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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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밥 호크는 1929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 태어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그는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직종별 노동조합(ACTU) 의장을 역임하며 노동 운동에 헌신했고, 1980년 연방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며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되었고, 1991년까지 재임하며 경제 개혁, 사회 복지 확대, 환경 보호, 외교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퇴임 후에는 사업가로 활동했으며, 2019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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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호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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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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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더 호너러블 |
이름 | 로버트 제임스 리 호크 |
출생일 | 1929년 12월 9일 |
출생지 |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보더타운 |
사망일 | 2019년 5월 16일 |
사망지 | 뉴사우스웨일스주 노스브리지 |
안장 장소 | 맥쿼리 파크 묘지 및 화장터 |
정당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배우자 | |
자녀 | 4명 |
아버지 | 클렘 호크 |
친척 | 버트 호크 (삼촌) |
학력 |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 (문학사, 법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문학 학사)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 (박사, 미완료) |
웹사이트 | 밥 호크 총리 도서관 |
정치 경력 | |
직위 | 제23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제13대 노동당 대표 야당 대표 |
총리 재임 기간 | 1983년 3월 11일 ~ 1991년 12월 20일 |
총리 이전 | 맬컴 프레이저 |
총리 이후 | 폴 키팅 |
노동당 대표 재임 기간 | 1983년 2월 8일 ~ 1991년 12월 19일 |
노동당 대표 이전 | 빌 헤이든 |
노동당 대표 이후 | 폴 키팅 |
야당 대표 재임 기간 | 1983년 2월 8일 ~ 1983년 3월 11일 |
야당 대표 이전 | 빌 헤이든 |
야당 대표 이후 | 앤드루 피콕 |
국회의원 | 오스트레일리아 |
선거구 | 윌스 선거구 |
국회의원 재임 기간 | 1980년 10월 18일 ~ 1992년 2월 20일 |
국회의원 이전 | 고든 브라이언트 |
국회의원 이후 | 필 클리어리 |
노동당 전국 집행위원장 재임 기간 | 1973년 6월 7일 ~ 1978년 8월 2일 |
노동당 전국 집행위원장 이전 | 톰 번스 |
노동당 전국 집행위원장 이후 | 닐 배트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협의회 의장 재임 기간 | 1969년 9월 10일 ~ 1980년 9월 1일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협의회 의장 이전 | 앨버트 멍크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협의회 의장 이후 | 클리프 돌런 |
총리 재임 주요 정책 | |
경제 정책 | 물가 및 소득 협정 오스트레일리아 달러 변동 환율제 금융 규제 완화 |
보건 정책 | 메디케어 |
법률 | 오스트레일리아 법 |
주요 사건 | 걸프 전쟁 원주민 사망 사건 왕립 위원회 |
내각 | |
내각 목록 | 제1차 내각 제2차 내각 제3차 내각 제4차 내각 |
선거 결과 | |
총선 | 1983년 1984년 1987년 1990년 |
2. 성장 과정
빅토리아주와 인접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접경마을 보더타운(Bordertown)에서 태어나 서호주 퍼스에서 자랐다. 서호주 대학교에서 법학사와 경제학사를 취득하고,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수학했다. 1947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에 입당했다.[19][20]
1954년 옥스퍼드의 유서 깊은 터프 테번 펍에서 11초 만에 야드 오브 에일(1.4L) 맥주를 마셔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펍에 명판으로 남아있다.[170]
195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 법학 박사과정에 진학해 중재법을 공부하다 이듬해 ACTU(중앙 직종별 노동조합 연맹체)의 노동조합 전임자로 스카우트되어 박사과정을 그만두었다. ANU 재학 당시 대학 이사회의 학생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족
빅토리아주와 인접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접경마을 보더타운(Bordertown)에서 태어나, 서호주 퍼스에서 자랐다.[10] 아버지 아서 "클렘" 호크(Arthur "Clem" Hawke, 1898–1989)는 독립교회(Congregationalist) 목사였고, 어머니 에디스 에밀리(리)(Edith Emily (Lee), 1897–1979)[11][12] (엘리(Ellie)로 알려짐)[13]는 교사였다. 삼촌 버트 호크(Bert Hawke)는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서호주 주 총리(premier of Western Australia)를 지냈다.[14]호크보다 일곱 살 위였던 형 닐은 17세에 수막염(meningitis)으로 사망했다. 당시에는 수막염 치료법이 없었다.[14] 엘리 호크는 아들의 운명에 대해 거의 메시아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고, 이는 호크가 경력 전반에 걸쳐 최고의 자신감을 갖는데 기여했다.[15] 15세 때 호크는 친구들에게 언젠가 호주 총리가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16]
