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왕묘 소장유물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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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관왕묘 소장 유물 일괄은 임진왜란 당시 한중일 삼국의 역학 관계 속에서 건립된 동관왕묘에 소장된 유물들을 포괄한다. 주요 유물로는 1601년에 제작된 금동관우좌상과 관우상 옆에 시립한 소조 시녀상 2기, 관우를 모시는 소조배위상, 감실, 회화, 옥대 및 옥대함, 면류관, 황룡선, 북, 청룡언월도, 석조물, 편액 및 비석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조선 시대의 조각, 회화, 건축,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보여주며, 관우 신앙과 민간 신앙의 결합,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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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 소장유물 일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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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동관왕묘 소장유물 일괄 |
종류 | 유형문화재 |
지정번호 | 365 |
지정일 | 2014년 7월 3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난계로27길 84 (숭인동, 동묘공원)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 | 37건 |
문화재청 ID | 21,03650000,11 |
2.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당시 조선, 명, 일본 세 나라의 역학 관계 속에서 동관왕묘가 탄생하였다.[1] 대한제국 고종 대에는 외세를 물리치고자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를 세웠고, 이후 동관왕묘에 합사되었다.[1]
동관왕묘의 내삼문은 중문이라고도 하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전과 일직선 상에 위치하여 정전 다음으로 정성들여 만든 건물이다. 기둥은 1단으로 장대석을 쌓아 사면을 둘렀고, 지붕 위에는 취두, 추녀마루에는 잡상 2개를 놓았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워 고급 건축의 면모를 갖추었다.
3. 동관왕묘의 건축
내삼문 동문 위쪽 판벽에는 청룡 벽화가, 안쪽 아래쪽에는 주악행렬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청룡도는 4조룡이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으며, 18세기 산릉도감의궤의 청룡 그림과 유사하다. 주악행렬도는 악공과 의장수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영정조 시대 국왕 행차 시 동관왕묘에서 군례가 행해지던 풍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3. 1. 내삼문과 외삼문
내삼문은 중문이라고도 하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동관왕묘 정전과 일직선 상에 있어 정전 다음으로 정성들여 만든 건물이다. 기둥은 1단으로 장대석을 쌓아 사면을 둘렀고, 바닥에는 전돌을 깔지 않았다. 지붕 위에는 취두를 두고 추녀마루에 잡상을 두 개 놓았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워 고급 건축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내삼문 동문 위쪽 판벽에는 벽화가 있다. 판벽은 5쪽으로 나뉘어 있으며 먹선과 분선으로 사각형 테두리를 두른 안쪽에 짙은 청룡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청룡은 4조룡이며 상하에 위치한 만(卍)자형 구름을 발로 딛고 화면 가득히 M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앞을 향해 눈을 크게 부라리고 입을 벌린 채 왼발을 들어 바깥쪽에 있는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청룡도의 전체적인 도상적 특징은 18세기 『산릉도감의궤』에 그려진 사신도의 청룡과 시대적으로 비슷하다. 동문 위 청룡으로 미루어 맞은편 서쪽 판벽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다.
내삼문 안쪽 아래쪽에는 좌우 각각 2개씩 총 4개의 판벽이 있다. 이곳도 청룡도 벽화처럼 6개 내지 7개의 좁고 긴 판을 이어 붙였으며 먹선과 분선으로 사각형의 테두리를 두른 안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벽화의 주제는 주악행렬도이다. 4개의 판벽마다 각각 7명의 인물이 제각기 악기나 의장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인물들의 머리에 쓴 모자는 고깔 형태와 벙거지 형태로 구분된다. 의복은 바지 저고리에 전복을 입고 허리띠를 띤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목이 긴 목화를 신은 한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버선 위에 목이 짧은 혜를 신은 것이 공통된다. 벙거지를 쓴 인물들은 악공들로서, 북, 징, 꽹과리, 날나리, 태평소 등을 들고 연주한다. 반면 고깔을 쓴 사람들은 손에 홀을 들거나 의장용 칼을 차거나 깃발을 들거나 각종 의물을 들고 있다.
이러한 주악인물상이 묘사건축에 벽화로 그려진 것은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국왕이 왕릉을 행행할 때마다 이곳 동관왕묘에 들러 군례가 행해지던 당시의 풍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어 흥미롭다.
4. 동관왕묘 소장 유물
동관왕묘에는 명나라와 조선의 협력으로 1601년에 완공된 후, 다양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관우 숭배와 관련된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조각상: 관우를 모시는 관평, 주창, 왕보, 조루의 소조배위상과 금동관우좌상, 소조시녀입상 등이 있다. 금동관우좌상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유일한 금동상으로, 송나라 때 형성된 관우 도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소조시녀입상은 국내 관왕묘 중 유일하게 동관왕묘에만 존재한다.
- 감실: 서관왕묘 감실, 충진사 감실, 용문양 감실 등이 있으며, 각각 독특한 제작 기법과 특징을 보인다. 서관왕묘 감실은 목재와 소조를 결합한 관우좌상이 특징이며, 충진사 감실은 관우 초상화를 봉안했던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용문양 감실은 건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용 문양이 여러 군데 새겨져 있다.
