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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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봉은 조선 시대 경상남도 단성현(현 산청군) 출신으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기근을 틈타 평민 신분을 얻고 김해 김씨 성과 본관을 획득한 인물이다. 그는 기근 시 곡물을 납부하여 관직을 얻고, 후손들은 신분 세탁을 통해 중인, 양반으로 상승했다. 수봉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후 노비를 소유하기도 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족보를 위조하고 본관을 바꾸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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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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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한글) | 수봉 |
이름 (한자) | 守奉 |
이름 (로마자 표기) | Subong, Soobong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646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단성현 단성면 읍내 (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국적 | 조선 |
부모 | 갓복 또는 어련 (부), 숙향 (모) |
배우자 | 영동이씨 이자목(李者目) |
종교 | 미상 |
2. 생애
수봉은 노비 업복(어련)과 노비 단문의 딸인 숙향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상남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일부)에 거주하는 몰락한 양반 심정량 가문의 노비였으며, 심정량 가문 노비 70명 중 한 명이자 외거 노비 13명 중 한 명이었다. 수봉은 노예로서 성씨가 없었고, 본관은 김해였다. 친조부의 이름은 알 수 없어 호적에 기록되지 않았다.
1675년(숙종 1년) ~ 1678년(숙종 4년) 조선에 심각한 흉작과 대기근이 발생하자, 수봉은 많은 곡물과 쌀을 정부에 납부하여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어 평민이 되었다.[1] 이후 김씨 성과 김해라는 본관을 구입했다.[2] 그는 기존의 김해 김씨, 경주 김씨의 분파인 신김해 김씨, 일본계 귀화인 2명의 자손인 김해 김씨와도 관련이 없는 새로운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1695년(숙종 21년) ~ 1696년(숙종 22년) 다시 조선에 흉작과 기근이 발생했고, 수봉은 다시 대량의 곡물과 쌀을 정부에 납부하여 통정대부(정3품)의 관직을 얻었다.
1678년 경남 단성현 호적대장에는 김수봉의 이름은 없고 노비 수봉이 있다.[2] 1717년 단성현 주민 김흥발의 호적에 아버지 이름은 김수봉, 관직은 납속통정대부로 되어 있으나, 김흥발의 조부와 증조부 병역 기록은 없다.[1] 조선에서는 평민이면 모두 병역이 부과되어 병사가 되거나 병역 대신 면포를 세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1717년 아들 김흥발 호적의 김수봉과 납속통정대부 직급은 일치한다.[2] 1678년 노비 수봉의 아내 아버지 이름은 김금이인데, 김금이는 이생(이씨 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므로 이금금과 동일 인물이다. 이름 없는 양반이나 평민인 이씨 성을 가진 이가 노비 여성과 성관계를 맺고 아들 김금이가 태어났지만, 돈을 주고 노비에서 구출하지 않고 방치했다. 1717년 김흥발 호적의 아버지 이름 김수봉과 조부 이금금, 1678년 노비 수봉 호적의 노비 수봉과 수봉의 아내 아버지 이금금이는 동일 인물로 확인되었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권내현 교수는 수봉의 막내아들이 처음으로 평민 의무인 군역을 돈으로 면제받은 후, 손자, 증손자 상당수가 중인 계층으로 상승했고, 1830~1860년에는 5세손과 6세손 시대에 상당수가 양반이 되었음을 밝혔다.[1] 이는 한국 노비들이 족보와 성씨, 본관을 돈으로 사고 양반 행세를 한 사례로 기록에 남아 있다. 수봉의 자손들은 안동 도산면, 진주시, 서울 등에서 흩어져 신분과 본명을 숨기고 위조된 호적을 만들어 양반 행세를 하는 데 성공했다.
