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토야 유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츠토야 유미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로, 1972년 작곡가로 데뷔하여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6개 시대에 걸쳐 앨범 1위를 기록하는 등 일본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포크, 뉴 뮤직 장르를 개척하며, 도시적이고 서정적인 가사와 세련된 음악 스타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6년 첫 베스트 앨범 《YUMING BRAND》를 시작으로 수많은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으며,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여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연출에도 혁신을 시도하여 다양한 규모와 테마의 공연을 선보였다. 2013년 자수포장을 받았으며, 2022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릿쿄 조가쿠인 고등학교 동문 - 쿠스노키 유코 (배우)
쿠스노키 유코는 1930년대 후반 데뷔하여 태평양 전쟁 시기 영화로 인상을 남겼고, 전쟁 후 영화와 연극, 1960년대 이후 드라마와 연극, 2000년대 여성 배우 친목 단체 결성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 다마 미술대학 동문 - 타케나카 나오토
타케나카 나오토는 일본의 배우, 코미디언, 영화 감독, 가수, 성우, 작가로 활동하며,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여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고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음악 활동도 펼쳤다. - 다마 미술대학 동문 - 이가라시 다이스케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자연의 아름다움, 영적인 주제, 민속적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화풍으로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일본의 만화가이며, 대표작으로는 《리틀 포레스트》, 《마녀》, 《바다의 아이들》 등이 있다. - 일본의 거품 경제 - 플라자 합의
플라자 합의는 1985년 미국 등 5개국이 달러 가치 하락과 엔화, 마르크화 가치 상승에 합의하여 미국의 무역 적자 감소에 기여했으나 일본 경제에는 불황을 초래한 사건이다. - 일본의 거품 경제 - 버블 붕괴
버블 붕괴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자산 가격 거품 붕괴로 시작되어 주식 시장 폭락, 금융 시스템 위기를 초래하고, 일본 경제를 장기간의 침체에 빠뜨린 심각한 불황이다.
2. 약력
릿쿄 여학원 고등학교와 타마 미술대학 미술학부 회화학과 일본화 전공을 졸업했다.
14세 무렵,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이 그녀를 '유밍(ユーミン)'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애칭으로 정착되었다.[11] 1971년 가하시 가츠미에게 〈사랑은 갑자기…〉(愛は突然に…)를 제공하며 17세의 나이로 작곡가로 데뷔했다.[38] 1972년 7월 5일 싱어송라이터로서 싱글 〈답장은 필요없어〉(返事はいらない)를 발매했지만, 당시에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11]
1975년 싱글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あの日にかえりたい)가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히트하면서 1차 유밍 붐이 일어났다.[44] 1976년 11월 29일 마쓰토야 마사타카와 요코하마 야마테 교회에서 결혼 후 '''마쓰토야 유미'''로 활동을 시작했다.[50]
1981년 싱글 〈지켜 주고 싶어〉가 히트하며 2차 유밍 붐이 일어났고, 이후 앨범들이 연속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다.[51] 1990년대에는 〈한여름 밤의 꿈〉, 〈Hello, my friend〉, 〈봄이여, 오라〉 등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3차 유밍 붐이 일어났다.[52]
1996년 아라이 유미 명의로 활동을 재개했고, 1999년부터 러시아 서커스 팀과 협력한 콘서트 《샹그리라》 시리즈를 개최했다.[55]
2005년 이후 아이치 엑스포 폐막 콘서트 등에서 국제적인 협업을 진행했고,[15] 2012년 베스트 앨범 발매로 누적 음반 판매량 3000만 장을 돌파했다.[15] 2013년 유니버설 뮤직으로 이적, 같은 해 자수포장을 받았다.[15]
2022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고,[70][71] 2023년 오리콘 앨범 차트 6개 시대 연속 1위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74]
2. 1. 성장
1954년 1월 19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3남 2녀 중 넷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본가는 1912년부터 영업해 온 아라이 포목점(荒井呉服店)이다.[33] 6세부터 피아노, 11세부터 샤미센, 14세부터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릿쿄 여학원 중학교 시절, 미나토구아자부다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칸티"에 드나들었다. 당시 칸티는 구로사와 아키라, 미시마 유키오, 아베 코보, 오자와 세이지 등 국내외 문화인들이 모이던 살롱 같은 곳이었다.[11] 훗날 이곳에 모인 예술가들에 의해 알파 레코드가 탄생하여 그녀가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릿쿄 여학원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파이프 오르간과 프로콜 하럼에 큰 충격을 받았다.[35][36] 오차노미즈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아르튀르 랭보, 자크 프레베르의 작품을 애독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37]
14살 무렵,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이 그녀를 '유밍(ユーミン)'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애칭으로 정착되었다. 그녀가 13살 때 짝사랑했던 중국인 베이시스트 시유첸(シー・유첸)이 지어준 것이다.
