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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청동 해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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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청동 해방파는 1960년대 일본 사회당의 청년 조직에서 분열되어 결성된, 즉각적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일본의 신좌파 조직이다. 1960-70년대 안보 투쟁, 반전 운동, 1968-69년 일본 대학 시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반대 투쟁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1981년 혁명적 노동자 협회(혁노협)와 해방파 전국 협의회(해방파전협)로 분열되었으며, 이후 과격한 노선으로 인해 내부 갈등을 겪었다. 사청동 해방파는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주장하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당 건설과 국제적 단결을 목표로 했다.

2. 역사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체결을 둘러싼 대규모 안보 투쟁 실패 후 전학련(전국학생연맹)이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자, 일본 사회당(JSP)은 당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학생 운동가들을 모아 새로운 청년 조직인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약칭 사청동)을 창설했다.

하지만 1964년, 사청동 내부에서도 사회당의 "구조 개혁" 노선을 둘러싼 이견이 발생했다. 사회당의 점진적 개혁 노선에 반대하며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급진 활동가들은 1965년 "즉각적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사청동 내에서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 해방파(日本社会主義青年同盟解放派|니혼 샤카이슈기 세이넨 도메이 카이호하일본어, 통칭 해방파)를 결성하며 분리되었다.

1966년, 해방파는 중핵파, 제2차 분파와 연합하여 "삼파 전학련"을 결성하고, 폭력적인 직접 행동을 통한 혁명 노선을 추구했다. 이들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방미 저지 투쟁,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이어진 1968-69년 일본 대학 시위, 그리고 1968년부터 1980년대까지 계속된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반대 산리츠카 투쟁 등 주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급진 노선으로 인해 1971년 일본 사회당은 해방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소속 당원들을 제명했다.

해방파는 경쟁 관계에 있던 신좌파 단체 혁마르파와 격렬한 내부 항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80년까지 해방파에 의해 살해된 혁마르파 조직원은 약 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직 내부의 노선 갈등 또한 심화되어, 결국 1981년에는 하자마파가 이끄는 혁명적 노동자 협회(혁노협)와 타키구치 히로토 등이 중심이 된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해방파 전국 협의회(해방파 전협)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사상적으로 해방파는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을 내세웠다. 이들은 레닌주의의 전위당 이론을 비판하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공통 이익에 기반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스탈린주의의 일국 사회주의론, 트로츠키주의의 반스탈린주의, 마오쩌둥 사상, 기성 좌익의 관료주의 등을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을 중시했다. 일본 사상계에서는 노농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61년 타키구치 히로토가 작성한 '공산주의=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탈환하기 위한 투쟁 선언(초안)'은 해방파의 중요한 강령적 문서로 간주된다. 이 문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 투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등을 비판하며, 로자 룩셈부르크노농파의 사상을 계승하여 순수한 '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가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8]

2. 1. 형성 배경 (1960년대 초)

1960년, 전학련(전국학생연맹)은 미일 안보 조약 통과를 막지 못한 대규모 안보 투쟁의 실패 이후 책임 공방 속에서 분열되어 사실상 해산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사회당(JSP)은 분열된 학생 운동 세력 일부를 당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사회당 계열 학생들이 주도하는 전학련 분파를 기반으로 새로운 당 청년 조직인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 日本社会主義青年同盟|니혼 샤카이슈기 세이넨 도메이일본어, 약칭 사청동)을 설립했다. 이후 '사청동계 전학련'은 여러 분파로 나뉜 전학련들 사이에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사청동은 1960년 2월 27일 일본 사회당 본부에서 학생반 협의회를 결성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전년부터 와세다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도쿄 사회주의 학생 회의가 발전적으로 전환된 것이다. 도쿄 외국어 대학에서 활동하다 도쿄 대학에 입학한 타키구치 히로토가 사청동 도쿄대 학생반을 결성했으며, 이후 에다 사츠키, 요코미치 타카히로 등도 참여했다. 1961년 5월, 타키구치 히로토는 사청동 도쿄대반 기관지 '解放|카이호일본어' 6호에 '공산주의 =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탈환하기 위한 투쟁 선언 (초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이후 '넘버 식스'로 불리며 해방파의 강령적 문서로 여겨지게 된다. 1962년 12월에는 비밀 조직인 공산주의자 통신 위원회(KTC)가 결성되어 과도기적 전위 조직을 지향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일본 사회당 내 구조개혁 노선을 둘러싼 대립은 사청동 내부로 이어졌다. 특히 1964년, 사회당의 "구조 개혁" 당 강령에 대해 급진적인 청년 활동가들은 지나치게 점진적이라며 비판했고, 이는 사청동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64년 2월 열린 '사청동 제4회 대회'에서는 사회주의협회파가 구조개혁파로부터 지도권을 장악하는 등 내부 갈등이 격화되었다.

