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시는 일본 혼슈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세토 내해에 접해 있으며 오타강 삼각주 위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1589년 모리 데루모토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사노씨의 지배 하에 발전했다. 1945년 8월 6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재건되어 평화 기념 도시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 도시이자, 다양한 문화 시설과 관광 명소를 갖춘 도시로, 8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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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는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오타가와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아, 아키군후추정이나 히가시히로시마시 사이조에 국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3]16세기 말, 전국 시대 무장 모리 데루모토가 오타가와 삼각주를 간척하고 히로시마성을 쌓으면서 지역의 중심이 오타가와 삼각주로 이동하며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는 히로시마 번 42만 석의 성하 마을로서 번주 아사노씨 아래에서 발전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육해군 거점이 집중된 군사 도시(군도)가 되었고, 청일 전쟁 때는 히로시마 대본영이 설치되어 메이지 천황이 머무르며 제7회 제국 의회가 히로시마시에서 개최되는 등 일시적인 수도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62] 히로시마 성 내에는 대일본제국 육군 제5사단 사령부, 히로시마 역 서쪽에는 제2총군 사령부가 있었고, 주변에는 각 부대 주둔지가 배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8월 6일, 미군 전략폭격기 B-29 "에노라 게이"가 히로시마시 중심부 아이오이바시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하여, 버섯구름과 함께 도시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투하 당일 수만 명, 1945년 말까지 13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원이 사망했고, 생존자들도 화상 흔적(켈로이드), 방사선 후유증, 정신적 후유증(PTSD 등), 유전에 대한 불안 등으로 평생 고통받았다.
1945년 원폭 투하 이후 인구가 급감했으나, 전후 중공업과 마쓰다(아키군후추정) 등의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부흥하여 세토나이 공업 지대의 주요 공업 도시가 되었다. 1980년4월 1일에는 전국에서 10번째로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고, 1985년 3월에는 인구가 100만 명을 돌파하여 현재는 전국 시에서 10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히로시마 도시권의 중심이자 중국·시코쿠 지방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지역 내 유일한 100만 도시이다.
히로시마시는 노면 전차 규모와 승차 인원 모두 국내 최대이며, 일본 제일의 노면 전차 도시이다.[67] 또한, 시내에는 버스 노선이 많고, 도쿄·오사카 등에 본사를 둔 기업의 지점(지점 경제 도시)이 많으며, 삼각주 지대에 있어 다리가 많다는 특징 때문에 "3B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68]
세계 최초로 핵무기(원자폭탄)에 의한 폭격을 받은 도시로서 인지도가 높으며, "'''국제평화문화도시'''"로서 평화시장회의를 통해 150개국 이상, 7,400개 이상의 자치단체와 협력하고 있다.[62]
2. 1. 고대 및 중세
히로시마가 위치한 지역은 원래 히로시마만 연안의 작은 어촌이었다. 12세기부터 이 마을은 미타키사(Mitaki-Ji)라 불리는 선 불교 사찰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당히 번영하였다. 이러한 번영은 다이라 씨(Taira clan)의 후원 아래 일본 전역과의 무역 증가에 힘입은 것이었다.[12]
고대에는 오타가와(太田川) 삼각주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카부(可部) 부근까지 바다가 들어와 있었다고 추정된다.[109]
고분시대: 오타가와 하류역의 나가츠카(長束)에서 카부(可部)에 걸쳐 고분군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하류역에는 어느 정도 규모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스카 시대: 7세기~8세기의 율령 시대에는 고아게군(古安芸郡)에 11개의 향(郷)이 있었고, 카부 근처는 간벤향(漢弁郷)이라 불렸다. 이곳은 오타가와(太田川), 네노타니가와(根之谷川), 미노사와가와(三篠川)의 합류 지점이자 이즈모 오우칸(出雲往還) 및 이시미 오우칸(石見往還)의 분기점으로 번영하였다.[110]
헤이안 시대:
카부(可部), 나카노(中野), 요카이치(四日市), 미즈오치(水落), 오오게지(大毛寺), 이마이다야나세(今井田柳瀬), 카츠키(勝木) 등의 지역이 카부쇼(可部荘)였다. 민하라가와(南原川)와 네노타니가와(根之谷川) 사이가 산이리쇼(三入荘), 미노사와가와(三篠川) 중류역에 미타고(三田郷), 토사카(戸坂) 부근이 타몬쇼(田門荘)가 있었고, 기온(祇園) 근처에 사토쿠라시키(佐東倉敷)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타가와(太田川) 하류부의 수로는 에도 시대 초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동쪽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코가와(古河)(사토가와(佐東川))가 본류였고, 하류부에서는 좌안(동쪽)은 현재보다 훨씬 넓었다.
