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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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진우 피살 사건은 1945년 12월 30일 새벽, 한국민주당의 유력 정치인 송진우가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과 관련하여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임시정부와 갈등을 겪으면서 암살의 원인이 되었다. 암살의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기도 했지만, 좌파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송진우 암살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이후, 한국민주당 내에서는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었고, 송진우는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입장은 임정 측과의 갈등을 야기했고, 특히 반탁투쟁이 반미군정 투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임정 측과 대립을 심화시켰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송진우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를 비롯한 6명의 청년단원들에게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범인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송진우에게 명중했다. 이들에게 총을 건네준 사람은 전백으로, 그는 자신이 배후라고 주장했다.[16]
2. 원인
2. 1.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문제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4][5] 한국민주당 내에서는 신탁통치를 놓고 반대하는 입장(김성수)과 불가피하다는 입장(송진우)이 대립했다.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보았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는 김구를 찾아가 미군정과 정면 대결을 피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김구는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송진우는 5년간의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며,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6] 같은 날 밤 10시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및 우파 회의에서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지만, 신중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군정을 무조건 적대시하면 안되며, 당분간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12월 29일 경교장 회의에 앞서, 송진우는 미국계 인사와의 인터뷰에서 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We want American troops to remain here for at least two years. If American troops leave now, there is a fear that communists will take power. Because they are better organized than us.|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영어[7]
송진우는 미군정에 도전하면 우익 진영이 아닌 제3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주장했지만, 자신을 적극적인 찬탁론자로 몰아가는 여론에는 불쾌감을 느꼈다. 서울 거리에는 '송진우 타도'등을 적은 벽보와 삐라가 대량으로 나돌았다.
정국이 불안해지고 이상한 소문이 돌자, 조카 송영수는 문단속을 제안했지만 송진우는 "문을 왜 거느냐? 그냥 내버려 둬."라며 거절했다.[9]
2. 2. 임시정부와 송진우 간 갈등
1945년 12월 중순, 송진우는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 준비 모임 겸 간담회를 서울 관수동 근처 국일관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는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조완구, 엄항섭 등 임정 요인 전원이 초대되었다.[10]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이 자리에서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며,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10]
이에 장덕수는 "해공!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국내에 있던 사람은 다 친일파라니? 임정 요인들은 그런 색안경을 쓰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나?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해공,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며 거칠게 항의했다.[11] 그러자 송진우는 다음과 같이 신익희를 설득하였다.
> 여보 해공! 표현이 좀 안됐는진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천만에요. 해외에서 헛고생을 했군. 해방된 우리 국민들에게 임시정부를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 개인을 위해선 줄 알고 있소?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고 있었는 줄 알어?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국내사람들보다 오히려 적었을 거 아니야? 가만히들 있기나 해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은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12]
이후 임정 측의 친일파 숙청론은 수그러들었다.[12] 송진우 측은 정치적 주도권 및 친일파 문제 등으로 충칭 임시정부 측과 갈등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송진우 측의 충칭 임시정부 측에 대한 과거 이미지가 크게 변화했음을 보여준다.[13] 또한 반탁투쟁이 반 미군정 투쟁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군정과 밀착된 그의 입장은 충칭 임시정부 측의 즉각적인 정권 인수 의지와 대립했다.[13]
한편, 송진우는 모종의 위협을 받았으며, 미군정 CIC는 이를 경고했다. 그의 경호원들은 항상 경계 태세에 있었다.[13]
3. 경과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다.[1] 브루스 커밍스나 리처드 로빈슨 역시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다. 암살범 중 한 명인 한현우는 훗날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17] 또한 한현우는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18][19][20]
한편, 송진우의 집에 병원 통원치료차 왔다가 자객들을 추격하던 외사촌 양신묵은 달아나던 범인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치료를 받았다.
3. 1. 암살 과정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송진우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게 저격을 당해 암살되었다.[14][15] 송진우와 임시정부 측의 면담은 같은 날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벌어진 일이었다. 범인은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이었고, 이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송진우에게 명중했다. 총탄은 얼굴에 1발, 심장에 1발, 복부에 3발, 하관절에 1발이 관통했다. 이들에게 총을 건네준 사람은 전백으로, '영화(永和)기업사'라는 해운회사의 사장이었다.[16] 전백은 자신이 배후라고 주장했다.
송진우의 집에 병원 통원치료를 왔다가 자객들을 추격하던 외사촌 양신묵은 달아나던 범인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치료를 받았다. 양신묵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9일 저녁 형님(송진우)과 둘이서 취침하게 되었는데, 아침 4시쯤 잠이 깨어 두어 대 담배를 피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5시쯤 다시 잠이 들었다. 6시가 될까 말까 해서 돌연 뒤꼍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 때 형님은 ‘누구요?’하고 평상 말투로 소리쳤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뒤이어 마루의 덧 유리창문이 열리더니 난데없는 육혈포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예닐곱 발 쏘는 소리가 났는데, 형님은 아무 말 없이 태연자약하게 쓰러졌다. 그 뒤는 아무것도 모른다.'