17세 때 호크는 팬서 모터사이클(Panther motorcycle)을 타다가 심각한 사고를 당해 며칠 동안 위독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죽음 직전의 경험은 호크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능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17][18] 18세가 되던 1947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에 입당했다.[19][20]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맥주 원샷(스컬) 기록을 세웠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맥주 1야드(약 91cm)를 11초 만에 마셨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그의 경력과 오커풍 이미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널리 여겨진다.[25]
2. 2. 학창 시절
빅토리아주와 인접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접경마을 보더타운(Bordertown)에서 태어나, 서호주 퍼스에서 성장했다. 서호주 대학교에서 법학사와 경제학사를 취득했고,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수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직전인 1947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원이 되었다.호크는 웨스트 리드빌 주립학교, 퍼스 모던 스쿨, 서호주 대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1952년에 문학사와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대학교 학생회장을 역임했다.[21] 이듬해 로드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정치 및 경제학(PPE) 학사 과정을 시작했으나, 서호주 대학교에서 받았던 교육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문학석사 과정으로 전과했다. 이후 호주의 임금 결정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1956년 1월에 발표했다.[23]
1954년, 17세기에 문을 연 옥스퍼드의 유서 깊은 터프 테번 펍에서 11초 만에 야드 오브 에일(1.4L) 맥주를 마셔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다. 그의 기록은 펍에 명판으로 남아있다.[170] 호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맥주 원샷(스컬) 기록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며, 맥주 1야드(약 91cm)를 11초 만에 마셨다. 이 기록은 그의 경력과 오커풍 이미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25] 202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구 저널''에 실린 C. J. 코번트리의 논문은 호크의 기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노동조합원과 국수주의적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한 "문화적 선전"이었다고 결론지었다.[26]
1956년 캔버라의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 법학과에서 중재법 분야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한 장학금을 받았다.[23][131] ANU에 도착한 직후 대학교 이사회 학생 대표가 되었다.[131] 1년 후, ANU에서 멘토인 H. P. 브라운에 의해 ACTU 회장 연구원으로 추천받아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멜버른으로 이주했다.[24]
3. 노동 운동
밥 호크는 대학 졸업 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 평의회(Australian Council of Trade Unions, ACTU)에 연구원으로 합류했다.[166] 1959년 ACTU 대변인으로 임명되어 임금 인상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명성을 얻었다.[29]
1969년부터 10년 동안 호주 최대 노동조합인 '오스트레일리아 직종별 노동조합(ACTU)' 의장을 지냈다.[166] 독일을 모델로 조합과 강령을 현대화했으며, 실용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며 노동조합 운동 내 좌파의 지지를 받았다.[31][33]
재임 기간 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다른 사안에서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유대인 거부자(Refuseniks) 문제 해결에 헌신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의 암살 시도 대상이 되기도 했다.[34] 197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라그비 팀의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에 반대하며 인종 차별에 맞섰고, 이는 훗날 넬슨 만델라의 존경을 받았다.[35]
산업 문제에서 뛰어난 협상 능력을 보여 노동조합과 고용주 양측 모두에게 존경받았으며, 1973년에는 노동당 연방 의장을 겸임했다.[43]
3. 1. ACTU 연구원 및 대변인 (1957-1969)
1956년 호크는 캔버라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NU) 법학과에서 중재법 분야의 박사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장학금을 받았다.[23][131] ANU에 도착한 직후, 그는 대학교 이사회의 학생 대표가 되었다.[131] 1년 후, 그는 ANU에서 그의 멘토인 H. P. 브라운에 의해 ACTU 회장에게 연구원으로 추천되었는데, 이는 해럴드 사우터가 ACTU 사무총장이 된 것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브라운은 수년간 전국 임금 사건에서 ACTU를 지원해왔다. 호크는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아내인 헤이즐과 함께 멜버른으로 이사했다.[24]3. 2. ACTU 의장 (1969-1980)
