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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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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 전도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는 과정과 그 영향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대정봉환과 왕정복고 이후 천황 친정을 위해 천도를 추진하면서, 오사카와 에도가 후보지로 떠올랐다.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주도로 오사카 천도 논의가 있었지만, 교토 보수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에도 개성 이후에는 에도가 새로운 천도 지역으로 주목받았다. 마에지마 히소카 등의 에도 천도 주장을 통해, 도쿠가와 가문을 슨푸로 옮기고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었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행과 만기친재 선언 이후, 수도 기능의 도쿄 이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교토 환행은 연기되었다. 1869년 천황의 도쿄 재행행과 태정관의 이전, 1871년 중앙 행정 기관의 도쿄 이전 완료를 통해 수도 기능 이전이 완료되었다. 이후에도 교토의 지위는 유지되었고, 황실 관련 의례는 교토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1950년 수도건설법 제정을 통해 도쿄가 공식적으로 수도로 지정되었고, 이후 즉위례가 도쿄에서 거행되는 등 도쿄가 실질적인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2. 천도의 움직임

대정봉환왕정복고의 대호령 이후, 교토막말 정치의 중심지로 떠올랐지만, 메이지 신정부는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천도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초기에는 에도의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주로 오사카가 유력한 천도 후보지로 거론되었다.[1]

에도 개성 이후에는 에도가 새로운 천도 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수파와 교토 시민들의 반대는 여전히 컸다. 막부와의 보신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유신이 이루어진 것도 얼마 안 돼 정국이 혼란스러웠는데, 특히 특정 번벌과 파벌에 의해 신정부의 정책이 결정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일부 공경과 손을 잡고 천황의 도쿄 행행에 반대하는 등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22]

2. 1. 오사카 천도론

도바·후시미 전투 직후인 1868년 2월 10일(게이오 4년 1월 17일), 오쿠보 도시미치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메이지 천황의 오사카 행행 및 체류를 제안했다.[19] 이는 조정의 구습을 타파하고 외교와 군사력 강화를 위한 목적이었다. 6일 뒤 태정관 회의에서 오사카 천도 건백서가 제출되었으나, 공가를 비롯한 보수파는 천 년간 수도 역할을 해온 교토를 떠나는 것에 격렬히 반대하여 3일 뒤 폐기되었다.[19]

2. 2. 에도 천도론

에도 개성 직후, 사쓰마 번의 양학교(개성소) 교수였던 마에지마 히소카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에도 천도를 주장하는 건백서를 보냈다.[20] 그는 건백서에서 오사카는 수도가 아니어도 쇠퇴할 우려가 없지만, 에도 막부가 붕괴하면서 에도는 시민들이 귀향하는 등 쇠퇴할 우려가 있으므로 에도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도는 국가의 중앙에 위치해야 하는데 오사카는 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로도 협소하지만, 에도는 제후의 번저가 남아있어 관청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에도 천도의 이유를 설명했다.[20]

이후 오쿠보도 도쿠가와 씨를 슨푸로 옮겨가게 한 뒤 에도를 도쿄로 하는 것이 상책이라며 에도 천도를 지지하게 된다.[21]

2. 3. 존왕양이파 및 탈번 부랑자 문제

수도 이전 계획에 대해 공가, 보수파, 교토 주민 등으로부터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보신 전쟁이 아직 계속되는 가운데, 메이지 유신 직후 혼란스러운 정국 하에서 정부 안팎의 각 번벌과 파벌에 의한 의사 결정 과정에 불만을 품은 불평 분자들이 이 과제를 정치 문제화했다. 특히 구루메히고존왕양이파나 탈번 부랑자들은 일부 공가와 결탁했다.[22] 이 움직임은 후에 사가의 난이나 신풍련의 난 등 규슈·야마구치를 무대로 하는 사족 반란으로 발전했다. 메이지 신정부에 의한 천황 행차(동행)조차 신정부 중추에 의한 정치 독점으로 반론이 터져 나오는 상태였다.[22]

3. 도쿄로 개칭

1868년 윤4월, 오키 다카토에토 신페이사가번을 대표하여 동서 양경제를 주장하는 건백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동일본을 안정시키기 위해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장차 도쿄와 교토를 연결하는 양경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행("Le Monde Illustre", 1869년 4월 1일)

3. 1. 도쿠가와 가문의 슨푸 이전과 도쿄 탄생

1868년 5월, 도쿠가와 가문을 슨푸로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오키 다카토에토 신페이가 주장했던 동서 양경제도 채택되었다. 이들은 사가번을 대표하여 이와쿠라에게 건백서를 제출했는데, 동일본은 천황의 덕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으므로 동일본을 안정시키기 위해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이를 거점으로 삼아 인심을 다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였다.[5]

