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카호리 모토유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카호리 모토유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시즈오카현 출신으로,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최우수 구원 투수 5회,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를 기록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5차례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하며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오릭스 버펄로스, SK 와이번스,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니치 드래건스 등에서 투수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5년에는 니가타 알비렉스 BC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24년부터는 쿠후 하야테 벤처스 시즈오카의 초대 감독을 맡을 예정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 나카무라 노리히로
    나카무라 노리히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 입단하여 타자로 전향, 여러 팀에서 활약하며 홈런왕, 타점왕 등을 수상했고, 메이저 리그에도 도전했으며,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NPB/MLB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한 후 은퇴하여 야구 교실을 운영하고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 마이크 존슨 (야구 선수)
    마이크 존슨은 캐나다 출신의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다양한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2008년 대만 CPBL에서 다승왕과 MVP를 수상했고, 캐나다 야구 국가대표팀으로도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한다.
  • 시즈오카현 출신 야구 선수 - 다도코로 젠지로
    다도코로 젠지로는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 시절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전 경기 완봉승으로 우승을 이끌었으며,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투수로 활동, 은퇴 후에는 코치, 야구 연맹 임원, 유소년 야구팀 대표를 역임했다.
  • 시즈오카현 출신 야구 선수 - 다케야스 다이치
    다케야스 다이치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한신 타이거스와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활동했으며, 2017년 1군 데뷔 후 첫 승을 거두고 2019년에는 완봉승을 기록했으며, 2024년부터는 구마모토 골든 락스의 코치로 활동한다.
  •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 노모 히데오
    노모 히데오는 독특한 투구폼으로 유명하며 NPB와 MLB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일본의 前 프로 야구 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로,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 리그 진출 붐을 일으킨 선구자이다.
  •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 백인천
    백인천은 중화민국 출신의 대한민국 야구 선수 및 감독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하며, KBO 리그에서 1982년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아카호리 모토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카호리 모토유키
오릭스 코치 시절의 아카호리 모토유키 (2012년 9월 30일, 세이부 돔)
이름아카호리 모토유키 (赤堀 元之)
출생지일본,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
생년월일1970년 4월 7일
신장180cm
체중89kg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프로 입단 년도1988년
드래프트 순위4순위
첫 출장1989년 5월 3일
최종 출장2004년 9월 27일
선수 경력긴테쓰 버펄로스/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1989 – 2004)
코치/감독 경력
코치 경력오릭스 버펄로스 (2005 – 2009, 2011 – 2014)
SK 와이번스 (2010)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17 – 2018)
주니치 드래건스 (2019 – 2021)
아와지시마 워리어스 (2023)
쿠후 하야테 벤처스 시즈오카 (2024 – )
감독 경력니가타 알비렉스 BC (2015 – 2016)
선수 정보
쿠후 하야테 벤처스 시즈오카
등번호19
역할투구 코치/투수
타격우타
투구우투
데뷔일1989년 5월 3일
데뷔팀긴테쓰 버펄로스
최종일2004년 9월 24일
최종팀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리그NPB
승패58–45
평균자책점2.88
탈삼진590
세이브139

2. 프로 입단 전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55] 후지에다 시립 아오지마 중학교에서는 시즈오카 현 대회에서 네 경기에 등판해 3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우승을 차지했다.[56] 시즈오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경식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 동급생으로는 가지야마 요시히코, 아마노 요시아키 등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하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간사이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5회부터 구원 등판했지만 6개의 피안타와 4실점을 내주며 팀은 4대 6으로 패했다.[57] 2학년 때는 구속이 124km에 머물렀고 커브슬러브를 중심으로 볼을 배합하는 연투파였다.[55]

가을에는 야수 전향도 검토하면서 내야수포수로 뛰기도 했는데, 겨울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자 근육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3학년 여름에는 구속이 140km까지 빨라졌다.[55] 비디오로 본 기타벳푸 마나부의 투구 폼도 참고가 되었다고 한다.[55]

