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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그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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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 그라쿠스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기원전 184년 호민관, 기원전 180년 법무관, 기원전 177년 집정관, 기원전 16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총독으로 재직하며 도시 그라쿠리스를 건설하고 켈티베리아인과의 조약을 이끌었으며, 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식을 거행했다. 또한 동방 외교 사절단의 단장으로 활동하며 그리스어 연설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형제는 그의 사후 로마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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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그라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자 표기Tiberius Sempronius Gracchus
다른 이름그라쿠스 마이오르 (Gracchus Maior)
출생기원전 220년경
사망기원전 154년
가족
씨족셈프로니우스 씨족
가문그라쿠스 가문
배우자코르넬리아
자녀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
셈프로니아
경력
아우구르기원전 204년(?) - 154년
레가투스기원전 190년, 185년
호민관기원전 187년 또는 184년
상급 안찰관기원전 182년
법무관기원전 180년
전 법무관기원전 179년 - 178년
집정관 I기원전 177년
전 집정관기원전 176년 - 175년
감찰관기원전 169년
레가투스기원전 165년
집정관 II기원전 163년
전 집정관기원전 162년
레가투스기원전 162년 - 161년
군사 경력
참전 전쟁제1차 켈티베리아 전쟁
사르데냐 반란 진압
기타
출신 계급노빌레스 (평민)

2. 초기 생애와 경력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평민 신분이었으나, 고대 로마의 유서 깊은 가문인 셈프로니아 씨족의 일원이었다.[3]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기원전 204년에 아우구르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3]

기원전 184년(또는 기원전 187년)에 플레브스의 호민관으로 활동하며, 거부권을 행사하여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에 대한 기소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게네스의 투옥을 막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키피오 가문과 개인적인 친분이나 정치적 동맹 관계는 아니었으나, 로마에 대한 그들의 공로를 고려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5] 아프리카누스 사후 그의 상속인들이 결혼을 주선했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6] 결혼은 기원전 181년경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182년에는 안찰관을 역임하며 호화로운 축제를 열었는데, 이로 인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자 원로원은 이후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과 속주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축제 경비에 상한선을 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8]

2. 1. 가문 배경

티베리우스는 평민 신분이었지만, 고대 로마의 유서 깊은 가문인 셈프로니아 씨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기원전 215년과 기원전 213년에 집정관을 지낸 동명이인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2. 2. 초기 활동

기원전 204년, 사망한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의 후임으로 아우구르(조점관)에 선출되었다.[3] 다만, 이 아우구르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는 로마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기원전 190년 로마-시리아 전쟁 중에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지시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다. 당시 그라쿠스는 가장 총명하고 정력적인 젊은이로 평가받아 이 임무를 맡았으며, 암피사에서 펠라까지 3일 만에 주파하여 필리포스 5세가 로마를 지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등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기원전 185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세력 확장을 시도하자, 그라쿠스는 마르쿠스 바에비우스 템필루스,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와 함께 마케도니아와 주변 그리스 국가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기원전 184년에는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재임 중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형제에 대한 탄핵과 투옥 시도를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라쿠스는 스키피오 형제와 개인적인 친분이나 정치적 동맹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그들의 공헌을 고려하여 기소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원로원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일에 감명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자신의 딸 코르넬리아를 그라쿠스에게 시집보내려 했다고 하지만[5], 플루타르코스폴리비오스를 인용하며 아프리카누스 사후 그의 상속인들이 결혼을 주선했다고 기록하여 이것이 더 신빙성 있는 설명으로 여겨진다.[6] 실제 결혼은 기원전 181년경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183년, 그라쿠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가이우스 아프라니우스 스테르리오와 함께 사투르니아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는 3인 위원으로 활동했다.

기원전 182년에는 상급 안찰관(아이딜리스 쿠룰리스)을 역임하며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그러나 이 축제에 소요된 막대한 비용 때문에, 이후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과 속주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축제 경비에 상한선을 두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8]

2. 3. 호민관 시절과 스키피오 가문과의 관계

기원전 184년(또는 기원전 187년)[3] 플레브스의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3] 그는 재임 중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와 그의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게네스에 대한 기소가 이루어지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으로 유명하다.[3]

