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로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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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일로타이는 고대 스파르타의 국유 노예 계급으로, 라코니아와 메세니아 지역에서 정복당한 사람들이 주로 이 계급에 속했다. 헤일로타이는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하며 스파르타인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공납했고, 가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스파르타 시민에 비해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놓였다. 스파르타는 소수의 시민으로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억압하기 위해 크립테이아와 같은 정책을 시행했고, 헤일로타이는 군 복무를 하기도 했지만, 해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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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일로타이 | |
|---|---|
| 지도 | |
| 개요 | |
| 명칭 | 헤일로타이 |
| 그리스어 | Εἵλωτες |
|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 | Heilōtai |
| 또 다른 그리스어 표기 | έλη, είλ |
| 로마자 표기 (개정) | Heilrotai |
| 역사적 배경 | |
| 사회적 지위 | 스파르타에서 정복된 인구 |
| 역할 | 농업과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적 위치 |
| 특징 | 국가 소유의 노예이며, 스파르타 시민에게 예속됨 |
| 스파르타 사회 내 위치 | |
| 스파르타 시민과의 관계 | 스파르타 시민에게 예속되어 노동력 제공 |
| 사회적 차별 | 스파르타 시민과는 다른 사회적 계층 |
| 크립테이아와의 관계 | |
| 크립테이아 | 헤일로타이 통제를 위한 스파르타의 비밀 경찰 |
| 목적 | 헤일로타이를 공포로 통제하는 것 |
| 헤일로타이의 기원 | |
| 기원 | 라코니아 지역의 정복된 주민들 |
| 헤일로타이의 반란 | |
| 반란 | 스파르타 지배에 저항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킴 |
2. 명칭의 기원
헬로트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헬라니코스는 이 단어가 스파르타 남쪽의 헬로스 마을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9] 파우사니아스는 "그 주민들은 라케다이몬 국가의 최초의 노예가 되었고, 최초로 헬로트라고 불렸다"고 말한다.[10] 그러나 이 설명은 어원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11]
기원전 1500년경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한 아카이아 인은 기원전 1100년경 스파르타 인에게 정복되어 노예 신분이 되었는데, 이들을 헤일로타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8세기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 주민들도 헤일로타이가 되었다.[70]
언어학자들은 이 단어를 "포획되다, 포로가 되다"를 의미하는 ἁλίσκομαι|할리스코마이grc와 같이 ϝελ-|웰-grc이라는 어근과 관련짓는다. 실제로 고대 저자들 중 일부는 이 용어를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봉역의 표시로 간주했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는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라케다이몬인들은 노예로 판정받고 헬로트라고 불렸다"고 기록했다.[12] 테오폼푸스(단편 122)는 아테네우스(VI, 416c)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그리고 한 민족은 그들의 노예를 헬로트라고 불렀고, 다른 민족은 그들을 페네스타이라고 불렀다..."고 말한다.[13] 이들 문헌에서 헬로트는 농노로 전락한 집단을 지칭하며, 익명의 ''douloi''(노예)와 제도적으로 구별된다.[14]
정복은 헬로티즘의 한 측면을 구성했다. 기원전 8세기의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인들은 헤로도토스에서 헬로트와 동의어가 되었다.
초기 헬로트의 경우 상황은 덜 명확하다. 테오폼푸스에 따르면, 그들은 도리아인이 정복한 최초의 아카이아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모든 아카이아인이 헬로티즘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히아킨티아 축제가 열린 아미클레는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현대 저자들은 대안적인 이론들을 제시한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에 따르면, 헬로트는 메세니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라케다이몬인이었다. 키메의 에포로스는 그들이 헬로스 출신의 ''페리오이키''("주변 지역 거주자")로서, 반란 실패 후 노예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3. 역사
헤일로타이는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된 국유 노예였다. 이들은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했고 주인인 스파르타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공납했다.
