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 (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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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적은 청나라 말기 만주 지역에서 치안 부재로 인해 등장한 도적 집단으로, 자위 조직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승마, 사격 기술을 중시하며 인질 납치, 약탈을 통해 재물을 얻었고, 출신, 씨족, 인맥으로 구성되었다. 마적은 때로는 정부에 의해 정규군으로 편입되기도 했으며, 장쭤린과 같은 인물은 군벌로 성장하기도 했다. 일본 관동군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일본과 갈등을 겪었으며, 소련과 일본 모두 마적을 이용하려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독립군과 마적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만주국 붕괴와 국공 내전으로 인해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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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 (도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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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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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강도 약탈 납치 살인 |
활동 지역 | 만주 |
활동 시기 | 청나라 말기 ~ 만주국 시대 |
상세 내용 | |
어원 | 말을 탄 도적 |
특징 | 유목민족 기원 조직적인 무장 집단 지역 사회와 연계 |
활동 | 민간인 대상 약탈 열차 습격 일본군 공격 |
관련 인물 | 장쭤린 두목 왕장 |
관련 영화 | 《마적》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황야의 무법자》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도적 산적 해적 정글모 의적 게릴라 |
2. 역사
마적이라는 용어는 이미 청 왕조 때 등장했다. 왕도(王度)의 《역년수성기(歷年守城記)》에는 "마적 등천봉(滕天鳳)이 태안성을 쳐부수고, 관원 서래빙(徐来聘) 등 사람을 살해했다"라는 기록이 있다.[1] 청조의 국력이 기울고 만주에서 청조의 통제가 약화되면서 치안이 나빠지고 도적도 늘어났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단련 또는 순찰대 성격의 자위대를 조직했고, 중국의 혼란이 심화되면서 많은 집단이 약탈을 일삼았다.
마적은 승마, 사격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정치적 목적이 없었던 마적의 주요 수입원은 인질 납치를 통한 금품 강탈이나 촌락, 현성, 대도시에 대한 재물 강탈이었다. 특히 현성이나 대도시에 대한 습격은 위험이 커서 다양한 전술이 필요했다.[1]
마적은 주로 출신, 씨족 등 인맥으로 구성되었고, 이후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일본인, 조선인도 합류했다. 특히 길림성은 조선, 중국, 러시아 국경을 이루는 변경 지역인데다 산맥과 인접해 마적이 활동하거나 은거하기 좋았다.[1]
마적은 원칙적으로 수호전에 나오는 양산박 유협의 정신에 따라 강간, 학대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빈자에 대한 구제나 교량 건설 등을 행하는 이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규율 없이 약탈은 물론 아편 밀매까지 벌였다.[1]
마잔산과 같은 만주 마적 지도자는 군벌이 되기도 했고,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은 마적으로 시작해 만주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처럼 마적 중 일부는 정부에 모집되어 정규군이 되기도 했다.[1]
만주국 붕괴 후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마적 조직은 점차 쇠퇴했다.[1]
2. 1. 일제강점기 마적과 한국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의 통제가 점차 강화되고, 만주 마적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점차 심각해졌다. 당시 소련은 외몽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적을 지원했고, 관동군 역시 세력 확장을 위해 마적을 지원하여 반공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일본은 만주에서의 영향력 확대 및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한국독립군 소탕을 목적으로 현지 마적을 사주해 훈춘 등 주요 도시들을 습격해 일본 영사관을 방화하는 등 인명피해를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주둔하면서 독립군 소탕을 빌미로 조선인 및 중국인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 세력을 선비(鮮匪, 조선인 도적)라는 비칭으로 부르며 마적과 동일시하였으나, 반대로 독립군들이 현지 조선인 및 중국인을 마적들로부터 보호해 주거나, 신팔균처럼 마적의 공격으로 숨진 독립군도 존재하였다.
3. 마적의 성격과 역할
마적은 말 타기, 사격, 기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주로 인질을 납치해 돈을 빼앗거나 마을, 현성, 대도시를 습격하여 재물을 강탈하는 방식으로 수입을 얻었다. 특히 현성이나 대도시 습격은 위험이 커서 다양한 전술이 필요했다.
마적은 출신, 씨족, 기타 인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일본인, 조선인도 합류했다. 특히 만주 길림성은 조선, 중국, 러시아 국경과 맞닿아 있고 산맥이 있어 마적이 활동하거나 은거하기에 유리했다.
마적은 원칙적으로 수호전 양산박의 유협 정신에 따라 강간, 학대 등을 엄격히 금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다리 건설 등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러한 규칙을 무시하고 약탈은 물론 아편 밀매까지 벌였다.
3. 1. 군벌과의 관계
마적이라는 용어는 청나라 때부터 있었다.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만주 지역에 대한 통제가 약해지면서, 도적의 수가 늘어나고 치안이 나빠졌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단련이나 순찰대 성격의 자위대를 조직했다. 중국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많은 집단들이 약탈을 일삼았다.마적은 말 타기, 사격, 그리고 기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정치적인 목적이 없었던 마적의 주요 수입은 인질을 납치하여 돈을 빼앗거나, 마을, 현성, 대도시를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는 것이었다. 특히 현성이나 대도시는 위험이 매우 컸기 때문에 다양한 전술이 필요했다.
마적은 주로 출신, 씨족, 기타 인맥으로 구성되었으며, 나중에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일본인과 조선인도 마적에 합류하였다. 특히 만주, 길림성은 조선, 중국, 러시아 국경과 맞닿은 변경 지역이고 산맥이 있어 마적이 활동하거나 숨기에 좋았다.
