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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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홈 왕국은 1228년 타이족 왕자 수카파가 건설한 왕국으로, 현재의 아삼 지역을 통치했다. 1228년 파트카이 산맥을 넘어 브라마푸트라 계곡에 정착한 수카파는 농업을 기반으로 왕국을 건설했으며, 샨족의 정치 구조, 벼농사 기술, 가부장적 사회 조직 등을 활용했다. 15세기에는 주변 왕국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고, 17세기에는 무굴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며 독립을 유지했다. 18세기에는 사회적 갈등과 버마의 침략으로 쇠퇴하여 1826년 얀다보 조약 이후 영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아홈 왕국은 파이크 제도, 행정 체계, 독특한 문화 유산을 남겼으며, 건축, 사원, 저수지,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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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홈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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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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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아홈 왕국 (Ahom kingdom) 아삼 왕국 (Assam Kingdom) 아삼 왕국 (Assamese Kingdom) |
고유 명칭 | 𑜒𑜑𑜪𑜨 (아훔) |
시대 | 중세 식민 시대 |
위치 | 인도 미얀마 |
수도 | 차라이데오 (1253–1397) 차라구아 (1397–?) 바카타 가르가온 (1540–1707) 랑푸르 (1707–1794) 조르하트 (1794–1826) |
공용어 | 아삼어 (링구아 프랑카, 궁정 언어) 아홈어 (궁정 언어, 왕조 언어) 기타 토착어 |
종교 | 아홈 종교 (1228–1648경) 샤크티교 힌두교 / 에카사라나 다르마 (1648경-1826) 토착 종교 |
통화 | 아홈 주화 |
국기 문양 | [[File:Ahom_insignia_plain.svg|170px|center]] |
국가 상징 | 응이 응가오 카암 (왕실 상징) |
건국 | 수카파에 의해 건국 |
건국 연도 | 1228년 |
재조직 | 수훙뭉 왕 통치하 재조직 |
재조직 연도 | 1497년 |
코치-아홈 분쟁 | 코치-아홈 분쟁 |
코치-아홈 분쟁 기간 | 1543–68년 |
아홈-무굴 분쟁 | 아홈-무굴 분쟁 |
아홈-무굴 분쟁 기간 | 1615–1682년 |
모아마리아 반란 | 모아마리아 반란 |
모아마리아 반란 발생 년도 | 1769년 |
버마의 아삼 침공 | 버마의 아삼 침공 |
버마의 아삼 침공 년도 | 1817년 |
영국에 의한 장악 | 영국이 장악 |
멸망 년도 | 1826년 |
데모님 | 아홈인 아삼인 |
정치 체제 | 관료제 봉건제 귀족 군주제 |
통치자 칭호 | 차오 파, 스와르가데오 |
역대 통치자 | |
초대 통치자 | 수카파 |
초대 통치 기간 | 1228–1268년 |
주요 통치자 | 수훙뭉 |
주요 통치 기간 | 1497–1539년 |
주요 통치자 | 수셍파 |
주요 통치 기간 | 1603–1641년 |
주요 통치자 | 수크룽파 |
주요 통치 기간 | 1696–1714년 |
마지막 통치자 | 푸란다르 싱하 |
마지막 통치 기간 | 1833–1838년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 카마루파 왕국 |
이전 국가 | 추티아 왕국 |
이후 국가 | |
이후 국가 | 콘바웅 왕조 |
이후 국가 | 식민지 아삼 |
통계 | |
면적 (1711년) | 41,957.807 제곱마일 |
인구 (1711년) | 2,880,000명 |
면적 (1826년) | 41,957.807 제곱마일 |
인구 (1833년) | 250,000명 |
추가 정보 |
2. 역사
아홈 왕국은 1228년 타이족 왕자 수카파(Sukaphaa)가 몽마오(Mong Mao)에서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계곡으로 이주하여 세운 왕국이다.[17][122] 수카파와 그의 추종자들은 상부 아쌈(Upper Assam)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 사회를 이루었으며, 이는 기존 카마루파(Kamarupa) 왕국과는 다른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모델에 기반한 독자적인 정치,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21][22][25] 초기 아홈족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고, 발전된 수리 기술을 바탕으로 농경지를 개간했으며, 원주민들을 통합하는 아홈화(Ahomisation) 과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23][24][35][36] 또한, 수카파 시대부터 부란지(Buranji)라는 독특한 역사 기록 전통을 세웠다.[33]
초기에는 몽마오(Mong Mao)에 종속적인 관계였으나, 14세기 말 수당파(Sudangphaa) 왕 때 몽광의 침입을 격퇴하고 파트카이(Patkai) 산맥을 경계로 하는 조약을 맺으며 완전한 주권을 확립했다.[40][49] 이 시기부터 국호도 '몽-둔-썬-캄(Mong-Dun-Sun-Kham)'에서 '아쌈(Assam)'으로 바뀌었으며, 브라만의 영향력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15][47] 16세기 수훈문(Suhungmung) 왕(재위 1497년~1539년) 시대에 아홈 왕국은 쭈티아 왕국과 카차리 왕국을 정복하고 벵골의 침입을 격퇴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완전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55][59][60][61][62] 이 과정에서 아쌈어를 사용하는 피정복민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행정 제도가 정비되는 등 큰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63][67]
17세기 프라탑 싱하(Pratap Singha) (재위 1603년~1641년) 시대에는 파이크 제도를 재정비하고 보르푸칸과 보르바루아 등 새로운 관직을 신설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75][76] 이 시기는 무굴 제국과의 오랜 전쟁(아홈-무굴 분쟁)이 벌어진 때이기도 하다. 아홈 왕국은 미르 줌라 2세의 침공으로 한때 수도를 함락당하기도 했으나, 사라이가트 전투(1671년)와 이타쿨리 전투(1682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무굴 세력을 마나스 강 서쪽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독립을 지켜냈다.[122]
가다다르 싱하(Gadadhar Singha)(재위 1682년~1696년)가 퉁쿵기아 아홈 왕조 시대를 열면서 왕국은 루드라 싱하(Rudra Singha) (재위 1696년~1714년)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예술과 건축이 발달하고 주변 왕국들을 정복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불안정과 샤크티즘 경향 심화에 따른 종교 갈등(바이슈나바 사트라 박해)이 깊어졌다.[27][28] 특히 시바 싱하(Siva Singha) (재위 1714년~1744년) 통치기에는 왕비들이 '바라자(Bar Raja)'로서 실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종교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81][28]
18세기 중반 이후, 약화된 파이크 제도와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면서 모암리아 반란이 발발하여 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86] 결국 1817년부터 시작된 버마 꼰바웅 왕조의 침략으로 정복당했으며,[122] 이후 발발한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의 결과로 1826년 양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아홈 왕국의 영토는 영국에 병합되어 수백 년간 이어온 역사를 마감했다.[123]
2. 1. 건국 (1228년)