'스키피오 재판'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는데, 대부분의 기록은 안티오크 전쟁 중의 부패 혐의로 아시아게네스에 대한 재판만 열렸다고 전한다.[4]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병을 이유로 탄핵 재판에 불참하고 아시아게네스가 상소하여 재판 연기를 요청했을 때, 그라쿠스는 스키피오의 국가에 대한 공헌을 언급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또한 아시아게네스가 횡령 혐의로 투옥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라쿠스는 횡령액 반환 자체는 동의했으나 국가에 헌신한 인물을 투옥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의 석방을 명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본래 스키피오 가문의 친구나 정치적 동맹자는 아니었으나, 로마를 위한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사사로운 감정보다 국가를 우선시한 것으로 평가받아 원로원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키피오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리비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같은 일부 고대 기록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딸 코르넬리아를 그라쿠스에게 약혼시켰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폴리비우스를 인용하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상속자들이 결혼을 주선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이 더 신빙성 있는 설명으로 여겨진다.[6] 코르넬리아가 당시 어렸기 때문에 실제 결혼은 그라쿠스가 40대 중반이 된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혼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81년경이 유력하며,[7] 기원전 170년이나 164년이라는 설도 있다.[7]

3. 군사 및 정치 경력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로마 공화국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180년 법무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연령 규정에 따라 그의 출생 연도가 기원전 220년경임을 시사한다. 법무관 임기 후 기원전 179년부터 기원전 178년까지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의 총독(프로콘술)으로 부임하여 켈티베리아인, 루시타니아인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장기적인 평화 협정을 맺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그라쿠리스를 건설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성공적인 임무 완수 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77년에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사르데냐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 공로로 기원전 175년 두 번째 개선식을 치렀다.

기원전 169년에는 다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감찰관으로서 그는 마케도니아 전쟁을 위한 병력 징집을 엄격하게 관리했으며, 해방 노예의 투표권을 특정 부족에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또한 로마 포룸에 셈프로니아 바실리카를 건설하는 등 공공 사업에도 기여했다.

감찰관 임기 후 기원전 165년에는 동방 여러 왕국에 사절단 대표로 파견되어 로마에 대한 각국의 우호적인 입장을 확인했다.

기원전 163년에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인 기원전 162년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신성한 징조 해석과 관련된 절차적 실수를 범했다. 이 실수로 인해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이 사임하는 정치적 파장을 겪기도 했다.

3. 1. 쿠르수스 호노룸

기원전 184년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재임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그라쿠스는 스키피오를 변호하기 위해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첫 번째는 스키피오가 병을 이유로 탄핵 재판에 불참하고 그의 형제 아시아티쿠스가 상소(프로보카티오,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민중에게 그것을 호소하여 판정받는 제도)하여 재판 연기를 요청했을 때였다. 그라쿠스는 스키피오의 국가 공헌을 강조하며 이를 인정해 줄 것을 호소했고, 이 행동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사사로운 감정보다 국가를 우선시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두 번째는 아시아티쿠스가 횡령 혐의로 고발되어 재산을 매각하여 반환하지 않으면 투옥될 상황에 처했을 때였다. 그라쿠스는 반환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국가에 헌신한 아시아티쿠스를 투옥할 수는 없다며 그의 석방을 명령했다. 이 결정은 환영받았으며, 아시아티쿠스의 재산에서는 횡령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그라쿠스의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딸 코르넬리아와의 혼인을 제안했지만, 코르넬리아가 어려 실제 결혼은 그라쿠스가 40대 중반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183년,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가이우스 아프라니우스 스테르리오와 함께 사투르니아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는 3인 위원을 맡았다.

기원전 182년, 아이딜리스 쿠루리스(상급 안찰관)를 맡아 성대한 축제를 열었으나, 과도한 비용 지출로 인해 향후 축제 경비에 제한이 가해졌다.

기원전 180년,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쿠르수스 호노룸에 따르면 법무관은 최소 40세 이상이어야 하므로, 그의 출생 연도는 기원전 220년경으로 추정된다. 법무관 임기를 마친 후, 전임자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임무 미완료를 이유로 히스파니아 주둔 군대의 개선식을 소환하려 하자 이에 성공적으로 반대하여, 기원전 179년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기원전 179년부터 178년까지 ''프로콘술레''(전직 집정관 자격)로 복무하며 제1차 켈티베리아 전쟁을 치렀다. 로마는 기원전 190년대 중반부터 이베리아에서 장기간 분쟁을 겪고 있었다. 총독 재임 중 다른 스페인 총독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협력하여 켈티베리아인, 루시타니아인 등 적대 세력에 맞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하는 동시에 장기적인 평화를 위한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은 주로 조공 협정과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후 20년간 로마의 스페인 확장은 원로원이 마케도니아에 군사력을 집중하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총독 재임 중인 기원전 178년 에브로 강 유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그라쿠리스를 건설했는데, 이는 로마인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도시에 붙인 사례가 되었다. 그라쿠스는 스페인 원정에서 300개의 도시를 파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로 귀환한 후 원로원은 그에게 "루시타니아와 스페인에 대한" 개선식을 수여했고, 그와 동료 알비누스는 약 약 27215.52kg의 은을 봉헌했다. 시케리아의 디오도로스는 이 시기 그라쿠스가 이미 동시대 인물 중 지성과 용기 모두 뛰어난 인물로 명성이 높았다고 기록했다.[15]

