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고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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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고그라드는 볼가 강과 차리차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1589년 기록이 시작되었다. 19세기에는 하항 및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며 인구가 급증했다. 1925년에는 스탈린을 기리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로 개명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무대가 되어 도시가 파괴되었다. 1961년에는 현재의 이름인 볼고그라드로 변경되었고, 2013년부터는 특정일에 "영웅 도시 스타린그라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주요 문화 시설로는 마마예프 쿠르간 기념 단지,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 등이 있으며, 볼고그라드 아레나에서 2018년 FIFA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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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고그라드주 - 보로네시 전투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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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고그라드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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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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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볼고그라드 |
러시아어 명칭 | Волгоград |
로마자 표기 | Volgograd |
이전 명칭 | 차리친 (Tsaritsyn) |
이전 명칭 로마자 표기 | Tsaritsyn |
이전 명칭 | 스탈린그라드 (Stalingrad) |
이전 명칭 로마자 표기 | Stalingrad |
도시의 날 | 9월 두 번째 일요일 |
위치 | 러시아볼고그라드주 |
행정 구역 | 볼고그라드 도시 округ |
설립일 | 1589년 |
도시 지위 획득 | 1780년 |
면적 | 859.4 km² |
시간대 | 모스크바 시간 (UTC+3) |
우편 번호 | 400000–400002, 400005–400012, 400015–400017, 400019–400023, 400026, 400029, 400031–400034, 400036, 400038–400040, 400042, 400046, 400048–400055, 400057–400059, 400062–400067, 400069, 400071–400076, 400078–400082, 400084, 400086–400089, 400093, 400094, 400096–400098, 400105, 400107, 400108, 400110–400112, 400117, 400119–400125, 400127, 400131, 400136–400138, 400700, 400880, 400890, 400899, 400921–400942, 400960–400965, 400967, 400970–400979, 400990–400993 |
지역 번호 | +7 8442 |
자동차 번호판 | 34, 134 |
정치 | |
시장 | 블라디미르 마르첸코 |
시의회 | 볼고그라드 시 두마 |
인구 | |
2010년 인구 조사 | 1,021,215 명 |
2021년 인구 추정 | 1,028,036 명 |
기타 | |
공식 웹사이트 | 볼고그라드 시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볼고그라드의 역사는 16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 차리친 (1589년 ~ 1925년) ===
1555년에 건설된 차리친은 차리차 강(Tsaritsa River)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0] 1589년 차리차 강과 볼가 강의 합류점에 요새가 세워지면서 무역 정착지로 발전했다.[5] 17세기 초에는 350~400명의 수비대가 주둔했으며, 1607년에는 바실리 슈이스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도시 최초의 돌 교회인 세례자 요한 성당이 건설되었다.
1670년 스테판 라진이 이끄는 군대가 요새를 점령했다가 한 달 후 철수했고, 1708년에는 콘드라티 뷸라빈이 이끄는 코사크 반란군이 요새를 점령했다. 1717년에는 크림 타타르의 바흐티 게라이가 이끄는 쿠반 습격자들이 도시를 포위하고 수천 명을 노예로 삼았다. 1774년에는 예멜리안 푸가초프가 도시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691년 모스크바는 차리친에 관세소를 설치했다.[12] 이후 카잔 주, 아스트라한 주를 거쳐 1773년 주 및 지역 도시로 지정되었고, 1779년부터 사라토프 총독령에 속했다. 1780년에는 사라토프 주 관할이 되었다.
19세기 차리친은 중요한 하항이자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895년에만 5만 명이 넘는 농민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왔다.[32] 인구는 1807년 3,000명 미만에서 1900년 약 84,000명, 1914년에는 13만 명으로 급증했다.[13] 1862년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고, 1872년에는 최초의 극장, 1907년에는 최초의 영화관이 문을 열었다. 1913년에는 최초의 트램 노선이 개통되고 도시 중심부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차리친은 유럽에서 가장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지역 중 하나였으며, 사망률은 1,000명당 33.6명에 달했다. 처리되지 않은 하수가 강으로 흘러들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 차례 콜레라 유행이 발생했다.[13] 1908년부터 1910년까지 3년 동안 콜레라로 1,045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1.01%에 해당한다.[32]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미친 승려' 일리오도르가 차리친에 거주하며 러시아 정교회 내 분열을 일으키고, 반유대주의 선동과 폭력을 조장했다. 그가 남긴 가장 영구적인 흔적은 1909년에 건설된 성령 수도원이다.[13]
1917년부터 1923년까지의 러시아 내전 동안 차리친은 1917년 11월 소비에트 통제하에 들어왔다. 1918년 표트르 크라스노프가 이끄는 백군 부대가 도시를 포위했으나, 적군은 세 차례 공격을 물리쳤다. 1919년 6월 안톤 덴킨 장군이 이끄는 남러시아 무장군이 차리친을 점령하여 1920년 1월까지 점령했다. 이 전투는 차리친 전투로 알려져 있다.