당시에는 아직 오타가와(太田川)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았고, 카이다(海田)에 카이덴쇼(開田荘)가 있었고, 국부는 현재의 히로시마현 아게군(安芸郡)후츄마치(府中町) 또는 히로시마시(東広島市)히로시마현 사이죠마치(西条町)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는 헤이안 해진(平安海進)(8세기부터 12세기)이 있었고, 카부(可部) 부근의 하천 수위와 해수면의 차이는 현재보다 작았다.
헤이안 시대 후반(1100년경)에는 만의 입구가 나가쓰카 부근[111]에 있으며, 우시다무라, 나가쓰카, 미사시노가 하구를 둘러싸고 있었고, 산요도는 토사카무라에서 오타가와를 건너고 있었다.
남북조 시대: 1371년(오안 4년)에 이곳을 지난 이마가와 료슌은 기행문 『도유키부리』에서 "카히타"에서 "사사이노우라"(현재 하쓰카이치시 부근)에 이르기까지는 "시오히(조간)의 하마"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12]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 중기(1400년경)에 삼각주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전국 시대(1500년경)에는 현재의 헤이와 오도리 부근(나가쓰카로부터 약 4km)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토사 퇴적은 당시 오타가와 중류 지역에서 성행했던 다타라 제철을 위한 사철 채취를 위해 행해진 철구멍(칸나) 흘리기의 영향으로 보인다.
무로마치 시대에 다케다산에 사토 은산성을 쌓은 아키 다케다씨의 기반은 미개발된 오타가와 삼각주 이북의 나가쓰카보다 상류였고, 하류 지역의 당시 중주(가와우치·나카스지·히가시노·히가시하라 일대)에 근거지를 둔 토호인 가와우치슈(카와우치슈)와 후추를 근거지로 한 아키 시라이씨의 수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두 수군은 다케다씨 멸망 후에는 모리씨를 섬겼다.[113] 가와우치슈는 모리씨의 지시에 따라 삼각주의 간척에 종사했다.[112]
1589년, 모리 데루모토는 세토 내해 해안 삼각주에 히로시마를 세웠다. 히로시마성은 빠르게 건설되었고, 데루모토는 1593년에 이전 근거지였던 고리야마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데루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였다.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로시마를 포함한 데루모토의 영지 대부분을 몰수해 자신을 지지했던 다이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주었다. 히로시마 성은 1619년에 아사노 나가아키라에게 넘어갔고, 나가아키라는 이 지역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아사노씨의 지배하에 도시는 별다른 군사적 충돌이나 소동없이 번영, 발전하였으며 확장되었다. 아사노 씨는 19세기의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곳을 지배하였다.
모리 모토나리가 주고쿠 지방 일대의 전국 다이묘가 되었을 때, 구리야마성은 좁고 교통편도 나빴다. 그래서 산요도(사이쿠쿠 가도)가 지나가고, 오타가와와 세토내해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오타가와 하류 델타의 한적한 마을 고카쇼(五箇庄)에 주목했다. 모토나리 사후, 모리 테루모토에 의해 히로시마 개발이 시작되었다.
1589년(덴쇼 17년): 모리 테루모토가 고카쇼의 하코시마(현재의 시라시마)를 중심으로 간척과 히로시마성 축성을 명령한다.
1591년(덴쇼 19년): 모리 테루모토가 미완성이지만 히로시마성에 입성하고, 지명을 '''히로시마'''로 명명한다.
에도 시대 동안 히로시마 인구는 계속 확대되어, 막말에는 무가・평민 합쳐 약 7만 명 규모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나고야, 가나자와에 이어지는 수준으로, 당시 일본 최고의 도시였다.
