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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파이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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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 파이얼스는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베를린 대학교, 뮌헨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고체 물리학, 핵력, 산란, 양자장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다. 1933년 나치의 집권으로 영국으로 망명하여 핵무기 연구에 참여, 오토 프리슈와 함께 '프리슈-파이얼스 보고서'를 작성하여 핵무기 개발에 기여했다. 이후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으며, 버밍엄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파이얼스 전이'를 발견하는 등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또한 핵무기에 대한 우려로 원자 과학자 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평화 운동에 참여했다.

2. 생애

베를린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하인리히 파이얼스(Heinrich Peierlsdeu)였고, 어머니는 엘리자베트 바이게르트(Elisabeth Weigertdeu)였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등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1929년에는 취리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볼프강 파울리 아래 응집물질물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3]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하던 중, 1933년 나치 당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영국에 망명하여 남게 되었다.[6][7] 1936년 버밍엄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39년부터 동료 망명 과학자인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함께 핵무기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 3월, 두 사람은 '''프리슈-파이얼스 보고서'''(Frisch–Peierls memorandumeng)를 작성하여 불과 1kg 정도의 우라늄-235로도 원자 폭탄 제조가 가능함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11] 이 보고서는 영국미국의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3년 8월부터 파이얼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핵무기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중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 대영 제국 훈장(CBE)과[12] 미국 자유 훈장을 받았다.[13]

전후에는 버밍엄 대학교(1945-1963)와 옥스퍼드 대학교(1963-1974)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물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원자 과학자 협회 활동과 퍼그워시 운동 등 평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1968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53년에는 도쿄교토에서 열린 국제이론물리학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5년 옥스퍼드에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04년 10월 2일, 옥스퍼드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건물은 그의 공적을 기려 "Sir Rudolf Peierls Centre for Theoretical Physics|서 루돌프 파이얼스 이론물리학 센터eng"로 명명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루돌프 에른스트 파이얼스(Rudolf Ernst Peierlseng)는 베를린 교외 오버쇠네바이데(Oberschöneweideger)에서 유대인 상인 가문 출신의 전기 기술자 아버지 하인리히 파이얼스(Heinrich Peierlsger)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바이게르트(Elisabeth Weigertger) 사이에서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알게(Allgemeine Elektricitäts-Gesellschaftger, AEG) 케이블 공장의 상무 이사였다. 루돌프에게는 알프레드라는 형과 애니라는 누나가 있었다.[2] 어머니는 1921년 호지킨 림프종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극작가 루트비히 풀다(Ludwig Fuldager)의 처남인 엘제 헤르만(Else Hermannger)과 재혼했다. 파이얼스 가족은 유대교 신자였으나 문화적으로 동화되었고, 파이얼스와 그의 형제자매는 루터교로 세례를 받았다.[2] 성인이 된 후 파이얼스는 교회를 떠났다.

파이얼스는 안경 착용 문제로 1년 늦게 학교에 입학했다. 지역 예비학교에서 2년을 보낸 후, 지역 김나지움인 훔볼트 김나지움(Humboldt-Gymnasium (Berlin-Tegel)ger)에 입학하여 9년 동안 공부했고, 1925년에 아비투어(Abiturger) 시험을 통과했다. 처음에는 공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물리학을 선택했다. 그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막스 플랑크, 발터 보테, 발터 네른스트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 물리학 실험 수업이 너무 붐벼 1학년 학생들은 이론 물리학 강의를 듣도록 권장되었고, 파이얼스는 이 과목에 흥미를 느꼈다.

1926년, 파이얼스는 당대 최고의 이론 물리학 교수로 평가받던 아놀드 조머펠트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로 옮겼다. 그곳에서 한스 베테, 헤르만 브뤼크(Hermann Brückeng), 윌리엄 V. 휴스턴(William V. Houstoneng) 등과 함께 공부했다. 당시 물리학계는 보어-조머펠트 이론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폴 디랙이 제시한 새로운 양자 역학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1928년, 조머펠트의 조언에 따라 파이얼스는 하이젠베르크가 교수로 임용된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옮겼다. 하이젠베르크는 파이얼스에게 강자성체 연구 과제를 주었으나, 파이얼스는 이론을 완성하지 못했다. 대신 홀 효과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어, 양자 역학을 통해 이상 홀 효과를 설명하는 첫 논문을 발표했다.

