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케런은 벨기에 동플랑드르주에 위치한 도시로, 지명은 닫힌 장소 또는 맑음과 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고대 로마 시대에는 도로가 지나갔다. 1114년에 처음 언급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독립적인 교구로 성장하여 아마 산업이 발달했다. 16세기에는 시장 개설 권한을 얻었으며, 18세기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캉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나폴레옹 시대에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19세기에는 철도역 개통으로 도시가 확장되었으나, 20세기 이후 산업 쇠퇴와 함께 도시 구조가 변화했다. 주요 명소로는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 교회, 자연 보호 구역 등이 있으며, 스포츠 행사로는 축구 클럽 K.S.C. 로케런 오스트플란데렌과 연례 음악 축제인 로케런 페스텐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스트플란데런주의 도시 - 헨트
헨트는 벨기에 동플란데른주에 위치하며 스헬더강과 레이어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중세 시대 양모 산업 중심지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주요 도시였으며, 헨트 대학교와 항구를 갖춘 문화 도시이다. - 오스트플란데런주의 도시 - 베베런
베베런은 벨기에 플란데런 지역의 도시로, 로마 시대부터 시작된 역사와 항구 확장, 원자력 발전소 건설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환경 문제와 주민 이주 과제를 안고 있으며, 역사적인 성과 민속 문화, 해양성 기후, 유명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 벨기에의 도시 - 안트베르펜
안트베르펜은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스헬트 강 우안에 위치한 세계적인 항구 도시이자 다이아몬드 무역 중심지로, 오랜 역사 속에서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며 성장해 현재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공존하는 국제적인 도시로서 풍부한 문화 유산과 활발한 경제 활동을 자랑한다. - 벨기에의 도시 - 디스트
디스트는 1499년부터 1795년까지 나사우 가문의 지배를 받은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도시로, 필립 빌헬름의 묘소와 잘 보존된 성벽, 여러 역사적 건축물, 문화 시설로 활용되는 요새를 보유하고 있으며, 여러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다양한 유명 인물을 배출했다.
로케런 | |
---|---|
기본 정보 | |
![]() | |
유형 | 도시 |
위치 | 이스트플란데런주 |
행정 구역 | 신트니클라스 |
NIS 코드 | 46014 |
우편 번호 | 9160 |
전화 지역 번호 | 09 |
웹사이트 | www.lokeren.be |
인구 통계 | |
인구 (2006년 1월 1일) | 0–19세: 23.93% 20–64세: 60.69% 65세 이상: 15.38% |
외국인 비율 (2005년 7월 1일) | 5.44% |
정치 | |
시장 | 필리프 안튀니스(Open VLD) |
다수당 | Open VLD, CD&V |
2. 지명
일부 저자들은 지명에서 'luken'이라는 요소를 찾는데, 이는 close, shut, lock|닫다, 막다, 잠그다eng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르면 로케런은 뒤름강과 야생 동물들이 서식하는 숲 지역 사이에 위치한 '닫힌 장소'를 의미했을 수 있다.
로케런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1114년에 '로케런'이라는 이름이 처음 문헌에 등장했다.[3] 중세 시대에는 플랑드르 백국에 속하여 농업과 아마를 기반으로 한 섬유 산업이 발달했으며, 이는 20세기까지 중요한 산업으로 남았다.
다른 이론에서는 로케런이라는 이름이 '맑은' 또는 '빛나는'을 의미하는 인도유럽어 어근 'leuk'과 물을 의미하는 선사 시대의 수계 지명 접미사 'arna'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 'Leuk-arna' 이론은 언어학적으로는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1]
3. 역사
16세기와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같은 종교 및 정치적 분쟁의 영향을 받았으나, 17세기 이후 시장이 확장되고 모자 제조업이 발달하며 다시 성장했다. 18세기에는 플랑드르의 주요 아마 생산 중심지로 번영했으며,[4] 프랑스 혁명 이후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도시 지위를 얻었다.
