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비 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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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비 찰턴은 1937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전 축구 선수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설적인 선수로 기억된다. 그는 195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1973년까지 758경기에 출전, 249골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 및 득점 기록을 세웠다.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의 주역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에서 살아남아 팀 재건에 기여했으며, 은퇴 후에는 지도자, 행정가, 자선 활동가로 활동했다. 2023년 사망했으며,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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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찰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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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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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버트 찰턴 |
출생일 | 1937년 10월 11일 |
출생지 | 애싱턴, 노섬벌랜드, 잉글랜드 |
사망일 | 2023년 10월 21일 |
사망지 | 맥클즈필드, 체셔, 잉글랜드 |
신장 | 173cm |
포지션 | 미드필더 / 공격수 |
로마자 표기 | Bobby Charlton |
애칭 | 보비, 구성 |
클럽 경력 | |
유스 클럽 | 이스트 노섬벌랜드 학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53–1956) |
클럽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56–1973) 프레스턴 노스 엔드 (1974–1975) 워터퍼드 (1976) 뉴캐슬 KB 유나이티드 (1978) 퍼스 아쭈리 (1980) 블랙타운 시티 (1980) |
클럽 출장 | 652 |
클럽 득점 | 21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장 | 606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득점 | 199 |
프레스턴 노스 엔드 출장 | 38 |
프레스턴 노스 엔드 득점 | 8 |
워터퍼드 출장 | 3 |
워터퍼드 득점 | 1 |
뉴캐슬 KB 유나이티드 출장 | 1 |
뉴캐슬 KB 유나이티드 득점 | 0 |
퍼스 아쭈리 출장 | 3 |
퍼스 아쭈리 득점 | 2 |
블랙타운 시티 출장 | 1 |
블랙타운 시티 득점 | 1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잉글랜드 학교 대표 (1953) 잉글랜드 유스 (1954) 잉글랜드 U-23 (1958–1960) 잉글랜드 (1958–1970) |
국가대표 출장 | 117 |
국가대표 득점 | 60 |
잉글랜드 학교 대표 출장 | 4 |
잉글랜드 학교 대표 득점 | 5 |
잉글랜드 유스 출장 | 1 |
잉글랜드 유스 득점 | 1 |
잉글랜드 U-23 출장 | 6 |
잉글랜드 U-23 득점 | 5 |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장 | 106 |
잉글랜드 국가대표 득점 | 49 |
감독 경력 | |
감독 클럽 | 프레스턴 노스 엔드 (1973–1975) 위건 애슬레틱 (1983, 감독 대행) |
수상 내역 | |
FIFA 월드컵 | 우승 (1966)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 3위 (1968) |
2. 유년 시절
로버트 찰턴은 1937년 10월 11일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탄광 노동자였던 로버트 "밥" 찰턴(1909년 5월 24일 – 1982년 4월)[10][11]과 엘리자베스 엘렌 "시시" 찰턴(1912년 11월 11일 – 1996년 3월 25일)[9]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쪽 친척들 중에는 여러 프로 축구 선수들이 있었는데, 잭 밀번(리즈 유나이티드와 브래드퍼드 시티 소속), 조지 밀번(리즈 유나이티드와 체스터필드 소속), 짐 밀번(리즈 유나이티드와 브래드퍼드 파크 애비뉴 소속), 스탠 밀번(체스터필드, 레스터 시티와 로치데일 소속) 등 삼촌들과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축구 선수였던 재키 밀번은 그의 어머니의 사촌이었다. 찰턴은 자신의 초기 경력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할아버지 태너와 어머니 시시를 꼽았다.[12] 그의 형인 잭 찰턴은 처음에는 광부로 일했지만[13] 경찰에 지원했고,[14] 결국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축구 선수가 되었다.[15]
1953년 2월 9일, 베들링턴 문법학교 학생이었던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트 조 아암스트롱에게 동노섬버랜드 주 학교 대표팀 경기에서 눈에 띄었다.[16] 찰턴은 이후 잉글랜드 스쿨보이스에서 활약했고, 1953년 1월 1일에 15세였던 윌프 맥기니스와 함께 유나이티드와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는 불안정한 축구 선수 생활에 그를 맡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그는 전기 기술자로서의 견습 과정을 시작했지만, 1954년 10월에 프로 선수가 되었다.[16]
3. 구단 경력
찰턴은 유명한 버스비 베이비 중 한 명이 되었는데, 이들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클럽 재건을 위한 장기 계획을 세운 매트 버스비 밑에서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에 올드 트래퍼드 시스템을 통해 등장한 재능 있는 축구 선수들을 일컫는다.[17] 그는 유소년 및 예비 팀에서 꾸준히 득점하며 순위를 착실히 밟아 올라갔고, 1956년 10월 찰턴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러 4-2로 끝난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17] 동시에 그는 슈루즈베리의 왕립 육군 병기단에서 병역을 수행했는데, 버스비는 그에게 주말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계속 뛸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조언했었다. 같은 시기에 슈루즈베리에서 군 복무를 수행한 그의 유나이티드 동료로는 던컨 에드워즈가 있다.[17]
찰턴은 그 첫 시즌에 유나이티드에서 17경기에 출전하여 데뷔전에서 2골을 넣었고, 모든 대회에서 총 12골을 기록했다.[18] 2월에는 찰턴 애슬레틱과의 원정 경기에서 5-1 승리를 거두며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19] 유나이티드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1957년 FA컵 결승전에서 애스턴 빌라에게 논란 속에 패하며 20세기 최초의 더블 달성은 실패했다.[20] 겨우 19세였던 찰턴은 이 경기에 출전했는데, 이 경기에서 유나이티드 골키퍼 레이 우드는 빌라의 중앙 공격수 피터 맥파랜드와의 충돌로 광대뼈 골절 부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21] 찰턴은 우드를 대신해 골키퍼로 나설 후보였지만, 그의 동료 재키 블랜치플라워가 골키퍼로 나섰다.[22]
다음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찰턴은 확고한 선수가 되었고, 유나이티드는 리그 챔피언 자격으로 유러피언컵에 참가하는 최초의 잉글랜드 팀이 되었다. 이전에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이 대회를 무시했지만, 유나이티드는 준결승전에 진출하여 우승팀인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했다. 그들의 명성은 다음 시즌 1957-58 유러피언컵에서 8강에 진출하여 레드 스타 벨그라드와 경기를 치르면서 더욱 높아졌다.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유나이티드는 2-1로 승리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2차전에서 찰턴은 2골을 넣으며 유나이티드가 3-0으로 앞서 나갔지만, 홈팀이 만회하며 3-3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러나 유나이티드는 합계 점수에서 앞서 4강에 진출했고, 주말에 울브스와의 중요한 리그 경기를 생각하며 기뻐하며 귀국 비행기를 타러 갔다.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난 보비 찰턴은 1954년 17세가 되던 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였다.