마적은 원칙적으로 수호전에 나오는 양산박의 유협 정신에 따라 강간, 학대 등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다리 건설 등을 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적들은 이러한 규칙을 무시하고 약탈은 물론 아편 밀매까지 하였다.
마적 중 일부는 정부에 의해 정식 군인이 되기도 했다. 마잔산 같은 만주 마적 지도자는 군벌의 일원이 되었고, 봉천군벌의 우두머리 장쭤린은 마적으로 시작해 만주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의 통제가 강해지고, 만주 마적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현대와 같은 마적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당시 소련은 외몽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적을 지원했고, 관동군 역시 세력 확장을 위해 마적을 지원하여 반공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일본은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마적을 사주해 훈춘 등 주요 도시를 습격하고 일본 영사관을 방화하는 등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이를 빌미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주둔하면서 독립군 소탕을 빌미로 조선인과 중국인 주민들을 학살했다. 일본군은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을 선비(鮮匪, 조선인 도적)라고 부르며 마적과 동일시했지만, 반대로 독립군이 현지 조선인과 중국인을 마적으로부터 보호해주거나, 신팔균처럼 마적의 공격으로 숨진 독립군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만주국이 사라지고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마적 조직은 점차 쇠퇴했다. 마적은 원래 자위 조직 (토비, 비적) 중의 유격대와 같은 역할이었다. 당시 만주에서는 청나라가 약해지면서 치안이 나빠져 도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위 조직을 만들어 도적에 대항했다. 그러나 만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힘을 가진 마적이 본래의 "자위"를 넘어 도적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만주에서 일본군의 지배가 강해지면서 마적은 일본인과도 충돌하게 되었고,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이나 일본인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일본인이 가지는 "마적"의 이미지는 이 무렵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마적이 항일 자세를 보인 것은 아니다. 당시 소련은 외몽골 지배를 확고히 하고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마적을 이용하려 했고, 내몽골·만주의 공산주의화를 막기 위해 관동군도 마적을 이용했다. 일본과 소련 양측은 마적을 기동 공작 부대로 이용하려 했다.
마적 중에는 군벌로 성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적 출신 군벌로는 장쭤린, 마잔산 등이 유명하지만, 그들은 중국에서 반복되었던 정권 교체의 혼란을 틈타 그때그때 정권의 군사적 지원을 함으로써 연계했다. 당시 중국에는 징병 제도가 없었고, 정권에 고용된 마적이 "정규군·정부군"이었으며, 마적 우두머리가 마음대로 관직이나 군 계급을 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연합은 마적을 둘러싼 각 세력의 의도가 변하면서 장기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그때그때 연계 대상을 바꾸며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만주국이 붕괴된 후에는 마적 조직도 쇠퇴했다. 그 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국공 내전)에서 각 진영에 편입되어 이합집산하면서 군의 일부에 편입되었다.
3. 2. 일본군과의 관계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의 통제가 점차 강화되고, 만주 마적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현대와 같은 마적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당시 소련은 외몽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적을 지원했고, 관동군 역시 세력 확장을 위해 마적을 지원하여 반공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1]일본은 만주에서의 영향력 확대 및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한국독립군 소탕을 목적으로 현지 마적을 사주해 훈춘 등 주요 도시들을 습격해 일본 영사관을 방화하는 등 인명피해를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주둔하면서 독립군 소탕을 빌미로 조선인 및 중국인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다.[1] 일본군은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 세력을 선비(鮮匪, 조선인 도적)라는 비칭으로 부르며 마적과 동일시하였으나, 반대로 독립군들이 현지 조선인 및 중국인을 마적들로부터 보호해 주거나, 신팔균처럼 마적의 공격으로 숨진 독립군도 존재하였다.[1]
3. 3. 소련과의 관계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의 통제가 점차 강화되고, 만주 마적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현대와 같은 마적의 이미지가 점차 형성되었다. 당시 소련은 외몽골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적을 지원했고, 관동군 역시 세력 확장을 위해 마적을 지원하여 반공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일본은 만주에서의 영향력 확대 및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한국독립군 소탕을 목적으로 현지 마적을 사주해 훈춘 등 주요 도시들을 습격해 일본 영사관을 방화하는 등 인명피해를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출동시켜 주둔하면서 독립군 소탕을 빌미로 조선인 및 중국인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 세력을 선비(鮮匪, 조선인 도적)라는 비칭으로 부르며 마적과 동일시하였으나, 반대로 독립군들이 현지 조선인 및 중국인을 마적들로부터 보호해 주거나, 신팔균처럼 마적의 공격으로 숨진 독립군도 존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만주국이 사라지고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마적 조직은 점차 쇠퇴했다.
4. 유명한 마적
- 왕용칭(王永清)
- 장쭤린(張作霖)
- 장징후이(張景惠)
- 마잔산(馬占山)
- 셰원둥(謝文東)
- 펑링게(馮麟閣)
- 바이인 달라이(白音大賚)
- 탁타오후(陶克陶胡)
- 고히나타 하쿠로(小日向白朗) (마적명: 샹쉬둥(尚旭東))
- 다테 준노스케(伊達順之助) (중국명: 장쭝위안(張宗援))
- 사이토 키쿠지로(齋藤菊次郎) (중국명: 추이젠쥔(崔鑑君))
- 하라다 사노스케(原田左之助): 막부 말기 신선조의 10번대 대장이었으며, 1868년 우에노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이나, 실제로는 죽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가 마적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메이지 40년경, 하라다 사노스케를 칭하는 노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 야마모토 키쿠코(山本菊子)
5. 관련 문화
馬賊の唄|마적의 노래일본어는 1922년에 나온 노래로, 미야지마 이쿠호가 작사하고 불초가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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