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크리소고노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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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 크리소고노 성당은 로마의 명의본당이자 로마 최초의 사목구 성당 중 하나이다. 4세기에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지시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리소고누스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73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여러 차례 재건축을 거쳐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현재는 삼위일체 수도회에서 관리하며, 대한민국 염수정 추기경이 명의사제로 임명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는 다양한 미술 작품과 지하 유적이 보존되어 있으며, 역대 명의 사제 목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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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크리소고노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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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산 크리소고노 성당 |
영어 이름 | Basilica of Saint Chrysogonus |
라틴어 이름 | Sancti Crisogoni |
위치 | 이탈리아 로마 피아차 손니노 44 |
교단 | 로마 가톨릭교회 |
전례 | 로마 전례 |
수도회 | 삼위일체회 |
봉헌 | 성 크리소고노 |
지위 | 추기경 서임 성당 소성당 삼위일체회 총본부 |
추기경 사제 | 안드레아 염수정 |
건축가 | 조반니 바티스타 소리아 |
건축 양식 | 로마네스크 건축 (종탑) 바로크 건축 (대성당) |
기공 | 4세기? |
완공 | 17세기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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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산 크리소고노 성당은 로마의 명의본당 가운데 하나이며, 로마의 첫 본당이다.[1] 4세기에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의 지시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 크리소고누스는 아퀼레이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으며, 그곳에 묻혀 그 지역의 신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존경받았다.[1] 이 순교자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일찍이 로마로 옮겨졌으며, 성당(''티툴루스 크리소고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499년 로마 시노드의 서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1] 성당의 설립자는 크리소고누스라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성당은 곧 아퀼레이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 되었을 수도 있다.[1] 또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처음부터 성 크리소고누스에게 봉헌되었고 그로부터 이름을 따왔을 수도 있다.[1]
73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당을 복원하고 ''산티 스테파니, 로렌치오 에 크리소고니'' 수도원을 설립했다.[2] 원래 수도승들은 비잔틴 전례를 따랐다.[2] 성당은 1123년 조반니 다 크레마에 의해 재건되었고,[2] 1626년 조반니 바티스타 소리아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며,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2]
1860년대 중반, 바실리카가 삼위일체 수도회의 관할 하에 놓인 직후 추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3] 1907년 L. 만프레디니 신부와 C. 피콜로미니 신부가 성당의 제의실 밑을 파본 결과, 초창기 성당의 유적들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당 지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산 크리소고노 성당의 관리는 삼위일체 수도회에서 담당하고 있다.[3] 대한민국의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이 명의사제로 임명되어 있다. 산 크리소고노 성당의 명의사제 추기경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는 훗날 교황 레오 13세로 선출된 빈첸초 조아키노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 추기경이 있다.
2. 1. 초기 역사와 기원