1929년, 하이젠베르크가 해외 강연을 떠나자 그의 추천으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파울리 밑에서 응집물질물리학을 공부했다. 파울리는 그에게 결정 격자 내 원자 진동 연구 과제를 주었고, 파이얼스는 이 연구를 통해 움클라프 산란(Umklapp scattering) 현상을 탐구하고 명명했다. 이 연구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 "결정에서 열전도의 운동학적 이론에 관하여"(Zur kinetischen Theorie der Wärmeleitung in Kristallenger)[3]의 기초가 되었고, 192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이론은 매우 낮은 온도에서 금속의 거동을 예측했지만, 실험적 검증은 20년 후에야 가능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파이얼스는 펠릭스 블로흐의 뒤를 이어 파울리의 조수가 되었다. 이 시기 소비에트 연방 장학금으로 취리히에 와 있던 레프 란다우와 친구가 되어 광자에 대한 파동 방정식 연구를 함께 진행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1930년에는 네덜란드에서 한스 크라머스를,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를 만났다.

1930년 8월, 오데사에서 열린 물리학회에서 레닌그라드 출신의 젊은 물리학 졸업생 유제니아 카네기서(Eugenia Nikolaievna Kannegiesserrus, 게니아)를 만났다. 영어로 소통하며 가까워졌고, 1931년 3월 15일 레닌그라드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네 자녀를 두었다.[4]

파이얼스는 에곤 오로완이 전위를 이동시키는 데 필요한 힘을 이해하도록 도왔고, 이는 나중에 프랭크 나바로에 의해 확장되어 파이얼스-나바로 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초기 양자 물리학 연구는 반도체의 열 및 전기 전도도를 설명하는 정공(hole) 이론으로 이어졌으며, 그는 반도체에서 "정공" 개념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5] 또한 레옹 브릴루앙보다 앞서 에너지 "영역(zones)"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포논에 적용하여, 포논에 대한 볼츠만 방정식과 움클라프 과정을 발견했다.[1] 그는 이 주제로 독일 대학에서 강의 자격을 얻기 위한 사강(Habilitation, Habilitationger) 논문을 제출했다.

2. 2. 영국 망명과 핵무기 개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1933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남기로 결정했다.[6][7] 그는 함부르크 대학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나치즘을 피해 망명한 학자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학술 지원 위원회(Academic Assistance Council)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계속했다. 1936년에는 마크 올리펀트의 제안으로 버밍엄 대학교의 응용수학(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어 안정적인 직위를 얻게 되었다.

버밍엄 대학교 포인팅 물리학 건물에 있는 프리슈-파이얼스 보고서를 기념하는 명판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파이얼스는 같은 독일 출신 망명 과학자인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함께 버밍엄 대학교에서 핵무기 연구를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두 사람은 적성국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기밀 사항인 레이더 연구에서는 제외되었다. 파이얼스는 1940년 3월 27일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10]

1940년 3월, 파이얼스와 프리슈는 '''프리슈-파이얼스 보고서'''(Frisch–Peierls memorandum영어)를 공동으로 작성했다. 이 짧은 문서는 적은 양의 우라늄-235(당시 계산으로는 약 1kg)로도 원자 폭탄 제조가 가능함을 이론적으로 설명했으며, 그 폭발력의 규모와 군사적, 정치적 영향을 예측했다.[11] 이전까지는 원자폭탄 제조에 수 톤의 우라늄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져 비현실적으로 간주되었으나, 이 보고서는 영국과 미국 당국이 원자 무기의 실현 가능성을 인지하고 개발에 착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1년, 보고서의 내용은 MAUD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 전달되었고, 이는 미국의 맨해튼 계획 착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적성국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MAUD 위원회에서 배제되었으나, 곧 기술 소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파이얼스는 우라늄 농축 방법으로 기체 확산법 연구에 집중하며, 같은 망명 과학자인 프란츠 사이먼과 협력했다. 또한 1941년 5월에는 또 다른 독일 출신 망명자인 클라우스 푹스를 조수로 영입했다.

