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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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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법무관(프라이토르, praetor)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콘술 다음가는 고위 행정관이었다. 초기에는 군사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기원전 367년 이후에는 수도 법무관(praetor urbanus)과 외국인 담당 법무관(praetor peregrinus)으로 나뉘어 사법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로마의 영토 확장과 함께 법무관의 수는 증가했으며, 제정 시대에는 역할이 축소되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프라이토르 직함이 유지되었고, 현대에는 루마니아, 몰도바,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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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관
고대 로마
로마 SPQR 깃발
로마 시대
직책 정보
직위고대 로마의 정무관
로마자 표기Praetor
IPA 표기/ˈpriːtər/
로마자 발음PREE·tər
라틴어 고전 발음/ˈprae̯tɔr/
기능
역할사법 기능 수행
때로는 군사 지휘관 역할 수행
기타
관련 용어군법무관
Praetorian

2. 역사적 배경

로마 공화정 초기인 기원전 450년까지 프라이토르(법무관)는 로마 최고위 관리직이었다. 그러나 콘술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콘술 다음가는 직책으로 여겨졌다.[9] '프라이토르(Praetor)'라는 명칭은 '앞장 선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πραίτωρ'의 라틴어 번역으로, 초기 프라이토르의 역할이 군사적인 면이 강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367년 섹스티아-리키니아 법을 통해 프라이토르직이 신설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초기에는 임페리움을 가진 군사 지휘관을 의미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본다.

기원전 367년 섹스티아-리키니아 법이 통과되면서, 플레브스(평민)도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파트리키(patrici)(전통적인 귀족)가 취임하는 행정관으로서 로마 시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 수도 법무관)가 만들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는 외국인 관련 소송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 외국인 담당 법무관)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외국인 소송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임페리움을 보유할 수 있는 행정관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336년,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가 처음으로 플레브스 출신 프라이토르가 되었다.

로마가 속주를 획득하면서 프라이토르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기원전 228년에는 4명, 기원전 197년에는 6명으로 증원되었고, 이들은 수도의 2명을 제외하고는 임페리움 보유자로서 속주 총독의 직무를 맡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프라이토르를 8명으로 늘리고, 모두 수도에 배치하여 사법을 담당하도록 했다.

2. 1. 초기 프라이토르

로마 공화정 초기인 기원전 450년까지 프라이토르(법무관)는 로마 최고위 관리직을 의미했다. 그러나 콘술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콘술 다음가는 직책으로 여겨졌다.[9] '프라이토르(Praetor)'라는 명칭은 '앞장 선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πραίτωρ'의 라틴어 번역으로, 초기 프라이토르의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

초기 로마 공화정에서 프라이토르의 지위는 명확하지 않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367년 섹스티아-리키니아 법을 통해 프라이토르직이 신설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리비우스를 포함한 고대 로마인들은 최고 관리직이 처음에는 '프라이토르'로 불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기 프라이토르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적으로 군사력을 이끄는" 씨족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praeire'(앞장서다) 또는 'praeesse'(탁월하다)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점차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관리로 제도화되었고, 군사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기원전 449년 개혁은 모든 군 사령관들이 로마 인민을 대표하는 인민회의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했을 수 있다.

기원전 367년 섹스티아-리키니아 법이 통과되면서 로마 인민에게 군 사령관 선출 권한이 커졌다. 일설에는 이 법을 통해 세 명의 프라이토르 집단이 설립되었고, 그중 두 명이 집정관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 프라이토르는 임페리움을 가진 군사 직책이었으며, "집정관직과 권한과 능력이 사실상 동일했다."