여름에 열린 시즈오카 현 대회는 첫 경기에서 시즈오카니시 고등학교에 4대 5로 패했지만, 1학년 때부터 아카호리의 팔 스윙을 면밀히 관찰하여 높이 평가했던 긴테쓰 버펄로스 스카우트 오다 요시토 덕분에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긴테쓰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3000만, 400만였다(금액은 모두 추정).[58]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55] 후지에다 시립 아오지마 중학교 시절 시즈오카 현 대회에서 37이닝 무실점으로 우승을 이끌었다.[56] 시즈오카 고등학교 2학년 때 하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나, 간사이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4실점하며 패했다.[57]

2학년 때는 구속이 124km 정도였으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3학년 여름에는 140km까지 구속을 끌어올렸다.[55] 기타벳푸 마나부의 투구 폼을 참고하기도 했다.[55]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긴테쓰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계약금은 3000만, 연봉은 400만이었다.[58]

긴테쓰 입단 후, 주로 구원 투수로 활약하면서 여러 차례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고, 한때 선발 투수로 전향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다시 구원 투수로 복귀했다.

3. 1. 구원 투수 시절 (1989년 ~ 1998년)

아카호리 모토유키는 입단 초기에는 1군과 2군을 오가며 경험을 쌓았다. 1990년부터 1군에 정착하여 중간 계투로 활약했다.[60] 1991년에는 요시이 마사토와 함께 마무리 투수를 맡아[61] 9세이브를 기록했다.[62]

1992년, 부상으로 이탈한 요시이를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최우수 평균 자책점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했다. 당시 평균 자책점은 1.80으로, 스즈키 게이시가 기록했던 팀 기록 2.02를 경신했다.[65] 1993년부터 1994년까지 3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세이부와의 개막전에서 3점을 앞서가고 있는 9회에 이토 쓰토무에게 사상 처음으로 개막전에서의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62] 그러나 이후 21경기 연속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67]

1995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69][70] 199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26세 55일)로 100세이브를 달성하고,[72] 통산 4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7년 오사카 돔 개장 첫 세이브를 기록하고, 2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8년에도 부상으로 인해 늦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롱릴리프와 선발 투수로도 활약했다.[73]

3. 2. 선발 전향 시도와 부상 (1999년 ~ 2004년)

1999년, 스프링 캠프와 시범 경기에서 개막전 투수를 맡는 등 순조로운 모습을 보이며 선발 투수로 전향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경마에 빗대어 "10승을 못하면 천황상마권은 사지 않는다"라는 목표를 세웠다.[57] 4월에는 개막 이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두 경기에서 2승을 올렸다.[73] 그러나 개막 전후부터 세로 슬라이더를 던질 때 통증을 느꼈고, 포크볼을 던지면서 팔꿈치부터 어깨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통증이 발생하여 진찰을 받았다. 4월 21일, 오른쪽 팔꿈치 관절주위염과 오른쪽 발목 염좌를 이유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75] 염증이 가라앉은 후 MRI 정밀검사를 통해 6월 8일에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팀 동료 사노 시게키가 인대 재건 수술 후 복귀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알고 고민했지만, 빠른 회복을 위해 수술을 결심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대가 끊어진 사카이 히로키와 함께 7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75]

수술 후에는 빨리 던지고 싶다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플로리다주에서 재활 훈련에 전념했다.[66] 2000년 8월 9일, 2군 서패스전에서 1년 4개월 만에 실전에 등판했지만,[76] 1군에서는 3경기 등판에 그쳤다. 시즌 후에는 연봉 1억 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77]

