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르투르 니키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르투르 니키슈는 1855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지휘자이다. 빈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빈 궁정 오페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으며,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지휘자를 거쳐 보스턴 교향악단, 부다페스트 왕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895년부터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겸임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는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다졌으며, 베토벤 교향곡 5번 등 최초의 관현악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1922년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지휘 스타일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 많은 지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체코계 헝가리인 - 요세프 도브로프스키
    요세프 도브로프스키는 헝가리 왕국 출신의 체코 문헌학자, 역사학자, 가톨릭 사제로, 체코어와 슬라브어 연구를 통해 체코 민족 부흥 운동에 기여했으며 특히 고대 교회 슬라브어에 대한 연구로 체코 슬라브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 체코계 헝가리인 - 아서 쾨슬러
    아서 쾨슬러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소설 《한낮의 어둠》으로 유명하며 공산주의, 반공산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관여했고, 말년에 파킨슨병과 백혈병으로 고통받다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 죄르모숀쇼프론주 출신 - 아데르 야노시
    아데르 야노시는 1959년 5월 9일 태어난 헝가리의 정치인으로, 2012년부터 2022년까지 헝가리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피데스-헝가리 시민 연합 결성에 참여,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냈고 유럽 의회 의원을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환경 보호 노력과 논란이 된 법안 서명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죄르모숀쇼프론주 출신 - 촐라니 실베스테르
    헝가리 체조 선수이자 코치였던 촐라니 실베스테르는 올림픽 안마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고 선수 은퇴 후 아이슬란드에서 코치로 활동했으나,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 헝가리의 지휘자 - 코다이 졸탄
    코다이 졸탄은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민속 음악학자, 음악 교육자로, 바르토크 벨라와 함께 헝가리 민요를 연구하여 민족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 민속 음악 요소와 서유럽 음악 전통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과 혁신적인 음악 교육 방법인 '코다이 메소드'로 세계 음악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헝가리의 지휘자 - 게오르그 솔티
    헝가리 출신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는 바르토크와 코다이에게 사사 후 헝가리 국립 오페라에서 데뷔, 뮌헨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 음악감독을 거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정상급으로 발전시켰고, 데카 레코드와 협력하여 250개가 넘는 음반을 제작했으며, '월드 오케스트라 포어 피스'를 창설하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아르투르 니키슈
기본 정보
니콜라 페르샤이트의 아르투르 니키슈 초상화
아르투르 니키슈 서명
본명Arthur Nikisch
출생1855년 10월 12일
사망1922년 1월 23일
출생지모션센트미클로시 (헝가리 왕국)
사망지독일국 라이프치히
국적헝가리
직업
직업지휘자
악기바이올린
피아노
음악 스타일
장르클래식 음악
레이블도이체 그라모폰
교육
학교빈 음악 아카데미
영향
관련 활동
기타
독일어 이름Arthur Nikisch
헝가리어 이름Nikisch Artúr

2. 생애

니키슈의 초상화 (1901년경)


아르투르 니키슈는 1855년 헝가리의 모손센트미클로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866년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 피아노, 작곡을 공부했으며, 오토 데소프, 요한 헤르베크,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 등에게 지휘를 배웠다. 1873년 음악원을 졸업했다.

1874년 빈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1878년 라이프치히로 옮겨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제2지휘자로 부임했고, 1879년에는 수석 지휘자로 승진했다.[2] 이 시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도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1884년 이 악단과 함께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을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3]

1885년 배우 겸 가수 아말리 호이스너와 결혼했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 보스턴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고, 이후 부다페스트 왕립 오페라 음악 감독을 거쳐 189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카펠마이스터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동시에 부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두 직책을 유지했다.[4][5]

1904년부터는 피아니스트로서 음반 녹음을 시작했으며, 주로 피아노 소품이나 성악가 엘레나 게르하르트의 가곡 반주를 녹음했다. 1912년에는 런던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도 취임하여 같은 해 악단을 이끌고 첫 미국 순회 연주를 가졌다.[7] 1913년에는 런던 교향악단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첫 관현악 녹음을 남겼는데, 특히 베를린 필과 녹음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은 최초의 교향곡 전곡 녹음으로 기록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에서 적성국민으로 분류되어 런던 교향악단 직책에서 물러났고, 전쟁 중에는 주로 독일 내에서 활동했다. 종전 후에도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의 활동을 이어갔으나, 1920년대 초반 건강이 악화되어 1922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 준비 중 타계했다. 유해는 라이프치히에 안장되었고, 시 당국은 니키슈 광장을 조성하여 그를 기렸다.