기원전 337년까지 프라이토르는 파트리키 중에서만 선출되었으나, 그 해에 플레브스에게도 자격이 개방되어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가 최초의 플레브스 출신 프라이토르가 되었다.[2]

시간이 지나면서 집정관직과 프라이토르직 사이에 구분이 생겼다. 기원전 180년 '렉스 빌리아 아날리스'가 통과되면서 집정관직 이후 프라이토르직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다. 집정관직이 더 높은 위신을 얻었지만, 프라이토르의 임페리움은 공화정 말기까지 법적으로 집정관의 임페리움보다 열등하지 않았다.[3]

기원전 241년부터 프라이토르들은 연장되었고, 전직 프라이토르들이 프로프라이토르로서 권한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4]

2. 2. 고전적 프라이토르

기원전 450년까지 프라이토르(법무관)라는 직책은 로마 공화정에서 최고위 관리로 사용되었으나, 콘술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콘술 다음가는 직책으로 평가되었다. 로마 제정 시기에는 명예직으로 축소되었다.[9] 프라이토르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πραίτωρ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앞장 선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이들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초기 로마 공화정에서 'praetor'(프라이토르)의 지위는 명확하지 않았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367년 섹스티아-리키니아 법을 통해 프라이토르직이 신설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화정 초기에는 프라이토르라는 직함이 단순히 "지도자"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들은 'praeire'(앞장서다) 또는 'praeesse'(탁월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초기에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적으로 군사력을 이끄는" 씨족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초기 군 지도자들은 점차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고정된 관리 기구로 제도화되었고, 군사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가 강화되었다. 기원전 449년 개혁은 "모든 군 사령관들이 로마 인민을 대표하는 인민회의에 의해 승인"받도록 요구했을 수도 있다.

고전적 프라이토르직의 등장은 기원전 367년 섹스티아-리키니아 법 통과와 함께 시작된 긴 과정이었다. 리비우스는 이 법이 집정관의 사법적 책임을 덜어주기 위해 프라이토르직을 신설했다고 주장하지만, 초기에는 임페리움을 가진 군사 직책이었으며, "집정관직과 권한과 능력이 사실상 동일했다."

일부 학자들은 섹스티아-리키니아 법이 세 명의 프라이토르로 구성된 집단을 설립했고, 그중 두 명이 결국 역사적 집정관이 되었다고 본다. 초기 고전적 프라이토르직은 집정관보다 낮은 직책이 아니었으며, "집정관직을 역임한 후 프라이토르직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이는 단순히 2년째 임페리움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37년까지 프라이토르는 파트리키 중에서만 선출되었다. 그 해에 'praetura'(프라이투라) 자격이 플레브스에게 개방되었고,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가 최초의 플레브스 출신 프라이토르가 되었다.[2]

세 명의 군 지도자 선출 후 125년이 지나서야 집정관직과 프라이토르직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생겼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진행 중이던 외국 전쟁에서 프라이토르들이 얻은 명예와 명성이 집정관직의 위신을 높였다. 기원전 180년 ''lex Villia annalis''(렉스 빌리아 아날리스)가 통과되면서 집정관직 이후 프라이토르직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다. 집정관직이 프라이토르직에서 출현하여 더 높은 위신을 얻은 후에도, 프라이토르의 임페리움은 공화정 말기까지 법적으로 구별되지 않았다.[3]

기원전 241년부터 프라이토르들은 연장되었고, 전직 프라이토르들이 ''프로 프라이토레''로서 권한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4] 연장은 임페리움을 가진 관리가 할당된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기원전 241년경 두 번째 장관직이 신설되어 집정관직과 더 명확히 구분되었다. 이는 사법 업무 부담을 덜고, 비상시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임무(imperium)''를 가진 고위 관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프라이토르가 처음부터 재판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정설 중 하나는 공화정 초기에는 군을 지휘하는 최고 행정관이 3명의 프라이토르였고, 그중 2명이 콘술이 되고 1명이 프라이토르로 남았다는 것이다.

기원전 367년, 플레브스(평민)도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면서, 파트리키(patrici)(전통적인 귀족)가 취임하는 행정관으로서 로마 시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수도 법무관)가 만들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외국인 담당 법무관)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외국인 소송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임페리움을 보유할 수 있는 행정관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336년,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Quintus Publilius Philo)가 처음으로 플레브스 출신 프라이토르가 되었다.

