야마구에 위치한 초라쿠지에서 출가하여 법명을 직여각니(直如覚尼)라 하였다.[11] 그해 9월 30일, 헤이안쿄 북동쪽에 위치한 오하라|大原 (京都市)일본어 마을 근처의 비구니 사원인 자코인|寂光院일본어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며 헤이시 일문의 명복을 빌었다.[12]

겐큐 2년(1186년) 4월 20일, 은퇴한 고시라카와 상황이 오하라에 있는 겐레이몬인의 은거처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13]

자코인


도쿠시의 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헤이케 이야기』(가쿠혼)는 겐큐 2년(1191년) 2월에 사망했다고 하지만, 당시 헤이시(平氏)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 도쿠시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황대력』, 『여원소전』, 『여원기』 등의 기록에 따라 겐포 원년(1213년)에 생애를 마쳤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2. 1. 출생과 입내

큐쥬 2년(1155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그의 정실(계실) 도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22] 아버지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에서 승리하여 무사로서 처음으로 공경이 되었으며,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여 조정 내에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조안 원년(1171년), 다카쿠라 천황이 원복(元服)을 하자 도쿠시의 입내(入內)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해 고시라카와 천황은 양위하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1172년 도쿠코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아들이자 이복 사촌인 다카쿠라 천황과 결혼했다.[4]

구칸쇼』에 따르면, 기요모리는 "천황의 외조모로서 세상을 모두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라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고시라카와 상황 또한 정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요모리의 협력이 불가피하여 입내를 인정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양측의 대립을 회피하고 다카쿠라 천황의 치세 안정을 바라는 겐슌몬인의 의향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2월 2일, 인덴죠(仁殿)에서 입내가 결정되었으며, 도쿠시는 종삼위로 서임되었다.[23][24] 타이켄몬인의 예를 따라 도쿠시는 고시라카와 법황과 시게모리의 유사가 되었지만, "그 예가 매우 부합하지 않는 바, 세상에서 이를 비난한다"[25]고 주변에서는 의문의 목소리가 나왔다. 12월 14일, 도쿠시는 호주지전(法住寺殿)에 참상하여 겐슌몬인의 손에 의해 착상 의식을 치르고 나서 다이리(內裏)로 향했다. 고시라카와 법황과 겐슌몬인은 시치조전(七条殿)의 난간에서 행렬을 지켜보았는데, 그날 밤은 "밝은 달빛이 낭랑하고, 흰 모래는 낮과 같았다"[26]고 한다. 16일, 도쿠시는 뇨고가 되었고, 이듬해 조안 2년(1172년) 2월 10일, 입후하여 중궁이 되었다.[27]

2. 2. 중궁 시절

고시라카와 천황의 양녀가 된 도쿠코는 1172년 고시라카와의 아들인 다카쿠라 천황과 결혼했다.[4] 이 결혼은 두 사람의 아버지 간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다.

도쿠코는 아이를 쉽게 갖지 못했으나, 고시라카와 천황의 여러 황자와 황녀들을 양육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천황이 유모와의 사이에서 공자 내친왕을, 고코노 쓰보네와의 사이에서 범자 내친왕을 두자 기요모리가 격노하여 고코노 쓰보네를 추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코노 쓰보네의 아버지가 고시라카와 천황의 측근이었고, 기요모리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여부는 의심스럽다. 도쿠코는 범자 내친왕 외에도 고시라카와 천황의 여러 황자, 황녀들을 양육하며 헤이시 일문이 이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29][30]

겐레이몬인 우쿄노 다이후 집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천황과 도쿠코의 관계는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1177년에는 화재가 발생하자 도쿠코는 고시라카와 천황과 함께 피난하기도 했다.[31]

1178년, 도쿠코는 임신했고, 도키히토 친왕을 출산했다. 이듬해 도키히토 친왕은 황태자가 되었다. 같은 해 후지와라 쇼쿠시 소생의 황자가 태어났지만, 도쿠코 소생 황자와의 격차는 컸다.