정부는 기도 다카요시와 오키를 에도에 파견하여 수도 적합성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들은 아리스가와 친왕, 산조, 오쿠보, 에토 등과 협의한 뒤 전도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1868년 7월 17일, '에도를 칭하여 도쿄로 삼는 조서'가 발표되었다. 이 조서는 일본을 하나의 가족으로 보고 동서를 모두 중시해야 하는데, 에도는 동일본 제1의 도시이니 천황이 여기서 정무를 살피도록 하며 에도의 이름을 도쿄로 고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 동서 양경제 방안을 수용한 것이었지만, 보수파의 반발을 우려하여 도쿄 천도를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다.[5]

3. 2. 도쿄 행행과 만기친재 선언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행 (세이토쿠 기념 회화관 벽화 「도쿄 어착련」)


1868년(메이지 원년) 8월 27일, 메이지 천황은 즉위의례를 거행하고, 9월 20일에 교토를 출발하여 도쿄로 행행했다.[6] 이와쿠라 도모미, 나카야마 다다야스, 다테 무네나리 등이 행행에 함께했으며, 조슈번, 도사번, 오카야마번, 오즈번 병사 3,300여 명이 호위했다. 10월 13일, 에도성에 도착하여 도쿄성으로 개칭하고, 황거로 규정했다. 10월 17일에는 천황이 직접 정사를 돌본다는 만기친재를 선언했다.[7]

4. 수도 기능의 도쿄 이전

1868년 도쿄 행행 이후, 메이지 천황교토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산조 사네토미는 간토 지방의 민심을 고려하여 반대했다. 산조는 교토와 오사카는 수천 년 동안 천황의 은혜를 입었지만, 도쿄는 300년 동안 도쿠가와씨로부터 혜택을 받았으니, 천황이 교토로 돌아가면 도쿄의 원망을 살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도쿄는 지세가 뛰어난 곳이므로 도쿄를 잃으면 천하를 잃게 되고, 도쿄의 인심을 얻는 것이 곧 교토와 오사카의 성쇠로 이어진다고 말했다.[24]

4. 1. 교토 환행 연기

이와쿠라 도모미고메이 천황의 대상제와 황후 책봉례를 거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1869년 1월 20일(음력 1868년 12월 8일) 천황은 도쿄를 떠나 2월 3일(음력 12월 22일) 교토로 돌아왔다.[24] 이때 도쿄 시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다시 도쿄에 행행하겠다고 약속했다.

4. 2. 도쿄 재행행

1869년 3월 7일, 메이지 천황은 다시 도쿄로 행행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에게 동일본에 대한 왕화(王化)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부나 민간에서 천도 논의가 나오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동일본이 천황의 덕이 오랫동안 미치지 못한 곳이므로, 다시 도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하된 몸으로 천도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9]

같은 해 3월 28일, 천황은 도쿄 성에 도착했고, 태정관도 도쿄로 이전했다. 교토에는 유수관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쇼켄 황후도 도쿄로 옮겨오면서, 도쿄는 황실의 거처가 되었다.[24]

4. 3. 수도 기능 이전 완료

천황과 황후가 도쿄에 행행할 때마다 공가, 번주, 교토 관리와 시민들은 행행 중지 및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정부는 앞으로도 천황의 행행은 자주 있을 것이나 교토는 천 년간 수도였으므로 특별히 여기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아도 좋다는 유고를 교토부에서 내리도록 하여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도쿄 행행 반대 소동이 벌어질 때에는 나고야 천도 주장이 나오는 등 천도에 대한 불안정한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다.[24]

이후 교토에서는 교토 어소만 남고, 1871년까지 형부성, 대장성, 병부성 등 중앙 행정 기관이 차례로 도쿄로 이전했다. 유수관도 교토 궁내성에 합쳐졌다가 다시 도쿄로 옮겨가면서, 교토에 남아있던 수도 기능은 모두 도쿄로 이전되었다.[24]

1870년 4월 14일(음력 3월 14일), 동일본의 정세가 아직 어수선하고 흉작이 이어지고 있으며 국고가 부족한 점을 이유로 들어 교토 환행 일정을 연기했다. 1871년 12월 28일(음력 11월 17일), 대상제가 처음으로 도쿄에서 거행되었다.[24]

5. 이후

1872년 6월, 천황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이전의 "환행" 대신 "행행"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는 사실상 도쿄가 수도 기능을 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발을 고려하여 1889년 황실전범에는 즉위례와 대상제를 교토에서 거행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다.[11] 1912년 메이지 천황 서거 후, 장례는 도쿄에서 치러졌지만 능은 교토에 조성되었다. 1915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례와 대상제 역시 교토에서 진행되었다.