아홈 왕국은 1228년 타이족 왕자 수카파(Sukaphaa)가 험준한 파트카이(Patkai) 산맥을 넘어 몽마오(Mong Mao)에서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계곡으로 들어오면서 건설되었다.[17] 수카파는 소수의 인원으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정 중에 다른 타이족 수장들과 추종자들이 합류하여[18] 약 9,000명의 인원으로 아쌈 지역에 도착했다.[19][20] 그의 목적지는 상부 아쌈(Upper Assam)이었는데, 이 지역은 과거 카마루파(Kamarupa) 왕국의 영토였으나 당시에는 쇠퇴하고 있었다.[21] 수카파의 의도는 정복이나 약탈이 아니라, 경작되지 않은 땅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여 농업을 하는 것이었다.[22] 아홈족은 상부 아쌈의 구릉지대 범람림과 습지 평야에 제방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논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23]아홈족의 기반이 된 타이-샨족은 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적인 정치 구조, 정주 벼농사와 수문학 같은 잉여 생산 기술, 수장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사회 조직,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문어 형태로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24] 이전 카마루파(Kamarupa) 왕국이 북인도(North India)의 정치 구조를 차용하여 인도-아리아인의 지배로 이어진 것과 달리, 아홈 왕국은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의 정치 구조를 기반으로 한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했으며, 이는 독특한 정치,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25] 아홈족은 초기에는 그들 고유의 렝돈(Lengdon) 신화를 바탕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원주민들과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26]
2. 2. ''Mong Dun Shun Kham'' (1228년–1401년)
1228년 타이족 왕자 수카파(Sukaphaa)는 몽마오(Mong Mao)를 떠나 험준한 파트카이(Patkai) 산맥을 넘어 약 9,0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계곡으로 들어와 아홈 왕국을 세웠다.[17][18][19][20][122] 당시 상부 아쌈(Upper Assam) 지역은 이전에 존재했던 카마루파(Kamarupa) 왕국이 쇠퇴한 상태였다.[21] 수카파의 목적은 정복이나 약탈이 아니라, 비어있는 땅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여 농업을 하는 것이었다.[22] 아홈족은 상부 아쌈의 범람원과 습지에 제방을 쌓아 논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벼농사를 지었다.[23] 이들은 타이-샨족의 정치 구조, 정주형 벼농사 기술, 수문학 지식, 부계 중심의 사회 조직, 그리고 고유 언어의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24] 이는 북인도(North India)의 영향을 받은 이전의 국가 형성 방식과 달리,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모델에 기반한 독자적인 정치,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25] 아홈족은 다른 아쌈 지역 왕국들처럼 브라만 신화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렝돈(Lengdon) 신화에 기반한 정당성을 내세워 통치 기반을 다지고 원주민들과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었다.[26][27]수카파(재위 1228년 ~ 1268년)는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기반을 다지다가 1253년 차라이데오(Charaideo)에 최종적으로 정착하여 수도로 삼았다.[29][30] 그는 부르하 고하인(Burhagohain)과 보르고하인(Borgohain)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고문직을 만들어 왕과 함께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31] 이 제도는 이후 600년 동안 유지되었다.[32] 또한 수카파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도록 지시했고, 이는 후대 왕들에게도 이어져 인도에서는 보기 드문 역사 기록물인 부란지(Buranji) 저술의 전통을 세웠다.[33][34]

아홈족은 자신들이 가진 발전된 수리 기술을 이용해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고,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농사를 짓던 원주민들을 자신들의 사회로 통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35] 이 과정에서 통합된 이주민들은 '카(kha)'라고 불렸으며, 많은 이들이 의례적으로 아홈 씨족에 편입되었다.[36] 이를 아홈화(Ahomisation) 과정이라고 부른다. 수카파는 자신에게 합류한 모란(Morans)족과 바라히(Barahi)족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반대하는 세력은 제거했다.[37] 아홈족은 자신들의 수가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큰 세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아홈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인구를 늘려나갔다.[38][39]
초기 아홈 왕국은 완전한 독립 국가는 아니었다. 수카파와 그의 초기 후계자들은 몽마오(Mong Mao)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으나, 몽마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이 관행은 중단되었다.[40] 아홈족은 자신들의 영토를 '몽 둔 썬 캄(Mong Dun Sun Kham)', 즉 '황금 정원의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41] 수카파는 병력이 적어 남당(Namdang) 지역 진출을 피했지만,[42] 그의 아들 수테우파아(Suteuphaa)는 계략을 써서 카차리족을 물러나게 하고 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43] 그러나 이후 약 200년 동안 아홈 왕국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 이 시기 아홈 왕국은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적이었지만, 추티아 왕국과는 초기 우호 관계가 점차 갈등으로 변했고, 카마타 왕국(Kamata kingdom)과는 결혼을 통해 동맹 관계를 맺었다.[44]
14세기 말, 아홈 왕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위기를 겪었으며, 두 차례의 왕 시해 사건과 왕이 없는 세 차례의 짧은 공위 시기를 거치며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맞이했다.[45]
2. 3. Assam (1401년–1510년)
수당파(Sudangphaa) 바무니 곤와르(Bamuni Konwar, 재위 1397년~1407년)는 하붕(Habung)의 브라만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과거 국왕의 후손으로 확인되어, 위기 시대를 끝내기 위해 부르하 고하인(Burhagohain)과 보르고하인(Borgohain)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46] 수당파는 수도 근처에 브라만 관리, 고문, 공동체를 세웠고, 이 시기부터 브라만의 영향력이 처음으로 나타났다.[47] 그는 하붕 출신 브라만들을 수도 근처에 정착시키고, 양자로 삼았던 브라만 가족의 아들들을 국경 지역에 보내 다스리게 했다.[52] 이러한 변화에 반대하는 여러 반란이 있었지만, 수당파는 이를 모두 진압하고 통치 기반을 다졌다.[48]1401년에는 반란군 중 한 세력이 몽광(몽마오의 후계 국가로, 초기 아홈 왕들이 조공을 바치던 곳)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수당파는 침입한 군대를 물리치고, 파트카이(Patkai) 산맥을 경계로 하는 조약을 맺어 분쟁을 마무리했다.[49] 이 사건은 아홈 왕국이 이전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명확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로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맞춰 국가의 이름도 '몽-둔-썬-캄(Mong-Dun-Sun-Kham)'에서 '아쌈(Assam)'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샨족/샴(Shyam)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15][50]
수당파는 수도를 차라구아(Charagua)로 옮기고, 기존의 씨족 중심 충성 체계를 약화시키는 대신 왕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했다. 또한 아홈 왕들의 국가 즉위식인 싱가리그루타(singarigharutha) 의식을 도입하여 왕실의 주권, 권위,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51]