2. 3. 국모

1179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쿠데타로 고시라카와 법황이 유폐되고, 다카쿠라 천황이 양위하여 안토쿠 천황이 즉위하면서 도쿠코는 국모가 되었다.[7]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하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지만,[32][33][34] 스스로의 간섭은 월권 행위이며, 본래는 다카쿠라 상황이 해야 할 일이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33]

2. 4. 다카쿠라 상황과 기요모리의 죽음

1180년, 다이라노 기요모리다카쿠라 천황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도키히토 친왕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다.[6] 다카쿠라 상황의 비가 된 도쿠코는 겐레이몬인(建礼門院)이라는 이름을 받았다.[6]

thumb의 입구 중 하나인 ''겐레이몬''(建礼門)]]

지요 5년(1181년) 1월 14일, 다카쿠라 상황이 21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했다.[38] 상황 사후에 중궁을 고시라카와 법황의 후궁으로 들이는 파격적인 안[38]이 나왔으나, 도쿠시는 거절했고, 고시라카와 법황도 사퇴했다. 대신 이복 여동생인 미코히메노미코가 고시라카와 법황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다카쿠라 상황의 붕어로 고시라카와 인세(院政)의 부활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헤이시(平氏)는 국정에 관여할 수단을 잃었다. 기요모리는 여러 대책을 강구했지만, 도쿠시의 중궁 지위를 이용하여 영향력 유지를 꾀했다. 다이라노 요리모리의 하치조 저택으로 안토쿠 천황이 행차한 것은 중궁령지에 의한 것이었고,[40] 다카마츠인령 장원도 다카쿠라 상황의 유언이라 칭하며 도쿠시에게 상속되었다.[41] 그러나 기요모리는 열병에 걸려 윤2월 4일에 사망했다.

기요모리가 죽은 후, 고시라카와 법황은 안토쿠 천황을 하치조 요리모리 저택에서 칸인으로 옮기고,[42] 11월 25일에 도쿠시가 인호(院号) 선하를 받아 겐레이몬인이 되자 덴조인(殿上人)을 스스로 정했다.[43] 천황과 모후를 헤이시에게서 떼어놓고, 정치의 실권을 탈취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44] 주에이 원년(1182년)에는 안토쿠 천황 준모(准母)도, 도키코에서 료시 내친왕으로 교체되었다.[45]

헤이시와 고시라카와 법황 사이에는 처음부터 해소할 수 없는 대립이 존재했지만, 한때는 겐슌몬인이 조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고시라카와 법황도 인세 정지·유폐를 겪으면서 헤이시에 대한 불만을 넘어 증오를 품게 되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도쿠시에게는 대립을 억누를 힘이 없었고, 정권의 붕괴는 눈앞에 다가왔다.

2. 5. 헤이시 멸망

1183년 5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에게 구리카라 고개의 전투에서 헤이시 군이 대패하면서 군사적 균형이 무너졌다. 엔랴쿠지가 요시나카 군에 가담하자,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교토 방어를 포기하고 도쿠코에게 도읍 탈출 계획을 알렸다.[46] 고시라카와 법황이 몰래 탈출한 다음 날인 7월 25일, 무네모리는 로쿠하라에 불을 지르고 안토쿠 천황, 도쿠코, 고노에 모토미치 등 일족과 함께 서둘러 도망쳤다.[47] 도읍으로 돌아온 고시라카와 법황은 헤이시 추토 명령을 내려 헤이시는 관군에서 적군으로 전락했다. 서쪽으로 피신한 헤이시는 1185년 3월 24일, 단노우라 전투에서 멸망했다.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도쿠코는 안토쿠 천황도키코가 물에 뛰어든 후 자신도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겐지 측에 구조되었다. 그러나 『헤이케 이야기』의 "오하라 고쿄(大原御幸)" 장과 설화집 『한거우』에서는 도키코가 "일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살아남아라"라고 도쿠코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남은 도쿠코는 다이라노 무네모리, 다이라노 도키타다 등과 함께 교토로 호송되었다. 무네모리는 참수되고, 도키타다는 유배되었지만, 도쿠코는 죄를 묻지 않았다.[48] 洛東의 요시다 땅에 은거했다.[49]

2. 6. 출가와 만년

분지 1년(1185년) 5월 1일, 겐레이몬인(建礼門院)은 엔랴쿠지의 분원인 교토 히가시야마구에 위치한 초라쿠지에서 출가하여 법명을 직여각니(直如覚尼)라 하였다.[11] 그해 9월 30일, 헤이안쿄 북동쪽에 위치한 오하라|大原 (京都市)일본어 마을 근처의 비구니 사원인 자코인|寂光院일본어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며 헤이시 일문의 명복을 빌었다.[12]

겐큐 2년(1186년) 4월 20일, 은퇴한 고시라카와 상황이 오하라에 있는 겐레이몬인의 은거처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13] 이를 '오하라 행행(大原御幸)' 설화라 하며,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관정 권과 설화집 『간거우(閑居友)』에 관련 내용이 전해지나, 1차 사료가 없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불분명하다.