19세기에는 철도 개통과 함께 산업이 발달했으나, 후반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산업 발전이 더뎌지기도 했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나치 협력자들을 수용하는 큰 규모의 구금 시설이 운영되기도 했다. 전쟁 이후 로케런은 재건과 산업 구조 변화를 거치며 현대적인 도시로 발전했으며, 1977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엑사르데(Eksaarde)와 다크남(Daknam)을 통합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3. 1. 초기 역사
로케런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은 이 지역이 신석기 시대에 인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대 로마의 도로가 뒤름 강을 따라 뻗어 있었다. ''바스''라는 이름은 로마인들이 게르만어 어근 ''Wasu''에서 유래된 것으로, "늪지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로케런이라는 이름이 처음 언급된 것은 1114년이다.[3] 오래된 정착지와는 달리, 새로운 마을은 뒤름 강 오른쪽 제방에 건설되었다. 12세기 중반까지 이곳은 독립적인 교구가 되었으며, 농업과 아마가 경제의 두 가지 주요 동력이었다. 섬유 산업은 20세기까지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다.
3.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부터 18세기 말까지, 로케런의 영토는 전적으로 플랑드르 백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백작은 헤르젤, 코켈베르헤 영주, 그리고 마르크트 왼쪽에 성을 소유했던 베베렌 영주와 같은 유력 지주들에게 도시의 여러 구역을 빌려주었다. 베베렌 영주의 성은 17세기 초, 영주가 땅을 시의회에 매각한 후 철거되었다.
13세기에는 오덴보스에 시토회 수녀원이 설립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수녀들은 수도원 근처의 땅에서 주요 발굴 작업을 수행했으며, 이 땅은 앙시앵 레짐이 끝날 때까지 수녀들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이 외에도 중세 시대 동안 보델로 수도원, 드롱엔 수도원, 테르 하겐 수도원 등 다른 종교 기관들도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
3. 3. 16세기 ~ 17세기
1555년, 카를 5세는 로케런에 시장을 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바스란트 지역 전체는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사이의 종교 및 정치적 분쟁에 휘말렸다. 이 분쟁은 지역 주민들에게 종종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16세기 말에는 많은 로케런 주민들이 북부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많은 농지가 경작되지 않고 버려져 야생 식물로 뒤덮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로케런은 17세기에 심각한 늑대 피해를 겪기도 했다.
17세기 들어 시의회는 시장 주변의 땅을 소유주들로부터 사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통해 시장은 부두와 연결될 수 있었고, 1651년경에는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모습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시장에는 광장 안쪽으로 약 15m 정도 들어오는 부두가 있었다. 1700년 이후 로케런은 새로운 산업인 모자 제조 덕분에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로케런은 바스란트와 덴더몬데 일부를 포함하는 플랑드르에서 가장 오래된 아마 생산 지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아마는 플랑드르 직조 공장에 최고 품질의 실을 공급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마는 플랑드르 지역 주요 산업의 중요한 원자재였다.[4]
3. 4. 18세기 ~ 19세기
18세기에는 새로운 산업인 모자 제조가 발달하면서 로케런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4] 또한 플랑드르의 주요 산업이었던 아마 산업의 중심지로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최고의 품질의 실을 플랑드르 직조 공장에 공급했다.[4] 이 시기 로케런은 겐트를 제외하고 당시 '에스코 데파르트망'이라 불렸던 동플랑드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을 보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누렸다. 다만, 인구 밀도는 신트니클라스와 같은 도시에 비해 낮았다. 수로 무역도 증가하여, 드룸(Durme) 강의 물줄기가 부일라어스(Buylaers) 근처에서 변경되기도 했는데, 이는 페라리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25년에는 마르크트(Markt) 광장에 성 로렌스 교회가 세워졌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 지역은 새로운 행정 구역인 ''에스코(Escaut) 데파르트망''에 속하게 되었고, 로케런은 캉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800년에 데파르트망이 분할되면서 로케런은 덴데르몬데의 행정구(arrondissement)에 편입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에 로케런에 도시 지위를 부여했다.
19세기 중반, 1845년 흉작 이후 지역 경제 활성화와 주민 지원을 위해 시의회는 철도역과 드룸 강 위의 철도 교량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1847년 8월 7일, 겐트-앤트워프 철도 노선을 따라 로케런 역이 개통되었다. 이 역은 드룸 강 북쪽, 마르크트 광장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화물과 여객 운송을 모두 담당했다. 이후 역은 로케런 역과 덴데르 & 바스 역으로 나뉘었으며, 원래 역 건물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었다.
