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하라 세이지
1. 개요
마에하라 세이지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교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수학했다. 1993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여러 정당을 거치며 활동했으며, 민주당 대표, 국토교통대신,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외무대신 재임 중 센카쿠 열도 문제와 관련된 발언으로 논란이 있었으며, 외국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사임하기도 했다. 이후 국민민주당에서 활동하다 탈당 후 일본유신회에 합류하여 현재 일본 유신회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이름 | 마에하라 세이지 |
|---|---|
| 출생일 | 1962년 4월 30일 |
| 출생지 | 교토시, 일본 |
| 국적 | 일본 |
| 학력 | 교토 대학 (법학사) |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 정당 | 일본유신회(2024년 이후) 일본신당(1992년–1994년) 신당사키가케(1994년–1998년) 민주당(1998년–2016년) 민진당(2016년–2017년) 희망의 당(2017년–2018년) 국민민주당(2018년–2023년)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2023년-2024년) |
|---|---|
| 소속 정당 (과거) | 일본신당 (1992년–1994년) 신당 사키가케 (1994년–1998년) 민주당 (1998년–2016년) 민진당 (2016년–2017년) 희망의 당 (2017년–2018년) 국민민주당 (2018년–2023년)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2023년-2024년) |
| 국회의원 | 중의원 |
| 지역구 | 교토 2구 (2000년 이후) 긴키 비례 (1996년–2000년) 교토 1구 (1993년–1996년) |
| 의원 임기 시작 | 1993년 7월 18일 |
| 이전 직책 | 교토부 의회 의원 |
| 교토부 의회 의원 임기 시작 | 1991년 |
| 교토부 의회 의원 임기 종료 | 1993년 |
|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 히로후미 요시무라와 공동 대표 |
|---|---|
|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임기 시작 | 2024년 12월 2일 |
|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대표 임기 시작 | 2023년 11월 30일 |
|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대표 임기 종료 | 2024년 10월 3일 |
| 민진당 대표 임기 시작 | 2017년 9월 1일 |
| 민진당 대표 임기 종료 | 2017년 11월 1일 |
| 민주당 대표 임기 시작 | 2005년 9월 17일 |
| 민주당 대표 임기 종료 | 2006년 4월 7일 |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재정정책) 임기 시작 | 2012년 10월 1일 |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재정정책) 임기 종료 | 2012년 12월 26일 |
| 외무대신 임기 시작 | 2010년 9월 17일 |
| 외무대신 임기 종료 | 2011년 3월 7일 |
| 국토교통대신 임기 시작 | 2009년 9월 16일 |
| 국토교통대신 임기 종료 | 2010년 9월 17일 |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방재) 임기 시작 | 2009년 9월 16일 |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방재) 임기 종료 | 2010년 1월 12일 |
| 국민민주당 대표 대행 |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 |
| 국민민주당 대표 대행 임기 시작 | 2020년 9월 11일 |
| 국민민주당 대표 대행 임기 종료 | 2023년 11월 30일 |
| 국민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 |
| 국민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임기 시작 | 2021년 12월 21일 |
| 국민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임기 종료 | 2022년 8월 31일 |
| 학위 | 법학사 (교토대학교, 1987년) |
|---|
-
희망의 당의 정치인 -
이즈미 겐타
이즈미 겐타는 1974년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태어나 200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민주당 정권에서 내각부 부대신을 역임하고, 2021년 입헌민주당 대표가 되어 중도 자유주의, 진보주의적 입장을 표방하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
희망의 당의 정치인 -
고이케 유리코
고이케 유리코는 카이로 대학교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하여 환경대신, 방위대신 등을 역임하고 현재 도쿄도지사로 재임 중인 일본의 정치인으로, 도민제일회를 창당하고 희망의 당을 이끌기도 했으며 경제 자유주의와 우익 포퓰리즘 성향으로 논란을 겪기도 했다. -
일본의 국토교통대신 -
다니가키 사다카즈
다니가키 사다카즈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도쿄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중의원 의원, 과학기술청 장관, 재무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내고 2017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
일본의 국토교통대신 -
마부치 스미오
마부치 스미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요코하마 국립대학 졸업 후 중의원 의원과 국토교통대신을 역임했으며, 2024년에는 입헌민주당 대표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차기 경제 재정 담당 대신에 취임했다. -
민주당 (1998년 일본)의 국회의원 -
오카다 가쓰야
오카다 가쓰야는 1953년 미에현 출생으로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관료, 하버드 유학 후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 여러 당의 대표와 간사장, 외무대신,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입헌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한다. -
민주당 (1998년 일본)의 국회의원 -
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유키오는 일본의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제93대 일본 총리를 지냈으며, 재임 중 복지 정책 추진과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정치자금 비리 의혹 등으로 사임 후 정계 은퇴, 사회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2. 어린 시절
교토시 사쿄구에서 돗토리현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카이미나토시, 어머니는 히노군 히나마치 출신이다. 마에하라 세이지는 "토착 교토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려면 3대, 100년은 살아야 한다더군요. …옛날 사람들 말로는 아직도 ‘이주민(入り人)’ 범주에 속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고향인 산인 지방에 기차를 타고 자주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철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에는 미나토역에서 사카이선으로 갈아타는 대신 타마즈쿠리온센역까지 가서 SL을 촬영하고 오느라 4시간이나 늦어 크게 혼난 적도 있다.
