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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큐 유럽 파견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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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분큐 유럽 파견 사절은 1862년 일본이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늦추기 위해 파견한 사절단이다. 다케우치 야스노리를 정사로,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를 부사로, 교고쿠 다카아키를 메츠케로 하여, 1862년 1월 시나가와를 출발하여 런던 의정서 체결 등 주요 활동을 펼쳤다. 사절단은 런던 만국 박람회를 참관하고 산업 혁명을 경험했으며, 나다르에 의해 사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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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큐 유럽 파견 사절
분큐 유럽 파견 사절
주프랑스 일본 대사관을 방문한 사절단 (나다르 촬영)
주프랑스 일본 대사관을 방문한 사절단 (나다르 촬영)
사절 정보
파견 시기분큐 2년 (1862년)
목적막부의 권위 회복, 조약 승인 연기, 나가사키 등 항구의 개항 연기 교섭
사절단 구성
정사다케우치 야스노리 (다케우치 시모쓰케노카미)
부사마쓰다이라 야스히데 (마쓰다이라 이와미노카미)
교고쿠 노리마사 (교고쿠 하야토노카미)
감찰가와즈 스케쿠니 (가와즈 사부로자에몬)
수행원후쿠자와 유키치
오카다 게이스케
하야시 다다스
데라시마 무네노리
야마구치 나오요시
미쓰쿠리 슈헤이
나카에 조민
기쿠치 다케시
구리모토 조운
방문 국가
방문 국가 목록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기타
관련 항목겐지 원년 미국 파견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

2. 사절단 구성

분큐 유럽 파견 사절단은 에도 막부가 유럽 각국과의 외교 교섭 및 개항 연기 협상을 위해 1862년에 파견한 공식 사절단이다. 사절단은 정사, 부사, 메츠케(감찰관) 등 막부의 고위 관료들을 필두로, 통역, 의사, 실무 관료, 각 번에서 차출된 번사 및 수행원 등 총 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4][5][6]

주요 직책에는 다케우치 시모쓰케노카미(정사), 마쓰다이라 이와미노카미(부사), 교고쿠 노토노카미(메츠케) 등이 임명되었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 마쓰키 고안, 미쓰쿠리 슈헤이 등 당시 서양 학문에 능통했던 인물들이 통역 및 번역 담당으로 참여하여 사절단의 활동을 지원했다.[7][8][9][10] 사절단의 구체적인 인물 구성과 각자의 역할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2. 1. 주요 인물

직책이름나이비고
정사(正使)다케우치 시모쓰케노카미56세
부사(副使)마쓰다이라 이와미노카미33세
메츠케(目付)교고쿠 노토노카미39세
구미가시라(組頭)시바타 사다타로46세
간조(勘定)히다카 게이하치로33세 (혹은 26세[4])히다카 유타카의 아버지
간조카쿠 도메츠케(勘定格徒目付)후쿠다 사쿠타로36세다카시마 시게노리의 형
메미모치카쿠 조야쿠나미(目見持格調役並)미즈시나 라쿠타로32세미즈시나 바이쇼
동(同)오카자키 도자에몬27세
의사(医師)다카시마 유케이31세
고용 의사(雇医)가와사키 도민31세
후신야쿠(普請役)마스즈메 슌지로36세[5]
조야쿠 모토도리 돕기(定役元締助)우에다 유스케45세우에다 빈의 외조부[6]
조야쿠(定役)모리 하치타로29세
조야쿠 통변 어용(定役通弁御用)후쿠치 겐이치로22세
조야쿠나미 통변 어용(定役並通弁御用)다치히로 사쿠22세다치 사쿠타로의 삼촌
동(同)오타 겐자부로
도신(同心)사이토 다이노신39세전년 도젠지 사건 경호로 영국 정부 포상
고인 메츠케(小人目付)다카마쓰 히코사부로44세
동(同)야마다 하치로41세
번역방 고용(翻訳方御雇)마쓰키 고안35세
동(同)미쓰쿠리 슈헤이36세
동(同)후쿠자와 유키치29세



그 외 삼사절(정사, 부사, 메츠케)의 하인 각 2명과 구미가시라 시바타의 종자 1명이 동행했다.


  • 다케우치 시모쓰케노카미 하인: 나가오 조스케, 다카마 오스케
  • 마쓰다이라 이와미노카미 하인: 노자와 이쿠타, 이치카와 와타루(이치카와 세이류)
  • 교고쿠 노토노카미 하인: 구로사와 신자에몬, 이와사키 도요타유
  • 시바타 사다타로 종자: 나가모치 고로지


마카이카타나미 고시(賄方並小使) 직책의 고용인 7명도 있었으며, 여기에는 각 번의 번사들도 포함되었다.

