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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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뛰어난 군인이었다. 카파도키아 출신으로 군인 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군에 입문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크레타 섬을 탈환하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는 등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으나, 과도한 세금 부과와 불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그는 969년, 황후 테오파노와 옛 동료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의 공모로 암살당하고, 치미스키스가 황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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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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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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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출생 | 년 |
출생지 | 카파도키아 |
사망일 | 969년 12월 11일 (57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매장지 | 성 사도 교회 |
통치 정보 | |
즉위 | 963년 8월 16일 |
퇴위 | 969년 12월 11일 |
이전 통치자 | 로마노스 2세 |
다음 통치자 | 요안니스 1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테오파노 |
아버지 | 바르다스 포카스 |
가문 | |
왕가 | 포카스 가문 |
왕조 | 마케도니아 왕조 |
2. 어린 시절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912년경 동로마 제국의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태어났다.[2][3] 그의 가문인 포카스 가문은 대대로 뛰어난 장군들을 배출한 명문 군인 집안이었다.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 할아버지 니케포로스 포카스, 삼촌 레온 포카스, 그리고 형제 레오 포카스 모두 제국의 중요한 군사 직책인 야전군 사령관(''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을 역임하며 제국 방위에 큰 공을 세웠다. 어머니 쪽으로는 말레이노이 가문 출신인데, 이 가문 역시 카파도키아에 기반을 둔 강력한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 귀족 가문이었다.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동로마 제국의 유명한 군사 가문인 포카스 가문 출신으로, 912년경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를 포함하여 여러 유능한 장군을 배출하며 제국 방위에 기여했다. 니키포로스 자신도 어린 나이에 군에 입문하여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군인으로서 강인함과 냉철함을 갖추었으나 사생활은 수도사처럼 검소하고 종교적으로 독실했다.
니키포로스는 이러한 군인 집안의 배경 속에서 어린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일찍부터 드러냈다. 그는 젊은 시절 스테파노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그녀는 니키포로스가 큰 명성을 얻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사별한 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정결 서약을 했다.
군인으로서 니키포로스는 엄청난 힘과 냉철하고 두려움 없는 성격을 지닌 뛰어난 인물이었다. 군사적인 능력 외에도 그는 마치 수도사처럼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종교적으로도 깊이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3. 군사 경력
그는 945년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 의해 아나톨리콘 테마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국 동방군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스콜라이 도메스티코스( δομέστικος τῶν σχολῶν|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el)로 승진하여[12] 함단 왕조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로마노스 2세 황제 치세에는 동생 레온 포카스와 함께 제국의 동방과 서방 군사령관을 맡아 활약했다. 특히 960년부터 시작된 크레타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약 1년간의 공방전 끝에 섬을 제국 영토로 되찾았다. 이 공적으로 그는 백성들의 큰 인기를 얻었으며, 동지중해의 제해권 회복에 기여했다.[12] 크레타 수복 후에는 동방 전선으로 이동하여 알레포를 점령하는 등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혁혁한 전공으로 그는 "사라센의 창백한 죽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3. 1. 초기 동방 원정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945년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 의해 아나톨리콘 테마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954년 또는 955년에는 제국 중앙군(타그마) 총사령관 격인 학교의 도메스틱 (스콜라이 군단의 사령관, δομέστικος τῶν σχολῶνel)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당시 함단 왕조와 아바스 칼리파조에게 연패하던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를 대신한 조치였다. 이 새로운 직책을 맡으면서 니키포로스는 동방 비잔틴 군대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955년부터 니키포로스는 동방의 함단 왕조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으며, 이는 1002년 함단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 왕조의 쇠퇴기 시작과 맞물렸다. 957년 6월, 니키포로스는 하다스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960년부터 961년까지 군대가 크레타 재정복에 집중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함단 왕조가 붕괴될 때까지 아랍 세력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특히 니키포로스는 크레타 섬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여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회복하는 큰 공적을 세웠다.[12]
크레타 수복 이후, 니키포로스는 다시 동방 전선으로 이동하여 동생 레온 포카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는 제국 동방의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여 알레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3. 2. 크레타 정복
959년 로마노스 2세 황제가 즉위한 후, 니키포로스와 그의 동생 레오 포카스는 각각 동부와 서부 야전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960년, 동로마 제국은 노잡이와 해병대 27,000명을 동원하여 308척의 함대를 운용했고, 이 함대는 50,000명의 병력을 수송했다. 당시 영향력 있던 재상 요셉 브링가스의 건의에 따라, 니키포로스는 무슬림 세력이 지배하던 크레타 토후국에 대한 원정을 이끌도록 임명되었다.