수당파 이후 약 100년 동안 아홈 왕국은 주로 반란을 일으키는 나가족들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1490년 디마사 왕국(Dimasa kingdom)과의 분쟁에서는 아직 힘이 부족하여 정면 대결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53] 아홈 왕실은 브라만 계층과의 관계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면서, 인도-아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부족 집단들의 지지를 얻고 왕국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54]
2. 4. 확장기 (1510년–1609년)
수훈문(Suhungmung, 디힝기아 라자(Dihingia Raja), 재위 1497년 ~ 1539년) 시기에 아홈 왕국은 짧은 기간 동안 극적인 변화를 겪으며 완전한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55] 이러한 변화는 1510년 민병 통합으로 시작되었고,[56] 1512년에는 하붕(Habung)의 바로-부얀(Baro-Bhuyan)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는 아마도 이전 수당파(Sudangpha) 시대에 정착했던 하붕기아 브라만(Habungia Brahmans) 후손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7] 인도-아리아계 부얀족(Bhuyans)은 수도로 이주하여 서기관이나 전사로서 성장하는 국가 체제에 편입되었다.[58] 이들은 1523년 쭈티아 왕국(Chutia kingdom) 정복에 기여했으며, 이후 쭈티아 왕국의 귀족, 지휘관, 전문 기술자, 전사 등이 아홈 왕국으로 흡수되었다.[59]1532년에는 투르박(Turbak)이 이끄는 벵골 술탄국의 침입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아홈 왕국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침략군을 카라토야 강(Karatoya river)까지 추격하여 몰아냈다.[60] 1536년에는 디마사 왕국(Dimasa kingdom, 또는 카차리 왕국)과의 충돌 이후 나가온(Nagaon) 지역의 콜롱 강(Kolong River)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61] 수훈문의 통치 말기에는 왕국의 영토가 이전보다 거의 두 배로 커졌다.[62]

이러한 급격한 영토 확장은 아홈 왕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아쌈어를 사용하고 힌두교화된 피정복민의 수가 기존 아홈족보다 많아졌다.[63] 또한 쭈티아 왕국 흡수로 다양한 장인 기술을 확보하여 사회 내 노동 분업이 더욱 발달했다.[64] 수훈문은 새롭게 편입된 백성들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스와르가나라야나'(Swarganarayana, 또는 스와르가데오(Swargadeo))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65] 하지만 아홈족 지배층은 인도 지역의 라지푸트처럼 힌두교화(Rajputisation)되지는 않았다.[66]
행정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쭈티아 왕국의 관직 명칭을 차용한 보르파트로고하인(Borpatrogohain)이라는 새로운 고위직이 신설되면서 왕과 기존 대신들 간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67][68] 또한 정복지를 관리하기 위해 쭈티아 영토 담당 사디야코와 고하인(Sadiyakhowa Gohain)[69]과 카차리 영토 담당 마랑기코와 고하인(Marangikhowa Gohain)[61] 직책이 신설되었고, 이 자리들은 기존의 보르고하인(Borgohain)과 부르하고하인(Burhagohain) 가문 출신이 맡았다.[70] 전통 아홈 귀족(차오, Chao)과 브라만 학자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했다.[71] 톤 캄(Ton Kham) 보르고하인(Borgohain)[72]이 이끄는 아홈 군대가 벵골 침략군을 카라토야 강[73]까지 추격하면서, 아홈 왕국은 스스로를 고대 카마루파 왕국(Kamarupa kingdom)의 정당한 계승자로 여기기 시작했다.[74]
2. 5. 성숙기 (1609년–1682년)
아홈 왕국은 프라탑 싱하 (재위 1603년–1641년) 치세에 이르러 더욱 체계적인 기반을 갖추고 성숙한 국가의 여러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는 주로 무굴 제국의 지속적인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었다.[75]1609년, 기존의 친족 기반 조직인 포이드(phoid) 시스템을 대신하여 전문적인 '크헬(khel)' 시스템 아래 파이크 제도가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를 통해 파이크(백성)는 왕의 허가를 받아 비왕족 기관에도 영구적으로 소속될 수 있게 되었다.[76] 또한 프라탑 싱하의 통치 아래 새로운 고위 관직이 만들어졌다. 코흐족과 무굴 제국으로부터 얻은 영토를 관리하는 총독인 보르푸칸과 왕실 정부의 장관 격인 보르바루아 직책이 신설되었고, 이들과 함께 다른 소규모 직책들이 추가되면서 최고 국정 자문회의 격인 '파트라 만트리스'의 구성원이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75]
문화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외교 사절단에 브라만 계층만을 임명하는 관행이 시작되었고,[77] 아홈 왕들이 기존의 아홈식 이름과 더불어 힌두식 이름을 사용하고 힌두교 관련 시설을 후원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다만, 왕들이 공식적으로 힌두교 입문 의식을 치른 것은 1648년 이후의 일이다.[78] 언어 면에서는 아쌈어가 처음으로 아홈 왕궁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존의 아홈어와 잠시 함께 쓰이다가 점차 아홈어를 대체하게 되었다.[79] 프라탑 싱하 시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국가 구조의 개편은 이후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2. 5. 1. 코흐, 무굴과의 관계
1581년 코흐 왕조가 두 개의 분파로 나뉘면서, 아홈 왕국은 서쪽의 코흐 하조 분파와 1603년부터 동맹을 맺었다. 이는 1576년까지 벵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힌 무굴 제국에 대한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614년 코흐 하조의 세력이 약화되자 무굴 제국은 바르나디(Barnadi) 강까지 진출했다. 1616년, 무굴 제국은 삼다라 전투를 통해 동쪽으로 더 나아가려 시도했고, 이는 아홈-무굴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이 전쟁은 1682년 이타쿨리 전투에서 아홈 왕국이 무굴 제국을 마나스 강 서쪽으로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1657년,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의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아홈 왕국의 자야드와지 싱하 왕은 이 기회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캄루프를 점령하고 서부 아삼 전역으로 영향력을 넓혔으며, 동쪽으로는 사디야, 남쪽으로는 셰르푸르까지 브라마푸트라 강 유역 전체를 장악하여 아홈 왕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이에 아우랑제브 황제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1662년 그의 부관 미르 줌라 2세를 보내 아홈 왕국을 침공했다. 아홈 군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고, 무굴 군대는 수도 가르가온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점령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라이가트 전투에서 아홈 왕국은 무굴 제국의 대규모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서쪽 국경을 마나스 강까지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타쿨리 전투 이후 마나스 강은 아홈 왕국의 서쪽 국경으로 확정되었고, 이 국경은 이후 영국에 의해 합병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사라이가트 전투 이후 아홈 왕국은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다. 이 시기에는 귀족들의 권력이 강해져 일곱 명의 왕이 즉위하고 폐위되는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으며, 캄루프는 잠시 무굴 제국의 수중에 다시 넘어가기도 했다.
2. 6. 퉁쿵기아 통치기 (1682년–1826년)
가다다르 싱하(재위 1682년 ~ 1696년)는 아삼에 '퉁쿵기아 통치'를 수립했으며, 이 왕조는 아홈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682년, 이타쿨 전투에서 무굴 제국에 승리하면서 마나스 강이 왕국의 서쪽 경계로 확정되었다. 가다다르 싱하는 국가와 백성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던 바이슈나바 사트라들과 갈등을 겪었고, 이들에 대한 광범위한 박해를 시작했다.
