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튼 펠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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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턴 펠드먼(Morton Feldman)은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나 1987년 사망한 미국의 작곡가이다. 그는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통해 전통적인 작곡 방식을 벗어나,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펠드먼은 그래픽 악보와 불확정성 요소를 활용하고, 후기에는 매우 느리고 조용한 다이내믹을 특징으로 하는 장시간의 작품을 작곡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로스코 채플', '현악 사중주 II' 등이 있으며, 펠드먼은 뉴욕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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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튼 펠드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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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926년 1월 12일 |
| 출생지 | 퀸스, 뉴욕 시 |
| 사망일 | 1987년 9월 3일 |
| 사망지 | 버펄로, 뉴욕 주 |
| 배우자 | 바버라 몽크 펠드먼 (1987년 결혼) |
| 직업 | 작곡가 |
| 장르 | 클래식 음악, 현대 음악 |
| 영향 | 출처 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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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목록 | |
| 주요 작품 | 작품 목록 |
2. 생애
모턴 펠드먼은 1926년 1월 12일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아동복 제조업자였다. 어린 시절 베라 마우리나 프레스에게 피아노를 사사받았으며, 월링퍼드 리거와 슈테판 볼페에게 작곡을 배웠다.[1] 펠드먼과 볼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냈다.
1950년대 초, 펠드먼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안톤 베베른의 교향곡을 들었다. 이 작품 이후 오케스트라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었는데, 펠드먼은 베베른의 작품에 대한 청중들의 무례한 반응에 충격을 받고 즉시 자리를 떴다.[2] 로비에서 그는 콘서트에 참석했다가 밖으로 나온 존 케이지를 만났다.[2] 둘은 금세 친구가 되었고, 펠드먼은 케이지가 살던 건물로 이사했다. 케이지를 통해 그는 조각가 리처드 리폴드 (인접 스튜디오에 예술가 레이 존슨과 함께 작업), 소냐 세쿨라와 로버트 라우센버그를 포함한 예술가, 헨리 카웰, 버지릴 톰슨, 조지 앤테일과 같은 작곡가들을 만났다. 케이지의 격려로 펠드먼은 전통적인 조성 화성이나 음렬주의와 같은 과거의 작곡 시스템과 관련이 없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비표준적인 악보 시스템을 실험했고, 종종 악보에 그리드를 사용하여 어떤 음표를 연주해야 하는지는 명시했지만 어떤 음표를 연주해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펠드먼의 악보 및 불확정성 실험은 케이지가 연주할 음표를 주역을 참조하여 결정하는 ''음악의 변화''와 같은 작품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케이지를 통해 펠드먼은 뉴욕 예술계의 많은 저명한 인물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잭슨 폴록, 필립 거스턴과 프랭크 오하라가 있었다. 그는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얻었고,[3] 1970년대에는 약 20분 길이의 여러 작품을 썼는데, 여기에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있는 동명의 건물을 위해 쓰여진 ''로스코 채플'' (1971)과 ''프랭크 오하라를 위하여'' (1973)가 있다. 1977년에는 새뮤얼 베케트가 쓴 원본 텍스트로 오페라 ''니더''를 썼다.[4]
펠드먼은 잭 가르페인의 1961년 영화 ''Something Wild''의 영화 음악 작곡을 의뢰받았지만, 펠드먼의 음악을 듣고 난 후, 가르페인의 아내 캐럴 베이커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강간당하는 오프닝 장면의 음악을 듣고 감독은 즉시 의뢰를 철회하고 대신 애런 코플런드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가르페인은 "내 아내가 강간당하는데 당신은 첼레스타 음악을 씁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5]
펠드먼의 음악은 1970년에 "급격하게 변화"하여 그래픽 악보 및 무율 리듬 표기 시스템에서 리듬의 정확성을 선호하게 되었다.[6] 이 새로운 시기의 첫 번째 작품은 그의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에게 헌정된 짧은 55마디 작품인 "마담 프레스는 지난주 90세로 돌아가셨다"였다.
1973년, 47세의 펠드먼은 뉴욕 버팔로 대학교에서 에드가 바레즈 작곡 교수 (그가 직접 만든 직함)가 되었는데, 그 전까지 그는 맨해튼 의류 지구에 있는 가족 섬유 사업체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펠드먼은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에서도 레지던시를 가졌다.