기원전 228년에는 4명, 기원전 197년에는 6명으로 증원되었는데, 로마가 속주를 획득할 때마다 증원되었고, 수도의 2명을 제외하고는 임페리움 보유자로서 속주 총독의 직무를 맡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프라이토르를 8명으로 증원하고, 모두 수도에 배치하여 사법을 담당하도록 했다.

2. 3. 프라이토르의 증원

기원전 228년에는 프라이토르가 4명으로 증원되었고(시칠리아·사르디니아 담당 증원), 기원전 197년에는 6명(히스파니아 근방 담당 증원)이 되었다. 로마가 속주를 획득할 때마다 증원되었고, 수도의 2명을 제외하고는 임페리움 보유자로서 속주 총독의 직무를 맡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로마를 장악하고 개혁을 실시했을 때, 프라이토르를 8명으로 증원하고 성격도 변화하여, 모두 수도에 배치되어 사법을 담당하게 되었다.

3. 권한과 직속 관리

법무관은 쿠루리스 관직(Curule magistrate)으로서 임무권(imperium)을 행사하는 고위 관직자(magistratus majores)였다.[5] 이들은 쿠루리스 의자(sella curulis)에 앉고 자색 띠 장식 토가(toga praetexta)를 착용했으며, 6명의 릭토르를 거느렸다. 법무관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임무권(imperium)을 행사했고, 상위직인 집정관의 거부권(veto)에만 종속되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 집정관과 법무관은 국가 문제에 독자적 판단을 하지 않고 원로원(SPQR) 권한 아래 원로원령으로 고위직 임무를 부여받아, 현대 행정부와는 달랐다.

리비우스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종교적 상설 임무 외에도, 군대를 이끌거나 반란 조사, 군대 모집, 특별 제사 집행, 자금 분배, 위원 임명, 메뚜기 박멸 등 다양한 특별 임무를 맡았다고 기록한다. 법무관은 임무를 위임할 수 있었으나, "사소한 일"(minima)이 아닌 "중대한 일"(maxima)을 담당해야 했다. "법무관은 사소한 일을 다루지 않는다(Non curat minima praetor)"는 로마법 원칙은 후대 유럽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3. 1. 주요 권한

기원전 367년 이후로 시법무관(''Praetor urbanus'')은 법적 판결권을 갖고 형사 및 민사 재판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치안권 역시 법무관의 권한에 속했다.[5]

선출된 법무관은 쿠루리스 관직(Curule magistrate)으로서 임무권(imperium)을 행사하는 고위 관직자(magistratus majores)였다. 쿠루리스 의자(sella curulis)에 앉고 자색 띠 장식 토가(toga praetexta)를 착용할 권리가 있었으며,[5] 6명의 집정관 호위관(lictor)을 거느렸다. 법무관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임무권(imperium)을 가졌으며, 상위직인 집정관의 거부권(veto)에만 종속되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과 법무관의 권한(potestas)과 임무권(imperium)은 국가 문제 해결에 독자적인 판단을 사용하지 않고, 원로원(SPQR)의 권한 아래 원로원령에 따라 직접 고위직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행정부와는 차이가 있었다.

리비우스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에게 주어진 임무들을 자세히 묘사했는데, 이들은 종교적인 성격의 상설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든지 특별 임무, 특히 군사적 임무를 맡을 수 있었다. 리비우스는 이들이 인지된 위협(국내 또는 외국)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가능한 반란을 조사하고, 군대를 모집하고, 특별한 제사를 집행하고, 뜻밖의 돈을 분배하고, 위원을 임명하고, 심지어 메뚜기를 박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법무관은 임의로 임무를 위임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할당될 수 있는 임무를 제한하는 한 가지 원칙은 "사소한 일"(minima)과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의상 "중대한 일"(maxima)의 행위자였다. 이 로마법의 원칙은 후대 유럽법의 원칙이 되었는데, "법무관은 사소한 일을 다루지 않는다(Non curat minima praetor)"는 격언처럼 세부 사항은 입법할 필요가 없으며 법원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3. 2. 인원 및 임기