퉁쿵기아 아홈 왕조 시대는 예술과 공학, 건축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모암리아 반란 이전까지는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를 누렸으나, 왕국을 분열시킬 내부 갈등의 씨앗도 품고 있었다. 1770년까지 아홈 왕국은 번영을 누렸으며, 특히 18세기 전반까지는 인구가 증가하고 무역이 활발해졌으며 화폐와 금융 시스템도 발전했다. 새로운 예술과 공예, 새로운 작물, 심지어 새로운 의복 양식까지 도입되었다.
루드라 싱하(수크룽파, 재위 1696년 ~ 1714년) 치세에 아홈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디마사 왕국과 자인티아 왕국을 정복했다. 또한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대규모 준비를 진행하며, 무굴 제국에 맞서 동인도의 힌두 왕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인 1714년에 사망했다. 루드라 싱하는 바이슈나바 사트라들을 복권시켰고, 스스로 아우니아티 고사인(가장 영향력 있는 브라만 사트라디카르)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말년에는 군주에게 더 적합하다고 여겨 샤크티즘에 기울었다. 그는 벵골 출신의 유명한 샤크타 브라만인 크리슈나람 바타차리아(프라바티야 고사인)를 초청했다. 임종 시에는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고 프라바티야 고사인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유언했다.[80]

시바 싱하(수탄파, 재위 1714년 ~ 1744년)는 아버지의 벵골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그는 프라바티야 고사인의 가르침을 받아 그에게 광대한 토지와 인력(파이크)을 하사하고 '닐라찰 산'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81] 시바 싱하는 브라만과 점성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1722년 점성가들이 '차트라-방가-요가'라는 불길한 운세 때문에 그의 통치가 곧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자,[82] 프라바티야 고사인의 조언에 따라 왕비 풀레슈와리에게 왕위를 넘기고 '바라자'(Bar Raja, 대왕) 칭호를 주었다. 풀레슈와리는 종교 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수드라 마한타들을 모욕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28] 풀레슈와리가 사망한 후에는 시바 싱하의 다른 두 부인인 암비카와 사르베스와리가 차례로 '바라자'가 되었다. 시바 싱하의 통치는 다플라 원정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그는 많은 사원을 짓고 종교 기관과 브라만들에게 많은 토지를 기증했다. 1744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 프라마타 싱하가 왕위를 계승했다.[83]
프라마타 싱하(수넨파, 재위 1744년 ~ 1751년)의 통치 기간에는 특별히 기록할 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그는 석조로 랑 가르(Rang Ghar, 왕실 관람석)를 건립하고 북구와하티에 수크레슈와르 사원과 루드레슈와르 사원을 세웠다. 이 시기 키르티 찬드라 보르바루아가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키웠다. 1744년에는 트위프라 왕국으로부터 사절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는 1751년에 사망했다.
라제슈와르 싱하(수렘파, 재위 1751년 ~ 1769년)는 형인 바르자나 고하인의 장자 계승권을 제치고 키르티 찬드라 보르바루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홈 왕들 중 가장 많은 사원을 건립했으며, 정통 힌두교도로서 나티 고사인(프라바티야 고사인의 친척)의 가르침을 받았다. 1765년에는 마니푸르 왕 자이 싱하의 요청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여 버마 왕조의 점령으로부터 마니푸르를 되찾는 것을 도왔다. 1767년 나가 언덕을 통해 보낸 첫 원정은 실패했으나, 라하의 옛길을 통해 보낸 두 번째 원정은 성공하여 마니푸르를 회복시켰다. 당시 아홈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던 키르티 찬드라 보르바루아는 역사 기록서인 부란지들을 불태우기도 했다.[84] 라제슈와르 싱하의 통치는 아홈 왕국의 패권과 영광이 저물어가는 시기였으며, 쇠퇴의 징후는 이미 그의 치세 동안 나타나기 시작했다.[85] 그가 사망한 후 동생 락슈미 싱하(수니오파, 재위 1769년 ~ 1780년)가 왕위를 계승했다.
18세기 중반 아홈 왕국은 취약한 제도적 기반과 부족한 경제적 여력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복잡한 계층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86] 17세기 무굴 제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격퇴하는 데 기여했던 파이크 제도는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다. 후기 퉁쿵기아 시대는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특징을 보였으며, 이는 결국 모암리아 반란으로 폭발했다. 반란군은 수년간 수도 랑푸르를 점령하고 권력을 유지했지만, 결국 웰시 선장 지휘하의 영국군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 이후 탄압 과정에서 이주와 처형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했으나,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2. 6. 1. 쇠퇴
라제슈와르 싱하(1751년 ~ 1759년 재위)의 통치는 아홈의 패권과 영광이 저물어가던 시기로, 이미 그의 통치 기간에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85] 이 시기 키르티 찬드라 보르바루아와 같은 귀족의 정치적 영향력이 비대해졌으며,[84] 왕국 내부의 갈등 요인이 잠재되어 있었다.퉁쿵기아 시대 후반에 발생한 모암리아 반란은 왕국을 분열시키는 심각한 내부 갈등으로 이어져 쇠퇴를 가속화했다.