말년에 펠드먼은 30분보다 짧은 경우가 드물고 종종 훨씬 더 긴 여러 개의 매우 긴 작품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바이올린과 현악 사중주'' (1985, 약 2시간),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 (1984, 약 4시간), ''현악 사중주 II'' (1983, 휴식 없이 6시간 이상)가 포함된다. 이 작품들은 전형적으로 매우 느린 발전 속도와 매우 조용한 다이내믹 범위를 유지한다. 펠드먼은 당시 조용한 소리만이 자신을 흥미롭게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1982년 강연에서 그는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정말로 지워버리는 음악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주는 음악이요?"라고 질문했다.
펠드먼은 사망 직전 캐나다 작곡가 바바라 몽크와 결혼했다. 그는 1987년 9월 3일 버팔로 자택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26-1950)
모턴 펠드먼은 1926년 1월 12일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아동복 제조업자였다. 어린 시절 페루치오 부소니의 제자인 베라 마우리나 프레스에게 피아노를 사사받았으며,[8] 월링퍼드 리거와 슈테판 볼페에게 작곡을 배웠다.[9] 하지만, 스승들의 작곡관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논쟁을 벌이는 일도 잦았다.1950년대 초, 펠드먼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안톤 베베른의 교향곡을 듣고 청중들의 무례한 반응에 충격을 받아 공연장을 떠났다.[2] 로비에서 그는 존 케이지를 만났고, 곧 친구가 되었다. 펠드먼은 케이지의 격려로 조성 화성이나 음렬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작곡 시스템과 관련 없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비표준적인 악보 시스템을 실험했고, 불확정성 요소를 도입하여 케이지의 ''음악의 변화''와 같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2. 2. 뉴욕 악파와의 만남 (1950-1970)
1950년대 초, 펠드먼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안톤 베베른의 교향곡을 들었다.[2] 공연 직후 펠드먼은 로비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고, 둘은 금세 친구가 되었다.[2] 케이지의 격려로 펠드먼은 전통적인 조성 화성이나 음렬주의와 같은 과거의 작곡 시스템과 관련이 없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비표준적인 악보 시스템을 실험했고, 종종 악보에 그리드를 사용하여 어떤 음표를 연주해야 하는지는 명시했지만 어떤 음표를 연주해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펠드먼의 악보 및 불확정성 실험은 케이지가 주역을 참조하여 연주할 음표를 결정하는 ''음악의 변화''와 같은 작품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존 케이지를 통하여 펠드먼은 잭슨 폴록, 필립 거스턴, 프랭크 오하라 등 뉴욕 예술계의 저명 인사들을 만났고,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얻었다.[3]
펠드먼은 도형 악보를 발안하여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존 케이지는 도형 악보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여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등에 영향을 주었다. 얼 브라운, 보그스와프 셰페르, 로만 하우벤슈토크-라마트리[11], 아네스티스 로고테티스, 실바노 부소티 등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전위 음악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우연성 음악, 불확정성 음악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펠드먼은 연주자가 악보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1970년대에 이 표기법을 포기한다.
2. 3. 후기 작품 활동 (1970-1987)
1970년대에 펠드먼의 음악은 그래픽 악보 및 무율 리듬 표기 시스템에서 벗어나, 리듬의 정확성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급격하게 변화"했다.[6] 이 시기 첫 작품은 "마담 프레스는 지난주 90세로 돌아가셨다"로, 그의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에게 헌정된 55마디의 짧은 작품이었다.1973년, 47세의 펠드먼은 뉴욕 버팔로 대학교에서 에드가 바레즈 작곡 교수(그가 직접 만든 직함)가 되었다. 그 전까지 그는 맨해튼 의류 지구에 있는 가족 섬유 사업체에서 일했다. 펠드먼은 1980년대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에서도 레지던시를 가졌다.