- 회화: 일월오봉도, 구룡도, 내삼문 판벽화 등이 있다. 일월오봉도는 한국 궁중장식화의 특징을 보여주며, 구룡도는 황제를 상징하는 오조룡(五爪龍)을 묘사하여 관우의 위상을 나타낸다. 내삼문 판벽화는 주악행렬도로서 묘사 건축에 벽화로 그려진 처음 발견된 사례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 기타 유물: 옥대 및 옥대함, 면류관, 황룡선, 북, 청룡언월도, 석조물, 편액, 비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조선시대 왕실 의례와 관련된 유물들로,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4. 1. 조각상
동관왕묘와 북관왕묘의 소조배위상은 관우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관평, 주창, 왕보, 조루 네 사람의 상이다.1883년 북관왕묘를 만들 때 남관왕묘를 참고하였기 때문에 배위상들의 모본도 남관왕묘의 것이라 여겨진다. 이들 조각상은 1908년 향사이정에 관한 칙령에 의해 북관왕묘가 1901년 동관왕묘에 합사될 때 함께 옮겨져, 현재 동관왕묘 정전 오른쪽 북관왕묘 감실 밖에 배치되어 있다.[1]
동관왕묘와 북관왕묘의 소조배위상은 제작 기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동관왕묘의 소조상은 속을 점토로 채운 반면, 북관왕묘의 소조상은 속이 비어 있어 가볍다. 북관왕묘 소조배위입상은 목심으로 형태를 잡은 후 왕골이나 대나무발로 몸체를 만들고, 짚을 섞은 점토로 형상을 만든 뒤 석회를 바르고 모시천으로 안정시킨 다음 다시 석회로 표면을 다듬고 채색하여 마감했다. 따라서 속이 비어 무게감이 덜하다.[1]
북관왕묘 앞 네 명의 배위상은 모두 등신대 이상이며 얼굴과 신체의 비례가 적당하고 당당한 체구를 가졌다. 복부가 튀어나와 입체감을 주며, 동관왕묘의 소조상에 비해 옷이 바닥에 닿아 안정감을 준다. 가볍고 이동이 편리하지만, 조각 기술은 관습적이고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1]
동관왕묘의 조각상이 옷자락을 펄럭이거나 다리를 벌려 공간을 활용하고 무게를 분산시키는 반면, 북관왕묘의 조각상은 아랫부분을 넓게 만들어 삼각형 모양을 만들거나 옷자락 끝을 바닥에 닿게 하여 안정감을 높였다. 각 조각상의 얼굴은 눈이 크고 둥글며 볼살이 많고 하관이 벌어져 있으며, 개성이 없고 모두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다.[1]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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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평소조상 | 관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인함을 들고 서 있다. 높이 196cm로 가장 작고 얼굴이 검붉으며, 큼직한 코와 동그란 눈이 과장되어 있다. 다른 상과 마찬가지로 눈에는 검은 돌을 박아 생기를 부여했다. 투구는 종 모양이고 붉은 상모로 장식했으며, 복식은 푸른색 안료로 칠한 다음 붉은색, 금색 안료로 세부 장식했다. 조각상은 두께 10cm 정도의 목판 위에 놓여 있고, 신발은 목제로 만들었으며, 처음에는 가죽을 붙였던 흔적이 있다. |
주창소조상 | 키가 242cm로 크며 양감이 풍부하다. 눈은 부리부리하여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듯하다. 오른손으로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으며, 위엄 있지만 둔중한 느낌도 준다. 갑옷은 비교적 세밀하게 표현되어 팔뚝에는 굉갑, 허리에는 포두를 둘러 가슴 쪽에 속갑반으로 묶고, 허리는 가죽띠로 둘렀다. 불룩 튀어나온 배에는 화려한 천 위에 도깨비 문양 장식을 달았다. |
왕보소조상 | 높이 249cm로 비교적 크며 체구가 장대하다. 다른 조각에 비해 균형 잡힌 얼굴에 수염이 단정하다. 왕보의 복식은 붉은색 위주로 화려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왕보가 쓴 투구는 조선 후기 투구 모양이나,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관우의 투구는 송나라식이다. |
조루소조상 | 신장 224cm로 피부색은 살색으로 현실감이 있다. 조루는 관우의 검을 받쳐 들었는데, 다른 조각상에 비해 허리가 들어가고 엉덩이 부분이 약간 나와 좁아지는 듯하다가 밑으로 벌어지는 형태로, 신체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칼자루와 칼집에는 운문, 화문, 용문이 정교하게 시문되어 있다. 금박 흔적이 있고 칼자루에는 붉은색 유소장식이 있으며, 칼집에는 붉은 바탕에 흰색 점무늬를 찍어 사어피(鯊魚皮) 무늬를 나타내는 등 실물을 보고 제작한 경향이 보인다. |
북관왕묘의 배위상은 동관왕묘에 비해 조각 기술이나 솜씨가 떨어지지만, 중국식에서 벗어나 점차 조선식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1]
4. 1. 1. 금동관우좌상
關羽|관우중국어는 중국 촉(蜀)의 장수였지만, 사후 신(神)으로 숭배되어 중국 각지에 관제묘(關帝廟)가 세워졌다. 동관왕묘는 명나라 황제와 조선 선조의 협력과 한중 장인의 기술로 1601년에 완공되었다. 동관왕묘 정전 내부 중앙에는 화려한 단청이 칠해진 당가(唐家)가 있고, 그 안에 도금된 <금동관우신상>이 용상(龍床) 위에 앉아 있다.[1]관우신상의 주조 상황은 『영조통기(營造通記)』에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장수 만세덕과 여러 장수들이 10개의 풍로에 구리 3,800근을 녹여 관우상을 주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감관 한빈(韓斌)과 조선의 동장(銅匠)들이 구리 3백여 근을 더 모아 완성하여 중국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다.[1]
완성된 금동관우상은 높이 2.5m, 무게 1톤에 달하는 거작이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관우상 중 유일한 금동상이다. 얼굴과 몸체는 양감이 풍부하다. 눈은 봉황처럼 위로 치켜 올라갔고, 흰자 위에 호분을 칠하고 눈동자에 까만 구슬을 박았다. 코는 두툼하고 입은 꾹 다물어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관우의 수염은 말총으로 만들어 코밑에 홈을 파고 끼워 넣어 무릎까지 길게 내려온다. 관우는 오른손을 들어 수염을 쓰다듬고, 배를 내밀고 가슴과 허리에 이중띠를 매고, 다리를 벌리고 용상에 앉은 의좌형(椅座形) 자세이다.[1]
이러한 의좌상의 관우상은 송나라 때 형성되어 금(金)과 서하(西夏)의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판화로 확인된다. 관우의 얼굴, 자세, 복식 등이 유사하여 송나라의 관우 도상이 중원 문화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1]