니키슈는 한스 폰 뷜로와 함께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브루크너, 차이콥스키 등 동유럽 및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해 레퍼토리를 확장했으며, 철저한 악보 분석과 절제된 지휘 동작 등 현대 지휘자들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당대 지휘자 중 드물게 녹음 활동에 적극적이어서, 녹음을 통해 연주를 접할 수 있는 초창기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1. 유년 시절 (1855-1866)

아르투르 아우구스티누스 아달베르투스 니키슈(Arthur Augustinus Adalbertus Nikischde)는 1855년 헝가리의 모손센트미클로시에서 헝가리인 아버지와 모라비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니키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여겨졌으며, 여덟 살 때 공개적인 피아노 연주를 하였다.[1] 1866년 11세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피아노,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2. 2. 빈 음악원 시절 (1866-1873)

1866년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수업 중 지휘에도 관심을 보여 작곡가 펠릭스 오토 데소프(Felix Otto Dessoff), 지휘자 요한 폰 헤르벡(Johann von Herbeck),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Joseph Hellmesberger, Jr.) 등에게 배웠다. 음악원에서 작곡,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1873년 음악원을 졸업했다.

빈 음악원에서 니키슈에게 작곡을 가르친 펠릭스 오토 데소프(Felix Otto Dessoff).

2. 3. 바이올리니스트 및 초기 지휘자 시절 (1874-1878)

1874년 빈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입단했고, 동시에 악단원들이 자주 결성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도 활동했다.[1] 1876년에는 초연 시즌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도 연주했다.[1]

1878년 그는 주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여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부지휘자(제2지휘자)가 되었다.[2] 이와 동시에 오페라 공연 때 반주 역할로 참여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도 지휘하기 시작했다.

2. 4. 라이프치히 시절 (1878-1889)

1878년 빈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다가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여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제2지휘자로 부임했다. 동시에 오페라 공연 시 반주를 담당하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도 지휘하기 시작했다. 1879년에는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로 승진했다.[2] 1884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과 함께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을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3]

1885년 7월 1일에는 배우 겸 가수였던 아말리 호이스너(Amélie Heussner, 1862~1938)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 전 해까지 카셀 궁정 극장에서 활동했었다. 니키슈는 1889년까지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했으며, 같은 해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초청받아 미국으로 갔다.

2. 5. 보스턴 교향악단 시절 (1889-1893)

1889년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여 1893년까지 재직했다.

2. 6. 헝가리 국립 오페라 시절 (1893-1895)

보스턴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임기를 마친 후, 니키슈는 1893년부터 1895년까지 부다페스트 왕립 오페라의 감독을 역임했다.[4][5] 1895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카펠마이스터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동시에 부임했다.

2. 7. 전성기: 라이프치히와 베를린 (1895-1922)

1901년 아르투르 니키슈


1895년 니키슈는 칼 라이네케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고, 같은 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도 부임하여[4][5] 1922년 사망할 때까지 두 직책을 겸임했다. 이 시기 니키슈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에서도 인기 있는 초청 지휘자였으며,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하기도 했다. 1902년부터는 라이프치히 음악원 원장을 맡아 지휘 수업을 가르쳤다.

니키슈 시대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제2의 전성기"로 평가받지만, 취임 초기 베를린에서는 인지도가 낮아 어려움을 겪었다. 1895년 10월 14일 베를린 데뷔 연주회는 4일 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데뷔 연주회만큼 성공적이지 못했고, 무료표를 배포했음에도 객석의 절반 정도만 채워졌다. 또한 1897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주요 관현악 작품인 돈 주앙,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영웅의 생애, 알프스 교향곡 등을 연주했을 때도 홀은 거의 비어 있었으며, 비평가들은 니키슈를 "허세 부리는 사람",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람" 등으로 평가하고 베토벤 해석에 대해서는 수준 이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니키슈는 점차 명성을 얻어 1897년 독일, 스위스, 프랑스 순회 연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파리에서는 수천 명의 관객이 몰리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 연주회에서는 며칠 전 발생한 바자르 드 라 샤리테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곡목을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으로 변경하고, 제2악장 장송 행진곡 연주 시 단원들을 일어서게 한 채 연주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해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베를린에서도 니키슈와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입석까지 매진되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1898년에는 "유리 지붕의 홀"이 건설되었고, 이듬해에는 1036석 규모의 "베토벤 홀" 건설 부지가 확보되었다. 이후 1899년, 1901년, 1904년에도 대규모 순회 연주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니키슈 시대의 베를린 필하모닉에는 마티아 바티스티니, 테레사 카레뇨, 프리츠 크라이슬러, 엘레나 게르하르트, 파블로 카잘스, 하인리히 슐루스누스, 야샤 하이페츠 등 당대 최고의 독주자들이 협연했다. 또한 악단 내에는 콘서트마스터 바츨라프 탈리히, 루이스 퍼싱거, 첼리스트 조세프 말킨 등이 니키슈 밑에서 활동했다. 1903년 12월 7일에는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한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904년부터는 피아니스트로서 음반 취입을 시작했으며, 주로 피아노 소품 연주나 성악가 엘레나 게르하르트의 가곡 반주 녹음을 남겼다.

