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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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순희는 190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3·1 운동 참여, 러시아에서의 교육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에서 외교, 선전,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다 1979년 사망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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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순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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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방순희 |
출생일 | 1904년 1월 30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부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
사망일 | 1979년 5월 4일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온양 |
학력 | 정신여학교 |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자 |
종교 | 개신교 |
배우자 | 사별 부군 현익철(玄益哲) 재혼 부군 김관오(金冠五) |
정당 | 무소속 |
부모 | 아버지 방도경(方道京) 어머니 김복녀(金福女) |
웹사이트 | 국가보훈처 - 방순희 |
경력 | |
주요 경력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 |
2. 생애
방순희는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정신여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기도 했다.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귀국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현익철과 결혼하였으나 남목청 사건으로 사별하였다.
임시정부에서 방순희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으며, 소련과의 외교 활동, 한국독립당 활동,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으로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량 결집에 힘썼다. 또한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선전 및 교육 활동에도 기여하였다. 독립운동 동지인 김관오와 재혼하여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며 조국 독립에 헌신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방순희는 1904년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부 남산동 163번지에서 온양 방씨 아버지 방도경(方道京)과 어머니 김복녀(金福女)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10살 어린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자, 1911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현지 한인 기독교회가 운영하던 중등교육기관인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에 진학하여 중학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아버지로부터 고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와 한인 동포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학문을 더 배우고자 1918년 15세의 나이로 조국에 돌아와 당시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정신여학교 재학 중에는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지냈다.
정신여학교 재학 시절 3·1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 4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1923년 제15회 졸업생으로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2. 2. 교육 및 사회 활동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 신한촌의 백산소학교에서 2년간 한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 당국이 민족 교육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연해주 일대의 한인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어 더 이상 교육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1925년 8월 24일 고국으로 돌아온 방순희는 러시아 영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했으나 약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서울 체부동에 머물며 활동 방향을 모색하다가 사회주의 계열 단체인 북풍회 등에 가입하여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 1925년 10월 31일에는 서울 제동에서 열린 경성청년회 월례회의에 북풍회 여성 단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한편, 재러 한인 사회 대표 자격으로 정동의 러시아 영사관 개관식에 참석했을 때,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색 옷을 입어 주목을 받았다. 이 일로 인해 치안유지법이 발효된 상황에서 일제의 요주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또한, 종로경찰서 고등계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에게 의용대장 임명장을 전달했다는 혐의로 방순희를 체포하여 이틀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입국한 목적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기도 했다.
당시 민족주의 진영이 활기를 띠고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민족협동전선론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북풍회는 1926년 4월 14일 결성된 정우회(正友會)에 합류하며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방순희는 분열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을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량을 모으고, 독립운동계의 좌우합작 운동에도 참여하여 독립 완성 및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해 힘썼다.
특히 방순희는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데 그치지 말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 소련 전문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주중 소련 대사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2. 3.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
여성 운동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방순희는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1년, 만주에서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틈을 타 탈출한 독립운동가 현익철(玄益哲, 1890~1938)과 결혼했다.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 프랑스 조계 일대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본 경찰의 검거 활동이 거세지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피난길에 올랐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가흥(嘉興), 남경(南京) 등지로 흩어졌고, 1938년에는 후난성 창사(長沙)에 임시정부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 5월 6일, 창사 남목청(楠木廳)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비극적인 '남목청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3당의 통합 회의가 열리던 중 이운한(李雲漢)이 권총을 난사하여 김구가 중상을 입고, 방순희의 남편 현익철이 사망하는 사건이었다.
갑작스럽게 남편과 사별한 슬픔을 딛고, 방순희는 193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입법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함경남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새로 선출된 18명을 포함한 재적의원 33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방순희는 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 의회에 참여하여 1940년도 임시정부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3년 간 독립운동의 총역량을 집중시킬 조직, 군사, 외교, 선전, 재정 등 5개 분야의 독립운동 방략을 수립하는 데 기여하며 독립을 준비했다.