1600년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감독관은 중국에서 유행하던 관우 도상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명나라 말기 신종황제는 후금(후일 청)의 세력을 관우의 영험으로 막고자 1593년 해주 관제묘를 조영하는 등 관제묘를 곳곳에 세웠고, 이것이 동관왕묘 관우상 조성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1]
중국인 기술자 한빈도 관우 도상을 알고 있어, 동관왕묘 관우상에 적극 반영되었다. 관우 복식은 실제 무장이 갑옷을 착용한 듯하다. 머리에 쓴 복두는 모부(帽部)가 2단으로 턱이 져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며 각(角)은 아래로 늘어져 있다. 이마 위 복두 중앙에는 수정을 박았고, 복두 위에 천을 둘러 나비처럼 묶고, 목 아래에 끈을 묶어 고정했다.[1]
동관왕묘 금동관우좌상의 갑옷은 덧입은 포(袍) 안쪽에 산자문(山字紋)으로 엮은 철갑편(鐵甲片)의 갑옷을 착용하고, 포 위에 속갑반(束甲絆)을 묶었다. 양 팔목에는 호견(護臂)을 착용했고, 양 허리에는 포(袍) 위에 포두(袍肚)를 찼고, 가죽 허리띠(雙帶鉤皮帶, 혹은 笏頭帶)와 비단천으로 만든 백대(帛帶)를 둘러 이중 허리띠를 묘사했다. 용상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오른쪽 무릎에서 포를 걷어 올려 그 아래쪽 퇴군(腿裙)이 보이며, 그 안쪽으로 결고포(缺胯袍)가 펄럭이고, 정강이에는 경갑(脛甲)을 두르고 발에는 운두오피화(雲頭烏皮靴)를 신었다.[1]
관우상은 당나라 때부터 유행한 고식(古式) 갑옷을 안에 입고, 그 위에 양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포(袍)를 몸에 꽉 끼게 겹쳐 입는 <창흉관포(敞胸寬袍)형갑옷>의 명대 무장 형식이 가미되었다. 이는 해주 관제묘 춘추루(春秋樓) 1층의 <관우융복도금소조상(關羽戎服鍍金塑造像)>과 가장 닮았다. 동관왕묘 금동관우상은 해주 관제묘 소조관우좌상의 원형으로, 한중 조각사적 의미가 크다.[1]
4. 1. 2. 소조시녀입상
동관왕묘 소조시녀입상은 관우상 양 옆에 높이 187cm로, 실제 사람 크기에 가까운 2기가 마주보며 서 있다. 서쪽 시녀는 '한수정후지인(漢壽亭侯之印)'이 새겨진 인새함(印璽函)을, 동쪽 시녀는 관우의 상징인 『춘추』를 들고 있다. 얼굴은 통통하고 눈썹이 가늘며 잔잔한 미소를 띠고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화려한 운견(雲肩)을 어깨에 덮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포를 입었으며, 아래에는 치마를 입고 목이 긴 목화(木靴)를 신었다. 동쪽 시녀상은 붉은색 조복(朝服) 위에 녹색 띠를, 서쪽 시녀상은 녹색 옷 위에 붉은 띠를 둘러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다. 가슴에는 흉배, 허리에는 포두(袍肚)를 두르고 옥대(玉帶)로 고정했으며, 앞쪽에 폐슬과 비단띠를 나비처럼 묶었다. 양옆에는 패옥(佩玉)을, 뒤쪽으로는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있다. 신체를 감싼 복식이 몸의 윤곽선을 따라 흘러내려 고요하면서도 절제된 표현을 보여준다.[1]국내 관왕묘 중 시녀상이 있는 경우는 동관왕묘가 유일하며, 중국 내 관제묘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이다. 청나라 때 중건된 해주 관제묘의 전각 내 감실 여러 곳에서 시자상이나 시녀상을 발견할 수 있어 동관왕묘와 해주 관제묘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춘추루 감실 내 <관우융복상(關羽戎服像)> 좌우에는 늠름한 시자상을, 숭녕전 감실 내 <관우면복상(關羽冕服像)>에는 시녀상을 세웠다. 그러나 동관왕묘는 감실 내에 시녀상을 세워 중국과 다른 배치 방식을 보여준다.[1]
중국 해주 관제묘의 시녀상은 청나라 때 중건되었음에도 당송대에 제작된 고풍스러운 시녀상에 가깝고, 동관왕묘의 시녀상은 명나라 때 유행한 복잡한 장식을 차용한 시녀상과 유사하다. 이는 동관왕묘와 해주 관제묘의 시녀상이 각기 다른 모본(模本)이나 화본(畵本)을 참고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복두를 쓰고 조복을 갖춘 시녀의 기본 복장은 당나라 때 남장 여인의 모습에 기원을 두지만, 이국적인 운견(雲肩)을 두르고 폐슬이나 패옥 등의 각종 장식을 착용하여 화려하게 묘사한 명나라 때 시녀상의 새로운 경향이 1601년 동관왕묘 완공 당시 관우상 앞 시녀상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1]
4. 1. 3. 소조배위입상
동관왕묘와 북관왕묘 소조배위상은 관우를 모시는 묘사 건축의 일종으로, 관우를 옹위하기 위해 세워진 관평, 주창, 왕보, 조루 네 사람의 상이다. 이들은 각각 특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제작 기법과 복식 등에서 조선 후기 조각 양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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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평소조상 | 관우의 첫째 아들로, 높이 234cm의 6등신 상이다. 흰 얼굴에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관우의 봉호가 새겨진 인새함을 받들고 있다. 머리에는 책(幘)이라는 복두 형식의 관모를 쓰고, 목 주위가 둥근 단령포(團領袍)를 입었다. 조복 가슴에는 녹색 흉배가 부착되어 붉은 조복과 보색 대비를 이룬다. |
주창소조상 | 높이 242cm(청룡언월도 창끝까지 344cm)의 상으로, 검은 얼굴에 구레나룻 수염이 길게 뻗쳐 용맹한 부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왼손으로 청룡언월도를 잡고 있으며,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려 공간감을 풍부하게 한다. 입자형(笠子形) 투구에 갑옷을 입고 수삼(綉衫)을 걸친 모습은 당나라 무장 설인귀와 유사하다. |
왕보소조상 | 높이 227cm의 상으로, 온화한 문신 복장의 노인 형상을 하고 있다. 손에 든 검은 몸체에서 분리되어 있다. 웃는 얼굴에 수염이 단정하고, 머리에 쓴 오사모(烏紗帽)에는 꽃이 장식되어 명나라 문신의 모습을 보인다. 단령 조복에 호랑이 두 마리가 있는 흉배를 달아 문관이자 무관인 왕보의 면모를 나타냈다. |
조루소조상 | 전사한 무장으로, 용맹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창(삼첨양도창)을 들고 있으며, 얼굴은 험상궂고 머리에는 세 개의 뿔이 솟아있다. 갑옷은 주창과 마찬가지로 설인귀의 복식과 유사하며, 산자문(山字紋) 철편으로 꿰어 입고 목이 긴 목화를 신었다. |
이들 소조배위상은 1601년에 완성된 것으로, 17세기 초 소조상 양식을 잘 반영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관우 숭배가 확산된 당송대의 고식(古式) 도상 위에 명나라의 요소가 일부 가미된 특징을 보인다.[1]
4. 2. 감실
동관왕묘에는 서관왕묘 감실, 충진사 감실, 용문양 감실 등 다양한 감실들이 있으며, 각각 독특한 특징, 제작 배경,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서관왕묘 감실: 북관왕묘에 있던 것을 동묘로 옮겨온 것으로, 목재와 소조를 결합한 독특한 기법으로 제작된 관우좌상이 특징이다.