1912년에는 런던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도 취임했으며, 같은 해 4월 악단을 이끌고 유럽 오케스트라로서는 최초로 미국 연주 여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7] 1913년 11월 10일에는 런던 교향악단 및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자신의 첫 관현악 녹음들을 영국 그라모폰에 취입했다. 특히 베를린 필과 녹음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은 녹음 기술의 한계로 일부 악기 편성이 축소되거나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보에 지시된 편성으로 전곡이 녹음된 최초의 교향곡으로 기록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니키슈는 영국에서 적성국민으로 분류되어 런던 교향악단의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고, 전쟁 기간 중에는 주로 독일 내에서만 활동했다. 중립국이었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연주가 가능했지만, 1917년 예정되었던 오슬로 연주회는 반독일 운동으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니키슈 자신은 평소 세계 시민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쟁 중에도 "국제주의적인 예술가"로서 "예술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상호 이해와 우정의 다리를 놓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종전 후에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1921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에서 여러 차례 지휘했으며, 이 중 일부 공연에서는 당시 22세였던 아들 미티아 니키슈가 피아노 협연자로 나서기도 했다.[6] 하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고, 1922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를 준비하던 중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라이프치히에 안장되었으며, 시 당국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니키슈 광장(Nikischplatz)을 조성했다.

3. 지휘 스타일 및 음악성

로베르트 슈테를(Robert Sterl)이 그린 니키슈의 지휘 모습 (1910년)


니키슈는 한스 폰 뷔로와 더불어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닦은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지휘는 절제된 동작과 카리스마가 특징이었다. 오른손에 든 긴 지휘봉은 주로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끝을 움직였고, 왼손으로는 음악에서 강조해야 할 부분을 표현했다.[1] 연주자들에게는 눈으로 부드러운 신호를 보내 연주하기 어려운 부분을 극복하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1] 프리츠 라이너는 니키슈로부터 "팔을 휘두르지 말고, 신호를 보낼 때는 눈을 사용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회고했다.[1] 니키슈는 때로는 지휘봉이나 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기도 했으며, 이러한 절제와 카리스마는 그의 후임자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악보 없이 암보로 지휘하여 청중과 동료 음악가들을 놀라게 했다.[1]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니키슈의 지휘에 대해 한스 폰 뷔로와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뷔로의 지휘는 몸짓이 과격하고 때로는 시각적 효과를 노렸지만, 니키슈는 조용하고 불필요한 동작을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단호하고 강력하며 자제력이 있었다. 그는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비로운 마법에 몸을 맡기는 듯하며, 오케스트라 전체는 그의 지휘에 완전히 최면술에 걸린 듯 따른다."[1] 반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키슈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의 양손 움직임이 과격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 지휘자 이고리 마르케비치는 현대 오케스트라의 규모 확대로 인해 현대 지휘자들에게는 니키슈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시대보다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테크닉이 요구된다고 언급했다.[1]

니키슈는 이러한 지휘 테크닉을 통해 연주자들로부터 이상적인 소리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연주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니키슈가 원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증언했으며,[1]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는 "니키슈가 레가토를 지시하면 숙련된 연주자라도 스타카토로 연주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였다.[1] 볼트는 또한 니키슈가 "항상 가능한 한 단순한 방법으로 결과를 얻고, 아주 적은 움직임으로 매우 큰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덧붙였다.[1][1] 니키슈 자신은 이러한 '마술' 같은 지휘의 메커니즘에 대해 "어떻게 내 감각을 연주자에게 전달하는지 자주 질문받지만, 나 자신도 모른 채 하고 있다. 어떤 작품을 지휘할 때는 음악의 자극적인 힘에 마음을 빼앗긴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해석하지 않으므로, 나를 움직이는 감정의 강도에 따라 해석은 거의 모든 연주에서 세부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다.[1] 유진 오만디 역시 니키슈가 "똑같은 연주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1] 니키슈는 지휘자가 손목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먼저 바이올린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1]