중학교 입시에서는 나라현의 동대사학원중학교와 교토교육대학 부속 중학교에 합격했다. 본인은 동대사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뜻에 따라 남녀공학인 교토교육대학 부속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토가정법원 계장이었던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한부모 가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어머니는 직장에 나가게 되었다.
교토 대학 법학부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수학하였다.
3. 초기 정치 경력
마에하라 세이지는 1991년 교토부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 기타가미 게이로 등의 지원을 받아 교토부 의회 사상 최연소(28세)로 당선되었다. 교토부 의회 의원 시절에는 후생노동, 환경대책, 동화추진 부위원장, 문교위원을 역임했다.
1993년에는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끄는 일본신당 소속으로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4년 일본신당을 탈당하고 다른 젊은 의원들과 함께 '민주적 경향'을 결성했으나, 그해 말 신당 사키가케에 합류했다. 1998년에는 민주당에 입당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으로서 마에하라는 안정 정세에 전념하였고, 가끔 정부와 협상을 하였다.
4. 민주당 당수 시절
2005년 오카다 가쓰야 대표가 민주당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를 표명하자, 마에하라 세이지는 같은 해 9월 17일에 실시된 2005년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여, 간 나오토를 2표 차이로 누르고 제5대 대표로 선출되었다. 아사히 신문은 "목표는 일본의 토니 블레어"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하지만 마에하라의 당수 임기는 짧았다. 자유민주당 의원들과 라이브도어 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주장에 사용된 이메일이 조작으로 밝혀진 스캔들로 인해 3월 31일 나가타 히사야스와 함께 사임하였다. 4월 7일에 열린 당수 선거에서는 오자와 이치로가 당선되었다.
2005년 12월 2일 도쿄의 대학에서 강연한 자리에서 “미일 안보와 방위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은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라며 자유민주당의 대미 추종을 비판했다. 같은 달 8일 미국에서 강연하며 중국의 군사력 확대 등에 대해 “현실적인 위협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언급하고 해상교통로(シーレーン) 방위를 위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개정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같은 달 12일 중국에서 강연하며 “중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 반발한 중국 측이 후진타오 국가주석과의 회담을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마에하라는 방문지인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 위협론 주장을 근거로 요인과의 회담을 거부한 중국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표면적인) 우정은 모래 위의 성과 같다”라고 지적했다. 귀국 후 마에하라는 중국 위협론에 근거한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했다. 또한 “말해야 할 것을 말했다는 것에 자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말로만 ‘우정’ ‘우정’을 외쳐온 친중파와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이 “현실적인 위협” 발언에 대해서는 “중국이 위협,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아소 다로), “당의 방침으로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하토야마 유키오) 등의 목소리가 나왔다.