결정적으로 1817년부터 1826년까지 이어진 버마의 아삼 침공으로 아홈 왕국은 꼰바웅 왕조에게 정복당하는 국운의 위기를 맞았다. 이후 1825년 제1차 영국-버마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아삼 지역에서 버마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아홈 왕국의 독립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1826년, 영국과 버마 사이에 체결된 양다보 조약에 따라 아홈 왕국의 영토는 영국에 병합되었고, 이로써 아홈 왕국은 수백 년간 이어온 독립 왕조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123]
3. 경제
아홈 왕국의 경제는 파이크 제도(Paik system)에 기반을 두었다. 이는 일종의 조세 노동(corvée) 제도로, 봉건제나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과는 다른 형태였다.[87] 17세기 자야드와지 싱하(Jayadhwaj Singha) 왕 때 처음으로 화폐가 도입되었지만, 파이크 제도를 통한 개인의 노동 봉사 의무는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17세기 아홈 왕국이 과거 코흐 하조(Koch Hajo) 왕국 지역과 무굴 제국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들 지역의 세금 제도를 접하고 이를 받아들여 조정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무역이 주로 물물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화폐 유통은 제한적이었다. 시하부두딘 타일라시(Shihabududdin Tailash)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홈 왕국에서는 조개껍데기(cowries), 루피, 금화 등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루드라 싱하(Rudra Singha) 왕의 통치 이후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화폐 유통량도 점차 증가했다. 시바 싱하(Siva Singha) 왕 시대의 비문에는 왕국 내 여러 사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쌀, 기(ghee), 기름, 콩류, 염소, 비둘기 등 다양한 상품의 가격이 기록되어 있다.[87] 이는 물물교환 중심의 경제에서 점차 화폐 경제로 전환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당시 인도의 다른 지역 및 주변 국가들과 아삼 지역 간의 경제적 관계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홈 왕국에서 사용된 은화는 외부와의 무역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동북부 인도 지역이나 인도의 다른 지역에는 은광이 없었기 때문에, 아홈 왕국에서 사용된 은은 전적으로 무역을 통해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진다.[89]
3. 1. 티베트와의 무역
자야드와지 싱하 시기에는 티베트와의 무역을 위해 발행된 주화가 있었다. 이 주화 양면에는 중국어 한자 蔵宝|짱 바오중국어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당신의 보물' 또는 '티베트 화폐'로 해석된다. 니콜라스 로드스(Nicholas Rodhes)는 후자의 의미로 해석했으며, 실제로 이 두 글자는 1792년부터 1836년까지 중국이 라싸에서 '티베트 화폐'라는 의미로 사용했던 표현이다. 17세기 중반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아쌈인들이 아쌈-티베트 무역 주화에 중국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주화는 자야드와지 싱하가 티베트 방면에서 온 중국 상인들과의 무역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88]이후 루드라 싱하 역시 티베트와 광범위한 무역 관계를 구축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를 장려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외국인의 왕국 내 출입은 엄격히 제한했다. 그의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 일부 주화는 이러한 무역 활동을 통해 얻은 은으로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89]
아홈 왕국과 다른 국가들 간의 무역 관계를 파악하는 데 은화의 사용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동북부 인도나 인도의 다른 지역에는 은광이 없었기 때문에, 아홈 왕국에서 사용된 은은 전적으로 무역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영역
아홈 왕국의 길이는 약 800km(약 804.67km), 평균 너비는 96km(약 96.56km)였다.[90] 왕국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쪽 강변(Uttarkul), 남쪽 강변(Dakhinkul), 그리고 마줄리(Majuli) 섬이다. 북쪽 강변은 인구 밀도가 더 높고 땅이 비옥했지만, 아홈 왕들은 방어에 유리한 요새와 중심지가 더 많은 남쪽 강변에 수도를 두었다.[91]
5. 인구
1500년부터 1770년까지 아홈 왕국 지역에서는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92] 그러나 모암오리아 반란(1769~1805) 동안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버마의 지배(1817~1825) 시기에는 버마 군대의 약탈과 폭정으로 인해 인구가 다시 1/3 가량 줄어들었다. 결국 영국이 아삼을 병합할 당시에는 약 70만 명의 인구만이 남아 있었다.[92]
프라탑 싱하 왕은 인구 분포를 파악하고 마을 정착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다. 특히 국가의 모든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엄격한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노동 가능한 인력을 파악하고 국가 봉사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인구 조사는 '파이카르 피얄라르 카카트'(paikar piyalar kakatas)라고 불리는 등록부에 상세히 기록되었다.[92]
다음 표는 라제스와르 싱하 왕(1751~1769) 통치 기간 동안 구나비람 바루아가 추정한 계층별 인구 구성이다.
귀족 | 노예/농노 | 차무아 | 카르니 파이크 | 총인구 |
---|---|---|---|---|
1% | 9% | 25% | 65% | 100% |
24,000 | 216,000 | 600,000 | 1,560,000 | 2,400,000[93] |
아래 표는 여러 학자들이 추정한 중세 아삼의 연도별 인구이다.
연도 | 구하(1978) 추정 인구[94] | 부얀(1949) 추정 인구[95] | NPB 추정 인구[96][97] | 두트(1958) 추정 인구[98] |
---|---|---|---|---|
1615 | 1,680,000 | 11,248,286 | ||
1620 | 2,440,000 | |||
1669 | 1,600,000 | |||
1711 | 2,880,000 | |||
1750 | 3,000,000+ | |||
1765 | 2,400,000 | |||
1833 | 250,000 |
5. 1. 도시
아홈 왕국에도 도시는 존재했지만, 전체 인구 중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낮았다. 아홈 시대의 주요 도시로는 랑푸르, 가르고안, 구와하티, 하조 등이 있었다. 1794년 웰시(Welsh) 대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수도였던 랑푸르는 그 규모가 약 32.19km에 달하고 인구 밀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도시 인구는 1만 명을 넘지 못했다.6. 행정
아홈 왕국은 스와르가데오(Swargadeo, 아홈어: Chao-Pha|차오파asm)라 불리는 왕이 통치했으며, 왕은 반드시 초대 왕 수카파(Sukaphaa)의 후손이어야 했다. 왕위 계승은 일반적으로 장자 상속을 따랐지만, 때로는 고하인(Gohains)이라 불리는 고위 관리들이 다른 혈통의 수카파 후손을 왕으로 선출하거나 심지어 재위 중인 왕을 폐위시키기도 했다.
'''당가리아스(Dangarias)'''
수카파는 왕국의 행정을 돕기 위해 두 명의 고하인(Gohain), 즉 부르하 고하인(Burhagohain)과 보르고하인(Borgohain)을 두었다. 1280년대에 이들은 각각 독립적인 영토를 부여받았는데, 이 영토는 빌라트(bilat) 또는 라자야(rajya)라 불렸으며, 그 안에서 고하인들은 사실상의 군주와 같은 권한을 행사했다. 부르하 고하인의 영토는 브라마푸트라 강 북쪽 제방의 사디야(Sadiya)와 게렐루아(Gerelua) 강 사이에 있었고, 보르고하인의 영토는 그 서쪽으로 브라이(Burai) 강까지 이어졌다.[99] 이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 파이크(paik)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가졌다. 이 직책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가문에서 세습되었으며,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왕자들은 고하인 직책에 고려되지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1527년 수훈문(Suhungmung) 왕은 세 번째 고하인인 보르파트로고하인(Borpatrogohain) 직책을 신설했다.[100] 보르파트로고하인의 영토는 기존 두 고하인의 영토 사이에 위치했다.
'''왕실 관리'''
수센가파(Susenghphaa, 프라탑 싱하) 왕은 왕에게 직속된 두 개의 새로운 직책, 즉 보르바루아(Borbarua)와 보르푸칸(Borphukan)을 만들었다. 보르바루아는 군사 및 사법 책임자로서, 당가리아스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있지 않은 칼리아보르(Kaliabor) 동쪽 지역을 관할했다. 그는 당가리아스와 달리 자신에게 할당된 파이크의 일부만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국가에 봉사해야 했다. 보르푸칸은 칼리아보르 서쪽 지역의 군사 및 민정을 총괄했으며, 서부 지역에서 스와르가데오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보르바루아는 주로 모란(Moran), 카차리(Kachari), 치링(Chiring), 캄티(Khamti) 공동체 출신 중에서 임명되었고, 저지 아삼(Lower Assam) 지역을 담당하는 보르푸칸은 추티아(Chutia) 공동체 출신 중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101] 보르바루아와 보르푸칸 직책은 세습되지 않았으므로, 어떤 가문 출신이든 임명될 수 있었다.
이 세 명의 고하인(부르하 고하인, 보르고하인, 보르파트로고하인)과 두 명의 왕실 관리(보르바루아, 보르푸칸)는 아홈 왕국의 최고 행정 기구인 파트라 만트리스(Patra Mantris, 장관회의)를 구성했다. 아홈 왕국의 행정 및 군사 체계는 파이크 제도라는 독특한 노동력 징발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운영되었다.