2. 4. 외교 활동과 한국독립당 활동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여성들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중국과 연계한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조국 독립과 민족해방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방순희는 이 시기 주미대표부대표권 문제, 광복군 창설, 대일·대독 선전포고 및 조소앙의 건국강령 채택 문제 등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입법 활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였다.193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에 들어갔다. 각 정부를 상대로 대표를 파견했을 때, 그는 러시아 사정에 능통하고 러시아어가 유창했기 때문에 대(對) 소련 대표로 선임되어 중경(重慶)에 있는 소련 대사관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 무렵 방순희는 한국독립당과 임시의정원에서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의 동지인 김관오(金冠五)와 재혼하는 한편,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 제5구 중 제1구에 소속되어 다가오는 독립에 대비하여 국가 건설을 준비하며 활약하였다. 1941년 5월 8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에는 홍진·최동오·이중만·채형세·김현구 등과 함께 토교(土橋) 선출대표로 출석하여 활약하였다. 본회의에서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합법적으로 한국독립당의 주의(主義)와 정강(政綱) 정책(政策)을 실현할 의(義)와 권리(權利)가 있도록 규정하여 한국독립당의 이당치국(以黨治國)과 일당단정(一黨專政)의 원칙을 실행할 것”과 1940년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결된 광복군 공약 3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수정해서 정부에 넘겨 빠른 기일 안에 분명하게 법령을 공포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안건을 검토, 새로운 안을 마련하고 이를 결의하였다.
2. 5.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여성의원
1942년 10월 25일, 중경시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건물에서 열린 제34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방순희는 19명의 의원 중 한 명으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가장 많은 의원이 참여한 회의로 기록된다. 회의는 '1.국가독립 2. 민족자주 3. 국권탈취'라는 임시약헌의 정신에 따라 개최되었으며, 주석 김구는 이 자리에서 여러 단체와 당파의 대립을 극복하고 임시의정원으로 완전히 통일되었음을 선언했다.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이념과 파벌을 넘어 한국 독립운동계가 통합을 이룬 역사적인 자리였다. 이 회의에서 방순희의 남편인 김관오 역시 새로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당시 40여 명의 의원 중 유일한 여성 의원이었던 방순희에 대해 『우리통신』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사십 여 명 의원 중 여자의원은 오직 방순희 여사 일인 뿐이니 만록총중(萬綠叢中)에 일점 홍(一點紅)이다. 부녀가 아직도 억울한 경경에 있는 조선 사회이므로 방 여사의 책임은 더욱 크다. 고군분투의 고독감도 있을 것이나 일천만 여성의 후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용기도 날 것이다."
