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가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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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국가방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 붕괴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창설된 독일의 임시 군대이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비밀리에 재무장을 추진하며 '국가 안의 국가'로 불리기도 했다. 소련과의 군사 협력을 통해 군사 기술을 발전시켰으나, 나치당 집권 이후 독일 국방군으로 재편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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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가방위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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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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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국가방위군 |
라이히스베어 의미 | 제국 방위 |
존속 기간 | 1919년 3월 6일 ~ 1935년 3월 16일 |
국가 | 독일국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1933년), 나치 독일 (1933년 ~ 1935년)) |
규모 | 115,000명 (1921년) |
본부 | 초센(Zossen), 브란덴부르크 |
지휘부 | |
총사령관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919년–1925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1925년–1934년) 아돌프 히틀러 (1934년–1935년) |
총사령관 직책 | 대통령 |
국방장관 | 목록 참조 |
국방장관 직책 | 국방장관 |
지휘관 | 목록 참조 |
지휘관 직책 | 장관 사무실 책임자 |
병력 | |
연령 | 18–45세 |
징병제 | 아니오 |
활동 병력 | }} |
조직 | |
군종 |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Reichsheer)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Reichsmarine) |
관련 조직 | 자유군단 |
역사 | |
주요 참전 | 독일 혁명 대 폴란드 봉기 실레시아 봉기 루르 봉기 카프 폭동 뮌헨 폭동 함부르크 봉기 |
군사 | |
계급 | 라이히스베어 군사 계급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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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내용 없음)
2. 1. 독일 혁명과 창설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의 발발로 독일 제국은 붕괴되었고 빌헬름 2세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 혼란 속에서 기존 독일 제국 육군 및 독일 제국 해군은 사실상 와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러 지역과 군항에서는 노동자들과 연대한 병사들이 소비에트를 결성했으며, 군대의 위계질서는 무너졌다. 특히 해군은 반란이 잇따르며 지도부와 군령부가 폐지될 정도로 혼란이 심각했다.1918년 11월 10일, 베를린에서 공화국을 선포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육군 최고 육군 지휘부(OHL)를 대표한 참모차장 빌헬름 그뢰너 장군은 군대의 존속과 공화국 정부 유지를 위해 비밀 협약을 맺었다.[4][5] 이 협약에서 그뢰너는 군대의 충성을 에베르트 정부에 보장하는 대신, 에베르트는 정부가 좌익 봉기에 단호히 대처하고 국민 의회를 소집하며, 군 지휘권을 전문 장교단에게 맡기고 군의 전통적인 '국가 안의 국가'로서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시켜 주기로 약속했다.[6][7]
혁명 초기에는 인민 해병단을 비롯한 좌파 세력이 군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때 해군 지도부를 장악하고 계급 폐지 및 지휘관 선거제를 담은 '함부르크 조항'이 채택될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정부가 점차 권력을 강화하면서 군 내부의 좌파 세력은 정치적으로 약화되었다.
한편,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에 따른 군대 해산과 동원 해제 과정이 진행되었다.[8] 서부 전선 철수는 11월 12일에 시작되어 1919년 1월 17일까지 완료되었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점진적으로 무장 해제하는 과정에서, 군에서 제대한 장교와 병사들은 의용군(Freikorps)을 조직했다. 당시 에베르트 정부는 베를린에 잔존한 좌파 병력을 진압할 정규군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들 의용군이 좌파 세력과의 전투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특히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진압 과정에서 의용군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군 내부의 좌파 운동은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국가 군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9년 3월 6일, 바이마르 국민의회는 임시 국가방위군 창설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제국 대통령에게 기존 군대를 해산하고 국경 방어, 정부 명령 집행,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임시 국가방위군(Reichswehr) 창설 권한을 부여했다.[9] 이어 1919년 4월 16일에는 해안 경비, 기뢰 제거, 해상 교통 지원 등을 담당할 임시 해군 창설법(병력 20,000명 규모)도 제정되었다.[10] 이 임시 국가방위군과 임시 해군은 이후 정식 국가방위군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군사 조직이 되었다.