『간거우』와 『헤이케 이야기』의 여러 판본에서는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헤이케 이야기』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법황은 도쿠다이지 사네다다(徳大寺実定), 카잔인 가네마사(花山院兼雅), 도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와 북면 무사를 대동하고 오하라를 몰래 방문했다. 도쿠시는 몰락한 자신의 신세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울면서 법황을 만나, 인간으로 태어나 국모가 되었으나 기소 요시나카에게 공격받아 아수라처럼 도읍에서 쫓겨나고, 해상을 유랑하며 아귀도의 고통을 받았으며,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시 일족이 겪었던 지옥과 같은 참상과 용궁에 대한 꿈 이야기를 전했다. 이에 법황은 "당신은 눈앞에서 육도를 보았군요. 드문 일이오"라고 대답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원어행 이후 도쿠시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다. 『아즈마카가미분지 3년(1187년) 2월 1일 조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케 몰관령 중에서 셋쓰국 마이・시마야 양장을 도쿠시에게 주었다는 기록과, 분지 5년(1189년)에 유배지에서 교토로 돌아온 전 곤쇼소즈・젠신이 오하라를 방문했다는 사실[58] 정도만 알려져 있다.

도쿠시의 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헤이케 이야기』(가쿠혼)는 겐큐 2년(1191년) 2월에 사망했다고 하지만, 당시 헤이시(平氏)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 도쿠시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황대력』, 『여원소전』, 『여원기』 등의 기록에 따라 겐포 원년(1213년)에 생애를 마쳤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스미다 후미에는 겐포 원년(1213년) 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헤이케 이야기』의 「엔케이본」, 「사부본」의 기술을 바탕으로 도쿠시가 오하라에서 호쇼지(엔케이본) 혹은 호쇼지(사부본) 근처로 이주하여 조큐의 난 이후인 조오 2년(1223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호쇼지의 서남쪽에는 도쿠시의 여동생이 시집간 시조 다카후사가 관리하는 젠쇼지가 있었고, 다카후사가 도쿠시를 보호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60]

3. 능묘 및 관련 유적

능묘 입구


다이라노 도쿠시의 능은 잣코인 인근(궁내청 관할 오하라니시 능)에 있으며, 안토쿠 천황과 함께 각지의 수천궁에 모셔져 있다.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쵸라쿠지에도 묘가 있다.

3. 1. 능묘



능은 잣코인 인근에 있는 궁내청 관할의 오하라니시 능이다. 안토쿠 천황과 함께 각지의 수천궁에 모셔져 있다. 또한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쵸라쿠지에도 묘가 있다.[58]

3. 2. 관련 유적



다이라노 도쿠시의 능은 잣코인 근처에 있으며 (궁내청 관할 오오하라니시 능), 안토쿠 천황과 함께 각지의 수천궁에 모셔져 있다. 또한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초라쿠지에도 묘가 있다.

켄레이몬인 오륜탑 (미요시시) (도쿠시마현 미요시시 미노쵸 타치노야마 13)


초라쿠지 상본당 (교토시)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마루야마쵸 476)


13층석탑 켄레이몬인어탑 (초라쿠지) (상본당 옆, 다이라노 도쿠시 유발을 넣었다?)

4. 관련 작품

다이라노 도쿠시는 일본 역사의 이 시기를 묘사하는 많은 이야기와 예술 작품을 통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헤이케 이야기'''는 이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자료이며, 많은 가부키분라쿠 연극에서도 이 전쟁의 사건들을 재현한다.[16]

헤이케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불교의 무상 사상이다. 무상(無常, ''mujō'')의 주제는 다음 도입부에서 잘 나타난다.