2. 3. 근대 (1871년~1945년)
1871년폐번치현 이후, 히로시마는 히로시마현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 도시화에 따라 히로시마는 일본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1870년대 정부의 후원을 받는 학교 중 하나가 히로시마에 세워졌고, 1880년대 히로시마 현령이었던 센다 사다아키의 노력으로 우지나 항이 건설되어 히로시마는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16]
1894년 산요 철도가 히로시마까지 연장되었고, 청일 전쟁 때 군사 수송을 위해 항구에 철도역이 건설되었다.[17] 전쟁 기간 일본 정부는 일시적으로 히로시마로 옮겨왔고, 메이지 천황은 1894년9월 15일부터 1895년4월 27일까지 히로시마성을 본부로 삼았다.[17] 청일 전쟁이 끝난 후 1895년2월 1일부터 2월 4일까지 양국 대표 간의 첫 번째 회담이 히로시마에서 열렸다.[18] 19세기 후반 방적 공장을 포함한 새로운 공장들이 히로시마에 세워졌다.[19]1904년러일 전쟁은 군사 보급품 개발과 생산을 필요로 하여 히로시마의 산업화를 더욱 자극했다. 1915년 히로시마 물산진열관이 건설되어 신제품 교역과 전시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1921년 히로시마 현 상품진열소, 1933년 히로시마 현 상업장려관으로 바뀌었다.[20]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참전하면서 히로시마는 군사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히로시마 만의 니노시마 섬에는 약 500명의 독일군 포로가 수용되었다.[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군사 도시였다. 히로시마 성 내에는 대일본제국 육군 제5사단 사령부, 히로시마 역 서쪽에 제2총군 사령부, 그 주변에는 각 부대 주둔지 등이 배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6일, 미군 전략폭격기 B-29 "에노라 게이"에 의해 히로시마시 중심부 아이오이바시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되어, 버섯구름이 솟아오르고 시가지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2. 4. 원자 폭탄 투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로시마는 일본제국 육군의 근거지였고, 우지나 항은 일본제국 해군의 근거지였다. 히로시마에는 커다란 병창이 있어 수송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45년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인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 시 중심부에 투하했다. 당시 히로시마 시 인구는 약 34만 명이었으나, 약 7~8만 명이 당일에 사망했고, 1945년 말까지 방사능 피해로 인해 약 9~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한국인 사망자는 3만 명에 달한다.[192] 도시 건물의 약 69%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약 7%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제2군과 중국지방군 사령부는 히로시마에 있었고, 육군 해군 사령부는 우지나 항에 있었다. 히로시마에는 대규모 군수품 창고가 있었고, 중요한 수송 중심지이기도 했다.[23]
1945년 8월 6일 월요일 오전 8시 15분(히로시마 시간), 폴 티베츠(1915년 2월 23일~2007년 11월 1일)가 조종한 미국의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에 핵무기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26] 최소 7만 명이 즉사했는데, 여기에는 수천 명의 한국인 강제 노동자도 포함되었다.[27] 연말까지 부상과 방사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9만~14만 명에 달했다.[28] 폭격 전 인구는 약 34만 5천 명이었다. 도시 건물의 약 70%가 파괴되었고, 7%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원폭 투하 전.
투하 후.
히로시마시 중앙부 동심원의 중심이 폭심지. 바로 왼쪽 위에 목표의 아이오이바시가 있다. 화면 오른쪽 위의 직사각형은 히로시마성이다.
2. 5. 현대 (1945년~현재)
1945년9월 17일, 쇼와 시대의 가장 큰 태풍 중 하나였던 마쿠라자키 태풍이 히로시마를 덮쳐 히로시마 현 전체에서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도시 교각의 절반이 파괴되고 도로와 철도도 심각한 피해를 입어 히로시마는 더욱 황폐화되었다.[37][38]
이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1949년에 일본 국회에서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 건설법이 제정되면서 도시는 재건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또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일부로서 히로시마 현 상업 장려관이 파괴된 자리에 원폭 돔을 만들었다. 1955년에는 평화공원 내에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이 개관하였다.[40]
1949년 히로시마는 일본 의회에 의해 국제평화문화도시로 선언되었다. 그 결과, 히로시마 시는 평화와 사회 문제에 대한 국제 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바람직한 위치에 서게 되어 더욱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히로시마 시장의 발안으로 창설된 평화 시장 회의에는 130개가 넘는 나라로부터 3000개 이상의 자치체가 가맹하고 있다.[42][43]
1985년 3월 20일 히로시마현 사에키군 이쓰카이치정이 폐지되고 히로시마시로 편입합병되면서 그 정역 전체를 사에키구 구역으로 하여 사에키구가 신설되었다.
1947년 히로시마를 방문한 히로히토(裕仁) 일왕. 전쟁 후 시민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배경에는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 돔이 보인다.
2016년 5월 27일, 버락 오바마는 원자 폭탄 투하 이후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44]2023년 5월 49회 연례 G7 정상회의는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45]
세계 최초로 핵무기(원자폭탄)에 의한 폭격을 받은 도시로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그 때문에 "'''국제평화문화도시'''"로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히로시마 시장의 제안으로 창설된 "평화시장회의"에는 150개국 이상에서 7,400개 이상의 자치단체가 가입하고 있다.[62]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부터 현재까지
1945년 9월 17일: 마쿠라자키(枕崎) 태풍으로 피해를 입음. 히로시마현 내 사망·실종자 2012명.
원자폭탄이 투하된 역사를 바탕으로 히로시마시(広島市)는 스스로를 평화기념도시로 선언하고 평화의 확립과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원폭투하 중심지 주변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으로 정비되었으며, 원폭돔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6년 G7 히로시마 외상 회합
2016년 버락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3. 지리
남쪽은 세토 내해와 접하고 히로시마만을 이룬다. 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오타강의 하구에 열려있는 삼각주상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오타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히로시마 평야가 형성되어 있지만 그것을 둘러싸듯이 시의 서부·북부·동부에는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3. 1. 기후
히로시마는 서늘하고 온화한 겨울과 덥고 습한 여름을 특징으로 하는 온대 습윤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히로시마는 여름철에 계절적 기온 지체 현상을 경험하며, 7월이 아닌 8월이 가장 더운 달이다. 강수량은 연중 내내 발생하지만 겨울이 가장 건조한 계절이다. 강수량은 6월과 7월에 최고조에 달하며, 8월에는 햇살이 더 강하고 건조한 조건을 경험한다.