5. 내각
2009년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이 중의원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여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6월 2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사퇴함에 따라 치러진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는 과거 대립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지지했다. 이후 출범한 간 나오토 내각에서 국토교통대신, 오키나와 및 북방 대책 담당 대신에 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간 나오토 대표의 임기 만료에 따라 실시된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도 간 나오토를 지지하고, 간의 추천인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
--
--
--
2010년 9월 17일, 민주당 대표로 재선된 간 나오토는 내각 개조(간 제1차 개조 내각)를 단행했고, 오카다 가쓰야의 후임으로 외무대신에 취임했다. 당시 48세 4개월이었던 마에하라는 이케다 내각의 고사카 젠타로 외무대신을 제치고 전후 최연소(당시) 외무대신이 되었다. 2011년 1월 제2차 개조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으로 유임되었다.
5.1. 국토교통대신
마에하라 세이지는 2009년 9월 16일 국토교통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토교통대신으로서 다음과 같은 정부 정책을 발표하였다.
* 얌바 댐 건설 중단
* 도쿄 하네다 공항의 장거리 국제선 운항 개시
* 파산한 일본항공의 구조조정
* 일본 고속도로망의 통행료 감면 또는 폐지 실험
5.2. 외무대신
--
--
--
--
2010년 9월 17일, 간 나오토 총리는 내각을 개편하여 마에하라를 전후 일본 역사상 최연소 외무대신으로 임명했다. 마에하라가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던 중 발생한 주요 국제 관계 사건은 2010년 센카쿠 열도 충돌 사건으로, 이 사건은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영유권 분쟁을 격화시켰다.
2010년 9월 8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항 인근 센카쿠 열도 주변 일본 영해 내에서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중국 어선이 충돌하여 중국인 선장이 체포되었다. 마에하라는 "(센카쿠 열도에) 영토 문제는 없다"고 강조하며, 직무집행방해죄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선장의 처우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내법에 따라 착실하게 대응한다. 그것이 전부다"라고 말하며, 중국 측의 조기 보석 요구를 거부했다. 또한, 이시가키시의 이시가키 해상보안부·순시선 정박소를 시찰하여 직원들을 격려하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2010년 9월 19일 NHK 프로그램에서 마에하라는 "이번은 우발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중국도 대응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9월 24일, 선장은 나하 지검의 판단에 따라 석방되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국제연합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던 마에하라가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의 회담에서 "곧 해결됩니다"라고 전달했으며, 중국인 선장 석방에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유토와 마에하라가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마에하라는 자신의 정치적 개입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2010년 10월 27일에는 호놀룰루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희토류 공급원 다변화 필요성에 공감하고, 센카쿠 열도가 미일안전보장조약 제5조 적용 대상이라는 인식을 같이했다. 클린턴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센카쿠 열도에 대해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를 규정한 미일안전보장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이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명확히 밝혔다.
TPP 협상과 관련하여, 2011년 10월에 "GDP 대비 겨우 1.5%에 불과한 1차 산업의 보호를 위해 다른 분야가 희생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자유 무역 옹호 주장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2011년 3월, 마에하라는 교토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72세의 재일 한국인으로부터 250의 정치자금 기부를 받은 사실이 니시다 쇼지 의원에 의해 밝혀져 외무대신직에서 사퇴했다. 마에하라는 중학교 시절부터 그 여성을 알고 있었지만, 외국인으로부터의 정치자금 기부는 불법이었다. 마에하라는 6개월 만에 직을 내려놓고 정치 자금 문제로 "불신을 야기"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재팬 타임스는 이 사퇴가 미국과의 관계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사건을 재일 한국인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대우를 보여주는 기술적인 문제에 기반한 스캔들로 묘사했다.
6.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1991년 8월 31일, 노다 요시히코 대표 체제 하에서 민주당 정책조사회장에 취임했다. 2011년 11월 10일에는 센고쿠 요시토의 뒤를 이어 영운회 회장에 취임했다. 정치단체로서의 영운회 대표자는 센고쿠 요시토시에서 마에하라 세이지로 변경되었다. 2012년 9월, 민주당 정책조사회장을 사임했다.
7. 국가전략・경제재정담당대신
--
2012년 10월 1일 노다 내각 개조 당시, 재무대신으로 입각하는 것도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국가전략담당대신, 해양정책담당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경제재정정책, 과학기술정책, 원자력행정, 우주정책)으로 1년 8개월 만에 재입각했다.
