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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 보니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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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1863년 마닐라에서 태어난 필리핀의 혁명가이다.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비밀 결사 카티푸난을 결성하고 무장 봉기를 이끌었으며, 타갈로그 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 대통령을 맡았다. 그러나 에밀리오 아기날도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1897년 처형되었다. 그의 생일은 보니파시오 데이로 지정되어 필리핀의 공휴일이 되었으며, 필리핀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죽음과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으며, 필리핀의 국민 영웅으로서의 지위와 유해 발견에 대한 논란이 있다.

2. 생애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1863년 11월 30일 마닐라 톤도에서 잠발레스 출신의 카탈리나 데 카스트로와 타기그 출신인 산티아고 보니파시오의 여섯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12][24] 그의 부모는 그를 마닐라의 수호성인사도 안드레아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그가 성 안드레아 축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13][14] 1863년 12월 3일 톤도 성당의 본당 신부인 사투르니노 분탄 신부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15][16] 고모에게서 필리핀어 표기법을 배웠고, 기예르모 오스메냐의 사립 초등학교[17][18]와 톤도의 일라야 거리에 있는 '에스쿠엘라 무니시팔 데 니뇨스'에 입학하여 마닐라의 사립 중등학교에서 3학년을 마쳤다.[24]

1974년 타갈로그어로 작성되어 마닐라 톤도에 있는 그의 출생지, 현재 투투반 센터(Tutuban Center)에 설치된 역사적 표지판


보니파시오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지팡이와 종이 부채를 만들고,[22] 기업을 위한 포스터도 제작했다.[23] 10대 후반에는 영국 무역 회사인 로버트 플레밍 & Co.](Fleming and Company)의 대리인(메신저)으로 일했으며,[24] 타르,

2. 1. 생애 초반

1863년 11월 30일 스페인필리핀 마닐라 톤토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산티아고 보니파시오는 평민이었고, 집안 환경이 가난하여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무거운 세금과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각지에서 스페인 통치에 항거하는 시위와 반 스페인 여론이 나타났다.[12] 잠발레스 출신의 카탈리나 데 카스트로와 타기그 출신인 산티아고 보니파시오의 여섯 자녀 중 첫째였다.[24] 그의 부모는 마닐라의 수호성인사도 안드레아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성 안드레아 축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13][14] 1863년 12월 3일 톤도 성당의 본당 신부인 사투르니노 분탄 신부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15][16] 그는 고모에게서 필리핀어 표기법을 배웠다. 기예르모 오스메냐의 사립 초등학교[17][18]와 톤도의 일라야 거리에 있는 '에스쿠엘라 무니시팔 데 니뇨스'에 입학했다. 마닐라의 사립 중등학교에서 3학년을 마쳤다.[24]

독립 운동과 혁명활동에 참여하기 전 독학으로 수학했고, 생계를 위해 배달부와 상점 점원 생활을 하였다. 14세에 부모를 모두 병으로 잃고 4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19][20] 부채나 지팡이를 팔기도 하고 노동을 하였으며, 심부름꾼과 포스터를 그리는 화가로도 활동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독서를 한 까닭에 매우 박식했다고 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와 그의 어린 형제들이 판매할 지팡이와 종이 부채를 만들었다.[22] 또한 기업을 위한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이는 안드레스와 그의 형제 시리아코, 프로코피오, 트로아디오가 사립 및 정부 회사에 고용되어 적절한 생활 조건을 제공받게 된 이후에도 지속된 가족 사업이었다.[23]

10대 후반에 처음으로 영국 무역 회사인 로버트 플레밍 & Co.](Fleming and Company)의 대리인 또는 '만다타리오'(메신저)로 일했으며,[24] 거기에서 타르,

2. 2. 독립 운동

호세 리살필리핀에서의 스페인 통치의 개혁과 자치 운동을 요구한 것과 달리, 보니파시오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37][38] 그는 필리핀의 민족 해방운동가 중 무장 독립운동파에 속했으며, 수많은 애국적인 글을 쓰고 필리핀의 역사 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칼럼으로 기고하였다.

