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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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양 방씨는 중국 허난성에서 기원한 성씨로, 당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온 방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방운 등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에는 방순, 방유령, 방호의, 방덕룡, 방우정 등이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특히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인물들이 많다. 온양 방씨는 12세손에서 7개 파로 분파되었으며, 판서공파가 대종을 이룬다. 주요 집성촌으로는 충청남도 아산시, 경상남도 합천군, 대구광역시 달성군 등이 있으며, 2015년에는 약 8만 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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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방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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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온양 방씨 |
한자 표기 | 溫陽 方氏 |
유형 | 씨족 |
국가 | 한국 |
지역 | 아산시 |
창시자 | ja |
웹사이트 | 온양 방씨 종친회 |
설립일 | ja에 의해 설립 |
지역 및 분포 | |
관향 |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
집성촌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경기도 성남시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경상북도 영천시 경상남도 합천군 평안북도 정주시 함경북도 부령군 |
인물 | |
주요 인물 | 방민아 성준 방용국 성훈 방신봉 방수현 방정환 방예담 방희진 방우선 방신우 방효유 방순 방강 방유령 방윤 방호의 방덕룡 방진 방양 방우정 숙의 방씨 방응모 방한민 방순희 방준경 방종현 방순원 방만수 방일영 방성출 방우영 방일홍 방열 방용석 방상훈 방영민 방영주 방문규 방효충 방기선 방성준 |
역사 | |
시조 | ja |
중시조 | 방운(方雲) |
기타 | |
2015년 인구 | 80,445명 |
2. 기원
방(方)씨는 중국 허난성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선왕 때 경사(卿士)를 지낸 방숙(方叔)의 후예이다. 염제 신농씨(神農氏)의 11세손이자 유망황제(楡罔皇帝)의 장남인 방뢰(方雷)가 하남성(河南省) 방산(方山) 지방을 봉토(封土)로 받으며 방(方) 성(姓)의 비조(鼻祖)가 되었다.[7]
시조 '''방지'''(方智)는 방지/方智중국어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669년(당 총장 2년) 나당동맹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신라에 동래(東來)하여 설총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 현 경상북도 상주시)에 정착하였다.[9] 시조 방지의 묘(墓)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 있다.
방뢰(方雷)의 134세손인 '''방지'''(方智)는 당나라 한림학사로서 669년 나당동맹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동래하였다.[7]
'''방운'''(方雲)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좌복야(左僕射)에 올랐으며,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공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7]
3. 역사
중시조 '''방운'''(方雲)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지성사(知省事)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993년(성종 12)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공훈을 세워 배방산 일대를 봉토(封土)받고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10]
2세 방중탁(方仲鐸)은 목종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3세 방휴(方休)가 현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6세 방유(方裕)는 숙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 7세 방재(方宰)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9세 방희진(方曦進)이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면서 고려조에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11]
12세 '''방우선'''(方于宣)은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國子試)에 장원급제하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12]
15세 방순(方恂)이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교시사 등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이집(李集)과 더불어 숯골에 은둔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13] 방순의 손자 방강(方綱)이 1447년(세종 2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성종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20세 '''방유령'''(方有寧)이 1489년(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議),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1520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계림군(雞林君) 방윤(方輪)[14]의 아들 '''방호의'''(方好義)는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손자 봉산군 이돈(鳳山君 李敦)의 딸과 혼인하여 1514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를 거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1554년(명종9년)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방호의의 손자 '''방덕룡'''(方德龍)은 1588년(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고 낙안군수로 재직할 때 이순신의 선봉으로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여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처가도 방(方)씨였으며,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방우정(方禹鼎)은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서정일기(西征日記)》를 저술하였다.