니키포로스는 함대를 이끌고 섬으로 건너가 알미로스 근처에 상륙하여 소규모 아랍군을 격파했다. 곧이어 그는 요새 도시 찬다크스를 9개월 동안 포위하기 시작했다. 겨울 동안 그의 군대는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몇 차례의 실패한 공격과 주변 지역에 대한 습격 이후, 니키포로스는 마침내 961년 3월 6일 찬다크스에 입성하여 섬 전체를 무슬림으로부터 되찾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니키포로스는 정식 로마 개선식의 영예는 받지 못했지만, 히포드롬에서 환호를 받는 것은 허락되었다.
포카스 가문은 할아버지 대부터 장군으로 동로마 제국에 봉사해 온 카파도키아 출신의 군사 귀족 가문이었다. 니키포로스 역시 제국 중앙군(타그마)의 총사령관 격인 스콜라이 군단의 스콜라이 군단 사령관으로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특히 크레타 섬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이라클리온 포위전)한 것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회복하는 중요한 공적으로 평가받는다.[12]
3. 3. 후기 동방 원정
크레타 정복 이후 니키포로스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대규모의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격했다. 962년 2월, 그는 아나자르보스를 점령했으며, 타르수스의 주요 도시는 더 이상 알레포의 함단 왕조 에미르인 사예프 알다울라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니키포로스는 킬리키아의 농촌 지역을 계속해서 파괴했고, 타르수스 총독 이븐 알자얏을 야전에서 격파했다. 이 패배 후 알자얏은 자살했다. 이후 니키포로스는 지역 수도인 카이사레아로 돌아갔다. 새로운 원정 시기가 시작되자, 알다울라는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들어와 약탈을 감행했으나, 이로 인해 알레포의 방어는 위험할 정도로 약해졌다. 니키포로스는 곧바로 히에라폴리스를 점령했다. 12월,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이끄는 군대는 둘로 나뉘어 알레포로 진격했고, 나자 알카사키가 지휘하는 적군을 빠르게 격파했다. 알다울라의 군대가 비잔티움 군을 추격했지만 그 역시 패배했고, 니키포로스와 치미스키스는 12월 24일 알레포에 입성했다. 알레포의 함락은 함단 왕조에게 전략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원정에서 니키포로스는 "사라센의 창백한 죽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4]
황제로 즉위한 니키포로스 2세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그는 강력한 중장 기병 군단을 창설하여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을 계속했고, 알레포와 타르소스를 점령했다.[13] 또한, 포카스 가문의 가신단은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헤라클리우스 1세 시대 이후 300년 이상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탈환하는 등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 기독교 5대 총대주교좌[14] 중 하나이자 동방의 주요 대도시였던 안티오키아의 회복 소식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시민들은 개선하는 황제를 환호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3]
: 오, 새벽의 샛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네. 아침의 별이 떠오르네. 그의 눈동자에 태양의 빛이 빛나네. 그 앞에서는 사라센인도 공포에 질려 죽으리라.
가사에서 "사라센인"은 이슬람교도(무슬림)를 의미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니키포로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토스산의 수도원 공동체를 후원하기도 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니키포로스의 군대에 대해 "이 군세를 로마 군대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오랫동안 아랍과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탓에 동방의 풍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그를 열렬히 환영했던 수도 시민들 사이에서도 점차 반야만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또한 교회가 세속 권력에 관여하려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고 성직자들에게 청빈을 강조했기 때문에, 독실한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총대주교들의 미움을 샀다. 게다가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군비 마련을 위해 일반 백성은 물론 귀족과 군인에게까지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재원 확보를 위해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는 화폐 개주를 단행했다. 965년 시칠리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포카스 가문의 친족과 측근들을 우대하는 정책 역시 귀족층과 군인들 사이에서 니키포로스 2세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이에 니키포로스는 강력한 친위대를 조직하고 교회의 항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군인층의 불만을 가장 위험하게 여겼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조카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의 황궁 출입을 금지시켰다.[13]
4. 황제 즉위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 황제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동시대 기록이나 후대 역사가들은 과도한 생활로 건강을 해쳤거나 황후 테오파노(약 941년–976년 이후)가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로마노스 2세에게는 어린 아들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 8세가 있었고, 이들은 이미 공동 황제로 즉위한 상태였다. 그러나 로마노스 사망 당시 바실리오스는 다섯 살, 콘스탄티노스는 세 살에 불과했기에 어머니 테오파노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테오파노는 지적이고 야심찬 여성이었지만 혼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로마노스 2세의 최측근이자 행정 실권을 쥐고 있던 환관 요세푸스 브링가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브링가스는 동방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군부와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크게 경계했다. 그는 니키포로스가 황제의 자리를 노릴 것이라 우려하여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한편, 테오파노는 자신과 어린 아들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니키포로스와 손을 잡고 브링가스에 맞섰다.