6. 1. 파트라 만트리스(Patra Mantris)
부르하 고하인, 보르고하인, 보르파트로고하인, 보르바루아, 보르푸칸의 다섯 직책은 파트라 만트리스(Patra Mantris)(장관회의)를 구성했다. 수핌파(Supimphaa) 왕(재위 1492년~1497년) 시대부터 파트라 만트리스 중 한 명이 라즈만트리(Rajmantri)(총리)로 임명되었는데, 이 직책은 보르파트로(Borpatro)라고도 불렸으며 아홈어로는 Shenglungaho이라 칭했다. 라즈만트리는 추가적인 권한을 가졌고, 자카이추크(Jakaichuk) 마을 출신의 파이크(paik) 1,000명을 추가로 지원받았다.6. 2. 기타 관리
바르바루아와 보르푸칸은 군사 및 사법적 책임을 지는 고위 관리였다. 이들은 각각 '푸칸'들로 구성된 별도의 평의회(sora|소라asm)의 도움을 받았다. 보르푸칸의 평의회는 구와하티에 있었고, 바르바루아의 평의회는 수도에 위치했다.바르바루아의 평의회는 여섯 명의 푸칸으로 구성되었으며, 각자 다른 임무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1,000명의 인원을 담당하는 나우바이차 푸칸은 왕실의 배를 관리했다. 이 외에 비타라울 푸칸, 나 푸칸, 디힝기아 푸칸, 데카 푸칸, 네오그 푸칸이 평의회를 이루었다.
보르푸칸 역시 여섯 명의 하급 푸칸으로 구성된 유사한 평의회를 운영했으며, 중요한 모든 문제에 대해 이들과 상의해야 했다. 이 평의회에는 6,000명의 파이크( paiks|파이크asm)를 지휘한 파니 푸칸, 4,000명의 파이크를 지휘한 데카 푸칸, 그리고 디힝기아 푸칸, 네크 푸칸, 두 명의 추티야 푸칸이 포함되었다.
'바루아'라고 불리는 감독관들도 있었다. 이들은 20명 이상이었으며, 주요 바루아와 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역할 |
---|---|
판다리 바루아 | 재무관 |
둘리아 바루아 | 왕실 가마 관리 |
차우당 바루아 | 사형 집행 감독 |
카니카르 바루아 | 수석 기능공 |
소나다르 바루아 | 조폐국장 겸 수석 보석 세공사 |
베즈 바루아 | 왕실 가족 주치의 |
하티 바루아 | |
고라 바루아 |
그 외 다른 관리들로는 12명의 라즈코와, 그리고 다수의 카타키, 카카티, 돌라이가 있었다. 라즈코와는 특정 영토의 총독이자 3,000명의 파이크를 지휘하는 지휘관 역할을 했다. 그들은 지역 분쟁을 중재하고 공공 사업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카타키는 외국 및 산악 부족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사절이었고, 카카티는 공문서를 작성하는 서기였다. 돌라이는 점성술을 해석하고 중요한 행사나 사업을 위한 길일을 정하는 역할을 했다.
6. 3. 총독
왕족 구성원들은 특정 지역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라자(Raja)'라고 불렸다.- 스와르가데오의 적장자인 '차링 라자(Charing Raja)'는 부리디힝 강(Burhidihing river) 우안의 조이푸르 주변 지역을 관할했다.
- '티팜 라자(Tipam Raja)'는 계승 서열 2위였다.
- '남룹 라자(Namrup Raja)'는 계승 서열 3위였다.
하위 직책의 왕족 구성원들에게는 '멜(mel)'이라는 지역이 주어졌고, 이들은 '멜당기아(meldangia)' 또는 '멜코와(melkhowa) 라자'로 불렸다. '멜당기아 고하인(Meldangia Gohain)'은 그보다 더 낮은 계급의 왕자들이었으며, '마주멜리아 고하인(Majumelia Gohain)'과 '사루멜리아 고하인(Sarumelia Gohain)' 두 명이 있었다.[102]
왕족 여성들에게도 개별적인 '멜(mel)'이 주어졌는데, 라제슈와르 싱하(Rajeshwar Singha) 시대에는 12명의 여성이 '멜'을 소유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왕비에게 주어진 '라이당기아 멜(Raidangia mel)'이었다.[103]
군 사령관 역할을 했던 선봉 총독들은 국경 지역의 영토를 다스리고 관리했다. 이들은 주로 세 명의 위대한 고하인(Gohain)이 될 자격이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주요 선봉 총독들은 다음과 같다.
총독 명칭 | 관할 지역 / 주요 역할 | 비고 |
---|---|---|
사디야 코와 고하인(Sadiya Khowa Gohain) | 사디야 지역 | 1524년 추티아 왕국 정복 후 획득한 지역 |
마랑기 코와 고하인(Marangi khowa Gohain) | 다나시리(Dhansiri) 강 서쪽, 나가(Naga) 부족 인접 지역 | 1526년 카차리 왕국으로부터 획득한 지역 |
솔랄 고하인(Solal Gohain) | 나가온 대부분과 차리두아르(Chariduar) 일부 | 보르푸칸의 본부가 구와하티로 이전된 후 관할 |
카잘리무키야 고하인(Kajalimukhiya Gohain) | 카잘리무크(Kajalimukh) 관할, 자인티아 및 디마루아(Dimarua)와의 관계 유지 | 보르푸칸 휘하[104] |
캄장기아 고하인(Khamjangia Gohain) | 캄장(Khamjang) 지역 | 나가 언덕의 일부 |
반루키아 고하인(Banrukia Gohain) | 반룩(Banruk) 지역 | 시브사가르 지구의 일부 |
퉁쿵기아 고하인(Tungkhungia Gohain) | 팅콩(Tingkhong) 지역 | |
반룽기아 고하인(Banlungia Gohain) | 반룽(Banlung, 데마지) 지역 | 1524년 추티아 왕국 정복 후 획득한 지역 |
바티알리아 고하인(Bhatialia Gohain) | 하붕(Habung) 지역 | 1524년 추티아 왕국 정복 후 획득, 나중에 보르파트로고하인(Borpatrogohain)이 대체 |
디힝기아 고하인(Dihingia Gohain) | 뭉클랑(Mungklang, 디힝) 지역 | 1524년 추티아 왕국 정복 후 획득한 지역 |
칼리아보리아 고하인(Kaliaboria Gohain) | 칼리아보르(Kaliabor) 지역 | |
자기얄 고하인(Jagiyal Gohain) | 나가온(Nagoan)의 자기(Jagi) 관할, 삿 라자(Sat Raja)(7명의 부족장)와의 관계 유지 | 보르바루아(Borbarua) 휘하[104] |
모홍기아 고하인(Mohongia Gohain) / 모홍고르 고하인(Mohongor Gohain) | 사디야와 모홍(Mohong, 나가 언덕)의 염전 관할 | 추티아 왕국과 나가족으로부터 정복한 지역 |
더 낮은 계급의 총독들은 '라즈코와(Rajkhowas)'라고 불렸으며, 그 예로는 바차(Bacha), 다랑(Darrang), 솔라구리(Solaguri), 아바이푸르(Abhaypur), 타파쿠치(Tapakuchi) 등이 있다.