- 충진사 감실: 동관왕묘 소장 감실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좋으며, 관우 초상화를 봉안했던 점이 특징이다.[1]
- 용문양 감실: 건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용 문양이 여러 군데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1]
4. 2. 1. 서관왕묘 감실
西關王廟|서관왕묘중국어 감실은 원래 북관왕묘에 있던 것으로, 1910년 동묘로 옮겨져 동관왕묘 당가의 오른쪽 공간에 배치되었다. 북관왕묘는 1883년 고종과 민왕비가 내탕금(왕실 재산)을 내어 조성한 곳으로, 고종이 재임 중 17회나 찾을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곳이다. 그러나 1908년 향사이정(제사 제도 개정)에 관한 칙령으로 북관왕묘가 폐쇄되면서 감실과 조각상이 동묘로 옮겨지게 되었다.북관왕묘의 관우좌상은 높이가 2.16m로 동관왕묘 관우좌상보다 작지만, 머리 위에 모자 모양의 일산(日傘)을 씌워 상당히 커 보인다. 이 관우상은 신체는 소조(塑造, 흙으로 빚어 만듦)로, 머리 부분은 목제(木製, 나무로 만듦)로 제작한 특이한 조각기법을 보인다. 목제로 만든 얼굴은 깊이 있게 조각한 다음 검붉은 옻칠로 마감하여 대추빛 같이 붉은 관우의 얼굴을 표현하였는데, 이 때문에 '생시관우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북관왕묘 관우상의 신체는 목심(木心, 나무 뼈대)으로 기본 골격을 갖추고 팔, 다리 등 뻗어나온 부분에 따로 나무를 연결하여 세부를 대충 만든 후, 왕골을 감아 볼륨감을 표현하고 그 위에 짚을 섞은 점토를 발라 표면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점토 표면에는 석회를 바른 후 채색하여 마무리하였다. 신체 위로 갑옷을 입은 다음 용포(龍袍, 임금의 옷)를 입혔는데, 용포는 뇌록색(濃綠色, 짙은 녹색)으로 칠하였고 속의 갑옷은 금빛의 산자문(山字文, 산 모양 무늬)으로 되어 있다. 용포의 양 어깨에는 황색의 사조룡보(四爪龍補, 발톱이 넷 달린 용 무늬)를 붙였고, 가슴과 배에는 붉은색 여의주가 그려진 흉배(胸背, 가슴과 등에 붙이는 장식)를 착용하고 있다. 도상학적(圖像學的, 그림이나 조각의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으로 볼 때 관우는 관왕(關王)으로 추존되었으므로 가슴과 등 및 양 어깨에 원형 보(補)를 붙여야 하지만, 충성스러운 신하의 상징이기도 하여 가슴과 등에는 신하의 상징인 흉배를 두어 살아 있는 왕보다 한 단계 낮추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관왕묘의 소조관우상은 1883년 남관왕묘의 관우상을 본보기로 하여 목제 조각과 소조가 결합된 특이한 방식으로 제작한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조각이다. 엄청난 크기에 두 손을 앞으로 모으는 공수(拱手) 자세를 하고 용상(龍床, 임금의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의자상(倚子像, 의자에 앉은 모습의 불상)이다. 얼굴은 용맹한 무사의 품격을, 신체는 당당한 관왕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4. 2. 2. 충진사 감실
충진사 감실은 동관왕묘 소장 감실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연꽃잎이 나선형으로 꼬인 듯한 파련문(波蓮文) 조각이 특징이다. 이러한 뛰어난 조형 감각 덕분에 비교적 옛 양식(古式)을 유지하면서도 고종 대의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1] 192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이 감실이 충진사에서 동관왕묘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1]충진사 감실은 관우 초상화가 독립적으로 놓이도록 제작된 목조 감실이다. 전체 높이는 251.4cm, 좌대 폭은 167.5cm × 626cm이다. 구조는 3단으로, 상단에는 닫집, 중단에는 초상화를 봉안하는 장(欌), 하단에는 좌대가 있다. 전면에 신탑(神榻)을 부착한 것이 특이하다.[1] 동관왕묘나 북관왕묘의 감실과 달리, 청동 관우상이나 소조관우상 대신 관우 초상화를 봉안했다는 점이 다르다. 감실장 내부에 평판형 용상(龍床)을 설치하여 초상화를 걸 수 있게 한 점이 두드러진다.[1]
감실의 중단에는 이중 구조의 감실장이 있어 깊이감을 더한다. 하단은 3단으로, 좌대, 난간, 신탑으로 나뉜다.[1] 감실 전체는 붉은색 석간주로 칠해져 있고, 닫집, 낙양, 난간 등에는 각종 문양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봉황, 용 문양 등에 금칠, 다양한 문양의 초각 장식도 있다.[1]
감실 내 용상은 가로 72.7cm, 세로 142cm 크기이다. 액자형이며, 하단에 ⊥형 족대(足臺)가 있다. 양쪽 끝에는 금빛 용머리[龍頭] 장식이 있고, 중앙에는 서일상운문(瑞日祥雲文)이 초각되어 있다. 좌우 측면 하단부는 당초문 초각과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1]
용상은 감실장 내부에 있어 단청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액자 가장자리는 주칠, 용머리 부분은 금색이 선명하다. 용상 판면 상단에는 관우 초상화를 걸었던 청동제 걸쇠가 양쪽에 하나씩 있다. U자형 걸쇠 끝은 연꽃봉오리 형태이다.[1] 용상 뒤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는데, 용상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훼손된 곳이 많다.[1]
용상이 놓인 감실 바닥에는 2중 깔개가 있다. 왕골자리 위에 화려한 비단깔개가 놓여 있다. 비단깔개는 주황색 장화단(粧花緞)에 모란, 국화문 수가 놓여 있고, 가장자리는 자주색 직금단(織金緞)으로 둘러져 있으며, 금색 실로 박음질되어 있다.[1] 감실 난간 안쪽 좌대 위에도 비슷한 왕골돗자리와 비단깔개가 있다.[1]
이처럼 충진사 감실에는 관왕 초상화를 걸었던 용상형 걸개, 비단깔개 2점, 화문석 깔개 1점 등이 갖춰져 있어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1]
4. 2. 3. 용문양 감실
용문양 감실은 동관왕묘 정전 내에 안치된 목조 감실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이지만, 건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용 문양이 여러 군데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1927년에 촬영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이 감실이 정전 뒤쪽 맨 왼쪽 벽면에 보정대사 감실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1]감실의 구조는 목조 건물의 구조와 일치한다. 천장에는 <쌍룡도>가 그려져 있고, 낙양에는 용 문양의 초각(草刻)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단청의 문양과 채색은 단순하고 도안화되어 있으며, 좌우 벽체에는 민화풍으로 단순화된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1]
용문양 감실은 충진사 감실과 같은 이동식의 독립형 감실이다. 크기가 크지 않아 좌대와 감실장을 일체로 제작하였다. 감실의 구조는 일반 목조 건물에 비해 현저히 작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건축물과 같이 치밀하게 목구조를 구현하고 있다.[1]
감실의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1]
- 첫째, 감실을 이루는 네 기둥 위에는 이익공(二翼栱) 양식의 귀공포를 설치하고 익공과 익공 사이에는 전면에 9개, 측면에 3개의 운공(雲栱)을 설치하였다. 포작(包作) 위에는 연목(椽木)과 부연(附椽)을 올려 겹처마를 구성하고 있는데, 일반 건물이 처마 끝을 살짝 올려 곡선으로 처리하는 것과 달리 평평하게 조성하고 있다.