결국 브링가스의 견제 속에서 니키포로스는 963년 7월 2일, 카이사레아에서 군대와 최고 지휘관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니키포로스는 즉시 함대를 보내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고,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를 동방군 사령관(도메스티코스)으로 임명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자신을 공동 황제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브링가스는 수도를 봉쇄하고 니키포로스 측근들을 탄압하려 했다.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야 했고, 동생 레오 포카스는 변장하고 도시를 탈출했다. 브링가스는 일부 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나 강력한 환관 장군 바실 레카페노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니키포로스를 지지하며 봉기했고, 브링가스는 실각하여 도주했다.
963년 8월 16일, 니키포로스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정식으로 황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로 즉위했다.[7]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로마노스 2세의 미망인이자 어린 공동 황제들의 어머니인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니키포로스가 과거 사별한 아내를 잃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맹세했으며, 테오파노의 아들들의 대부였다는 점 때문에 기독교 교리상 문제가 되었다. 완고한 성격의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는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결혼은 성사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를 공동 황제로서 존중하는 한편, 자신의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를 카이사르(부제)로 임명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13]
5. 치세
니키포로스 2세의 치세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외교와 내정에서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낸 시기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제국의 동방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킬리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크 등 중요한 지역을 되찾으며 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서방 전선에서는 시칠리아를 완전히 상실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적으로도 실책이 잦았는데, 불가리아 문제에 키예프 루스를 끌어들인 것은 장기적으로 제국에 부담을 주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악화는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불필요한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내정 면에서는 군사 활동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강압적인 세금 징수와 화폐 개주를 단행하여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다. 또한 교회 정책과 관련해서도 갈등을 빚었으며, 친족 등용 등으로 귀족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내정 불안과 민심 이반은 그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5. 1. 군사적 성공
니키포로스는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황제가 된 후에도 강력한 중장 기병 군단을 창설하여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이어갔다. 964년부터 이슬람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동방 전선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964년 봄, 동방 원정을 시작하여 여름에는 킬리키아의 아나자르보스와 아다나를 점령했다. 같은 해 말 몹수에스티아 공략에는 실패했으나, 이듬해인 965년 여름, 니키포로스와 치미스키스는 몹수에스티아를 점령했고, 레오 포카스는 타르수스를 포위 공격했다. 니키포로스는 카타프락토이를 동원한 격전 끝에 타르수스 군대를 격파했고, 8월 16일 타르수스는 항복했다. 니키포로스는 주민들을 추방하고 도시를 약탈했으며, 이로써 킬리키아는 완전히 비잔티움 제국의 수중에 들어왔다. 또한 965년에는 니케타스 찰코우체스가 키프로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섬을 제국 영토로 회복시켰다. 키프로스는 668년 콘스탄티노스 4세와 칼리프 아부드 알말리크의 조약 이후 비무장 공동 지역으로 관리되고 있었다.[13]

966년 6월, 사모사타에서 사이프 알다울라와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10월에는 상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북부를 공격하여 아미다, 다라, 니시빈 등을 약탈했다. 또한 히에라폴리스에서 예수의 성유물을 확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왔다. 이후 안티오크를 잠시 포위했으나 보급 문제로 철수했다. 967년 또는 968년에는 외교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타론 지역과 아르젠, 마르티로폴리스를 제국에 병합했다.

968년 10월, 다시 시리아 원정에 나서 오론테스 강 유역의 여러 도시(마아라트 미스린, 아라, 카파르다, 라리사, 에피파니아, 에메사)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해안가의 트리폴리까지 진군하여 아르카, 안타라도스, 마라클레아, 가발라를 점령하고 라오디케아의 항복을 받았다. 이는 안티오크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안티오크 공략을 위해 파그라에 요새에 병력을 남겨두었다.