2001년 4월 8일, 오릭스전에 선발로 나서 723일 만에 승리 투수[66]가 되었지만, 5월 18일 지바 롯데전에서 패전 투수가 된 후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다시 장기간 이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팔꿈치 통증은 사라졌지만, 초조함으로 인해 오른쪽 어깨에 부담이 가해져 등판하지 못했고,[66] 이후 오른쪽 어깨 통증은 현역 은퇴까지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1989년에 이어 2001년 긴테쓰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일본 시리즈에 등판하지 못했고, 일본 시리즈에 등판하지 못한 채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웨스턴 리그에서 2군의 전기 시즌 우승 헹가래 투수가 되었지만, 그 해를 마지막으로 해체되는 긴테쓰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9월 24일 오사카 돔 최종전에서는 9회 2사 상황에 아카호리는 벤치에서 팀 동료들이 만든 하나미치를 통해 등판하여 노다 고스케를 중견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관중석에서 울려 퍼진 큰 환호성에 부응했다.[59] 당초에는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트라이 아웃을 위한 조정을 하고 있었지만, 차기 감독이 되는 오기 아키라로부터 코치직을 제안받았고, 어깨 상태가 좋지 않은 점도 있어 결국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78]

4. 은퇴 후

2004년 웨스턴 리그에서 2군의 전기 시즌 우승 헹가래 투수가 되었지만, 그 해를 마지막으로 해체되는 긴테쓰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59] 9월 24일 오사카 돔 최종전에서 9회 2사 상황에 벤치에서 팀 동료들이 만든 하나미치를 통해 등판, 노다 고스케를 중견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관중석의 대환성에 부응했다.[59] 당초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트라이 아웃을 향한 조정을 하고 있었으나, 차기 감독 오기 아키라의 코치직 제안과 어깨 상태 악화로 인해 은퇴를 결심했다.[78]

5. 플레이 스타일

구원 투수 시절에는 바깥쪽 낮은 곳으로 모이는 150 km/h에 가까운 속구를 중심으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다.[62][81] 포크볼을 던지지 않는 마무리 투수로서 활약했다. 이 두 가지 구종을 같은 곳에 던지면서 구분하는 뛰어난 제구력을 가졌고, 더욱이 슬라이더는 각각 가로와 세로로 변화하는 두 종류를 적절하게 사용해 직구와 같은 수준의 구속이 있는 슈토도 던졌다.[60][62] 슬라이더는 리그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마무리의 1이닝이면 이렇게 힘으로 누르는 투구가 매우 유효했다고 한다.[89] 마토야마 데쓰야는 현역 시절 중에서 제일 인상에 남는 투수로서 아카호리를 꼽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치로에게는 궁합이 잘 맞아 1994년부터 4년 간 25타수 4안타(타율 .160)라는 호투를 보였다.[83] 마무리 투수는 1점 차라면 긴장감도 있지만, 2점 차라면 1점 빼앗겨도 문제없고 동점에서 연장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식으로 냉정하게 던졌다고 한다.[81] 한편으로 다른 선수가 이기는 경기를 만든 상황에서 나오기 때문에 움직임이나 신뢰에 부응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고 한다.[62] 마무리 투수 시절에는 전개에 따라 6회말이나 7회초에 몸을 풀고 그 내용은 직구 8구, 커브 2구, 슬라이더 3구, 몸쪽 직구를 3구, 슈토를 2구, 바깥쪽 직구 2구 등 도합 20구를 반드시 정해놓고 했으며, 등판 직전에 직구 2구와 슬라이더 1구를 던졌다.[84] 아카호리가 기록한 139세이브는 긴테쓰의 구단 기록이다.[85] 과도한 등판에 의한 부상을 피하기 위해 중간 계투 시절에는 다치바나 류지가 긴테쓰에서 활약했을 때 작성한 트레이닝 메뉴를 실행에 옮겼다.[86]

선발 전향을 강하게 원했던 이유로는 매일 어깨를 만드는 부담이 컸다는 점,[87] 역할이나 스타일을 바꿔 동기부여를 높이는 것,[73] 타자와의 밀고 당기기를 즐기고 싶었다는 점[88]을 꼽고 있다. 선발 전향 시에는 마찬가지로 구원 투수에서 선발이 된 요시이 마사토에게 조정법 등을 상의했고, 노모 히데오에게는 안타를 맞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경기를 망치지 말아달라는 조언을 받았다.[89] 또 전향 시에 포크볼을 습득했던 요시이를 본받아 커브체인지업 등을 습득하여 구종을 늘리고 완급을 더해 폭넓은 피칭을 하도록 유의하였다.[89]