2012년 10월 5일, 경제재정담당대신으로서 2003년 다케나카 헤이조 이후 9년 반 만에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참석했다. 재임 중 총 3회에 걸쳐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은행이 제시하는 인플레 목표 1% 달성을 위해 강력한 금융완화를 요구하는 입장을 강화했다. 또한, 금융완화책의 일환으로 외채 매입도 유효한 수단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일본은행은 9월과 10월 두 달 연속 금융완화에 나섰다.
같은 해 12월에 실시된 제46회 중의원의원총선거에서는 자신은 선거구에서 압승하여 7선을 확정했지만 민주당은 압도적인 참패를 당했고, 물가상승률 2%를 주장하는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의 정권 재탈환이 확실시되었다. 그 후 12월 20일에 열린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존의 물가상승률 1%를 목표로 하는 중장기적인 물가 안정의 전망 재검토가 결정되었고, 2%의 물가 목표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에 대해, 각의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참석하여 물가 목표 1% 달성을 위해 금융완화를 요구했던 당시에는) 다른 분들이 1% 달성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의견을 내셨다”라고 말한 후, 총선 이후 일본은행의 움직임에 대해서 “ (멤버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갑자기 이렇게 크게 바뀌는가. 놀랍다”, “지금까지와 어떤 일관성, 연속성, 지속성이 있는가. 국회에서 엄격하게 확인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일본은행의 태도 변화에 의문을 제기했다.
8. 국민민주당
2018년 5월 7일,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류하여 국민민주당이 결성되자 마에하라도 여기에 참여했다. 같은 해 8월에는 국민민주당 교토부 연의 회장에 취임했다. 9월 국민민주당 대표 선거에서는 자신이 두 차례의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 내걸었던 "All for All"과 주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쓰무라 케이스케에게 투표했다.
2020년 8월 15일, 국민민주당과 입헌민주당의 합류 신당(신·입헌민주당)에 참여하지 않고, 국민민주당 잔류파 신당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9월 15일 신·국민민주당 창당대회가 열렸고, 마에하라는 당 대표 대행에 취임했다.
2021년 10월 31일, 제4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10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부터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겸임했다.
2022년 2월 2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정부의 당초 예산안에 찬성해야 했지만, 마에하라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국회에 결석했다. 그는 BS-TBS의 “보도 1930”에 출연하여 “트리거 조항의 동결 해제가 만약 이루어진다고 해도 찬성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고, 하물며 이루어지지도 않은 단계에서 찬성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당에 아부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라며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의 대응을 비판했다.
2022년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교토부 선거구에서 오랫동안 정치 활동을 함께 해 온 입헌민주당 현직 의원 후쿠야마 테쓰로를 지지하지 않고, 일본유신의회 공인 신인 후보를 전면 지원했지만, 신인 후보는 낙선했다. 8월 31일, 마에하라는 당 선거대책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2023년 8월 21일, 국민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전에서는 마에하라와 재선을 노리는 다마키의 일대일 대결이 되었고, 다마키는 자민당·공명당 연립 정권과의 연계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나타낸 반면, 마에하라는 다마키 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일본유신의회 및 입헌민주당 일부와의 선거 협력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9월 2일 개표 결과, 다마키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마에하라는 “완패다.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싶다”라고 말하고, 대표 선거 이후 탈당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대표 선거 이후 임원 인사에서 대표 대행직을 유임했다.
2023년 11월 30일, 국민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교육 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대표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13일, 국민민주당 양원 의원 총회에서 제출된 탈당계를 수리하지 않고 “당의 결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마에하라 세이지는 제명 처분을 받았다.
9. 일본유신회
2022년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교토부 선거구에 출마한 일본유신의회 공천 신인 후보를 전면 지원했으나, 후보는 낙선했다.
2024년 1월 15일, 일본 이신회의 마바 신코 대표와 기자회견을 열고, 1월 26일에 회기가 시작되는 제213회 국회 (정기국회)에서 양당이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통합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16일에 통합 원내 교섭단체 결성을 신고했다. 교섭단체 명칭은 "일본 이신의회·교육 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약칭: 이교)"이다.