=== 스탈린그라드 (1925년 ~ 1961년) ===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고 요셉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1925년 4월 10일 차리친은 스탈린그라드로 개명되었다.[15][16] 이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백군에 맞선 도시 방어와 스탈린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었다.[17]
스탈린 시대에 스탈린그라드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업화 정책 아래 남러시아의 중요한 중공업 도시로 발전했으며, 철도와 강을 통한 환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0년에는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고, 1년 후에는 현재 볼고그라드 주립 사범대학교의 전신인 스탈린그라드 공업 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소비에트 통제하에 소수 민족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탄압을 받았다. 1926년에는 이 지역 유일의 유대인 학교가 폐쇄되었고,[14] 1928년에는 지역 행정위원회가 스탈린그라드의 회당을 폐쇄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저항으로 1929년에 특별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위원회는 시 당국을 설득하여 회당 건물이 주요 수리와 안전 점검이 필요하며,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800명이 넘는 예배자들에게는 너무 작다고 주장했다.[14]
1931년, 독일인 정착촌인 옛 사렙타(1765년 설립)가 스탈린그라드의 구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적군 지역"(Krasnoarmeysky Rayon)으로 개명되었으며, 도시에서 가장 큰 지역이었다.
====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단일 전투 중 하나로,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졌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도시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고, 9월부터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도시 중앙역은 13번, 마마예프 쿠르간은 8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격전이 벌어졌다.
1942년 11월, 소련군의 반격(우라누스 작전)으로 독일 제6군과 추축군이 포위되었고, 1943년 1월 31일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항복하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 전투로 도시의 99%가 파괴되었고, 50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1,515명으로 줄었다.[21]
1945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 영웅 도시 칭호를 수여했고, 영국의 조지 6세는 시민들의 용기를 기려 스탈린그라드의 검을 수여했다.[22]
=== 볼고그라드 (1961년 ~ 현재) ===
1961년 11월 10일, 니키타 흐루쇼프 정권은 탈스탈린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 이름을 볼고그라드("볼가 도시")로 변경했다.[11]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저항의 상징으로서 스타린그라드가 지닌 중요성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도시의 스탈린 시대 이름을 부활시키자는 제안이 제기되었으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 5월 21일, 공산당의 로만 그레벤니코프가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에는 도시 이름을 차리친으로 되돌리자는 요구가 있었지만, 당국은 거부했다.
2013년 1월 30일, 볼고그라드 시의회는 매년 특정한 9일 동안 시 공식 발표에서 "영웅 도시 스타린그라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24][25][26]
날짜 | 기념일 |
---|---|
2월 2일 |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전일 |
2월 23일 | 조국 수호자의 날 |
5월 9일 | 승전절 |
6월 22일 |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 |
8월 23일 | 스탈린그라드 전투 개시일 |
9월 2일 | 대일 전승 기념일 |
11월 19일 | 우라누스 작전 개시일 |
12월 9일 | 조국의 영웅의 날 |
[24]
2013년 1월,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시 이름을 스타린그라드로 영구적으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에 서명했다.[25] 푸틴 대통령은 지역 주민 투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답했다.[27]
2. 1. 차리친 (1589년 ~ 1925년)
차리친(Царицынъ)은 1555년에 건설되었으며, 차리차 강(Tsaritsa River)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0]
차리친에 대한 기록은 1589년 차리차 강(Царица (приток Волги), Tsaritsa River)과 볼가 강의 합류점에서 시작된다.[5] 건축물은 차리차 강 어귀의 오른쪽 강둑 위에 약간 높은 곳에 세워졌으며, 곧 무역 정착지의 중심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수비대는 350~400명으로 구성되었다. 1607년 요새 수비대는 바실리 슈이스키의 군대에 맞서 6개월 동안 반란을 일으켰다. 그 다음 해에는 세례자 요한 성당을 봉헌하는 도시 최초의 돌 교회가 건설되었다.