6. 4. 봉신
아홈 왕국에 종속된 왕 또는 봉신들은 '''라자'''(Raja)라고 불렸다. 라니(Rani)의 라자를 제외한 모든 봉신은 매년 조공을 바쳤다. 이 라자들은 전쟁과 같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자원과 '''파이크'''(paik, 아홈 왕국의 군사 및 노동력 제공 의무를 지닌 사람)를 제공해야 했다. 아홈 왕국에는 총 15개의 봉신국이 있었다.[105]봉신 | 설명 |
---|---|
다랑 라자(Darrang Raja) | 후대의 다랑 지구(Darrang district) 지역을 통치했으며, 코흐 왕조(Koch dynasty)의 칠라이(Chilarai)의 증손자인 순다르 나라얀(Sundar Narayan)의 후손들이었다. |
카므룹 라니(Rani, Kamrup) | 매년 조공 의무가 면제되었다. |
벨톨라(Beltola) | 구와하티(Guwahati) 남서부 지역을 통치했으며, 코흐 왕조(Koch dynasty)의 칠라이(Chilarai)의 손자인 가이 나라얀(Gaj Narayan)의 후손들이었다. |
루키(Luki) | |
바르두아르(Barduar) | |
디마루아(Dimarua) | |
고바(Gobha) | |
넬리(Neli) |
아홈의 지배와 명목상의 주권을 인정한 다른 산악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
특히 자인티아와 디마사는 아홈 왕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며 아홈의 지배와 봉신 관계를 인정했다. 이들의 아홈과의 관계는 '''타피타 산치타'''(thapita sanchita, 확립되고 보존된)라는 용어로 규정되었다.[107]
6. 5. 파이크 제도(Paik system)
아홈 왕국은 파이크 제도(Paik system)라는 독특한 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이는 봉건제나 아시아적 생산방식과는 다른 형태의 역(役) 노동(corvée) 제도였다.[108] 17세기 자야드와지 싱하(Jayadhwaj Singha) 왕 때 처음으로 화폐가 도입되었지만, 파이크 제도 아래에서의 개인적인 봉사 의무는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17세기에 아홈 왕국이 과거 코흐 하조(Koch Hajo) 왕국이나 무굴 제국이 지배했던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들 지역의 세금 제도와 접촉하고 이를 받아들여 제도를 일부 조정하기도 했다.
파이크 제도는 1608년 모마이 타물리 바르바루아(Momai Tamuli Barbarua)에 의해 체계적으로 재편되었다.[108] 이 제도 하에서 모든 평민 남성은 '파이크'(paik)로 불렸으며, 네 명의 파이크가 모여 하나의 '갓'(got)이라는 단위를 구성했다. 일 년 중 특정 시기에는 각 갓에 속한 파이크 중 한 명이 왕에게 직접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이 기간 동안 나머지 세 명의 파이크는 봉사 중인 파이크의 농경지를 대신 경작해주었다. 파이크 제도는 다음과 같은 관리 체계를 통해 운영되었다.[108]
관리직 | 담당 파이크 수 |
---|---|
보라(Bora) | 20명 |
사이키아(Saikia) | 100명 |
하자리카(Hazarika) | 1000명 |
라즈코와(Rajkhowa) | 3000명 |
푸칸(Phukan) | 6000명 |
6. 6. 토지 측량
수파파(Supatphaa) 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캄루프에 숨어 있던 시절 무굴 제국의 토지 측량 시스템을 접하게 되었다. 무굴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영토 전역에 걸쳐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작업을 위해 코치 베하르와 벵갈에서 측량사들이 초빙되었다. 측량은 시브사가르에서 시작되어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그의 사후에야 완료되었다. 다음으로 나가온 지구가 측량되었고, 그 후의 토지 정리가 루드라 싱하 왕 자신에 의해 감독되었다.역사가들에 따르면, 측량 방법은 길이 약 3.66m의 대나무 막대기인 ''날''(nal)을 사용하여 각 필지의 네 변을 측정하고 면적을 계산하는 것을 포함했으며, 단위는 "루차"(lucha) 또는 약 13.38m2였고, 약 1337.80m2는 "빅하"(Bigha) 한 단위였다. 빅하 네 단위가 하나의 '푸라'(Pura)를 이룬다. 이와 유사한 토지 측량 시스템은 현재 아삼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 측량 시스템은 농민(파이크)들뿐만 아니라 귀족과 관리들 사이에서도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토지 기록은 ''다라브다라 바루아''(Darabdhara Barua)라는 관리 아래 유지되었다. 따라서 주택과 숲을 제외한 모든 경작 가능하고 점유된 토지가 측량되고 기록되었다. 이 기록에 사용된 종이는 ''페라카가즈''(perakagaz) 또는 ''페라카카트''(perakakat)라고 불리며, ''페라''(pera)라고 불리는 나무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보관된 종이라는 뜻이다. ''페라카가즈''가 내구성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종교 시설이나 브라만에게 기증된 무세 토지의 중요한 기록을 위해 ''탐라파트라''(tamrapatra) 또는 ''팔리''(phali)라고 불리는 구리판이 발행되었다.[109]
7. 군사
아홈 군대는 보병, 기병, 코끼리 부대, 포병, 첩보 부대 및 해군으로 구성되었다. 군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은 파이크(민병)들이 군대의 기반을 이루었다. 파이크들은 4명씩 '곳'이라는 단위로 묶였고, 여러 '곳'이 모여 '켈'(부서)에 소속되었다. 파이크들은 다음과 같은 계급의 장교 지휘를 받았다.[110]
파이크 장교 | 파이크 수 |
---|---|
푸칸 | 6000 |
라즈코와 | 3000 |
하자리카 | 1000 |
사이키아 | 100 |
보라 | 20 |
전쟁에서는 칼, 창, 활과 화살 같은 전통적인 무기와 함께 총, 마치락, 대포 등 화약 무기도 사용되었다. 병사들은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기병대는 '고라 바루아'가, 코끼리 부대는 '하티 바루아'가 지휘했다.[110]
중세 아쌈 지역에서는 방화 무기를 사용한 기록이 있지만, 본격적인 화기는 16세기 초에 도입되었다. 아홈 군대는 빠르게 다양한 종류의 소형 및 대형 총, 마치락, 대포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화약 제조는 '카르가리아 푸칸'이 책임졌다.[110]
해군은 아홈 군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전력이었다. 주력 군함은 '바차리스'라고 불렸는데, 이는 벵골의 '코사'와 유사한 형태로 약 70~80명을 태울 수 있었다. 바차리스는 튼튼하고 강력했으며, 후기에는 많은 함선에 총이 설치되었다. 파티야-이-이브리아는 미르 줌라의 아쌈 침공 당시 아쌈 왕에게 속한 32,000척의 배를 언급하고 있다. 이 배들은 주로 가볍고 빠른 짬발 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침몰하지 않았다. 해군은 '나오바이차 푸칸'과 '나오살리아 푸칸'이 지휘했다.[110]