- 둘째, 창방(昌防) 아래로는 감실 전면에 4개의 헛기둥(虛柱)을 짧게 내리고 있다. 창방과 양쪽 기둥을 연결하는 낙양 장식이 설치되어 있고 낙양이 끝나는 지점에 난간이 있다. 감실의 측면에도 평난간(平欄干)이고, 감실 내부의 아자살창과 같은 아자교란(亞字交欄)을 선택하고 있다. 난간의 양쪽 끝에 법수(엄지기둥, 法首)를 세워 격이 있어 보인다.
- 셋째, 좌대 역할을 하는 감실의 하단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2단의 머름칸을 두고 전면 하단에는 7개, 상단에는 8개의 칸으로 구획하고, 측면은 2단 모두 3칸으로 구획하였다. 이곳은 뇌록색 바탕에 안상을 투각한 청판을 끼워 놓았다.
- 넷째, 난간 안쪽으로 전면에서 21.5cm, 측면에서 20.5cm 들어간 위치에 내부 감실장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장은 감실의 외부 형식과 마찬가지로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창방 아래 기둥과 기둥 사이에 낙양을 설치하였으며, 하단에는 1단의 머름칸을 두었다.
이처럼 용문양 감실은 각 부재마다 세밀하고 격조 있게 베풀어진 단청 문양을 통해, 이 감실이 궁궐의 전각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4. 3. 회화
동관왕묘에는 일월오봉도, 구룡도, 내삼문 판벽화 등 다양한 회화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독특한 특징과 도상적 의미를 지니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일월오봉도와 구룡도, 내삼문 판벽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문단을 참조하라.
4. 3. 1.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동관왕묘 감실 내 금동관우좌상의 용상 뒤쪽 벽면에 배치되어 있다. 일월오봉도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 곤륜도(崑崙圖)로도 불리며,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궁중장식화이다. 그림의 주제는 하늘 아래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있고, 골짜기에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산 아래에는 격랑이 이는 파도가 그려져 있으며, 화면 양 끝에는 붉은 가지의 소나무가 두 그루씩 서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은 음양(陰陽)을, 다섯 봉우리는 오행(五行)을 나타내고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대변하는 주인공으로 국왕을 상징한다.[1]동관왕묘의 일월오봉도는 여러 특징이 있다. 첫째, 일반적인 일월오봉도에서 해와 달은 다섯 개의 봉우리 중 오른쪽 두 산 사이에 붉은 해가, 왼편 두 산 사이에 흰색 달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동관왕묘 오봉도에서는 중앙의 산봉우리 좌우에 해와 달이 위치하고, 붉은 해와 흰 달의 위치도 좌우가 바뀌어 붉은 해가 왼쪽에, 흰 달이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1]
둘째, 동관왕묘의 일월오봉도의 구도는 좌우 대칭적이면서 배치된 경물이 비교적 적다. 그러면서 전체 그림이 매우 단정하고 정적이며 종교적 엄숙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것은 필세의 태세나 필선의 강약이 없이 일정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붓끝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붓 중심이 필선의 가운데를 지나가게 중봉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그린 공필화의 일종이다.[1]
셋째, 여러 화원이 한꺼번에 참여한 공동작품으로, 그림의 초안이 약간씩 어긋나고 좌우를 연결한 화폭마다 색상의 색감이나 처리가 약간씩 다르게 되어 있다.[1]
넷째, 동관왕묘의 일월오봉도는 세로 259cm×가로 490cm로 현존하는 일월오봉도 중 최대 크기이다. 더욱이 일반적인 병풍이 6폭, 8폭, 10폭 등 짝수로 제작되는 데 비해 7폭 병풍으로 제작되어 있다. 바탕의 천은 명주이고, 7폭의 배첩은 각 폭마다 경첩을 달아 고리로 고정시킨 독특한 방법을 구사하였다. 양식적으로 18세기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1]
4. 3. 2. 구룡도
동관왕묘 구룡도는 일월오봉도 뒷벽에 붙어 있다. 용 아홉 마리를 그린 '구룡도'는 중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인들은 양(陽)의 숫자 중 가장 큰 '9'를 좋아한다. 북경 자금성은 아홉 마리 용이 지킨다고 하여 성문도 아홉 개이고, 아홉 마리 용이 조각된 구룡벽을 세웠다. 명나라 때 관우가 황제로 승격하면서 해주 관제묘에도 입구에 구룡벽을 쌓았다. 동묘에도 구룡벽 대신 구룡도를 그려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구룡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 첫째, 모든 용이 발톱 다섯 개를 지닌 오조룡(五爪龍)으로 묘사되어 있다.
- 둘째, 선묘(線描)로 간결하고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형적인 공필화(工筆畵)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선적인 처리로 인해 용의 형태는 단순해지면서 평면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 셋째, 선명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일월오봉도 병풍이 앞을 가려 공기와 먼지가 차단되고 색상의 변화가 거의 없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 넷째, 황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제한된 색을 사용하여 조화롭다. 백룡 1마리와 청룡 1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황룡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오방색을 사용하여 비교적 다채롭게 용을 표현하는 반면, 동묘는 황토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여 고상한 분위기를 낸다.
- 다섯째, 중국 구룡도의 용은 한 마리씩 따로 위치하지만, 동관왕묘의 구룡은 서로 자연스럽게 엉켜 있다.
- 여섯째, 용 그림은 매우 섬세한 세필(細筆)로 그린 공필화로, 선묘 후 채색을 엷게 하였다. 용들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각상 뒤의 황룡은 앞을 향하고 주위의 용들은 시선을 중앙, 즉 관우상을 향해 화면의 집중감을 높이고 있다.