[79] 당초에는 대기 선수에 불과했지만, 1956년에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팀의 중심이 되어 1956-57 시즌에 리그 우승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1958년 2월 6일 유러피언컵 준준결승전 츠르베나 즈베즈다 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뮌헨 비행기 참사라고 불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해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주장인 덩컨 에드워즈를 포함한 많은 팀 동료들을 잃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불과 2개월 후인 1958년 4월 19일 스코틀랜드 전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24] 하지만, 사고를 연상시키는 베오그라드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전의 영향을 받아 그 해의 월드컵까지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그후에는 정신적으로 회복해 팀의 재건에 공헌하였고, 1960년대에는 자신과 같이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회복한 맷 버스비와 함께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등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을 맡아 1963년에는 FA컵을, 1965년과 1967년에는 당시 잉글랜드 1부 리그에 해당되는 풋볼 리그에서 우승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구축하였다. 또 개인적으로는 196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뮌헨 비행기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1968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상대로 2골을 넣어 10년 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이루지 못했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성공시켰고, 그의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잉글랜드 팀으로선 처음으로 유럽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758경기에 출전해 249득점을 기록하며 1973년을 기준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자와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다 출전 기록은 2008년 라이언 긱스가 2008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하면서 긱스에게 넘어갔고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은 2017년 웨인 루니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50번째 득점을 기록하면서 루니에게 넘어갔다.[92]
1970년대 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더 이상 잉글랜드 최상위 팀들과 경쟁하지 못했고, 여러 차례 강등권과 싸워야 했다. 때때로 찰턴은 유나이티드의 다른 슈퍼스타인 조지 베스트와 데니스 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베스트는 찰턴의 고별 경기인 셀틱과의 경기에 출전을 거부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라고 말했다.[25] 찰턴은 1972-73 시즌이 끝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났다.
찰턴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마지막 경기는 1973년 4월 28일 첼시와의 스템포드 브리지 경기였다. 첼시가 1-0으로 승리했다.[26] 우연히도, 이날은 그의 형제 재키의 마지막 경기(리즈 유나이티드)이기도 했다. 찰턴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마지막 골은 한 달 전인 3월 31일 사우샘프턴과의 1부 리그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둔 경기였다.[27]
3. 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난 보비 찰턴은 1954년 17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79] 처음에는 후보 선수였지만, 1956년에 주전으로 자리 잡아 중심 선수가 되었고, 1956-57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1958년 2월 6일, 유러피언컵 준준결승전 츠르베나 즈베즈다 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뮌헨 비행기 참사라고 불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해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주장인 덩컨 에드워즈를 포함한 많은 팀 동료들을 잃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자신도 의식을 잃은 채 안전벨트를 한 채로 좌석째 기체 밖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기적적으로 큰 부상 없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이 컸고, 한때는 전혀 공을 찰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고로부터 불과 2개월 후인 1958년 4월 19일 스코틀랜드 전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대표팀 첫 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대표팀 세 번째 경기는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베오그라드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찰턴은 현저하게 부진했고, 그 해 월드컵까지 정신적인 데미지를 끌고 가게 되었다.
그 후, 불굴의 정신으로 회복하여 팀 재건에 기여했다. 1960년대에는 마찬가지로 사고의 정신적 데미지에서 회복한 맷 버스비 감독과 함께 조지 베스트와 데니스 로 등 젊은 선수들이 많은 팀을 주장으로 이끌고, 1963년에는 FA컵을, 1965년과 1967년에는 당시 잉글랜드 1부 리그인 풋볼 리그를 제패하는 등 황금기를 구축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1966년에 유럽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뮌헨 비행기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1968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상대로 2골을 넣어 10년 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이루지 못했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성공시켰고, 그의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잉글랜드 팀으로선 처음으로 유럽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758경기에 출전해 249득점을 기록하며 1973년을 기준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자와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다 출전 기록은 2008년 라이언 긱스가 2008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하면서 긱스에게 넘어갔고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은 2017년 웨인 루니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50번째 득점을 기록하면서 루니에게 넘어갔다.[92]3. 1. 1. 뮌헨 비행기 참사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난 보비 찰턴은 1954년 17세가 되던 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였다. 당초에는 대기 선수에 불과했지만, 1956년에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팀의 중심이 되어 1956-57 시즌에 리그 우승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1958년 2월 6일 유러피언컵 준준결승전 츠르베나 즈베즈다 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뮌헨 비행기 참사라고 불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해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주장인 덩컨 에드워즈를 포함한 많은 팀 동료들을 잃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79]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이 컸고, 한때는 전혀 공을 찰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불과 2개월 후인 1958년 4월 19일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상대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의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사고를 연상시키는 베오그라드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전의 영향을 받아 그 해의 월드컵까지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그 후에는 정신적으로 회복해 팀의 재건에 공헌하였고, 1960년대에는 자신과 같이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회복한 맷 버스비와 함께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등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을 맡아 1963년에는 FA컵을, 1965년과 1967년에는 당시 잉글랜드 1부 리그에 해당되는 풋볼 리그에서 우승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구축하였다.