말년에 펠드먼은 30분보다 짧은 경우가 드물고 종종 훨씬 더 긴 작품들을 제작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있는 동명의 건물을 위해 쓰여진 ''로스코 채플'' (1971), ''프랭크 오하라를 위하여'' (1973) 등이 1970년대에 작곡되었다. 1977년에는 새뮤얼 베케트가 쓴 원본 텍스트로 오페라 ''니더''를 작곡했다.[4]
1980년대 이후, 그는 하나의 악장으로 소요 시간이 60분 이상이며, 음악 전체가 피아니시모 상태로 유지되는 매우 장대한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바이올린과 현악 사중주」(1985년, 약 2시간), 「필립 가스톤을 위하여[14]」(1984년, 약 4시간) 등이 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현악 사중주곡 II」(1983년)는 단일 악장(쉼표 없는 반복)으로 5시간 반이 소요되는 극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형적으로 매우 느린 발전 속도와 매우 조용한 다이내믹 범위를 유지한다. 펠드먼은 당시 조용한 소리만이 자신을 흥미롭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콥트의 빛》을 썼을 무렵, 펠드먼은 연주 시간의 극단적인 연장에 한계를 느끼고, 짧아진 만큼 세밀한 음을 채워 넣는 양식을 모색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췌장암에 걸려 있었고, 1987년 바바라 몽크와 결혼 직후 뉴욕주 버펄로 시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펠드먼의 제자로는 바니타 마커스가 있으며, 그녀에게는 크라니히슈타인 음악상이 주어졌다. 존 케이지의 초청으로 뮈지 서커스 내 피아노 출연도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일 프로그램에는 "아무도 펠드먼을 대신할 수 없다[15]"라고만 적혀 있었다.
3. 주요 작품 경향
3. 1. 도형 악보와 불확정성
1950년, 뉴욕 필하모닉 연주회에 참석하여 안톤 베베른의 "교향곡"을 들었다.[10] 그 연주회장에서 존 케이지를 알게 되었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펠드먼은 음렬 기법이나 전통 화성의 제약과 같은 과거의 작곡 체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드를 사용하거나, 일정 시간에 연주하는 음표의 개수를 명기하는 등, 그가 세계 최초로 발안했다고 여겨지는 도형 악보를 이용한 실험을 했다.도형 악보를 발안한 임팩트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우선 존 케이지가 찬사하며 그 가능성을 추구했다. 그 결과는 케이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등에 영향을 주었다. 전위 음악의 메카인 다름슈타트에서도 이 가능성이 절찬을 받아, 얼 브라운, 보그스와프 셰페르, 로만 하우벤슈토크-라마트리[11], 아네스티스 로고테티스, 실바노 부소티 등으로 차례로 영향이 확산되었다. 라마트리에 이르러서는 자작 그림을 악보라고 주장하며, 그 그림에 의존하여 지휘를 하고 즉흥 연주를 할 정도였다. 기호를 연주자 스스로가 해석하고,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음악을 이끌어내는 유행은, 후에 우연성 음악, 불확정성 음악을 만들어내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펠드먼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펠드먼 자신은 "결국 연주자가 제멋대로 악보를 해석하고,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것을 듣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70년대에는 이 표기법을 포기한다.
3. 2.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
존 케이지를 통해 잭슨 폴록, 필립 가스톤, 프랭크 오하라를 비롯한 뉴욕 미술의 저명 인사들과 알게 되었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1970년대에 '로스코 채플(1971)'이나 '프랭크 오하라를 위해(1973)' 등 20분대의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로스코 채플'은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에게 헌정되었으며, 로스코의 작품이 수용된 동명의 건물에서 초연되었다. 매우 정교한 리듬 조작과 아름다운 음색을 특정 패턴으로 반복하는 양식을 철저히 따랐지만, 아직 '피아노'와 같이 돌발적인 포르티시모를 사용하기도 했다.이 시기부터 세계적인 인지도가 높아져 대편성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처럼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표현의 기회가 증가했다. 그러나 연주 시간의 제약으로 인한 패턴화는 피할 수 없었고, 이후 실내악을 통한 시도로 잠시 되돌아갔다.