2. 2. 바이마르 공화국군 성립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과 1918년 11월의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서 독일 제국 육군과 독일 제국 해군은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은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군의 지휘 체계는 무너졌다. 특히 해군은 지도부가 폐지될 정도로 타격이 컸다. 육군 참모차장 빌헬름 그뢰너는 군의 존속을 위해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비밀리에 에베르트-그뢰너 협약(Ebert-Groener-Pakt)을 맺었다. 군은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대신, 정부는 군의 자율성과 지위를 보장하기로 합의했다.[4][5][7] 이 협약은 군이 '국가 속의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초기 공화국 정부는 좌파 세력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이후 대규모 병력 감축이 불가피해지면서 정규군만으로는 내부 질서 유지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제대한 군인들로 구성된 의용군(Freikorps)이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등 좌파 봉기 진압의 주력이 되었다.
1919년 3월 6일, 바이마르 국민 의회는 임시 국가방위군(Reichswehr|라이히스베어de) 창설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8][9][83] 이 법은 독일 대통령에게 기존 군대를 해산하고 국경 방어, 정부 명령 집행,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임시 군대 창설 권한을 부여했다. 4월 16일에는 임시 국가해군(vorläufige Reichsmarine|포어 로이피게 라이히스마리네de)의 존속도 법적으로 인정받아 해안 방어, 기뢰 제거, 해상 교통 지원 등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10][84] 초기 해군 규모는 20,000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919년 6월 28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군의 규모와 무장을 엄격히 제한했다. 조약 제5부에 따라 독일군은 국경 방위와 내부 질서 유지 목적으로만 운용될 수 있었다.[1] 육군 병력은 10만 명(장교 1,400명), 해군 병력은 1만 5천 명(장교 1,500명)으로 제한되었다.[1][84] 징병제는 금지되었고, 장교는 25년, 병사는 12년의 장기 복무를 의무화하여 훈련된 예비군 축적을 막았다.[3][17] 참모본부 설치도 금지되었으며, 전차, 장갑차, 군용 항공기, 항공모함, 잠수함, 독가스 등 현대적인 무기 보유가 전면 금지되었다. 대포 구경도 육군 105mm, 해군 203mm 이하로 제한되었다.[1] 이러한 군비 제한 조치는 1927년까지 연합국 군사 통제 위원회의 감독을 받았다.[2]
이러한 가혹한 군비 제한 조치에 대한 군 내부의 불만은 1920년 3월 카프 반란으로 폭발했다. 정부가 자유군단 해산을 명령하자, 에르하르트 해병여단 등 일부 부대가 반발하여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다. 당시 국방부 장관 구스타프 노스케가 군 지휘부에 진압을 요청했으나, 군 수뇌부의 실질적 리더였던 한스 폰 젝트는 "Reichswehr schießt nicht auf Reichswehr|라이히스베어는 라이히스베어에게 발포하지 않는다de"는 입장을 내세우며 사실상 쿠데타를 방관했다.[44] 육군의 소극적인 태도로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으로 공화국에 대한 군의 충성심 부족이 드러났고, 반란에 적극 가담했던 해군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반면, 같은 시기 발생한 좌익 루르 봉기는 국가방위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군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44]

임시 국방군은 단계적인 감축을 거쳐 1921년 1월 1일,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한 육군 10만 명, 해군 1만 5천 명 규모의 정식 국가방위군으로 출범했다.[13] 1921년 3월 23일 제정된 국방법은 독일 대통령을 최고 사령관으로 규정하고, 군인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여 군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국가 속의 국가'로 남도록 했다.[14][85] 육군은 7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으로 재편되었고, 독일 영토는 7개 군관구로 나뉘었다.[11][15] 해군은 국가해군(Reichsmarine)으로 불리며 발트해와 북해에 기지를 두었다.[16]
한스 폰 젝트는 금지된 참모본부를 '육군 병무국(Truppenamt)'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유지하며 비밀리에 군 재건을 추진했다.[86] 그는 정예화된 소수 병력이 유사시 다수의 민병을 지휘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화민국이나 볼리비아 등에 군사 고문을 파견하여 군사 기술과 경험을 유지하려 했다. 또한 라팔로 조약 (1922년)의 비밀 협정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과 군사적으로 협력하며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을 우회하려는 시도를 했다.
