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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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평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의 아들로, 형주 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오나라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양자로 삼은 인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관평은 관우를 모신 사당에서 주창과 함께 숭배되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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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년 출생 - 등지
등지는 삼국 시대 촉한의 외교 및 군사 인물로, 유비의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오나라와의 동맹을 재건하여 촉한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다가 251년에 사망했다. - 178년 출생 - 팽양
팽양은 후한 말 유비 휘하에서 익주의 치중종사까지 올랐으나 자만심으로 유비에게 불만을 품고 마초에게 모반을 암시하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 관우 - 관흥
관흥은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관우의 아들이며, 아버지 사후 한수정후 작위를 계승하고 제갈량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시중·중감군에 임명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인물이다. - 관우 - 적토마
적토마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명마로, 특히 여포와 관우의 애마로 알려져 있으며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전설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붉은 털을 가진 말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라는 주장도 있다. - 219년 사망 - 관우
관우는 후한 말기 ~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자 정치인으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로서 유비를 보좌하며 뛰어난 무예와 충절로 이름을 알렸으나, 손권의 계략으로 최후를 맞이한 후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숭배받고 대중문화에서 영웅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강직함과 자만심이 정치적 판단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다. - 219년 사망 - 하후연
하후연은 조조 휘하의 장수로 동탁 토벌, 관도 전투, 황건적 토벌 등에서 활약했으며, 군수 물자 수송에도 기여했으나,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 관평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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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일 | 220년 1월 또는 2월 |
| 사망 장소 | 후베이성샹양시난장현 |
| 아버지 | 관우 |
| 가족 관계 | 관흥 (형제) 관 부인 |
| 직업 | 장군 |
| 인물 정보 | |
| 성 | 관(關, Guān) |
| 이름 | 평(平, Píng) |
| 출생지 | 허둥군 해현 (현재의 산시성윈청시옌후구) |
| 기타 정보 | |
| 섬기는 군주 | 유비 |
2. 생애
관평(關平)은 관우(關羽)의 아들이다. 정사 《삼국지》(三國志)에서는 관우의 친아들이자 장남[2]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양자로 각색되어 등장한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관평은 아버지 관우를 따라 활동했으며, 219년 말(220년 초)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군이 패배하자 함께 맥성(麥城)을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임저(臨沮)에서 손권(孫權) 군의 마충(馬忠) 등에게 사로잡혀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2]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족한 편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오관참장의 여정을 하던 중 관정(關定)의 아들인 관평을 만나 양자로 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관우를 따라다니며 유비(劉備)의 양자 유봉(劉封)과 함께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마지막 번성 전투에서도 양아버지 관우와 운명을 함께했다.
관평의 처(妻)는 일설에 조운(趙雲)의 딸 조씨(趙氏)[7][8]이며, 아들로 관월(關樾)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촉한 멸망 당시 위나라 장수 방회(龐會)가 관흥(關興)의 후손 등 관우의 일족에게 복수했으나, 관평의 후손들은 당시 오나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화를 면하고 가계를 이을 수 있었다.