역 개통과 함께 스테이션스트라트(Stationstraat)가 건설되면서 드룸 강 왼쪽 제방에 새로운 주거 지역이 형성되었고, 헤이르부르크(Heirburg)의 작은 마을도 도심과 완전히 연결되었다. 19세기 동안 로케런은 산업적으로 번창했는데, 특히 모자 제조와 리넨 표백과 같은 전통적인 수공예 부문에 집중했다. 당시에는 자택 산업의 수익성이 높아 큰 공장을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러한 산업 구조는 20세기 초까지 도시 경제를 지탱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유리한 상황은 점차 끝나고, 알스트나 신트니클라스와 같은 다른 동플랑드르 도시들이 산업적으로 더 앞서 나가게 되었다.
3. 5. 20세기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은 도시의 성장을 둔화시켰지만, 로케런은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점령 기간에는 영국 전쟁 포로들을 추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블레크메르스트라트(Bleekmeerstraat)와 오데 브루글란(Oude Bruglaan) 사이에 통과 수용소(Durchgangslagerde)가 세워졌다. 벨기에 해방 이후, 이 수용소는 나치 협력자들을 구금하는 시설로 사용되었다. '로케런 구금 센터'(''Hechteniskamp Lokeren'')는 당시 벨기에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협력자 수용소 중 하나였으며, 1944년 9월부터 1947년 11월까지 약 15,000명에서 22,000명 사이의 인원을 수용했다. 이 시기는 흔히 '탄압 기간'으로 불린다.
전쟁 이후 로케런은 빠르고 안정적으로 재건되었다. 폭격으로 파괴된 주택들은 개조되거나 새로 지어졌고, 심하게 손상되었던 기차역은 철거 후 현대적인 건물로 대체되었다. 뒤르메(Durme) 강과 레데(Lede) 강을 가로지르는 많은 다리들도 다시 건설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로케런 시 중심지는 주거 및 산업 측면에서 크게 확장되었다.
1980년대까지 시내 중심부에 공장들이 남아 있었으나, 점차 모든 산업 활동은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2차 산업의 쇠퇴와 맞물려 'Nijverheidstraat', 'Oude Durme', 'Hoedhaar' 등 시내 중심부의 대형 공장들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대신 Den Oever, Rozen, Everslaar 등 시 외곽 지역에 새로운 산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기존의 Dender & Waas 화물역을 대체하기 위해 로케런-오스트 화물역도 건설되었다. 2018년에는 Everslaer 산업 단지 확장이 발표되었고, 초콜릿 제조업체인 칼리보(Callebaut)가 유럽 최대 규모의 초콜릿 창고를 짓기 위해 대규모 부지를 매입했다.
1970년대에는 도시를 관통하는 철도 59번 노선과 57번 노선이 고가화되었다. 이로 인해 시가지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60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로케런 중심지 북쪽으로 주거 지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59번 및 77A번 철도 노선과 N70 도로 사이에 새로운 주택가가 들어섰고, 이후 N70 도로와 Oude Heerweg 주변 지역으로도 확장이 이어졌다. 로케런 외곽 순환도로인 N47 도로가 건설된 후에는 중심지 남쪽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되어, 스폴레(Spoele)와 복슬라르(Bokslaar) 같은 작은 마을들이 주택가로 변모했다. 현재 이 지역들은 N47 도로, 57번 철도 노선, 그리고 E17 고속도로 사이의 에버스라에르(Everslaer) 공업 단지까지 확장되었다. 중심지 서쪽 지역도 확장되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작았다. 이러한 도시 성장에 힘입어 1956년 6월 10일에는 벨기에의 보두앵 국왕이 로케런을 방문하기도 했다.
1977년 1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엑사르데(Eksaarde)와 다크남(Daknam)이 로케런 시에 합병되었다. 다만 다크남과 로케런은 이미 1794년부터 하나의 행정 단위로 묶여 있었다.
4. 주요 명소
로케런에는 선사 고고학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지역 역사를 다루는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주요 명소로는 1725년에 지어진 성 로렌스 교회(Sint-Laurentiuskerk (Lokeren)nl)가 있다. 이 교회에는 1956년 6월 10일부터 49개의 종을 가진 카리용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로케런 지역에는 몰스브루크(Molsbroeknl) 자연 보호 구역이 자리 잡고 있다. 성 로데베이크스 대학 고등학교의 정면도 주목할 만하다.