969년, 파그라에 요새 사령관 마이클 부르체스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스트라토페다르크 페트로스의 지원을 받아 기습 공격으로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이는 헤라클리우스 시대 이후 약 300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였다. 과거 기독교 5대 총대주교좌[14] 중 하나이자 동방의 주요 도시였던 안티오키아의 회복 소식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크게 환호하며 개선 행진을 벌이는 황제를 맞이했다. 시민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3]
: 오, 새벽의 샛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네. 아침의 별이 떠오르네. 그의 눈동자에 태양의 빛이 빛나네. 그 앞에서는 사라센인(무슬림)도 공포에 질려 죽으리라.
니키포로스는 또한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아토스 산의 수도원 공동체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방에서의 빛나는 성공과 달리, 서방 전선과 외교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시칠리아에서는 군사적 실패를 경험했다. 962년 파티마 왕조가 타오르미나를 점령한 데 이어, 965년 니키포로스가 파견한 대규모 함대(약 4만 명)가 해협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마지막 거점이었던 로메타마저 함락되었고, 이로써 시칠리아는 완전히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967년 비잔티움 제국과 파티마 왕조는 시칠리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파티마가 이집트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고 비잔티움은 신성 로마 제국과의 이탈리아 본토 문제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니키포로스가 오토 1세를 모욕하면서 양 제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968년과 969년 오토 1세는 비잔티움령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침공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비잔티움군 역시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한 채 니키포로스 사후까지 교전이 계속되었다.
불가리아와의 외교에서도 실책을 범했다. 불가리아가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니키포로스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불가리아 침공을 부추겼다. 이는 오히려 강력한 키예프 루스 세력을 남쪽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비잔티움-불가리아 간의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5. 2. 서투른 외교
니키포로스 2세는 동방 전선에서는 타르수스[13], 키프로스, 안티오키아[14] 등을 점령하며 빛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외교 정책에서는 여러 실책을 범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불가리아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불가리아와의 외교적 분쟁이 벌어지자 키예프 공국의 스뱌토슬라프 1세 대공에게 상당한 지원금을 약속하며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이는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지 못한 불가리아에 대한 보복 조치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더 강력한 세력인 키예프 공국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고, 수십 년간 이어질 비잔티움-불가리아 간 외교 관계 악화와 바실리우스 2세 시대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유럽과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와의 관계에서 니키포로스는 오토 1세를 모욕하는 등 갈등을 키웠다. 두 제국 간의 긴장은 상호 문화적 편견과 함께 서로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를 자처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자신의 영토로 선언하며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968년 오토 1세는 비잔티움령 아풀리아를 침공했으나 바리 점령에 실패했고, 이듬해 재차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공격했지만 카사노나 보비노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후 판둘포 아이언헤드가 공세를 이어받았으나 비잔티움 장군 유게니오스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양측의 교전은 니키포로스 사후까지 이어졌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가 남긴 기록은 당시 두 제국 간의 악화된 관계를 보여준다.