법무관의 임기는 1년으로, 공화국 시대에는 40세 이상의 남자만이 선출될 자격이 있었으나 제국 시대에는 30세로 연령 제한이 완화되었다. 선출된 법무관은 쿠룰리스 관직(Curule magistrate)으로서 임무권(imperium)을 행사했으며, 고위 관직자(magistratus majores) 중 한 명이었다.[5] 법무관은 쿠룰리스 의자(sella curulis)에 앉고 자색 띠 장식 토가(toga praetexta)를 착용할 권리가 있었으며,[5] 6명의 릭토르를 거느렸다. 법무관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임무권(imperium)을 가진 관직자였으며, 상위직인 집정관의 거부권(veto)에만 종속되었다.

법무관의 인원수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시기인원
초기6명
술라 개혁 이후8명
카이사르 이후16명
아우구스투스 이후8명


4. 프라이토르의 종류

로마 사회를 통솔하는 직책은 원래 "프라이토르(praetor)"라고 불렸으나, 이후 "콘술(consul)"로 명칭이 변경되었다.[9] 초기 프라이토르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행정관으로서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기원전 367년, 플레브스(plebs)(평민)도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면서, 파트리키(patrici)(귀족)가 맡는 행정관으로 로마 시의 재판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 수도 법무관)가 신설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는 외국인 관련 소송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 외국인 담당 법무관)가 추가되었다.[4] 기원전 336년,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Quintus Publilius Philo)가 평민 출신 최초의 프라이토르가 되었다.[5]

로마가 속주를 획득하면서 프라이토르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기원전 228년에는 4명, 기원전 197년에는 6명[6]으로 증원되었으며, 이들은 수도의 법무관 2명을 제외하고는 임페리움(imperium)을 보유한 속주 총독의 직무를 맡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프라이토르를 8명으로 늘리고, 이들 모두 수도에 배치하여 사법을 담당하게 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4. 1.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 (Praetor urbanus)

기원전 367년 이후로 시법무관(''Praetor urbanus'')은 법적 판결권을 가지면서 형사 및 민사 관계 재판을 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치안권 역시 프라이토르의 권한에 속했다. 도시 관할 판관(praetor urbanus)은 시민 간의 민사 사건을 관할했으며, 상원은 고위 관리가 항상 로마에 머물러야 한다고 요구했기에 이 의무는 도시 관할 판관에게 주어졌다. 집정관이 없을 경우, 도시 최고 관리로서 상원을 소집하고 공격 발생 시 도시 방어를 조직할 권한을 가졌다.[1] 그는 한 번에 10일 이상 도시를 떠날 수 없었기에 로마에서 적절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아폴로 축제(Ludi Apollinares)를 감독하고 사법 행정의 최고 관리였으며 판관 포고(Praetor's Edict)를 공포했다. 이 포고는 임기 동안 내려질 사법 결정에 대한 판관의 정책 진술이었다. 판관은 포고에 대해 상당한 재량권을 가졌지만 입법은 불가능했다. 지속적인 포고는 판례의 집합체를 형성했으며, 로마법 발전과 개선은 판관 재량권의 현명한 사용 덕분이었다.[2]

그 성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로마 사회 통솔자가 “콘술(consul)”이라 불리기 이전 명칭으로 “프라이토르(praetor)”가 사용되었다고 한다.[9]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프라이토르가 처음부터 재판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정설 중 하나는 공화정 초기 군 지휘 최고 행정관이 3명의 프라이토르였고, 그중 2명이 콘술, 1명이 프라이토르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원래 군사적 의미가 강했을 것이다.[3]