2. 3. 국가 속의 국가
1921년 3월 제정된 방위법에 따라 독일 대통령이 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군인의 정치 활동이나 정당 가입이 금지되었다.[85] 이로 인해 군은 공화국 정치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고, "국가 속의 국가"라고 불리게 되었다.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국가방위군(Reichswehr)이 실제로 "국가 안의 국가"였는지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측은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군대의 비정치성을 강조하며 의회 공화국에 비판적인 장교단을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한다.[66] 이러한 비정치성은 군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고[67] 군 내부의 자체적인 사법 관할권에 따르도록 한 법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68] 군대는 정치와 정부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특정 정권이 아닌 추상적인 국가에 충성했고, 이러한 고립이 군대를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69][70] 젝트 자신도 1929년 저서 ''Gedanken eines Soldaten|군인의 생각de''에서 "군대는 국가 안의 국가가 되어야 하지만, 복무를 통해 국가와 융합되어야 한다. 사실상 군대 자체가 국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1928년 이후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정부 로비를 위한 Ministeramt|장관 사무국de을 만들면서[4]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대통령 내각 시기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통해 수상 임명과 국가 정책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된다.[66]
반면, 군대가 "국가 안의 국가"가 아니었다고 보는 측은 군대가 바이마르 헌법에 따라 국가 기관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71] 헌법상 국가 대통령이 최고 사령관으로서 장교 임면권을 가졌고(제46, 47조), 평화 조약이나 선전 포고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제45조). 또한 젝트 장군이 근본적으로 국가에 충성했으며 국가 통합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66] 1923년 위기 상황에서 오토 게슬러 국방장관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았을 때, 젝트는 루르 점령 저항 중단과 관련된 내전 가능성을 막고 작센, 튀링겐에서의 공산주의 위협에 대처하는 등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권력을 정치 당국에 반환했으며, 1926년에는 게슬러 국방장관의 요구에 따라 육군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가 된다.[72]
하지만 실질적인 군 지도자였던 한스 폰 젝트는 공화국 정부 몰래 비밀리에 재무장을 추진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금지된 참모본부는 "육군 병무국 (Truppenamt)"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활동을 계속했다.[86] 젝트는 유사시 소수의 정예 군대가 다수의 민병대를 지휘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군사 기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중화민국 (중독 협력)이나 볼리비아 등에 군사 고문을 파견했으며, 라팔로 조약의 비밀 협정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과 군사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2. 4. 소련과의 비밀 군사 협력
1923년 2월, 신임 Truppenamtde(병무청) 국장인 오토 하세 소장이 비밀 협상을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 협상을 통해 독일은 소련의 산업 발전을 지원하고 붉은 군대 지휘관들이 독일에서 참모 훈련을 받는 것을 돕기로 했다. 그 대가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 조항을 위반하면서 비밀리에 ''국방군''(Reichswehr)을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소련으로부터 포병을 확보하고, 소련 영토 내에서 항공 및 전차 전문가를 훈련시키며, 화학전을 위한 물질을 제조하고 시험할 수 있게 되었다.이를 위해 리페츠크에는 비밀 항공 학교 및 시험 시설이 설립되었다. 이곳에서 약 120명의 군 조종사, 100명의 항공 관측병, 그리고 다수의 지상 요원이 훈련을 받았는데, 이들은 훗날 독일 공군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카잔에서는 전차 전문가들이 훈련을 받았으나, 1930년까지 훈련받은 인원은 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사라토프 근처의 톰카 가스 시험장에서는 양국이 공동으로 화학전 물질을 시험하고 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6년 12월, 사회민주당 소속의 필리프 샤이데만이 국회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빌헬름 마르크스 총리가 이끌던 내각이 붕괴되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1931년에는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와 발터 크라이저가 1929년 주간지 ''Die Weltbühne''에 이 협력 관계를 상세히 보도했다는 이유로 ''벨트뷔네'' 재판에서 간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협력 사실 자체는 이미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53] 이러한 판결이 내려졌다.