니키포로스의 첫 군사적 실패는 시칠리아에서 발생했다. 962년 파티마 왕조의 시칠리아 총독 아흐마드 이븐 알하산 알칼비의 아들이 비잔티움 도시 타오르미나를 점령했다. 시칠리아의 마지막 주요 비잔티움 거점이었던 로메타가 니키포로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파트리키오스 니케타스와 마누엘 포카스가 이끄는 약 4만 명 규모의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비잔티움군은 해협 전투에서 패배했고 로메타마저 함락되면서 시칠리아는 완전히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들어갔다. 967년, 비잔티움 제국과 파티마 왕조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 정복을 준비하고 있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오토 1세와의 갈등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5. 3. 내정

니키포로스의 인기는 주로 그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었지만, 내정에서는 여러 정책으로 인해 점차 지지를 잃어갔다. 그는 군대에 많은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는 엄격한 경제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궁정의 지출을 줄이고 성직자의 면세 혜택을 축소했으며, 개인적으로 금욕주의 성향을 가졌음에도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금지했다. 또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는 악주를 단행했으며, 제국 중앙 지역까지 세금을 강하게 징수하면서 백성들의 불만을 샀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13] 965년 시칠리아 원정 실패는 이러한 민중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13]

니키포로스는 교회와도 여러 면에서 갈등을 빚었다. 그는 사라센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교회가 순교자로 인정해주기를 원했는데, 이는 이슬람교에서 전사자에게 부여하는 '샤히드'와 유사한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 교리상 논란이 많았고 교회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또한 교회가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을 비판하며 성직자들에게 청빈을 강조했기 때문에, 독실한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총대주교들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을 샀다.[13] 하지만 그는 아토스 산의 아타나시우스를 도와 아토스 산의 대 라브라 수도원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토스 산의 수도원 공동체를 후원하는 등 긍정적인 기여도 했다.[6][13]
사회적으로도 논란을 일으켰다. 967년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군사 훈련을 시연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중이 공황 상태에 빠져 서로 밀치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는 과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니카의 반란 직전 경기장에서 군사력을 과시했던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오랫동안 제국 동방 국경에서 활동했던 탓에 몸에 밴 동방 풍습 역시 수도의 귀족과 시민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져 '반야만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13] 더불어 자신의 가문인 포카스 가문의 친족과 측근들을 요직에 등용하면서 다른 귀족들과 군인들의 원망을 샀다.[13] 니키포로스는 이러한 불만을 군대의 동요로 이어질까 경계하여 강력한 친위대를 조직하고, 특히 군부 내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조카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의 황궁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13]
한편, 니키포로스는 군사 전술에 관한 논문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당시의 전쟁 기술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는 ''군사 지침(Praecepta Militaria)''이며, 덜 알려진 ''기습에 관하여''(Περὶ Παραδρομῆς Πολέμου)는 제국 동부 국경에서 적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게릴라 전술 등을 다루고 있다. 다만 후자의 저작은 니키포로스 본인이 아닌, 그의 동생이자 서방 군대의 도메스티코스였던 레오 포카스가 저술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5]
6. 말년과 암살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니키포로스는 정치적으로 오만해지고 성격도 급해졌으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지주와 귀족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쳤고, 교회 재산을 제한하는 정책으로 교회의 지지마저 잃었다. 또한 지나친 과세로 인해 민중은 점차 그에게서 희망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후 테오파노는 남편의 옛 동료이자 총사령관이었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불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니키포로스에게 관직을 박탈당했던 요안니스는 테오파노와 함께 니키포로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일부 기록은 암살 음모가 니키포로스가 안티오크 포위 공격 당시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미카엘 부르체스를 해임하면서 시작되었고, 불만을 품은 부르체스가 동맹을 찾으면서 요안니스와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니키포로스는 965년 말 요안니스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동부 소아시아로 추방했지만, 테오파노의 간청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요안네스 조나라스와 요한 스킬리체스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고행적인 생활을 했으며 테오파노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7]
969년 12월 10일 밤 또는 11일 새벽, 테오파노는 니키포로스의 침실 문을 열어두었고, 여자로 변장하여 황궁에 침입한 요안니스와 그의 공모자들은 침실을 습격했다. 당시 니키포로스는 침대가 아닌 성상 앞 바닥에서 잠들어 있었으며, 요안니스 일당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진다.[7]
니키포로스를 암살한 요안니스는 즉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요안니스 1세로 즉위했다. 니키포로스의 죽음 이후, 그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가 포카스 가문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새로 즉위한 요안니스 1세에 의해 즉시 진압되었다.[7]
7. 유산
니키포로스가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는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 주교가 저술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사 보고서』에서 니키포로스와 그의 궁정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8] 리우트프란트의 기록은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하며 겪었던 불쾌한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쟁을 선호했던 니키포로스는 외교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더욱이 리우트프란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는 동안 교황 요한 13세가 니키포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를 '로마 황제'로 칭하고 니키포로스는 단순히 '그리스 황제'라고 부르면서 외교적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리우트프란트는 오토 1세의 아들인 미래의 황제 오토 2세와 동로마 황실 공주와의 혼담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리우트프란트 주교는 니키포로스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 "... 난쟁이에 뚱뚱한 머리, 눈이 작아 마치 두더지 같고, 짧고 넓으며 두껍고 반쯤 흰 수염이 혐오스러우며, 목은 1인치 길이밖에 안 되고, 머리카락이 길고 굵어 매우 억세며, 피부색은 에티오피아인 같으며, 한밤중에 만난다면 유쾌하지 않을 사람이며, 배는 크고 허리는 가늘며, 키에 비해 엉덩이는 매우 길고, 정강이는 작고, 발꿈치와 발은 균형 잡혀 있으며, 값비싸지만 너무 낡아 냄새나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시키오니아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언변이 뛰어나고 본성은 여우 같으며, 위증과 거짓말을 하는 율리시스였다."[9]
반면, 동시대의 역사가 레오 디아코누스는 니키포로스의 머리카락이 "꽉 조인 곱슬머리"에 "유난히 길고" 검은색이었다고 기록하여 리우트프란트의 묘사와는 다른 모습을 전한다.