같은 해 8월 22일, 이신회의 마바 대표와 차기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당 합류를 포함한 협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9월 11일, 연합 교토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에 대한 추천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이신회와 합류를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연대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24년 10월 3일, 마에하라 세이지는 일본이신의회의 바바 대표와 기자회견을 열고, 교육의 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소속 중의원·참의원 4명의 의원이 일본이신의회에 합류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0일, 일본이신의회는 마에하라 등의 입당과 같은 달 27일 투개표되는 제5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공천을 공식 발표했다. 당 국회의원단 부대표에 취임했다. 투개표 결과, 교토부 제2구에서 11선을 달성했다. 당선 후, 지지자들에게 "일본이신의회에 합류하면서 상당한 비판이 있었지만, 저의 생각을 이해해주고 지지의 폭을 넓혀준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12월 1일, 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요시무라 히로후미는 마에하라를 공동대표로 임명하고 싶다는 의향을 표명했고, 다음 날 열린 당 양원 의원 총회에서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12월 15일, 당 교토부 총지부는 대표로 마에하라를 임명하는 인사를 결정했다.
일본유신의회는 민주당 정권 시절에는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정권 교체 후에는 유신의당과 야당 연수회를 열어 협력 자세를 구축하는 등 점차 태도가 완화되었다. 2020년부터는 오사카도구상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교토부 선거구에서 유신 추천 후보를 지원하는 등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2020년 6월, 마에하라와 유신의 마바 신코 간사장(당시)은 "새로운 나라의 모습(분권 2.0)협의회"라는 연수회를 설립하고, 마에하라는 마바와 함께 대표 섭외인이 되었다. 이 모임에는 유신, (구) 국민, (구) 입헌민주 등 국회의원 약 40명이 참가했으며, 오사카유신의회의 오사카도구상 정책 문구가 설립 취지서에 포함되었다. 다음 달 회합에서는 오사카부지사인 요시무라 히로후미가 오사카도구상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2022년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교토부 선거구에서 후쿠야마 테쓰로 대신 유신 추천 후보인 쿠스이 유코를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마에하라의 선거구(교토부 제2구)에서는 국민민주당 홍보판에 마에하라와 쿠스이의 포스터가 모두 게시되었지만, 쿠스이는 후쿠야마에게 패배했다.
10. 정책 및 주장
마에하라 세이지는 민주당 내 대표적인 보수파 정치인으로,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같은 중도 세력 결집을 지향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2005년 12월, 도쿄의 한 대학 강연에서 "미일 안보와 방위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은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라며 자민당의 대미 추종 외교를 비판했다. 같은 달 미국 강연에서는 중국의 군사력 확대를 "현실적인 위협"으로 규정하고, 해상 교통로(시레인) 방어를 위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헌법 개정 필요성을 주장했다.
--
2006년, 호리에 메일 문제로 대표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에도 민주당 내에서 외교·안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2007년 가을 임시국회를 앞두고 당 부대표에 취임했으며,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는 국토교통대신 겸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담당 대신, 방재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
마에하라는 일본항공의 경영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25주년인 2010년 8월 12일에는 역대 운수대신 및 국토교통대신 중 처음으로 사고 현장인 '미쓰가다케의 능선'을 찾아 위령 등산을 했다.
마에하라는 2008년 6월, 『중앙공론』 7월호에서 자민당의 요시노 케이와의 대담에서 농가에 대한 호별소득보상과 아동수당 등을 포함한 2007년 참의원 선거 매니페스토에 대해 "행정개혁만으로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절대 무리"라고 비판했다.
2009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 질의에서는 도로 특정재원의 일반재원화와 관련하여 아소 다로 당시 총리를 "사기"라고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10.1. 외교 및 안보
간 나오토 총리는 2010년 9월 17일 내각을 개편하여, 마에하라 세이지를 전후 일본 역사상 최연소 외무대신으로 임명했다. 마에하라가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국제 관계 사건은 2010년 센카쿠 열도 충돌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센카쿠 열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었다.
2010년 9월 8일, 오키나와현 센카쿠 열도 주변 일본 영해 내에서 해상보안청의 순시선과 중국 어선이 충돌하여 중국인 선장이 체포되었다. 마에하라는 "(센카쿠 열도에) 영토 문제는 없다"고 강조하며, 직무집행방해죄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선장의 처우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내법에 따라 착실하게 대응한다. 그것이 전부다"라고 말하며, 중국 측이 요구하는 중국인 선장의 조기 석방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본에 대한 항의 활동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도 억제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2010년 9월 24일, 선장은 "여러 사정 때문에"라는 나하 지검의 판단에 따라 석방되었다. 마에하라 자신은 "나하 지검이 절차 속에서 결정한 것이므로, 정부로서 따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정치적 개입은 없었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2010년 10월 27일에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회담을 가졌다. 희토류 공급원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일치했으며, 센카쿠 열도는 미일안보조약 제5조 적용 대상이라는 인식에서도 일치했다. 클린턴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센카쿠 열도에 대해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를 규정한 미일 안보 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이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명확히 밝혔다.