2. 2. 아라이 유미의 시대
1971년, 가수 가하시 가츠미에게 〈사랑은 갑자기…〉(愛は突然に…)를 제공하여 17세의 나이로 작곡가로서 데뷔했다.[38] 1972년 7월 5일, 싱어송라이터로서 싱글 〈답장은 필요없어〉(返事はいらない)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하지만 이 음반은 당시 수백 장밖에 팔리지 않아 나중에는 환상의 데뷔 싱글로 불리게 된다.[11]1973년 11월 20일에 첫 앨범 《히코키구모》를 발매하고, TBS 라디오의 심야 프로그램 《팩 인 뮤직》을 담당하던 하야시 요시오(林美雄)의 지지를 받고 인지도가 올랐다.[41] 1975년 10월에 발매한 싱글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あの日にかえりたい)는 TBS 드라마 《가정의 비밀》(家庭の秘密)의 주제가가 되어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고, 61만 5천여 장이 판매되어 1976년의 연간 싱글 차트 10위에 오를 정도로 히트하면서 1차 유밍 붐이 일어났다.[44]
1954년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태어난 아라이 유미는 옷감 가게인 아라이 고후쿠텐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자랐다.[11] 중학교 시절, 그녀는 1960년에 문을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 키안티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미시마 유키오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드나들었다.[11] 그녀의 별명 "유밍"은 13살 때 짝사랑했던 중국인 베이시스트가 지어준 것이다.[11]
릿쿄 여학원 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4월, 다마 미술대학에 입학했다.[40] 처음에는 작곡가를 지망했지만, 알파 레코드를 설립한 무라이 구니히코의 권유로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미국, 영국의 1960년대 음악의 영향을 받아 포크(뉴 뮤직) 장르를 지향한 이들이 많아지던 때였다. 초기 뉴 뮤직은 다다미 포크 등으로 불리며 일상생활의 감정이나 생생한 연애 묘사에 치중한 가사가 많았다. 반면 그녀의 작품은 일상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서정적, 시적 가사로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도시적이고 감각적인 풍경이 연상된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매우 신선했다.
1976년 11월 29일, 마쓰토야 마사타카와 요코하마 야마테 교회에서 결혼한 후, '''마쓰토야 유미'''로서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2. 3. 마츠토야 유미의 시대
1975년 12월에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약혼하고, 1976년 11월 29일에 요코하마 야마테 교회에서 결혼했다. 원래는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전업주부가 되는 대신 성을 아라이(荒井)에서 마츠토야(松任谷)로 바꾸어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마츠다 세이코 등 여러 가수에게 곡을 제공하면서도,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정규 앨범을 매년 2장씩 발표하는 등, 빠른 속도로 작품을 제작했다. 〈부두를 건너는 바람〉, 〈DESTINY〉, 〈애인이 산타클로스〉, 〈칸나 8호선〉, 〈진주 귀걸이〉, 〈단데라이온〉 등의 곡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한 리조트에서의 콘서트라는 스타일을 이 시기에 확립하여 그 분야에서도 개척자가 되었다.[50]1981년 6월 21일에 발매한 싱글 〈지켜 주고 싶어〉가 69만 5천여 매가 팔려 1981년의 연간 싱글 차트 10위에 올랐고, 2차 유밍 붐이 시작되었다. 〈지켜 주고 싶어〉가 수록된 앨범 《간밤에 만나요》가 1981년 11월 1일에 발표된 이후 앨범이 17작품 연속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특히 1987년작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사라지기 전에》가 78만 장 판매되며 히트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에 발매한 《Delight Slight Light KISS》는 159만 장으로 판매량이 급증했다. 1990년작 《천국의 문》은 일본 아티스트의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출하량이 200만 장을 돌파한다.[52] 그 후로도 1995년작 《KATHMANDU》까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걸쳐 8작품 연속으로 밀리언셀러를 획득한다.