그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입니다. 교향곡을 아주 훌륭하게 지휘하기 시작해도 그 악장이 끝난 후, 휴지 동안 다음 악장에 대한 기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최고의 연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분위기 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 니키슈는 청중 중 한 명이 옆 친구에게 "마법이 시작되면 알려줘"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1]

리허설에서는 먼저 곡 전체를 연주한 뒤, 주의가 필요한 부분을 골라 반복 연습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세세하게 지시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연주법은 각 연주자에게 맡겼다. 연주 중의 직관을 중시했던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단원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그의 리허설에서 단원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바이올리니스트 시절 함께 연주했던 단원에게 말을 거는 등 친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 니키슈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케스트라가 열심히 일에 매달리면 뛰어난 기량이 길러집니다. 각 단원은 개성과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마치 혀끝에 올려놓고, 단원들의 악기와는 전혀 다른 울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개별 연주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연주하지만, 결국 지휘자의 의도를 따르게 만드는 것이 지휘의 요령이라는 것입니다."[1]

지휘자 프리츠 부쉬는 니키슈의 리허설을 참관하고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의 인사 방식은 매우 매력적이었고, 지휘대에 섰을 때 이미 악단 전체가 흥분하여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어떤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으로 지휘할 때도 타고난 친절함으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감동한 듯이, 노년의 비올라 연주자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쉘체 씨, 당신을 여기서 만나다니! 우리가 리스트 선생님의 지휘 아래, 마그데부르크에서 『산악 교향곡』을 연주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지휘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오케스트라 전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1]

뛰어난 기억력과 이해력 덕분에 니키슈는 리허설에서 처음 보는 곡을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1] 음악 평론가 베르너 에르만은 "그에게 음악은 소리였고, 소리는 무한한 색채와 밝음, 강도와 뉘앙스가 풍부한 울려 퍼지는 현실 세계의 매체였다"고 평가했다. 막스 레거의 신작 리허설 당시, 니키슈가 곡을 모른다고 의심한 레거가 "먼저 마지막 푸가를 연습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 니키슈는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그 곡에는 최종 푸가가 없었다.[1]

음악 해석에 있어서는 음향적 효과를 위해 템포를 유연하게 바꾸거나 현악기의 포르타멘토나 페르마타 등을 활용했으며, 때로는 악보를 수정하거나 작품 내 연주 순서를 변경하기도 했다.[1] 예를 들어,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 제2번』과 『레오노레 서곡 제3번』의 연주 순서를 바꾸어 연주했다.[1] 음악 평론가 베르너 아이어만은 니키슈의 음색에 대해 "그 자신 숙련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탓에, 그의 음색의 기본은 현악기였다. 먼저 현악기의 음색으로 가득 채운 캔버스 위에 다른 악기의 광채가 겹쳐진다"고 분석했다.[1]

니키슈의 지휘 스타일은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어드리안 볼트 경,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헨리 우드 등 수많은 후대 지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8] 라이너는 니키슈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회고했으며,[1] 조지 셀은 니키슈를 "오케스트라의 마법사"라고 불렀다.[1] 헨리 우드는 "그가 지휘하는 모든 음악절을 매우 열심히 경청하는 놀라운 방식을 기억한다... 그는 멜로디를 연습할 때 항상 엄청난 감정을 담아 오케스트라에게 불렀고, 그런 다음 '이제 여러분이 느끼는 대로 연주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들어본 어떤 지휘자도 그의 감정과 극적인 강렬함을 능가한 적이 없다"고 썼다.[8] 특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슈를 자신의 유일한 모델로 여겼으며, 니키슈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초기 경력을 지원하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예언했다.[9][10] 니키슈가 지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가 손동작 대신 눈을 사용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니키슈는 악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지휘 동작(비트),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완전한 음향을 이끌어내고 음악의 깊이를 탐구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통해 현대 지휘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기억된다.

4. 영향 및 유산

니키슈는 악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단순한 비트,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완전한 음향을 이끌어내고 음악의 깊이를 탐구하게 한 카리스마를 통해 현대 지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절제된 지휘 스타일과 카리스마는 후대 지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슈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항상 니키슈를 자신의 유일한 모델로 여겼다.[9] 니키슈는 푸르트벵글러의 초기 경력을 지원했고 그가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10]