수봉의 4대손 김성종은 1825년 안동시 도산면으로 이주하여 김해 김씨보다 위세가 높았던 안동 김씨로 바꾸려 했으나 실패하고 김해 김씨로 환원되었다.[3] 도산면으로 이주한 수봉의 다른 4대손 김종원과 김종원 가족은 안동 김씨로 호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3]
2. 1. 출생과 가계
1646년(인조 24년)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일부)에서 사노 갓복(㖙卜) 또는 어련(於連)과 사노 단문(丹文)의 딸 사비 숙향(淑香)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일부)에 살던 양반 심정량(沈廷亮) 가문의 노비였다. 1678년(숙종 4년) 호적 대장에는 그의 본관이 김해(金海)로 나타나지만, 수봉의 선조들이 실제로 경상남도 김해에 거주했는지는 불분명하다.[6]수봉은 성(姓)이 없는 노비였다. 조선의 노비종모법에 따라 양반과 노비 첩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나, 양인이 노비 여성과 혼인해 낳은 이들은 노비가 되었으나 성씨가 있었다. 그러나 수봉은 원래 성씨가 없었고, 친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祖 不知).[6]
수봉의 아버지 갓복(㖙卜) 또는 어련(於連)과 할아버지 이동(以同) 역시 원래 직역이 호적에 없었다.[7]
2. 2. 생애 초반
1646년(인조 24)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일부)에서 사노 갓복(㖙卜) 또는 어련(於連)과 사노 단문(丹文)의 딸 사비 숙향(淑香)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일부)에 살던 양반 심정량(沈廷亮) 가문의 노비였다. 1678년(숙종 4년)의 호적 대장에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로 기록되어 있다.수봉은 성(姓)이 없는 노비였다.[6] 조선의 법인 노비종모법에 따라 양반과 노비 첩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 양인이 노비 여성과 혼인해 낳은 이들은 노비가 되었으나 성씨가 있었다. 그러나 수봉은 원래 성씨가 없었고, 친할아버지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祖 不知)고 한다.
수봉의 아버지 갓복(㖙卜) 또는 어련(於連)과 할아버지 이동(以同) 역시 원래 직역이 호적에 없었다.[7] 수봉의 집안이 어떤 이유로 노비가 되었는지, 수봉이 어떤 이유로 주인의 신뢰를 얻어 솔거노비에서 외거노비가 될 수 있었던 배경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수봉의 생애 초반에 대한 기록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수봉은 심정량이 소유하고 있던 59명의 노비 중 한 명이었다.[7] 그중 13명이 외거노비였다. 노비였지만 그는 따로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 외거노비였던 그는 주인 심정량 집안에 신공을 바쳤다. 노비였던 그가 어떻게 농토를 획득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비들도 재산을 상속받고 재산을 모아 토지를 사는 것이 가능했다.[7] 수봉은 “도망이라는 방법보다 그가 가진 재산을 통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7]
1678년(숙종 4년) 당시 그는 단성현의 호적대장 중 심정량 가문의 노비로 호적에 등재되어 있었다.
부인 이소사 자목(李召史 者目)의 친정아버지 금금이는 심정량 가문의 노비였다. 자목은 나중에 성주군 군관(軍官) 도시담(都時淡)의 노비가 되었다. 도시담의 노비가 된 자목이 어떻게 수봉과 만나 결혼하게 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부인 자목(者目)은 노비였지만 영동 이씨(永東李氏)였다. 금금이의 아버지이자 수봉의 처조부는 호적상 이생(李生)으로 나타나는데 본명이나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이씨 성을 가진 것만 확인되었다. 금금이의 아버지는 평민 혹은 양반이었으나, 금금이의 어머니는 노비였고, 금금이는 어떤 이유로 노비에서 속량되지 못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수봉의 부인 자목의 친정어머니는 사노비 애춘(愛春)인데, 애춘의 친정아버지는 김복(金卜)으로 본관은 미상이다.
2. 3. 성씨, 본관과 양반 신분 획득
1678년에서 1717년 사이에 사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어 김씨(金氏) 성을 획득하였다.[8] 1680년(숙종 6년) 경신대기근 때 곡식을 바쳐 평민 신분을 얻었다.[7] 1695년~1696년(숙종 21~22년) 을병대기근 이후 다시 곡식을 바쳐 납속통정대부라는 관직을 받았다.[5] 단성현 지역에는 김해 김씨 양반이 없었기에, 김해 김씨를 자신의 성본으로 선택했다.[5]수봉은 자신의 조상 이름을 정확히 몰랐고, 아버지 갓복 또는 어련 외에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부지(不知)라 하였다. 아들 김흥발이 증조부를 이동이라고 기록한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들 김흥발은 1750년(영조 26년) 가선대부에 올랐다.[9] 다른 아들 김흥창은 1732년(영조 8)과 1750년(영조 26년) 두 차례 납속절충장군 직책을 받았다.