1670년 스테판 라진의 군대가 요새를 점령했고, 한 달 후에 철수했다. 1708년 반란을 일으킨 코사크 콘드라티 뷸라빈(1708년 7월 사망)이 요새를 점령했다. 1717년 쿠반 포그롬(Кубанский погром, Kuban pogrom)에서 쿠반의 습격자들은 크림 타타르 바흐티 게라이의 지휘 아래 도시를 포위하고 그 지역의 수천 명을 노예로 삼았다. 1774년 8월 코사크 지도자 예멜리안 푸가초프는 도시를 공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691년 모스크바는 차리친에 관세소를 설립했다.[12] 1708년 차리친은 카잔 주에 배속되었고, 1719년에는 아스트라한 주에 배속되었다. 172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시 인구는 408명이었다. 1773년 이 정착지는 주 및 지역 도시로 지정되었다. 1779년부터 사라토프 총독령에 속했다. 1780년 이 도시는 새로 설립된 사라토프 주의 관할에 들어왔다.
19세기에 차리친은 중요한 하항(河港)과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895년에만 5만 명이 넘는 농민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차리친으로 왔다.[32] 인구는 1807년 3,000명 미만에서 1900년 약 84,000명, 1914년에는 13만 명으로 증가했다.[13] 1897년에는 893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1920년대 중반에는 2,000명을 넘었다.[14] 19세기 말 차리친은 국경 도시였으며, 거의 모든 건물이 나무로 지어졌고 포장 도로나 상하수도 시설이 없었다.[13] 최초의 철도는 1862년에 도시에 도착했고, 최초의 극장은 1872년에, 최초의 영화관은 1907년에 문을 열었다. 1913년 차리친은 최초의 트램 노선을 확보했고, 도시 중심부에 최초의 전등이 설치되었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지역 중 하나였으며, 사망률은 1,000명당 33.6명이었다. 처리되지 않은 하수가 강으로 흘러들어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여러 차례의 콜레라 유행을 일으켰다.[13] 지역 시 당국은 경제적 고려 사항을 들어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도시의 식수는 강에서 직접 끌어왔고, 취수관은 항구와 하수구에 너무 가까웠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3년 동안 차리친은 콜레라로 1,045명을 잃었는데, 이는 당시 인구의 1.01%에 해당한다.[32]
1908년부터 1911년까지 차리친은 '미친 승려' 일리오도르로 알려진 세르게이 트루파노프의 거주지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내분과 권력 투쟁을 일으키고, 지역 주민들에게 반유대주의 열정과 폭력을 선동하며, 언론을 공격하고, 지역 시 당국을 비난했다. 그가 도시에 남긴 가장 영구적인 흔적은 1909년에 건설된 성령 수도원(Свято-Духовский монастырь, Holy Spirit Monastery)이다.[13]
볼가 하류 지역은 혁명 활동과 사회 불안의 온상이었다. 차르 정부가 콜레라로부터 기본적인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고, 엄격하지만 효과 없는 보건 조치를 대중에게 적용한 결과, 1829년 여러 차례의 폭동, 1890년대, 1900년대 초에 폭동이 발생했으며, 이는 여러 러시아 혁명의 무대를 마련하고 정치적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32] 1917년부터 1923년까지의 러시아 내전 동안 차리친은 1917년 11월 소비에트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1918년 표트르 크라스노프 지휘하의 백군 부대가 차리친을 포위했으나, 적군은 백군의 세 차례 공격을 물리쳤다. 1919년 6월 안톤 덴킨 장군이 지휘하는 남러시아 무장군이 차리친을 점령하여 1920년 1월까지 점령했다. 1918년 7월부터 1920년 1월까지의 전투는 차리친 전투(Battle for Tsaritsyn)로 알려지게 되었다.