2. 5. 스캔들과 정치적 혼란
1926년 10월, 젝트는 정부 승인 없이 옛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손자인 빌헬름 왕자를 옛 제국 제1 근위 보병 연대 군복 차림으로 육군 훈련에 초대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공화국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파문이 일자, 국방장관 오토 게슬러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게 젝트가 사임하거나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통보했다. 내각의 지지를 받은 게슬러의 요구에 따라 힌덴부르크는 10월 9일 젝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55]
젝트의 후임으로는 빌헬름 하이에 장군이 임명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에게 넘어갔다. 슐라이허의 영향 아래 국가방위군은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927년 8월 8일, 해군 대령 발터 로만이 해군의 비밀 자금을 페브스 영화 회사(Phoebus-Film AG)에 불법적으로 융자해 준 사실이 드러났다(로만 사건). 이 사건으로 군이 비밀리에 재군비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결국 오토 게슬러 국방장관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후임으로 빌헬름 그뢰너가 임명되었다. 그뢰너는 군의 독자적인 행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비밀 재군비를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 하에 진행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군비 계획은 국회에는 보고되지 않았다.
한편,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 규정 내에서 건조가 추진된 "장갑함 A(Panzerkreuzer A)" 건조 예산을 둘러싸고 격렬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 1928년,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장갑함 대신 어린이 급식을(Kinderspeisung statt Panzerkreuzer)"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승리했지만[57], 헤르만 뮐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 주도의 연립 내각은 군부의 요구와 연정 유지를 위해 결국 장갑함 건조 예산을 승인했다. 이는 국가방위군 지도부에게 중요한 정치적 승리로 여겨졌으며, 이후 국방 예산 증액에 대한 비판은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29년 예산에는 첫 번째 장갑함 도이칠란트의 자매함인 아드미랄 셰어 건조를 위한 첫 분할금까지 포함되었다.
2. 6. 바이마르 공화국 붕괴와 나치 집권
세계 대공황 이후 독일 정계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의회를 불신하며, 자신이 신임하는 내각과 측근들을 통해 정치를 운영하는 이른바 대통령 내각 체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대통령 내각은 1930년부터 국가방위군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 전직 군인이었던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은 국가방위군의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뒤를 이은 프란츠 폰 파펜과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민주주의를 폐지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방위군을 이용하는 것을 고려했다. 대통령 내각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베르사유 조약 개정을 통해 군사적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었다.이 시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측근으로 부상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국방상 관방장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였다. 슐라이허는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을 실각시키는 데 관여했으며, 여러 총리를 교체하는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32년, 그뢰너 장관이 여러 주의 압력으로 나치 돌격대(SA)와 친위대(SS)를 금지하자, 국방부 내 그의 부하인 슐라이허는 이를 빌미로 그뢰너가 국가방위군의 신뢰를 잃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사임을 압박했다. 슐라이허는 SA를 국가방위군 산하의 초당파적 준군사 조직으로 통합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방위군과 그 지도부는 점차 나치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였다. 1931년에는 나치당을 포함한 반민주적 동맹인 하르츠부르크 전선 결성에 한스 폰 젝트를 포함한 다수의 전직 장성들이 참여했다. 1932년 7월에는 알토나의 피의 일요일 사건과 같은 폭력 사태를 빌미로, 파펜 수상이 헌법 제48조에 따른 비상 칙령을 발동하여 프로이센 자유주의 행정 권한을 일시적으로 국방장관에게 이양하는 프로이센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는 국가방위군이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슐라이허는 결국 스스로 총리 자리에 올랐으나, 당시 급부상하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신임마저 잃고 실각했다. 이 시기 슐라이허와 프란츠 폰 파펜 등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국회 세력을 제압하려 했으나, 군 내부와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슐라이허의 실각은 결과적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히틀러 내각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정권을 장악한 나치당과 히틀러에게는 돌격대(SA)라는 거대한 준군사 조직이 있었는데, 이는 국가방위군에게 잠재적인 위협이자 경쟁 상대였다. 