1979년부터는 콘서트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해, 살아있는 코끼리를 등장시킨 《OLIVE》, 마술을 선보인 《MAGICAL PUMPKIN》,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BROWN'S HOTEL》, 분수 쇼를 넣은 《SURF & SNOW》, 30미터짜리 용 모형에 올라탄 《물 속의 ASIA로》 등, 연출이 해마다 진화를 거듭했다. 억 단위의 돈을 들여 일본과 해외의 최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콘서트의 범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구현해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인터뷰에서도 "음반으로 돈을 번 만큼, 콘서트를 통해 꿈과 함께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51]
당시 인기가 높던 스키를 소재로 한 영화 《나를 스키에 데려가 줘》의 주제가와 삽입곡을 담당하며, “'''젊은이의 카리스마'''”, “'''연애의 교주'''”등으로 불렸다.[54] 자주 비교되는 나카지마 미유키의 스타일과 반대로,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 “중산계급의 손에 닿는 꿈”(당시의 음악 평론가의 표현)을 노래하며, 버블 경제로 고조되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정신세계나 민속 음악에도 주목하면서, 싱글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한여름 밤의 꿈〉과, 연이어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Hello, my friend〉, 〈봄이여, 오라〉 등의 걸작을 낳는다. 1994년 발매된 앨범 《THE DANCING SUN》은 유밍의 정규 앨범 중 최고 판매량인 217만 장을 달성하는 등, 3차 유밍 붐이라고 불릴 정도의 시기였다.
1996년에는 아라이 유미 명의로 활동을 재개한다. 셀프 커버 싱글 《마치부세》를 발매하고, 아라이 유미 시절의 동료를 모아 《Yumi Arai The Concert with old Friends》를 개최했다. 이 라이브 앨범 발매 때문에 연말에 항례적으로 발매되었던 앨범의 발매가 몇 달 늦어졌고, 일본의 연례행사로까지 불린 겨울의 앨범 발매부터 여름까지 하는 콘서트 투어의 사이클이 약간 완만해졌다. 1998년에는 마츠토야 유미 시대의 곡으로 구성된 베스트 앨범 《Neue Musik》을 발매했고, 380만 장 판매되며 유밍의 모든 작품 가운데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러시아의 서커스 팀과 협력해 콘서트 《샹그리라》를 개최한다. 2003년에는 《샹그리라II》를, 2007년에는 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한 《샹그리라Ⅲ》를 개최한다. 이 《샹그리라》 시리즈의 총 제작비는 1200억엔 이상,[55] 총 관객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2. 4. 2000년대 이후의 활동
2005년 9월, 아이치 엑스포 폐막 콘서트에서 중국의 아밍과 셰이크, 싱가포르의 딕리, 한국의 임형주와 함께 “마츠토야 유미 with Friends Of Love The Earth”를 결성해 〈Smile again〉을 발표했고, 이 유닛은 홍백가합전에도 출연했다.[15] 2006년 9월에는 일본의 히라하라 아야카와 FAR EAST RHYMERS, 중국의 샌디 램, 베트남의 미링, 티베트의 유키렌조 자매, 한국의 MC 스나이퍼와 함께 《Friends of Love The Earth 2006》을 개최했다.[15]2011년에는 NHK의 음악 프로그램 《SONGS》 기획으로, 새롭게 녹음한 〈(모두의) 봄이여, 오라〉((みんなの)春よ、来い) 1탄을 5월에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고, 11월에는 2탄인 〈(모두의) 봄이여, 오라 2011년 가을 편〉((みんなの)春よ、来い 2011年秋編)을, 2012년 3월에는 〈(모두의) 봄이여, 오라 2012〉((みんなの)春よ、来い 2012)를 발매했다. 수익은 전액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 기부되었다.[15]
2012년 발매한 베스트 앨범 《일본의 사랑과, 유밍과.》(日本の恋と、ユーミンと。)가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누적 음반 판매량이 3000만 장을 돌파했는데, 이는 일본의 솔로 가수 및 여성 가수로서는 최초이다.[15]
2013년에는 유니버설 뮤직으로 이적했고,[15] 같은 해에 일본의 학술∙예술 분야 공헌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인 자수포장(紫綬褒章)을 받았다.[15]
2015년에는 이시카와현 관광 브랜드 프로듀서에 취임했으며, 2017년에는 도쿄 예술문화 평의회의 위원으로 취임했다. 세타가야구 명예 구민이기도 하다.[15]
2007년 6월 30일, 도시바는 마츠토야의 음반 레이블에 남아 있던 지분 45%를 EMI에 매각하여 EMI가 회사의 완전한 소유권을 갖게 했다. 이후 레이블의 이름은 '''Toshiba-EMI'''에서 '''EMI Music Japan'''으로 변경되었다.[15] 2012년 9월, 영국의 EMI 그룹은 해체되어 여러 회사에 매각되었다. 2013년 4월 1일, EMI Music Japan은 유니버설 뮤직 재팬에 흡수되어 회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EMI Records Japan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6] 따라서, 마츠토야의 모든 이후 발매는 '''유니버설 뮤직 재팬'''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2013년, 마츠토야의 곡 ''Hikouki Gumo''가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 ''바람이 분다 (Kaze Tachinu)''의 엔딩 테마로 사용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17]