아홈 왕국은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아홈 병사들은 특히 야간 기습 공격에 능숙했으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전투 능력을 발휘하여 종종 수천 명의 적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홈 군대의 강력함은 수적 우위뿐만 아니라, 병사 개개인의 뛰어난 체력, 용기, 그리고 지구력에 기반한 것이었다.[110]
8. 사법 제도
민사 사건에서는 일반적으로 힌두법이 적용되었고, 형법은 매우 엄격하고 가혹한 것이 특징이었다. 형법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의 원칙이 일반적이어서, 범죄자는 자신이 고소인에게 입힌 피해와 똑같은 형벌을 받았다. 보르보루아와 보르푸칸은 각자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최고 사법 책임자로서 재판을 주관했다.[111]
범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잔인한 경우가 많았다. 범죄자를 찔러 죽이거나, 두 개의 원통 사이에 넣어 갈아 죽이거나, 굶겨 죽이는 형벌이 있었다. 또한 몸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거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을 발라내는 형벌도 시행되었다. 눈알이나 무릎뼈를 뽑거나, 코를 베거나, 몽둥이로 때리는 것 역시 흔한 형벌이었다.[112]
9. 사회 계층
3대 아홈 왕인 수빈파(Subinphaa, 재위 1281~1293)는 '칠가 아홈'(Satgharia Ahom)이라 불리는 귀족 계층을 확립했다. 이는 왕족인 차오파(Chaophaa) 가문(아홈 왕조), 부르하 고하인(Burhagohain) 가문, 보르고하인(Borgohain) 가문과 네 개의 사제 계보(데오다이(Deodhai), 모한(Mohan), 바일룽(Bailung), 치링 프칸(Chiring Phukan))로 구성되었다. 이들 가문과 계보는 서로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외혼(exogamy) 관계를 유지했다.[101]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계보가 편입되거나 기존 계보가 나뉘면서 귀족 계보의 수는 늘어났다. 왕은 오직 첫 번째 가문인 차오파 가문에서만 나올 수 있었고, 부르하 고하인과 보르고하인은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 가문 출신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고위직인 보르푸칸(Borphukan)은 대부분 추티아족 출신이었고, 보르바루아(Borbarua)는 모란족, 치링족, 캄티족 출신들이 많았다.[101] 나중에는 나가족, 미싱족, 그리고 나라(몽카웅(Mongkawng))의 무당들도 바일룽(Bailung) 사제 계층에 포함되었다.[113] 이렇게 확대된 귀족 계층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세금을 내지 않는 성직자 계급으로 이루어졌다.
계층 | 가문/계보 | 주요 역할 및 특징 |
---|---|---|
왕족 | 차오파(Chaophaa) (아홈 왕조) | 왕 배출 |
고위 귀족 | 부르하 고하인(Burhagohain) | 해당 가문에서만 배출 |
고위 귀족 | 보르고하인(Borgohain) | 해당 가문에서만 배출 |
사제 | 데오다이(Deodhai) | 4대 사제 계보 |
사제 | 모한(Mohan) | 4대 사제 계보 |
사제 | 바일룽(Bailung) | 4대 사제 계보, 후대에 나가족, 미싱족, 나라 무당 등 포함[113] |
사제 | 치링 프칸(Chiring Phukan) | 4대 사제 계보 |
귀족 아래에는 여러 계층이 존재했다. apaikan chamua|아파이칸 차무아as는 켈스(khels, 일종의 길드 또는 집단)의 의무에서 벗어나 화폐로 세금을 내는 지주 계급이었다. 파이칸 차무아(paikan chamua)는 수공업자, 글을 아는 사람,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로 구성되었으며, 노동력 제공(봉사)으로 세금을 대신했다. 간리 파이크(kanri paik)는 주로 육체노동을 담당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는 리초(licchous), 반디-베티(bandi-beti)라 불리는 이들과 기타 농노 및 속인들이 있었다.
계층 | 설명 | 납세 방식 |
---|---|---|
apaikan chamua|아파이칸 차무아as | 켈스(khels) 의무에서 해방된 지주 계급 | 화폐 |
파이칸 차무아(paikan chamua) | 수공업자, 문인, 노동자 | 봉사 (노동력 제공) |
간리 파이크(kanri paik) | 육체 노동 제공자 | 육체 노동 |
최하층 | 리초(licchous), 반디-베티(bandi-beti), 농노, 속인 등 | - |
계층 간 이동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모마이 타물리 보르보루아는 낮은 신분에서 시작하여 여러 계층을 거쳐 프라탑 싱하 왕 치하에서 최초의 보르바루아(Borbarua)라는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다.
10. 문화
10. 1. 건축
랑푸르에는 탈라탈 가르(Talatal Ghar), 랑 가르(Rang Ghar), 골라 가르(Gola Ghar)와 같은 주요 건축물이 있으며, 가르고안에는 카렝 가르(Kareng Ghar)가 있다.[114] 또한 아홈 왕조는 아삼 후기 중세 시대의 많은 사원과 저수지 건설에 기여했다.10. 1. 1. 사원
아쌈 후기 중세 시대의 많은 사원은 아홈 왕조 시기에 지어졌다. 아홈 시대의 주목할 만한 사원으로는 시바사가르 사원군, 자이사가르 사원군, 가우리사가르 사원군, 루드라사가르 사원, 네게리팅 시바 사원, 랑그나트 사원, 마니카르네슈와르 사원, 디르게슈와리 사원, 하티무라 사원, 케다르 사원, 바시스타 사원, 수크레슈와르 사원, 우마난다 사원, 루드레슈와르 사원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많은 사원이 있다.[115]10. 1. 2. 저수지
아홈 왕조 시대에는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종교적인 목적으로 크고 작은 저수지(tank)가 많이 만들어졌다. 저수지 제방에는 사찰을 세워 위엄을 더하기도 했다. 아홈 시대의 주요 저수지로는 시바사가르 저수지(Borpukhuri), 조이사가르 저수지, 가우리사가르 저수지, 락슈미사가르 저수지, 비슈사가르 저수지(라즈마오 푸쿠리) 등이 있다. 아홈 통치자들이 만든 저수지는 약 2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16]10. 2. 회화
(내용 없음)10. 3. 음악과 무용
아홈 왕국에서는 음악과 무용 문화가 널리 퍼져 인기를 누렸으며, 왕족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특히 아홈 왕들은 무굴 음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음악가들을 델리로 보내 배우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가얀 바루아(Gayan Barua)'와 같은 특정 관리를 임명하여 음악 발전을 장려했다.[117]10. 4. 상징
왕국의 왕실 문장은 날개 달린 사자 용인 Ngi-ngao-kham|응이-응아오-캄aho으로 알려져 있다.[118][119][12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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