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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페르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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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타페르네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인물로, 다리우스 1세의 형제이자 소아시아의 사트라프였다. 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테네와의 관계, 낙소스 포위전, 히피아스와의 관계 등에서 활동했다. 반란 이후에는 이오니아 도시들의 분쟁을 중재하고 공정한 조세 제도를 확립하는 등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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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페르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아르타페르네스
원어 이름Artafarna
원어 표기 언어peo
소속아케메네스 제국
복무 기간기원전 513년 - 기원전 492년
계급리디아의 사트라프
주요 전투이오니아 반란
자녀아르타페르네스 2세
친척다리우스 1세 (형제)

2. 어원

아르타페르네스라는 이름은 '정의의 영광을 부여받은'이라는 뜻을 가진 메디아어에서 파생되었다. 'Arta'는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흔히 사용되는 접두사로 '정의'를 의미하며, Farnah는 "광채, 영광"을 뜻한다.[3] 아르타페르네스는 그리스어 어원에 따라 '정의의 영광을 부여받은'을 뜻하는 아르타파나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2. 1. 어원 분석

아르타페르네스라는 이름은 메디아어 'Rta' + 'Farnah'(정의의 영광을 부여받은)에서 파생되었다. 중세 페르시아어에서 Rta는 Arda-/Ard-/Ord- 형태로 변형되며, 아르다빌(Arta vila 또는 Arta city), 아르타바누스(보호된, 또는 아르타를 보호하는), Ordibehesht(최고의 Arta)와 같은 단어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Arta'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흔한 접두사 이름이며, ‘바름’, ‘정의’, ‘궁극의 진실’을 의미한다.

아케메네스 왕조 계보: 아르타페르네스는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다리우스 1세의 형제였다.


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는 어원(그리스어: phren, "정신, 영혼")에 따라 아르타파나(Artafanah, 정의의 영광을 부여받은)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 아르타(Arta)는 아케메네스 이름에 흔히 사용되는 접두사로 정의를 의미한다.[2] 파르나(Farnah)는 "광채, 영광"을 의미한다.[3]

3. 생애

아르타페르네스는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다리우스 1세의 형제로, 리디아 사트라프로 임명되어 소아시아 지역을 통치했다.

기원전 507년,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 사절단을 맞이하여 흙과 물을 요구하며 복종을 강요했다. 사절단은 이에 동의했지만, 아테네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아테네의 참주였던 히피아스가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복위를 요청하자, 아르타페르네스는 히피아스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아테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지속된 이오니아 반란에서 아르타페르네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르디스 포위전 (기원전 498년)에서 그는 사르디스 요새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도시는 그리스 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후 반란을 진압하고, 라데 해전에서 승리하여 이오니아 반란을 종식시켰다.

반란 진압 후,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서로 법을 따르고 약탈하지 않도록 강요했으며, 영토를 파라상으로 측량하여 공물을 공정하게 평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이오니아 지역의 안정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3. 1. 리디아 사트라프 임명

아르타페르네스가 기원전 513년 권력을 잡았을 당시 리디아 사트라피.


아르타페르네스는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다리우스 1세의 형제였다. 다리우스 1세는 권력을 잡자 제국을 사트라피라고 불리는 20개의 지역으로 조직하고, 신민들이 바쳐야 할 조공을 정례화했으며, 사트라프를 임명했다.[4] 아르타페르네스가 소아시아에서 권력을 잡기 전, 이전 사트라프였던 오로에테스는 기원전 522년 다스키리움에서 또 다른 사트라프인 미트로바테스와 그의 아들 크라스파스를 암살했다.[5] 이후 사트라프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바가에우스는 오로에테스를 죽이기 위해 임명되었다.[6][7]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13년 아르타페르네스를 다음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3. 2. 아테네와의 첫 만남 (기원전 507년)

기원전 507년, 다리우스 1세의 형제이자 사르디스에 주둔한 소아시아의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는 스파르타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구하던 클레이스테네스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사절단을 맞이했다.[9] 아르타페르네스는 사절들에게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디에 살고 있소?"라고 물었다.[10] 아테네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된 후, 그는 아케메네스 왕의 도움을 원한다면 복종의 상징인 "흙과 물"을 요구했지만, 그렇지 않다면 떠나라고 했다.[10] 사절들은 "흙과 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했으나,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비난을 받았다.[10]