산 크리소고노 성당은 로마의 명의본당 가운데 하나이며, 로마의 첫 본당이다.[1] 4세기에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의 지시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 크리소고누스는 아퀼레이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으며, 그곳에 묻혀 그 지역의 신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존경받았다.[1] 이 순교자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일찍이 로마로 옮겨졌으며, 성당(''티툴루스 크리소고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499년 로마 시노드의 서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1] 성당의 설립자는 크리소고누스라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성당은 곧 아퀼레이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 되었을 수도 있다.[1] 또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처음부터 성 크리소고누스에게 봉헌되었고 그로부터 이름을 따왔을 수도 있다.[1]73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당을 복원하고 ''산티 스테파니, 로렌치오 에 크리소고니'' 수도원을 설립했다.[2] 원래 수도승들은 비잔틴 전례를 따랐다.[2]
1907년 L. 만프레디니 신부와 C. 피콜로미니 신부가 성당의 제의실 밑을 파본 결과, 초창기 성당의 유적들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당 지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2. 2. 중세 시대 재건축
499년 로마 시노드의 서명에서 ''산 크리소고노 성당''(티툴루스 크리소고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1] 성당의 설립자는 크리소고누스라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성당은 곧 아퀼레이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 되었을 수 있다.[1] 또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처음부터 성 크리소고누스에게 봉헌되었고 그로부터 이름을 따왔을 수도 있다.[1] 크리소고누스는 아퀼레이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으며, 그곳에 묻혀 그 지역의 신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존경받았다.[1] 이 순교자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일찍이 로마로 옮겨졌다.[1]73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당을 복원하고 ''산티 스테파니, 로렌치오 에 크리소고니'' 수도원을 설립했다.[2] 원래 수도승들은 비잔틴 전례를 따랐다.[2] 성당은 1123년 조반니 다 크레마에 의해 재건되었고,[2] 1626년 조반니 바티스타 소리아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며,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2] 1860년대 중반, 바실리카가 삼위일체 수도회의 관할 하에 놓인 직후 추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3]
2. 3. 17세기 바로크 양식 재건축
4세기에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 치세에 지어진 ''산 크리소고노 성당''은 로마 최초의 본당 중 하나이다.[1] 크리소고누스는 아퀼레이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으며, 그곳에 묻혀 그 지역의 신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존경받았다. 이 순교자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일찍이 로마로 옮겨졌다. 이 성당(''티툴루스 크리소고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499년 로마 시노드의 서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1] 성당의 설립자는 크리소고누스라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성당은 곧 아퀼레이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 되었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처음부터 성 크리소고누스에게 봉헌되었고 그로부터 이름을 따왔을 수도 있다.[1]73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당을 복원하고 ''산티 스테파니, 로렌치오 에 크리소고니'' 수도원을 설립했다. 원래 수도승들은 비잔틴 전례를 따랐다. 성당은 1123년 조반니 다 크레마에 의해 재건되었고, 1626년 조반니 바티스타 소리아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며,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2] 1860년대 중반, 바실리카가 삼위일체 수도회의 관할 하에 놓인 직후 추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3]
2. 4. 현대
산 크리소고노 성당은 로마의 명의본당 가운데 하나이며, 로마의 첫 본당이다.[1] 4세기에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의 지시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2세기에 크레마의 요한과 조반니 바티스타 소리아에 의해 재건축되었으며, 17세기 초에 시피오네 보르게세에 의해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되었다.1907년 L. 만프레디니 신부와 C. 피콜로미니 신부가 성당의 제의실 밑을 파본 결과, 초창기 성당의 유적들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당 지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산 크리소고노 성당의 관리는 삼위일체 수도회에서 담당하고 있다.[3]