3. 1. 고려 시대
시조 '''방지'''(方智)는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669년(당 총장 2년) 나당동맹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신라에 동래(東來)하여 설총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 현 경상북도 상주시)에 정착하였다.[9]
중시조 '''방운'''(方雲)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993년(성종 12)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공훈을 세워 배방산 일대를 봉토(封土)받고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10]
2세 방중탁(方仲鐸)은 목종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3세 방휴(方休)는 현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6세 방유(方裕)는 숙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 7세 방재(方宰)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9세 방희진(方曦進)이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면서 고려조에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11]
12세 '''방우선'''(方于宣)은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國子試)에 장원급제하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12]
15세 방순(方恂)은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교시사 등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이집(李集)과 더불어 숯골에 은둔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13]
3. 2. 조선 시대
고려 개국 공신인 중시조 방운(方雲)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고,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공훈을 세워 배방산(拜方山) 일대를 봉토(封土)받고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10] 2세 방중탁(方仲鐸)이 목종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고, 3세 방휴(方休)가 현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6세 방유(方裕)는 숙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11] 7세 방재(方宰)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9세 방희진(方曦進)이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면서 고려조에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11] 12세 방우선(方于宣)은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國子試)에 장원급제하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12]
15세 방순(方恂)이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교시사 등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이집(李集)과 더불어 숯골에 은둔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13] 방순의 손자 방강(方綱)이 1447년(세종 2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성종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20세 방유령(方有寧)이 1489년(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議),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1520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계림군(雞林君) 방윤(方輪)[14]의 아들 방호의(方好義)는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손자 봉산군 이돈(鳳山君 李敦)의 딸과 혼인하여 1514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를 거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1554년(명종9년)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방호의의 손자 방덕룡은 1588년(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고 낙안군수로 재직할 때 이순신의 선봉으로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여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처가도 방(方)씨였으며,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방우정(方禹鼎)은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서정일기(西征日記)》를 저술하였다.
4. 분파
온양 방씨는 12세손 방우선(方于宣)과 그의 아우 방우번(方于蕃), 목사(牧師) 방득세(方得世)의 아들 대(代)인 13세손에서 7파로 분파되었다.[12]
- 12세 방우선(方于宣)
- * 13세 장암공(莊岩公) 방서(方曙) - 판서공파(判書公派)
- * 13세 간의대부(諫議大夫) 방현(方玄) - 간의공파(諫議公派)
- * 13세 안렴사(按廉使) 방훤(方暄) -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 * 13세 군위군(軍威君) 방적(方迪) -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 군위 방씨(軍威方氏)
- 12세 방우번(方于蕃)
- * 13세 방가달(方可達) -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12세 방득세(方得世)
- * 13세 평장사(平章事) 방신제(方臣悌) -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 * 13세 방신우(方臣佑) - 상락부원군공파(上洛府院君派)[15]
7파 중 판도판서공파가 온양 방씨의 대종으로서 주축을 이룬다. 상락부원군 방신우(臣祐)는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평장정사(平章政事) 등의 요직을 지냈고, 원나라를 왕래하며 외교에 공헌하였다. 광록대부파의 파조 방신제(方臣悌)도 원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를 지내고 중국에 정착하였다. 명나라의 유학자 방효유(方孝孺)는 방신제의 5대손이다.[16] 중국의 방씨원류역사연구회, 방씨전족통보이사회(方氏全族統譜理事會)와 한국의 온양방씨중앙종친회는 인적·물적 교류를 하고 있다.
방씨는 온양(溫陽),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온양으로 단일화되고 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서도 종전의 상주·신창·군위 방씨도 본관을 온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5. 인물
온양 방씨의 인물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이들이 있다.
- 방휴(方休) : 방운(方雲)의 손자로, 1010년(고려 현종(顯宗) 원년) 거란(契丹)의 2차 침입 때 낭장(郎將)으로 평양성을 지켰고,[17]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때 강감찬(姜邯贊)의 지휘 아래 지채문(智蔡文)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승리했으며, 1019년에는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 방오계(方吳桂) : 1075년(고려 문종(文宗) 29년)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다.[18]
- 방유(方裕) : 고려 숙종(肅宗)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종(睿宗)조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 안렴사(按廉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했다. 사위는 정습명(鄭襲明)이다.[19]
- 방재(方宰) : 방유(裕)의 아들로, 1135년(고려 인종(仁宗) 13년) 대호군으로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방희진(方希進) : 호는 박재(博齋). 보명(譜名) 희진(曦進). 1175년(고려 명종 5년) 국자시에 급제하고 1177년에 빈공과(賓貢科)에 등과 후 양광도 관찰사를 거쳐 진현관대제학(大提學)과 상서령에 이르렀으며 숭록대부에 승품으로 올랐다.