현역 시절에는 야마시타 가즈히코, 미쓰야마 히데카즈, 후루쿠보 겐지 등 3명이 포수로서 병용되었다. 각각의 특색에 대해서 미쓰야마는 강한 리드, 후루쿠보는 바깥 중심의 정통적인 스타일, 야마시타는 양쪽 모두를 겸비한 임기응변의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66] 각각 배울 점이 있어 모두 던지기 쉬웠다고 한다.[55]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9긴테쓰91000010--.000357.090600210433.862.14
1990211000401--1.00021951.15062401381023172.981.44
1991260000139--.25021853.14331632382023213.541.11
199250211011422--.733499130.09152935882029261.800.92
19934600006626--.50033182.25763631603019141.521.12
19944500009424--.69236994.06652442732020191.820.96
19952810001813--.11123352.05682100497030193.291.48
19964400009421--.69231173.16752543675019172.091.25
199757000010723--.58842897.190544951004042333.051.38
1998244110330--.50029166.17032726310034314.211.46
199922000200--1.0006013.1131802600553.381.58
200031000010--.000409.061701510555.001.44
200198000130--.25022348.26161810271031295.361.62
2002110000110--.5005912.1181420310996.571.78
200310000000------61.021100010119.003.00
200440000000------162.2404003005516.883.00
통산:16년380202205845139--.5633338794.17035629431285903102992542.881.26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는 기록 없음

6. 상세 정보

아카호리 모토유키의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수상



첫 기록



이정표 기록



기타 기록



'''등번호'''

연도등번호
1989년 ~ 1991년40
1992년 ~ 2004년19
2005년 ~ 2009년, 2012년 ~ 2014년87
2010년74
2011년98
2015년 ~ 2016년89
2017년 ~ 2018년83
2019년 ~ 2021년84
2023년 ~19


6. 1. 출신 학교

시즈오카 고등학교[1][2][3][4]

6. 2. 선수 경력

긴테쓰 버펄로스·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1989년 ~ 2004년)