니키포로스의 암살과 매장에 대해 역사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것은 명예로운 장소였지만, 사라센의 흰 죽음, 시리아와 크레테의 영웅, 성스럽고 끔찍하며, 웅장하고 참을 수 없는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더 나은 최후를 맞이할 자격이 있었다."
니키포로스 사후, 10세기 말 동안 포카스 가문은 여러 차례 제위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특히 니키포로스 2세의 조카인 바르다스 포카스는 바실 2세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켜 거의 성공할 뻔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아마도 심장 마비로 추정)으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포카스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인 니키포로스 포카스 바리트라켈로스가 1022년에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와 함께 또 다른 반란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군사 전략에 관한 중요한 저술인 『군사 지침서』(Praecepta Militaria)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10][11]
현대에 이르러 니키포로스 2세는 그리스에서 군사적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4년 11월 19일, 헬레닉 해군은 네덜란드로부터 도입한 코르테나르급 프리깃함 중 열 번째 함선을 그의 이름을 따 ''니키포로스 포카스'' (F-466)으로 명명했다. (이 함선은 이전 네덜란드 해군의 HNLMS ''블로이스 반 트레스롱'' F-824함이었다.) 또한, 크레타 섬의 레팀노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니키포로스 포카스 시가 있으며, 그리스 전역의 여러 거리에도 그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니키포로스 2세는 다음과 같은 현대 창작물에도 등장한다.
- 프레데릭 해리슨, 『테오파노: 10세기의 십자군』(Theophano: The Crusade of the Tenth Century, 1904). ISBN 978-1017148909
- 프레데릭 해리슨, 『니케포루스: 신 로마의 비극』(Nicephorus: A Tragedy of New Rome, 1906). ISBN 978-1290581578
- 아나스타시아 레비, 《비잔티움 00AD》(Byzantium 00AD, 2000년 연극).
- 조나단 해리스, 『테오시스』(Theosis, 2023). ISBN 979-8668071487
참조
[1]
간행물
Inventing and re-inventing Byzantium: Nikephoros Phokas, Byzantine Studies in Greece, and 'New Rome'
https://www.academia[...]
2014
[2]
문서
[3]
문서
[4]
서적
A History of Byzantium
https://books.google[...]
Wiley-Blackwell
[5]
문서
Three Byzantine Military Treatises
Dumbarton Oaks
2008
[6]
서적
A history of the Athonite Commonwealth: the spiritual and cultural diaspora of Mount Athos
2018
[7]
서적
History
Dumbarton Oaks
[8]
간행물
Liudprand of Cremona’s Account of his Legation to Constantinople (968) and Ottonian Imperial Strategy
2001
[9]
citation
Relatio de legatione Constantinopolitana ad Nicephorum Phocam
http://medieval.ucda[...]
[10]
서적
Sowing the dragon's teeth : Byzantine warfare in the tenth century
Dumbarton Oaks Research Library and Collection
1995
[11]
서적
The grand strategy of the Byzantine Empir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12]
웹사이트
現在クレタ島にはニケフォロス・フォカスという名前の町がある。また現在のギリシャ海軍には「ニキフォロス(ニケフォロスの現代ギリシャ語形)・フォカス」([http://www.hellenicnavy.gr/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40%3A%CE%A6-%CE%93-%CE%9D%CE%99%CE%9A%CE%97%CE%A6%CE%9F%CE%A1%CE%9F%CE%A3-%CE%A6%CE%A9%CE%9A%CE%91%CE%A3-%28F-466%29&catid=12%3Afregates&Itemid=259&lang=en HS NIKIFOROS FOKAS])というフリゲート艦が在籍している
[13]
문서
2010
[14]
문서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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