구조 개혁 노선에 반대하며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활동가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 1965년 3월 '즉각적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식적으로 사청동 해방파를 결성하며 분리되었다. 이것이 해방파(解放派|카이호하일본어)의 시작이다.

사청동 해방파는 다른 일본 신좌익 정파들과 달리 일본 공산당에 기원을 두지 않은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안보분트(안보조약 반대 공동투쟁 학생 연락회의)의 잔여 세력이 사청동에 합류하여 형성된 것도 아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해방파 지도부는 다른 신좌익 그룹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었으며, 1960년대 초반 불과 5년 만에 전국적인 조직을 구축했다.

2. 2. 주요 활동 (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1966년, 사청동 해방파는 다른 급진 학생 분파인 중핵파 및 제2차 분파와 연합하여 "삼파 전학련"()을 결성했다. 이들은 폭력적인 직접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1967년 10월 17일, 삼파 전학련의 일원으로서 사청동 해방파는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의 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였으며, 이 충돌로 학생 운동가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일본 전역의 여러 대학에서 벌어진 1968-69년 일본 대학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학생 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68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산리츠카 투쟁에도 참여하여 폭력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1971년, 일본 사회당은 사청동 해방파와의 모든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하고, 당 소속 해방파 구성원들을 제명 조치했다.

한편, 사청동 해방파는 라이벌 관계에 있던 신좌파 단체 혁마루파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노선 갈등을 넘어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 1972년 4월 28일: 오사카성 공원에서 혁마르파와의 충돌 중 혁마르파 학생 기노시타 마사토가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 마비로 밝혀졌으며, 이 사건 이후 양측의 대립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1972년 11월 8일: 와세다 대학에서 혁마르파가 학생 가와구치를 린치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와세다 해방 투쟁'의 시작점이 되었고, 와세다 행동위원회(WAC)가 결성되어 혁마르파는 대학 내 자치회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혁마르파는 학생 집회를 습격하며 와세다 대학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자위 무장을 시작한 WAC와 이를 지원하는 해방파, 분트 등 다른 세력과의 정면 대치가 이어졌다.
  • 1973년 5월 ~ 6월: 와세다 대학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충돌 끝에 혁마르파 전국 부대를 격퇴했다.


이러한 격렬한 대립은 1970년대를 넘어 지속되었으며, 1980년까지 사청동 해방파는 약 20명의 혁마르파 구성원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2. 3. 분열 (1980년대 이후)

1981년, 사청동 해방파는 하자마파(학생위원회 중심의 무투파)와 타키구치 히로토, 타카미 케이지 등을 중심으로 한 그룹(노동자 활동가 중심)으로 완전히 분열되었다.[1] 이 분열로 인해 기존의 혁명적 노동자 협회(혁노협)는 하자마파가 주도하게 되었고, 타키구치 그룹은 이후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해방파 전국 협의회(통칭 해방파 전협)를 결성했다. 분열 과정에서 사청동 조직은 사실상 기능을 정지했다.

분열의 조짐은 1977년 2월 혁노협 서기장 나카하라 하지메 피살 사건 이후 본격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학생위원회 무투파(하자마파)에 대한 조직 내 견제가 약화되었다. 혁마르파에 대한 대응 방식을 놓고, 타키구치 등은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한 해체를 주장한 반면, 하자마 등 학생 조직과 전투 조직에 영향력을 가진 그룹은 무력 투쟁을 통한 물리적 해체를 주장하며 군사 노선을 강화했다. 같은 해 4월, 하자마파는 혁마르파 간부 4명을 차량 방화로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켜, 잔혹한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78년에는 부락 해방 운동과 관련된 목상위 차별 삐라 사건이 발생하자, 하자마파는 이를 빌미로 "조직 내부 규탄 투쟁"(내규) 노선을 채택했다. 이들은 반대파 활동가들을 '스파이', '차별주의자'로 몰아 자기비판을 강요하는 등 내부 탄압을 강화하며, 타키구치·타카미 그룹과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1980년 9월 15일, 산리즈카에서 하자마파가 타키구치파를 무장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직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하자마파는 반대파 활동가들에 대한 무장 습격, 납치, 감금 등을 반복했다.