뮌헨 비행기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1968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상대로 2골을 넣어 10년 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이루지 못했던 유로피언 컵 우승을 성공시켰고, 그의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잉글랜드 팀으로선 처음으로 유럽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유나이티드 선수단과 직원들을 젬운 공항에서 데려온 비행기는 급유를 위해 뮌헨에 들러야 했다.[23] 이 작업은 악화되는 날씨 속에서 이루어졌고, 급유가 완료되고 승객들에게 다시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올 때쯤에는 겨울 폭풍우가 몰아치고 활주로와 공항 주변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두 차례의 이륙 시도가 실패하면서 기내에서는 우려가 커졌고, 승무원은 사소한 기술적 오류를 수정하는 동안 승객들에게 다시 내리라고 알렸다.
팀은 겨우 10분 만에 공항 터미널에 다시 있었고, 비행기에 다시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많은 승객들이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찰턴과 팀 동료인 데니스 바이올렛은 토미 테일러와 데이비드 페그와 자리를 바꿨는데, 그들은 비행기 뒤쪽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이륙 시도에서 비행기는 활주로 끝의 울타리를 스치면서 날개가 인근 주택을 뚫고 들어가 불을 질렀다. 날개와 일부 꼬리 부분이 부러져 나무와 나무 오두막을 치면서 비행기는 눈 위를 회전하며 멈출 때까지 미끄러졌다. 비행기는 두 동강이 났다.
좌석에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찰턴은 기내에서 떨어졌다. 유나이티드 골키퍼인 해리 그레그(어떻게든 비행기 구멍을 통해 무사히 빠져나와 혼자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찰턴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찰턴과 바이올렛의 바지 허리띠를 잡고 비행기에서 끌어냈는데, 비행기가 폭발할까 봐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그레그는 심각하게 부상당한 버스비와 블랜치플라워를 돕기 위해 비행기로 돌아갔고, 다시 돌아섰을 때, 그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찰턴과 바이올렛이 분리된 좌석에서 나와 잔해를 살펴보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찰턴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심한 쇼크를 받았고,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팀 동료 7명이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치명적인 이륙 시도 전에 그와 바이올렛과 자리를 바꿨던 테일러와 페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팀 주장인 로저 번도 사망했고, 마크 존스, 빌리 웰런, 에디 콜먼 및 제프 벤트도 사망했다. 던컨 에드워즈는 입은 부상으로 2주 후 사망했다. 총 23명이 사망했다. 처음에는 날개의 빙결이 원인으로 지목되었지만, 후속 조사에서 활주로의 슬러시로 인해 안전한 이륙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44명의 승객과 승무원(17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 포함) 중 23명(그중 8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이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 찰턴은 경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다른 8명의 생존 선수 중 2명은 너무 심하게 부상당하여 다시는 경기를 뛸 수 없었다.
찰턴은 부상당한 생존자 중 가장 먼저 병원을 떠났다. 해리 그레그와 빌 폴크스는 부상 없이 무사했기 때문에 입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락 8일 후인 1958년 2월 14일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애싱턴의 가족과 함께 요양하는 동안 그는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고, 그때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그는 아직 20살에 불과했지만, 이제 버스비의 보좌관들이 시즌의 잔해를 수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가 클럽 재건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2020년 해리 그레그 사망과 2023년 자신의 사망 사이에 찰턴은 이 사고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3. 1. 2. 참사 이후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난 보비 찰턴은 1954년 17세가 되던 해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였다.[79] 당초에는 대기 선수에 불과했지만, 1956년에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팀의 중심이 되어 1956-57 시즌에 리그 우승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1958년 2월 6일 유러피언컵 준준결승전 츠르베나 즈베즈다 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뮌헨 비행기 참사라고 불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해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주장인 덩컨 에드워즈를 포함한 많은 팀 동료들을 잃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불과 2개월 후인 1958년 4월 19일 스코틀랜드 전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24] 하지만, 사고를 연상시키는 베오그라드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전의 영향을 받아 그 해의 월드컵까지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그후에는 정신적으로 회복해 팀의 재건에 공헌하였고, 1960년대에는 자신과 같이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회복한 맷 버스비와 함께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등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을 맡아 1963년에는 FA컵을, 1965년과 1967년에는 당시 잉글랜드 1부 리그에 해당되는 풋볼 리그에서 우승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구축하였다. 또 개인적으로는 196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뮌헨 비행기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1968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상대로 2골을 넣어 10년 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이루지 못했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성공시켰고, 그의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잉글랜드 팀으로선 처음으로 유럽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758경기에 출전해 249득점을 기록하며 1973년을 기준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자와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다 출전 기록은 2008년 라이언 긱스가 2008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하면서 긱스에게 넘어갔고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은 2017년 웨인 루니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50번째 득점을 기록하면서 루니에게 넘어갔다.[92]
1970년대 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더 이상 잉글랜드 최상위 팀들과 경쟁하지 못했고, 여러 차례 강등권과 싸워야 했다. 때때로 찰턴은 유나이티드의 다른 슈퍼스타인 조지 베스트와 데니스 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베스트는 찰턴의 고별 경기인 셀틱과의 경기에 출전을 거부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라고 말했다.[25] 찰턴은 1972-73 시즌이 끝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났다.
찰턴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마지막 경기는 1973년 4월 28일 첼시와의 스템포드 브리지 경기였다. 첼시가 1-0으로 승리했다.[26] 우연히도, 이날은 그의 형제 재키의 마지막 경기(리즈 유나이티드)이기도 했다. 찰턴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마지막 골은 한 달 전인 3월 31일 사우샘프턴과의 1부 리그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둔 경기였다.[27]
3. 2. 프레스턴 노스 엔드 외
4. 국가대표팀 경력
뮌헨 비행기 참사 두 달 만에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었으며 그 해 4월 스코틀랜드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를 통해 A매치에 처음으로 출전했다.[28]
이후 칠레에서 열린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팀을 준준결승으로 이끌었고, 1966년 자국에서 벌어진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첫 월드컵 우승에 기여하였다.