MAUD 위원회의 보고 이후, 영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튜브 얼로이가 출범했고, 파이얼스는 제임스 채드윅, 사이먼과 함께 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 8월 퀘벡 협정 체결로 튜브 얼로이 프로젝트가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통합되면서, 파이얼스는 채드윅, 올리펀트, 사이먼 등과 함께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즉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파이얼스는 처음 뉴욕에 있는 켈렉 코퍼레이션(Kellex Corporation)에 배속되어 K-25 기체 확산 공장 설계에 참여했다. 1944년 2월에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로 옮겨갔으며, 이후 채드윅의 뒤를 이어 로스앨러모스 주재 영국 대표단의 책임자가 되었다. 로스앨러모스에서 그는 이론 부문(T-Division) 내 내파(Implosion) 그룹(T-1)의 책임자를 맡아, 플루토늄 폭탄(팻 맨)에 사용될 폭축 렌즈 설계를 담당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맨해튼 계획 영국 대표단의 책임자인 채드윅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으며,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요청으로 그에게도 직접 보고했다. 파이얼스는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핵실험을 참관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1946년 미국 자유 훈장 수여 당시. 왼쪽부터 윌리엄 페니, 오토 프리슈, 루돌프 파이얼스, 존 콕크로프트.


전쟁이 끝난 후 파이얼스는 1946년 1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 신년 서훈에서 대영 제국 훈장(CBE)을 받았고,[12] 같은 해 미국 정부로부터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13]

2. 3. 전후 활동

전쟁 후 물리학자들에 대한 수요가 높아 파이얼스는 여러 대학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가 제안한 자리도 고려했지만, 결국 버밍엄 대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버밍엄에서 그는 핵력, 산란, 양자장론, 핵의 집단 운동, 수송 이론 및 통계역학을 연구했다.[1] 1953년경 고체 물리학 연구를 재개하며 금속 결정의 원자 배열 방식에서 불안정성을 발견했는데, 이는 파이얼스 전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파이얼스는 제럴드 브라운, 맥스 크룩, 토니 스카이름, 리처드 달리츠, 프리먼 다이슨, 루이지 아리아로 라디카티 디 브로졸로, 스튜어트 버틀러, 월터 마셜, 스탠리 맨덜스탐, 엘리엇 리브 등 우수한 연구자들을 유치하여 버밍엄 대학교 물리학과의 위상을 높였다. 수리물리학 학부가 신설되었고, 파이얼스는 전쟁 전에는 버밍엄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양자역학 강의를 맡았다.

1946년, 파이얼스는 옥스퍼드셔주 해러웰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AERE)의 자문위원이 되었다. 1950년 클라우스 푸크스가 이론 물리학부장직에서 해임된 후, 모리스 프라이스가 임시로 직책을 맡았으나 미국 안식년을 떠나자 파이얼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브라이언 플라워스가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파이얼스는 미국 측의 보안 심사 방식에 불만을 느껴 1957년 해러웰 자문직을 사임했으나, 1960년 복귀 요청을 받아들여 1963년부터 다시 합류했고 이후 30년간 자문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파이얼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Wykeham 물리학 교수로 임용되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제목
1955Quantum Theory of Solids|고체의 양자 이론영어
1955The Laws of Nature|자연의 법칙영어
1979Surprises in Theoretical Physics|이론 물리학의 놀라움영어
1985Bird of Passage|이주하는 새영어 (자서전)
1991More Surprises in Theoretical Physics|이론 물리학의 더 많은 놀라움영어



자신이 개발에 기여한 핵무기의 위험성을 우려하여, 원자 과학자 협회(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활동에 참여했고, 영국 원자 과학자 협회(Atomic Scientists' Association) 회장을 역임했으며, 퍼그워시 운동[1]과 세이퍼월드(Saferworld)의 전신인 FREEZE 활동에도 참여했다.