3. 신분 세탁 과정
수봉은 노비 업복과 어련, 그리고 노예 단문의 딸인 여성 노비 숙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경상남도 단성현에 거주하는 몰락한 양반 심정량 가문의 외거 노비였으며, 성씨가 없는 본관은 김해였다. 친조부의 이름은 호적에 기록되었으나 알 수 없다.[1]
1675년(숙종 1년) ~ 1678년(숙종 4년) 조선에 심각한 흉작과 대기근이 발생하자, 수봉은 많은 곡물과 쌀을 정부에 납부하여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어 평민이 되었다.[1] 이후 김씨 성과 김해라는 본관을 구입했다.[2] 1695년(숙종 21년) ~ 1696년(숙종 22년) 다시 조선에 흉작과 기근이 발생했고, 수봉은 다시 대량의 곡물과 쌀을 정부에 납부하여 통정대부(정3품) 관직을 얻었다.
1678년 경남 단성현의 호적대장에는 김수봉이라는 이름은 없고 노비 수봉만 있었다.[2] 1717년 단성현 주민 김흥발의 호적에는 아버지 이름이 김수봉, 관직은 납속통정대부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김흥발의 조부와 증조부의 병역 기록은 없었다.[1] 조선에서는 평민이면 병역이 부과되어 병사가 되거나 면포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1717년 김흥발 호적의 김수봉과 납속통정대부 직급은 일치한다.[2] 해당 호적에는 김흥발의 외조부 이름이 이금금으로 되어 있는데, 1678년 노비 수봉의 처부 이름은 김금이였다. 김금이는 이생, 즉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므로, 김금이는 이금금과 동일 인물이다. 1717년 김흥발 호적의 아버지 김수봉과 조부 이금금, 1678년 노비 수봉 호적의 노비 수봉과 수봉의 처부 이금금은 동일 인물로 확인되었다.
3. 1. 후손들의 신분 세탁 과정
수봉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로 살아갔지만, 일부는 안동 김씨로 본관을 바꾸기도 했다. 아들 김흥발은 호적에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직역을 정병(正兵) 또는 양인(良人)으로 기록하여 신분을 세탁했다.[6] 정병은 평민의 군역이고, 양인은 평민을 의미한다.김흥발은 아들들을 서원(書院) 원생으로 보내 군역을 면제받게 하고, 유학(幼學)이라는 거짓 직역을 호적에 쓰기도 했다.[6] 증손 김광오는 1780년(정조 4년) 유학이 되었으나,[7][8] 이후 교생, 평민, 업무(業武) 등으로 신분이 변동되었다.[8]
1825년(순조 25년) 4대손 김성종은 산청군 신등면으로 이주하여 안동 김씨로 본관을 바꿨고, 6촌 동생 김종원도 안동군으로 이주하여 안동 김씨로 본관을 바꿨다. 6대손 김정흠 대에 이르러 1858년(철종 9년) 양반 신분 획득에 성공하고, 호적상 직역은 유학으로 확정된다.
3. 2. 양반 입양 문화 모방
수봉의 후손들은 양반가에서 형제나 사촌 간에 아들이 없으면, 다른 형제의 아들이나 사촌 등 같은 항렬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양자입양 문화를 모방했다. 수봉의 후손 중 최초로 입양된 인물은 1831년(순조 31) 자신의 큰아버지 양자로 기재된 김종원이다. 김종원은 안동군 도산면으로 가서 안동 김씨로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했다.수봉의 아들 김흥발의 증손자 김종원은 친아버지 김성대가 아닌, 자녀 없이 죽은 큰아버지 김정대의 양자로 등재되었다. 이후 김종원의 아들 김재곤은 호적이나 문서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름을 김성대가 아닌 그의 형 김정대로 기록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권내현에 의하면 "아들이 없을 경우 부계 친족을 통해 가계를 잇는 것은 조선 후기 양반층의 정서였다"고 한다.[1] 그러나 안동군 도산면의 양반들은 수봉의 후손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혼인 관계나 교류를 하지 않았다.