  • 1989년 개막은 2군이었지만 5월 3일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1군 첫 등판[5]하였다. 6월 7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에서 프로 데뷔 첫 선발 등판하였으나 1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14구 만에 강판되었지만, 이 경험을 발판 삼아 훈련을 했다[5]
  • 1990년 올스타전 이후 1군에 정착하여, 슈트를 많이 사용하는 야마시타 가즈히코의 강한 리드도 있어 21경기에 등판해 4승을 올려 구원 투수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남겼다[6]
  • 1991년 개막부터 요시이 마사토와 함께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7]。6월 16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이시게 히로노리의 타구가 맞아서 오른손 등뼈가 골절되었지만, 다치바나 류지 코치와 함께 재활을 하여 9월에 1군에 복귀하여 시즌 9세이브를 올렸다[8]。5월 29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전(니혼 생명 구장)에서는 연장 11회 초에 돈 슐지에게 홈런을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는 퍼시픽 리그DH제를 채택한 이후, 처음으로 투수가 홈런을 맞은 것이었다.
  • 1992년 전년도의 부상 영향도 있어서, 선발과 마무리 중 어느 쪽으로 기용할지 수뇌진이 망설였고, 개막까지 본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9]。결국 요시이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마무리로 등판, 4월에는 7경기에서 1승 4세이브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세이부와 우승 경쟁을 벌인 긴테쓰에서 등판 기회가 늘어나, 처음 출전한 올스타전에서는 3차전에서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우수 선수상을 수상[10]하였다. 시즌 통산 50경기에 등판하여 11승 4패 22세이브의 성적으로 투구 이닝도 100이닝을 넘었고, 10월에는 규정 투구 이닝까지 15이닝, 3실점 이하이면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10월 5일 다이에전에 시즌 첫 선발 등판하여 프로 첫 완봉승을 거두었고, 10월 11일 다이에전에서도 6이닝 3실점으로 막았다. 최종적으로 스즈키 게이지의 팀 기록 2.02를 갱신하는[11]방어율 1.80의 성적으로 최우수 구원 투수에 더해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해의 활약으로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가 되었지만, 아카호리에게는 첫 완봉을 계기로 선발 전향의 마음이 강해졌다고 한다[12]。하지만, 팀 사정상 이후 5시즌 동안 마무리를 맡았다.
  • 1993년 2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 1994년 세이부와의 개막전에서 3점 리드 중 9회에 이토 쓰토무에게 사상 첫 개막전 역전 사요나라 만루 홈런을 맞는 파란만장한 시작을 했다. 이 경기는 전날 스즈키 게이지 감독이 말한 "개막전은 노모와 운명을 함께 한다"라는 말에 응하여 노모가 9회 1사까지 노히트 노런 호투를 펼쳤기 때문에, 1사 1, 2루가 된 상황에서 등판을 통보받아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게다가 다음 경기에서도 스즈키 겐에게 안타를 맞고 집중력을 잃은 상태에서 사사키 마코토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아 패했다。그러나 이후에는 컨디션을 되찾아, 당시 NPB 신기록인 21경기 연속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최대 15개의 빚에서 팀을 받쳐주었다[13]。최종적으로 3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 상을 수상하며, 당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오프에는 4000만 엔 증가한 연봉 1.2억 (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4]
  • 1995년 오른쪽 어깨 통증과 허리 통증으로 여름 전에 1군 등록이 말소되어[15], 7월 31일에는 왼쪽 종아리 통증으로 다시 등록이 말소[16] 되는 등 반복적으로 전열에서 이탈, 28경기에 등판하여 1승 8패 13세이브로 성적이 떨어졌다. 스즈키 게이지가 감독이었던 해까지 3년 동안 팀이 "바닥에 어두운 기간"이었다고 나중에 말했다[17]
  • 1996년 6월 1일 세이부전에서 26세 55일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100세이브를 달성하여, 에가와 츠토무가 기록한 3번을 넘어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통산 4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가 되었다.
  • 1997년 개막전에서 이 해 개장한 오사카 돔 첫 세이브를 기록. 8월 24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8회 초부터 등판하여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프로 야구 사상 3번째 10점 차 역전 경기의 승리 투수가 되었다. 또한 시즌 막바지에는 NPB 타이기록인 더블헤더 2경기에서 세이브를 거두는 활약을 하여,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기록을 갱신하는 5번째 최우수 구원 투수가 되었다.

한편 선발 전향의 소망은 여전히 강했고, 1997년 오프에는 하와이의 윈터 리그에 선발로 참가했다[18]。구단의 요청으로 오쓰카 아키후미가 독립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릴리프를 맡게 되었고, 새해에 퍼시픽 리그 투수 최고액인 1.85억 (추정)으로 긴테쓰에서 처음으로 복수년 계약인 2년 계약을 체결했다[19]