기원전 367년, 플레브스(plebs)(평민)도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면서, 파트리키(patrici)(전통적인 귀족)가 취임하는 행정관으로서, 로마 시 재판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수도 법무관)가 만들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는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외국인 담당 법무관)가 추가되었는데, 고대 사료에서는 외국인 소송 대응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설은 임페리움을 보유할 수 있는 행정관을 늘리기 위한 것이며, 실제로 외국인 소송 재판은 기원전 2세기 이후라고 한다.[4]

기원전 336년,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Quintus Publilius Philo)가 처음으로 플레브스 출신 프라이토르가 되었다.[5]

4. 2.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 (Praetor peregrinus)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무렵, ''praetor qui inter peregrinos ius dicit'' (praetor qui inter peregrinos ius dicit|외국인 사이에서 재판을 집행하는 법무관la)이라는 새로운 법무관 직책이 등장했다. 후대에는 이 직책을 ''praetor inter cives et peregrinos'' (praetor inter cives et peregrinos|시민과 외국인 사이에서la)라고 불렀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로마의 영토 확장과 외국 인구 증가로 인해 이러한 임무만을 전담하는 새로운 직책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T. 코리 브레넌은 240년대 군사 위기 동안 두 번째 법무관이 임무 권한을 가진 자를 확보하여 ''inter peregrinos''(inter peregrinos|외국인 사이에서la) 지휘 및 속주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창설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니발 전쟁 동안 ''praetor peregrinus''(praetor peregrinus|외국인 법무관la)는 특별 임무로 로마에 자주 없었다. 반면 도시 법무관은 사법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도시에 더 자주 남아 있었다.[9]

기원전 2세기 이후, 외국인과의 소송을 재판하는 것은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였다.[9]

5. 프라이토르와 재판

기원전 367년 이후, 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은 법적 판결권을 가지며 형사 및 민사 재판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에 따라 치안권도 자연스럽게 프라이토르의 권한에 속했다.[9]

프라이토르의 성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로마 사회를 통솔하는 자가 “콘술(consul)”이라 불리기 이전의 명칭으로 “프라이토르(praetor)”가 사용되었다고 한다.[9]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는 프라이토르가 처음부터 재판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정설 중 하나는 공화정 초기에는 군을 지휘하는 최고 행정관이 3명의 프라이토르였고, 그중 2명이 콘술이 되고 1명이 프라이토르로 남았다는 것이다.

기원전 367년, 플레브스(plebs)(평민)도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면서, 파트리키(patrici)(전통적인 귀족)가 취임하는 행정관으로서 로마 시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수도 법무관)가 만들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는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praetor peregrinus)(외국인 담당 법무관)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고대 사료에서는 외국인에 의한 소송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되지만, 정설에서는 임페리움을 보유할 수 있는 행정관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실제로 외국인의 소송을 재판한 것은 기원전 2세기 이후라고 한다.

기원전 336년,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Quintus Publilius Philo)가 처음으로 플레브스 출신 프라이토르가 되었다.

기원전 228년에는 프라이토르가 4명으로 증원되었고, 기원전 197년에는 6명으로 늘어났다. 로마가 속주를 획득할 때마다 증원되었으며, 수도의 2명을 제외하고는 임페리움 보유자로서 속주 총독의 직무를 맡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로마를 장악하고 개혁을 실시했을 때, 프라이토르를 8명으로 증원하고 그 성격도 변화시켜 모두 수도에 배치되어 사법을 담당하게 되었다.

5. 1. 민사 재판 (Actio)

기원전 367년 이후 시법무관(''Praetor urbanus'')은 법적 판결권을 갖고 형사 및 민사 재판을 담당했다.