스파르타 인의 수는 약 5만 명이었던 반면, 헤일로타이의 수는 약 10만 명으로 훨씬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인들은 항상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했다. 실제로 정복된 메세니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기원전 5세기 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아리스토메네스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를 위협했다. 특히 기원전 5세기에 발생한 지진을 틈타 일어난 반란은 스파르타를 위협했고, 스파르타는 이를 계기로 군국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다.[65]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참전했을 때 스파르타 인 1명 당 헤일로타이 7명이 장교당번병, 병참병으로 동원되었다. 헤일로타이는 위험한 분견 작전에 투입되었고, 대부분 주저없이 버려졌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불만을 품은 헤일로타이를 정기적으로 단속했으며(기원전 397년의 키나돈의 모반 등),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젊은 스파르타 인에게 크립테이아(Krypteia)라고 칭하는 헤일로타이 살해 행위를 장려하여 공포 정치를 강화했다. 또한 헤일로타이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년 취임하는 에포로스(민선 장관으로 정원 5명의 행정 장관)가 헤일로타이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을 치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이었던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에게 무공을 세운 자는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가장 유능하고 자유를 열망하는 약 2000명의 헤일로타이가 선발되었으나, 이들은 해방된 후 모두 제거되었다.
3. 1. 기원과 초기 역사
헬로트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헬라니코스는 이 단어가 스파르타 남쪽의 헬로스 마을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9] 파우사니아스는 "그 주민들은 라케다이몬 국가의 최초의 노예가 되었고, 최초로 헬로트라고 불렸다"고 설명한다.[10] 그러나 이 설명은 어원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11]
언어학자들은 "포획되다, 포로가 되다"를 의미하는 ἁλίσκομαιgrc, ''halískomai''와 같이 ϝελ-grc, ''wel-''이라는 어근과 연결짓는다. 실제로 고대 저자들은 이 용어를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봉역의 표시로 간주했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는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라케다이몬인들은 노예로 판정받고 헬로트라고 불렸다"고 기록했다.[12] 테오폼푸스는 아테네우스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그리고 한 민족은 그들의 노예를 헬로트라고 불렀고, 다른 민족은 그들을 페네스타이라고 불렀다..."고 말한다.[13] 즉, "헬로트라는 집단의 명명은 그들이 농노로 전락하는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순간"을 나타낸다.[14]
정복은 헬로티즘의 한 측면이다. 기원전 8세기의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인들은 헤로도토스에서 헬로트와 동의어가 되었다. 초기 헬로트의 경우, 테오폼푸스에 따르면, 그들은 도리아인이 정복한 최초의 아카이아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모든 아카이아인이 헬로트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히아킨티아 축제가 열리는 아미클레는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현대 저자들은 대안적인 이론들을 제시한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에 따르면, 헬로트는 메세니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라케다이몬인이었다. 키메의 에포로스는 헬로스 출신의 페리오이키("주변 지역 거주자")로서, 반란 실패 후 노예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했던 아카이아인들은 기원전 1100년경 스파르타인들에게 정복당하여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여 헤일로타이라 불렸다. 또한 기원전 8세기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메세니아도 정복당하여 주민들은 헤일로타이가 되었다.
헤일로타이는 가족을 가질 수 있었던 국가 소유의 노예였다.[69] 이들은 대대로 노예 신분을 이어받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하며, 주인인 스파르타인들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납부했다.
약 20만 명의 헤일로타이는 약 1만 명(시민과 그 가족)의 스파르타인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인들은 항상 헤일로타이에 의한 반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실제로 정복당한 메세니아인들은 아리스토메네스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기원전 7세기(제2차 메세니아 전쟁)에, 그리고 기원전 5세기(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 스파르타를 덮친 지진을 이용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시민 모두가 병사인 군국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원정 때는 스파르타인 1인당 헤일로타이 7명이 종졸 또는 수송병으로 참가했다. 헤일로타이는 위험한 분견 작전에 기꺼이 이용되었고, 대부분은 주저 없이 버려졌다.