방순희는 1942년 한국독립당 충칭구 당부 간사로 선임되어 남편 김관오와 함께 한국독립당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동지이자 부부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1943년 3월 1일 오전 10시, 충칭에 거주하는 교민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신생활운동복무소(新生活運動服務所) 대강당에서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선앙의 개회사와 여러 인사들의 연설에 이어, 한국청년회 대표 안원생과 한국애국부인회 대표 방순희의 치사가 있었다. 방순희는 치사를 통해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더욱 단결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을 다짐하며, 민주 우방의 적극적인 원조와 협력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같은 해 1943년 8월 19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생계부 생활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 6.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지원
1940년대 들어 다양한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여 민족통일전선 구축에 앞장섰다. 한국광복진선에 참여한 여성들은 항일 역량을 강화하고 조국 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강력한 여성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오랫동안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마침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면서 여성 조직 결성이 본격화되었고, 1940년 6월 16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었다.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 광복 운동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한국 여성들의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일깨워 혁명에 기여함으로써 조국 광복을 앞당길 것을 선언하였다. 이때 방순희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통일전선운동을 이끌었다. 이 외에도 오광심(재무부주임 겸임), 정정화(조직부주임 겸임), 김효숙(훈련부주임 겸임), 김정숙(선전부주임 겸임) 등이 집행위원으로, 최형록, 최소정, 이순승 등이 감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동맹은 한국 여성이 혁명가임을 자처하며 조국 독립과 세계 평화 실현에 힘쓰고, 중국 및 전 세계 피압박 민족 여성들과 연대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의 활동을 바탕으로, 1943년 2월 23일에는 각 정파 여성 50여 명이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 모여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다. 이는 3·1 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결성되었던 애국부인회의 활동을 계승하고, 남녀평등의 권리 신장을 통해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을 지원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 해방 운동의 주체이자 민주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통합과 조국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이 재건 대회에서 김순애가 주석으로, 방순희가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재건된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전 민족 해방 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자”는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여성 동포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또한 의연금 모금, 부상자 간호, 광복군 위문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해외 한인 여성 단체들과 연계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 독립과 민족 해방을 완성하고, 남녀가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2. 6. 1. 자유한인대회 개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논의가 미국 워싱턴 회의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중경에 전해지자, 현지 동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1] 이에 대응하여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은 1943년 5월 10일 오후 2시, 중경의 한 장소에서 300여 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었다.[1] 이 대회는 전후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1]대회는 엄숙하면서도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총주석 홍진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1] 방순희를 비롯하여 조소앙, 손두환, 박건웅, 류월파, 성현원 등이 연설자로 나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 의지를 강조했다.[1] 대회에서는 즉석에서 선언문이 채택되었고, 같은 날짜로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보내는 전문'이 발송되었다.[1] 또한,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어떠한 형태의 외세 간섭도 반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발표되었다.[1]
이 대회는 광복 운동 진영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전후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외세 간섭 배격이라는 한인 사회의 강력한 의지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
2. 7. 임시정부 선전부장 취임과 교육활동
1944년 6월 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선전부 선전과 과원으로 선임되어 안원생 선전부장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방송을 진행하며 반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포로 중 한인 사병들을 위문하고, 위문 금품을 모아 전선에서 활동하는 항일 군인들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는 데에도 힘썼다.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위안부 피해 여성 10여 명이 충칭 임시정부로 인계되자, 이들의 교육을 전담하였다. 일제의 침략 전쟁 중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이 여성들은 임시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광복군과 함께 1946년 3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내선전 연락원으로 선발되어 선발대로 귀국할 때까지 조국 광복을 위한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하였다.[2]
3.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방순희는 남편 김관오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 임명되어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각지에서 선무공작을 펼쳤다. 임시정부 요인 1진과 2진이 귀국한 후, 중국에 남은 요인 및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로 이동했다.
1946년 4월 26일, 방순희 가족은 이범석이 이끄는 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미군이 제공한 군함 LST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인천항 도착 예정이었으나 당시 콜레라 유행으로 부산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에야 상륙 수속을 마치고 인천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환국 기반을 마련하고자 전력을 다했지만, 광복된 조국은 극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48년 4월 14일 한미호텔에서 열린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직 개편에 참여하여, 실행 조직 중 하나인 부인부를 맡아 여성문제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하면서 한국독립당은 큰 정치적 위기에 빠졌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민족 통일의 염원은 좌절되었다. 6.25 전쟁 당시 육군사단장과 유격사령관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국군 발전에 기여한 남편 김관오와는 1965년 사별하였다. 이후 방순희는 1979년 5월 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3]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참조
[1]
뉴스
5월의 독립운동가에 방순희 선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적 승인 이끌어 내
http://news1.kr/arti[...]
뉴스1
2014-04-29
[2]
뉴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홍일점 여장부 “방순희”
http://www.suwon.com[...]
수원일보
2012-05-16
[3]
뉴스
獨立(독립)유공方順熙(방순희)여사
http://newslibrary.n[...]
197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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