- 방보(方甫, ? ~ 1271) : 밀성인(密城人)으로 1270년 고려 원종이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강화(講和)하기로 함에 반발해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진도 삼별초(三別抄)에 호응하여 개국병마사(改國兵馬使)로 칭하며,[20] 밀성군(密城郡)을 중심으로 영남민(嶺南民)들을 규합하여 대몽항쟁을 계속하기로 했으나, 배신자 일선(一善) 현령(縣令)에게 죽임을 당한다.[21]
- 방우선(方于宣, 1253 ~ 1321) : 1269년(고려 원종 10년) 국자시에 장원급제하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12]
- 방우번(方于蕃) :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의 동생이다. 정순대부(正順大夫) 통례원사(判通禮院事)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지제교(知制敎)를 지냈다.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과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김진(金轃,1339년생)이 외손자이다.[22]
- 방우정(方于楨) : 충선왕 3년(서기 1311년) 산신(山神) 숭상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여 충선왕에게 상소(上疏)하여 이를 금지했다.[23] 충숙왕 5년(서기 1318년) 왕명으로 한반도 남쪽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삼한통일을 위해 창건했던 3대 비보사찰(裨補寺刹)중의 하나인 경남 진해시 소재 용암사(龍巖寺) 중창(重創)을 시행하여 완공을 보았으며, 그해 11월 18일에 고려말 천태종의 원혜국사(圓慧國師)의 제자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를 맞아 약 7일 동안 성대하게 낙성(落成) 법회(法會)를 열고 왕의 수(壽)와 복을 빌었다. 그러나 이 사찰은 지금 폐찰되여 부도와 석탑만이 있다. 용암사의 중창당시 왕명으로 대장경을 보수하여 새 전당과 새 창고 안에 안치하였다.[24]
- 방신우(方臣祐, 1267 ~ 1350) : 추성돈신양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경상도 관성현(管城縣, 현 충북 영동)의 사족(士族) 출신. 1298년 충선왕조에 안평공주를 수행 원나라에 들어가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를 섬기고 벼슬이 평장원사(平章院事)에 올랐으며, 1298년 벽상삼한정광(壁上三韓正匡)이 되고, 충선왕조에 홍중희(洪重喜)의 무고를 원나라 황제에게 간하여 물리쳤으며 금자장경을 완성한 공으로 1310년 중모군(中牟君)에 올랐다. 1332년 고려에 돌아와 선흥사(禪興寺)를 수리했으며, 1342년 원나라로 들어가 이듬해 병을 얻고 1345년 경인(庚寅)년에 죽었다.[25]
- 방서(方曙, 1275 ∼ ? ) : 자(字)는 원명(源明) 시호(諡號)는 장헌(莊獻)으로 문정공(文定公) 휘 우선(于宣)의 아들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판도판서(版圖判書)직을 역임했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스승 경주(慶州)이씨 계림군(鷄林君) 이래(李來)의 부친 석탄공(石灘公) 이존오(李存吾)가 외손(外孫)이며,[26]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와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를 했던 순천(順天)김씨 김천호(金天晧)가 장인이다.[27][28][29]
- 방현(方玄) : 생몰년미상. 고려 충선왕(忠宣王)시 명경업과(明經業科) 등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간의공파 파조(派祖).
- 방훤(方暄) : 생몰년미상. 고려조 문과에 등과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 방적(方迪) : 생몰년미상. 고려 충렬왕(忠烈王)시 태상경(太常卿)을 지냈다. 군공(軍功)으로 군위군(軍威君)을 봉(封) 받았다. 태상경파 파조
- 방언휘(方彦暉) : 아버지는 휘 서(曙). 자(字)는 달가(達可) 호는 국서(菊墅)[30] 또는 독락정(獨樂亭). 고려 충혜왕조 1342년 명경업과에 등과한 후 사인(舍人)을 거쳐 밀직원직학사(密直院直學士)를 지냈으며, 충목왕(忠穆王)의 국구(國舅, 장인)로 온천부원군(溫泉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숙(敬肅)이다.[31]
- 방천봉(方天奉) : 장헌(莊獻)공 휘 서(曙)의 아들이다. 공민왕 12년(1363년) 11월, 1359년(己亥년, 공민왕 8년) 대호군(大護軍)으로 정세운(鄭世雲)과 같이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으로 녹훈됐다.[32]
- 방절(方節) : 1359년(공민왕8년) 기철(奇轍)을 제거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으로 녹훈되고, 1363년(공민왕12년) 3월에는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경성수복공신 1등공신에 책봉되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33] 그해 11월에 1359년(공민왕8년)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2등 공신(功臣)으로 녹훈됐다.