3. 2. 범인 체포
암살 직후, 건넌방에서 자던 양자 송영수와 하인들은 암살범들을 추격하여 주범 한현우와 주요 범인 유근배를 검거했다.[1] 나머지 공범 4명도 4개월 뒤 군정청 경찰에 의해 검거, 체포되었다.[1]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수사에 박차를 가하여, 이듬해 1946년 2월 13일 송진우의 경호원들의 동정을 살피던 형사로부터 '전에 고하의 경호원으로 있었던 김일수(金日洙)가 해안경비대에 입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1] 장택상은 미군 스톤 부장의 양해를 얻어 미군 두 명을 해안경비대에 파견하는 한편 경찰관들을 서울역 주변에 잠복시켰다.[1]
1946년 2월 13일 오후 2시 경찰은 정종칠(鄭鍾七)과 경비대에 입대하게 된 김일수를 검거하고 취조를 개시하였다.[1] 그 결과 생존시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던 백남석(白南錫), 김의현(金義賢), 신동운(申東雲), 박민석(朴閔錫), 유근배 등이 1945년 11월 말경에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경호원에서 물러난 점을 알아냈다.[1] 한편 김일수의 진술 중에 김일수가 시내 종로 모처에서 김의현을 만나 송진우 암살을 물었을 때 김의현이 "그건 왜 묻느냐? 누구면 알아서 뭘 어쩔 작정이냐? 그만 두어라."라고 답했다고 진술했다.[1] 김일수의 진술로 김의현이 암살범에 대해서 안다고 보고 장택상은 2월 14일 신동운, 김의현, 백남석 등을 각각 체포하여 심문하였다.[1] 그리고 4월 8일 인천 화평동에 숨어있던 유근배를 체포하고 같은 날 한현우를 수색하여 그날 10시 20분 서울 신당동에서 한현우를 체포하였다.[1]
3. 3. 재판과 진술
한현우는 재판 과정에서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는 질문에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다.[2] 한민당 계열의 성토가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방청객도 존재했다.
한현우는 여운형을 먼저 죽이려고 따라다녔다고 진술했다.[2] 그는 종로3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여운형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죽이려 했으나,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아, 현우군! 오랜만일세"하며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니 차마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2] 또한 송진우 암살을 두고 이승만과 김구가 자신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했다고 주장했다. 훗날 언론인 송건호는 한현우를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라고 평가했다.[21] 일본 유학을 다녀온 평안남도 출신 한현우는 월남 청년이었으며, 민족주의 광신자가 되었다.
4. 암살의 배후
송진우 암살 배후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해방 당시 한민당 세력은 송진우가 건준과 여운형, 박헌영에 반대하고, 좌파와의 협력을 놓고 안재홍과 갈등을 빚은 점을 들어 좌파 진영을 배후로 지목했다.
강원룡의 증언에 따르면, 장택상은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 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2] 그러나 장택상이 이러한 주장을 하기 전에 이미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는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하고 있었다.
4. 1. 김구 배후설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22] 장택상이 미군정 인사에게 김구 배후설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미 존 하지는 송진우 암살을 김구의 소행으로 보았다. 훗날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도 송진우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17]강원룡은 한현우가 두 사람을 모두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가 개입했을 리는 없다고 회고했다.[2] 또한 강원룡은 김구와는 무관하다고 보았으며, 미군정이 김구를 싫어했기 때문에 송진우 암살 배후로 지목한 것은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당시 경찰 책임자였던 조병옥도 김구를 송진우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우파 내에서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송진우를 꺼려한 김구가[3]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23]
4. 2. 좌파 배후설
해방 후 송진우가 건준에 반대하고 여운형, 박헌영에 반대했으며, 좌파와의 협력을 놓고 안재홍과 갈등을 벌인 것을 두고 한민당 세력은 '송진우 암살 배후는 좌파 진영'이라고 주장했다.[2]4. 3. 김구 배후설에 대한 반론
강원룡은 한현우가 두 사람을 모두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가 개입했을 리는 없다고 보았다.[2] 또한 1947년 장덕수 암살 배후로도 김구가 의심받아 미군정이 그를 법정에 불러내 조사하려 한 일도 있었다고 증언하며 김구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2] 강원룡은 '미국 사람들이 송진우 선생을 죽인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다고 봤다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것이다. 미군정은 김구 선생을 싫어했으니까.'라고 회고했다.[2]5. 결과
송진우 암살 이후 장택상과 한민당 인사들은 김구와 임시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장덕수 암살 사건 재판에는 암살 사주를 의심받았던 김구가 재판에 소환되었다. 김구는 재판에서 암살을 사주한 사실을 부정하였지만, 많은 이들은 김구가 여러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하였다.
6. 기타
라우터백(Lautenbach)은 송진우가 훈정(신탁통치)을 지지했기 때문에 암살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암살된 이유는 훈정을 지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4]'는 것이다.
1945년 12월 말 서울에 도착하여 일주일간 체류한 미국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민주당 영수는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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