  • 1998년 오른쪽 어깨 부상과 허리 통증으로 1군 등록은 6월 27일로 그 해에는 출전이 늦어졌다。그 사이에 오쓰카가 당시 퍼시픽 리그 세이브 기록을 경신하는 활약을 보여, 1군 복귀 후에는 롱 릴리프를 중심으로 구원을 맡아 시즌 막바지에는 선발로 전향하여 9월 19일 오릭스전에서 자신 두 번째 완봉승을 거두었다。
  • 1999년 구단명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로 개칭된 후, 캠프의 백홍전이나 오픈전에서도 개막 투수를 맡는 등 순조로운 모습을 보였고, 자신의 경마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10승을 못하면 천황상마권은 사지 않겠다"라고 목표를 내걸었다。4월 개막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2경기에서 2승을 거두었다。하지만 개막 전후부터 세로 슬라이더를 던질 때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포크볼을 던져 팔꿈치에서 어깨로 전기가 흐르는 듯한 격통이 느껴져 진찰을 받았으며, 4월 21일 오른쪽 팔꿈치 관절 주위염과 오른쪽 발목 염좌를 이유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20]。염증이 가라앉은 후 MRI로 정밀 검사를 실시하여 6월 8일 오른쪽 팔꿈치 인대 파열이 발견되었다. 동료 사노 시게키가 인대 재건 수술 후 복귀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어 고민했지만, 조기 회복을 위해 수술을 결심하고, 역시 인대가 파열된 사카이 히로키와 함께 7월에 보스턴으로 건너가 재건 수술을 받았다。
  • 2000년 수술 후에는 빨리 던지고 싶다는 조급함을 억누르면서, 플로리다 주에서 재활에 전념했다。8월 9일 웨스턴 리그 서패스전에서 1년 4개월 만에 실전에 등판했다[21]。1군에서는 3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쳤다. 오프에는 연봉 1억 (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22]
  • 2001년 4월 8일 오릭스전에 선발 등판하여 723일 만에 승리[23]를 거두었지만, 5월 18일 롯데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면서 오른쪽 어깨의 위화감으로 다시 장기 이탈을 하게 되었다. 팔꿈치 통증은 해소되었지만 초조함 때문에 오른쪽 어깨에 부담이 갔다고 하며, 이후 오른쪽 어깨 통증이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1989년에 이어 2001년 긴테쓰 리그 우승 당시에도, 일본 시리즈에 등판하지 못했고, 시리즈 미등판 상태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 2004년 웨스턴 리그에서 2군 전기 우승의 헹가래 투수가 되었지만,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9월 24일 오사카 돔 최종전에서는 9회 2사부터 벤치에서 팀 동료들이 만들어 준 꽃길을 통해 등판하여, 노다 고스케를 중비로 처리하여 대환호에 응했다。당초에는 현역 속행 의지를 표명하여 트라이아웃을 위한 조정을 하고 있었지만, 오릭스 감독이 될 아오키 아키라로부터 코치 취임을 제안받았고,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았던 점도 있어서 은퇴를 결정했다[23]

6. 3. 지도자 경력

1999년 스프링 캠프의 홍백전과 시범 경기에서 개막전 투수를 맡는 등 순조로운 모습을 보였고, 자신이 좋아하는 경마에 빗대어 “10승을 할 수 없으면 천황상마권은 사지 않는다”라는 목표를 세웠다.[57] 4월에는 개막 이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두 경기에서 2승을 올렸다.[73] 그러나 개막 전후부터 세로 슬라이더를 던질 때 통증을 느꼈고, 포크볼을 던지면서 팔꿈치부터 어깨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통증이 발생하여 진찰을 받았다. 그 결과 4월 21일 오른쪽 팔꿈치 관절주위염과 오른쪽 발목 염좌를 이유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75] 염증이 가라앉은 후 MRI 정밀검사를 통해 6월 8일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팀 동료 사노 시게키가 인대 재건수술 후 복귀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알고 고민했지만, 빠른 회복을 위해 수술을 결심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대가 끊어진 사카이 히로키와 함께 7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재건수술을 받았다.[75]

수술 후에는 빨리 던지고 싶다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플로리다주에서 재활 훈련에 전념했다.[66] 2000년 8월 9일 2군 서패스전에서 1년 4개월 만에 실전에 등판했지만,[76] 1군에서는 3경기 등판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에는 연봉 1억(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77] 이듬해인 2001년 4월 8일 오릭스전에 선발 등판하여 723일 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66] 5월 18일 지바 롯데전에서 패전 투수가 된 후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다시 장기간 이탈하게 되었다. 팔꿈치 통증은 사라졌지만 초조함으로 인한 오른쪽 어깨 부담이 원인이었다.[66] 이후 오른쪽 어깨 통증은 현역 은퇴 시까지 계속되었다. 1989년과 2001년 긴테쓰의 리그 우승 당시에도 일본 시리즈에 등판하지 못했고, 결국 일본 시리즈 등판 없이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2004년 웨스턴 리그에서 2군의 전기 시즌 우승 헹가래 투수가 되었지만, 그 해를 마지막으로 해체되는 긴테쓰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9월 24일 오사카 돔 최종전에서 9회 2사 상황에 벤치에서 팀 동료들이 만든 하나미치를 통해 등판, 노다 고스케를 중견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관중석의 환호에 답했다.[59] 당초 현역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트라이 아웃을 준비했지만, 차기 감독 오기 아키라의 코치 제안과 좋지 않은 어깨 상태를 고려하여 은퇴를 결심했다.[78]