대한민국의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이 명의사제로 임명되어 있다. 산 크리소고노 성당의 명의사제 추기경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는 훗날 교황 레오 13세로 선출된 빈첸초 조아키노 라파엘레 루이지 페치 추기경이 있다.
73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당을 복원하고 ''산티 스테파니, 로렌치오 에 크리소고니'' 수도원을 설립했다. 원래 수도승들은 비잔틴 전례를 따랐다.[2]
2. 5. 대한민국과의 관계
3. 미술과 건축
성당의 종탑은 12세기에 재건축한 것이며, 성당 내부는 12세기에 재건된 성당 자리에 1620년대에 재건축한 것이다.[4] 네이브를 떠받치는 22개의 화강암 기둥은 고대 시절의 기둥을 손본 후에 재활용한 것이다.[4] 바닥 부분은 코스마테스크 장식이 되어 있지만, 대부분 긴 회중석에 의해 가려져 있다.[4] 제단 밑 지하실은 8세기에 지어진 것이다.[4] 중앙 제대는 1127년에, 제대 위를 덮은 천개(발다키노)는 1627년 또는 1641년에 G.B 소리아가 제작한 것이다.[4] 제대 위 바로크 양식의 천장 중앙 부분에는 구에르치노가 그린 《성 크리소고노의 영광》이라는 제목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는데, 런던으로 옮겨진 원본의 복사본일 가능성이 높다.[5]
성당 내부 왼쪽 끝에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의 유해를 모신 부속 제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녀는 삼위일체 수도회의 3회원 복장을 하고 묻혔다.[6]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1769–1837)는 1920년에 시복된 기독교 신비주의자였다.[6] 제단 위에는 아론 델 베키오가 그린 삼위일체 성인들의 영광을 그린 그림이 있다.[6] 인접한 수도원에서 그녀의 다른 소지품들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존경의 대상이자 유물로 여겨진다.[6] 입구 왼쪽에는 카를로 마르키오니와 피에트로 브라치가 제작한 지오반니 자코포 밀로 추기경에게 헌정된 기념비가 있다.[7] 성당 오른쪽에는 파올로 구이도티의 작품으로, 성 바르바라와 성 카타리나 성당에서 옮겨진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와 "십자가 처형"을 포함한 프레스코 유물이 있다.[7] 네이브에는 조반니 다 산 조반니의 "세 대천사" 그림과 자친토 지미냐니의 "삼위일체와 천사"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단에는 루도비코 지미냐니의 "수호 천사" 그림이 있다.[7] 사제관과 성찬 덮개 (또는 발다키노)는 소리아가 제작했으며, 네 개의 설화석고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앱스에는 피에트로 카발리니의 12세기 학파가 그린 "성 크리소고노와 야고보 성인이 있는 성모자" 위에 "성 크리소고노의 생애" (16세기) 프레스코가 있다. 사제관의 볼트는 주세페 체사리가 그린 성모 마리아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7] 산 크리소고노에서 발견된 비문은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빈첸초 포르첼라가 수집하여 출판했다.[8]
1907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교회 유적이 성물실 계단을 통해 접근 가능한 형태로 발견되었다.[9] 반원형의 앱스 구역의 벽돌 구조는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4세기에 교회로 개조된 상당한 규모의 개인 주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는 단일 네이브를 가지고 있었다.[9]
앱스 양쪽에는 동방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스토포리아로 알려진 방들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방은 성물실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집사관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세례당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다수의 분지 중 남쪽 벽에 조각된 분지가 있어, 이곳이 세탁소이자 염색장이었던 풀로니카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9] 당시 이 지역은 상업 지구였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른 사람들은 남쪽 벽의 분지가 침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지들도 있었기 때문에, 원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건물이 교회로 봉헌된 후 세례반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4]