1589년 타타르의 습격에 대비하여 세워진 사리 수(Sary Su) 요새(현지 타타르인의 언어로 "황색의 물"이라는 뜻)가 마을의 시작이다. 곧 무역 기지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Sary Su"의 발음이 변하여 "여제의 것"을 의미하는 차리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630년, 호 우르룩 태사가 이끄는 칼미크인이 볼가 강 유역의 노가이 오르다를 몰아내고 칼미크 칸국(1630년 - 1771년)을 건국했다. 1670년(스테판 라진), 1774년(예멜리안 푸가초프) 두 차례에 걸쳐 코사크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에서는 전장이 되었다. 1918년 볼셰비키군이 점령했지만, 안톤 덴킨의 백군의 공격을 받았다.
2. 2. 스탈린그라드 (1925년 ~ 1961년)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고 요셉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1925년 4월 10일 차리친은 스탈린그라드로 개명되었다.[11][15][16] 이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백군에 맞선 도시 방어와 스탈린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었다.[17]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은 스탈린(Сталинru)과 러시아어로 도시를 뜻하는 '그라드'(градru)의 합성어이다.스탈린 시대에 스탈린그라드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업화 정책 아래 남러시아의 중요한 중공업 도시로 발전했으며, 철도와 강을 통한 환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0년에는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고, 1년 후에는 현재 볼고그라드 주립 사범대학교의 전신인 스탈린그라드 공업 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소비에트 통제하에 소수 민족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탄압을 받았다. 1926년에는 이 지역 유일의 유대인 학교가 폐쇄되었고,[14] 1928년에는 지역 행정위원회가 스탈린그라드의 회당을 폐쇄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저항으로 1929년에 특별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위원회는 시 당국을 설득하여 회당 건물이 주요 수리와 안전 점검이 필요하며,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800명이 넘는 예배자들에게는 너무 작다고 주장했다.[14]
1931년, 독일인 정착촌인 옛 사렙타(1765년 설립)가 스탈린그라드의 구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적군 지역"(Krasnoarmeysky Rayon)으로 개명되었으며, 도시에서 가장 큰 지역이었다.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의 포위를 받아 6개월 이상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참조)
2. 2. 1.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추축국 군대는 이 도시를 공격했고, 1942년 이 도시는 전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의 현장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단일 전투였으며, 사상자는 1250000명[18] 에서 2500000명[19][20]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전투는 1942년 8월 23일에 시작되었고, 같은 날 도시는 맹렬한 공습을 받아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7월 14일에는 이미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9월까지 전투는 도심에 이르렀다. 그 격렬함은 전례가 없었다. 도시 중앙역은 13번이나 손바뀜되었고,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 중 하나인 마마예프 쿠르간은 8번이나 탈환되었다.
11월 초 독일군은 도시의 90%를 장악하고 소련군을 두 개의 좁은 포켓에 몰아넣었지만, 11월 19일 소련군이 대규모 반격을 개시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의 최후 저항 거점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군이 소련군에 포위되었다. 1943년 1월 31일, 제6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항복했고, 2월 2일 잔존 독일군이 제거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났다.
폭격과 5개월간의 전투로 도시의 99%가 파괴되었다.[21] 전투 전 500000명이 넘었던 인구는 전투가 끝난 후 1515명만 남았다.[21]
1945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저항을 기려 영웅 도시 칭호를 수여했다. 영국의 조지 6세 국왕은 시민들의 용기를 인정하여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에게 보석이 박힌 "스탈린그라드의 검"을 수여했다.[22]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는 청색 작전에 의한 독일군의 포위를 받아 6개월 이상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전투로 도시는 황폐해지고 인구도 격감했지만, 격전을 뚫고 나온 스탈린그라드는 전후 “영웅 도시”가 되었고, 현재도 시의 문장에는 금성장이 그려져 있다. 격전지를 바라보는 마마예프 쿠르간에 많은 기념비가 세워졌다.
2. 3. 볼고그라드 (1961년 ~ 현재)
1961년 11월 10일, 니키타 흐루쇼프 정권은 탈스탈린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 이름을 볼고그라드("볼가 도시")로 변경했다.[11] 이 조치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저항의 상징으로서 스타린그라드가 지닌 중요성 때문에 논란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도시의 스탈린 시대 이름을 부활시키자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이름 변경에 대한 지역 사회의 지지가 상당했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는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 5월 21일, 공산당의 로만 그레벤니코프가 득표율 32.47%로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레벤니코프는 당시 러시아 연방 구성체 행정 중심지 중 가장 젊은 시장이었다.