--
--
2009년 10월 17일, 북방 영토 해상 시찰 후 기자 회견에서 "구 소련의 불법 점령이라고 계속 말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러시아 외무성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노다 정권의 센카쿠 열도 국유화와 관련하여 "도지사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이시하라 도지사가 없었다면 국유화는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이시하라의 돌발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일미 동맹 강화, 중국 위협론, 헌법 9조 1항, 2항은 유지한 채 조문 추가를 통해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할 필요성, 무기수출삼원칙 재검토, 북한의 미사일 기지 등을 자위대가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 검토 등을 주장하고 있다.
10.2. 내정
마에하라 세이지는 내정 분야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10.3. 경제
마에하라 세이지는 경제 정책에서 개혁파에 속하며, 경제성장을 중시한 "진정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간 나오토 내각총리대신이 "일은 고용, 이는 고용, 삼은 고용"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에 대해, 탈원전을 전제로 "일은 성장, 이는 성장, 삼은 성장"과 같이 산업 발전을 중시해야 한다고 반론했다.
공공사업 개혁은 그의 주장이자, 은사인 고사카 마사타카가 마에하라에게 남긴 유언이라고 한다. 민주당에서도 사회자본정비 넥스트 장관, "공공사업을 재검토하는 위원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일관되게 공공사업 문제에 매달렸으며, 이러한 활동은 하토야마 내각에서 국토교통대신 취임으로 이어졌다.
아베 정권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에 대해서는, 과감한 금융완화와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성장 전략에 대해 민간 정당의 입장에서 대찬성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인플레 기대만을 노리고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호소하며, 아베노믹스의 위험성, 문제점을 지적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일본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리플레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노(No)라고 말하는 것이 국익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디플레 배경으로 일본의 인구 감소가 소비 수요를 전반적으로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12년 10월 5일, 경제재정담당대신으로서 2003년 다케나카 헤이조 이후 9년 반 만에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참석했다. 재임 중 총 3회에 걸쳐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은행이 제시하는 인플레 목표 1% 달성을 위해 강력한 금융완화를 요구하는 입장을 강화했다. 또한, 금융완화책의 일환으로 외채 매입도 유효한 수단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일본은행은 9월과 10월 두 달 연속 금융완화에 나섰다.
같은 해 12월 제46회 중의원의원총선거에서 자신은 선거구에서 압승하여 7선을 확정했지만, 민주당은 압도적인 참패를 당했고, 물가상승률 2%를 주장하는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의 정권 재탈환이 확실시되었다. 12월 20일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존의 물가상승률 1%를 목표로 하는 중장기적인 물가 안정 전망 재검토가 결정되었고, 2%의 물가 목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이에 대해 각의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 참석하여 물가 목표 1% 달성을 위해 금융완화를 요구했던 당시에는) 다른 분들이 1% 달성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라고 말했다. 이어 총선 이후 일본은행의 움직임에 대해 " (멤버가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갑자기 이렇게 크게 바뀌는가. 놀랍다", "지금까지와 어떤 일관성, 연속성, 지속성이 있는가. 국회에서 엄격하게 확인하고 싶다"라며 일본은행의 태도 변화에 의문을 제기했다.
10.4. 사회보장
2014년 마에하라 세이지는 "사회보장에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출 삭감과 부담 증가, 둘 다 해야 합니다."라며 사회보장비 "삭감"을 주장했다. 그는 "개인의 자산을 파악할 수 있는 마이넘버 제도가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고령자분이라도 자산이 있다면 의료비 부분 부담 증가를 부탁하는 등, 어느 정도 사회에 협력해 주셔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만 부담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라며, 고령자의 부담을 늘리고 그만큼을 젊은이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7년 9월 민진당 대표 선거 이후에는 국민 부담을 증가시켜 광범위하게 사회보장을 제공하는 "All for All"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10.5. TPP
마에하라 세이지는 TPP영어 협상과 관련하여, 2011년 10월 기자회견에서 "GDP 대비 겨우 1.5%에 불과한 1차 산업의 보호를 위해 다른 분야가 희생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보호주의적 주장을 밝혔다.