스파르타인들은 헤일로타이 반란을 막기 위해 불만 분자를 정기적으로 색출하고(기원전 397년 키나돈의 반란 등),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젊은 스파르타인들이 크뤼프테이아라 불리는 헤일로타이에 대한 테러 행위를 장려하여 공포 정치를 펼쳤다. 또한 헤일로타이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년 취임하는 에포로이(5명의 행정 장관, 감독관으로 번역됨)가 헤일로타이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인 기원전 424년에는 스파르타인들이 헤일로타이에게 적에게 공을 세운 자는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통지했다. 그래서 가장 유능하고 자유를 열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약 2000명의 헤일로타이가 선발되었으나,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노예에서 해방된 후 모두 제거되었다.
3. 2. 메세니아 전쟁과 헤일로타이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한 아카이아 인은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스파르타 인에게 정복되어 노예 신분이 되었는데, 이들을 헤일로타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8세기 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 주민들도 헤일로타이가 되었다.[70]
헤일로타이는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된 국유 노예였다. 이들은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했고 주인인 스파르타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공납했다.
스파르타 인의 수는 약 5만 명이었던 반면, 헤일로타이의 수는 약 10만 명으로 훨씬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인들은 항상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했다. 실제로 정복된 메세니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기원전 5세기 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아리스토메네스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를 위협했다. 이에 스파르타는 시민 개병의 군국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참전했을 때 스파르타 인 1명 당 헤일로타이 7명이 장교당번병, 병참병으로 동원되었다. 헤일로타이는 위험한 분견 작전에 투입되었고, 대부분 주저없이 버려졌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불만을 품은 헤일로타이를 정기적으로 단속했으며(기원전 397년의 키나돈의 모반 등),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젊은 스파르타 인에게 크립테이아(Krypteia)라고 칭하는 헤일로타이 살해 행위를 장려하여 공포 정치를 강화했다. 또한 헤일로타이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년 취임하는 에포로스(민선 장관으로 정원 5명의 행정 장관)가 헤일로타이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을 치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이었던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에게 무공을 세운 자는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가장 유능하고 자유를 열망하는 약 2000명의 헤일로타이가 선발되었으나, 이들은 해방된 후 모두 제거되었다.
3. 3. 헤일로타이 반란
헤일로타이는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한 아카이아 인이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스파르타 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생긴 노예 신분이다.[70] 기원전 8세기 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 주민들도 헤일로타이가 되었다.
헤일로타이의 수는 약 20만명으로 약 1만명 정도였던 스파르타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인들은 항상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경계했다. 실제로 정복된 메세니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기원전 5세기 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아리스토메네스라는 지도자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기원전 5세기에 발생한 지진을 틈타 일어난 반란은 스파르타를 위협했고, 스파르타는 이를 계기로 군국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다.[65]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단속을 실시했다. (기원전 397년의 키나돈의 모반 등)[70] 또한, '크립테이아'라 불리는, 젊은 스파르타 인들에 의한 헤일로타이 살해 행위를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장려하여 공포로 지배했다. 매년 취임하는 5명의 행정 장관인 에포로스는 헤일로타이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헤일로타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70]
기원전 42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에게 무훈을 세우면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가장 유능하고 자유를 열망하는 약 2000명의 헤일로타이가 선발되었으나, 이들은 해방된 후 모두 제거되었다.[70]
기록상 최초로 알려진 헤일로타이 반란 시도는 기원전 5세기 파우사니아스 장군이 선동한 것이다. 그는 반란에 가담하고 자신의 계획을 끝까지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면 헤일로타이에게 자유와 시민권을 약속했다.[52] 그러나 이 음모는 헤일로타이 봉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테나룸 곶에서 발생한 학살은 투키디데스가 기록했다.[58] 스파르타인들은 포세이돈 신전에서 신에게 의탁하는 헤일로타이들을 끌어내 살해했고, 스파르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은 신의 응징이라고 믿었다.