1969년 호크는 399대 350의 근소한 차이로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 평의회(ACTU)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31] 여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과 관련된 일부 인사들을 포함한 노동 운동 좌파의 지지가 있었다.[31] 그는 레이 지첼트(호주 금속 노동자 연맹(FMWU) 사무총장)를 그 결과를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언급했다.[32]ACTU 의장 선출 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질문에 호크는 자신을 묘사하는 데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정치적 접근 방식은 실용주의적이라고 말했다.[33]
1971년, 호크는 ACTU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인종 차별이 없는 팀을 197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라그비 투어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노동조합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 팀을 지원하지 않기로 합의했지만, 호주 운수 노동자 연맹 서호주 지부와 바텐더 노조가 그 팀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여 스프링복스가 퍼스에 착륙할 수 있었다. 투어는 6월 26일에 시작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대가 경기를 방해하면서 폭동이 발생했다. 호크는 아파르트헤이트 팀에 대한 금지 조치를 계속해서 지지했고 그해 후반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크리켓 팀의 입국이 성공적으로 거부되었으며, 다시는 아파르트헤이트 팀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평등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훗날 호크에게 넬슨 만델라의 존경과 우정을 얻게 해 주었다.[35][36][37]
산업 문제에 있어서 호크는 협상에 대한 선호와 상당한 기술을 보여주었고, 고용주뿐만 아니라 그가 대변했던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일반적으로 좋아하고 존경받았다.
1973년 6월 호크는 노동당 연방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년 후 고프 휘틀럼 정부가 논란이 많은 총독에 의해 해임되자, 호크는 이어지는 선거에서 의회에 진출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해리 젠킨스(스컬린 선거구 의원)는 호크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그는 이러한 압력에 강하게 저항했다.[39] 호크는 결국 당시 의회 진출을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가 곧 후회한 결정이었다.[39]
호크는 1978년 8월 노동당 의장직에서 사임했다.[43] 1979년 그는 신체적 붕괴를 겪었고, 이 충격으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그는 작가 블랑쉬 달푸게와 맺은 관계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녀는 1982년에 호크의 전기를 출판했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재활 기간 동안 오히려 높아졌고, 여론 조사에 따르면 그는 노동당 당수 빌 헤이든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총리 말콤 프레이저보다 더 인기 있는 대중 인물이었다.


4. 정치 경력
1969년부터 10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직종별 노동조합(ACTU) 의장을 지내면서 독일을 모델로 조합과 강령의 현대화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전통적 좌파 조합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재임 기간 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다른 사안에서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1980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빅토리아주 멜버른시 윌스 선거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고, 특유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그해에 범야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83년 3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보수 정권을 끝내고 총리에 취임하였다. '오일 쇼크', 초고금리(1982년 존 하워드 재무장관 재임 당시 사상 최고 22%)와 개혁 지체로 침체된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에 새로운 개혁 정책들을 도입했다. 폴 키팅 재무장관의 주도로 대규모 부실 은행들을 민간에 매각하고, 전격적인 세제 개편을 이끌어내는 등 경제 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를 흡수했다. 이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보다 앞선 것이었으며, 이웃 뉴질랜드의 데이비드 롱이 노동당 행정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 개혁의 성과는 사회 복지에 환원되어, 전임 보수 정권이 추진하지 못한 '메디케어'(Medicare, 건강보험 개편)를 도입하고, 에이즈 예방을 비롯한 각종 보건복지정책과 어보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의 화해 및 협력을 추진하는 등 사회적 성과를 이끌어냈다. 환경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당시에 유행했던 무분별한 댐과 (수력)발전소 건설을 저지했다. 국제적으로는 남태평양에서 자행된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던 이웃 뉴질랜드를 도왔으나, 국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국 내 미군 주둔 부대의 철수 요구를 무시하고 '협력 강화'를 명분으로 잔류시켰다.