- 방순(方恂) : 초명 방득주(方得珠). 호는 만송당(晩松堂) 시호(諡號)는 문의(文毅). 방언휘(彦暉)의 아들. 1362년(공민왕 31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문과에 등과하고,[34] 1369년 좌랑(佐郞)을 거쳐, 1375년 7월에는 정몽주와 장인 윤호(尹虎) 등과 같이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어 1376년 중서사인(中書舍人) 1377년 성균관 좨주(祭酒)를 거쳐 판전교시사를 한다.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광주인(廣州人) 둔촌(遁村) 이집(李集)과 더불어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지켜 숯골에 은둔중 붙잡혀 황해도(黃海道) 금촌(金村)서 죽음을 당했다. 후손들이 시신을 찾지못해 현 성남의 수정구 태평동에 의장(衣葬)한 것을 1969년 성남시 개발로 광주시 오포면 양벌리(陽筏里)로 이장하였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순절(殉節)했으나, 아들 영화군(永華君) 휘 운실(芸實, 일휘 龍)과 손자 천(天)·용(龍)·언(彦)·택(澤)이 조선개국을 도우는 것은 막지 않았다. 부인은 조선 개국공신 파평인(坡平人) 윤호(尹虎)의 장녀와[35] 경주인(慶州人) 문정공(文靖公) 이달충(李達衷)의 차녀이고,[36] 딸은 숙녕택주(淑寧宅主)로 사위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의령인(宜寧人) 남재(南在)의 장남 남경문(南景文)이며, 외손자는 태종의 사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다.[37] 동방(同榜,1362년 문과 임인방)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문의공(文毅公)에게 보낸 시(詩) ‘방동년 생녀 희정(方同年 生女 戲呈)’이 도은집에 수록되어 있다.[38]
- 방여권(方與權) : 호조의랑(戶曹議郞)을 지냈다. 배우자는 안동(安東) 권씨(1427년 3월 사망). 변계량(卞季良,1369년생) 시문집 춘정집에 '의랑 방여권에게 드림(呈方議郞 與權)'이라는 시가 있다. 1413년(태종 13년) 의관(衣冠,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신흥세력들이 견제하여 허물을 만들어 처단하라고 간언하지만, 태종은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39]
- 방효유(方孝孺, 1357 ~ 1402) : 자(字)는 희직(希直) 희고(希古), 호는 정학(正學) 또는 손지(遜志). 명(明)나라 때 대신이자 학자, 문학가, 사상가이다. 온양방씨 18세(世). 명조(明祖) 영락제(永樂帝)에게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지키다, 10족의 멸족을 당함.
- 방유신(方有信) : 서울출신이며, 1360년경 출생. 군기시(軍器寺) 소감(少監)을 지냈으며, 1443년 세종대왕이 마련한 원로중신들의 경로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40]
- 방운실(方芸實) : 초휘 태응(台應) 一云 춘응(春應), 자(字)는 신어당(愼語堂). 문의공(文毅公) 방순(方恂)의 아들이며, 숙녕택주(淑寧宅主)의 오빠(娚)이다. 고려조 진사시에 합격하고 별장(別將)을 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41]
- 방천(方天) : 소윤(少尹) 방희우(方希佑)의 장남이다. 중랑장(中郎將) 승훈랑(承訓郎)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41]
- 방용(方龍) : 소윤(少尹) 방희우(方希佑)의 차남 회덕군(懷德君)이다. 군기시감(軍器寺監)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41]
- 방언(方彦) : 소윤(少尹) 방희우(方希佑)의 삼남이다. 검교내시부사(檢校內侍府事)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42]
- 방택(方澤) :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방유량(方有良)의 아들로, 검교밀직사사(檢校密直司事)를 역임했다. 조선 개국원종공신이다.[43]
- 방지신(方之信) : 중랑장(中郞將)으로 조선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된다.[41]
- 방장수(方長守) : 산원(散員)으로 조선의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된다.[41]
- 방강(方綱, 1400 ~ ? ) : 방순의 손자. 자는 군필(君弼), 호는 경재(敬齎). 1447년(세종 2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사성(司成)·정언(正言)·흡곡현령 사간(司諫) 이천부사(伊川府使, 강원도 이천군)를 역임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계유정난 이후 부인 순천 김씨가 김종서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성종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 방계산(方桂山) : 호군(護軍) 1455년 좌익원종3등공신(佐翼原從三等功臣)[44]
- 방계충(方繼忠) : 주부(主簿) 1455년 좌익원종3등공신(佐翼原從三等功臣),[44] 풍수학(風水學,1457년)
- 방서동(方瑞同) : 함경남도 출신 진무(鎭撫,軍官)로 이시애(李施愛)의 란을 평정한 공으로 세조조(世祖朝) 1467년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이 됨.