3. 2. 1. 배경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507년, 다리우스 1세의 형제이자 수도 사르디스에 주둔한 소아시아의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는 스파르타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구하던 클레이스테네스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사절단을 맞이했다.[9] 사절들이 도착하자 아르타페르네스는 그들에게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디에 살고 있소?"라고 물었다.[10] 아테네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난 후, 그는 아케메네스 왕의 도움을 원한다면 복종의 상징인 "흙과 물"을 요구했지만, 그렇지 않다면 떠나라고 했다.[10] 사절들은 "흙과 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절들이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비난을 받았다.[10]

이후,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했으며,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은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수스로 태워 보냈다. 그곳에서 그 부대는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해서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3. 2. 2. 만남과 요구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41]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507년, 다리우스 1세의 형제이자 수도 사르디스에 주둔한 소아시아의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는 스파르타의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구하던 클레이스테네스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사절단을 맞이했다.[9] 사절들이 도착하자 아르타페르네스는 그들에게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디에 살고 있소?"라고 물었다.[10] 아테네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난 후, 그는 아케메네스 왕의 도움을 원한다면 복종의 상징인 "흙과 물"을 요구했지만, 그렇지 않다면 떠나라고 했다.[10] 사절들은 "흙과 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절들이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비난을 받았다.[10]

3. 2. 3. 결과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했으며,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이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수스로 태워 보냈다. 그곳에서 그 부대는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해서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3. 3. 히피아스와의 관계

아르타페르네스는 히피아스를 복위시키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히피아스를 아테네의 통치자로 복위시키지 않으면 아테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11] 아테네는 이러한 위협을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11][13] 이후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3. 1. 히피아스의 망명과 복위 요청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했으며,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이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수스로 태워 보냈다. 그곳에서 그 부대는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해서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기원전 510년에 추방된 아테네의 전 참주 히피아스는 기원전 505년에 아테네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히피아스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아테네인들을 헐뜯었고, 아테네를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11] 아르타페르네스가 히피아스를 위해 이 일을 기꺼이 맡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아테네가 기원전 507년에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복종은 영구적인 것이었으며, 이는 아르타페르네스가 동맹을 지지하는 아테네 정부를 지원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의미했다.[12]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히피아스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듣고 추방된 아테네인들을 믿지 말라고 페르시아에 경고하기 위해 사르디스로 사절을 보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안전을 원한다면" 히피아스가 아테네로 돌아가도록 허용하라고 말했다.[11] 이 위협이 아테네인들에게 전달되자 그들은 거부했고, 대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11][13]

3. 3. 2. 아르타페르네스의 경고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510년에 추방된 아테네의 전 참주 히피아스는 기원전 505년에 아테네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히피아스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아테네인들을 헐뜯었고, 아테네를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11] 아르타페르네스가 히피아스를 위해 이 일을 기꺼이 맡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아테네가 기원전 507년에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복종은 영구적인 것이었으며, 이는 아르타페르네스가 동맹을 지지하는 아테네 정부를 지원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의미했다.[12]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히피아스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듣고 추방된 아테네인들을 믿지 말라고 페르시아에 경고하기 위해 사르디스로 사절을 보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안전을 원한다면" 히피아스가 아테네로 돌아가도록 허용하라고 말했다.[11] 이 위협이 아테네인들에게 전달되자 그들은 거부했고, 대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11][13]

3. 3. 3. 아테네의 반응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했으며,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은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수스로 태워 보냈다. 그곳에서 그 부대는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해서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기원전 510년에 추방된 아테네의 전 참주 히피아스는 기원전 505년에 아테네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히피아스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아테네인들을 헐뜯었고, 아테네를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11] 아르타페르네스가 히피아스를 위해 이 일을 기꺼이 맡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아테네가 기원전 507년에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복종은 영구적인 것이었으며, 이는 아르타페르네스가 동맹을 지지하는 아테네 정부를 지원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12]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히피아스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듣고 추방된 아테네인들을 믿지 말라고 페르시아에 경고하기 위해 사르디스로 사절을 보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안전을 원한다면" 히피아스가 아테네로 돌아가도록 허용하라고 말했다.[11] 이 위협이 아테네인들에게 전달되자 그들은 거부했고, 대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11][13]

3. 4. 낙소스 포위전 (기원전 499년)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했으며,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은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수스로 태워 보냈다. 그곳에서 그 부대는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해서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메가바테스아리스타고라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후, 메가바테스는 낙소스에 원정의 목적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17] 이 메시지로 인해 낙소스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할 수 있었지만, 페르시아군은 이러한 작전을 유지할 충분한 물자와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포위는 4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페르시아군은 가져온 모든 것과 아리스타고라스의 사비를 소진한 후 철수해야 했다.[4][13][18]