2010년, 러시아 군주제 지지자들과 정교회 단체 지도자들은 도시의 이름을 원래 이름인 차리친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당국은 그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2013년 1월 30일, 볼고그라드 시의회는 매년 특정한 9일 동안 시 공식 발표에서 "영웅 도시 스타린그라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24][25][26] "영웅 도시 스타린그라드"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날짜는 다음과 같다.
날짜 | 기념일 |
---|---|
2월 2일 |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전일 |
2월 23일 | 조국 수호자의 날 |
5월 9일 | 승전절 |
6월 22일 |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 |
8월 23일 | 스탈린그라드 전투 개시일 |
9월 2일 | 대일 전승 기념일 |
11월 19일 | 우라누스 작전 개시일 |
12월 9일 | 조국의 영웅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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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고그라드는 볼고그라드주의 행정 중심지이다.[29] 러시아의 행정 구역 체계 내에서 '''주 소속 도시'''로 편입되어 있으며, 이는 구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행정 단위이다.[30] 지방 자치 구역으로서 볼고그라드는 '''볼고그라드 도시 구역'''으로 편입되어 있다.[31]
볼가강은 목재, 곡물, 목화, 주철, 생선, 소금, 아마인유를 운송하는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했지만, 볼고그라드의 경제적 영향력은 비교적 작았다. 1871년 최초의 철도가 모스크바와 연결되면서 이 고립된 지역은 갑자기 효율적으로 제국의 다른 지역과 연결되었다. 이 연결 덕분에 이 지역은 러시아 대부분을 공급하는 주요 곡물 생산, 가공 및 수출 지역이 되었다. 1890년대까지 볼고그라드(당시 차리친)의 경제는 주로 곡물, 나프타, 생선, 소금 무역에 의존했다.[32] 현대 볼고그라드는 중요한 공업 도시로 남아 있다. 산업에는 조선, 정유, 철강 및 알루미늄 생산, 볼고그라드 트랙터 공장과 티탄-바리카디 공장에서의 중장비 및 차량 제조, 화학 생산 등이 포함된다. 대규모 볼고그라드 수력 발전소는 볼고그라드 북쪽 가까이에 있다.
볼고그라드는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의 주요 철도 교차점으로, 프리볼시스카야 철도(Privolzhskaya Railway)가 지나간다. 볼고그라드 역(Volgograd railway station)에서는 모스크바, 사라토프, 아스트라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Donbas) 지역, 코카서스(Caucasus) 및 시베리아(Siberia)로 연결되는 철도가 있다. 볼고그라드는 1952년에 개통되어 볼가강과 돈강이라는 두 개의 큰 강을 연결하는 볼가-돈 운하(Volga–Don Canal)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의 칼레(Calais)를 카자흐스탄의 리데르(Ridder, Kazakhstan)와 연결하는 유럽에서 가장 긴 노선인 유럽 고속도로 E40(European route E40)이 볼고그라드를 통과한다. 모스크바와 카스피해를 연결하는 M6 고속도로도 이 도시를 통과한다. 1995년부터 건설 중이던 볼고그라드 다리(Volgograd Bridge)는 2009년 10월에 개통되었다.[33] 도시의 강변 터미널은 볼가강을 따라 지역 여객 운송의 중심지이다.
볼고그라드는 덥고 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특징인 온난 습윤 대륙성 기후(쾨펜 기후 분류 ''Dfa'')를 가지고 있으며, 냉량 반건조 기후(쾨펜 기후 분류 ''BSk'')와 인접해 있다. 강수량은 적으며 연중 거의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6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며, 볼고그라드는 이 전투의 중심지였다. 1945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저항을 기려 영웅 도시 칭호를 수여했으며, 영국의 조지 6세는 시민들의 용기를 인정하여 보석이 박힌 "스탈린그라드의 검"을 수여했다.[22]
2013년 1월,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시 이름을 스타린그라드로 영구적으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에 서명했다.[25] 푸틴 대통령은 그러한 조치는 지역 주민 투표가 선행되어야 하며, 러시아 당국은 그러한 주민 투표를 실시하는 방법을 검토할 것이라고 답했다.[27]
3. 행정 구역
4. 경제
오늘날 볼고그라드는 러시아에서 중요한 현대적인 산업 도시이다. 조선, 석유 정제, 제철, 알루미늄 제련, 기계·차량 제조, 화학 공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이 지역의 공장 등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볼고그라드 댐과 볼가 수력 발전소가 시 북쪽에 있으며, 볼가 강을 막아 거대한 댐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5. 교통
볼고그라드 국제공항(Volgograd International Airport)은 러시아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안탈리아(Antalya), 예레반(Yerevan), 악타우(Aktau)로 연결되는 항공편을 제공한다.