1981년 6월경, 조직은 공식적으로 나가이, 하자마 등이 이끄는 하자마파(학생 절반과 노동자 일부)와 타키구치, 타카미 등이 이끄는 그룹(훗날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해방파 전국 협의회(통칭 해방파 전협)가 되는 그룹, 학생 절반과 노동자 다수)으로 나뉘었다. 분열 과정에서 양측에 가담하지 않고 조직을 이탈하는 활동가들도 다수 발생했다. 이는 해방파가 본래 다양한 노선을 포괄하는 통일 전선적 성격을 가졌으나, 나카하라 서기장 피살 이후 군사 노선 강화와 내부 규탄 투쟁의 격화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타키구치 그룹은 하자마파의 스탈린주의적 방식과 개인 테러를 비판하며, 1981년 '연대'(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해방파 전국 협의회(해방파 전협)를 결성, 초기 해방파의 사상을 계승하는 조직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하자마파의 폭력에 대해 동일한 방식의 보복은 하지 않았다.

1999년 타키구치 히로토가 사망하였다.

3. 사상

다른 많은 신좌익 분파들이 트로츠키레닌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따르는 것과 달리, 해방파는 제1 인터내셔널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복원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볼셰비키와 같은 전위당이 외부에서 사상을 주입하여 대중을 지도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반레닌주의(반볼셰비즘)적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입장은 로자 룩셈부르크주의, 좌익 공산주의, 그리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반대파의 사상과 유사점을 보인다. 비록 레닌주의의 외부 주입론을 부정했지만, 전위 조직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어서 '공산주의 통신 위원회'라는 전위 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해방파는 다른 신좌익 분파들과의 의식의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신좌익 분파들이 스스로를 '신좌익'이라 칭하며 기존 일본 공산당을 대체할 진정한 전위 정당으로 여겨 공산당을 '요요기'(代々木, 공산당 본부 소재지)라고 부른 반면, 해방파는 공산당을 '닛쿄'(日共)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들을 기존 공산당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규정하기보다는, 다른 흐름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다른 당파들의 무력 투쟁에 대해서도, 혁마르파가 이를 '권력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고 중핵파가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과 달리, 해방파는 자신들의 기관지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었다.[7]

4. 조직

사청동 해방파는 혁명적노동자협회(혁로협)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정확히는 혁로협은 해방파라는 더 넓은 흐름의 중심 조직이었다. 해방파는 사회주의협회파에 가까운 좌파 사회민주주의 그룹부터, 학생위원회를 중심으로 무장 투쟁 강화를 주장하는 혁로협 내 최좌파 그룹까지 포괄하는 통일전선의 성격을 가졌다. 다양한 조류를 포괄했기 때문에 조직 내 분쟁이 잦았다는 평가도 있다.

해방파 조직은 크게 노동자 중심 흐름과 학생 중심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주요 활동 거점은 노동조합의 청년부, 대학, 학생 신문회 등이었다.

'''주요 거점 노동조합'''

조직명비고
전국수도노동조합(전수도) 도쿄수도노동조합
전신노동조합 도쿄 지방본부 청년부
전신노동조합 도쿄 남부 지구 청년부
일본 사철 노동조합 총연합회(사철총련) 도큐 노동조합 청년부
국철노동조합(국노) 다카사키 지방본부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자치노) 오사카시종 청년부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자치노) 가와사키시직 청년부



'''주요 거점 대학'''