그는 멕시코에서 열린 1970년 FIFA 월드컵에 출장해 총 3번의 월드컵에서 14경기에 출장해 4골을 넣었고, 이것을 포함해 대표팀에서 106경기에 나서 49득점을 기록하였다.
뮌헨 공항 참사를 겪은 지 두 달 남짓 지난 1958년 4월 19일, 햄든 파크에서 열린 영국 홈 챔피언십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를 위해 잉글랜드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찰턴은 국가 대표급 유망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28]
찰턴은 잉글랜드가 4-0으로 대승을 거둔 데뷔전에서 왼쪽 윙어 톰 피니의 크로스를 강력한 발리슛으로 마무리하며 득점에 성공, 더욱 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웸블리에서 포르투갈을 2-1로 꺾으며 2골을 넣었고, 세 번째 경기인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는 벨그라드에서의 경기였기에 긴장감이 역력했으나, 잉글랜드는 5-0으로 패했고 찰턴은 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다.
찰턴은 스웨덴에서 열린 1958년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출전하지는 못했다.[29]
1959년 찰턴은 잉글랜드가 미국을 8-1로 대파한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1961년에는 멕시코를 8-0으로 꺾은 경기에서 두 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또한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이어진 대회에서 16골을 기록하며 10번의 토너먼트 우승(5번 공동 우승)을 차지했으며, 1963년을 제외한 모든 영국 홈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찰턴은 칠레에서 열린 1962년 월드컵 예선에서 룩셈부르크와 포르투갈을 상대로 경기를 뛰었고, 본선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는 데 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단 38경기 만에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기록한 25번째 득점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성공은 팀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잉글랜드는 8강전에서 브라질에게 패배하여 탈락했으며, 브라질은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은 알프 램지였는데, 그는 이전 월드컵까지 지속되었던 위원회 기반의 선수 선발 시스템에서 선수 영입 및 팀 선발 절차에 대한 단독 권한을 확보했다. 램지 감독은 위원회의 충성심에 의존하여 계속해서 선발되던 일부 노장 선수들을 이미 제외시켰다. 1963년 6월 스위스를 8-1로 대파하는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찰턴의 잉글랜드 대표팀 득점 수는 30골이 되어 톰 피니와 냇 로프하우스가 공동으로 보유하던 기록과 같아졌다. 같은 해 10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31번째 골을 넣으며 단독 기록을 세웠다.
찰턴의 역할은 전통적인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오늘날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불리는 역할로 발전하고 있었고, 램지는 그를 중심으로 1966년 월드컵을 위한 팀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1964년 5월 27일 미국을 10-0으로 이긴 친선 경기에서 그는 한 골을 넣었고, 이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시니어 레벨로 기록한 33번째 골이었다.[30]
그의 득점 빈도는 다소 줄었고, 실제로 순수한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지미 그리브스는 1964년 10월 그의 잉글랜드 대표팀 득점 기록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턴은 여전히 꾸준히 득점하고 기회를 창출했고,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직전 그는 스타 중 한 명이 되어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서의 명성을 더욱 굳힐 것으로 기대되었다.
=== 1966년 FIFA 월드컵 ===
잉글랜드는 1966년 FIFA 월드컵 개막전에서 우루과이와 0-0으로 비겼다. 찰턴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2-0 승리를 이끈 첫 골을 넣었다.[79] 이어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같은 점수로 승리하며 잉글랜드는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었다. 이 경기는 찰턴이 국제 경기에서 유일하게 경고를 받은 경기였다.
준결승에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만났고, 이 경기에서 찰턴은 로저 헌트의 도움과 제프 허스트에게 연결된 패스를 받아 두 골을 넣으며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를 승리로 이끌었다. 찰턴과 헌트는 3골로 잉글랜드의 공동 득점왕이 되었고, 서독과의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찰턴은 프란츠 베켄바우어에게 견제당하며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잉글랜드는 연장전 끝에 4-2로 승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79]
=== 1970년 FIFA 월드컵 이후 ===
찰턴의 다음 잉글랜드 경기는 75번째 경기였고,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승리했다.[31] 두 번 더 출전한 후, 그는 베테랑 빌리 라이트(105경기) 다음으로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되었다.[31] 몇 주 후, 스웨덴과의 친선 경기에서 45번째 잉글랜드 골을 넣어 지미 그리브스의 44골 기록을 경신했다.[31] 1968년 유럽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피렌체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했지만, 3위 결정전에서 소련을 2-0으로 이겼다.[31]
