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 사키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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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당 사키가케는 1993년 자유민주당 탈당파 의원들이 결성한 일본의 정당으로, 5가지 정치 이념을 표방하며 보수 정당이면서도 온건한 자유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창당 이후 연립 정권에 참여했으나, 내부 갈등과 분당을 겪으며 쇠퇴하여 2002년 녹색 회의로 이름을 바꾸며 해산되었다. 중의원 선거에서는 1993년 13석을 얻었으나 이후 의석수가 감소했고, 참의원 선거에서도 1995년 3석을 얻은 이후 의석을 잃었다. 신당 사키가케의 이념은 민주당에 계승되었으며, 이후 정당 활동은 녹색 회의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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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사키가케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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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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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 자유민주당 (자유보수주의 성향) 일본신당 사회민주연합 |
창립자 | 다케무라 마사요시 |
창립 | 1993년 |
해산 | 2004년 10월 31일 |
이념 | 자유주의 개혁주의 시츠지츠 콧카 (질과 내용이 있는 국가) |
정치적 위치 | 중도주의에서 중도좌파 |
색상 | 연한 파란색 (공식) 짙은 파란색 (관례) |
국가 | 일본 |
일본어 정보 | |
일본어 이름 | 新党さきがけ (신토 사키가케) |
역사 | |
전신 정당 | 자유민주당 (일부) 일본사회당(일부) 일본신당 (일부) |
후신 정당 | 민주당 미도리의 회의 |
추가 정보 | |
기관지 | 통신 사키가케 |
웹사이트 | 신당 사키가케 아카이브 |
2. 정치 이념
신당 사키가케는 다나카 히데유키가 초안을 작성하고, 창당 의원 전원의 협의를 거쳐 확정한 5가지 정치 이념을 표방했다. 다나카는 고치카이의 정치적 입장을 염두에 두고, 보수 본류의 계승을 강하게 의식하며 이념을 구상했다고 한다.
- 우리는 일본국 헌법을 존중한다. 헌법이 일본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시대적 요구에 따른 재검토 노력을 기울여 헌법 이념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 우리는 다시 침략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확인하고, 정치적·군사적 대국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적극적으로 공헌한다.
- 지구 환경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일본 열도, 아름다운 지구를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국내외 정책을 펼침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 우리는 일본의 문화와 전통의 근간인 황실을 존중하는 동시에, 어떠한 전체주의의 진출도 허용하지 않고, 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을 실현하여 건전한 의회 정치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자립과 책임을 시대 정신으로 삼아, 사회적 공정이 관철된 질 높은 실질적인 국가, 즉 「질실 국가」를 목표로 한다.
「질실 국가」라는 용어는 1926년 쇼와 천황 즉위 후 조견식 칙어의 "사치와 허식을 배척하고 질실을 숭상하며..."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다나카는 이를 "쇼와를 이런 시대로 만들고 싶다는 쇼와 천황의 꿈이며, 겉치레를 멀리하고 내용 본위의 자연스러운 자세"라고 설명했다.[21] 행정·재정 개혁 추진과 환경 중시 자세를 내세우고, 황실과 일본국 헌법 제9조를 존중하는 '존헌'을 내걸어, 보수 정당이면서도 온건한 자유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민주당에 계승되었다.
당시에는 냉전 종결 직후라 이러한 소박한 소국 지향이 공감을 얻지 못했지만, 2022년 요미우리 신문 편집위원 요시다 기요토는 "지금에 와서 이 깃발은 시대를 내다보며 '일본의 진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일렀다."라고 평가했다.[21]
3. 당 역사
총선 이후, 신당 사키가케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에 참여했고, 다케무라 마사요시가 장관이 되었다. 하타 쓰토무 내각을 지지했지만,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9]
1994년, 자유민주당과 일본 사회당의 연립 정부인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 참여했다. 1996년 9월, 일본 사회당 정치인들과 함께 자유민주당과의 연합에 반대하며 탈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구성원들이 탈당하면서 당은 우경화되었다. 1998년 10월, 당명을 ''사키가케''로 변경했다. 이후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여 2001년에는 하원과 상원 모두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고, 2002년 '''녹색 회의'''로 당명을 변경하며 사실상 해산했다.