3. 4. 1. 원정의 배경

기원전 525년, 과두 정치가 낙소스를 통치하기 시작했지만, 기원전 503년에 민주당에 의해 과두 정치가 추방되었고 헌법이 제정되었다.[13] 낙소스 포위전 (기원전 499년)은 추방된 과두 정치 세력이 밀레투스로 가서 당시 밀레투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에게 그들의 나라를 되찾을 충분한 병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요청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이 요청을 듣고 아르타페르네스에게 해군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14] 아르타페르네스는 국왕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키클라데스 제도로 확장할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동의했다.[15][1] 그러나 다리우스 1세가 이 계획에 동의해야 했지만, 동의가 떨어지자 200척의 삼단 노선이 제공되었고, 메가바테스가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16]

3. 4. 2. 페르시아의 지원

낙소스 포위전 (기원전 499년)은 낙소스에서 추방된 과두 정치 세력이 밀레투스로 가서, 당시 밀레투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에게 그들의 나라를 되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이 요청을 듣고 아르타페르네스에게 해군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14] 아르타페르네스는 이 계획에 동의했는데, 이는 국왕에게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키클라데스 제도로 확장할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15][1] 다리우스 1세가 이 계획을 승인하자, 200척의 삼단노선이 제공되었고, 메가바테스가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16]

3. 4. 3. 포위전의 실패

기원전 503년, 낙소스에서 민주정에 의해 과두 정치가 추방되고 헌법이 제정되었다.[13] 낙소스 포위전은 추방된 과두 정치 세력이 밀레투스로 가서 당시 밀레투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에게 그들의 나라를 되찾을 병력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이 요청을 듣고 아르타페르네스에게 해군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14] 아르타페르네스는 국왕에게 이익이 되고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키클라데스 제도로 확장할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동의했다.[15][1] 다리우스 1세가 이 계획에 동의하자 200척의 삼단 노선이 제공되었고, 메가바테스가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16]

메가바테스와 아리스타고라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후, 메가바테스는 낙소스에 원정의 목적을 알렸다.[17] 이로 인해 낙소스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할 수 있었지만, 페르시아군은 이러한 작전을 유지할 물자와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다. 포위는 4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페르시아군은 가져온 모든 것과 아리스타고라스의 사비를 소진한 후 철수해야 했다.[4][13][18] 낙소스 포위전의 실패는 이오니아 반란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아리스타고라스가 실패의 결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 5. 이오니아 반란 (기원전 499년 ~ 기원전 494년)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지속된 이오니아 반란에서 아르타페르네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해 군대를 파병했고, 이들의 함선은 아테네 부대를 에페소스로 수송했다. 에페소스에서 이오니아 병력과 합세한 아테네군은 사르디스로 진격했다.[19]

아테네군이 이오니아와의 동맹을 끝내고 지원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비잔티움, 카리아, 카무스, 키프로스까지 확산되었다.[26][27] 아르타페르네스와 오타네스는 이오니아와 아나톨리아 영토를 되찾는 임무를 맡아 클라조메나이와 클림을 탈환했다.[28]

페르시아는 반란을 일으킨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후,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하에 밀레투스를 포위했다. 기원전 494년, 밀레투스 항구 근처 라데 섬 인근에서 결정적인 라데 해전이 벌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그리스 함대는 사모스와 레스보스 함선이 후퇴하기 전까지 승리하는 듯 보였다.[29] 그러나 갑작스러운 배신으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고, 나머지 그리스 함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직후 밀레투스는 항복했고, 이로써 이오니아 반란은 사실상 종식되었다.[30]

3. 5. 1. 반란의 발발

기원전 6세기, 아르타페르네스는 클레이스테네스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의 특사를 받았다.[41]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이오니아 반란은 낙소스 포위 실패로 자신의 지위가 박탈되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확신한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선동으로 시작되었다.[20] 히스티아이오스는 반란이 일어나면 해안으로 다시 보내질 것이라고 믿고 이를 지지했다.[21][20] 히스티아이오스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반란을 암시하는 비밀 메시지를 보낸 후, 이오니아 반란이 시작되었다.[20]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시키려 시도했고, 동맹을 찾기 위해 그리스 본토를 방문했다.[22] 그는 아테네에레트리아를 설득하여 배와 병력을 제공받는 데 성공했다.[23]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배는 아테네 군대를 이오니아 도시 에페소스로 수송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오니아인 부대와 합류하여 사르디스로 진군했고, 이로 인해 사르디스 포위전 (기원전 498년)이 벌어졌다.[23]

사르디스 포위전 (기원전 498년) 이후, 그리스인들은 사르디스를 불태웠다.