히틀러는 돌격대를 군사 조직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고 공언했지만,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은 돌격대가 기존 군대를 대체하는 "제2 혁명"을 꿈꿨다. 국가방위군과 돌격대 간의 협력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룀이 군 대체 의지를 굽히지 않자 위기감을 느낀 국방상 관방장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헤르만 괴링, 친위대(SS)와 손을 잡고 1934년 6월 말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돌격대 지도부를 숙청하는 데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전직 국방장관이었던 슐라이허와 그의 측근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 장군도 살해되었으나, "고무 사자"로 불리며 나치에 협조적이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상은 별다른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통합하여 국가 원수인 총통(Führer)의 지위에 올랐다. 이에 군은 충성 서약의 대상을 공화국이나 헌법이 아닌 히틀러 개인으로 변경하는 충성 서약을 실시했다. 이는 국가방위군이 나치 정권의 핵심적인 지지 기반이자 도구로 편입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7. 나치 시대와 국방군으로의 재편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시기, 의회보다 대통령 측근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국가방위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특히 국방상 관방장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 등 여러 총리를 실각시키고 자신이 총리가 되는 등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41][42][43] 슐라이허와 파펜 등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의회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려 했으나 군과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슐라이허는 결국 실각했고, 이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 배경이 되었다.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서 나치당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SA)의 위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300만 명에 달하는 돌격대의 존재를 빌미로 1933년 10월 제네바 군축 회의와 국제 연맹 탈퇴를 선언하며 국제 사회의 군축 압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국가방위군이 독일의 유일한 무장 세력으로 남을 것이라 약속했지만,[73][74]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은 돌격대가 기존 군대를 대체하는 '제2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민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룀은 자신이 국방상이 되어 돌격대와 국가방위군을 통합하려 했고, 이는 10만 명 규모의 국가방위군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돌격대의 위협에 맞서 국가방위군 지도부는 히틀러 및 헤르만 괴링, 친위대와 손을 잡았다. 국방상 관방장 발터 폰 라이헤나우 등은 돌격대 숙청 계획에 협력했다.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벌어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지도부와 나치의 다른 정적들이 대거 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직 총리이자 국가방위군 장성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 장군도 희생되었으나, 군 수뇌부는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75] 특히 국방상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나치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며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국가방위군은 돌격대라는 경쟁자를 제거했지만, 나치 정권에 더욱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1934년 8월 2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통합하여 국가 원수인 총통(Führer)의 지위에 올랐다. 같은 날, 국방상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군인들의 충성 서약 대상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서 히틀러 개인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79] 이는 군대가 국가가 아닌 독재자 개인에게 충성하게 되는 중요한 변화였다.
히틀러 집권 이후 국가방위군은 비밀리에 군비 확장을 추진했다. 1933년 말 이미 병력을 30만 명으로 증강하고 21개 사단으로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1934년에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76][77][78] 1935년 2월 26일에는 육군 총사령부(OKH), 해군 총사령부(OKM), 공군 총사령부(OKL)가 설치되어 육·해·공 삼군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어 1935년 3월 1일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공공연히 위반하며 공군(Luftwaffe) 창설을 발표했고, 3월 16일에는 독일 재군비 선언을 통해 일반 징병제 부활을 선언했다.[80] 이와 함께 국가방위군(Reichswehr)의 명칭은 공식적으로 국방군(Wehrmacht)으로 변경되었다.[81] 1935년 6월 1일에는 육군(Reichsheer)이 육군(Heer)으로, 해군(Reichsmarine)이 전쟁해군(Kriegsmarine)으로 각각 개칭되었다.[82] 이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방위군은 완전히 해체되고, 나치 독일의 침략 전쟁을 수행하게 될 국방군으로 재편되었다.
