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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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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1793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온화한 성품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했으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데려오는 데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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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 (종교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출생일1793년
사망일1840년 1월 31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서울
사망지서울 당고개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생애

1793년 한양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박종원은 온화한 성품의 학자이자 수완가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께 효도하며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지켰다. 교우 고순이와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으며, 신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등 신앙 공동체에 헌신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고 신앙 전파에 힘썼으며, 이러한 활동과 덕행으로 앵베르 주교에 의해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피신하여 교우들을 돌보았으나 10월 26일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으며, 조상 제사 거부 등을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840년 1월 31일, 한양 근교 당고개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는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 지 약 한 달 뒤였다.

2. 1. 출생과 성장

박종원은 1793년 한양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으며, 뛰어난 학자이자 수완가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교우 고순이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그는 매우 자비로워 여러 천주교 신자들과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했으며, 죽을 위험에 처한 많은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므로, 저 또한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저를 위하여 고통 받으셨으므로, 저 또한 고통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순교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박종원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충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여 불쾌감을 주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박종원이 화난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라고 평하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솔선수범했으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재능과 덕행을 전해 들은 앵베르 주교는 그를 교리 교사로 임명했고, 박종원은 교리 교사로서의 의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집을 떠나 8개월 동안 수감된 교우들과 연락하고 흩어진 교우들을 돌보다가 10월 26일체포되었다. 여러 차례 혹독한 심문고문으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고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행복하게 여겼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확신을 가지고 천국지옥에 대해 설명했으며, 조상 제사를 거부한 것이 죄목이 되었다고 한다.

한양 근교의 당고개로 압송되어,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 지 약 한 달 뒤인 1840년 1월 31일에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2. 2. 신앙 활동

박종원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독실한 천주교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으며, 교우 고순이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여러 천주교 신자들과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했으며, 특히 죽을 위험에 처한 많은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므로, 저 또한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저를 위하여 고통 받으셨으므로, 저 또한 고통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순교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신중하고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종원이 화난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솔선수범하여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뛰어난 학식과 덕행이 앵베르 주교에게 알려져 교리 교사로 임명되었고, 그 직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종원은 집을 떠나 피신 생활을 하면서도 8개월 동안 수감된 교우들과 연락하고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돌보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0월 26일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혹독한 심문고문으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고통받는 것을 오히려 행복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그는 천국지옥의 존재를 확신에 차서 설명했으며,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했다는 죄목을 받았다.

결국 박종원은 1840년 1월 31일, 한양 근교의 당고개로 압송되어 다섯 명의 다른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는 그의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 지 약 한 달 뒤의 일이었다.

2. 3. 체포와 순교

1839년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박종원은 집을 떠나 피신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8개월 동안 숨어 지내면서도, 감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을 유지하고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돌보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0월 26일, 결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박종원은 여러 차례 극심한 심문고문을 겪었다. 고문으로 인해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그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살가죽이 벗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박종원은 관리들 앞에서 천국지옥의 실재에 대해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했으며, 조상 제사를 거부한 것이 자신의 죄목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결국 박종원은 한양 근교의 당고개 형장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 지 약 한 달 뒤인 1840년 1월 31일, 다른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3. 시복 · 시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3]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2-14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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