4. 1. 연방 하원의원 (1980-1992)
1980년 총선에서 빅토리아주 멜버른 윌스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의회에 입성하자마자 호크는 빌 헤이든 노동당 당수에 의해 산업 관계 담당 그림자 내각으로 임명되었다.[49]1980년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후, 헤이든은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노동당 의원들의 비판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헤이든은 1982년 7월 16일 지도부 경선을 실시했는데, 이는 승리한다면 다음 총선까지 노동당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0] 호크는 경선에서 헤이든에게 도전하기로 결정했지만, 헤이든은 5표 차이로 그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가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의구심을 불식시키기에는 너무나 미미했다.[51] 패배에도 불구하고 호크는 배후에서 지도부 교체를 위한 활동을 더욱 본격화했는데, 여론조사는 계속해서 호크가 헤이든과 맬컴 프레이저 총리보다 훨씬 더 인기 있는 대중적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1982년 12월 빅토리아주 플린더스 보궐선거에서 노동당이 예상치 못한 부진을 겪으면서 헤이든은 더욱 약해졌다. 이는 현역 의원이자 자유당 전 부당수 필립 린치의 사임으로 인해 발생했다. 노동당은 해당 선거구를 차지하기 위해 5.5%의 지지율 변화가 필요했고 언론은 노동당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3%의 지지율 변화만 달성했다.[52]
그레이엄 리차드슨과 배리 언스워스와 같은 노동당 실세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헤이든에서 호크로 충성을 바꿨다.[52] 더욱 중요한 것은 헤이든의 끈끈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인 노동당 상원 원내대표 존 버튼이 호크가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헤이든보다 더 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에 헤이든은 자신의 직책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버튼의 변절은 헤이든이 노동당 당수직을 사임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53] 플린더스 보궐선거 결과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83년 2월 3일, 헤이든은 노동당 당수직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호크는 2월 8일 무투표로 당수로 선출되었고,[2] 그 과정에서 야당 당수가 되었다.[53]
같은 날 아침 지도부 교체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된 맬컴 프레이저는 호크가 노동당 당수직을 맡은 날과 같은 날인 1983년 3월 5일 조기 총선을 선포하여 노동당의 지도부 교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54] 그러나 노동당이 지도부 교체를 발표하기 전에 총독으로부터 선거를 확정받지는 못했다.
1983년 총선에서 호크는 노동당을 압승으로 이끌었고, 24석의 의석 변화를 달성하여 7년간의 자유당 집권을 종식시켰다. 호크가 노동당 당수가 된 것과 동시에 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에, 그는 야당 당수로서 의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고, 짧은 야당 당수 시절 전체를 승리로 이끈 선거 운동에 보냈다.[55]
4. 2.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1983-1991)
1983년 3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온 보수 정권을 끝내고 밥 호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로 취임하였다. 취임과 함께 그의 행정부는 침체되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에 새로운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다. 노동당의 전통적 정책 기조와 함께, 폴 키팅 재무장관의 주도로 대규모 부실 은행들을 민간에 매각하고, 전격적인 세제 개편을 이끌어내는 등 경제 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을 흡수했다. 이러한 정책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보다 앞선 것이었으며, 이웃 뉴질랜드의 데이비드 롱이 노동당 행정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48][49][50][51][52][53][54][55]경제 개혁으로 얻은 이득은 곧바로 사회 복지에 환원되어, 전임 보수 정권이 추진하지 못한 '메디케어'(Medicare, 건강보험 개편)를 도입했다.[74] 에이즈 예방을 비롯한 각종 보건복지정책과 더불어 어보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의 화해 및 협력을 추진했다. 환경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당시에 유행했던 무분별한 댐과 (수력)발전소 건설들을 저지시켰다.