은퇴 후 지도자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팀명직책
2005년 ~ 2009년오릭스 버펄로스투수 코치
2010년SK 와이번스2군 투수 코치
2011년 ~ 2011년 8월오릭스 버펄로스육성 담당 코치
2011년 8월오릭스 버펄로스1군 불펜 투수 코치
2012년오릭스 버펄로스1군 벤치 투수 코치
2013년 ~ 2014년오릭스 버펄로스육성 담당 인스트럭터
2017년 ~ 2018년야쿠르트 스왈로스2군 투수 코치
2019년 ~주니치 드래곤스1군 투수 코치


6. 4. 수상·타이틀 경력


  • 최우수 방어율: 1회(1992년)
  • 최다 구원 투수: 5회(1992년 - 1994년, 1996년, 1997년) ※ 에가와 토요, 사사키 가즈히로, 이와세 히토키와 함께 최다 타이 기록.
  • 월간 MVP: 1회 (1994년 6월)
  • 파이어맨상: 5회 (1992년, 1993년, 1994년, 1996년, 1997년)

6. 5. 개인 기록

수상



첫 기록



이정표 기록



기타 기록


6. 6. 등번호

연도등번호
1989년 ~ 1991년40
1992년 ~ 2004년19
2005년 ~ 2009년, 2012년 ~ 2014년87
2010년74
2011년98
2015년 ~ 2016년89
2017년 ~ 2018년83
2019년 ~ 2021년84
2023년 ~19