1892년, 보니파시오는 호세 리살라 리가 필리피나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39] 라 리가 필리피나필리핀에 대한 스페인 식민 정부의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단체였다.[40] 그러나 라 리가는 리잘이 체포되어 서부 민다나오 지역의 다피탄으로 추방된 후[41] 단 한 번의 회의만 가진 채 해산되었다.[42] 보니파시오,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등은 리잘이 부재한 동안 라 리가를 부활시켰고 보니파시오는 마닐라에서 지역 지부를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부활한 라 리가의 수석 선전가가 되었다.[44]

라 리가 필리피나가 해산되자, 1892년 그는 독립 혁명을 목표로 하는 비밀 결사 "카티푸난"을 창설했다. 그가 이끈 카티푸난은 1896년 8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초반에는 스페인군에 고전했지만, 카티푸난의 지방 조직 간부였던 프린시팔리아 계층이 영향력을 가진 타갈로그 지방(루손 섬 중남부)에서는 기세를 회복하여 스페인인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립 세력 내부에서 대립이 생겼다. 빈곤층 출신인 보니파시오는 독립 후 필리핀에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혁명을 지향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 등 프린시팔리아는 자신들의 경제 기반을 위협하는 보니파시오의 노선에 반대했다. 보니파시오와 아기날도는 혁명의 방침을 놓고 대립했지만, 다수파가 된 아기날도 파는 보니파시오 파에 승리하여 아기날도가 독립파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패배한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 등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독립 혁명을 진행하려 했지만, 그의 이탈을 두려워한 아기날도에 의해 체포되어 1897년 5월 10일에 처형되었다.

2. 3. 카티푸난 결성과 무장 투쟁

1892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마닐라에서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카티푸난을 결성했다.[45] 프리메이슨의 의식과 조직 체계를 본뜬 카티푸난(Kataas-taasan, Kagalang-galang na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 조국의 아이들의 가장 높고 존경받는 단체)은 무장 투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다.[46][47] 보니파시오는 이 단체에서 ''May pag-asa''(희망이 있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49]

1892년 7월 3일 톤도에서 호세 리살 등과 독립운동 단체 라 리가 필리피나(La Liga Filipina)를 창립했지만, 리살의 비폭력 노선에 반발한 보니파시오는 무장 독립을 주장하며 카티푸난을 이끌었다.

보니파시오는 에밀리오 하신토를 조언자이자 측근으로 삼았고, 하신토의 ''Kartilya'' 입문서를 카티푸난의 공식 가르침으로 채택했다. 보니파시오, 하신토, 피오 발렌수엘라는 칼라야안(자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카티푸난 운동을 루손, 비사야스의 파나이, 민다나오까지 확산시켰다.[62]

1896년 8월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을 이끌고 '푸가드 라윈의 통곡'이라는 무장 봉기를 일으켜 독립 전쟁을 선언했다. 그는 스페인을 외세로 규정하고 타갈로그 공화국을 선포,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티푸난''은 자체적인 법률, 관료적 구조, 선출된 지도부를 갖추고 있었다.[2] 각 주에는 최고 위원회가 주 위원회를 조정하고, 주 위원회는 지방 자치 또는 준 지방 수준에서 공공 행정 및 군사 업무를 담당했으며,[8] 지역 위원회는 지구 또는 바리오 수준의 업무를 담당했다.[8]

발린따왁(혹은 푸가드 라윈)의 외침 다음 날, 보니파시오는 최고 평의회를 재조직했다.

직위이름
회장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부회장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전쟁 장관테오도로 플라타
국무 장관에밀리오 하신토
내무 장관아구에도 델 로사리오
법무 장관브리시오 판타스
재무 장관엔리케 파체코



보니파시오는 군사 전략 계획 및 명령, 선언문, 포고령 준비를 감독하고, 국가에 대한 범죄를 심판했으며, 정치적 분쟁을 중재했다.[8] 그는 장군들을 지휘하고 최전선에 병력을 배치했다.[8]

보니파시오가 구상한 필리핀 국민 국가는 ''Haring Bayang Katagalugan''(까따갈루간의 주권 국가) 또는 ''Repúblika ng Katagalugan''(타갈로그 공화국)으로 불렸다.[8][9]