히로시마시의 기후 (1991년–2020년 평균, 극값 1879년–현재)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간
평균 최고 기온 (°C)
9.9°C
10.9°C
14.5°C
19.8°C
24.4°C
27.2°C
30.9°C
32.8°C
29.1°C
23.7°C
17.7°C
12.1°C
21.1°C
일 평균 기온 (°C)
5.4°C
6.2°C
9.5°C
14.8°C
19.6°C
23.2°C
27.2°C
28.5°C
24.7°C
18.8°C
12.9°C
7.5°C
16.5°C
평균 최저 기온 (°C)
2°C
2.4°C
5.1°C
10.1°C
15.1°C
19.8°C
24.1°C
25.1°C
21.1°C
14.9°C
8.9°C
4°C
12.7°C
강수량 (mm)
46.2mm
64mm
118.3mm
141mm
169.8mm
226.5mm
279.8mm
131.4mm
162.7mm
109.2mm
69.3mm
54mm
1572.2mm
평균 적설량 (cm)
3cm
3cm
0cm
0cm
0cm
0cm
0cm
0cm
0cm
0cm
0cm
2cm
8cm
평균 상대 습도 (%)
66
65
62
61
63
71
73
69
68
66
67
68
67
평균 일조 시간
138.6
140.1
176.7
191.9
210.8
154.6
173.4
207.3
167.3
178.6
153.3
140.6
2033.1
출처: 일본 기상청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879년~현재)[193][194]
히로시마는 연안부에서 산간 지역까지 시역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후는 복잡하다. 시역 북부(아사키타구, 아사미나미구, 사이키구 북부)는 일본 해측 기후와 세토내해식 기후의 경계에 해당하지만, 시역 남부는 세토내해식 기후로 맑은 날이 많고 온난하다. 여름은 덥고, 세토내해 특유의 잔잔한 바다도 발생한다. 35°C 이상의 폭염을 기록하는 경우도 잦다. 겨울에는 공기가 건조해져 맑은 날이 많지만, 겨울형 기압 배치가 강해지면 북서의 계절풍의 영향으로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다. 산간부의 기온은 위도에 비해 낮고, 겨울에는 자주 영하로 내려간다. 강설일수는 세토내해 연안 도시 중에서는 많지만, 적설량은 시 북부를 제외하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드물게 눈구름이 끊임없이 일본해에서 공급되어 시내 중심부에서도 10~15cm 정도의 큰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다. 도로 결빙도 발생하고, 국도 488호처럼 겨울철에 폐쇄되는 도로도 있다. 겨울부터 봄에 걸쳐서는 중국 대륙 유래의 황사가 날아와 시계가 흐릿해지거나, 희미하게 쌓이는 경우도 있다. 히로시마 기상대는 1987년 12월 22일에 중구의 에하야마 공원에서 번화가인 중구 가미하치쵸보리로 이전했기 때문에, 기온 등이 데이터 상으로 크게 상승했다. 구 히로시마 기상대는 히로시마시 에하야마 기상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히로시마시의 연 강수량은 1349mm[76]로 전국 평균(1596mm)보다 적지만, 세토내해에서도 현저하게 강우량이 적은 지역인 오카야마시(921mm)나 다카마쓰시(872mm)보다는 많다. 연간 강수일수는 90일로, 전국에서 5번째로 강수일수가 적은 현청 소재지이다.[77]
3. 2. 행정구
(명/km2)
지도
아키구
安芸区|아키 구일본어
80,702
94.08
857
히로시마시의 구
아사키타구
安佐北区|아사키타 구일본어
148,426
353.33
420
아사미나미구
安佐南区|아사미나미 구일본어
241,007
117.24
2,055
히가시구
東区|히가시 구일본어
121,012
39.42
3,069
미나미구
南区|미나미 구일본어
141,219
26.30
5,369
나카구 *행정 중심지
中区|나카 구일본어
130,879
15.32
8,543
니시구
西区|니시 구일본어
189,794
35.61
5,329
사에키구
佐伯区|사에키 구일본어
137,838
225.22
612
2016년 3월 31일 기준
4. 인구
2006년에 히로시마시의 추정 인구는 1,154,391명이었고, 2000년 히로시마 도시권의 추정 인구는 2,043,788명이었다. 당시 시의 총 면적은 905.08km2이었고 인구밀도는 km2당 1275.4명이었다. 2017년 기준, 히로시마 시의 추정 인구는 1,195,327명이었으며, 인구 밀도는 1km2당 1321명이었다.[7] 2023년 기준, 시 인구는 1,183,696명이다.[8] 2024년 현재 히로시마시 인구는 약 118만 명이다.