4. 노비 소유
노비 출신이었던 수봉은 노비를 소유하기도 했다. 수봉이 거느리던 노비 중 한 명인 큰아지(大阿只)는 양인 옥상과 비(婢, 여자 노비) 순옥 사이에서 태어났다.[12] 큰아기의 어머니 순옥은 여자 노비였지만, 아버지 옥상은 양인, 즉 평민이었다. 그러나 노비종모법에 따라 순옥의 자녀들은 노비가 되었다.
인근 법물야면 구술에는 옥상과 순옥 사이에서 태어난 일례라는 또 다른 여자 노비 1명이 있었다.[12] 일례는 노비에서 속량된 박기룡의 부인이었다.[12]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할아버지 | 이동(李同) | ? - ? | |
아버지 | 어련(於連) 또는 갓동(㖙同) | ? - ? | |
어머니 | 숙향(淑香) | ? - ? | 사노(私奴) 단문(丹文)의 딸 |
부인 | 이소사 자목(李召史 者目) | 1651년 - ? | |
장인 | 이금금(李今金) 또는 금금이(金金伊) | ? - ? | 사노비, 이생의 아들 |
장모 | 김애춘(金愛春) | ? - ? | 본관 미상, 김복(金卜)의 딸 |
외할아버지 | 단문(丹文) | ? - ? | 본관은 안동(安東) |
이종사촌 | 실동 | ? - ? | |
사돈 | 변담 | ? - ? | 며느리 변소사의 친정조카, 평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신분을 세탁했다.[11] |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아들 | 김흥발(金興發) | 1668년 - 1759년? | |
며느리 | 변소사(卞召史) | 1674년 - ? | 본관은 초계, 통정대부 변해금의 딸, 친정어머니와 외조부는 노비 |
손자 | 김이달(金伊達) | 1700년 - ? | |
손자며느리 | 주소사(周召史) | 1700년 - ? | |
손자 | 김금철 | 1712년 - ? | |
손자 | 김소명 | ? - ? | |
아들 | 갓동이(㖙同伊) | ? - ? | |
아들 | 김흥창(金興昌) | 1677년 - 1750년? | |
손자 | 김해발 | ? - ? | |
아들 | 금학(金鶴) | 1668년/1674년 - 1737년? | |
손자 | 김세우 | ? - ? | |
딸 | 김소사(金召史) | 1684년 - ? | |
사위 | 박끝용(朴末龍) | 1684년 - ? | 노비 출신으로 1729년 평민 신분 획득, 본관은 밀양. |
6. 기타
7. 노비 종모법
노비종모법에 따라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었다.[13] 수봉의 부인 이소사는 이씨 성을 가졌지만,[13] 친정아버지는 노비였다.[13] 수봉의 장인 이금금(李今金)의 아버지는 이생(李生)이었다.[13] 그러나 이금금은 노비였고, 다만 이금금의 아버지가 이씨라는 것만 전할 뿐, 이생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여부와 이생의 정확한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13] 수봉의 사위 박끝용의 호적에 의하면 처외조부 이금금의 본관은 영동(永同)이다.[13]
참조
[1]
뉴스
양반을 꿈 꾼 노비집안… 드라마틱한 ‘신분상승’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14-09-12
[2]
뉴스
풀려난 노비 ‘수봉이’가 김해 김씨 고른 이유는
https://www.seoul.co[...]
서울신문
[3]
뉴스
평민의 양반 되기 ‘성씨·족보를 내 품에’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4-09-14
[4]
웹인용
책소개, 노비에서 양반으로
https://bookapp.mk.c[...]
2017-03-30
[5]
뉴스
평민의 양반 되기 '성씨·족보를 내 품에'
http://www.hani.co.k[...]
한겨레
2014-09-14
[6]
뉴스
'[책 속으로] 노비 집안 어떻게 양반이 됐나 … 호적대장 200년 미스터리'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2014-09-13
[7]
뉴스
'[책과 삶] 노비 출신 평민 후손, 이름 자주 바꿔 \'호적세탁\''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4-09-20
[8]
뉴스
풀려난 노비 ‘수봉이’가 김해 김씨 고른 이유는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2-03-06
[9]
문서
아들 김흥발은 어영청 소속 보인이었다.
[10]
서적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11]
간행물
역사비평 2012년 봄 호:통권 98호
역사비평사
2012
[12]
서적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13]
문서
노비는 성과 본관이 없었다.
[14]
서적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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