1969년, 찰턴은 축구 발전에 대한 공로로 OBE를 받았다.[31] 1970년 4월 21일,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100번째 잉글랜드 출전 기록을 세웠고, 램지 감독에 의해 주장으로 임명되어 득점했다.[31] 그의 49번째이자 마지막 골은 한 달 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나왔다.[31] 이 경기는 1970년 월드컵을 위한 고지대 적응 훈련의 일환이었다.[31] 찰턴은 램지 감독에 의해 1970년 월드컵에 참가하여 네 번의 월드컵 대표팀에 참가한 유일한 잉글랜드 선수가 되었다.[31]
월드컵 직전, 찰턴은 보고타 팔찌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31]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두 번의 승리와 브라질에게 패배 후, 8강에서 서독을 다시 만났다.[31] 잉글랜드가 2-1로 앞서던 중 찰턴은 교체되었으나, 서독이 연장전 끝에 3-2로 승리했다.[31] 잉글랜드는 탈락했고, 106경기 49골의 기록을 세운 찰턴은 32세에 국가대표팀 은퇴를 결정했다.[31] 멕시코에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그는 램지에게 자신을 다시 고려하지 말라고 요청했다.[31]
찰턴의 출전 기록은 1973년 보비 무어가 경신했고,[31] 2023년 10월 현재 잉글랜드 역대 출전 순위 7위이다.[31] 찰턴의 득점 기록은 2015년 9월 8일 웨인 루니가 UEFA 유로 2016 예선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깨졌다.[31]
4. 1. 1966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는 1966년 FIFA 월드컵 개막전에서 우루과이와 0-0으로 비겼다. 찰턴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2-0 승리를 이끈 첫 골을 넣었다.[79] 이어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같은 점수로 승리하며 잉글랜드는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었다. 이 경기는 찰턴이 국제 경기에서 유일하게 경고를 받은 경기였다.준결승에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만났고, 이 경기에서 찰턴은 로저 헌트의 도움과 제프 허스트에게 연결된 패스를 받아 두 골을 넣으며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를 승리로 이끌었다. 찰턴과 헌트는 3골로 잉글랜드의 공동 득점왕이 되었고, 서독과의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찰턴은 프란츠 베켄바우어에게 견제당하며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잉글랜드는 연장전 끝에 4-2로 승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79]
4. 2. 1970년 FIFA 월드컵 이후
찰턴의 다음 잉글랜드 경기는 75번째 경기였고,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승리했다.[31] 두 번 더 출전한 후, 그는 베테랑 빌리 라이트(105경기) 다음으로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되었다.[31] 몇 주 후, 스웨덴과의 친선 경기에서 45번째 잉글랜드 골을 넣어 지미 그리브스의 44골 기록을 경신했다.[31] 1968년 유럽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피렌체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했지만, 3위 결정전에서 소련을 2-0으로 이겼다.[31]1969년, 찰턴은 축구 발전에 대한 공로로 OBE를 받았다.[31] 1970년 4월 21일,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100번째 잉글랜드 출전 기록을 세웠고, 램지 감독에 의해 주장으로 임명되어 득점했다.[31] 그의 49번째이자 마지막 골은 한 달 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나왔다.[31] 이 경기는 1970년 월드컵을 위한 고지대 적응 훈련의 일환이었다.[31] 찰턴은 램지 감독에 의해 1970년 월드컵에 참가하여 네 번의 월드컵 대표팀에 참가한 유일한 잉글랜드 선수가 되었다.[31]
월드컵 직전, 찰턴은 보고타 팔찌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31]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두 번의 승리와 브라질에게 패배 후, 8강에서 서독을 다시 만났다.[31] 잉글랜드가 2-1로 앞서던 중 찰턴은 교체되었으나, 서독이 연장전 끝에 3-2로 승리했다.[31] 잉글랜드는 탈락했고, 106경기 49골의 기록을 세운 찰턴은 32세에 국가대표팀 은퇴를 결정했다.[31] 멕시코에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그는 램지에게 자신을 다시 고려하지 말라고 요청했다.[31]
찰턴의 출전 기록은 1973년 보비 무어가 경신했고,[31] 2023년 10월 현재 잉글랜드 역대 출전 순위 7위이다.[31] 찰턴의 득점 기록은 2015년 9월 8일 웨인 루니가 UEFA 유로 2016 예선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깨졌다.[31]
5. 플레이 스타일
보비 찰턴은 젊은 시절 왼쪽 측면 공격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속도와 민첩성을 보였다.[32] 성장하면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어 재능을 만개했다. 전성기 시절 찰턴은 정확한 패스와 양발을 사용한 강력한 슛으로 경기를 지휘하고 득점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32] 특히 왼발에서 나오는 정확하고 강력한 슛은 "캐논슛"이라 불렸다.[78]
그는 지구력, 정신력, 리더십, 겸손함으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심판이나 상대 선수와 언쟁을 벌이는 일이 없었다.[3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맷 버스비는 "그보다 더 인기 있는 축구 선수는 없었다. 그는 인간과 선수로서 가능한 한 완벽에 가까웠다."라고 말했다.[33]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 알프 램지는 "그는 내가 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고, 1966년 팀의 핵심이었다."라고 말했다.[33]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여겨진다.[78] 어머니의 형제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선수인 잭키 밀번이며, 보비는 밀번의 조카이다. 그러나 그에게 축구를 가르친 것은 삼촌이 아니라 어머니였다. 두 살 위의 형 잭키 찰턴도 월드컵 우승 멤버이다. 잉글랜드 대표팀 통산 득점 수에서 역대 3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주장으로서 침착하고 냉정한 플레이는 모범적이었고, 사생활에서도 항상 좋은 남편이자 두 딸의 좋은 아버지였다.