10세기에 베네딕토회가 이 부지를 인수하여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생애 장면을 묘사한 일련의 프레스코화를 추가했다.[4] 다른 프레스코화는 8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그려졌으며, "교황 실베스터가 용을 사로잡는 장면", "성 판탈레온이 맹인을 치료하는 장면", 그리고 "성 플라시두스의 구출"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 개의 석관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는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첫 번째 교회 아래에는 초기 로마 시대 주택의 유적이 있다.[9]
3. 1. 건축
성당의 종탑은 12세기에 재건축한 것이며, 성당 내부는 12세기에 재건된 성당 자리에 1620년대에 재건축한 것이다.[4] 네이브를 떠받치는 22개의 화강암 기둥은 고대 시절의 기둥을 손본 후에 재활용한 것이다.[4] 바닥 부분은 코스마테스크 장식이 되어 있지만, 대부분 긴 회중석에 의해 가려져 있다.[4] 제단 밑 지하실은 8세기에 지어진 것이다.[4] 중앙 제대는 1127년에, 제대 위를 덮은 천개(발다키노)는 1627년 또는 1641년에 G.B 소리아가 제작한 것이다.[4] 제대 위 바로크 양식의 천장 중앙 부분에는 구에르치노가 그린 《성 크리소고노의 영광》이라는 제목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는데, 런던으로 옮겨진 원본의 복사본일 가능성이 높다.[5]
성당 내부 왼쪽 끝에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의 유해를 모신 부속 제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녀는 삼위일체 수도회의 3회원 복장을 하고 묻혔다.[6]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1769–1837)는 1920년에 시복된 기독교 신비주의자였다.[6] 제단 위에는 아론 델 베키오가 그린 삼위일체 성인들의 영광을 그린 그림이 있다.[6] 인접한 수도원에서 그녀의 다른 소지품들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존경의 대상이자 유물로 여겨진다.[6] 입구 왼쪽에는 카를로 마르키오니와 피에트로 브라치가 제작한 지오반니 자코포 밀로 추기경에게 헌정된 기념비가 있다.[7] 성당 오른쪽에는 파올로 구이도티의 작품으로, 성 바르바라와 성 카타리나 성당에서 옮겨진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와 "십자가 처형"을 포함한 프레스코 유물이 있다.[7] 네이브에는 조반니 다 산 조반니의 "세 대천사" 그림과 자친토 지미냐니의 "삼위일체와 천사"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단에는 루도비코 지미냐니의 "수호 천사" 그림이 있다.[7] 사제관과 성찬 덮개 (또는 발다키노)는 소리아가 제작했으며, 네 개의 설화석고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앱스에는 피에트로 카발리니의 12세기 학파가 그린 "성 크리소고노와 야고보 성인이 있는 성모자" 위에 "성 크리소고노의 생애" (16세기) 프레스코가 있다. 사제관의 볼트는 주세페 체사리가 그린 성모 마리아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7] 산 크리소고노에서 발견된 비문은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빈첸초 포르첼라가 수집하여 출판했다.[8]
3. 2. 내부 장식
성당 내부는 12세기에 재건된 성당 자리에 1620년대에 재건축한 것이다.[4] 천장을 떠받치는 22개의 화강암 기둥은 고대 시절의 기둥을 손본 후에 재활용한 것이다.[4] 바닥 부분은 코스마테스크 장식이 되어 있지만, 대부분 긴 회중석에 의해 가려져 있다.[4] 제단 밑 지하실은 8세기에 지어진 것이다.[4] 중앙 제대는 1127년에, 제대 위를 덮은 천개(발다키노)는 1627년 또는 1641년에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제작한 것이다.[4] 제대 위 바로크 양식의 천장 중앙 부분에는 구에르치노가 그린 《성 크리소고노의 영광》이라는 제목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는데, 런던으로 옮겨진 원본을 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5]성당 내부 왼쪽 끝에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의 유해를 모신 부속 제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 왼쪽에는 조반노 자코포 밀로 추기경에게 헌정된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6][7] 이 기념비는 카를로 마르키오니와 피에트로 브라치가 제작한 것이다.[7]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1769–1837)는 1920년에 시복된 기독교 신비주의자였다.[6] 그녀는 삼위일체 수도회의 3회원 복장을 하고 이곳에 묻혔다. 제단 위에는 아론 델 베키오가 그린 삼위일체 성인들의 영광을 그린 그림이 있으며, 인접한 수도원에서 그녀의 다른 소지품들을 볼 수 있다.[6] 성당 오른쪽에는 파올로 구이도티의 작품으로, 성 바르바라와 성 카타리나 성당에서 옮겨진 《성녀 프란체스카 로마나의 십자가형》을 포함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7]
네이브에는 조반니 다 산 조반니의 "세 대천사" 그림과 자친토 지미냐니의 "삼위일체와 천사" 그림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단에는 루도비코 지미냐니의 "수호 천사" 그림이 있다.[7] 사제관과 성찬 덮개 (또는 발다키노)는 소리아가 제작했으며, 네 개의 설화석고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7] 앱스에는 피에트로 카발리니의 12세기 학파가 그린 "성 크리소고노와 야고보 성인이 있는 성모자" 위에 "성 크리소고노의 생애" (16세기) 프레스코가 있다. 사제관의 볼트는 주세페 체사리가 그린 성모 마리아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7] 산 크리소고노에서 발견된 비문은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8]