국제적으로는 남태평양에서 자행된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던 이웃 뉴질랜드를 도왔으나, 국내의 많은 반발에도 불구, 자국 내 미군 주둔 부대의 철수 요구를 무시하고 '협력 강화'를 명분으로 잔류하도록 조치했다.[2]
4. 2. 1. 경제 정책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압승을 거두었고, 7년간의 자유당 집권은 종식되었다. 호크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보수 정권을 끝내고, 경제 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들을 흡수한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이는 빌 클린턴의 미국과 토니 블레어의 영국보다 앞선 것이었으며, 이웃 뉴질랜드의 데이비드 롱이 노동당 행정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48][49][50][51][52][53][54][55]호크와 그의 재무장관 폴 키팅(Paul Keating)은 1983년 취임 한 달 후 "국가 경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경제 변화를 감독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이 회담에는 기업 및 산업 지도자들과 정치인, 노동 조합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3일간의 정상회담은 전국적인 경제 전략의 만장일치 채택으로 이어져 광범위한 개혁을 위한 충분한 정치적 자본을 창출했다.[67]
호크 정부는 호주 달러의 자유화를 단행하고, 외국계 은행의 호주 내 운영을 금지하는 규칙을 폐지했으며, 보호 무역 관세 제도를 해체하고, 여러 공공 부문 산업을 민영화했고, 적자 산업의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으며, 국영 연방은행(Commonwealth Bank)의 일부를 매각했다.[68]
세금 제도 또한 크게 개혁되어 소득세율이 인하되고, 근로복지세와 자본 이득세가 도입되었다. 폴 켈리에 따르면 1985년 세금 정상회담의 "주요 패자"인 기업계에 대한 이러한 부담을 부분적으로 상쇄한 것은 키팅이 주장한 완전한 배당소득 귀속제도(dividend imputation)의 도입이었다.[70] 이 패키지의 일환으로 학교에 대한 자금 지원도 상당히 증가했고, 학생들이 더 오래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이 제공되었다. 호크 정부 초기에 10명 중 3명이었던 호주 어린이의 학교 졸업률은 1991년 정부 종료 시점에는 10명 중 7명으로 증가했다. 모든 복지 혜택 전반에 걸쳐 "가장 불우한 수혜자에게" 지원을 제공하는 데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71]
전 호주노총(ACTU) 회장 출신인 호크는 호주 산업 관계 시스템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장관 동료들과 호주노총 서기 빌 켈티와 긴밀히 협력하여 1983년 노동조합과 협상을 통해 물가 및 소득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노동조합이 임금 인상 요구를 제한하는 대신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임금을 증가시키도록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메디케어와 같은 새로운 사회 프로그램을 설립하는 것도 포함되었다.[84]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실질 임금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러한 개혁과 인플레이션 감소로 인해 호주 노동자들의 사회적 임금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주장했다.[88]
4. 2. 2. 사회 정책
호크 정부는 경제 개혁으로 얻은 이익을 사회 복지에 환원하여 여러 사회 정책에서 성과를 냈다. 전임 보수 정권이 추진하지 못한 '메디케어'(Medicare, 건강보험 개편)를 도입하여 1983년부터 1989년까지 호주에 보편적 의료를 영구적으로 확립했다.[74] 또한, 보조금을 받는 어린이집 수를 두 배로 늘리고, 직업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시작했으며, 학교 잔류율을 크게 높였다.[74][75] 이와 함께 보조금이 지원되는 가정 간호 서비스를 만들고, 복지 시스템의 빈곤 함정을 제거했으며, 노령 연금의 실질 가치를 높였다. 1인 실업 수당의 6개월 단위 지수화를 재도입하고, 가족 소득 보충금(Family Income Supplement)으로 알려진 광범위한 유급 가족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74] 1980년대 가족, 환자, 편부모, 미망인, 장애인, 참전용사에게 배정된 정부 총 지출 비중은 이전 프레이저 정부와 휘틀럼 정부보다 훨씬 높았다.[74]1984년 호크 정부는 직장 내 성차별을 없앤 1984년 성차별 금지법(Sex Discrimination Act 1984)을 제정했다.[76] 에이즈 예방을 비롯한 각종 보건복지정책과 더불어 어보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의 화해 및 협력을 추진했다.[78][79] 1989년에는 고등교육 기여 제도(Higher Education Contributions Scheme, HECS)를 설립하여 대학교 학비를 점진적으로 재도입했다.[77] 초기 HECS에서는 모든 대학생에게 1,800달러의 수수료가 부과되었고, 연방 정부가 나머지 금액을 지불했다. 학생은 이 HECS 금액의 지불을 연기하고, 소득이 특정 수준을 초과할 때 세금 시스템을 통해 채무를 상환할 수 있었다. 고등교육대학(Colleges of Advanced Education)이 여러 방식으로 대학 부문에 진입했고, 이를 통해 대학 정원을 확장할 수 있었다. 호크 정부 초기에는 10명 중 3명이었던 호주 어린이의 학교 졸업률은 1991년 정부 종료 시점에는 10명 중 7명으로 증가했다.[71]