볼고그라드의 대중교통 시스템에는 볼고그라드 메트로트램(Volgograd metrotram)으로 알려진 경전철 서비스가 포함된다. 지역 대중교통은 버스, 트롤리버스, 트램이 제공한다.
볼가강(Volga River)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교통로이다.
6. 인구
연도 인구 1897년 56,500명 1926년 153,502명 1939년 445,312명 1959년 593,844명 1970년 817,647명 1979년 928,692명 1989년 998,894명 2002년 1,011,417명 2010년 1,021,215명 2021년 1,028,036명
20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볼고그라드 시민(999,785명)의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34]민족 인구 비율 러시아인 922,321명 92.3% 아르메니아인 15,200명 1.5% 우크라이나인 12,216명 1.2% 타타르인 9,760명 1.0% 아제르바이잔인 6,679명 0.7% 카자흐인 3,831명 0.4% 벨라루스인 2,639명 0.3% 한국인 2,389명 0.2% 기타 24,750명 2.5%
7.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 평균 최고 기온 (°C) -3.5 -3.3 3.3 14.5 21.4 26.6 29.3 28.1 21.3 12.7 3.4 -2.0 12.7 평균 최저 기온 (°C) -9.2 -9.9 -4.0 4.1 10.1 15.1 17.5 16.2 10.3 3.9 -2.5 -7.6 3.7 평균 강수량 (mm) 38 30 28 28 39 41 35 30 29 29 34 45 406 평균 강우일수 9 7 8 12 12 12 11 8 10 11 12 11 123 평균 강설일수 20 18 11 2 0.03 0 0 0 0.1 1 9 18 79 평균 상대 습도 (%) 88 86 81 64 57 56 53 51 61 73 86 89 70 평균 일조 시간 66.1 96.9 138.4 204.2 290.8 308.4 329.3 300.2 228.9 155.8 63.6 42.5 2225.1 최고 기온 기록 (°C) 12.3 15.9 20.5 29.2 37.2 40.1 40.9 42.7 37.8 31.0 18.5 12.3 42.7 최저 기온 기록 (°C) -33.0 -32.5 -25.8 -12.8 -1.1 1.1 7.2 4.5 -1.5 -12.2 -25.8 -27.8 -33.0 8. 문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화해와 연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볼고그라드는 세계 각지의 도시들과 자매 도시 결연을 맺었다. 최초의 "자매 도시" 중 하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와 영국의 코번트리 사이에 맺어졌는데, 두 도시 모두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2022년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이 관계는 중단되었다.[23]
1961년 11월 10일, 니키타 흐루쇼프 정권은 탈스탈린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 이름을 볼고그라드("볼가 도시")로 변경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저항의 상징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고, 도시 이름을 복원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2013년 1월 30일, 볼고그라드 시의회는 매년 특정한 9일 동안 시 공식 발표에서 "영웅 도시 스탈린그라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24][25][26] 다음은 "영웅 도시 스탈린그라드"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날짜이다.날짜 기념일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전일 2월 23일 조국 수호자의 날 5월 9일 승전절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 8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개시일 9월 2일 일본 패전 기념일 11월 19일 우라누스 작전 개시일 12월 9일 조국의 영웅의 날
2013년 1월,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시 이름을 스탈린그라드로 영구적으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에 서명했다.[25] 푸틴 대통령은 지역 주민 투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답했다.[27]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념하는 주요 시설로는 마마예프 쿠르간 기념 কমপ্লেক্স,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 파블로프의 집 등이 있다. 또한, 볼고그라드 천문관은 스탈린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동독이 선물한 것이다.[35]
8. 1. 마마예프 쿠르간 기념 কমপ্লেক্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격전지였던 마마예프 쿠르간(러시아어: Мамаев Курган) 언덕에는 전투를 기념하는 거대한 기념 시설이 세워져 있다. 이 시설의 중심에는 상징적인 조각상인 《조국 어머니상》(The Motherland Calls)이 있다.