기원전 464년 지진과 동시에 발생한 반란은 그리스 역사가들의 해석이 엇갈리지만, 확실히 증명된 사실이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61] 투리아와 아이타이아의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는 지진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켜 이토메 산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는 대부분의 반란군이 메세니아 출신이었음을 덧붙였다. 반대로, 역사가들은 반란군 중 소수가 라코니아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며, 이것이 그들의 역사상 유일한 반란이 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반란의 책임을 메세니아인과 헤일로타이에게 동등하게 돌렸다.[62] 플루타르코스도 이를 뒷받침한다.[63]
플루타르코스의 「키몬의 일생」에서는 유로타스 강 계곡의 헤일로타이들이 지진을 이용해 무장해제되었다고 생각하는 스파르타인들을 공격하려 한다.[64] 아르키다모스 2세가 스파르타인들을 무장하도록 소집함으로써 지진과 헤일로타이의 공격으로부터 동시에 구원받는다.
기원전 464년의 반란은 스파르타인들에게 중대한 사건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크립테이아와 헤일로타이에 대한 다른 가혹한 처우가 이 반란 이후에 제정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반란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관계 악화의 초기 징후를 보여주었다.[65] 스파르타는 반란 진압을 돕기 위해 파견된 아테네 군대를 부당하게 추방했고,[66] 아테네는 헬로트들을 코린트 만 건너편 펠로폰네소스 반대편 해안의 나우팍토스 마을에 재정착하는 것을 도왔다.[67]
4. 사회적 지위와 생활
고대부터 스파르타 인구는 헬롯에 비해 매우 적었다. 투키디데스는 "대부분의 스파르타 제도는 항상 헬롯에 대한 안전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고 강조한다.[15]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을 "스파르타인들의 재앙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적"에 비유한다.[16]
스파르티아테스는 항상 창을 휴대하고 집에 있을 때만 방패 끈을 풀었으며(헬롯이 빼앗을까 염려해서), 집에 잠그고 지냈다.[17] 테오폼푸스는 스파르타인들이 헬롯을 "전적으로 잔혹하고 비참한 조건"에 놓았다고 묘사했다.[18]
기원전 3세기 중엽 반스파르타 역사가였던 프리에네의 미론[19]에 따르면, 헬롯들은 수치스러운 모든 일을 강요받았다. 개가죽 모자(κυνῆ|쿠네|kunễgrc)를 쓰고 가죽(διφθέρα|디프테라|diphthéragrc)으로 몸을 감싸고, 매년 정해진 횟수의 매질을 당했다. 또한, 노예의 조건에 맞지 않는 활력을 보이면 사형에 처해졌고, 감독관들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았다.[20]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인들이 헬롯들을 "혹독하고 잔인하게" 다루었다고 말한다. 헬롯들에게 순수한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춤을 추게 하고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게 했다.[21] 그러나 그는 이러한 거친 대우는 기원전 464년 지진 이후 비교적 늦게 가해졌다고 언급한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kunē''가 실제로 개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22] ''diphthera''는 가난한 농민 계급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다고 주장한다.[23] 또한, 스파르타인들이 헬롯의 식단을 엄격하게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24] 헬롯을 잘 먹이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고 주장한다.[24] 그로트는 "[헬롯] 대우에 관해 전해지는 여러 일화들은 잔혹함보다는 과시적인 경멸을 나타낸다"고 썼다.[28] J. 두카트는 스파르타인들의 헬롯 대우를 헬롯들이 자신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전쟁으로 묘사한다.[29]
다른 현대 학자들은 미론의 증거가 헬롯에 대한 일반적인 스파르티아테스의 태도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한다.[19] 또한, 조직적인 학살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2]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에포로스들은 매년 헬롯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여 스파르타인들이 종교적 오염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용했다.[33] 이 임무는 ''크립테스'', 즉 어려운 ''아고게''를 졸업하고 크립테이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34]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2,000명의 헬롯이 기원전 425년 이전에 조심스럽게 계획된 사건에서 학살당했다.[52]
폴 카틀리지는 "스파르타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스파르타인과 헬롯 사이의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주장한다.[35]
4. 1. 스파르타와의 관계
헤일로타이는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한 아카이아 인이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스파르타 인에게 정복당하여 노예 신분이 된 것을 말한다. 기원전 8세기 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 주민들 또한 헤일로타이가 되었다.[70]헤일로타이는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된 국유 노예였다.[70] 이들은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했고 주인인 스파르타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공납했다.