6. 은퇴 이후
찰턴은 1959년 맨체스터의 스케이트장에서 그의 아내 노르마 볼(Norma Ball)을 만나 1961년 결혼했다. 그들은 두 딸, 수잔과 안드레아를 두었다. 수잔은 1990년대 BBC의 기상캐스터였다. 그들은 손주들을 보았는데, 그중 수잔의 아들 로버트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44]
2007년, 다가오는 자서전 홍보 중 찰턴은 그의 형 잭과 오랜 불화를 겪었다고 밝혔다. 그의 아내 노르마와 어머니 시시(1996년 83세로 사망) 사이의 불화 이후 그들은 거의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45] 이 불화로 인해 바비 찰턴은 1992년 이후로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46]
잭은 2008년 12월 14일 그에게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그는 형에게서 상을 받자 '기절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상을 기다리는 동안 기립 박수를 받았다.[47]
찰턴은 1996년과 2000년 올림픽 게임, 2002 코먼웰스 게임을 위한 맨체스터의 입찰, 2006년 월드컵을 위한 잉글랜드의 입찰 그리고 런던의 성공적인 입찰을 위한 2012년 하계 올림픽을 홍보하는 데 기여했다.[48] 그는 1994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2002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의 초대 회원이 되었다. 그는 상을 받으면서 "국립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포함된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큰 영광입니다. 포함된 이름들을 보면 그들과 논쟁할 수 없다고 말해야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선수들이며 제가 함께 뛰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국립 축구 박물관(그는 "세상 어느 박물관보다 더 좋은 박물관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기관)의 명예 회장이었다.[49]
2009년 3월 2일, 찰턴은 맨체스터 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환상적입니다. 훌륭한 도시입니다. 저는 항상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50]
찰턴은 암 병원을 위한 모금을 포함한 여러 자선 활동에 참여했다.[51] 보스니아와 캄보디아 방문 후, 찰턴은 지뢰 제거 운동에 참여했고,[52] 지뢰 자문 그룹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향상된 민간 지뢰 제거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자신의 자선 단체인 찰턴 경 재단(구 Find a Better Way)을 설립했다.[53]
2011년 1월, 찰턴은 ''인사이드 유나이티드''와 ManUtd.com 독자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4위에 올랐다. 1위는 라이언 긱스, 그리고 에릭 칸토나, 조지 베스트가 그 앞에 있었다.[54]
그는 로레우스 세계 스포츠 아카데미 회원이었다.[55] 2012년 2월 6일, 찰턴은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 후 담석을 제거했다. 이로 인해 그는 로레우스 세계 스포츠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지 못했다.[56]
2016년 2월 15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올드 트래퍼드의 사우스 스탠드를 바비 찰턴 경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7] 제막식은 2016년 4월 3일 에버턴과의 홈 경기에서 열렸다.[58]
2015년, 그는 배스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7년 10월, 찰턴은 버턴어폰트렌트의 세인트 조지스 파크 국립 축구 센터에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을 갖게 되었다.[59]
2020년 11월, 찰턴이 치매 진단을 받았고 그 결과 공인 생활에서 물러났다는 것이 알려졌다.[60]
- 주장으로서 침착하고 냉정한 플레이는 모범적이었고 인망도 있었지만, 정반대의 방탕한 생활을 계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후배인 베스트의 인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물론, 밥비가 냉담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기에 가능했던 인간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챔피언스컵 결승에서 승리하고 10년 만에 잊었던 것을 되찾은 그날, 밥비는 승리 축하연에 불참하고 자기 방에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80]
- 어느 소년 축구 대회에서 밥비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그 소년이 바로 데이비드 베컴이다.
- 1960년대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한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기념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퍼드에는 베스트, 로와 함께 동상이 세워져 있다(세 사람 모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 2008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일본을 방문하여 감바 오사카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 중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 맷 버스비가 1994년, 빌 폴크스가 2013년에 각각 사망했기 때문에, 뮌헨 참사와 1968년 UEFA 챔피언스컵 우승을 모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으로서 경험한 마지막 사람이다. 또한, 2020년에 해리 그레그가 사망했기 때문에, 2023년 사망 시점까지 뮌헨 참사 생존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 후쿠시마현에 있는 스포츠 훈련 시설인 「J빌리지」의 이름은 그가 명명한 것이다.[86]
6. 1. 경영 및 행정
찰턴은 1973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감독이 되었으며,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동료인 노비 스타일스를 선수 겸 코치로 영입했다.[34] 그의 첫 시즌은 강등으로 끝났고, 다시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1975-76 시즌 초 존 버드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이적 문제로 이사회와 의견 충돌을 빚은 후 프레스턴을 떠났다.[34][35] 그는 그 해 CBE를 받았고, 여러 해 동안 계속된 경기 해설가로 BBC와 비정기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1976년 초, 그는 워터포드 유나이티드에서 세 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한 골을 넣었다. 그는 또한 호주 클럽 뉴캐슬 KB 유나이티드,[36][37] 퍼스 아주리,[38][39] 그리고 블랙타운 시티에서도 몇 차례 출전했다.[40]찰턴은 위건 애슬레틱의 이사로 합류했고, 1983년에는 잠시 동안 감독 대행을 맡았다. 그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했다.[41] 그는 또한 여행, 보석, 선물 바구니와 같은 분야에서 여러 사업체를 설립했고,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중국에서 축구 학교를 운영했다. 1984년, 그는 맷 버스비 경의 사임 이후 클럽에 "유명 인사"가 필요하다는 판단과 그의 축구 지식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사회에 합류하도록 초청받았다.[42] 2005년 6월, 팬들의 반대 속에 미국 글레이저 가문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했을 때, 찰턴은 새로운 구단주들에게 사과했다.[43]
1960년대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한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기념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퍼드에는 베스트, 로와 함께 동상이 세워져 있다(세 사람 모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2008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일본을 방문하여 감바 오사카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 중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후쿠시마현에 있는 스포츠 훈련 시설인 「J빌리지」의 이름은 그가 명명한 것이다.[86]
6. 2. 자선 활동
찰턴은 후쿠시마현에 있는 스포츠 훈련 시설인 「J빌리지」의 명명자이다.[86] 2008년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일본을 방문하여 감바 오사카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 중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6. 3. 한국과의 인연
7. 개인사
보비 찰턴의 형 잭 찰턴 또한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였으며 리즈 유나이티드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했던 그는 1966년 FIFA 월드컵에 동생과 함께 참가해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찰턴은 현역 시절 옐로카드를 총 2번 받았는데 한 번은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1966년 월드컵 경기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첼시 FC와의 풋볼 리그 경기에서였다.