대학명비고
도쿄 대학코마바, 혼고 캠퍼스
와세다 대학
호세이 대학
메이지 대학80년대 이후 주요 거점 중 하나
조치 대학
도요 대학
세이케이 대학
고마자와 대학
도쿄 여자 대학
릿쿄 대학
지바 대학
지바 공업 대학
도쿄 이과 대학노다 캠퍼스
가나가와 대학70년대 최대 거점이었으나 분열 후 약화
게이오기주쿠 대학히요시 캠퍼스 (공학부, 자치회)
간토가쿠인 대학
요코하마 시립 대학
도쿄 외국어 대학
무사시노 미술 대학
타쿠쇼쿠 대학
무사시 공업 대학(현 도쿄 도시 대학)
릿쇼 대학
오타루 상과 대학1973년 혁마르파의 습격으로 붕괴
히로사키 대학
도호쿠 대학
우츠노미야 대학
토야마 대학
후쿠이 대학
메이조 대학도카이 지방 최대 거점
간세이 가쿠인 대학
칸사이 대학간사이 지방 최대 거점
오사카 교육 대학
오사카 의과약과대학
나라 교육 대학
고베 대학
킨키 대학
토쿠시마 대학
히로시마 여자 대학(현 현립 히로시마 대학)
큐슈 대학큐슈 지방 거점
나가사키 대학
사가 대학
오이타 대학
큐슈 산업 대학
오키나와 대학



'''주요 거점 학생 신문회'''

신문명
도쿄 대학 코마바 신문
교토 대학 신문
히토츠바시 대학 신문
메이지 대학 신문



'''관련 조직'''


  •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 (사청동)
  • 전국 반제 학생 평의회 연합 (반제학평)
  • 전일본 학생 자치회 총연합 (전학련)
  • 반제 고교생 평의회 연합 (반제고평)
  • 프롤레타리아 통일 전선 (PSD)

5. 평가

사청동 해방파는 1960년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 내 학생 조직으로 출발하여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사회 변혁을 목표로 활동했다.[1] 초기에는 타키구치 히로토 등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론적 기반을 다졌고, 1961년 발표된 '공산주의 =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탈환하기 위한 투쟁 선언 (초안)'은 해방파의 중요한 강령적 문서로 여겨졌다.[1]

그러나 혁마르파와의 대립 과정에서 투쟁 방식이 점차 과격해졌다. 특히 1977년 발생한 혁노협 서기장 내게바 살인 사건과 우라와 차량 방화 내게바 살인 사건은 폭력 노선의 심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 이러한 사건들은 해방파 내부의 군사주의적 경향을 강화하고 군사 노선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는 해방파가 비판했던 레닌주의적 조직 원칙으로 회귀하는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1]

과격 노선과 더불어 조직 내부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1978년 '목상위 차별 삐라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내부 규탄 투쟁은 하자마 요시아키 중심의 무투파(하자마파)와 타키구치 히로토 중심의 노동자 활동가 그룹(타키구치파, 이후 노대파) 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1] 결국 1980년 9월, 삼리츠카 현장에서 하자마파가 타키구치파를 무장 습격하면서 조직 분열이 결정적이 되었고, 이후 사회청년동맹 해방파는 사실상 기능을 정지했다.[1] 분열 과정에서 양측에 가담하지 않고 이탈하는 활동가들도 다수 발생했는데, 이는 해방파가 다양한 성향의 집단을 아우르는 통일 전선이었으나 군사화 노선과 내부 갈등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1]

사청동 해방파의 활동이 한국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동시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반체제 운동 및 사회 변혁 운동의 한 흐름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 중심의 사회 변혁을 추구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극단적인 폭력 투쟁 방식과 파괴적인 내부 분열은 결국 조직의 쇠퇴를 자초하며 명확한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사회 운동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중요한 성찰 지점을 남긴다. 분열 후 타키구치파는 1999년 타키구치 히로토 사망 전까지 초기 해방파 사상 계승을 목표로 활동을 이어갔다.[1]

6.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Zengakuren: Japan's Revolutionary Students Ishi Press 1970
[2] 서적 Coed Revolution: The Female Student in the Japanese New Left Duke University Press 2021
[3] 서적 Against the State: Politics and Social Protest in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解放派の組織建設史(霧山 衛) http://kaihouha.org/[...]
[5] 웹사이트 昭和49年 警察白書 第8章 https://www.npa.go.j[...]
[6] 문서 日本の新左翼#呼称 참조
[7] 문서 一例として、連合赤軍に対し「あくまで革命運動の歪曲と破産であって反革命と切り捨ててはならない。彼等は破産しつつも、最後の力を振りしぼって権力への徹底抗戦をやりぬいた」(「解放」91号 )と言及た。
[8] 웹사이트 共産主義=革命的マルクス主義の旗を奪還する為の闘争宣言(草案)滝口弘人 1961年5月 http://zengakuren.in[...]
[9] 뉴스 学生ゲリラ 火炎ビン市民を巻添え 朝日新聞 196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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