스파르타 인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던 것에 비해 헤일로타이의 인구는 약 10만 명으로, 스파르타 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인은 항상 헤일로타이에 의한 반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실제로 정복된 메세니아인은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기원전 5세기 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 스파르타를 덮친 지진을 틈타 아리스토메네스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 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 시민은 군국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에 출병을 했을 때는 스파르타 인 1명에 대해 헤일로타이 7명이 장교당번병, 병참병으로 동원되었다. 헤일로타이는 위험한 분견 작전에 자주 투입되었고, 대부분 주저없이 버려졌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불만을 가진 헤일로타이에 대한 정기적인 단속(기원전 397년의 키나돈의 모반 등)을 했으며, 또한 군사 교련의 일환으로 젊은 스파르타 인의 크립테이아(Krypteia)라고 칭하는 헤일로타이에 대한 살해 행위를 장려했고, 공포 지배를 철저히 했다. 또한 헤일로타이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년 취임하는 에포로스(민선 장관으로 정원 5명의 행정 장관)가 헤일로타이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행사가 시작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중요한 시기였던 기원전 424년에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에게 적을 상대로 무훈을 세운 사람은 노예에서 해방시키겠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가장 유능하고,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고 생각된 약 2000명의 헤일로타이가 선별되었다. 이들은 겉으로만 노예에서 해방된 뒤, 모두 제거되었다.
4. 2. 크립테이아와 억압
기원전 1500년경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했던 아카이아 인은 기원전 1100년경 스파르타 인에게 정복되어 노예 신분이 되었고, 이들을 헤일로타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8세기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 주민들 역시 헤일로타이가 되었다.헤일로타이는 가족을 가질 수 있는 국유 노예였다.[70] 이들은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했으며, 주인인 스파르타인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바쳤다.
스파르타 인은 소수였기 때문에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항상 경계했다. 실제로 메세니아 인은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기원전 5세기 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아리스토메네스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를 위협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는 스파르타 인 1명당 헤일로타이 7명이 장교당번병, 병참병으로 동원되었다. 헤일로타이는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스파르타는 불만을 품은 헤일로타이를 정기적으로 단속했고(기원전 397년의 키나돈의 모반 등),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젊은 스파르타 인에게 크립테이아(Krypteia)라 불리는 헤일로타이 살해 행위를 장려하여 공포로 다스렸다. 또한 매년 취임하는 에포로스(민선 장관으로 정원 5명)는 헤일로타이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살육을 정당화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이었던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는 무훈을 세운 헤일로타이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약 2000명을 선발하여 제거했다.
4. 3. 경제 활동과 재산
헬로트들은 시민들에게 배정되어 가사일을 하거나 그들의 클레로이(klēroi), 즉 토지 구획에서 일했다. 클레로이는 스파르타가 메세니아(Messenia)를 정복한 후 원래의 토지 분할 단위였다.[36] 여러 자료들은 이러한 종들이 특정 스파르타인을 수행했다고 언급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아기스 2세(Agis II) 왕의 아내 티마이아(Timaia)가 자신의 헬로트 여종들에게 자신이 임신한 아이가 남편이 아닌 알키비아데스의 아이라고 속삭였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신뢰 관계를 보여준다.[37] 일부 저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에는 시민들이 가사 목적으로 노예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부 헬로트들은 스파르타 교육인 아고게 기간 동안 젊은 스파르타인들의 종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토네스(μόθωνες / móthōnes)였다. 헬로트들은 노예들처럼 장인이나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38]헬로트들은 수확량의 미리 정해진 부분을 ἀποφορά|아포포라|apophorágrc 바쳐야 했고, 나머지는 소유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부분은 남자의 경우 보리 70 메디므노이, 여자의 경우 12메디므노이였고, 전사와 그의 가족 또는 미망인의 필요에 맞는 양의 기름과 포도주도 포함되었다.