구룡도가 뛰어난 점은 아홉 마리의 용들이 거대한 화면 속에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고, 아래쪽에는 출렁이는 물결과 그 위로 피어오르는 구름이 화면을 가득 채운 사이에 용들이 자유자재로 비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잡한 화면을 가득 채운 짜임새 있는 구성뿐만 아니라 황, 적, 청, 백, 흑색의 용들이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된 것을 보아도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구룡도 상단에는 앞쪽에 배치한 일월오봉도를 고정시키기 위한 못 자국이 3번 이상 있어, 구룡도의 제작 시기는 일월오봉도보다 앞선 1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1]
4. 3. 3. 내삼문 판벽화
내삼문은 중문이라고도 하며, 동관왕묘 정전과 일직선 상에 위치하여 정전 다음으로 정성들여 만든 건물이다. 문의 가구는 2고주 7량이며, 전후로 퇴를 구성했고 전면 고주에는 매 칸마다 판문을 두었다.[1]내삼문 동문 위쪽 판벽에는 벽화가 배치되어 있다. 판벽은 5쪽으로 나뉘어 있으며 먹선과 분선으로 사각형 테두리를 두른 안쪽에 희미하게 짙은 청룡이 그려져 있다. 청룡은 4조룡이며 상하에 위치한 만(卍)자형 구름을 발로 딛고 화면 가득히 M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청룡은 오른쪽 앞을 향해 눈을 크게 부라리고 입을 벌린 채 왼발을 들어 바깥쪽에 있는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청룡도의 전체적인 도상적 특징은 18세기 『산릉도감의궤』에 그려진 사신도의 청룡과 시대적으로 비슷하다. 동문 위 청룡으로 미루어 맞은편 서쪽 판벽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다.[1]
내삼문 안쪽 아래쪽에는 좌우 각각 2개씩 총 4개의 판벽이 있다. 이곳도 청룡도 벽화처럼 6개 내지 7개의 좁고 긴 판을 잇대었으며 먹선과 분선으로 사각형 테두리를 두른 안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벽화의 주제는 주악행렬도이다. 4개의 판벽마다 각각 7명의 인물이 제각기 악기나 의장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고 있다. 그들의 머리에 쓴 모자는 고깔 형태와 벙거지 형태로 구분된다. 그들의 의복은 바지저고리에 전복을 입고 허리띠를 띤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목이 긴 목화를 한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버선 위에 목이 짧은 혜를 신은 것이 공통된다. 벙거지를 쓴 인물들은 악공들로서, 들고 연주하는 악기는 북이나 징, 꽹과리, 그리고 날나리와 태평소 등이다. 반면 고깔을 쓴 사람들은 손에 홀을 들거나 의장용 칼을 차거나 깃발을 들거나 각종 의물을 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1]
이러한 주악인물상이 묘사 건축에 벽화로 그려진 것은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18세기 영조·정조 시대에 국왕이 왕릉을 행행할 때마다 이곳 동관왕묘에 들러 군례가 행해지던 당시의 풍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어 흥미롭다.[1]
4. 4. 기타 유물
동관왕묘에는 옥대, 면류관, 황룡선, 북, 청룡언월도, 석조물, 편액, 비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각각 독특한 특징과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옥대 및 옥대함''':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 '''면류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 '''황룡선''':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 '''북 일괄''':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 '''청룡언월도 일괄''':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 '''석조물''':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 '''편액 및 비석''':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4. 4. 1. 옥대 및 옥대함
옥대는 옥 장식이 달린 허리띠로, 왕이 곤룡포 위에 착용했다. 동관왕묘의 옥대는 현재 길이 2490mm, 폭 68mm이며, 옥과 띠는 분리된 상태이다. 옥대 표면은 붉은색 단으로 싸여 있고, 철제 버클이 남아 있다. 버클 쪽에는 옥판을 고정한 흔적이 보인다. 앞쪽은 2겹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옥판을 고정하기 위해 꿰맨 실을 가리고 옥판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옥대와 함께 발견된 옥판은 총 13개이다. 철제 테두리가 있는 옥판과 테두리가 없는 옥판으로 나뉜다. 철제 테두리가 있는 옥판은 총 7개인데, 그 중 큰 사각형 옥판은 106mm×67mm 크기이다. 이는 동관왕묘 관왕상의 옥대에 남아있는 접착제 위치 및 크기와 유사하다. 테두리가 있는 옥판은 큰 사각형 3개, 작은 사각형 2개, 물방울형 2개로, 총 7개이다. 큰 사각형 옥판 중 1개는 한 면이 둥글고 다른 면은 모가 났으며, 다른 2개는 모든 면이 모가 났다. 이 중 한 면이 둥근 것과 모든 면이 모난 것 중 1개에는 네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는 옥대와 연결하기 위한 구멍으로 추정되지만, 옥대에서 실로 꿴 흔적은 확인되지 않아 옥판에 장식을 달았던 구멍일 가능성도 있다.
옥대를 넣는 함은 둥근 원통형이며 주칠로 되어 있다. 왕실 유물 중 주칠은 왕이 사용하는 의물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 관왕의 위상을 보여준다. 민간의 관복함 중에는 관모, 관복, 대대를 넣어 보관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원통형에 주칠한 유물은 흔치 않다.
북관왕묘 옥대는 옥과 띠가 분리된 상태이며, 붉은색 단으로 싸여 있다. 철제 버클이 남아 있는데, 형태와 크기는 동관왕묘 옥대와 같다. 버클 쪽으로 옥판을 고정한 흔적이 보인다.