기념 시설에는 군사 영광의 전당(Hall of Military Glory)이 있는데, 이곳에는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한 영웅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있다. 이 기념관에서는 매시간 근위병 교대식이 거행되며, 따뜻한 계절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전당 맞은편에는 쓰러진 병사를 안고 슬퍼하는 여성을 묘사한 '어머니의 슬픔' 조각상이 있다. 여름철에는 이 조각상 주변에 '눈물의 호수'(Lake of Tears)라고 불리는 작은 분수대가 설치된다.
시설의 언덕 아래에는 여러 개의 상징적인 영웅적 행위 조각상이 있는 영웅 광장(Heroes' Square)이 있다. 이 광장은 때때로 가장 유명한 조각상인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하다"(Having withstood, we conquered death)의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볼가 강 우안, 마마예프 쿠르간에는 어머니 조국상과 수호자상이 세워져 있다.[82] 마마예프라는 이름은 타타르-몽골군의 마마이 칸이 야영을 했던 곳에서 유래한다.
8. 2.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추축국 군대는 이 도시를 공격했고, 1942년 이 도시는 전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의 현장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단일 전투였다.(사상자 추산은 1,250,000명[18] 에서 2,500,000명[19][20]에 이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은 볼가 강 기슭에 위치한 대규모 문화 시설이다. 펜젠스카야 거리(현 소베츠카야 거리)를 따라 위치한 건물 군인 "펜자 방어 교차점" 부지에 있으며, 13근위 소총사단이 이곳을 방어했다. 이 시설에는 폭격으로 파괴된 상태로 보존된 게르하르트 제분소(Gerhardt's Mill)가 포함되어 있다. 시설 부지 내 박물관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그림인, 현재 "조국 어머니상"이 서 있는 마마예프 쿠르간에서 본 전장의 파노라마 그림(panoramic painting)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는 1940년대 소련 군사 장비, 다수의 무기 전시품(유명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소총 포함), 군복, 전투에 참여한 장군과 병사들의 개인 소지품, 그리고 전투의 상세 지도와 연표가 전시되어 있다.
8. 3. 파블로프의 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추축국 군대는 볼고그라드를 공격했고, 1942년 이 도시는 중요한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단일 전투로, 사상자는 명[18]에서 명[19][20]에 이른다.
전투는 1942년 8월 23일에 시작되었고, 같은 날 도시는 맹렬한 공습을 받아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9월까지 전투는 도심에 이르렀고, 그 격렬함은 전례가 없었다. 도시 중앙역은 13번이나 손바뀜되었고, 마마예프 쿠르간(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 중 하나)은 8번이나 탈환되었다.
11월 초 독일군은 도시의 90%를 장악하고 소련군을 두 개의 좁은 포켓에 몰아넣었지만, 11월 19일 소련군이 대규모 반격을 개시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의 최후 저항 거점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군이 소련군에 포위되었다. 1943년 1월 31일, 제6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항복했고, 2월 2일 잔존 독일군이 제거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났다.