4. 2. 3. 환경 정책
호크 정부는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환경 정책 결정을 내렸다. 1983년 호크는 이 문제에 대한 거센 항의에 따라 타즈매니아의 프랭클린 댐(Franklin Dam) 건설을 직접 거부했다.[80] 또한 1987년 퀸즐랜드 습윤 열대지역(Wet Tropics of Queensland)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여 그곳의 산림 벌채를 막았다. 호크는 나중에 그레이엄 리처드슨을 환경 장관으로 임명하여 환경 정당의 2순위 지지 확보라는 임무를 맡겼는데, 리처드슨은 이것이 1990년 선거에서 정부의 근소한 재선의 주요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81] 정부의 네 번째 임기 동안 호크는 직접 호주 대표단을 이끌고 남극 조약 환경 보호 의정서(Protocol on Environmental Protection to the Antarctic Treaty)의 변경을 확보하여, 최소 2048년까지 남극 내 광물 시추를 전면 금지하는 것을 보장했다.[82] 호크는 나중에 남극 시추 금지가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고 주장했다.[83]4. 2. 4. 외교 정책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압승을 거두었고, 7년간의 자유당 집권은 종식되었다. 호크는 보수 연립 정권을 끝내고 총리로 취임하였다. 국제적으로 호크 정부는 남태평양에서 자행된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던 이웃 뉴질랜드를 도왔다. 그러나 국내의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국 내 미군 주둔 부대의 철수 요구를 무시하고 '협력 강화'를 명분으로 잔류하도록 조치했다.[2]4. 2. 5. 당내 갈등과 퇴진
빌 헤이든은 1982년 7월 16일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당내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도부 경선을 실시했다. 밥 호크는 이에 도전했지만, 헤이든은 5표 차이로 호크를 누르고 당수직을 유지했다.[50][51] 그러나 이 근소한 승리는 헤이든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론조사에서 호크는 헤이든과 맬컴 프레이저 총리보다 더 인기 있는 인물로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1982년 12월 플린더스 보궐선거에서 노동당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면서 헤이든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52]그레이엄 리차드슨과 배리 언스워스와 같은 노동당 실세들은 헤이든에서 호크로 지지를 공개적으로 바꿨다.[52] 더욱 중요한 것은 헤이든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이었던 존 버튼 상원 원내대표가 호크가 헤이든보다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53] 결국 헤이든은 1983년 2월 3일 노동당 당수직 사임을 발표했고, 호크는 2월 8일 무투표로 당수로 선출되어 야당 당수가 되었다.[2][53] 같은 날, 프레이저 총리는 조기 총선을 선포했지만, 노동당의 지도부 교체가 발표되기 전에 총독으로부터 선거 확정을 받지는 못했다.[54]
5. 퇴임 이후
하원을 떠난 후 호크는 여러 이사직과 컨설팅 직책을 맡으며 사업계에 진출하여 상당한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폴 키팅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노동당과의 공개적인 관계를 피하며 후임자의 그림자에 가리지 않으려 했다.[112] 1996년 선거에서 존 하워드 정부의 당선 이후, 그는 노동당과 함께 다시 공개적인 선거 운동에 복귀하여 정기적으로 선거 출범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자신을 "가장 좋아하는 총리"라고 자랑했던 호크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으며 1999년 공화국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113][114]
2004년 2월 27일에는 대한민국 참여정부 1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했으며, 당시 탄핵 직전의 노무현 대통령과 장시간 동안 회담하였다. 주간지 한겨레21 기사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밥 호크 당의장의 재임 시절 업적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 열린우리당의 이후 행보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171]