기원전 177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르데냐 속주에 파견되어 프로프라이토르 티투스 에부티우스 파루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했다. 일리엔세스와 발라리를 상대로 두 차례 "무자비한" 원정을 벌여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175년 말 로마로 돌아와 약 8만 명의 사르데냐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보고하고, 기원전 175년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69년, 집정관 시절 동료였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위한 병력 징집을 도왔는데, 너무 엄격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동료 클라우디우스가 기소되기도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라쿠스의 변호 덕분에 간신히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감찰관 재임 중 시민들은 그라쿠스가 밤에 지나갈 때 너무 관대하게 보일까 두려워 불을 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동료 클라우디우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해방 노예를 도시 부족 중 하나에만 등록시켜 투표권을 제한했다. 또한 로마 포룸에 셈프로니아 바실리카를 건설했으며, 이들의 건축 프로그램 완공 요청은 거부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해방 노예를 특정 트리부스(선거구)에 등록하는 문제에 대해 풀케르와 협의하여 도시 트리부스 중 하나에 전원 등록하기로 결정하자 원로원에서 두 사람에게 감사 결의를 했다고 한다.

감찰관 임기를 마친 후 기원전 165년, 동방의 페르가몬, 카파도키아, 시리아, 로도스 섬 등 여러 왕국에 대한 로마의 태도를 조사하기 위한 사절단의 단장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모든 왕국이 로마에 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로도스 섬에서 행한 그리스어 연설은 후대 키케로 시대까지 남아 그를 웅변가로 평가받게 했다.[16]

기원전 163년,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동료 마니우스 유벤티우스 타르나가 코르시카 속주에서 반란을 진압한 후 급사하자, 다음 해 집정관 선거를 치른 후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로 급히 파견되었다. 기원전 162년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면서 신성한 징조를 살피는 과정에서 절차적 실수를 저질렀다. 부정적인 징조를 관찰한 후 원로원과 상의하기 위해 포메리움을 넘어가면서 선거 집행에 필요한 ''아우스피키아 밀리티아에''(군사 점유권)를 상실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후임자들이 취임하고 그가 프로마기스트라투스(전직 정무관 자격)로 사르데냐에 도착한 후에야 이 실수를 깨닫고 원로원에 보고했다. 이로 인해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 즉 그의 처남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을 포함한 집정관들이 사임해야 했고, 후임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선출되었다.[17][18] 나시카 코르쿨룸과는 같은 대 스키피오의 딸을 아내로 둔 사이였는데, 역사가 F. 뮌처는 이 사건이 훗날 그들의 아들들(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의 정치적 대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19]

같은 해 로마로 돌아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등과 함께, 로마에서 도망친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의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그리스로 파견되었다.

키케로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의 미덕을 높이 평가했다.[20] 기원전 154년 사망할 때까지 그라쿠스는 로마 사회를 이끌어갈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

3. 2. 히스파니아 총독 시절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80년에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법무관 임기를 마친 후, 그는 전임자의 개선식 소환 시도에 성공적으로 반대하여 기원전 179년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기원전 179년부터 178년까지 해당 지역에서 ''프로 콘술레''(총독 대행)로서 복무했다. 당시 로마는 기원전 190년대 중반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장기간의 분쟁을 겪고 있었다.

총독 재임 기간 동안 그라쿠스는 다른 스페인 총독인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협력하여 켈티베리아인, 루시타니아인 등 로마에 적대적인 세력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동시에 그는 장기적인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조약 협상도 진행했다. 이 조약은 주로 조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라쿠스의 이러한 활동 이후 약 20년간,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 전쟁에 군사력을 집중하면서 스페인 지역으로의 확장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라쿠스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총독으로 재직하던 기원전 178년, 에브로 강 유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그라쿠리스(Graccurris|그라쿠리스la)를 건설했다. 이는 로마인으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도시에 붙인 사례였다. 그는 스페인 원정 중 300개의 도시를 파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과장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한 그라쿠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루시타니아와 스페인에 대한" 개선식을 수여받았으며, 동료 알비누스와 함께 약 약 27215.52kg의 은을 로마에 바쳤다.