찰턴은 1959년 맨체스터의 스케이트장에서 그의 아내 노르마 볼(Norma Ball)을 만나 1961년 결혼했다. 그들은 두 딸, 수잔과 안드레아를 두었다. 수잔은 1990년대 BBC의 기상캐스터였다. 그들은 손주들을 보았는데, 그중 수잔의 아들 로버트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44]
2007년, 다가오는 자서전 홍보 중 찰턴은 그의 형 잭과 오랜 불화를 겪었다고 밝혔다. 그의 아내 노르마와 어머니 시시(1996년 83세로 사망) 사이의 불화 이후 그들은 거의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45] 이 불화로 인해 바비 찰턴은 1992년 이후로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46]
잭은 2008년 12월 14일 그에게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그는 형에게서 상을 받자 '기절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상을 기다리는 동안 기립 박수를 받았다.[47]
찰턴은 1996년과 2000년 올림픽 게임, 2002 코먼웰스 게임을 위한 맨체스터의 입찰, 2006년 월드컵을 위한 잉글랜드의 입찰 그리고 런던의 성공적인 입찰을 위한 2012년 하계 올림픽을 홍보하는 데 기여했다.[48] 그는 1994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2002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의 초대 회원이 되었다. 그는 상을 받으면서 "국립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포함된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큰 영광입니다. 포함된 이름들을 보면 그들과 논쟁할 수 없다고 말해야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선수들이며 제가 함께 뛰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국립 축구 박물관(그는 "세상 어느 박물관보다 더 좋은 박물관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기관)의 명예 회장이었다.[49]
2009년 3월 2일, 찰턴은 맨체스터 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환상적입니다. 훌륭한 도시입니다. 저는 항상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50]
찰턴은 암 병원을 위한 모금을 포함한 여러 자선 활동에 참여했다.[51] 보스니아와 캄보디아 방문 후, 찰턴은 지뢰 제거 운동에 참여했고,[52] 지뢰 자문 그룹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향상된 민간 지뢰 제거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자신의 자선 단체인 찰턴 경 재단(구 Find a Better Way)을 설립했다.[53]
2011년 1월, 찰턴은 ''인사이드 유나이티드''와 ManUtd.com 독자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4위에 올랐다. 1위는 라이언 긱스, 그리고 에릭 칸토나, 조지 베스트가 그 앞에 있었다.[54]
그는 로레우스 세계 스포츠 아카데미 회원이었다.[55] 2012년 2월 6일, 찰턴은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 후 담석을 제거했다. 이로 인해 그는 로레우스 세계 스포츠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지 못했다.[56]
2016년 2월 15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올드 트래퍼드의 사우스 스탠드를 바비 찰턴 경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7] 제막식은 2016년 4월 3일 에버턴과의 홈 경기에서 열렸다.[58]
2015년, 그는 배스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7년 10월, 찰턴은 버턴어폰트렌트의 세인트 조지스 파크 국립 축구 센터에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을 갖게 되었다.[59]
2020년 11월, 찰턴이 치매 진단을 받았고 그 결과 공인 생활에서 물러났다는 것이 알려졌다.[60]
7. 1. 가족
보비 찰턴의 형 잭 찰턴은 리즈 유나이티드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한 수비수로, 동생과 함께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44] 찰턴은 1959년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아내 노르마 볼(Norma Ball)과 1961년 결혼하여 두 딸 수잔과 안드레아를 두었으며, 수잔의 아들 로버트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44]찰턴은 형 잭과 오랜 불화를 겪었으며, 아내 노르마와 어머니 시시(1996년 83세로 사망) 사이의 불화로 인해 1992년 이후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45][46] 하지만 2008년 12월 14일 잭은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평생 공로상을 동생에게 수여했고, 찰턴은 형에게 상을 받아 '기절할 정도'였다고 말했다.[47]
7. 2. 형 잭과의 관계
보비 찰턴의 형 잭 찰턴 또한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였으며 리즈 유나이티드 FC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했던 그는 1966년 FIFA 월드컵에 동생과 함께 참가해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7. 3. 치매 투병과 사망
보비 찰턴은 2020년 11월 치매 진단을 받았고, 그 결과 공인 생활에서 물러났다.[60] 2023년 10월 21일 메이클즈필드 종합병원에서 거주하던 요양원에서 입은 낙상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61][62] 이후 검시관은 후속 조사에서 그의 사망 원인을 "폐 외상, 낙상 및 치매"로 기록했다.[61][62] 그의 죽음으로 제프 허스트는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참가한 잉글랜드 선수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63]찰턴의 형 잭 찰턴 또한 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1966년 FIFA 월드컵에 동생과 함께 참가해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2007년, 찰턴은 자서전 홍보 중 형 잭과 오랜 불화를 겪었다고 밝혔다. 그의 아내 노르마와 어머니 시시(1996년 83세로 사망) 사이의 불화 이후 그들은 거의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45] 잭은 2008년 12월 14일 그에게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고, 찰턴은 형에게서 상을 받자 '기절할 정도'였다고 말하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47]
찰턴은 1959년 맨체스터의 스케이트장에서 아내 노르마 볼(Norma Ball)을 만나 1961년 결혼했다.[44] 그들은 두 딸, 수잔과 안드레아를 두었다. 수잔은 1990년대 BBC의 기상캐스터였다.[4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찰턴이 사망한 후 사흘 뒤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코펜하겐과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그를 추모하는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64] 장례식은 11월 13일에 거행되었으며, 맨체스터 대성당에서 주요 예배가 치러졌다.[65] 윌리엄 왕세자, 알렉스 퍼거슨을 비롯해 클럽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65]
8. 수상 및 서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팀'''
- FA 유스컵: 1953–54, 1954–55, 1955–56[6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69]
-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 1956–57, 1964–65, 1966–67
- FA컵: 1962–63; 준우승: 1956–57, 1957–58