3. 3. 지하 유적
1907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교회 유적이 성물실 계단을 통해 접근 가능한 형태로 발견되었다.[9] 반원형의 앱스 구역의 벽돌 구조는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4세기에 교회로 개조된 상당한 규모의 개인 주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는 단일 네이브를 가지고 있었다.[9]앱스 양쪽에는 동방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스토포리아로 알려진 방들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방은 성물실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집사관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세례당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다수의 분지 중 남쪽 벽에 조각된 분지가 있어, 이곳이 세탁소이자 염색장이었던 풀로니카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9] 당시 이 지역은 상업 지구였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른 사람들은 남쪽 벽의 분지가 침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지들도 있었기 때문에, 원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건물이 교회로 봉헌된 후 세례반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4]
10세기에 베네딕토회가 이 부지를 인수하여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생애 장면을 묘사한 일련의 프레스코화를 추가했다.[4] 다른 프레스코화는 8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그려졌으며, "교황 실베스터가 용을 사로잡는 장면", "성 판탈레온이 맹인을 치료하는 장면", 그리고 "성 플라시두스의 구출"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 개의 석관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는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첫 번째 교회 아래에는 초기 로마 시대 주택의 유적이 있다.[9]
4. 역대 명의 사제
스테파노 (745년-752년)는 교황으로 선출된 사제였으나, 서임 전에 사망했다.[10] 로렌의 프레데릭은 1057년 6월 14일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 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0] 베르나르도 데글리 우베르티는 1097년부터 1111년까지 파르마 주교를 역임했다. 그레고리우스는 1111년부터 1113년까지,[11] 테오데리쿠스는 1113년부터 1116년까지 재임했다.[12] 조반니 다 크레마는 1117년부터 1137년 이전에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13] 베라르도 데이 마르시는 1130년부터 1136년까지 아베차노 주교였으며, 베르나르도는 1136년부터 1138년까지 사제였다. 귀도 벨라기는 1138년부터 1158년까지, 아르디치오 리볼텔라는 1158년부터 1165년까지 사제를 역임했다. 피에트로는 1173년부터 1180년까지, 보나디에스 데 보나디에는 1186년에 사제를 역임했다. 스테판 랭턴은 1205년부터 1228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했다. 로버트 소머코츠는 1239년부터 1241년까지 사제였다. 레몽 르 루는 1325년 1월부터 11월까지 교황청 원로원을 역임했다. 피에르 키리아크는 1342년 9월 20일부터 1351년까지 사제였다.
기 드 불로뉴는 1351년부터 1373년까지 리옹 대주교를 역임했다. 코라도 카라치올로는 1405년 6월 12일부터 1411년 2월 15일까지 밀레토 주교였다. 안타웅 마르틴스 데 차베스는 1440년 7월 8일부터 1447년 7월 6일까지 포르투 주교였다. 안토니오 세르다 이 요스코스는 1448년 2월 17일부터 1459년 9월 12일까지 모데나 대주교였다. 자코모 아만나티-피콜로미니는 1462년 1월 8일부터 1477년 8월 17일까지 파비아 주교였다. 지로라모 바소 델라 로베레는 1479년 9월 17일부터 1492년 8월 31일까지 레나카티 주교였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라리는 1500년 1월 5일부터 1502년 7월 20일까지 모데나 주교였다. 아드리아노 디 카스텔로는 1503년 6월 12일부터 1518년 7월 5일까지 헤리퍼드 주교였다.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1518년 7월 5일부터 1521년 1월 5일까지 마인츠 주교였다. 에버하르트 폰 데어 마르크는 1521년 1월 5일부터 1538년 2월 27일까지 발렌시아 대주교였다. 지로라모 알레안드로는 1538년 3월 20일부터 1542년 2월 1일까지 브린디시-오리아 대주교였다. 피에트로 벰보는 1542년 2월 15일부터 1544년 10월 17일까지 베르가모 주교였다. 우베르토 감바라는 1544년 10월 17일부터 1549년 2월 14일까지 토르토나 주교였다. 장 뒤 벨레는 1549년 2월 25일부터 1550년 2월 28일까지 보르도 대주교였다. 앙투안 상갱 드 뫼동은 1550년 2월 28일부터 1559년 11월 25일까지 리모주 주교였다. 크리스토포로 마드루초는 1560년 1월 16일부터 3월 13일까지 브릭센 주교였다. 장 베르트랑은 1560년 3월 13일부터 12월 4일까지 센스 대주교였다.