폭격과 5개월간의 전투로 도시의 99%가 파괴되었다.[21] 전투 전 50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전투가 끝난 후 1,515명만 남았다.[21]
8. 4. 볼고그라드 천문관
볼고그라드 천문관은 스탈린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동독이 선물한 것이다.[35]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물 외관은 별로 장식된 주두가 얹어진 6개의 토스카나식 기둥이 있는 로마 신전과 같은 모습이다. 베라 무히나(Vera Ignatyevna Mukhina)가 설계한 돔에는 비둘기를 든 천체측량기를 들고 있는 평화의 여신상이 꼭대기에 있다. 1954년에 개관한 이 천문관은 소련에서 두 번째로 특별히 건설된 천문관이었다. 입구 내부에는 해군 제독의 흰색 제복을 입은 스탈린의 벽화가 있으며, 주변에는 평화의 상징인 백합과 비둘기가 있다. 벽화 양쪽에는 소련의 로켓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와 최초로 우주로 진출한 소련의 조종사이자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의 흉상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칼 자이스 사의 예나 공장에서 최초로 생산된 자이스 투영기가 설치되어 있다.[36] 설치된 투영기는 1954년부터 1964년 사이에 생산된 UPP-23/1s 모델이며, 현재도 볼고그라드 천문관에서 정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9년에는 디지털 시스템인 Fulldome Pro 모델 LDX12가 추가되었다. 자이스는 또한 365mm 굴절 망원경을 제공했으며, 이는 현재도 운영 중이다.[37] 이 천문관은 과학 및 교육 강연을 개최하고, 풀돔 쇼를 제공하며, 정기적인 투어를 진행하고, 주간 및 야간 관측을 제공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천문학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38]
8. 5. 기타 문화 시설
파노라마 박물관 맞은편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또 다른 생존 기념물인 파블로프의 집이 있다. 근처에는 레닌 동상, 전쟁을 극복한 어린이들을 기리는 동상, 파블로프의 집 방어자들을 기리는 동상 등 여러 기념비와 기념물이 있다.[1]
볼고그라드 악기 박물관은 볼고그라드 지역 향토 박물관의 분관이다.[1]
9. 종교
볼고그라드는 중요하고 번화한 무역로를 따라 위치한 항구 도시로서,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해 왔다. 1897년 조사에 따르면 유대인 893명, 무슬림 1,729명, 가톨릭 신자 193명이 있었다.[39]
1911년에 완공된 성령 수도원(Holy Spirit Monastery)은 세르게이 트루파노프(Sergei Trufanov)가 주도하여 건설되었다.[13] 이 수도원에는 교회, 수도원, 강당, 학교, 작업장, 인쇄소, 구빈원(almshouse), 정원, 분수 등이 있었다.[40] 1912년에는 남녀 구역으로 나뉘었고, 1914년에는 도시 학교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으며, 1915년에는 전쟁터에 아버지를 둔 소녀들을 수용하였다.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중에는 의무실로 사용되었고, 볼셰비키(Bolsheviks)와 백군이 번갈아 사용하였다. 1923년 수도원은 폐쇄되었고, 이후 고아원, 도서관, 영화관,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군에 넘겨져 대부분 철거되었다.[41] 1991년 소련 붕괴 후, 볼고그라드 교구(Diocese of Volgograd)가 설립되었고, 군은 수도원 잔해를 교회에 반환했다. 1992년에는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현재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42]
베이트 다비드 시나고그(Beit David Synagogue)는 소비에트 시대 유대인 지도자 다비드 콜로틸린(David Kolotili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건물은 1888년에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1903년 차리친(Tsaritsyn) 관광 안내서에는 이 건물에 대한 언급이 없어 1888년 건설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13] 이 건물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로, 세기 전환기 이후 차리친에 건설된 주택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이다.[46] 원래 건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1997년까지 폐허 상태였다. 1999년까지 재건되었지만 복원되지는 않았다.[45] 흐바드-루바비치(Chabad-Lubavitch) 단체의 노력으로 2003년 유대인 공동체에 반환되었고, 2007년에 재봉헌식이 거행되었다.[47] 1층에는 기도실, 2층에는 공동 사무실이 있다.[45] 발라히닌스카야(Balachninskaya) 거리 2번지에 위치하며, 무료 급식소, 유대인 학교, 야간 아동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Zalman Yoffe 랍비가 이끌고 있다.[48]
10. 교육
볼고그라드에는 여러 고등 교육 기관이 있다. 대표적인 대학교로는 볼고그라드 국립대학교, 볼고그라드 국립기술대학교(구 볼고그라드 공과대학교), 볼고그라드 국립사범대학교, 볼고그라드 국립의과대학교 등이 있다.[49][50][51][83][84][85]
학교 명칭 | 원어 명칭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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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고그라드 국립대학교 | Volgograd State University | |
볼고그라드 국립기술대학교 | Volgograd State Technical University | 구 볼고그라드 공과대학교 |
볼고그라드 국립농업대학교 | Volgograd State Agriculture University | |
볼고그라드 국립의과대학교 | The Volgograd State Medical University | |
볼고그라드 국립건축토목대학교 | Volgograd State University of Architecture and Civil Engineering | |
볼고그라드 산업대학교 | Volgograd Academy of Industry | |
볼고그라드 경영대학교 | Volgograd Academy of Business Administration | |
볼고그라드 국립사범대학교 | Volgograd State Pedagogical University |
11.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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