참조

[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6月18日号、P.40
[2] 뉴스 朝日新聞、1996年2月10日付朝刊、静岡地方面
[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6月18日号、P.38
[4] 뉴스 読売新聞、1988年12月4日付朝刊、P.19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4年12月13日号、P.105
[6] 간행물 Number、1993年1月20日号、P.50
[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7年3月31日号、P.120
[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4年12月13日号、P.106
[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2年11月23日号、P.114
[10] 뉴스 読売新聞、1992年7月22日付朝刊、P.21
[1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2年11月23日号、P.116
[1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4年12月13日号、P.107
[1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4年9月19日号、P.111
[14] 뉴스 読売新聞、1994年12月16日付朝刊、P.23
[1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6年6月17日号、P.6
[16] 뉴스 毎日新聞、1995年8月1日付朝刊、P.13
[1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7年3月31日号、P.121
[1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9年3月8日号、P.30
[19] 뉴스 朝日新聞、1998年1月18日付朝刊、P.23
[2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6月18日号、P.39
[21] 뉴스 朝日新聞、2000年8月10日付朝刊、P.21
[22] 뉴스 読売新聞、2001年1月25日付夕刊、P.3
[2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4年12月13日号、P.104
[24] 웹사이트 久しぶり(^^)/ https://ameblo.jp/ke[...] 2008-12-13
[25] 뉴스 【オリックス】球団内人事を発表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0-12-29
[26] 뉴스 オリックス4年連続投手コーチ途中交代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1-08-04
[27] 웹사이트 2012年度コーチングスタッフ発表のお知らせ|オリックス・バファローズ https://www.buffaloe[...] 2011-11-25
[28] 웹사이트 コーチ配置転換について|オリックス・バファローズ https://www.buffaloe[...] 2012-05-22
[29] 웹사이트 2013年度コーチングスタッフ発表のお知らせ|オリックス・バファローズ https://www.buffaloe[...] 2012-11-04
[30] 뉴스 オリックス 西本コーチら4コーチと契約結ばず 4選手に戦力外通告 https://web.archive.[...] スポーツニッポン 2014-10-01
[31] 웹사이트 新監督決定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新潟アルビレックス・ベースボール・クラブ
[32] 뉴스 赤堀監督が一転退団へNPB球団からオファー http://www.niigata-n[...] 新潟日報 2016-11-08
[33] 웹사이트 赤堀元之監督退任・退団のお知らせ http://www.niigata-a[...] 新潟アルビレックス・ベースボール・クラブ
[34] 뉴스 【赤堀元之コラム】なんでヤクルト?僕にも分からない(笑い) https://www.tokyo-sp[...] 2022-08-31
[35] 뉴스 ヤクルト2軍投手コーチに赤堀氏 今季BC新潟監督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6-11-11
[36] 웹사이트 来季の契約について http://www.yakult-sw[...]
[37] 웹사이트 中日ドラゴンズ オフィシャルウェブサイト - ドラゴンズニュース ★来季コーチングスタッフのお知らせ http://dragons.jp/ne[...] 2018-10-29
[38] 뉴스 救援陣防御率4.93から3.32に向上も来季へは喜べない現状。2人の助っ人投手流出の可能性など不安は山積[中日2019検証・投手編] https://web.archive.[...] 中日スポーツ
[39] 뉴스 【中日】パウエル打撃コーチ、中村武志バッテリーコーチらの退団発表 https://www.chunichi[...] 中日スポーツ
[40] 웹사이트 【中等部】 ⭐️新スタッフ紹介⭐️ 赤堀元之投手コーチ https://www.instagra[...] 2022-01-04
[41] 웹사이트 新球団加盟についてのお知らせ https://kandok.jp/ar[...] 関西独立リーグ 2022-10-24
[42] 웹사이트 球団名決定のお知らせ https://kandok.jp/ar[...] 関西独立リーグ 2022-11-16
[43] 뉴스 NPB2軍参入の「ハヤテ223」、横浜元監督の山下大輔氏がGMに 元近鉄・赤堀元之氏が監督就任 https://full-count.j[...] 2023-10-27
[44] 웹사이트 赤堀元之監督の退任について https://www.awjs-war[...] 淡路島ウォリアーズ 2023-10-28
[4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6-18
[4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惜別球人」
[47] 간행물 別冊宝島1652号 宝島社
[4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8-04-06
[49] 간행물 Number 1994-09-01
[5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12年5月28日号
[5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4-09-19
[5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3-08
[5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6-18
[5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3-08
[5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6-18
[56] 뉴스 아사히 신문 1996-02-10
[5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6-18
[58]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88-12-04
[59]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4-12-13
[60] 간행물 Number 1993-01-20
[6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7-03-31
[62]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4-12-13
[63]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2-11-23
[64]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2-07-22
[6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2-11-23
[6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4-12-13
[6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4-09-19
[68]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4-12-16
[69]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6-06-17
[70] 뉴스 마이니치 신문 1995-08-01
[7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7-03-31
[72] 문서 지금까지의 기록은 우시지마 가즈히코의 26세 174일이며, 더욱이 2012년에 야마구치 슌이 기록을 갈아치웠다(25세 53일).
[73]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3-08
[74] 뉴스 아사히 신문 1998-01-18
[7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6-18
[76] 뉴스 아사히 신문 2000-08-10
[77]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1-01-25
[7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4-12-13
[79] 웹사이트 【オリックス】球団内人事を発表 http://www.nikkanspo[...] 2010-12-29
[80] 웹사이트 オリックス4年連続投手コーチ途中交代 http://www.nikkanspo[...] 2011-08-04
[8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6-18
[82] 간행물 ‘석별 야구 선수’, 《슈칸 베이스볼》
[83]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8-04-06
[84] 간행물 Number 1994-09-01
[8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12-05-28
[8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4-09-19
[8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3-08
[8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6-18
[89]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3-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