- 방유령(方有寧, 1460 ∼ 1529) : 자는 태화(太和), 호는 무기당(無期堂)·주탄(舟灘).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중랑장(中郞將) 방을상(乙祥)의 증손으로,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청환(淸宦)에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파직당했으나, 150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등용되었고, 1512년(중종 7)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다. 1515년 대사헌(大司諫), 1516년 대사간(大司諫), 1517년 공조참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45] 151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이조참판과 병조참판(參判)을 역임하고, 1520년(중종 15)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46]
- 방윤(方輪, 1464 ∼ 1534) : 조선 중종 때 계림군(雞林君)에 봉군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14] 두 차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추증되었다.
- 방규(方規) : 경기도 강화(江華) 교동(喬桐)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치정(致正)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끝낸 중동반정(中宗反正)에 내금위(內禁衛) 직으로 가담하여 1507년 정국원종2등공신(靖國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 됐다.
- 방순달(方順達) : 1465년경 출생, 자(字)는 백순(伯順). 종사랑(從仕郎). 개성(開城)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윤손(潤孫)이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끝낸 중종반정(中宗反正)에 학생(學生)으로 가담하여 1507년 정국원종3등공신(靖國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됐다.
- 방응두(方應斗) : 개성(開城) 출신이다. 아버지는 휘 순달(順達), 응규(應奎, 보명 繼昌)의 형. 개성 거주. 부사과(副司果). 조선의 왕실(王室) 전주이씨 종계(宗系)를 바로잡은 공으로 1591년 광국원종3등공신(光國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됐다.
- 방계창(方繼昌) : 1480년경 출생. 초휘(初諱) 응규(應圭). 자(字)는 문백(文伯). 아버지는 휘 순달(順達)이다. 아버지와 함께1507년 정국원종3등공신(靖國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 되고,[47] 뒤늦게 1549년 생원(生員) 식년시에 합격해[48] 개성에서 서울 경복궁 옆 장의동(壯義洞 : 現 종로구 경복궁 서쪽 효자동사무소 앞 창성동)으로 이거(移居) 하였다.[49] 인의(引儀)를 지냈으며 예빈시(禮賓寺) 정(正)을 추증 받았다. - 창성(昌成) 방(方)씨의 개조(開祖).
- 방호의(方好義) : 방윤(方輪)의 아들.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현손녀와 혼인하고, 1511년(중종6) 경회루에서 활쏘기 장원을 하고, 1518년 부령부사가 되었다. 1525년 전라좌수군절도사 1540년 경상병마절도사를 거쳐 1542년 충주목사를 역임했다. 1544년 경상우수군절도사시 50년후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부산 가덕도(加德島)에 성을 축조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충청수군절도사, 1549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550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554년(명종 9년)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50]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556년 청홍도병마절도사(淸洪道兵馬節度使)로서 왜구의 방어에 힘썼다.
- 방인(方寅, 1511 ~ 1573) : 경기도 강화 출신. 자(字) 원겸(元兼). 아버지는 영동(永同) 현감 휘 국형(國亨) 이고, 동생은 충무공 이순신 장인 보성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이다. 둘째 사위가 사촌 아래 동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 장수로 1598년 예교(曳橋:順天倭城)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성주인(星州人)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 충장공(忠壯公) 황세득(黃世得,1537년생)이다.[51] 명종조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은일불사(隱逸不仕) 했다.