3. 3. 집정관 및 감찰관

기원전 177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르데냐 속주에 파견되어, 프로프라에토르 티투스 에부티우스 파루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일리엔세스와 발라리를 상대로 두 차례의 격렬한 원정을 벌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듬해 프로콘술로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그는 기원전 175년 말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약 8만 명의 사르데니아인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으며, 기원전 175년에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69년, 집정관 시절 동료였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감찰관으로서 그는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위한 병력 징집을 도왔다. 그의 감찰 활동은 매우 엄격하여 동료인 클라우디우스가 기소되기도 했으나, 그라쿠스의 변호로 간신히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시민들은 밤에 그라쿠스가 지나갈 때 불을 끌 정도로 그의 엄격함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 (기원전 187년 집정관)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 제일인자)로 지명하고,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 (기사 계급)에 대한 심사를 엄격하게 진행했다.

감찰관 임기 중인 기원전 168년에는 해방 노예의 투표권 문제에 관여했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동료 클라우디우스와 협의하여 모든 해방 노예를 도시 트리부스 (선거구) 중 하나에만 등록하도록 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했다. 이 조치에 대해 원로원은 두 감찰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결의를 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클라우디우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추진했다고도 한다.) 그는 또한 로마 포룸에 셈프로니아 바실리카를 건설하는 등 공공사업에도 힘썼으나, 추가적인 건축 계획 완공 요청은 거부되었다.

3. 4. 외교 활동

기원전 162년 말, 첫 번째 집정관 임기를 마친 그는 로마 공화정의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그리스와 아시아 지역의 상황을 조사하고, 주변 헬레니즘 왕국들과의 다양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3. 5. 두 번째 집정관 선거와 논란

기원전 16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기원전 162년의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면서 절차상의 실수를 저질러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신성한 징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부정한 징조를 발견하고, 이를 원로원과 상의하기 위해 로마의 신성 구역인 포메리움 경계를 넘어섰다. 이 행위로 인해 그는 선거를 주관하는 데 필수적인 군사적 조점권, 즉 ''아우스피키아 밀리티아에''(auspicia militiae)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후임자들이 이미 취임하고, 본인이 전직 정무관 자격(프로마기스트라투스)으로 사르데냐에 도착한 뒤에야 이 절차적 실수를 깨닫고 원로원에 보고했다. 이 보고로 인해 기원전 162년에 선출된 집정관들은 결국 사임해야 했다. 사임한 집정관 중 한 명은 그의 아내의 언니의 남편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었다.

이 사건이 스키피오 나시카의 첫 집정관직 수행 실패로 이어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나 불화가 생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스키피오 나시카는 이후 기원전 159년에 감찰관으로 선출되었고, 기원전 155년에 다시 집정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약 30년 후, 그라쿠스와 나시카의 아들들은 격렬한 정치적 대립을 벌였고, 이는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4. 만년과 가족

기원전 162년 말, 첫 번째 집정관 임기를 마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로마로 돌아와 그리스아시아 속주 상황을 조사하고 주변 헬레니즘 왕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의 처남인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첫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한 일(나시카는 기원전 159년 감찰관을 거쳐 기원전 155년 집정관에 당선된다)이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나 불화를 일으켰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약 30년 후, 이들의 아들들은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대립하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72년경, 45세 무렵에 18세였던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 딸 셈프로니아와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두었다. 코르넬리아와의 결혼 생활과 그녀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깊은 애정, 그리고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14]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자신의 업적은 그의 사후, 미망인 코르넬리아의 명성과 두 아들의 정치 활동에 의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경향이 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장남 티베리우스는 청년기에 있었고 차남 가이우스는 유아였다. 두 아들은 친척이자 매형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고, 역사가 폴리비우스, 철학자 파나이티우스, 시인 루킬리우스, 극작가 테렌스 등 스키피오 주변의 지식인들로부터 교육과 영향을 받았다.

4. 1. 코르넬리아와의 결혼

기원전 172년 티베리우스는 약 45세의 나이에 18세였던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다. 코르넬리아는 유명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었다.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결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 결실도 풍성했다. 코르넬리아는 티베리우스와의 사이에서 열두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이 중 세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녀는 딸 셈프로니아(훗날 코르넬리아의 사촌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와 결혼)와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그리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였다.