북관왕묘 관우상의 옥대에는 테두리가 없는 옥판이 부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옥판은 큰 사각형 2개, 물방울형 4개이다. 동관왕묘 관우상의 옥대와 옥판 배치를 참고하면, 분실된 옥판은 작은 직사각형 옥판 2개로 추정된다. 옥판은 양쪽 대칭으로, 가운데부터 큰 사각형, 물방울형 2개, 작은 직사각형 옥판 순서로 일정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중심에는 큰 사각형 옥판 1개가 있고, 양쪽에 작은 사각형 옥판이 바로 붙어 있으며, 간격을 두고 물방울형 옥판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옥대함은 둥근 원통형 주칠함 1점이 있는데, 동관왕묘의 것과 마찬가지로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북관왕묘 감실 내부에서도 옥대함 1점이 발견되었다. 동관왕묘에는 옥대를 넣었던 비단 주머니가 남아있지만, 북관왕묘에는 남아있지 않아 후에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4. 4. 2. 면류관
동관왕묘의 면류관은 관판, 관대, 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판과 관대는 분리된 상태이다. 관판은 앞면은 둥글고 뒷면은 모가 난 형태이며, 나무판으로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 비단을 발랐다. 관판 윗면은 검은색의 무늬 없는 비단, 아랫면은 붉은색 화문단(花紋緞)을 발랐는데, 이는 『증보문헌비고』에 기재된 면류관의 설명과 일치한다.[1]면류관에 달린 류(旒)는 앞쪽에 11줄, 뒤쪽에 12줄이 남아 있어 12류 면류관이다. 류에는 유리구슬이 10개씩 5단으로, 한 줄에 50개의 구슬이 꿰어져 있다. 오랜 시간 먼지가 묻고 세척되지 않아 원래 색상을 알기 어려웠으나, 각 단마다 황색, 적색, 청색, 백색, 흑색, 녹색의 구슬이 확인되었다.[1]
관판과 관대는 분리되어 있지만 연결되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관판에는 철사 고리가 4군데 남아있고, 관대에도 종이가 뜯긴 흔적이 있다. 관대는 원통형으로, 안쪽에 대나무살을 엮어 형태를 만들고 한지를 여러 겹 바른 후 옻칠하고 금색 종이띠를 둘러 마무리하였다. 안쪽 대나무살은 1인치×1인치에 22×16개의 댓살을 사용한 죽망(竹網)의 일종이다. 관대 양쪽에는 잠(簪)을 꽂기 위한 구멍이 있다. 잠은 철제로 만들어 도금하였으며, 잠 머리에는 정사각형 판장식이 달려 있는데, 한 면에 접착 흔적이 있어 다른 장식이 달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조선시대 면류관은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 없지만, 동관왕묘의 면류관은 조선 왕실 및 대한제국 시대에 실제로 만들어 사용한 면류관으로서, 그 실제 형태나 제작 기술 등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1]
4. 4. 3. 황룡선
황룡선은 동관왕묘 정전 뒤에서 발견되었다. 이 황룡선의 형태는 목제 장대에 부채를 단 형태로서, 부채 부분은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며 각이 둥글다. 철사로 형태를 잡고 그 위에 배접한 금색 무늬 없는 천을 싸고, 가장자리에 같은 원단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테두리 장식은 직사각형 천을 주름잡아 둘렀으며 원단과 같은 색상의 금색 실로 꿰매었다. 부채의 양면에는 각각 한 쌍의 용을 그려 넣었다.[1]황룡선의 용은 발톱이 5개인 오조룡이다. 오조룡은 황제를 상징하며 이것은 관우가 황제라는 것을 상징하는 의물인 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기에 고종황제가 관왕을 황제로 승격시킨 1901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1]
북관왕묘 감실 안에서는 자루가 분리된 한 쌍의 황룡선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황룡선은 북관왕묘 감실 내부에 배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관왕묘 황룡선은 자루가 분리된 채 발견되어 부채와 자루가 연결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장대 상단에 부채를 끼우기 위해 홈을 파 놓은 부분 끝을 보면 작은 구멍이 있고, 실이 끼워진 채 남아있다. 이로 보아 부채를 끼우고 실로 감아 고정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부채 끼우는 틈 끝부분에는 철제를 둘러 보강하였다.[1]
동관왕묘 황룡선에는 없는 것으로 북관왕묘 황룡선에는 장대 중간에 주황색 직물띠를 묶은 것이 보인다. 주황색의 원단은 동관왕묘 관우상의 옥대함이 들어있던 옥대 주머니감과 같은 것이다.[1]
4. 4. 4. 북 일괄
동관왕묘에는 3점의 북이 창고에 소장되어 있다. 각각의 북은 장식이나 형태 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조선 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1]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북 1점은 한두 차례 보수한 흔적이 있다. 북의 배 부분은 31개의 쪽나무를 이어 붙여 둥글게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로 종이 3겹을 발랐다. 가장 바깥쪽 종이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북면에는 적색, 백색, 청색으로 삼태극을 그렸다. 북 내부에는 울림테 4줄을 설치하였다.[1]
두 번째 북은 형식 면에서 첫 번째 북과 유사하다. 용의 뿔로 보이는 부분이 남아 있어 첫 번째 북과 마찬가지로 구름 사이로 나는 용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1]
세 번째 북은 제작 방법으로 보아 가장 최근에 제작된 것으로, 34쪽의 나무를 이어 붙여 둥글게 만들었다. 표면에 붙인 종이가 남아 있지 않아 무엇을 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내부에는 울림테가 없다.[1]
4. 4. 5. 청룡언월도 일괄
동관왕묘 서무에는 청룡언월도 2점과 목제 받침대 2점이 소장되어 있다. 언월도는 총길이가 3m이고, 전체가 철제로 제작되어 무게가 상당하다. 창날과 자루를 연결하는 부위에는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으며 반대편에는 3개의 창날이 원뿔 형태로 장식되어 있다. 목제 받침대는 높이가 160cm이고 상단에 창을 꽂고 잠글 수 있는 걸쇠가 있다.이 청룡언월도 2점은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무게도 엄청나며 제작 기술 또한 뛰어나고 형태나 문양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탁월하다. 철제의 부식 정도나 제작 기술로 볼 때 빠르면 동관왕묘를 조성할 당시이거나 늦어도 영조, 정조 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청룡언월도는 조선 후기 무기사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물로 판단되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4. 4. 6. 석조물
동관왕묘에는 석조해태상, 석조사자상, 석제드므, 등롱석, 향로석, 용두석 등 다양한 석조물들이 있다.석조해태상현재 동관왕묘의 해태상은 정문 오른쪽의 세 점의 석수 중 하나이다. 원래 해태상은 1쌍으로 배치되지만,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어 다른 1마리는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해태상의 길이는 126cm, 높이는 57.8cm이다. 뒤로 넘긴 갈퀴, 소처럼 꿇어앉은 모습, 소의 발, 머리에 난 뿔 하나, 전신의 동그란 비늘 문양, 큰 코 등은 해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광화문 앞 해태상과 비교해도 유사하다. 동관왕묘의 해태상은 남관왕묘 건립 이후 관왕묘에 해태를 놓는 전통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제작 시기가 비교적 후대인 것으로 보인다.
석조사자상동관왕묘 중문 오른쪽에는 해태상 1기와 함께 좌우로 5m 정도 떨어진 곳에 높이 46.9cm의 석사자 두 구가 배치되어 있다. 이 사자상들은 중국 관제묘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사자상들은 고개를 안쪽으로 돌려 해태상을 바라보는 형상이며, 앞다리를 들어 땅을 밟고 뒷다리는 구부리고 있다. 동그란 눈, 목 뒤로 뻗친 갈기, 앞다리 위의 작은 날개, 목걸이형 띠와 가슴 쪽의 큼직한 방울 장식 등이 특징이다. 귀가 뒤로 젖혀진 모습은 낙양 관림의 사자상과 유사하여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석제드므동관왕묘 정전 밖 등롱석 옆에는 석제 드므가 있다. 드므는 원래 화재 예방이나 화재 진압용 물을 담는 큰 항아리지만, 동관왕묘의 드므는 높이 30.5cm의 작은 크기로 상징적인 의미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호족반 위에 올려진 형태이며,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들었다. 안쪽은 정으로 거칠게 다듬어 홈을 만들었고, 윗부분부터 옆면은 매끄럽다. 특별한 모양은 없으며, 호족반 또한 사면이 같은 모습이다.