2013년 3월 12일, 미국 정부가 노다 정권 당시 일본 정부에 TPP 사전 협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했다고 설명하며, 아베 신조 총리에게 "우리는 일본에 너무 불공평했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TPP에 참가하지 않도록) 요청했다".
11. 논란 및 사건
2011년 3월, 마에하라 세이지는 교토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72세의 재일 한국인으로부터 250(약 3,000달러)의 정치자금 기부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외무대신직에서 사퇴했다. 마에하라는 중학교 시절부터 그 여성을 알고 있었지만, 외국 국적자로부터 고의로 기부를 받았다면 불법이었다. 마에하라는 6개월 만에 직을 내려놓고 정치 자금 문제로 "불신을 야기"한 것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재팬 타임스는 이 사퇴가 미국과의 일본 관계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기부 사실은 야당 정치인 니시다 쇼지에 의해 밝혀졌으며, 이코노미스트는 이 사건을 주로 재일 한국인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대우를 보여주는 기술적인 문제에 기반한 스캔들로 묘사했다.
2011년 3월 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자유민주당의 니시다 마사시 의원의 질의에 따라, 마에하라 세이지가 교토시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 여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에하라 세이지는 이 여성으로부터 매년 50, 4년간 총 200을 받았다.
2011년 8월 27일, 마에하라 세이지의 사무소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조사한 결과, 재일 외국인 3명과 재일 외국인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법인으로부터 총 340의 외국인 정치자금이 추가로 발각되었다. 이 정치자금은 발표 전에 반환되었다.
2011년 9월 1일, 8월 27일 발표 내용과는 별도로 재일 한국인이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으로부터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총 약 1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다만, 이 정치자금 문제는 공소시효 3년을 경과했으므로, 반환은 의원의 기부에 해당하여 공직선거법 위반이 되므로 할 수 없다.
2012년 10월 29일, 비서의 자택을 사무실로 신고하여 12.32의 경비를 계상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무실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유민주당의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은 "자민당 정권 시대에는 이 문제로 각료 사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마에하라 본인은 "확실한 실체가 있다. 변호사와도 상담했지만 문제없다"고 답했다. 이 건과 관련하여, "마에하라 세이지 도쿄 후원회"의 2010년분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 비정상적인 금액의 회합비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6월 11일 하루만 해도, 고급 요릿집, 일식집, 중식집, 교토풍 고급 요릿집 등 7곳에 1 이상을 지출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2012년 11월 1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영수증을 받을 시간이 없어서, 그에 대한 영수증을 적은 것이지 위조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2012년 2월 23일, 마에하라 세이지는 산케이 신문이 사용했던 "말만 하는 우두머리"라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며 취재 거부를 통고하고, 같은 날 저녁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산케이 신문 기자의 참석을 거부했으며, 민주당 정책조사회에 대한 취재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23일 낮, 인사 이동 인사 차 국회에서 마에하라와 접촉했는데, 마에하라는 중의원 의원회관 자신의 집무실에서 기자에게 "이유도 없이 '말만 하는 우두머리'라고 쓰는" 이유를 산케이 회장 명의의 문서로 요구했다. 그리고 답변이 없으면 산케이 신문에는 정책조사회 취재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고 한다. 또한, 산케이 신문 기자가 회견장에 있었기 때문에 "(회견은) 시작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 후 별실에서 참석하는 기자들에게 명함 제출을 요구했다고 한다. 산케이 신문 기자가 명함을 제출하자, 당 직원이 "산케이 신문은 거절합니다"라며 입장을 거부했다. 마에하라는 기자회견에서 "수용 한계를 넘었다. 기자에게 비판할 권리는 있지만,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사히 신문은 2012년 2월 25일 사설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정치인은 항상 비판에 직면하는 것이며, 취재 거부는 정치인으로서의 옹졸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마에하라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주당도 비판했다. 정치평론가 아사카와 히로타다는 "총리 자리를 노리는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옹졸한 인상을 주었다. 비판도 수용하는 '넓이'를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마이니치 신문 논설부 차장 요라 마사오는 "매우 옹졸합니다. 민주당 정권은 곧바로 언론을 차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비판했다. 도쿄 공업대학 교수 오자키 히로유키는 "마에하라 씨는 오히려 홍보를 해버렸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불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도 이제 주목할 것입니다"라고 평했다. 정치평론가 미야케 히사유키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여당을 비판하는 것은 건전한 정치를 위해 당연한 행위이며, 정당 보조금을 받는 공당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려는 대응은 정치인으로서 미숙하다고 비판했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옹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산케이 신문은 "주장"에서 "보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특정 언론을 배제하고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기자 배제에 대해 다른 언론 기관도 마에하라와 민주당에 항의했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자위대 시설 행사에서 민간인의 정권 비판을 봉쇄할 목적으로 방위심의관 통달을 내린 것과, 새로운 인권 구제 기관인 "인권위원회"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예로 들며, 이 문제를 "민주당의 체질"과 연결시켜 비판했다.