  • 사가 번사: 이시구로 간지
  • 기쓰키 번사: 사토 고조 (39세[7])
  • 가가 번사: 사노 가나에
  • 조슈 번사: 스기 도쿠스케 (스기 손시치로)
  • 아와 번사: 하라 가쿠조
  • 이세야 하치베에 사용인: 주베[8][9][10]

3. 여정

1854년 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 파견 이후, 주일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과 주일 프랑스 공사 구스타브 뒤센느 벨쿠르의 제안으로 막부는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올콕은 처음에는 개항 연기 교섭에 반대했으나, 막부의 내부 사정을 이해하고 지원하기로 했으며, 자신의 휴가 일정을 맞춰 교섭을 돕기로 했다.

분큐 원년 12월 22일(1862년 1월 21일), 사절단은 영국 해군의 증기 프리깃 오딘 호(HMS Odin)를 타고 시나가와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아시아 각지를 거쳐 이집트를 통해 지중해를 건너 1862년 4월 3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프랑스에서는 개항 연기 동의를 얻지 못했으나, 4월 30일 도착한 영국 런던에서는 올콕의 도움으로 6월 6일 런던 각서를 체결하여 효고, 니가타, 에도, 오사카의 개항 및 개시를 5년 연기하는 데 성공했다.[11][2] 이후 네덜란드, 프로이센과도 유사한 각서를 체결했지만, 러시아와의 사할린 국경 획정 협상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사절단은 포르투갈 등 여러 유럽 국가를 방문한 뒤, 분큐 2년 12월 11일(1863년 1월 30일), 약 1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1] 유럽 체류 중 사절단의 모습은 나다르에 의해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사절단의 주요 목적은 서구 문물 학습, 조약 비준, 그리고 개항 연기 협상이었다.[1]

3. 1. 주요 방문 국가 및 도시

분큐 유럽 파견 사절 여정. 다카시마 유케이 그림


오딘 호. 다카시마 유케이 그림


분큐 원년 12월 22일(1862년 1월 21일), 사절단은 영국 해군의 증기 프리깃 오딘 호(HMS ''Odin'')를 타고 시나가와항을 출발하여 유럽으로 향했다. 이들은 나가사키, 영국령 홍콩, 영국령 싱가포르, 영국령 실론, 아덴 보호령을 거쳐 이집트수에즈에 상륙했다. 이후 철도를 이용해 카이로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배로 지중해를 건넜고, 영국령 몰타를 지나 1862년 4월 3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나폴레옹 3세를 알현하는 사절단


4월 7일 파리에 도착한 사절단은 프랑스와 개항 연기 교섭을 벌였으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후 칼레에서 영불 해협을 건너 4월 30일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에서는 러더퍼드 올콕의 도움을 받아, 6월 6일 일본 내 존왕양이 운동의 고조를 이유로 효고, 니가타, 에도, 오사카의 개항 및 개시를 1868년 1월 1일까지 5년 연기하는 내용의 런던 각서를 체결했다.[11][2]

런던 체류 중 사절단은 1862년 런던 만국 박람회를 방문하여 전시장을 여러 차례 참관했다.[3] 이 박람회에는 올콕이 수집한 일본 물품들이 전시되어 일본이 참여한 최초의 만국 박람회가 되었다.[3] 또한 산업 혁명의 성과인 철도, 국회의사당, 버킹엄 궁전, 대영 박물관, 전신국, 해군 공창 등을 방문하며 서구 문물을 경험했다.[3]

이후 사절단은 네덜란드(6월 13일부터 방문)와 프로이센베를린(7월 18일부터 방문)을 찾아 영국과 유사한 내용의 각서를 체결했다. 8월 8일부터는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으나, 사할린 국경 획정 교섭에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귀국길에는 카우나스, 프로이센, 프랑스(파리 각서 체결)를 거쳐 10월 9일부터 포르투갈을 방문했다. 이후 영국령 지브롤터를 경유하여 출국 시와 비슷한 경로를 따라 이동했으며, 분큐 2년 12월 11일 (1863년 1월 30일), 약 1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1] 유럽 체류 중 사절단의 모습은 나다르에 의해 사진으로 남겨졌다.

4. 주요 활동 및 성과

1854년 만엔 원년 미국 파견 사절의 영향을 받아, 주일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과 프랑스 공사 구스타브 뒤센느 벨쿠르의 기획으로 추진되었다. 올콕은 처음에는 개항 연기 교섭에 반대했으나, 막부의 내부 사정을 이해하고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은 서구 문명을 배우고, 기존 조약을 비준하며, 외국과의 무역을 위한 도시 및 항구 개방을 연기하는 것을 목표로 파견되었다.[1]

분큐 원년(1862년 1월 21일), 사절단 일행은 영국 해군 군함 오딘 호(HMS Odin)를 타고 시나가와 항을 출발하여 유럽으로 향했다. 아시아의 여러 영국령 식민지를 거쳐 이집트를 통해 1862년 4월 3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와 교섭했으나 개항 연기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후 영국 런던에서는 러더퍼드 올콕의 도움을 받아 1862년 6월 6일 주요 항구의 개항 및 개시를 5년 연기하는 런던 각서를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1][2] 이후 네덜란드, 프로이센과도 유사한 각서를 체결했다.