2. 1. 정사에서의 생애
정사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관우(關羽)의 친아들이자 장남이다.[2] 《삼국지》 "관우전"에는 219년 음력 12월 (220년 1월 23일 ~ 2월 21일 사이),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가 조조 군의 조인, 손권 군의 여몽 등에게 패배한 후의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다. 관우와 관평 부자는 서촉(익주)으로 가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마지막 보루였던 맥성(麥城, 현재 후베이성 당양시 동남쪽)을 탈출하려 했으나, 임저(臨沮, 현재 후베이성 샹양시 난장현) 서쪽에서 손권의 장수 반장(潘璋)의 부장 마충(馬忠)에게 사로잡혀 아버지 관우와 함께 참수되었다.[2]왕은(王隱)의 《촉기》(蜀記)에는 관우가 번성(樊城)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자신의 발을 무는 꿈을 꾸고 불길하게 여겨 아들 관평에게 "내가 이제 늙고 쇠약하니, 필시 (형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관평이 아버지 관우를 따라 번성 전투에 참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화양국지》(華陽國志)에 관우가 198년 하비성(下邳城) 전투 이후 조조에게 항복할 당시,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성이 함락되면 진의록의 처 두씨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妻無子 下城 乞納宜禄妻")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관평이 199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후대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관우의 양자로 설정되었으나, 정사 《삼국지》에는 양자라는 기록이 없으며 친아들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2. 2. 《삼국지연의》에서의 생애
사서 기록과 달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평이 관우의 양자로 등장한다. 연의에 따르면 관평은 본래 하북 땅에 사는 관정(關定)의 둘째 아들이며, 182년생으로 설정되었다. 그의 형은 관녕(關寧)으로, 동생과 달리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관우가 조조에게서 벗어나 유비를 찾아 오관참장의 여정을 하던 중 관정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관정의 청과 유비의 중재로 아들이 없던 관우가 관평을 양자로 삼게 된다.《삼국지연의》에서 관평은 유비의 또 다른 양자인 유봉(劉封)과 함께 행동하며 호흡을 맞추는 장면이 많다. 그는 유비 군의 주요 전투에 참여하며 활약한다. 조조의 부하 장합이 공격해왔을 때 주창과 함께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비를 구출했으며, 신야에서 벌어진 박망파 전투에서는 하후돈을 상대로 싸웠다. 적벽대전에도 참전했으며, 익주 땅을 차지하려는 주유의 계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이후 익주 공략전에 종군하여 부수관에서 유장의 부하 장수 양회와 고패를 사로잡아 처형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익주 공략 중 군사(軍師) 방통이 전사하자, 관평은 형주를 지키던 제갈량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파견된다. 형주로 돌아간 그는 그대로 남아 양아버지 관우를 도와 형주 수비에 힘쓴다. 219년, 관우를 따라 번성 전투에 참전하여 위나라의 방덕과 일대일로 맞서 싸우고, 수공(水攻)으로 적군을 격파하는 등 초기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유비의 동맹이었던 손권이 동맹을 깨고 여몽을 보내 기습적으로 형주를 점령하면서 전세는 뒤집힌다. 관우와 관평은 맥성에 고립되었고, 포위망을 뚫으려다 결국 손권 군의 매복에 걸려 함께 사로잡힌다. 손권은 그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두 사람 모두 거절하였고, 결국 처형당했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관평은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제묘에서 주창과 함께 관우를 보좌하는 신(관평제군)으로 모셔지며 제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보통 관제묘에서 관우상의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관평이다. 한편, 연의에서는 관평 사후 그의 의동생으로 관흥 외에 관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3. 평가
관평에 대한 평가는 주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의 행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아버지 관우에 대한 충성과 용맹함이 높이 평가되며, 비극적인 최후는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후대에는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3. 1. 긍정적 평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관평은 특히 아버지 관우에 대한 깊은 충성심과 뛰어난 용맹함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관우가 유비를 찾아 오관참장의 여정을 하던 중 만난 관정의 아들로, 관우에게 감명을 주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관평은 관우를 따라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며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조조의 장수 장합에게 공격받았을 때 주창과 함께 유비를 구출했으며, 박망파 전투에서는 하후돈을 상대로, 익주 전투에서는 유장을 상대로 싸웠다.형주 방어에도 힘썼으며, 219년 번성 전투에서는 관우를 따라 참전하여 초기 승리에 기여하고 수공으로 적의 7개 군대를 격파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손권의 배신과 여몽의 기습적인 형주 침공으로 관우와 함께 맥성에 고립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는다. 포위망을 뚫으려다 아버지와 함께 사로잡힌 관평은 손권의 항복 권유를 끝까지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며 충절을 지켰다.
이러한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덕분에 관평은 비극적 최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절과 용기를 인정받아,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에서 주창과 함께 수신(守神)으로 모셔지며 후대에 기려지고 있다. 관제묘에서는 보통 오른쪽에 서 있는 신상이 관평이다.
4. 가족 관계
정사 《삼국지》에서는 관우의 친아들이자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다.[2] 그러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양자로 등장하는 등 설정 차이가 있다.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화양국지》에서는 관우가 아들이 없어 다른 이의 아내를 취하려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199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청나라 시대에 발견된 관우의 묘비를 근거로 한 전정방의 《소설총고》에서는 관평이 관우의 친아들이며 178년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삼국시대보다 1500년 이상 지난 후대의 기록이므로 신빙성은 낮다고 평가된다.