- 방진(方震, 1514 ~ ? ) : 22세손.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22세인 1535년 제주 대정현감에 부임하였다가 이후 보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사위는 이순신 장군이다.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중매를 섰다. 21세에 결혼한 이순신은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하여 방씨 집안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며, 충청도의 재력가 집안이었던 방씨와 혼인하면서 부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의 권유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方震)으로부터 병학을 배워 3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충무공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의 활솜씨에 대한 내용이 있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이미 계집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영특한 딸이 베 짜는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선조 24년 이순신 장군의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였다.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는 대한민국 보물 제1564-8호다. 난중일기에 방필순(方必淳), 방익순(益淳)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온양 방씨 문중들과 한 집에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방진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증직되었고, 부인 남양 홍씨는 숙인(淑人)으로 증직되었다.
- 방춘정(方春禎, 1523 ~ ? ) : 경기도 여주 출신. 아버지는 통덕랑 휘 순효(舜孝). 1605년 임란시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된다.
- 방우주(方佑周, 1549 ~ ? ) : 자는 원로(元老)와 윤숙(允淑)이고 호(號)는 안분당(安分堂)이다. 영동(永同) 현감(縣監) 휘 국형(國亨)의 손자이자 진사(進士)공 휘 인(寅,1511년생)의 아들로 온양방씨 23세이다. 선조(宣祖)조 서기 1561년 명종조 사마시(司馬試) 과장에서 장원(壯元) 다툼이 생겨 합격이 취소되었으나, 1579년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 19위로 등과하시고[5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즉시 고향 강화 마니산지역에서 의병을 이르켜 남하하여, 이율곡의 문하생 의병장 조헌(趙憲)과 합세하여 왜적과 전투 하였다. 어유간만호(魚遊澗萬戶)시에는 정문부와 함께 국경인(鞠景仁)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임시 권지(權知) 동래부사를 역임하셨고 란이후 1605년 선무원종3등공신 녹권을 받고, 상부(尙州)목사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부임치 않았다.
- 방덕공(方德恭) : 평안남도 맹산(孟山) 출신.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戶曹參判) 휘 원길(元吉)이다. 1605년 첨정(僉正)으로 임란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2등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사후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와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추증(追贈 받는다.
- 방승경(方承慶, 1547 ~ ? ) : 경기도 평택 출신이다. 아버지는 개천군수 휘 윤지(允祉)이다. 선조조 1572년 내금위(內禁衛)로 재직시 별시 무과에 급제했다.[53] 임진왜란 당시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54] 임란후 통훈대부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냈다.[55]
- 방수경(方守慶, 1548 ~ ? ) 경기도 평택(平澤) 출신이다. 자(字) 응길(應吉). 아버지는 충청도병마우후(忠淸道兵馬虞候) 어모장군 휘 윤행(允行)이다. 1583년 알성시 무과에 등과하여, 목포만호(임란당시) 판관(判官) 도총도사(都摠都事)를 지냈으며, 1605년 임란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1등공신(扈聖原從一等功臣) 훈호(勳號)를 받음.
- 방준호(方俊豪) :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조의 내관(內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서하군(西河君). 광국원종2등공신(1591년) 평난원종1등공신(1591년) 호성원종2등공신(1605년) 익사3등공신(1613년, 후에 취소) 형난원종1등공신(1614년, 후에 취소) 정운원종1등공신(1614년, 후에 취소)
- 방응원(方應元, 1553 ~ ? ) : 충청남도 온양(溫陽) 출신. 자(字)는 선중(善中). 아버지는 진위장군 휘 사열(思說). 1583년 정로위(定虜衛)로 별시 무과에 등과하고 임란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1605년 부정(副正)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으로 녹훈(錄勳)된다.
- 방희윤(方希尹, 1557 ~ ? )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 아버지는 가선대부 훈련원주부 휘 훤(萱)이다. 1599년 훈련원 정(正) 당시 무과 정시(庭試)에 합격했다. 1605년 임란시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3등공신으로 녹훈(錄勳) 된다.