1910년에 도시의 인구는 143,000명이었다.[9]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히로시마의 인구는 36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1942년에 419,182명으로 정점에 달했다.[10] 1945년의 원폭 투하 후에는 인구가 137,197명까지 감소하였다.[10] 1955년에 도시의 인구는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11]
2020년 히로시마현 인구 피라미드
최근 히로시마시의 인구는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히로시마시는 전국 도시 중 10번째 규모이며, 일본 국내 인구의 1%를 차지한다. 1950년 당시 히로시마시(현재 시역)의 인구는 약 45만 명이었지만, 고도 경제 성장기의 발전은 눈부셨고, 1974년에는 90만 명을 넘어서는 등 불과 24년 만에 히로시마시 인구는 두 배가 되었다. 이 기간(쇼와 중기) 히로시마시의 연간 인구 증가율은 약 3%, 연간 인구 증가 수는 약 2만 명에 달했다. 오일 쇼크 이후에는 유입이 줄어들면서 큰 폭의 인구 증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1981년에는 100만 명을, 1991년에는 110만 명을 넘는 등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이 기간(쇼와 후기) 히로시마시의 연간 인구 증가율은 약 1%, 연간 인구 증가 수는 약 1만 명 정도였다. 110만 명을 넘어선 이후로는 인구 증가가 완만해졌지만, 2020년 국세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120만 명대 인구를 기록했다.
히로시마시의 인구 동태는 자연 증감(출생-사망)이 2017년 이후 감소로 전환되었고, 사회 증가(전입-전출)로 약간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97]
히로시마시 역대 인구 변화[99][100]
조사 연도
총인구 (명)
증감 (명)
증감률 (%)
1920년
305,773
-
-
1930년
382,697
76,924
25.2
1940년
463,670
80,973
21.2
1947년
387,477
-76,193
-16.4
1950년
447,174
-16,496
-3.6
1960년
590,972
143,798
32.2
1970년
798,540
207,568
35.1
1980년
992,736
194,196
24.3
1990년
1,093,707
100,971
10.2
2000년
1,134,134
40,427
3.7
2010년
1,173,843
39,709
3.5
2020년
1,201,281
27,438
2.3
히로시마시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간부나 산간부·섬 지역의 인접 자치체에서는 인구 감소 및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오타가와 하류 삼각주(나카구·미나미구·니시구·히가시구 등)와 하류부(아사미나미구 등)에서는 60세 이상 인구 비율이 23%, 20세 미만은 20%였지만, 아키오타정(安芸太田町)에서는 60세 이상 인구 비율이 50%, 20세 미만은 13%였다(헤이세이 17년 국세 조사).[82]
중구는 1960년대, 남구는 1970년대에 일찍 감소로 전환되었다. 인구 증가 지역은 아사남구로 합병 이후인 1975년부터 2010년까지 인구가 10만 명 증가하여 178%가 되었다. 같은 기간 중구는 약 1만 8천 명 감소하여 88%, 남구는 약 3만 명 감소하여 82%가 되었다.[101] 중구와 남구에서는 20세기 후반에 지속적인 인구 유출이 있었지만, 21세기에 들어 증가로 전환되고 있다(도심 회귀).
히로시마현의 인구는 1998년 288만 5617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지만[105], 히로시마시의 인구는 증가를 계속하고 있다. 2009년 시점에서는 2015년 이후 인구 감소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06] 따라서, 히로시마시의 히로시마현에서의 인구 비율(인구 집적률)은 상승 추세에 있다.
5. 경제
히로시마는 주고쿠-시코쿠 지방의 공업 중심지이며 해안 지역을 따라 공업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히로시마는 오랫동안 항구 도시였고 히로시마항과 히로시마 공항은 상품 수송의 역할을 해왔다. 도시의 가장 큰 산업은 제조업이고 핵심 산업은 자동차 및 그 부품과 산업 장비 생산이다. 마쓰다는 히로시마의 지배적인 기업으로 히로시마 GDP의 32%를 차지한다.
일반 기계와 장비도 수출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히로시마에는 많은 혁신적인 기업들의 지사가 있으며 새로운 성장 분야에 활발하게 종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소매업과 같은 3차 산업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산업 집중의 또 다른 결과로 숙련된 노동력과 기초 기술의 축적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많은 기업들이 히로시마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한 이유이다. 사업 비용도 일본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저렴하며 포괄적인 세금 감면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론리 플래닛의 조사에 따르면 히로시마는 일본의 도시들 중 통근 시간이 가장 짧으며 생계 비용이 도쿄, 오사카, 교토, 후쿠오카와 같은 대도시들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히로시마항
마쓰다(マツダ)・액셀라(アクセラ)
히로시마 상공회의소
구 히로시마 증권거래소
료오 공원(竜王公園)에서 본 도심부(都心部) 야경
오타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니시구, 나카구, 미나미구 지역(구 히로시마시 지역과 거의 일치)의 면적은 현 시역의 9%를 차지하며, 시 인구의 39%가 거주하고 있다. 제2차·제3차 산업의 경제 활동은 이 3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조품 출하액의 70%, 상품 판매액의 82%를 이 지역이 차지한다. 농업 등 제1차 산업 종사자의 88%는 이 3구 이외의 시민이며, 아사키타구(2479명), 아사미나미구(1876명), 사에키구(991명)에 많다.