3. 군비 개발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 제한 조항을 회피하기 위해, 국가방위군(Reichswehr) 지도부는 일찍부터 비밀리에 불법적인 군비 증강 조치를 추진했다. 이는 검은 국가방위군의 은밀한 설립[45], 소련에서의 무단 무기 시험[46], 금지된 참모 훈련을 대체하기 위한 지도자 보조 훈련 학교(Führergehilfenschulung|퓌러게힐펜슐룽de) 설립[47], 그리고 새로 창설된 Truppenamt|트루펜암트de 내 참모 조직 유지[48] 등을 포함했다. '통계학회'라는 위장 명칭 아래 독일 산업 연맹과 협력하여 군수 산업 계획을 수립했으며[49], 퇴역 장교들의 도움으로 군사 훈련 목적의 스포츠 학교들을 설립했다. 이 학교들은 주로 이전 군사 훈련 지역 근처에 위치했으며, 가짜 탱크를 이용한 훈련도 이루어졌다.[50] 특히 북부 독일에서는 재향군인 단체인 Der Stahlhelm|데어 슈탈헬름de(강철 투구단)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51]
조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기만 전술과 위장 개발이 이루어졌다. 전투기를 민간 여객기로, 전차를 농업용 트랙터로 위장하여 개발했으며, 우편 배달원의 자위용이라는 명목으로 Kar98k와 같은 소총을 개발했다. 또한, MG15 기관총, 7.5 cm leIG 18 경보병포, 10.5cm leFH 18 경곡사포, 8.8 FlaK 18 대공포 등 새로 개발된 무기들에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연식을 붙여 개발 시기를 속이는 방식을 사용했다.
해외에서의 비밀 개발 및 훈련도 진행되었다. 1919년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일본 등 비교적 중립적이고 생산 설비를 갖춘 국가들에서 항공기, 전차, U보트(잠수함) 건조를 비밀리에 진행했다.[87] 또한,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비밀리에 무기 시험 및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46][87] 조약상 금지된 군대의 무기 보유 한도를 넘어서기 위해, 무장 민병대에 대량의 무기를 제공하여 명목상 군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공작도 이루어졌다.[88]
이러한 비밀스러운 노력의 결과, 여러 혁신적인 무기들이 개발되었다.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의 역할을 겸하는 다목적 기관총인 MG34와 MG42, 그리고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인 V2 로켓(A-4) 등이 대표적이다. 해군력 증강을 위해 건조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역시 조약의 제한 규정을 교묘하게 회피하여 설계 및 제작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바이마르 헌법에 따르면 독일의 국가 원수(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군 통수권을 가졌으나, 실질적인 지휘권은 국방장관에게 있었다.[19] 초대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를 시작으로[20] 오토 게슬러,[21] 빌헬름 그뢰너,[22] 쿠르트 폰 슐라이허[23] 등이 이 자리를 거쳐갔다. 특히 슐라이허는 수상까지 역임하며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집권 직전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수상의 추천 없이 독단적으로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는데,[24] 이는 헌법 절차를 벗어난 결정으로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육군 사령관으로는 발터 라인하르트, 한스 폰 젝트, 빌헬름 하이에,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 베르너 폰 프리치 등이 임명되었다.[25][26] 특히 젝트 장군은 1923년 독일 공산당(KPD)과 나치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는 등 군대가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5]
베르사유 조약은 국가방위군(Reichswehr) 육군 장교 수를 4,000명, 제국 해군(Reichsmarine) 장교 및 갑판 장교 수를 1,500명으로 제한했다.[33] 1918년 22만 명이 넘었던 장교 수는 3,718명으로 크게 줄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구 제국군의 참모 장교 출신이었다.[34] 전쟁 중 능력을 인정받아 장교로 진급했던 이들이나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장교들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는 국가방위군이 엘리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급진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장교들 역시 카프 반란 이후 숙청되었다.[34]
국가방위군 장교단의 정치적 성향은 기본적으로 군주제 복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겉으로는 공화국에 충성하는 태도를 보였다.[34] 1919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 출신 장교의 비율은 평균 23.8%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독일 전체 인구 중 귀족 비율(0.14%)과 비교할 때 매우 높은 수치였다. 특히 기병 병과에서는 장교의 절반이 귀족 출신일 정도였다. 반면, 부사관에서 장교로 진급한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장교 후보 선발 과정 역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각 연대 지휘관의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군과 유착 관계가 깊은 상류 계층 출신들이 장교 후보로 대거 선발되었다. 1926년 통계를 보면, 장교 후보의 96%가 상류 계급 출신이었고, 그중 절반 가까이는 현역 또는 전직 장교의 자제들이었다. 이러한 폐쇄적인 선발 시스템은 국가방위군 장교단의 동질성을 독일 제국 시절보다 오히려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국가방위군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와는 거리를 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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