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사카 조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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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사카 조에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와 2루수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스카우터와 2군 감독을 역임했다. 센다이 철도국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48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 1950년에는 타율 0.258, 18홈런, 72타점을 기록했다. 1959년 은퇴 후에는 지도자 및 구단 프런트로 활동했으며, 2015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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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사카 조에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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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선수명 | 시라사카 조에이 |
원어명 | 白坂 長栄 (Shirasaka Choei) |
국적 | 일본 |
출신지 | 이와테현 니노헤군 이치노헤정 |
생년월일 | 1922년 7월 23일 |
사망일 | 2015년 7월 8일 |
신장 | 171 |
체중 | 65 |
포지션 | 2루수, 유격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48년 |
첫 출장 | 1948년 |
마지막 경기 | 1959년 |
선수 경력 | |
감독 경력 |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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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이치노헤정에서 광대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가에서 태어났다.[1] 구제 후쿠오카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센다이 철도국에 입사했지만, 징병되어 전선에 참전했고, 전후에는 센다이 철도국 모리오카에서 투수 및 유격수로 활약했다.[1] 이때 팀 동료로는 사와후지 미츠로 (후에 긴테쓰 펄스에 입단)가 있었다.
1948년 시즌 중에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 이 입단은, 모리오카에 원정을 왔던 당시 타이거스 감독 와카바야시 타다시의 권유 때문이었다.[1] 타이거스 입단 후에는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다. 요시다 요시오 입단 후에는 2루수로 전향했고, 요시다와 2루수-유격수 콤비를 이루었다. 프로 2년째인 1949년에는 투수로서 8경기에 등판하기도 했다.
레귤러로 자리 잡은 1950년에는 타율 0.258, 18홈런 72타점을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51년 이후에는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고, 타순도 2번 또는 하위 타선을 주로 맡았다. 반면에 수비는 일류였고, 유격수인 요시다와의 2루-유격수 콤비는 철벽이라고 불렸다.
195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이치노헤정에서 광대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가에서 태어났다.[1] 구제 후쿠오카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센다이 철도국에 입사했지만, 징병되어 전선에 참전했고, 전후에는 센다이 철도국 모리오카에서 투수 및 유격수로 활약했다.[1] 이때 팀 동료로는 사와후지 미츠로 (후에 긴테쓰 펄스에 입단)가 있었다.2. 2. 프로 선수 시절
이치노헤정에서 광대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가에서 태어났다[1]。구제 후쿠오카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센다이 철도국에 입사했지만, 징병되어 전선에 참전했고, 전후에는 센다이 철도국 모리오카에서 투수 및 유격수로 활약했다[1]。이때 팀 동료로는 사와후지 미츠로 (후에 긴테쓰 펄스에 입단)가 있다.1948년 시즌 중에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이 입단은, 모리오카에 원정을 왔던 당시 타이거스 감독 와카바야시 타다시의 권유 때문이었다[1]。타이거스 입단 후에는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다. 요시다 요시오 입단 후에는 2루수로 전향했고, 요시다와 2루수-유격수 콤비를 이루었다. 프로 2년째인 1949년에는 투수로서 8경기에 등판하기도 했다.
레귤러로 자리 잡은 1950년에는 타율 0.258, 18홈런 72타점을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51년 이후에는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고, 타순도 2번 또는 하위 타선을 주로 맡았다. 반면에 수비는 일류였고, 유격수인 요시다와의 2루-유격수 콤비는 철벽이라고 불렸다.
195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부터 스카우터로 활동했고, 부터는 2군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했다.[1] 부터는 다시 프런트로 들어가 스카우트 겸 스카우터, 부터는 다시 2군 감독을 맡았다.[1] 부터 세 번째로 프런트에 복귀하여 까지 스카우터로 활동했다. 이후에도 한신 구단에서 근무했다.
2015년7월 8일, 병으로 인해 니시노미야시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2]。향년 92세.
4. 상세 정보
4. 1. 출신 학교
- 구제 이와테 현립 후쿠오카 중학교
4. 2. 선수 경력
센다이 철도국, 화중 철도, 센다이 철도국 모리오카를 거쳐 1948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1959년까지 선수로 활동하였다.4. 3. 지도자 경력
시라사카 조에이는 1964년부터 1965년까지, 그리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을 맡았다.4. 4. 개인 기록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57년 10월 7일 ※역대 43번째
- 2루수 최다 병살 프로 야구 기록 : 136병살(1950년)
- 2루수 최다 척살 프로 야구 기록 : 431척살(1950년)
- 올스타전 출장 : 3회(1952년, 1954년, 1955년)
4. 5. 등번호
시라사카 조에이는 1948년 등번호 27번을 사용했다. 1949년에는 26번, 1950년부터 1957년까지는 17번을 사용했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는 1번을, 1964년부터 1965년까지는 65번을 사용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는 75번을 사용했다.5.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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