'''주요 건축물 및 장소'''
- --
- --
- --
- --
- 성모 마리아 교회(닥남): 1156년 이전에 건축되었으며, 15세기에 남쪽 부분이 증축되었다. --
- 승천 교회(엑사르데): 1230년에 세워졌으나 1570년대에 큰 피해를 입고 17세기에 복원되었다. --
- 호흐하위스(Hooghuysnl): 1568년 건축. --
- 케르크스트라트(Kerkstraat)의 옛 선술집: 1621년 건축. --
- 크라위스카펠: 1626년 건축. --
- 라위크스트라트(Luikstraat) 예배당: 1633년 건축. --
- 17세기 주택: --
- 신트아나카펠: 1568년 파괴되었다가 1644년에 재건되었다. --
- 프레이헤이드스플레인(Vrijheidsplein)의 주택들: 1663년에 지어진 주택과 17세기 주택이 있다. -- --
- 휘스 흐루네 포르트(Huis Groene Poortnl): 17세기 건물. --
- 구 우체국 건물: --
- 뒤름강: 로케런을 흐르는 강. --
- 스타시온스트라트(Stationstraat)의 브뤼흐하위스(Brughuisnl): --
5. 유명 인물
wikitext
이름 | 직업/활동 분야 | 생몰년도 / 활동 기간 |
---|---|---|
얀 판 로케런 | 조각가 | 활동 1375–1381 |
헨드릭 더 소메르 | 화가 | 1602–1656 |
피터 레고치 | 화가 | ?–1664 |
아브라함 스미트 | 화가 | c. 1621–1672 |
얀 밥티스트 더 스메트 | 메헬렌 신학교 학장, 메헬렌 대교구 총대리, 이프르 주교 및 겐트 주교 | 1674–1741 |
조세핀 니스언스 킬호프 | 활동가, 사회 개혁가, 편집자 | 1833–1917 |
프란스 렌스 | 작가 | 1805–1874 |
아우구스트 더 빌데 | 화가 | 1819–1886 |
미트 스메트 | 정치인 | 1943년 출생 |
아메 안투에니스 | 전 축구 선수이자 코치 | 1943년 출생 |
가브리엘 드 코만 |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인 세계 총대주교청의 서유럽 대주교 | 1946년 출생 |
마를린 템머만 | 산부인과 의사 | 1953년 출생 |
윌리 린트하우트 | 만화 작가 | 1953년 출생 |
프랑수아 반 데르 엘스트 |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 | 1954년 출생 |
크리스 반 덴 뒤르펠 | 배우 및 모창가 | 1960년 출생 |
파울 페르헤헨 | 소설가 | 1965년 출생 |
펨케 마에스 |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 | 1980년 출생 |
옐레 반 담메 |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 | 1983년 출생 |
린데 메르크푸엘 | 라디오 진행자 | 1984년 출생 |
그레그 반 아버매트 | 프로 사이클 선수 | 1985년 출생 |
킬리안 오버메이레 |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 | 1985년 출생 |
로르카 반 데 퓌테 | 축구 선수 | 1988년 출생 |
마누엘 벤슨 | 축구 선수 | 1997년 출생 |
루카 반 덴 케이부스 | 체조 선수 | 1997년 출생 |
팀 코펜스 | 패션 디자이너 |
6. 스포츠 및 행사
로케런을 대표하는 축구 클럽은 K.S.C. 로케런 오스트플란데렌이다. 또한, 매년 8월 첫째 주에 열리는 10일간의 음악 축제 및 박람회인 '[http://www.lokersefeesten.be 로케런 페스텐]'으로 플랑드르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다.
1970년 7월 14일에는 비극적인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영국 런던 웨스트햄 소속 스피드웨이 선수들을 태운 미니버스가 휘발유 탱크로리와 충돌하여 선수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1930년대 유명 스피드웨이 선수이자 당시 팀 매니저였던 필 비숍도 목숨을 잃었다.
참조
[1]
간행물
DULLAERT, E., Bijdrage tot de toponymie van Lokeren, scriptie
http://lib.ugent.be/[...]
University of Gent
2007-2008
[2]
웹사이트
Kroniek van Lokeren
https://lib.ugent.be[...]
2020-08-27
[3]
서적
Lokerse straten & co
https://books.google[...]
Culturele Raad Lokeren
2014
[4]
서적
Geschiedenis van de landbouw in België
[5]
뉴스
Tragic West Ham speedway crash remembered on 46th anniversary
https://www.newhamr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