- FA 자선 방패: 1965, 1967
- 유러피언컵: 1967–68
'''잉글랜드'''[69]
- FIFA 월드컵: 1966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3위: 1968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단독 우승): 1961, 1965, 1966, 1968, 1969
- *(공동 우승) 1958, 1959, 1960, 1964, 1970
'''개인'''[69]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5,[70] 1966,[71] 1967,[72] 1968[73]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 1965–66
- FIFA 월드컵 골든볼: 196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66, 1970
- 발롱도르: 1966; 준우승: 1967, 1968
- PFA 공로상: 1974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공로상: 1989
- FIFA 월드컵 역대 최고의 팀: 1994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1998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FIFA 100: 2004
- UEFA 골든 주빌리 폴: 14위
- BBC 스포츠 개인상 평생 공로상: 2008
- UEFA 회장상: 2008[74]
- 로레우스 평생 공로상: 2012
- FIFA 올해의 선수:
- *FIFA 인터넷 투표: 16위
- *IFFHS 투표: 10위
- 월드 사커 20세기 최고의 선수: 12위[75]
- IFFHS 레전드[76]
'''훈장 및 특별상'''
-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OBE): 1969
- 대영 제국 훈장 2등급 (CBE): 1974
- 기사 작위: 1994
- 욱일장 4등급: 2012[77]
8. 1. 클럽
보비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팀에서 1953-54, 1954-55, 1955-56 시즌 FA 유스컵에서 우승했다.[6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 1부에서 1956-57, 1964-65, 1966-67 시즌에 우승했고, 1962-63 시즌 FA컵 우승, 1965, 1967 시즌 FA 자선 방패 우승, 1967-68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했다.[69]8. 2. 국가대표팀
보비 찰턴은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69] 1968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3위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69] 또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1961, 1965, 1966, 1968, 1969년 단독 우승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69]8. 3. 개인
보비 찰턴은 1966년 발롱도르와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69] 1974년에는 PFA 공로상을,[69] 1989년에는 FWA 공로상을 받았다.[69] 2008년에는 UEFA 회장상과 BBC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고,[69][74] 2012년에는 라우레우스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69]1994년 FIFA 월드컵 드림팀에 선정되었고,[69] 2007년에는 PFA 세기의 팀에 포함되었다.[69] FIFA 20세기 최고의 선수 투표에서는 10위를 기록했다.[69] 2002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69] 월드사커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선수 12위에 올랐다.[75] 2004년에는 UEFA 골든 주빌리 투표에서 14위를 기록했고,[69] 풋볼리그 레전드 100인과[69] FIFA 100에도 선정되었다.[69]
찰턴은 1969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OBE)을 받았고,[69] 1974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CBE)으로 승급했으며,[69] 1994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69] 20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장 4등급을 수여받았다.[77]
8. 4. 서훈
보비 찰턴은 1969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OBE)을 받았고,[77] 1974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CBE)을 받았다.[77] 1994년에는 기사 작위에 서임되었다.[77] 또한 20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장 4등급을 수여받았다.[77]9. 경력 통계
9. 1. 클럽 기록
wikitext클럽 | 시즌 | 리그 | 컵 | 리그 컵 | 유럽(UEFA) | 합계 | ||||||||||||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1956–57 | 14 | 10 | 2 | 1 | 1 | 1 | 17 | 12 | |||||||||
1957–58 | 21 | 8 | 7 | 5 | 2 | 3 | 30 | 16 | ||||||||||
1958–59 | 38 | 29 | 1 | 0 | 39 | 29 | ||||||||||||
1959–60 | 37 | 18 | 3 | 3 | 40 | 21 | ||||||||||||
1960–61 | 39 | 21 | 3 | 0 | 42 | 21 | ||||||||||||
1961–62 | 37 | 8 | 6 | 2 | 43 | 10 | ||||||||||||
1962–63 | 28 | 7 | 6 | 2 | 34 | 9 | ||||||||||||
1963–64 | 40 | 9 | 7 | 2 | 6 | 4 | 54 | 15 | ||||||||||
1964–65 | 41 | 10 | 7 | 0 | 11 | 8 | 59 | 18 | ||||||||||
1965–66 | 38 | 16 | 7 | 0 | 8 | 2 | 54 | 18 | ||||||||||
1966–67 | 42 | 12 | 2 | 0 | 44 | 12 | ||||||||||||
1967–68 | 41 | 15 | 2 | 1 | 9 | 2 | 53 | 20 | ||||||||||
1968–69 | 32 | 5 | 6 | 0 | 8 | 2 | 48 | 7 | ||||||||||
1969–70 | 40 | 12 | 9 | 1 | 8 | 1 | 57 | 14 | ||||||||||
1970–71 | 42 | 5 | 2 | 0 | 6 | 3 | 50 | 8 | ||||||||||
1971–72 | 40 | 8 | 7 | 2 | 6 | 2 | 53 | 12 | ||||||||||
1972–73 | 36 | 6 | 1 | 0 | 4 | 1 | 41 | 7 | ||||||||||
합계 | 606 | 199 | 78 | 19 | 24 | 7 | 45 | 22 | 758 | 249 |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 1974–75 | 38 | 8 | 4 | 1 | 3 | 1 | 45 | 10 | |||||||||
합계 | 38 | 8 | 4 | 1 | 3 | 1 | 45 | 10 | ||||||||||
워터퍼드 유나이티드 FC | 1975–76 | 4 | 1 | |||||||||||||||
합계 | 4 | 1 | ||||||||||||||||
총 계 | 834 | 277 |
9. 2. 국가대표팀 기록
잉글랜드 대표팀 | ||
---|---|---|
년도 | 출장 | 득점 |
1958 | 6 | 7 |
1959 | 7 | 5 |
1960 | 8 | 6 |
1961 | 9 | 6 |
1962 | 8 | 1 |
1963 | 10 | 6 |
1964 | 8 | 2 |
1965 | 5 | 2 |
1966 | 15 | 6 |
1967 | 4 | 2 |
1968 | 8 | 3 |
1969 | 9 | 1 |
1970 | 9 | 2 |
합계 | 106 |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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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웹인용
Giggs nears Reds all-time record
http://news.bbc.co.u[...]
200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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