1896년 11월 7일, 보니파시오는 산 마테오, 마리키나, 몬탈반 공격을 이끌었으나, 스페인군의 반격으로 발라라로 후퇴했다.[56]

2. 4. 권력 투쟁과 몰락

1896년 8월, 루손에서 오랜 계획 끝에 반란을 일으키고 스페인에 대한 봉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한 의용군은 스페인 군대와의 교전에서 거듭 패배하여 북부의 몬탈반으로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부관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저항을 계속했다.[75]

1896년 12월 30일 호세 리살 박사가 마닐라에서 공개 처형되자 필리핀인들은 격분했고, 보니파시오는 호세 리잘의 원수를 갚겠다며 항전을 계속했다. 그는 호세 리잘이 처형당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작별의 글'을 필리핀어타갈로그어로 번역하였다.

산악 지대로 이동하며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부 군대와 교전했지만 29회의 교전에서 거듭 패배하였다. 스페인이 반란자들을 체계적으로 색출하고 이들의 근거지와 새 계획까지 미리 탐지함에 따라, 보니파시오는 무능한 군사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카티푸난 회의에서 그는 점차 부관들 사이에서 신망을 잃어갔다.[83] 1897년 3월 테제로스 회의에서 보니파시오 대신 아기날도를 필리핀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1896년 8월 19일, 스페인 당국은 ''까띠뿌난''의 존재를 확인했다. 수백 명의 필리핀인 용의자들이 반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64] 호세 리살은 당시 쿠바로 가는 길이었는데, 다피탄 헤리티지 존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스페인 식민지 군대에서 의사로 복무하기 위해서였다.[65][66] 보니파시오는 리잘을 설득하여 탈출해 봉기에 합류하도록 했으나, 리잘은 거절했다.[67] 리잘은 나중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65]

보니파시오는 ''까띠뿌난'' 회원들을 칼로오칸에 대규모로 소집하여 봉기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세둘라'(개인 신분증)를 찢는 것으로 표시된 이 사건은 "발린따왁의 외침" 또는 "푸가드 라윈의 외침"으로 불렸다.[68][69] ''까띠뿌난'' 최고 위원회는 스페인에 대한 전국적인 무장 혁명을 선포하고 8월 29일 수도 마닐라에 대한 동시 다발적인 공격을 촉구했다. 보니파시오는 반군을 마닐라로 이끌 장군들을 임명했다. 적대 행위가 벌어지기 전에 보니파시오는 ''까띠뿌난''을 혁명 정부로 재편하여 그를 반군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최고 위원회를 내각으로 삼았다.[59][70][71] 8월 28일, 보니파시오는 다음과 같은 일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모든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 이번 달 29일 토요일, 우리의 합의에 따라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 이 신성한 국민의 이상을 방해하는 사람은 ... 배신자이자 적으로 간주되며, ... 재판을 받게 됩니다.

>

>자유의 언덕, 1896년 8월 28일 – 안드레스 보니파시오[72][73]

1896년 8월 30일, 보니파시오는 직접 산 후안 델 몬테(현재 산 후안)를 공격하여 마을의 화약고와 급수 시설(마닐라에 공급)을 점령했다. 증원된 후 스페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보니파시오의 군대를 격퇴했다. 보니파시오와 그의 부대는 마리키나, 산마테오 및 몬탈반(현재 로드리게스) 근처에서 재집결했다.[75] 필리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견해는 마닐라에 대한 계획된 ''까띠뿌난'' 공세가 보니파시오의 산 후안 델 몬테 공격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이다.[75][76]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계획된 공세가 실제로 진행되었고, 보니파시오의 산 후안 델 몬테 전투는 더 큰 전체의 일부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74][78] 그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보니파시오는 여전히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8월 말까지 반란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74][78]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은 ''까띠뿌난''(Katipunan)은 "자체적인 법, 관료적 구조, 그리고 선출된 지도부"를 갖추고 조직되었다.[2] 각 지방에 대해 최고 평의회는 지방 평의회를 조정했으며,[2] 이들은 지방 자치 수준에서 공공 행정 및 군사 업무를 담당[8]했고, 지역 평의회[9]는 "지구 또는 바리오"(barrio) 수준의 업무를 담당했다.[8] 8월 말, ''까띠뿌난'' 회원들은 칼로오칸에서 만나 반란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8]