2007년 선거를 앞두고 호크는 케빈 러드를 지원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호주 전역의 많은 선거 사무소 개소식에서 연설하고 여러 선거 광고에 출연했다. 워크초이스에 반대하는 선거 운동뿐만 아니라 호크는 존 하워드의 재무장관 재임 기록을 비난하며 "모든 경제학자와 국제 금융기관의 판단은 노동조합 운동과의 완전한 협력을 통해 내 정부가 실시한 구조조정 개혁이 오늘날 호주 경제의 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117] 2008년 2월 러드의 승리 후, 호크는 전 총리 고프 휘틀럼, 말콤 프레이저, 폴 키팅과 함께 의사당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피랍 세대에 대한 사과를 목격했다.[118]
2009년, 호크는 남호주 대학교에 무슬림과 비무슬림 상호 이해 센터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종교 간 대화는 호크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며, 그는 ''애들레이드 리뷰''에서 "세계가 직면한 큰 잠재적 위험 중 하나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확신한다. 광신자들은 이슬람이 무엇인지 잘못 해석했다. 그들은 이슬람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119]
2016년, 앤드류 덴턴의 Better Off Dead 팟캐스트에 참여한 후 호크는 자발적 안락사 합법화 요구에 동참했다.[120] 호크는 문제 해결에 대한 정치적 의지 부족을 '터무니없다'고 규정했다. 그는 그러한 끔찍한 의료 상황이 발생할 경우 아내 블랑쉬와 그러한 합의를 맺었다고 밝혔다.[121] 그는 또한 원자력과 호주에 대한 국제 사용후핵연료 수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이것이 호주에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122][123]
2018년 12월 말, 호크는 "건강이 매우 나쁘다"고 밝혔다. 다가오는 2019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의 승리를 예측하면서 호크는 "당의 성공을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124] 5월 선거가 있던 달에 그는 폴 키팅과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노동당의 경제 계획을 지지하고 자유당을 "경제 개혁 의제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쇼튼의 노동당은 우리 시대의 주요 과제인 인간이 유발한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경제를 현대화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정부 당"이라고 말했다. 이는 1991년 이후 두 사람이 발표한 최초의 공동 기자 회견이었다.[125]
2022년 3월,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자이자 정치 역사가인 트로이 브램스턴은 호크에 관한 허가받지 않은 전기를 쓴 ''밥 호크: 악마와 운명''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호크는 브램스턴에게 이전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개인 서류에 대한 완전한 접근 권한을 부여하고 책을 위해 일련의 인터뷰를 허락했다. 브램스턴은 호크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한 사람이었다. 호주와 국제 기록 보관소와 100명 이상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결정판"으로 여겨지며 오스트레일리아 정치 서적 상을 후보로 지명되었다.[126]
2019년 5월 18일 투개표를 앞둔 2019년 호주 총선에서도 노동당 지지 호소를 했지만, 이틀 전인 5월 16일, 선거 이틀 전 호크는 노스브리지 자택에서 짧은 병환 끝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7][128] 그의 가족은 5월 27일 맥쿼리 파크 묘지 및 화장장에서 비공개 화장을 했고, 그곳에 안치되었다.[129] 6월 14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국가 추모식이 거행되었으며, 크레이그 엠머슨이 사회를 맡고 킴 비즐리가 조사를 읽었으며 폴 키팅, 줄리아 길라드, 빌 켈티, 로스 가르노, 현직 총리 스콧 모리슨, 야당 대표 앤서니 앨버니즈 등이 연설했다.[130]
정계 은퇴 후에도 최근까지 정치에 계속 관여했다. 경마가 취미였으며, 총리 퇴임 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홋카이도의 목장을 방문하거나, 1992년에는 TV 도쿄(テレビ東京)의 ‘토요 경마 중계(土曜競馬中継)’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2003년 11월, 릿쿄 대학교(立教大学)에서 명예 교수 학위를 받았다.