도시 기능도 구 시가지에 집중되어 있으며, 주간 인구는 나카구에서 평방km당 5만 명 이상, 니시구와 미나미구에서 1만 명 이상이다. 동일 5천 명 이상의 지역은 동쪽으로는 가이타정, 서쪽으로는 하쓰카이치시, 북쪽으로는 아사미나미구 오마치까지 이어져 있다. 히로시마 도시권의 기능 분산이 진전되어 중심부로의 주간 인구 유입은 감소하는 반면, 사에키구, 하쓰카이치시, 히로시마 IC 주변, 히로시마 대학이 위치한 히가시히로시마시 등에서는 증가 추세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교통 기반 시설, 특히 도로 정비가 지체되어 히로시마시의 인구 백만 명당 자동차 전용도로 길이는 11km로, 삿포로시(21km)·센다이시(27km)·후쿠오카시(30km)와 비교하여 짧다.[102]
히로시마 대학은 1949년 교육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각 현에는 국립 대학교가 하나씩 설립되었는데, 히로시마 대학교는 히로시마 문리과대학, 히로시마 중등교원양성학교, 히로시마 사범학교, 히로시마 여자중등교원양성학교, 히로시마 청년교육학교, 히로시마 고등학교, 히로시마 고등공업학교, 히로시마 시립고등공업학교 등 8개 기관을 통합하고, 1953년 히로시마 현립 의과대학을 추가하여 설립되었다.[54] 1972년 히로시마 대학교는 히로시마 시에서 히가시히로시마시의 더 큰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54] 1995년까지 거의 모든 캠퍼스가 히가시히로시마시로 이전하였다.[54] 의학부, 치의학부, 약학부와 이들 분야의 대학원은 가스미 캠퍼스에, 법학부와 지역경제시스템 연구센터는 히가시센다 캠퍼스에 남아 있다.[54]
시내 중심부에서는 노면 전차와 시내버스가 많이 운행되고 있다. 중구, 동구, 서구, 남구는 주로 히로덴 버스(녹색 차체, 통칭: 아오버스)와 히로시마 버스(적색 차체, 통칭: 아카버스)가 운행하며, 서구 일부에서는 에이치·디 니시히로시마가 운행한다. 교외 노선은 히로시마 버스센터를 중심으로 여러 회사가 운행하고 있다. 2017년 11월 1일부터 시 중심부 시내버스 요금은 6개 회사 모두 180엔으로 통일되었다.[188][189]
2008년 1월 26일부터 비접촉식 IC 카드 승차권인 PASPY(파스피)가 도입되었고,[190] 2008년 3월부터는 JR 서일본의 ICOCA로도 PASPY 이용 가능 버스 노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주요 버스터미널
히로시마 버스센터
카미야초·하치조보리 버스 정류장
히로시마 역 버스 승강장
; 고속버스
히로시마 버스센터와 히로시마역 앞을 기점으로 중국·시코쿠 지방 각지와 간사이, 규슈 북부를 연결하는 주간 고속버스와, 간토·중경·간사이 각지와 히로시마를 잇는 야간 고속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중심역은 '''히로시마 역'''이며, 마쓰다 스타디움 근처에 있다. 히로시마시의 도시 내 교통은 노면 전차인 히로시마 전기 철도(히로덴)가 주로 담당하고 있으며, 노선 길이, 차량 보유 대수, 승객 수는 일본 최대 규모이다.[187] 히로덴은 LRT로 변화하고 있으며, 원폭 피해를 입은 차량(피폭 전차)을 운행하거나 다른 도시의 차량을 그대로 사용하는 등 관광객 유치에도 힘쓰고 있다.
히로시마 전기철도 히로시마시는 노면전철(LRT) 정비를 진행하고 있다.
히로시마 전기철도 노선도
히로시마 전기 철도는 미야지마 선도 보유하고 있으며, 시내선과 같은 차량을 사용하지만 전용 궤도로 운영된다.
히로시마 고속교통의 아스트람 라인은 시가지와 북부 뉴타운을 연결한다. 혼도리 역 - 현청 앞 역 구간은 지하선으로, 지하철로 분류되며 중국·시코쿠 지방에서 '''유일한 지하철'''이다.
현재 노면 전차의 일부 고가화 및 노선 변경, 아스트람 라인의 광역 공원 앞 역에서 니시히로시마 역까지의 연장이 계획되어 있다.