보니파시오는 ''까띠뿌난''을 정부로 조직했다.[79] 밀라그로스 C. 게레로 등은 보니파시오를 혁명가들의 "사실상" 총사령관으로 묘사했다.[8]

보니파시오가 구상한 필리핀 국민 국가에 대한 한 가지 이름은 ''Haring Bayang Katagalugan''( "까따갈루간의 주권 국가" 또는 "타갈로그 주권 국가")이다.[8] 보니파시오는 1897년 2월 스페인 정기간행물 ''라 일루스트라시온 에스파뇰라 이 아메리카나''에 "타갈로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언급되었다.[8]

에밀리오 하신토에게 보낸 보니파시오의 공식 서한과 임명 서류에는 보니파시오의 다양한 직함과 지위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8][9]

  • 최고 평의회 의장
  • 최고 대통령
  • 까따갈루간/타갈로그 주권 국가 대통령
  • 주권 국가 대통령, 까띠뿌난 창설자, 혁명의 시작
  • 최고 대통령 사무실, 혁명 정부


1896년 11월, 발라라에서 야영하던 보니파시오는 훌리오 나크필에게 국가를 위한 국가를 작곡하도록 의뢰했다. 나크필은 ''마라갈 나 달라잇 응 카타갈루간''( "타갈로그 국가/국민의 존경할 만한 찬가")이라는 찬가를 만들었다.[80]

1897년 카비테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으로 혁명의 지휘권이 테헤로스 협약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로 옮겨졌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보니파시오는 새로운 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처형되었다.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 공화국은 "제1 필리핀 공화국"으로 여겨진다.

1896년 12월까지 스페인 정부는 세 개의 주요 반란 중심지 (카비테, 불라칸, 모롱)를 파악했다. 반란은 카비테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81]

전통적으로 카비테가 "필리핀 혁명의 심장부"로 여겨지지만, 마닐라와 그 주변 자치구는 스페인 군사 작전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보니파시오는 모롱에서 반군 게릴라의 전술가 역할을 했고, 자신의 구역 외 지역에도 명령을 내렸지만,[59]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평판은 하락했다.[83]

1896년 9월부터 10월까지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 산악 기지 및 언덕 기지 건설을 감독했다. 보니파시오는 이 지역에 장군을 임명하거나, 병사들이 직접 선택한 인사를 승인했다.[56]

1896년 11월 7일, 보니파시오는 산 마테오, 마리키나, 몬탈반 공격을 이끌었다. 스페인군은 퇴각했고, 산 마테오의 시청을 제외한 지역을 반군에게 넘겨주었다. 3일 후, 스페인군의 반격으로 낭카강 방어선이 무너졌다. 스페인군은 반군 점령지를 다시 탈환했고, 산 마테오에서 보니파시오를 기습했다. 보니파시오는 발라라로의 전면 후퇴를 명령했다.[56] 그들은 추격을 받았고, 보니파시오는 에밀리오 하신토를 스페인군의 총알로부터 보호하다가 옷깃을 스쳐 거의 죽을 뻔했다.[75]

1896년 말, 혁명의 전반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은 보니파시오는 카비테 주에 가서 반란 지도자들 사이를 중재하도록 요청받았다. 카비테에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사촌인 발도메로 아기날도가 이끄는 ''마그달로''와 보니파시오의 아내의 삼촌인 마리아노 알바레스가 이끄는 ''마그디왕'' 두 개의 ''카티푸난'' 지방 지부가 있었다. 두 파벌의 지도자들은 상류층 출신이었는데, 하류 중산층 출신인 보니파시오와는 대조적이었다. 초기 성공 이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임시 혁명 정부를 선포했다. ''마그달로''와 ''마그디왕''은 권한과 관할권을 놓고 충돌했으며 전투에서 서로 돕지 않았다. 1896년 12월, 보니파시오는 카비테로 갔다. 보니파시오 형제는 이 기간 동안 산프란시스코 데 말라본(현재 제너럴 트리아스)에 머물렀다.