등롱석동관왕묘 정전 내부와 외부에는 각각 등롱석이 하나씩 있다. 등롱석은 등불을 밝히는 등롱을 올려놓는 받침대이다.
구분 | 내부 등롱석 | 외부 등롱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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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정전 내부 | 정전 외부 (1913년 북관왕묘 훼철 시 옮겨옴) |
용도 | 관왕의례 때 사용 | |
구성 |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 |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 |
상대석 | 육면체, 측면에 난초 새김, 상판 네 귀퉁이에 ㄱ자 홈, 촛농 오염 | 상판에 ㄱ자 홈, 좌측면에 성수만년(聖壽萬年) 음각 |
중대석 | 3층, 윗층은 대나무, 아래층은 모란문 새김, 2개의 돌 결합, 운문 조각 | 4면에 대나무, 운문, 모란, 보주문 새김 |
하대석 | 1단, 호족 형태, 풍혈과 다리 결합, 기단석은 육면체, 상부 모죽임 | 호족반 다리, 풍혈, 전면 좌측 상단 파손, 기단석에 백목전진상(白木廛進上) 명문 (1888년 제작) |
특징 | 섬세한 조각술, 정교한 장식, 17세기 초 광해군묘 양식과 유사 |
향로석동관왕묘 정전 내외부에 거의 비슷한 형태의 향로석이 각각 1기씩 있다.
구분 | 내부 향로석 | 외부 향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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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정전 내부 | 정전 외부 (원래 북관왕묘에서 사용) |
특징 | 전체 높이 46.2cm, 각 면 모죽임, 상판 아랫부분 역사다리꼴, 개다리[狗足) 형태 풍혈, 특별한 문양 없음, 17세기 광해군묘 향로석과 유사 | 전면 방형, 후면 팔각형, 전후면 1개의 돌, 전면 기단석 위 구족반, 중심부 대칭, 다리는 안으로 들어간 구족, 구름 모양 대칭 곡선 풍혈, 기단석 모 처리, 후면 상단에 향로 다리 놓는 자리 3개 홈, 정전 내부 향로석보다 장식적, 고종대 양식 반영 |
용두석정전 앞 월대 위에 화강암제 용두 한 쌍이 마주보고 있다. 원래 계단석 양 옆에 앞을 향해 배치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유선형 몸체, 비늘, 화염문, 운문 조각, 뿔 두 개, 촉수, 세밀한 이목구비가 특징이며, 조선시대 석조 용머리상 중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4. 4. 7. 편액 및 비석
편액이나 현판은 널판지에 글씨를 써서 문 위나 벽에 걸어 놓는 틀을 말한다. 동관왕묘 낙성식 이전에 중국 황제에게 현판 글씨를 요청하여 신종으로부터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는 글을 받았는데, 이것이 동관왕묘 최초의 현판이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1]동관왕묘 정전 내부에는 '현령소덕무안왕묘' 편액이 두 개 걸려 있다. 하나는 남색 바탕에 금색 글씨, 다른 하나는 붉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이다. 푸른색은 동쪽, 붉은색은 남쪽을 의미하므로, 전자는 동관왕묘의 것이고 후자는 남관왕묘의 것이다. 푸른색 바탕의 현판에는 '이곳에 한나라 관왕의 시호가 모셔져 있으니 이런 흥겨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 소냐. □□□□음력 8월에 친히 글을 지어 삼가 여기에 모시노라'라는 명문이 있다.[1] 붉은색 바탕의 현판은 '英祖御制(영조어제)'라는 명문으로 보아 1746년 영조가 남관왕묘에 내린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남관왕묘가 훼철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동관왕묘 서무에 있는 비석은 1746년(영조 22) 영조가 왕릉에 행차했다가 동관왕묘에 들러 참배한 후 세운 것이다. 북쪽 끝 칸의 비석에는 숙종과 영조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앞면의 "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 전액과 행서 본문은 숙종의 글과 글씨이고, 뒷면의 "顯靈昭德武安王廟"(현령소덕무안왕묘) 해서 비액과 해서체 본문은 영조의 글과 글씨이다. 내용은 남묘와 동묘 건립 경과와 관우에 대한 감사이다.
동관왕묘 동무 북편 끝 칸에는 네모난 화강암 받침에 목조건축 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은 비석이 있는데, 숙종, 사도세자(추증 장조), 정조의 글과 글씨가 담겨 있으며 1900년(광무 4)에 세워졌다. 숙종 21년(1695) 10월 숙종의 글, 영조 28년(1752) 당시 세자였던 사도세자의 글과 글씨, 정조 9년(1785) 11월 정조의 글과 전서, <영송신전헌악가>를 짓게 한 기록이 1900년 음력 6월에 다시 새겨져 있다.
1902년 고종은 관우를 왕에서 황제로 추숭하면서 '현영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 편액을 내렸다. 이 편액은 고종의 친필이며, 본래 동관왕묘에 있던 것과 '향사이정' 정책에 따라 합사된 다른 관왕묘의 편액이 함께 있어 원 소장처 구분이 어렵다. 좌측에는 "한나라 관제의 성은이 그 위엄을 사방에 떨치니, 관제에 대한 존경심이 진심으로 우러나도다. 광무 임인년에 맹춘호(孟春号)가 친히 글을 지어 삼가 올리노라."라고 쓰여 있다.
'현영소덕의열무안성제묘'에서 靈(영)은 신령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뜻, 昭德(소덕)은 한나라 아무(雅舞)의 명칭으로 미덕(美德), 義烈(의열)은 '올바르고 장함', 武安(무안)은 명장에 대한 존경심을 뜻한다.
'만고충절 천추의열(萬古忠節 千秋義烈)' 편액은 영조가 동관왕묘에 임어하여 쓴 어필로,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게시하라고 명하여 현재 동관왕묘 정전 내부에 걸려 있다.
5. 동관왕묘와 한국 사회
동관왕묘는 임진왜란 당시 한중일 삼국의 역학 관계 속에서 탄생했으며, 한말 고종 대에 외세를 물리치고자 북관왕묘와 서관왕묘 등이 세워져 동관왕묘에 합사되었다.[1]
5. 1.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보존
동관왕묘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역학 관계 속에서 탄생했으며, 현재 동관왕묘에 합사되어 있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 등은 한말 고종 대에 외세를 물리치고자 세워진 것이다. 동관왕묘에 소장된 유물에 내재된 역사적, 문화적, 미술사적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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