일반도로는 오타가와 삼각주 지대에 발달한 기존 중심 시가지를 지나 히로시마시와 다른 지역의 도시를 연결한다. 중심 시가지는 대체로 평탄하며, 국도와 현도 등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시도 등이 정비되어 있어 일반도로 정비 상황은 대체로 양호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 대책으로 실시된 방화대 정비와 원폭 투하로 인한 구 시가지의 붕괴 및 소실로 인해, 전후 복구 사업으로 폭이 넓은 도로가 정비되었다. 이는 히로시마 전철 노면 전차망의 존속과 고빈도·정시 운행 유지(궤도 부지에 대한 자동차 진입 금지 유지)에도 기여하고 있다. 특히 원폭 투하 중심지 부근을 통과하는 헤이와오오도오리는 나고야시의 와카미야오오도오리·쿠야오오도오리와 함께 "100m 도로"로 정비되었다.
반면, 연약한 지반 등을 이유로 고가도로 정비 등을 수반하는 도시 고속도로 건설은 지연되어, 각 국도 등에서의 자동차 교통은 도시 간(중장거리) 수송과 도시 내(단거리) 교통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광역 합병으로 히로시마시에 편입된 유키온센(구 유키정) 등 산간 지역에서는 지형의 제약을 크게 받아 강의 계곡을 따라 일반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그 폭은 중심 시가지에 비해 좁고, 국도라도 국도 433호선 나나마가리토오게의 대형차 통행 불가 구간, 국도 488호선의 동계 폐쇄 구간 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사미나미구의 니시카제신토 지역을 비롯해 사이키구 내나 아키구 내 등에서는 산을 깎으면서 경사지에 건설된 뉴타운이 산재하며, 그 내부에서는 주민의 자동차 이용을 전제로 한 구역 내 도로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주고쿠 자동차도와의 연결 도로인 히로시마 자동차도, 이어서 산요 자동차도의 시내 구간이 완성되면서, 산요 자동차도의 각 인터체인지와 히로시마 중심 시가지를 잇는 연결 도로가 정비되었다. 히로시마 동쪽 인터체인지에 직결되는 히로시마 고속 1호선(안게후츄 도로), 히로시마 인터체인지와 연결되어 아스트람라인과 일체로 정비된 국도 54호선, 이츠카이치 인터체인지에 가까운 니시카제신토 지역에서 니시카제 터널로 도심부에 연결되는 히로시마 고속 4호선(히로시마 니시카제신토선) 등 히로시마 고속도로와 일반도로 등이 이에 해당하며, 히로시마시는 1975년 개업한 산요 신칸센에 이어 자동차 교통에서도 고속화 시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히로시마 고속도로는 기존 중심 시가지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히로시마 공항과의 연락 기능도 담당하고 있는 1호선에 대해서는 히로시마 고속 5호선(동부선) 건설 등에서의 편리성 향상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남부의 림해부(臨海部)에서는 히로시마 고속 3호선(히로시마 남부 도로)이 건설되어 히로시마 구레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히로시마 고속 2호선(후츄니호 도로)을 경유한 히로시마 고속 1호선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하츠카이치시 방면으로의 정비에 의한 시역의 동서 횡단은 아직 계획 단계이다.
히로시마 공항(HIJ/RJOA)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미하라시에 있으며, 주고쿠 지방에서 가장 큰 공항이다. 도쿄, 삿포로, 센다이,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중국, 타이완, 대한민국으로 가는 정기 항공편을 운항한다.[55]하네다 노선을 비롯한 국내선을 운항하며, 공항 리무진을 이용하면 히로시마역 및 시 도심부에서 약 1시간이 걸린다. 히로시마 역에서 신칸센을 타면 후쿠오카 공항까지 약 1시간 30분이 걸리기 때문에, 항공 노선이나 가격에 따라 후쿠오카 공항을 이용하기도 한다.
히로시마 공항
이와쿠니 킨타이쿄 공항(Iwakuni Kintaikyo Airport)은 히로시마에서 남서쪽으로 43km 떨어진 야마구치현이와쿠니시에 있으며, 2012년 12월 13일에 민간 항공편 운항을 재개했다.[55]하네다 노선과 나하 노선이 있으며, 거리상으로는 시 동부와 고속도로에 접한 시 북부를 제외하고 이와쿠니 킨타이쿄 공항이 더 가깝다.
히로시마 헬리포트는 과거 히로시마 서부 비행장으로, 1993년 10월 28일까지 히로시마 공항이었다. 2010년 10월 31일에 정기편 운항이 중단되었고, 2012년 11월 15일부터 헬리포트 기능만 운영되고 있다.
8. 문화
히로시마에는 1963년부터 웰시티 히로시마에서 공연을 해 온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다.[58]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는데, 프랑스르네상스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히로시마 미술관은 1978년에 개관했다. 히로시마 현립 미술관은 1968년에 개관하여 縮景園(Shukkei-en) 정원 근처에 있으며, 1989년에 개관한 히로시마 시립 현대미술관은 히지야마 공원 근처에 있다.