샤를 드 부르봉은 1561년 1월 15일부터 1590년 5월 9일까지 루앙 대주교였다. 도메니코 피넬리는 1591년 1월 14일부터 1602년 4월 22일까지 페르모 주교였다. 카밀로 보르게세는 1602년 4월 22일부터 1605년 5월 16일까지 몬탈치노 주교였다. 카를로 콘티)는 1605년 6월 1일부터 8월 17일까지 안코나 에 우마나 주교였다. 시피오네 카페렐리-보르게세는 1605년 8월 17일부터 1633년 10월 2일까지 볼로냐 대주교였다. 피에트로 마리아 보르게세는 1633년 12월 19일부터 1642년 6월 15일까지 사제였다. 파우토 폴리는 1643년 8월 31일부터 1653년 10월 7일까지 오르비에토 주교였다. 로렌초 임페리알리는 1654년 3월 23일부터 1673년 9월 21일까지 사제였다. 조반니 바티스타 스파다는 1673년 9월 24일부터 1675년 1월 23일까지 성 추기경단 실무자였다. 카를로 피오 디 사보이아는 1675년 1월 28일부터 1681년 12월 1일까지 성 추기경단 실무자였다. 팔루초 팔루치 알티에리 데글리 알베르토니는 1681년 12월 1일부터 1684년 11월 13일까지 신앙 성성 장관이었다. 줄리오 스피놀라는 1684년 11월 13일부터 1689년 2월 28일까지 루카 주교였다. 파브리초 스파다는 1689년 5월 23일부터 1708년 4월 30일까지 산타 프라세데의 추기경-사제로 승격했다. 필리포 안토니오 구알테리오는 1708년 4월 30일부터 1724년 1월 29일까지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의 추기경-사제로 승격했다. 프로스페로 마레포스키는 1725년 1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산 칼리스토의 추기경-사제로 승격했다. 줄리오 알베로니는 1728년 9월 20일부터 1740년 8월 29일까지 산 로렌초 인 루치나의 추기경-사제로 승격했다. 지기스문트 폰 콜로니치는 1740년 8월 29일부터 1751년 4월 12일까지 재임했다. 조반니 자코모 밀로는 1753년 12월 10일부터 1757년 11월 16일까지 재임했다. 조반니 바티스타 로베로는 1758년 8월 2일부터 1766년 10월 9일까지 재임했다. 필리포 마리아 피렐리는 1766년 12월 1일부터 1771년 1월 10일까지 재임했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반디티는 1775년 12월 18일부터 1796년 1월 27일까지 재임했다.
빈첸초 페치는 1853년 12월 22일부터 1878년 2월 20일까지 재임했으며, 교황 레오 13세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곤 폰 퓌르스텐베르크는 1880년 2월 27일부터 1892년 8월 20일까지 재임했다. 필리프 크레멘츠는 1893년 1월 19일부터 1899년 5월 6일까지 재임했다.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카세타는 1899년 6월 22일부터 1905년 3월 27일까지 재임했으며, 사비나 주교 추기경으로 승격했다. 피에트로 마피는 1907년 4월 18일부터 1931년 3월 17일까지 재임했다. 테오도르 인니처는 1933년 3월 13일부터 1955년 10월 9일까지 재임했다. 안토니오 마리아 바르비에리는 1958년 12월 15일부터 1979년 7월 6일까지 재임했다. 베르나르 야고는 1983년 2월 2일부터 1997년 10월 5일까지 재임했다. 단 궈시는 1998년 2월 21일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재임했다. 염수정 안드레아는 2014년 2월 2일부터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5. 각주
- 아폴론지-게티, 브루노 마리아 (1966). ''산 크리소고노''. 로마의 일러스트 교회, 92. (로마, 1966).it
- 치골라, 미켈라, [http://webuser.unicas.it/cigola/pub/filoni/Roma.htm "로마의 산 크리소고노 바실리카. 비판적 연구"], ''건축사 연구 센터 게시판''의 단일호, 35호, 로마, 1989년 12월.it
- 치골라, M., "산 크리소고노의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 ''고고학'' XXV, 6/7호, 1986년 6월~7월, 14–15쪽.it
- 치골라, M., "로마의 산 크리소고노 바실리카," ''알마 로마'' XXV, 5–6호, 1984년 9월~12월, 45–57쪽.i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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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St. Chrysogonus."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08-11-21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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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religiana.co[...]
[3]
웹사이트
Monday: San Crisogono
https://www.pna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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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San Crisogono
http://www.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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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Walking Through Rome
i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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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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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8]
문서
Inscrizioni delle chese e d' altre edifici di Roma, dal secolo XI fino al secolo XVI
Fratelli Bencini
1873
[9]
웹사이트
Basilica of San Crisogono
https://www.atlasobs[...]
2019-09-09
[10]
문서
Theology, Rhetoric, and Politics in the Eucharistic controversy, 1078–1079
Columbia University Press
[11]
문서
Kardinal, Klerus und Kirchen Roms: 1049–1130
Tübingen
1977
[12]
문서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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