1953년에는 도쿄교토에서 열린 국제이론물리학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

아내 게니아는 1986년 10월 26일에 사망했다. 파이얼스는 말년에 시력이 나빠졌음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94년에는 심장, 신장, 폐 질환 등 여러 건강 문제로 옥스퍼드셔주 파머 근처의 요양원 오켄홀트로 옮겼다. 컴퓨터 화면에 확대된 글씨로 과학 논문을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995년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처칠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신장 투석을 받았으며, 1995년 9월 19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2004년 10월 2일, 옥스퍼드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건물은 "Sir Rudolf Peierls Centre for Theoretical Physics|서 루돌프 파이얼스 이론물리학 센터영어"로 명명되었다.

3. 저서

wikitext

} ||

|-

| 1979 || 이론물리학의 놀라움 || Surprises in Theoretical Physics|eng ||

|-

| 1985 || 나그네 새 || Bird of Passage|eng || 자서전

|-

| 1991 || 이론물리학의 더 놀라운 이야기 || More Surprises in Theoretical Physics|eng ||

|-

| || 고체의 양자론 || Quantum Theory of Solids|eng ||

|}

4. 수상 내역

파이얼스는 1968년 생일 기사 작위 수여식(1968 Birthday Honours)에서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16]

그의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원제비고
1955자연의 법칙{{lang|eng|The Laws of Nature|}
연도수상 내역비고
1946미국 자유훈장
1952러더퍼드 메달[17]
1959왕립 메달[18]
1962로렌츠 메달[19]
1963막스 플랑크 메달[20]
1968구드리 메달과 상
1980엔리코 페르미상[22]미국 정부로부터 원자력 과학에 대한 공헌으로 수상
1982마테우치 메달[21]
1986코플리 메달러더퍼드 기념 강연 진행
1991폴 디랙 상



2004년 10월 2일, 옥스퍼드 대학교 이론물리학 하위 학과 건물은 공식적으로 "서 르돌프 파이얼스 이론물리학 센터"(Sir Rudolf Peierls Centre for Theoretical Physicseng)로 명명되었다.

참조

[1] 논문 Rudolph E. Peierls
[2] 뉴스 Obituary: Sir Rudolf Peierls https://www.independ[...] 1995-09-21
[3] 논문 Zur kinetischen Theorie der Wärmeleitung in Kristallen
[4] ODNB Peierls, Rudolf Ernst (1907–1995)
[5] 문서 Selected Scientific Papers of Sir Rudolf Peierls World Scientific
[6] 논문 Zur Theorie des Diamagnetismus von Leitungselektronen 1933-11
[7] 논문 Zur Theorie des Diamagnetismus von Leitungselektronen. II Starke Magnetfelder 1933-03
[8] 논문 The Neutrino 1934-05-05
[9] 논문 The Dispersion Formula for Nuclear Reactions 1938-05-09
[10] London Gazette 1940-05-07
[11] 논문 A Memorandum that Changed the World https://www.pugetsou[...] 2011-05-01
[12] London Gazette 1946-01-01
[13] 웹사이트 Citation of US Medal of Freedom with Silver Palm (CSAC 52/6/77 A.3) http://discovery.nat[...] The National Archives (United Kingdom) 2017-09-27
[14] 잡지 Sir Rudolf and Lady Spies https://www.questia.[...] 1999-05-29
[15] 뉴스 New spy claims meet firm denial http://physicsworld.[...] 1999-07-01
[16] London Gazette 1968-06-08
[17] 웹사이트 Rutherford medal recipients http://www.iop.org/a[...] Institute of Physics 2017-09-27
[18] 웹사이트 Johnian recipients of the Royal Medal of the Royal Society http://www.joh.cam.a[...] St John's College, Cambridge 2017-09-27
[19] 웹사이트 Lorentz Medal https://www.knaw.nl/[...] Koninklijke Nederlandse Akademie van Wetenschappen 2017-09-27
[20] 웹사이트 Preisträger Max Planck nach Jahren http://www.dpg-physi[...] Deutsche Physikalische Gesellschaft 2017-09-27
[21] 웹사이트 Matteucci Medal http://www.accademia[...] Accademia XL 2017-09-27
[22] 웹사이트 The Enrico Fermi Award – Award Laureates https://science.ener[...] United States Department of Energy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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