縮景園(Shukkei-en)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는 히로시마 원폭 돔이 있으며, 원폭 투하일을 기념하는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 때문에 전 세계에서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이 공원에는 어린이 평화 기념비,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 국립 평화 기념관 등 많은 기념물이 있다. 재건된 히로시마 성(잉어 성)에는 에도 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고, 히로시마 고쿠쿠 신사는 성벽 안에 있다. 히로시마의 다른 명소로는 縮景園(Shukkei-en), 후도인, 미타키데라, 히로시마 도쇼구, 히지야마 공원 등이 있다.
평화 메시지(등롱流し)
히로시마시(広島市)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역사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평화기념도시로 선언하고 평화 확립과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원폭투하 중심지 주변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으로 정비되었으며, 원폭돔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핵피폭지로서의 의미를 강조할 경우, 가타카나로 '''히로시마'''(ヒロシマ)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8. 1. 축제
히로시마 꽃 축제와 히로시마 국제 영화제가 열린다.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1985년부터 2020년까지 격년으로 개최되었다.[58]
히로시마는 철판에 굽는 감칠맛 나는 팬케이크인 오코노미야키로 유명하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요리하는데, 오사카식 오코노미야키처럼 재료를 섞는 대신 층층이 쌓아 올린다. 일반적으로 계란, 양배추, 숙주나물, 얇게 썬 돼지고기/베이컨을 기본으로 마요네즈, 튀긴 오징어, 문어, 치즈, 떡, 김치 등의 선택 재료를 추가하고, 메밀국수, 우동 등의 면을 얹은 후, 다시 한 겹의 계란을 얹고 넉넉한 양의 오코노미야키 소스(Carp와 Otafuku는 인기 브랜드 두 가지이다)를 뿌린다. 사용하는 양배추의 양은 오사카식보다 일반적으로 3~4배 많다. 처음에는 아주 높이 쌓아 올렸다가 양배추가 익으면서 일반적으로 눌러준다. 층의 순서나 재료는 요리사의 스타일과 취향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으며, 고객의 취향에 따라 재료가 달라질 수 있다.[146][147][148][149][150][151][152][153][154][155]
히로시마시는 77년 전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오늘날 일본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12년에는 약 36만 3천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히로시마를 방문했으며, 그중 미국인이 가장 많았고, 호주인과 중국인이 그 뒤를 이었다.[59] 2016년에는 약 118만 명의 외국인이 방문하여 2012년에 비해 3.2배 증가했다. 방문객 중 미국인이 16%로 가장 많았고, 호주인(15%), 이탈리아인(8%), 영국인(6%) 순이었다.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은 각각 전체의 1%와 0.2%로 적었다.[60]
히로시마시는 스스로를 평화기념도시로 선언하고, 평화 확립과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원폭투하 중심지 주변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으로 정비되었으며, 원폭 돔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핵 피폭지로서의 의미를 강조할 때는 가타카나로 '''히로시마'''(ヒロシマ)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멀리서 본 원폭 돔
1945년 9월 17일, 히로시마는 마쿠라자키 태풍(아이다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히로시마현에서는 3,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전국 총 사상자 수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37] 도시의 다리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고, 도로와 철도에도 큰 피해가 발생하여 도시는 더욱 황폐해졌다.[38]
1949년 제정된 히로시마 평화 기념 도시 건설법을 통해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다. 이 법은 재건을 위한 재정 지원과 함께, 이전에 일본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군사 시설 부지를 기증했다.[39] 같은 해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의 설계가 확정되었다.
1949년 시장인 하마이 신조(Hamai Shinzo)의 주도로 일본 의회에서 평화 도시로 선포되었다. 그 결과, 히로시마는 평화와 사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를 개최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92년 히로시마 통역 안내 협회(HIGA)가 설립되었고, 1998년에는 히로시마 대학 내에 히로시마 평화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히로시마 시는 모든 핵무기의 폐지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으며, 히로시마 시장은 평화를 위한 시장회의(Mayors for Peace)의 회장을 맡고 있다.[42][43]
2016년 5월 27일, 버락 오바마는 원자 폭탄 투하 이후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44] 2023년 5월에는 49회 연례 G7 정상회의가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45]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1949년에 설계가 확정되었다. 폭탄 투하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로 살아남은 히로시마 현립 공업 진흥관은 원폭 돔(原爆ドーム, Genbaku Dome)으로 지정되어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의 일부가 되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은 1955년 평화 기념 공원에 문을 열었다.[40] 닛폰잔묘호지(Nipponzan-Myōhōji)가 건립한 평화탑도 히로시마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탑은 돌이 아닌 강철로 만들어졌다.[41]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는 히로시마 원폭 돔이 있으며, 특히 원폭 투하일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인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 때문에 전 세계에서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이 공원에는 어린이 평화 기념비,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 국립 평화 기념관 등 많은 기념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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