2018년 9월에는, 아라이 유미 시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앨범과 싱글의 서브스크립션 배포가 시작되었다.[65]
2019년 8월 23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역대 뮤직 비디오 중 33 작품이 공개되었다.[66]
같은 해 12월 6일에는 LGBTQ 지원을 표방한 대형 음악 이벤트 'LIVE PRIDE'에 출연했다.[67]
2022년에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사상 처음으로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70] [71]
2023년 9월 14일, '오리콘 주간 앨범 랭킹'에서 『유민 만세!〜마츠토야 유미 50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이 1위를 차지했다. 오리콘 사상 최초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의 6개 시대 연속 앨범 1위 획득을 달성했다. 이 기록이 『Most consecutive decades with a No.1 on the Japanese albums chart』(일본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연속으로 획득한 최다 디케이드 수)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인정되었다.[74]
최근에는 테시마 아오이, 이토 아야, NOKKO, 이와사와 코우야, 스즈키 마사유키, 마츠다 세이코, Char, 야쿠시마루 히로코에게 악곡 제공도 하고 있다.
3. 음반
마쓰토야 유미는 1972년 데뷔 이후 수많은 음반을 발표하며 일본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규 앨범뿐만 아니라 베스트 앨범과 싱글 앨범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72년 7월 5일, 아라이 유미라는 이름으로 데뷔 싱글 "返事はいらない"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300장밖에 판매되지 않았지만, 마사타카 마츠토야와 밴드 '캐러멜 마마'(후의 틴 팬 앨리)와 함께 제작한 첫 정규 앨범 ''비행기 구름''(1973)에 재녹음되어 수록되었다.
초기에는 Hi-Fi Set가 커버하여 히트한 "졸업사진", 남성 포크 듀오 BanBan이 불러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한 "딸기 백서를 다시 한번" 등의 곡을 작곡하며 작곡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첫 히트곡은 1975년 싱글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로, 오리콘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1976년 마쓰토야 마사타카와 결혼 후 마쓰토야 유미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이어갔다. 1981년 싱글 "지켜주고 싶어"가 크게 히트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후 1997년까지 발매한 17장의 정규 앨범이 연속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0년대에는 "한여름 밤의 꿈"(1993), "Hello, my friend"(1994), "봄이여, 오라"(1994) 등의 싱글이 연이어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제3의 전성기를 누렸다.
마쓰토야 유미는 정규 앨범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앨범을 발매했다. 1998년 발매한 베스트 앨범 ''Neue Musik''은 이상 판매되며 자신의 앨범 중 최대 판매량을 기록했다. 또한, 2012년 발매한 베스트 앨범 ''일본의 사랑과, 유민과.''는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CD 앨범 판매량 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2022년에는 데뷔 50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 ''유밍 만세!''를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며,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6개 시대 연속 앨범 1위 획득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정규 앨범, 베스트 앨범, 싱글 앨범 목록은 마츠토야 유미 음반 목록 문서를 참조하라.
3. 1. 정규 앨범
3. 2. 베스트 앨범
1998년에는 마츠토야 유미 시대 이후의 베스트 앨범 『Neue Musik』이 을 판매하여, 자신이 발표한 모든 작품 중에서 최대 판매를 기록하고 있다.[57]
3. 3. 라이브 앨범
3. 4. 싱글
마쓰토야 유미(아라이 유미 시절 포함)의 싱글은 다음과 같다.
1972년 데뷔 싱글 返事はいらない(300장 판매)를 시작으로, 守ってあげたい(1981, 오리콘 2위, 약 70만 장 판매), 真夏の夜の夢(1993, 140만 장 이상 판매), Hello, my friend(1994), 春よ、来い(1994) 등 다수의 히트 싱글을 발표했다. 특히 1993년 真夏の夜の夢는 싱글로는 처음으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고, 이듬해 발매된 Hello, my friend, 春よ、来い도 연속으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3작품 연속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4. 공연
마쓰토야 유미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콘서트 투어, 리조트 콘서트, 주요 이벤트 등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통해 팬들과 소통해왔다.