6. 한국과의 관계
2004년 2월 27일, 밥 호크는 대한민국 참여정부 1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했으며, 당시 탄핵 직전의 노무현 대통령과 장시간 회담을 가졌다. 한겨레21 기사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밥 호크 당 의장의 재임 시절 업적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이는 열린우리당의 이후 행보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71]
7. 유산 및 평가
2010년 7월 18일, 호주 텐 네트워크에서 리처드 록스버그(Richard Roxburgh)가 주인공을 맡은 전기 텔레비전 영화 ''호크''가 초연되었다. 레이철 블레이크(Rachael Blake)와 펠릭스 윌리엄슨(Felix Williamson)은 각각 헤이즐 호크와 폴 키팅을 연기했다.[141][142] 록스버그는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의 2020년 에피소드 "테라 눌리우스"에서 호크 역을 다시 맡았다.[143]
보더타운의 밥 호크 갤러리는 그의 생애를 기리는 기념품을 전시하였으며, 2002년 호크에 의해 개관되었다.[144] 호크가 유년 시절을 보낸 보더타운의 호크 하우스는 2021년 호주 정부가 매입하여 숙박 및 행사 공간으로 2024년 5월 개장했다.[144][145] 그 마을의 시민 센터에는 호크의 청동 흉상이 있다.[144]
2020년 12월, 서호주 정부는 호크의 어린 시절 집인 웨스트 리드빌의 집을 매입하여 주 자산으로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해당 부동산은 주 유산 등록부에 등재 여부도 평가받을 예정이다.[146]
호주 정부는 2019년 7월, 존 모나쉬 장군 재단을 통해 새로운 연례 장학금인 밥 호크 존 모나쉬 장학금을 설립하기 위해 500만호주 달러를 약속했다.[145] 호크의 이름을 딴 서비아코, 서호주의 고등학교인 밥 호크 칼리지는 2020년 2월 개교했다.[147]
2020년 3월, 호주 선거위원회는 호크를 기리는 이름의 새로운 호주 하원 선거구를 만들 것이라고 발표했다. 호크 선거구는 2022년 연방 선거에서 처음으로 경합을 벌였으며, 호크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대표했던 윌스 선거구 근처, 빅토리아주에 위치해 있다.[148]
8.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80년 선거 | 하원의원 (윌스 선거구) | 32대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65.1% | 42,815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
1983년 선거 | 하원의원 (윌스 선거구) | 33대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67.6% | 45,571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84년 선거 | 하원의원 (윌스 선거구) | 34대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66.5% | 38,846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87년 선거 | 하원의원 (윌스 선거구) | 35대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61.8% | 35,849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90년 선거 | 하원의원 (윌스 선거구) | 36대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 48.7% | 32,596표 | 57.9% | 38,708표 | 1위 |
9. 수상
훈장 | ||||||
---|---|---|---|---|---|---|
} (1979년): "노동조합 및 노사 관계에 대한 공로"[149] |
기타 수상 |
---|
명예 회원 |
---|
명예 박사 학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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