3. 5. 2. 사르디스 포위전 (기원전 498년)

기원전 6세기아테네의 특사를 받은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키라고 조언했다.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테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41]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은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소스로 태워 보냈고, 그곳에서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하여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이후 이오니아 반란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낙소스 포위 실패로 자신의 지위가 박탈되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확신한 아리스타고라스의 선동에 따른 것이었다.[20] 밀레투스의 참주였지만 다리우스가 이오니아의 힘을 두려워하여 수사로 소환된 히스티아이오스는 반란이 일어나면 해안으로 다시 보내질 것이라고 믿고 이를 지지했다.[21][20] 히스티아이오스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반란을 암시하는 비밀 메시지를 보낸 후, 이오니아 반란이 시작되었다.[20]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시키려 시도했고, 동맹을 찾기 위해 그리스 본토를 방문하여,[22]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설득하여 배와 병력을 제공받는 데 성공했다.[23]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배는 아테네 군대를 이오니아 도시 에페소스로 수송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오니아인 부대와 합류하여 사르디스로 진군했고, 이로 인해 사르디스 포위전 (기원전 498년)이 벌어졌다.[23] 사르디스는 쉽게 함락되었지만, 아르타페르네스와 그의 군대가 지키고 있던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24] 비록 그리스인들이 요새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도시를 약탈하고 사르디스를 불태웠다. 군대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을 보고 에페소스로 퇴각했지만 그곳에서 패배했다.[25][26]

3. 5. 3. 반란 진압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특사를 받은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인에게 아테네의 폭군 히피아스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고, 페르시아는 히피아스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아테네를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남기를 원했다.[41] 이 사건 직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이오니아의 원군 요청에 응했으며, 군대를 파병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함선은 아테네 부대를 이오니아의 에페소스로 태워 보냈다. 그곳에서 그 부대는 이오니아의 병력과 합세해서 사르디스로 진격했다. 이후 곧 이오니아 반란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낙소스 포위 실패로 자신의 지위가 박탈되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확신한 아리스타고라스의 선동에 따른 것이었다.[20] 밀레투스의 참주였지만 다리우스가 이오니아의 힘을 두려워하여 수사로 소환된 히스티아이오스는 반란이 일어나면 해안으로 다시 보내질 것이라고 믿고 이를 지지했다.[21][20] 히스티아이오스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반란을 암시하는 비밀 메시지를 보낸 후, 이오니아 반란이 시작되었다.[20]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시키려 시도했고, 동맹을 찾기 위해 그리스 본토를 방문했다.[22] 그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설득하여 배와 병력을 제공받는 데 성공했다.[23]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배는 아테네 군대를 이오니아 도시 에페소스로 수송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오니아인 부대와 합류하여 사르디스로 진군했고, 이로 인해 사르디스 포위전 (기원전 498년)이 벌어졌다.[23] 사르디스는 쉽게 함락되었지만, 아르타페르네스와 그의 군대가 지키고 있던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24] 비록 그리스인들이 요새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들은 도시를 약탈하고 사르디스를 불태웠다. 군대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을 보고 에페소스로 퇴각했지만 그곳에서 패배했다.[25][26] 아테네인들은 이오니아와의 동맹을 끝내고 더 이상의 지원을 거부했다. 반란은 비잔티움, 카리아, 카무스, 키프로스까지 확산되었다.[26][27]

아르타페르네스와 오타네스는 이오니아와 아나톨리아 영토를 되찾는 임무를 맡았고, 클라조메나이와 클림을 탈환했다. [28] 반란을 일으킨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페르시아는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하에 밀레투스를 포위했다. 결정적인 라데 해전은 기원전 494년, 밀레투스 항구 근처의 라데 섬 근처에서 벌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그리스 함대는 사모스와 레스보스의 배들이 후퇴하기 전까지는 승리하는 듯했다.[29] 갑작스러운 배신은 전투의 흐름을 바꾸었고, 나머지 그리스 함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밀레투스는 그 직후 항복했고, 이오니아 반란은 사실상 종식되었다.[30]

3. 5. 4. 히스티아이오스의 처형

히스티아이오스이오니아 반란을 선동한 인물로, 다리우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설득하여 수사 감옥에서 풀려나 사르디스로 보내졌다.[13] 히스티아이오스가 사르디스에 도착하자 아르타페르네스는 그에게 이오니아인들이 왜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지 물었고, 히스티아이오스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르타페르네스는 진실을 알고 있었고, "히스티아이오스, 내가 이 일의 진실을 말해주겠소. 당신이 이 신발을 만들었고, 아리스타고라스가 그것을 신었소."라고 말했다.[31]