푸르트벵글러 외에도 많은 지휘자들이 니키슈를 높이 평가했다.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에이드리언 볼트 경, 프리츠 라이너, 에르빈 니이레지하지, 그리고 니키슈를 "오케스트라의 마법사"라고 불렀던 조지 셀 등이 그들이다. 라이너는 "니키슈가 지휘할 때 절대 팔을 휘두르지 말고 눈으로 신호를 주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고 회고했다. 헨리 우드는 니키슈의 지휘에 대해 "멜로디를 연습할 때 항상 엄청난 감정을 담아 오케스트라에게 불렀고, '이제 여러분이 느끼는 대로 연주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들어본 어떤 지휘자도 그의 감정과 극적인 강렬함을 능가한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8]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역시 니키슈가 지휘하는 영상을 보고 손동작 대신 눈을 사용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니키슈는 당대 지휘자들 중 드물게 녹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13년 11월 10일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완곡을 녹음했는데, 이는 해당 곡의 가장 초기 녹음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녹음은 나중에 도이치 그라모폰 등 여러 레이블에서 LP와 CD로 재발매되었다. 또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도 여러 초기 녹음을 남겼으며, 이 녹음들에서는 20세기 초 연주의 특징인 포르타멘토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음악원 원장(1902년~)으로서 지휘 수업을 통해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니키슈 상"이 제정되었다. 그에게 배운 주요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비고
알베르트 코츠
에일머 부스트
페저 그람
스테반 프리스티치
프리코 카펜다
오토 루트비히
솔로몬 로소프스키
발레리안 비어디아예프
마르틴 카를 하세
알렉산드르 볼리소비치 체신
프리츠 슈타인
샨돌 옘니츠
루이스 퍼싱거나중에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마스터로 초빙됨.
에드빈 카르스테니우스
첼레스티노 피아조
에밀 쿠퍼
조르제 조르제스쿠
에르네스트 안세르메
존 포울스
하인츠 티티엔
에이드리언 볼트
바츨라프 탈리히니키슈 시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마스터, 후에 지휘자로 전향하여 사사함.



니키슈는 지휘 지도 외에도 가수들의 재능 발굴에도 힘썼다.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알프레트 판 바리에게 가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했으며, 엘레나 게르하르트의 재능을 발견하고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해주거나 함께 녹음을 하기도 했다.

1922년 니키슈가 사망하자 라이프치히 시 당국은 그가 살았던 광장을 니키슈 광장(Nikischplatz)으로 개명하여 그를 기렸다. 1971년에는 라이프치히시에서 젊은 지휘자들을 위한 아르투르 니키슈 상(Arthur Nikisch Prize)을 제정했다.

5. 주요 녹음 목록

(최초의 교향곡 전곡 녹음)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13년 11월 20일모차르트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런던 교향악단1914년 6월 21일베버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런던 교향악단1914년 6월 21일베를리오즈서곡 '로마의 사육제'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20년리스트헝가리 광시곡 제1번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20년


6. 에피소드

니키슈는 절제된 지휘 동작 외에도 특유의 카리스마로 유명했고, 심지어 지휘봉이나 손을 전혀 쓰지 않고 눈으로만 지시를 내려도 음악이 끊김없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절제와 카리스마는 그의 후임으로 게반트하우스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3년 11월 20일에 녹음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은 훗날 LP와 CD로 복각되었으며, 특히 CD의 경우 도이체 그라모폰EMI에서 각각 베토벤 전집의 역사적 녹음 편과 베를린 필 창단 120주년 기념 세트에 모두 수록되었다. 이 녹음이 베를린 필의 최초 녹음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약 두 달 전에 알프레드 헤르츠가 자신의 편곡으로 만든 바그너파르지팔 모음곡을 지휘해 취입한 것이 최초이다.

니키슈의 아들이었던 미티아 니키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가 되었고, 클래식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지만 주로 재즈 밴드의 지휘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나치스가 집권하면서 재즈가 퇴폐 음악의 한 종류로 공공연한 비난과 연주 방해를 받게 되자 밴드를 해산해야 했고, 그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베네치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조

[1] 백과사전 Nikisch, Arthur
[2] 서적 A History of Orchestral Conducting Pendragon Press
[3] 뉴스 Widmanns Partita uraufgeführt http://www.lvz.de/Na[...] 2018-03-09
[4] 웹사이트 History https://www.gewandha[...] 2022-06-18
[5] 웹사이트 The era of Arthur Nikish https://www.berliner[...] 2022-06-18
[6] 서적 El Teatro Colón – Cincuenta Años de Gloria Buenos Aires
[7] 블로그 The diary of the timpanist, Charles Turner https://lsoontour.wo[...]
[8] 서적 My Life of Music Gollancz
[9] 서적 Pour Wilhelm Paris
[10] 서적 Furtwängler
[11] 학술지 The Musical Trinity of Leipsic https://books.google[...] 1910-02-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