[39] ''apophorá''의 존재는 튀르타이오스에 의해 논쟁된다. "둘째로, 그들에게 고정된 조공이 부과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들판의 모든 생산물의 절반을 스파르타로 가져왔습니다.... 큰 짐에 지친 당나귀처럼, 그들의 주인에게 옥수수 밭이 맺는 모든 과일의 절반을 엄청난 필요성으로 가져왔습니다."[40] 파우사니아스는 메세니아 전쟁 직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상황은 아마 더 심각했을 것이다.[41] 또한, 생산량의 일정 비율을 가져가려면 헬로트들을 끊임없이 감독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먼 메세니아에 그러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튀르타이오스가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 양은 현대의 "왕국 절반"과 같은 시적 표현이었을 수 있다. 튀르타이오스의 묘사가 2차 메세니아 전쟁에 대한 적의 파랑크스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용구가 애초에 헬로트들을 가리키는지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이는 1차 전쟁이 헬로트가 되기보다는 메세니아 사람들이 스파르타의 속국이 되는 것으로 끝났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42]
세금을 낸 후, 헬로트들은 종종 꽤 잘 살 수 있었다. 라코니아(Laconia)와 메세니아의 토지는 매우 비옥했고, 종종 일년에 두 번 수확이 가능했다.[43] 그들은 어느 정도의 사유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44] 기원전 425년에 일부 헬로트들은 자신의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45] 기원전 223년에는 6,000명의 헬로트들이 각각 500 드라크마를 지불하고 자유를 샀는데, 당시 상당한 금액이었다.[46]
4. 4. 인구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펠로폰네소스반도 라코니아 지방에 정착한 아카이아 인은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스파르타 인에게 정복되어 노예 신분이 되었는데, 이들을 헤일로타이라고 했다. 기원전 8세기 경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정복당한 메세니아 주민들도 헤일로타이가 되었다.[70]헤일로타이는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된 국유 노예였다.[70] 이들은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했으며 주인인 스파르타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공납했다.
스파르타 인구는 약 5만 명(시민과 그 가족)이었고 헤일로타이는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어, 숫자가 적은 스파르타 인은 항상 헤일로타이에 의한 반란을 경계했다. 실제로 정복된 메세니아인은 기원전 7세기 제2차 메세니아 전쟁과 기원전 5세기 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스파르타를 덮친 지진을 틈타 아리스토메네스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 인들을 위협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는 스파르타인 1명당 헤일로타이 7명이 장교당번병, 병참병으로 동원되었다.[48]
헬로트들은 가족 단위로 생활했으며, 적어도 사실상(''de facto'') 서로 간에 결합을 할 수 있었다.[47] 헬로트들은 고대 그리스의 다른 노예들보다 가족 단위가 해체될 가능성이 훨씬 적었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하거나, 적어도 인구 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44]
정식 인구 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헬로트 인구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 당시 헬로트는 스파르타인의 7배였다.[48] 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많은 시민을 잃었고, 기원전 4세기 초 키나돈의 모반 당시 아고라에 모인 4,000명 중에서 귀족, 즉 시민은 겨우 40명에 불과했다(크세노폰, ''헬레니카'', III, 3, 5). 그 당시 여성을 포함한 헬로트의 총 인구는 17만~22만 4천 명으로 추산된다.[49] 제2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헤일로타이가 된 메세니아인은 스파르타 인구의 절반에서 3분의 2에 달했다.
헬로트 인구는 기술적으로는 노예 재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 포로나 매입된 노예와 달리 토착 출산율에 의존했다. 스파르타인들은 헬로트들이 자신들이 실천했던 것과 유사한 우생학적 교리를 시행하도록 장려했다.
4. 5. 모타케스와 모토네스
필라르코스는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시민이 아닌 계층인 μόθακες|모타케스|grc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들은 스파르타 교육 제도인 '''아고게'''를 거친 자들이다.[53] 고전 시대 역사 서술에서는 헤로트들이 이 모타케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계층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는데, 첫째는 어휘의 문제이다.고전 시대 저술가들은 유사한 개념을 나타내는 여러 용어를 사용했다.
| 용어 | 의미 | 설명 |
|---|---|---|
| {{lang|grc|μόθακες|모타케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