정사 기록상으로는 관흥이 동생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시대의 《강릉현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아내는 조씨(趙氏)이며 일설에는 조운의 딸이라고도 전해진다.[7][8] 아들로는 213년에 태어난 외아들 관월(關樾)이 있었다.[8]
촉한 멸망 당시, 위나라 장수 방덕의 아들 방회가 복수를 위해 관흥의 후손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으나, 관월을 비롯한 관평의 후손들은 당시 오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후 형주 지역에 정착하여 살면서 관우의 대를 이었다.
5. 후손
관우의 67대 후손이자 관평의 66대 후손인 關忠金|관충금중국어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6. 대중문화에서의 관평
관평은 특히 14세기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하북 출신인 관정(關定)의 둘째 아들이며, 형은 관녕(關寧)이다. 182년에 태어났다는 설정이다.[4] 관우가 오관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는 여정 중 관정의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관우는 관평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양자로 삼는다.
이후 관평은 양아버지 관우를 따라 유비 진영에 합류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다. 조조의 부하 장합에게 공격받는 유비를 구출하고, 박망파 전투에서는 하후돈과 맞서 싸웠으며, 익주 평정전에도 참전했다. 유비의 양자 유봉과 함께 행동하는 모습도 자주 그려진다. 익주 공략 중 방통이 전사하자 형주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자로 갔다가 그대로 관우와 함께 형주에 남아 방어를 돕는다.
219년, 관평은 관우를 따라 번성 전투에 참전하여 초기에는 조조군을 상대로 7개 군을 수몰시키는 등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동맹이었던 손권이 여몽을 보내 형주를 기습 점령하면서 관우군은 고립된다. 관우와 관평은 소수의 병력으로 맥성에서 저항하다가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하지만, 결국 손권군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힌다. 손권이 항복을 권유했으나 부자 모두 거절하였고, 결국 함께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이러한 영웅적인 활약과 충성스러운 모습 덕분에, 관평은 후대에 신격화된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 등에서 주창과 함께 관우를 보좌하는 중요한 인물로 모셔지기도 한다.
6. 1. 종교

관평은 때때로 관우와 함께 중국 사원과 도교 사원의 문신(門神)으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전쟁의 신으로서의 관우를 보좌하는 역할로 묘사되기도 하며, 때로는 주창 및 요화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관평의 얼굴은 전통적으로 흰색으로, 주창은 검은색, 관우는 붉은색으로 칠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관평은 관우의 양자로 등장하며, 관우를 따라다니며 활약하다가 결국 관우와 함께 처형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삼국지연의》의 이러한 묘사 때문에,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제묘에서는 주창과 함께 관제(관우)를 보좌하는 수신(隨神)으로 모셔진다. 관제묘에서 관우상의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보통 관평이다.
6. 2. 게임
관평은 코에이의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6. 3. 인형극
(내용 없음 -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인형극'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6. 4. 기타
관평의 자는 사극이나 《삼국지연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민간 전승에서는 자가 '탄지'[4]라고 전해진다. 경극 고전극목 《주맥성》에서도 '관탄지'로 기록된다. 2010년 중국 드라마 《삼국지 Three Kingdoms》에서는 자를 '정국'으로 설정했다.한편 청나라 시대의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은 진동장군의 딸 조씨(부모는 불명)와 결혼했으며, 아들 관월은 강릉에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삼국시대보다 1500년 이상 후에 만들어진 기록으로, 신빙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NHK의 《인형극 삼국지》에서는 아버지를 잃고 사마휘의 집에서 동자로 일하던 중 유비 일행과 만나 함께 행동하게 된다. 관우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다가 의자가 되어 훌륭한 무장으로 성장해 활약한다는 각색된 설정이 이루어졌다. 작중에서는 연의에서 관흥의 역할도 흡수하여 제갈량의 북벌에도 참여하고 강유와 함께 그의 최후를 지켜보는 등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anguozhi
[3]
웹사이트
Guan Ping -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Sanguo yanyi) Biography
http://kongming.net/[...]
[4]
문서
『関聖太子宝誥』の関聖太子事略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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