3. 1. 창당 배경
1988년 9월 2일, 무라카미 마사요시, 하토야마 유키오 등 자민당의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책 연구회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가 모태이다.[1]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는 리크루트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으며, 정계 정화와 자유주의적 정치 개혁을 주장했다.1993년 4월, 무라카미와 다나카 히데유키는 신당 결성을 결심했다. 무라카미, 다나카, 하토야마 유키오, 미하라 아사히코, 사토 켄이치로, 도카이 기미로, 소노다 히로유키, 이와야 다케시, 야나세 스스무, 이데 쇼이치 등 10명의 의원은 같은 해 6월 18일 미야자와 내각 (개조)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 가결에 따라 중의원 해산 직후 탈당했다. 6월 21일,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다.[19][13][20]
불신임 결의안에 대해서는 연구회 멤버 대부분이 반대표를 던졌다. 반면 불신임안에 찬성했던 오자와 이치로 등은 당초 탈당할 의사가 없었고, 당내 개혁 운동을 지속할 생각이었지만, 불신임에 반대했던 무라카미 등이 먼저 탈당했기 때문에 자신도 탈당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키가케의 결성은 비자민정권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계 재편의 방아쇠를 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3. 2. 창당 과정
1993년 6월 21일, 미야자와 내각 불신임안 가결을 계기로, 파벌을 초월한 공부 모임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소속 중의원 의원 10명이 자민당을 탈당해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다.[19] 대표는 다케무라 마사요시였다.1988년 9월 2일 무라카미 마사요시, 하토야마 유키오 등 자민당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책 연구회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18]가 모체이다.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는 리크루트 사건을 계기로 생겨났으며, 정계 정화와 자유주의적 정치 개혁을 주장했다.
1993년 4월, 무라카미와 다나카 히데유키는 신당 결성을 결심했다. 무라카미, 다나카, 하토야마 유키오, 미하라 아사히코, 사토 켄이치로, 도카이 기미로, 소노다 히로유키, 이와야 다케시, 야나세 스스무, 이데 쇼이치 총 10명의 의원은 같은 해 6월 18일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 가결에 따른 중의원 해산 직후 탈당했다.
불신임 결의안에 대해 연구회 멤버 대부분은 반대표를 던졌다. 불신임안에 찬성했던 오자와 이치로 등은 당초 탈당할 의사가 없었고 당내 개혁 운동을 지속할 생각이었지만, 불신임에 반대했던 무라카미 등이 먼저 탈당했기 때문에 자신도 탈당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사키가케의 결성은 비자민정권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계 재편의 방아쇠를 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3. 3. 연립 정권 참여와 갈등
1993년 총선 이후, 신당 사키가케는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끄는 비자민·비공산 연립 내각에 참여했다.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표는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했다.[19] 그러나 호소카와 총리와 다케무라 대표 간의 '국민복지세' 도입 구상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신생당 오자와 이치로, 공명당 이치카와 유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원-원-라이스'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로 인해 정권 내 갈등이 심화되었고, 1994년 4월 8일 호소카와 내각은 총사퇴했다.이후 하타 쓰토무 내각이 출범했지만, 신당 사키가케는 각외협력으로 전환했다.
3. 4. 자민당과의 연립과 세력 확장
1993년 총선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에 참여했던 신당 사키가케는 1994년, 자유민주당, 일본 사회당과의 연립 정권인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 참여했다.[19]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표는 대장대신에 취임했다.같은 해 4월 25일, 호소카와 내각이 총사퇴한 후, 하타 쓰토무를 수반으로 하는 하타 내각이 발족했지만, 사키가케는 각외협력을 표명하며 '정권 내 야당'의 위치에 있었다.