민사 소송(''actio'')에서 법무관은 특정 상황을 금지하는 명령(interdictum)을 내리거나 재판관(iudex, 판사)을 임명할 수 있었다. 법무관 앞에서의 절차는 기술적으로 ''in iure''라고 불렸다. 이 단계에서 법무관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주어질 구제책에 대해 재판관에게 지시하는 ''formula''(소송절차)를 설정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X를 재판관으로 한다. 피고가 원고에게 1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재판관은 피고가 원고에게 1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하도록 선고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원고는 그를 석방한다."[1]

재판관에게 넘겨진 후에는 더 이상 법무관 앞에서 ''in iure''가 아니었고 ''apud iudicem''이 되었다. 재판관의 ''iudicium''(판결)은 구속력이 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이러한 2단계 절차가 대부분 사라졌고, 법무관은 직접 전체 사건을 심리하거나 대리인(iudex pedaneus)을 임명하여 판결 집행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formula''는 비공식적인 변론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2]

로마 공화정 시대에 도시 법무관은 매년 법률가들의 자문을 받아 구제책을 부여할 상황을 명시하는 칙령(edict)을 발표했다. 법무관의 칙령에서 발생하는 법적 규정은 ''ius honorarium''(관례법)으로 알려졌다. 이론적으로 법무관은 법을 변경할 권한이 없었지만, 실제로 칙령은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변경했고 사실상 입법 문서였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칙령의 조항은 영구적으로 확정되었고 법무관의 사실상 입법적 역할은 폐지되었다.[3]

5. 2. 형사 재판 (Quaestiones perpetuae)

기원전 367년 이후 시법무관(''Praetor urbanus'')은 법적 판결권을 갖고 형사 및 민사 재판을 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에 따라 치안권도 프레토르의 권한에 속했다.[1]

로마 법정 사건은 민사 또는 형사 재판으로 나뉘었다. 판관들은 특정 유형의 범죄 소송인 영구 재판(quaestiones perpetuae)을 주재했는데, 이는 판관 한 명이 특정 유형의 사건을 상임으로 담당했기 때문이다. 판관은 배심원 역할을 하는 재판관들을 임명하여 유죄 또는 무죄에 대해 투표하게 했고, 평결은 무죄 또는 유죄였다.[1]

이러한 재판(quaestiones)은 판관의 주의를 끌 만한 "공공에 대한 범죄"(crimina publica)를 조사했다. 유죄 판결 시 처벌은 대개 사형이었지만, 때로는 다른 가혹한 형벌이 적용되기도 했다. 공화정 말기 공공 범죄는 다음과 같았다.[1]

범죄설명예시
횡령(Repetundae)관리가 불법으로 빼앗은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고 가해자를 유죄로 판결하는 것불법 몰수
매수(Ambitus)불법적으로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매수
반역죄(Majestas)국민의 "위엄"에 대한 범죄, 즉 반역죄관리의 살해 공모
공금횡령(Peculatus)공공 재산 절도공금 횡령
위증(Falsum)위증
살인 및 독살(De Sicariis et Veneficis)전문 암살자와 공범에 대한 죄목
친족살해(De Patricidis)아마도 재산 때문에 친족 살해로 확대 해석된 죄목



마지막 세 가지 죄목은 기원전 1세기 초 술라 독재자에 의해 추가되었다.[1]

6. 후기 로마 시대와 비잔티움 제국

아우구스투스는 법무관의 역할을 제국의 행정관으로서 축소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선거 기관은 상원으로 변경되었고, 상원은 제국의 비준 도구가 되었다. 원수정의 수립은 사실상 군주제 복원으로 볼 수 있다. 황제는 과거 왕들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공화정의 기구를 이용하여 그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황제는 최고 항소 법원을 주재했다.

여러 차례의 변화 끝에 아우구스투스는 법무관의 수를 12명으로 고정했고, 티베리우스 치하에서는 16명이었다. 제국 행정관으로서 그들의 임무는 공화정 시대에는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문제까지 확대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신탁 관련 사항을 처리하기 위해 두 명의 법무관을 임명했지만, 티투스는 그 수를 한 명으로 줄였고, 네르바는 국고와 개인 간의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법무관을 추가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6]는 후견 관련 사항을 처리하기 위한 법무관을 임명했다.