祇園精舎の鐘の声、諸行無常の響きあり。沙羅双樹の花の色、盛者必衰の理をあらはす。奢れる人も久しからず、唯春の夜の夢のごとし。猛き者も遂にはほろびぬ、偏に風の前の塵に同じ。|기온쇼자(Gion Shōja)의 종소리는 모든 것의 덧없음을 울리고, 사라쌍수 꽃의 색깔은 번성하는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자만하는 사람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저 봄밤의 꿈과 같다. 용맹한 자도 결국에는 멸망하니, 오로지 바람 앞의 먼지와 같다.일본어

이 이야기와 다른 고전 일본 이야기에서 중심 인물들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고, 주요 사건들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며, 당시 이해되었던 이해관계는 일본 문화의 기초 요소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각 역사 기록의 정확성은 추가 연구의 매력적인 주제가 되었으며, 일부 기록은 면밀한 조사를 견뎌냈지만, 다른 "사실"로 추정되는 것들은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17]

영문학에서는 도쿠코의 삶과 통치가 세리드윈 폴링스타의 2권으로 된 역사 소설 ''White as Bone, Red as Blood''에 묘사되어 있으며, 각각 2009년과 2011년에 출판되었다.[18]

4. 1. 소설

4. 2. 희곡

호조 히데시의 『겐레이몬인』이 있다.[16]

4. 3. 영화

닛카츠 로망 포르노에서 제작한 단노우라 요마쿠라 합전기(1977년)에서 와타나베 토쿠코가 도쿠코를 연기했다.[16]

4. 4. TV 드라마

4. 5. 애니메이션

헤이케모노가타리 (2022년, 후지 TV, 제작: 사이언스 SARU, 감독: 야마다 나오코, 성우: 하야미 사오리)

4. 6. 만화

가와구치 가이지의 지팡구 심청해류[16]

4. 7. 악곡


  • 미나미 하루오의 『겐레이몬인 도쿠코(建礼門院徳子)』[16]
  • 사쿠라유키의 『육도의 끝(六道の果て)』 (작사 오구리 사쿠라, 작곡 이세 켄지)[16]

참조

[1] 서적 Gukanshō
[2]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3] 서적 The Tales of the Heike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Jinnō Shōtōki
[5]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7] 서적
[8]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17] 서적
[18] 웹사이트 White as Bone, Red as Blood: The Fox Sorceress' https://www.amazon.c[...]
[19] 서적 教育社
[20] 서적 戦争の日本史 6 源平の争乱, 図説 合戦地図で読む源平争乱 吉川弘文館, 青春出版社
[21] 간행물 歴史群像シリーズ 平清盛 早稲田大学
[22] 문서 山槐記 1181-07-22
[23] 문서 玉葉, 兵範記
[24] 문서 徳子
[25] 문서 玉葉 1181-12-24
[26] 문서 兵範記
[27] 문서 玉葉
[28] 문서 山槐記 1181-07-03
[29] 문서 山槐記 1181-07-05
[30] 문서 山槐記 1182-05-04
[31] 문서 玉葉 1182-05-02
[32] 문서 山槐記 1183-03-12
[33] 문서 山槐記 1183-03-10
[34] 문서 山槐記 1183-03-21
[35] 문서 玉葉, 山槐記
[36] 서적 玉葉 불명-12-19
[37] 서적 山槐記 불명-12-24
[38] 문서
[39] 서적 玉葉 불명-01-13
[40] 서적 玉葉 불명-01-29
[41] 논문 高倉皇統の所領伝領 東京大学出版会 2008
[42] 서적 吉記 불명-04-10
[43] 서적 明月記 불명-12-01
[44] 논문 高倉皇統の所領伝領
[45] 서적 玉葉, 吉記 불명-08-14
[46] 서적 平家物語
[47] 서적 吉記 불명-07-25
[48] 서적 玉葉 불명-04-21
[49] 문서
[50] 문서
[51] 서적 古今集
[52] 서적 平家物語
[53] 서적 建礼門院右京大夫集
[54] 문서
[55] 문서
[56] 문서
[57] 문서
[58] 서적 玉葉和歌集
[59] 서적 明月記 불명-12-14
[60] 간행물 建礼門院の後半生 東京堂出版 1973
[6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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