이후 일본신당 내 친사키가케파 의원들과 사회민주연합 출신 간 나오토 등이 합류하며 당세를 확장했다. 5월 9일에는 일본신당 탈당파 의원들과 '사키가케・청운' 통일 회파를 결성했고, 5월 30일에는 '사키가케・청운・민주의 바람'으로 확대 개편했다. 칸 나오토는 정책조사회장이 되었다.
6월 30일, 자사사 연립 정권에 의한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하면서, 사키가케는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케무라는 대장대신에, 이데 쇼이치는 후생대신에 취임하고, 소노다 히로유키는 내각관방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 7월 5일에는 중의원 회파도 '신당 사키가케'로 개칭하고, '청운・민주의 바람'의 구 일본신당 그룹이 정식으로 합류했다.
3. 5. 민주당 분당과 쇠퇴
1996년 8월 28일,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표와 일본사회당 위원장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민주당 초대 당수가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 양당의 신당(사사신당) 결성을 시도했다.[19] 그러나 하토야마 유키오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하토야마 등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하토야마는 신진당에 소속되어 있던 동생 구니오, 후생대신으로서 인지도를 높인 간 나오토, 전 홋카이도 지사 요코미치 등과 신당 결성을 추진하며, 다케무라, 무라야마, 도이 다카코 등의 신당 참가를 거부하는 ''''배제의 논리''''를 내세웠다. 같은 해 8월 30일, 하토야마는 신당 기치를 내걸고 신당 사키가케를 탈당했다. 같은 날, 다케무라는 혼란의 책임을 지고 대표에서 사임했고, 이데 쇼이치가 후임 대표가 되었다. 이 신당 결성 움직임에 따라 신당 사키가케에서는 간 나오토, 야나세 스스무 등 당 간부와 아라이 사토시, 에다노 유키오, 오자와 에이지, 마에하라 세이지, 이시이 고키, 겐바 고이치로 등 젊은 의원 15명이 탈당했다. 같은 해 9월 28일,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를 공동 대표로 하여 신당 사키가케와 사민당 탈당자, 시민 리그가 구 민주당을 결성했다.같은 해 10월 20일,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 구 민주당 결성 등의 영향으로 고전하여, 이데 대표, 현직 각료 다나카 히데유키, 미하라 아사히코 총무회장, 와타라이 기미로 정조회장 등 전직 의원 7명이 낙선하고, 다케무라와 소노다 히로유키만이 당선되어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 결과에 책임을 지고 이데가 대표직을 사임했다. 같은 달 22일, 도모토 아키코가 의원단 좌장에 취임했다.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는 사민당과 함께 각외 협력을 결정했다.
1998년 2월, 다나카 히데유키가 재정・금융 분리 문제로 다케무라와 의견이 대립하여 탈당했다.
같은 해 5월 31일, 제1회 당대회가 개최되어 다케무라가 대표로 복귀했다. 6월, 자민당과의 연립을 공식 해소하고, 환경 정당으로서 재출발을 표명했다.
같은 해 7월 제18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우사미 노보루 등 비례대표 후보 3명만을 공천했으나 의석을 얻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당명을 '''사키가케'''로 변경했다. 이때 소노다 히로유키(무소속을 거쳐 자민당으로 복귀), 도모토 아키코, 미즈노 세이이치(두 사람은 참의원 클럽 결성)가 탈당하여, 소속 국회의원은 다케무라와 오쿠무라 노부조 간사장 2명이 되었다.
2000년 6월 25일,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케무라와 참의원에서 전향한 오쿠무라가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하여 소속 국회의원이 없어졌다. 그러나 같은 날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도쿄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나카무라 아쓰오가 입당(복당)하여 정당 지위를 유지했다. 같은 해 7월 3일, 나카무라가 대표로 취임하여 환경 정당으로서 재건을 시도했다.
3. 6. 해산
2001년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후보자를 내지 않아, 선거 후인 2001년 7월 29일에 정당조성법상의 정당 요건을 잃었다.[22]2002년 1월 16일, '''녹색 회의'''로 정당명을 개칭하여, '''사키가케'''는 사실상 해산했다.
4. 역대 지도부
1996년 10월 22일

1998년5월 6일
2000년7월 3일
2002년1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