"말만 하는 우두머리"는 "말만 하고 결과가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만화 "석양의 우두머리"를 본떠 표현한 것이다. 산케이 신문은 이것이 언론의 비판으로서 허용 범위 내에 있으며, 공인에 대한 인권 침해나 명예 훼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에서 "'말만 하는 우두머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있다"(11년 10월 30일 자 조간) 등 적어도 2번, 또한 니시니혼 신문이나 오키나와 타임스와 같은 지방 신문 외에, 주간신조나 선데이 마이니치와 같은 주간지, 석간지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 산케이 신문보다 먼저 사용한 예로는, 확인된 범위 내에서는 2011년 8월 산케이 스포츠 기사가 있다. 주간 포스트 2012년 3월 16일호에 따르면, 산케이 신문이 만든 신조어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나가타초에서는 유명한 별명일 뿐이라고 한다. 최종적으로 2012년 2월 28일 기자회견에서 마에하라는 산케이 신문의 참석을 허용하고, 산케이 신문 배제를 철회했다.
기자인 스즈키 에이트가 작성한 「舊統一教会 관련 단체와 관계가 있었던 현직 국회의원 168명」에 따르면, 舊統一教会 관련 단체와의 관계에 대해, 2011년에 교단 계열 미디어인 『워싱턴 타임스』에 전면적인 의견 광고를 게재했다고 한다.
2024년 8월 28일, 마에하라 세이지가 선거구 밖에 거주하는 교토 시민의 장례식에 이름이 들어간 조화를 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선거구 내 유권자에 대한 기부를 금지한 공직선거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마에하라는 "고인이 선거구 밖이라면 보내도 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고의나 위법성 인식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개선하겠다"고 설명했다. 마에하라는 언론으로부터 위법성을 지적받고 총무성에 확인한 결과, "장례식장이 선거구 밖이더라도, 상주가 선거구 내에 거주하는 경우 상주에게 보냈다고 해석할 수도 있어 공직선거법에 저촉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12.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시행일 | 선거구 | 정당명 | 득표수 (표) | 득표율 (%) | 순위 | 당락 | 비고 |
|---|---|---|---|---|---|---|---|---|
| 교토부 의회의원 선거 | 1991년 | 교토시 사쿄구 | 무소속 | 9,678 | 당선 | |||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3년 | 교토부 제1구 | 일본신당 | 65,182 | 17.0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6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31,257 | 21.23 | 3위 | 당선 | 석패율제 |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0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52,077 | 33.46 | 1위 | 당선 | |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3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73,934 | 49.73 | 1위 | 당선 | |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5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73,795 | 42.79 | 1위 | 당선 | |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9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101,151 | 57.52 | 1위 | 당선 | |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12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72,170 | 49.35 | 1위 | 당선 | |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14년 | 교토부 제2구 | 민주당 | 66,227 | 50.44 | 1위 | 당선 | |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17년 | 교토부 제2구 | 무소속 | 65,480 | 48.71 | 1위 | 당선 | |
|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21년 | 교토부 제2구 | 국민민주당 | 72,516 | 48.89 | 1위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