1996년에는 동료 뮤지션들과 함께 Yumi Arai The Concert with old Friends를 개최하여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 이로 인해 겨울 앨범 발매 및 여름 투어라는 활동 사이클이 다소 유연해졌다.[54]
1999년에는 러시아의 서커스 팀과 협업한 콘서트 샹그릴라를 개최했다. 이 콘서트는 2003년 샹그릴라 II, 2007년 샹그릴라 III로 이어졌으며, 총 제작비 1200억엔 이상, 관객 동원 수 100만 명을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55]
2012년에는 제국극장에서 유민×제극을 개최했으며,[58] 2014년과 2017년에도 다른 작품으로 공연을 이어갔다.
2019년에는 LGBTQ를 지원하는 대형 음악 이벤트 'LIVE PRIDE'에 출연했다.[67]
4. 1. 콘서트 투어
마쓰토야 유미는 다양한 콘서트 투어를 통해 팬들과 만났다. 주요 콘서트 투어는 다음과 같다.
1999년에는 러시아의 서커스 팀과 협업한 콘서트 《샹그릴라》를 개최했다.[55] 2003년에는 《샹그릴라 II》, 2007년에는 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하는 《샹그릴라 III》가 개최되었다. 《샹그릴라》 3회의 총 제작비는 1200억엔 이상,[55] 관객 동원 수는 100만 명이었다.
2020년에는 4년 만의 앨범 《심해의 거리》를 발매하고, 2021년 9월 30일부터 이에 연동된 전국 60회에 걸친 콘서트 투어 《심해의 거리》를 개최했다.
4. 2. 리조트 콘서트
- 1978년 8월 28일, 1981년 8월 2일, 1982년 7월 25일 《하야마 마리나・섬머 리조트 콘서트 vol.1~3》
- 1983년 ~ 1989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2000년, 2002년, 2004년 《SURF & SNOW in Zushi Marina vol.4~17》
- 1981년 8월 22일 ~ 8월 23일 《섬머 리조트 콘서트 인 가루이자와》
- 1981년 ~ 2007년 《SURF & SNOW in Naeba vol.1~27》
4. 3. 주요 이벤트
- 1978년 6월 3일, 6월 10일, 6월 27일, 6월 29일에 《대중적 시사 가극》 (4회) 공연을 했다.[52]
- 1985년 6월 15일, 《ALL TOGETHER NOW》에 참여했다.
-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후지마루 Merry Christmas from YUMING vol.7~9》를 개최했다.
- 1996년 8월 13일부터 8월 15일까지 《Yumi Arai the Concert with old Friends》 (3회)를 개최했다.
- 1998년 10월 28일과 10월 30일, 《도쿄 골프클럽 50주년 기념 콘서트 Jazz Night / Orchestra Night》 (2회)를 개최했다.
- 1999년 5월 15일, 2001년 6월 16일, 2004년 6월 5일에 《Internet Home Live vol.1~3》를 개최했다.
- 1999년, 러시아의 서커스 팀과 콜라보레이션한 콘서트 《샹그릴라》를 개최했다. 2003년에는 《샹그릴라 II》, 2007년에는 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하는 《샹그릴라 III》를 개최했다. 《샹그릴라》 3회의 총 제작비는 120억엔 이상[55], 관객 동원 수는 100만 명이었다.
- 2000년 11월 1일, 《Brothers & Sisters》에 참여했다.
- 2003년 1월 31일, 《Yuming Tribute Concert Queen's Fellows》에 참여했다.
- 2005년 4월 8일과 4월 9일, 《The Session at stella ball》 (2회)를 개최했다.
- 2005년 9월 23일, 《YUMING Love The Earth Final》에 참여했다.
- 2005년 11월 15일, 《미대생 유미, 다마 미대에 유밍이 돌아온 날》에 참여했다.
- 2005년 12월 22일, 《실크로드 콘서트》에 참여했다.
- 2006년 9월 17일, 《Friends of Love The Earth 2006》에 참여했다.
- 2012년에는 제국극장에서 《유민×제극》을 개최했다.[58] 그 후, 2014년, 2017년에도 연목을 바꿔서 개최했다.
- 2019년 12월 6일에는 LGBTQ 지원을 표방한 대형 음악 이벤트 'LIVE PRIDE'에 출연했다.[67]
- 2021년 9월 30일부터 2020년 12월 1일에 발매한 앨범《심해의 거리》와 연동된 전국 60회에 걸친 콘서트 투어 《심해의 거리》를 개최했다.
5. 오리콘 기록
마쓰토야 유미는 오리콘 차트에서 여러 기록을 세웠다. 다음은 주요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