1927년, 도쿄에 처음으로 천황릉이 조성되었다. 이듬해인 1928년 쇼와 천황의 즉위례와 대상제는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1947년, 구 황실전범이 폐지되고 현행 황실전범이 시행되면서 즉위례와 대상제 장소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은 사라졌다. 1950년 수도건설법이 제정되어 도쿄도를 수도로 명시했다. 1956년에는 수도권정비법이 제정되어 도쿄도와 주변 지역을 수도권으로 규정했다.

1990년, 아키히토의 즉위례가 처음으로 도쿄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교토에서 천황과 황후의 옥좌를 도쿄로 옮겼다가 즉위례 이후 다시 교토로 돌려보냈다. 2019년 나루히토 즉위례 때도 같은 절차가 반복되었다.

6. 전도와 천도의 차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수도를 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전도'와 수도를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천도'라는 용어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전도는 수도를 정하는 것이고, 천도는 수도를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의 중심이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천도는 옛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뜻을 포함한다는 차이가 있다.[16]

1895년 교토시794년 헤이안 천도를 기념하여 '헤이안 전도 천백년 기념제'를 열었던 것처럼, '전도'라는 표현은 널리 사용되었다. 1898년 도쿄 전도 3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전도 30년』에서도 도쿄와 교토가 모두 수도라면서도 '도쿄 천도'라는 표현이 나타났다.

1917년 오카베 세이이치는 도쿄 전도는 천도가 아니며, 수도를 도쿄로 옮긴 것이 아니라 교토와 함께 도쿄가 병립하여 수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19년 도쿄시가 발행한 『도쿄 전도』에서도 교토 유수관이 폐지되고 도쿄 전도가 완료되었지만, 도쿄와 교토는 양경으로 병립하고 있으며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공식적인 발표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교토의 역사』 제7권에서는 천황의 두 번째 도쿄 행행 때 태정관도 도쿄로 옮겨가면서 사실상 천도가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사사키 스구루 교토 대학 명예교수는 교토는 도읍이 아니라고 부정당한 적은 없으니 전도가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부기관이 교토에서 이미 옮겨갔으므로 천도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현대에는 전도보다 천도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奠)' 자가 당용한자에 포함되지 않아 천도라는 표현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참조

[1] 웹사이트 明治元年、幻の大阪遷都論 大久保利通に前島密が反論 時を刻む https://www.nikkei.c[...] 2019-08-08
[2] 간행물 『東京遷都の経緯及びその後の首都機能移転論等』 日本開発構想研究所
[3] 서적 『東京百年史 第2巻 首都東京の成立(明治前期) 』 東京百年史編集委員会
[4] 논문 東京「遷都」の政治過程
[5] 문서
[6] 문서
[7] 웹사이트 御東幸万機御親裁ノ詔書 https://dl.ndl.go.jp[...]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明治元年
[8] 웹사이트 三条実美公年譜 https://dl.ndl.go.jp[...]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9] 웹사이트 岩倉公実記 https://dl.ndl.go.jp[...]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10] 웹사이트 現在でも京都に残っている皇族、公家はいるか。 https://crd.ndl.go.j[...] 京都府立京都学・歴彩館 2021-09-24
[11] 웹사이트 「祝賀会の発起」 https://dl.ndl.go.jp[...] 東都沿革調査会編『最新東京案内記 春の巻』、教育舎 1898年
[12] 웹사이트 最新東都の栞 https://dl.ndl.go.jp[...] 教育舎 1898年
[13] 문서
[14] 문서
[15] 관보 京都事務所の所掌事務を定める内閣府令及び宮内庁組織規則の一部を改正する内閣府令 https://kanpou.npb.g[...]
[16] 문서
[17] 웹사이트 第142回国会衆議院特別委員会 https://kokkai.ndl.g[...]
[18] 법률
[19] 간행물 東京遷都の経緯及びその後の首都機能移転論等 日本開発構想研究所
[20] 간행물 『東京遷都の経緯及びその後の首都機能移転論等』 日本開発構想研究所
[21] 서적 『東京百年史 第2巻 首都東京の成立(明治前期) 』 東京百年史編集委員会
[22] 논문 東京「遷都」の政治過程
[23] 웹사이트 御東幸万機御親裁ノ詔書 https://dl.ndl.go.jp[...]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明治元年
[24] 웹사이트 三条実美公年譜 https://dl.ndl.go.jp[...]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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