3. 3. 긴 지속 시간
1980년대 이후, 모튼 펠드먼은 하나의 악장으로 소요 시간이 60분 이상이며, 음악 전체가 피아니시모 상태로 유지되는 매우 장대한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바이올린과 현악 사중주」(1985년, 약 2시간), 「필립 가스톤을 위하여[14]」(1984년, 약 4시간) 등이 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현악 사중주곡 II」(1983년)는 단일 악장(쉼표 없는 반복)으로 5시간 반이 소요되는 극단적인 예이다. 이 작품의 완전한 초연은 1999년 플럭스 현악 사중주단에 의해 뉴욕시의 쿠퍼 유니언에서 이루어졌으며, 불완전판 초연을 했던 크로노스 콰르텟도 곧 완전판 연주를 했다. 2003년에는 플럭스 사중주단의 연주가 녹음되었다(연주 시간 6시간 7분). 2006년 10월에는 일본의 Ensemble Bois에 의해 치바시 미술관 사야홀에서 7시간 반이라는 역대 최장 시간의 연주가 이루어졌다.일반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분위기의 변화가 적고, 전곡에 걸쳐 매우 조용한 음만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펠드먼은 조용한 음만이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있는 독일의 펠레그리니 현악 사중주단에서도 최장 6시간이 소요된 연주가 남아 있으며, 2006년 11월 18일에는 독일의 FM에서 심야 0시부터 아침 6시까지 논스톱으로 라이브 방송되었다.
4. 대표적인 작품
''참고: 모턴 펠드먼의 작품 목록''
- 「~도 아니고」(1977년)
- 시간과 악기의 요소에 관하여(On Time and the Instrumental Factor) (1969년)
- 콥트의 빛(コプトの光) (1986년)
- 사무엘 베케트를 위하여(サミュエル・ベケットのために) (1987년)
- 합창과 악기 II (1967년)
- 로스코 채플(1971년)
- Three Voices ~ 소프라노, 테이프 (또는 소프라노 3명) (1982년)
- 슈테판 볼페를 위해 (1986년)
- 아틀란티스 (1959년)
- 듀레이션 I-V (1960년 - 1961년)
- 드 쿠닝 (1963년)
- 덴마크의 왕 (1964년)
- 프랭크 오하라를 위해 (1973년)
- 왜 패턴인가? (1978년)
- 현악 사중주 1번 (1979년)
- Patterns in a Chromatic Field (1981년) (첼로, 피아노)
- 존 케이지를 위해 (1982년)
- 왜곡된 대칭 (1983년)
- 현악 사중주 2번 (1983년)
- 클라리넷과 현악 사중주 (1983년)
- 피아노와 현악 사중주 (1985년)
- 바이올린과 현악 사중주 (1985년)
- 크리스찬 울프를 위해 (1986년)
- 필립 가스톤을 위해
- 마지막 소품 (1959년)
- 피아노 (1977년)
- 트라이아딕 메모리즈 (1981년) - 세 명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 로저 우드워드, 다카하시 아키)의 추억에 관한 작품[16]
- 바니타 마커스를 위해 (1985년)
- 말리의 궁전 (1986년)
4. 1. 초기 (1950년대)
모턴 펠드먼의 작품 목록 문서에서 초기 작품들을 참고할 수 있다.4. 2. 중기 (1960-1970년대)
존 케이지를 통해, 잭슨 폴록, 필립 가스톤, 프랭크 오하라[12]를 비롯한 뉴욕 미술의 저명 인사들과 알게 된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1970년대에 '로스코 채플(1971)'이나 '프랭크 오하라를 위해(1973)' 등 20분대의 작품을 다수 작곡했다. '로스코 채플'은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에게 헌정되었으며, 로스코의 작품이 수용된 동명의 건물에서 초연되었다. 매우 정교한 리듬 조작과 아름다운 음색을 특정 패턴으로 반복하는 양식을 철저히 따랐지만, 아직 '피아노'와 같이 돌발적인 포르티시모를 사용하기도 했다.[13]이 시기부터 세계적인 인지도가 높아져 대편성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처럼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표현의 기회가 증가했다. 그러나 연주 시간의 제약으로 인한 패턴화는 피할 수 없었고, 이후 실내악을 통한 시도로 잠시 되돌아갔다.