8월 8일에는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사할린 국경 획정 문제를 논의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절단은 유럽 순방 중 런던 만국 박람회를 참관하고, 산업 혁명의 성과를 확인하는 등 서구 문물을 접했으며, 사진가 나다르에 의해 모습이 기록되기도 했다.

귀국길에는 포르투갈 등을 방문하고 출발 경로와 비슷하게 이동하여, 분큐 2년(1863년 1월 30일), 약 1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1]

4. 1. 런던 각서(1862)

사절단1862년 4월 7일 파리에 도착하여 프랑스와 교섭했지만, 항구 개항 연기에 대한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칼레에서 영국 해협을 건너 1862년 4월 30일 (분큐 2년 4월 2일)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에서는 일본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주일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이 휴가차 귀국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협력을 얻어 교섭을 진행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존왕양이 운동이 거세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국내 사정을 감안하여 1862년 6월 6일 (분큐 2년 5월 9일), 효고, 니가타, 에도, 오사카의 개항 및 개시 시기를 당초 예정보다 5년 뒤인 1868년 1월 1일까지 연기하는 내용의 런던 각서(London Protocol)가 조인되었다.[11][2] 이 각서는 일본이 "현재 존재하는 반대", 즉 외국인에 대한 반감과 황실의 정서를 극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영국 측이 인정한 결과였다.[2]

이후 사절단은 네덜란드 (6월 13일), 프로이센 (7월 18일, 베를린)과도 런던 각서와 같은 내용의 각서를 체결했다.

4. 2. 문화 교류 및 영향

런던에는 런던 만국 박람회 개최 시기에 맞춰 체류하며, 여러 차례 전시장을 방문하여 열성적으로 참관했다. 일행의 모습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기이하게 비춰졌으나, 예의 바른 태도는 감탄을 자아냈다고 전해진다[3]. 런던 만국 박람회의 일본 코너에는 올콕이 수집한 물품이 전시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물품이 전시된 최초의 만국 박람회였다[3]. 일본 전시품은 현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사절단 일원들은 "골동품 같은 잡동사니뿐이고 조악한 물건만 출품되어 있다"고 아쉬워했다[3]. 이러한 경험은 5년 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막부와 사쓰마 번이 각각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행은 런던 체류 중 산업 혁명을 이룬 영국철도나 국회의사당, 버킹엄 궁전, 대영 박물관, 전신국, 해군 공창, 조선소, 총기 공장 등을 방문하며 서구 문물을 직접 체험했다. 이때 시찰한 무기 중에는 1860년에 끝난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위력을 떨친 암스트롱 포도 있었는데, 이 포는 훗날 보신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3].

또한 유럽 체류 중 사절단의 모습은 사진가 나다르에 의해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5. 평가

분큐 유럽 파견 사절에 대한 평가는 여러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주요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다.


  • 하가 토루, 『대군의 사절 막말 일본인의 서구 체험』, 주오코론신서, 1968년.
  • 미야나가 타카시, 『막말 견구 사절단』, 고단샤 학술문고, 2006년.
  • * 원판: 『분큐 2년의 유럽 보고』, 신초 선서, 1989년.
  • 후쿠자와 유키치, 『서항기』 (이와나미 서점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 제19권 수록).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Japanese Foreign Policy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5
[2] 문서 French Policy in Japan
[3] 웹사이트 1862年第2回ロンドン万博、日本人がはじめて見た万博 https://www.ndl.go.j[...]
[4] 웹사이트 日高圭三郎為善(当時24歳)- プロファイル http://1860-kenbei-s[...]
[5] 웹사이트 益頭駿次郎尚俊(当時32歳)- プロファイル http://1860-kenbei-s[...]
[6] 웹사이트 新潟の音楽・文学・美術の萌芽とその後(2019. 10. 13全国外国人居留地研究会横浜大会) https://www.keiwa-c.[...] 2019-10-13
[7] 웹사이트 佐藤恒蔵秀長(豊後杵築藩士)(当時37歳)- プロファイル http://1860-kenbei-s[...]
[8] 서적 慶應義塾百年史: 上巻 慶応義塾 1958
[9] 뉴스 幕末の遣欧使節竹内下野守一行 : 使命と一行の顔触 : 福沢諭吉、福地源一郎も随員 url 大阪毎日新聞 1928-05-17
[10] 웹사이트 幕末の遣欧使節団1.開市開港延期交渉使節団の一行 https://www.lib.u-to[...]
[11] 문서 French Policy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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