395년경, 집정관의 책임은 순전히 시정(市政)의 역할로 축소되었다.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게임 전시 또는 공공 사업에 대한 자금 지출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민관과 같은 다른 전통적인 로마 관직의 쇠퇴와 함께, 집정관직은 귀족들이 서로마 또는 동로마 상원에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로 남아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법무관 (πραίτωρel, ''praitōr'')은 존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 527~565)는 535년부터 주요 행정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특정 주에서 총독의 손에 민정과 군정 권한을 재통합하고 교구를 폐지하는 것을 포함했다. 트라키아 교구는 이미 5세기 말 아나스타시우스에 의해 폐지되었고, 그곳의 ''비카리우스''는 트라키아의 새로운 ''프라이토르 유스티니아누스''가 되었으며, 하부 메시아와 소 키티아를 제외한 모든 이전 트라키아 주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두 주는 ''퀘스투라 엑세르키투스''의 일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피시디아와 뤼카오니아, 그리고 혼오리아스와 합병되어 확장된 파플라고니아의 총독들도 ''프라이토레스 유스티니아니''로 승격되었고, ''비르 스펙타빌리스''의 계급을 받았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는 그때까지 치안을 담당했던 ''프라이펙투스 비길룸''을 광범위한 경찰 권한을 가진 ''프라이토르 포풀리''( πραίτωρ [τῶν] δήμωνel, ''praitōr [tōn] dēmōn'')로 대체했다.

9세기 초, ''프라이토르''는 ''테마''에서 지배하는 ''스트라테고스''에 종속된 하급 행정관이었다. 그러나 점차 민정 관료들이 더 큰 권력을 장악했고, 10세기 말에는 ''프라이토레스''(또는 ''크리타이'', "판사")가 ''테마''의 민정 행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정과 군정의 분리는 12세기에 종종 폐기되었는데, 민정 ''프라이토르''와 군정 ''두크스''의 직책이 자주 함께 맡겨졌다. 1204년 제국의 붕괴 이후 주 지방의 직책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엘렌 아르베일러에 따르면, 니케포로스 2세 황제 (재위 963~969)는 고위 판사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프라이토르를 재도입했다. 그는 아마도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의 ''프라이토르 투 데모우'' 직책과 동일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1355년까지 확인된다. 가짜 코디누스의 ''직책의 책''에 따르면, ''프라이토르 투 데모우''는 ''메가스 차우시오스''와 ''로고테테스 톤 오이케이콘'' 사이에 황실 서열 38위를 차지했지만, 공식적인 직무는 없었다. 그의 법복은 금박을 입힌 모자(''스키아디온''), 평범한 비단 ''카바디온'' 튜닉, 그리고 평범하고 매끄러운 나무 지팡이(''디카니키온'')로 구성되었다.

7. 현대의 프라이토르

전간기 루마니아 왕국의 주는 다양한 수의 '플라샤'(단수: '플라샤')로 나뉘었고, 각 '플라샤'는 현감이 임명한 'Pretor'가 이끌었다. Pretor가 이끄는 기관은 'Pretură'라고 불렸다. 현재 이 직책은 몰도바 공화국에만 남아 있으며, 키시너우의 5개 구역의 수장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998년까지 Praetor는 특정 임무(특히 민사 분야)를 맡은 사법관이었다.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티치노주에는 'pretori'(단수: 'pretore')가 있는데, 이는 구역의 수석 사법관(민사 분야)이며, 'pretura'(법원)를 이끌고 있다.[7] 'pretori'는 주 의회에서 임명한다.[8]

참조

[1] 서적 Brill's Companion to Cassius Dio https://books.google[...] BRILL 2023
[2] 문서 Ab urbe condita
[3] harvnb 2015
[4] harvnb 2015
[5] 문서 From the Founding of the City
[6] 문서 Vita Marci Antonini
[7] 웹사이트 Repubblica e Cantone Ticino https://www4.ti.ch/p[...]
[8] 웹사이트 Constitution of Ticino https://www.admin.ch[...]
[9] 서적 An Introduction to Roman Law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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