4. 3. 후기 (1980년대)
1980년대 이후, 모튼 펠드먼은 하나의 악장으로 소요 시간이 60분 이상이며, 음악 전체가 피아니시모 상태로 유지되는 매우 장대한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14]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바이올린과 현악 사중주」(1985년, 약 2시간), 「필립 가스톤을 위하여」(1984년, 약 4시간) 등이 있다.[14] 특히 마지막 작품인 「현악 사중주곡 II」(1983년)는 단일 악장(쉼표 없는 반복)으로 5시간 반이 소요되는 극단적인 예이다.[14] 이 작품의 완전한 초연은 1999년 플럭스 현악 사중주단에 의해 뉴욕시의 쿠퍼 유니언에서 이루어졌으며, 불완전판 초연을 했던 크로노스 콰르텟도 곧 완전판 연주를 했다.[14] 2003년에는 플럭스 사중주단의 연주가 녹음되었다(연주 시간 6시간 7분).[14] 2006년 10월에는 일본의 Ensemble Bois에 의해 치바시 미술관 사야홀에서 7시간 반이라는 역대 최장 시간의 연주가 이루어졌다.[14]일반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분위기의 변화가 적고, 전곡에 걸쳐 매우 조용한 음만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14] 펠드먼은 조용한 음만이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14] 전 세계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있는 독일의 펠레그리니 현악 사중주단에서도 최장 6시간이 소요된 연주가 남아 있으며, 2006년 11월 18일에는 독일의 FM에서 심야 0시부터 아침 6시까지 논스톱으로 라이브 방송되었다.[14]
그 외 작품으로는,
- 마지막 소품 (1959년)
- 피아노 (1977년)
- 삼화음의 기억 (트라이아딕 메모리즈) (1981년) - 세 명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 로저 우드워드, 다카하시 아키)의 추억에 관한 작품[16]
- 바니타 마커스를 위해 (1985년)
- 말리의 궁전 (1986년)
등이 있다.
5. 펠드먼과 한국의 관계
6. 펠드먼의 유산과 영향
6. 1. 제자
wikitext모턴 펠드먼의 제자들에 대한 내용은 펠드먼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같이 보기
- 작품 목록
- [https://web.archive.org/web/20051022095129/http://www.artofthestates.org/cgi-bin/composer.pl?comp=15 Art of the States: 모튼 펠드먼] 펠드먼의 세 작품
- [http://www.ubu.com/sound/feldman.html UbuWeb: 모튼 펠드먼] "덴마크의 왕"("The King of Denmark") 수록
- [https://web.archive.org/web/20040406162341/http://www.epitonic.com/artists/mortonfeldman.html Epitonic.com: 모튼 펠드먼] "오직 - 목소리와 악기를 위한 작품"("Only – Works for Voice and Instruments") 수록
- [http://radiom.org/detail.php?omid=C.1967.10.25.1 존 케이지와의 대화, 1966, 파트 1], [http://radiom.org/detail.php?omid=C.1967.10.25.2 파트 2], [http://radiom.org/detail.php?omid=C.1967.10.25.3 파트 3], [http://radiom.org/detail.php?omid=C.1967.10.25.4 파트 4], [http://radiom.org/detail.php?omid=C.1967.10.25.5 파트 5]
- 결정적이지 않은 음악
- 뉴욕 악파 작곡가
- 얼 브라운
- 존 케이지
- 크리스티안 볼프
참조
[1]
PDF
Morton Feldman «The Early Years»
http://www.cnvill.ne[...]
[2]
서적
Liner Notes
Cambridge: Exact Change
2000
[3]
간행물
Morton Feldman: The Viola in my Life
http://www.dramonlin[...]
New World Records
[4]
웹사이트
Morton Feldman's ''Neither''
http://www.themodern[...]
2001-05-17
[5]
웹사이트
Canvasses and time canvasses
http://www.cnvill.ne[...]
2011-05-30
[6]
웹사이트
Morton Feldman Slee Lecture, February 2, 1973
http://library.buffa[...]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2012-12-17
[7]
웹사이트
Morton Feldman (1926-1987) Music is built on primitive memory structures
https://interlude.hk[...]
Interlude
2019-12-22
[8]
웹사이트
Morton Feldman's Madame Press - Chris Villars
https://www.cnvill.n[...]
Interlude
2019-12-22
[9]
웹사이트
FELDMAN, WOLPE, AND POLLOCK
http://www.studiozst[...]
Studio Z Blog
2019-12-22
[10]
웹사이트
OLD FRIENDS, NEW SETTING
https://americansymp[...]
American Symphony Orchestra
2019-12-22
[11]
웹사이트
Roman Haubenstock-Ram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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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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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iner Notes
Cambridge: Exact Chang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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