- 방업(方業, 1558 ~ 1627) :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증 판결사(判決事) 행 절충장군(折衝將軍) 휘 수인(壽仁, 守仁)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시 충무공 이순신을 도왔다.[56] 딸은 중종 초상화를 그렸던 어모장군 행 호군(護軍) 증 공조판서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중순군(仲順君) 이흥효(李興孝: 1537년-1593년)의 둘째 아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장(李檣)에게 시집갔으나, 신병으로 남편이 세상을 하직하자, 따라죽어 나라에서 열녀(烈女)됨을 기려 정문(旌門)을 내린다.[57]
- 방응상(方應祥, 1559 ~ ? ) : 충청남도 온양(溫陽) 출신. 아버지는 무과 훈련주부 휘 규(奎)이다. 1605년 내금위(內禁
6. 집성촌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일대는 백제 탕정군(湯井郡)이었다가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되었다.[6] 757년(경덕왕 16년)에는 탕정군으로 강등되었으나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쳐졌다.[6] 1018년(현종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되었고, 1441년(세종 23)에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6] 1896년에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가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6]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방(方)씨는 충청도 온수(溫水; 아산), 신창(新昌; 아산) 등에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6]
경상남도 합천군 적중면 상부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오설동,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읍,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부거리가 온양 방씨 집성촌이다.[6]
7. 인구
1985년에는 17,933가구에 75,290명이었다. 2000년에는 19,961가구에 64,128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에는 80,445명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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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간행물
승정원일기-고종 41년 갑진(1904) 5월 2일(경진, 양력 6월 15일) 기사
1904-06-15
[75]
간행물
승정원일기-고종 36년 기해(1899) 1월 20일(무진, 양력 3월 1일) 기사
1899-03-01
[76]
뉴스
宮廷錄事
황성신문
1904-06-23
[77]
뉴스
叙任及辭令
황성신문
1904-07-21
[78]
간행물
승정원일기 고종 27년 8월 10일 기사
1894-08-10 #추정 날짜. 고종 27년이 1890년이 아니라 1894년이라는 정보가 부족하여 추정 날짜를 사용했습니다.
[79]
간행물
승정원일기 1899년 8월 29일자 기사
1899-08-29
[80]
간행물
관보 1899년 10월 31일 1406호 및 1899년 11월 6일 1411호
1899-10-31
[81]
간행물
황성신문 1906년 4월 4일자 기사
황성신문
1906-04-04
[82]
간행물
태극학보 제7호
태극학보
1907-02-24
[83]
간행물
서북학회지 ‘서우’ 제5호
서북학회지
1907-04-01
[84]
간행물
승정원일기 1907년 7월 26일자 기사
승정원일기
1907-07-26
[85]
간행물
서북학회지 제12호 1907년 11월 1일자 기사
서북학회지
1907-11-01
[86]
간행물
대한협회보 제1호 1908년 4월 25일자
대한협회보
1908-04-25
[87]
간행물
조선총독부관보 정규호(745호), 4면 대부허가 국유미개간지처분사항
조선총독부관보
#날짜 정보 부족하여 생략
[88]
뉴스
일신(日新) 신문-광무4년 경자년(1900년) 3월 14일 기사
일신 신문
1900-03-14
[89]
논문
한국의 영국 축하사절단 파견과 한․영 외교관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2-06
[90]
기록
주영의거래안- 서울대규장각 M/F64-16-4-총2책중 1책-報告(1901.2.22.)
서울대규장각
1901-02-22
[91]
간행물
관보
1902-07-29
[92]
서적
온양방씨대동보
2005
[93]
서적
독립유공자공훈록
1987
[94]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95]
기록
한국근현대인물자료-조선인사흥신록
[96]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97]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98]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99]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100]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101]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102]
간행물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103]
간행물
온양방씨 갑신보 제10권
2005-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00-00-00으로 표기
[104]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05]
기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서대문형무소 수형인카드)
[106]
간행물
목은시고(牧隱詩藁)
[107]
간행물
방씨 대종보 제15호
2010-01-25
[108]
간행물
온양방씨 갑자보
1804-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00-00-00으로 표기
[109]
간행물
온양방씨 경신중간보
1860-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00-00-00으로 표기
[110]
뉴스
종 2품 숙의 방씨
http://www.gndomin.c[...]
경남도민신문
201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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