티베리우스는 아내 코르넬리아를 매우 깊이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전기를 통해 아버지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특별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어느 날 티베리우스는 침실에서 뱀 두 마리를 발견했다. 점술가들은 두 마리 모두를 죽이거나 풀어주어서는 안 되며, 수컷 뱀을 죽이면 티베리우스가 죽고 암컷 뱀을 죽이면 코르넬리아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던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아내보다 나이가 많으니 자신이 죽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수컷 뱀을 죽이고 암컷 뱀은 풀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리우스는 세상을 떠났다.

티베리우스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사회 역시 코르넬리아를 이상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높이 평가했다. 티베리우스가 사망한 후, 코르넬리아는 남편의 재산과 가정을 책임졌다. 그녀는 여러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나 심지어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8세로부터 재혼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남은 생을 오롯이 아들들의 교육과 양육에 헌신했다.[14]

주세페 카데스 그림,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1776)


비록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본인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명성은 후대에 미망인 코르넬리아의 명성과 로마 공화정 말기 개혁을 주도한 두 아들, 그라쿠스 형제의 업적에 다소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 티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장남 티베리우스는 청소년이었고, 차남 가이우스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집뿐만 아니라 친척이자 매형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의 집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 폴리비우스, 철학자 파나이티우스, 풍자 시인 루킬리우스, 극작가 테렌스 등 당대 로마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4. 2. 죽음

플루타르코스가 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대 그라쿠스의 아들)의 전기에 따르면, 대 그라쿠스는 아내 코르넬리아에 대한 깊은 사랑을 특별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침실에서 뱀 두 마리를 발견했다. 점쟁이들은 이 징조에 대해 두 마리 모두 죽이거나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되며, 수컷 뱀을 죽이면 티베리우스가, 암컷 뱀을 죽이면 코르넬리아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티베리우스는 아내를 매우 사랑했고, 자신은 나이가 많고 아내는 젊으니 자신이 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수컷 뱀을 죽이고 암컷 뱀은 놓아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고, 코르넬리아가 낳은 열두 명의 아이들을 남겨두었다.[14]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자신의 생애와 업적은 그의 사후 미망인 코르넬리아의 명성과 두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의 활동에 의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게 되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장남 티베리우스는 청년이었고, 차남 가이우스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두 아들은 어머니 코르넬리아뿐만 아니라 친척이자 매형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의 집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 이들은 역사가 폴리비우스, 철학자 파나이티우스, 풍자 시인 루킬리우스, 극작가 테렌스 등 스키피오 주변의 로마 엘리트들로부터 교육과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4. 3. 일화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에서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생애를 다루며, 아버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아내 코르넬리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준 특별한 일화를 소개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어느 날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침실에서 뱀 두 마리를 발견했다. 그는 점쟁이들에게 이 징조에 대해 물었고, 점쟁이들은 두 뱀을 모두 죽이거나 모두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만약 수컷 뱀을 죽이면 티베리우스 자신이 죽게 되고, 암컷 뱀을 죽이면 아내 코르넬리아가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으며, 게다가 자신은 이미 나이가 많고 아내는 아직 젊기에 자신이 죽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수컷 뱀을 죽이고 암컷 뱀은 살려 보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14] 이 이야기는 티베리우스가 아내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진다.

참조

[1] 학술지 Cn. Domitius and Samos: a new extortion trial (IGR 4,968) https://www.jstor.or[...] 1991
[2] 학술지 Cornelia Africani f. Gracchorum https://journal.fi/a[...]
[3] 논문
[4] 서적 Leaders and masses in the Roman world https://brill.com/vi[...] Brill 1995
[5] 간행물 Livy, 38.57; Val. Max., 4.2.3.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서적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Roman Republ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논문
[13] 학술지 Imperium, Potestas, and the Pomerium in the Roman Republic https://www.jstor.or[...] 2007
[14] 웹사이트 Cornelia (1), mother of Tiberius Gracchus (3) and Gaius Gracchus https://oxfordre.com[...] 2022-02-16
[15] 문서 ディオドロス『歴史叢書』29.26
[16] 문서 キケロ『ブルトゥス』79
[17] 문서 "[[マルクス・トゥッリウス・キケロ|キケロ]]『神々の本性について』2.10-11"
[18] 문서 キケロ『占いについて』1.36、2.74-7
[19] 문서 RE:Sempronius 53
[20] 문서 キケロ『義務について』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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