이에 히스티아이오스는 겁을 먹고 키오스로 도망쳐 밀레투스로 돌아가려 했지만 밀레투스인들은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다시 키오스로 돌아가야 했다.[32] 이후 레스보스로 가서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삼단 노선 8척을 받아 비잔티움으로 항해했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33]

히스티아이오스는 키오스로 도망쳤을 때, 이전에 반란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사르디스에 있는 페르시아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전령은 이 편지를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전달했고, 아르타페르네스는 그 전령에게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고 답장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들이 발각되자 아르타페르네스는 그들을 처형했다.[34]

히스티아이오스는 밀레투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키오스로 항해하여 강제로 들어갔다.[35] 이후 타소스에 대항하기 위해 이오니아인과 아나톨리아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모았지만, 페르시아군이 나머지 이오니아를 공격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레스보스로 도망쳤다. 그의 군대는 굶주렸고, 그는 여러 섬으로 식량 징발 원정을 이끌어야 했는데, 이때 페르시아 장군 하르파구스에게 기원전 493년에 붙잡혔다.[36] 그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끌려갔는데, 아르타페르네스는 다리우스가 그를 사면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에 그를 말뚝에 꽂아 처형하고 그의 머리를 다리우스에게 보냈다. 다리우스는 여전히 히스티아이오스가 반역자라고 믿지 않았고, 그의 머리를 명예롭게 장례했다.[37]

3. 6. 반란 이후의 조치

헤카타이오스와의 대화 이후,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서로 법을 따르고 약탈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영토를 파라상으로 측량하여 토지 대장을 재편성하고 그에 따라 공물을 평가했다.[39] 이러한 변화를 확립한 후 아르타페르네스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는 아르타페르네스의 사트라피를 인수하여 참주를 권력에 복귀시키려는 결정을 뒤집고, 지역 통치를 민주주의에 넘겼다.[4] 기원전 490년, 그의 아들 아르타페르네스는 다티스와 함께 다리우스가 이오니아 반란에 대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처벌하기 위해 보낸 원정을 지휘했다.[40]

3. 6. 1. 분쟁 중재와 안정 확립

헤카타이오스는 이오니아인들의 대사로 파견되어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왜 그들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인들이 패배 후 앙심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된다고 대답했고, 헤카타이오스는 "고통스러운 대우가 불신을 낳는다면, 친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분명히 우리 도시들이 페르시아인들에게 호의를 갖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38] 이 이야기가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일지라도, 페르시아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4]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서로 법을 따르고 서로를 약탈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영토를 파라상으로 측량하여 토지 대장을 재편성하고 그에 따라 공물을 평가했다.[39] 이러한 개혁을 통해 도시 간의 논쟁을 최소화하고 지속적인 안정을 확립했다.[13] 이러한 새로운 개혁은 또한 페르시아인들이 이오니아의 차이점을 중재하는 표준을 설정했다.[4]

3. 6. 2. 공정한 조세 제도 확립

헤카타이오스는 이오니아인들의 대사로 파견되어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왜 그들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인들이 패배 후 앙심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된다고 대답했고, 헤카타이오스는 "고통스러운 대우가 불신을 낳는다면, 친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분명히 우리 도시들이 페르시아인들에게 호의를 갖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38] 이 이야기가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일지라도, 페르시아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4]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서로 법을 따르고 서로를 약탈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영토를 파라상으로 측량하여 토지 대장을 재편성하고 그에 따라 공물을 평가했다.[39] 이러한 개혁을 통해 도시 간의 논쟁을 최소화하고 지속적인 안정을 확립했다.[13] 이러한 새로운 개혁은 또한 페르시아인들이 이오니아의 차이점을 중재하는 표준을 설정했다.[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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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웹사이트 Herodotus, The Histories, Book 6, chapter 30 https://www.perseus.[...] 2024-05-24
[38] 웹사이트 Diodorus Siculus, Library, Fragments of Book 10, Chapter 25, section 4 https://www.perseus.[...] 2024-06-09
[39] 웹사이트 Herodotus, The Histories, Book 6, chapter 42 https://www.perseus.[...] 2024-05-24
[40] 간행물 Artaphernes
[41] 서적 Ancient Persia: A Concise History of the Achaemenid Empire, 550–330 BCE https://books.google[...]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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