카비테에 도착하자 보니파시오와 ''마그달로'' 지도자들 사이에 마찰이 커졌다.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마그달로'' 지도자들이 "그의 권위와 명령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썼다.[85] 보니파시오는 ''마그디왕''에게 편향되었다.[135] 아기날도와 에딜베르토 에반젤리스타가 보니파시오를 맞이하러 갔을 때, 그들은 그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짜증을 냈다.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가 "마치 왕처럼" 행동했다고 썼다.[88][87] 보니파시오는 라구나 출신 ''카티푸난'' 장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마그달로'' 지도자들은 거부했다. 노벨레타 주민들은 보니파시오를 필리핀의 통치자로 칭송했는데, 이는 ''마그달로'' 지도자들을 분개하게 했다.[87]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와 전략적인 군대 배치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실랑 점령에 대해 그를 비난했다.[88] 스페인 정부는 예수회 수장 피오 피를 통해 평화 협상의 가능성에 대해 아기날도에게 편지를 썼다.[88] 보니파시오는 ''마그디왕'' 의회와 함께 제안된 평화 회담을 거부했다. 보니파시오는 스페인이 아기날도를 "반란의 수장"으로 간주한 것에 분노했다.[88] 그러나 아기날도는 협상을 계속 준비했다.[89]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가 혁명을 포기할 의향이 있다고 믿었다.[89]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 자금 횡령, 여동생 관련 소문, 선동가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또한 익명의 편지가 돌았는데, 보니파시오를 우상화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보니파시오는 소문이 ''마그달로'' 지도자 다니엘 티로나의 소행이라고 의심했다. 그는 티로나와 대면했고, 티로나의 가벼운 대답은 보니파시오를 격분시켜 총을 뽑아 티로나를 쏠 뻔했다.[90][91]

12월 31일, 보니파시오와 ''마그달로'', ''마그디왕'' 지도자들은 이무스에서 회의를 열었다. ''마그달로''는 ''카티푸난''을 혁명 정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니파시오와 ''마그디왕''은 ''카티푸난''이 자체 헌법, 법률, 정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혁명 정부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에딜베르토 에반젤리스타는 제안된 정부에 대한 초안 헌법을 제시했지만, 보니파시오는 거부했다. 보니파시오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위원회를 임명할 ''백지 위임''을 받았고, 그가 이 위원회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회의록을 기록하도록 요청했지만, 이것들은 수행되지 않았다.[92][93]

1897년 3월 22일, 혁명 지도자들은 테헤로스에서 회의를 열었다.[94] 보니파시오는 "Katipunan" 정부를 공화국으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을 강조했다.[56][5] 보니파시오는 선거 진행을 주장했다.[95]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그는 모든 사람이 결과를 존중할 것을 요청했고, 모두 동의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부재 중 대통령으로 투표되었다.[94][96][97] 테헤로스에서 설립된 혁명 정부는 ''Republica de Filipinas''(필리핀 공화국)이라고 칭했으며, 이후 아기날도가 이끄는 여러 혁명 정부로 대체되었다.

보니파시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마그디왕의 마리아노 트리아스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보니파시오는 내무부 이사로 선출되었다. 다니엘 티로나는 보니파시오의 임명을 반대했다. 모욕감을 느낀 보니파시오는 사과를 요구했지만, 티로나는 무시했고, 보니파시오는 총을 꺼내 티로나를 쏘려고 했지만, 아르테미오 리카르테에 의해 제지되었다.[99] 보니파시오는 회의 결과를 무효로 선언했다.[100] 그는 즉시 그 장소를 떠났다.[99][101]

1897년 3월 23일, 아기날도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은밀히 했다.[102] 아르테미오 리카르테는 테헤로스 선거가 부정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104]

한편, 보니파시오는 테헤로스 선언을 작성했다. 보니파시오는 선거가 사기라고 주장했으며, 아기날도를 반역죄로 고발했다.[105] 산티아고 알바레스와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는 투표 용지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알바레스는 보니파시오가 조작된 투표 용지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썼다.[56][106] 테헤로스 선언에는 보니파시오를 비롯하여 44명이 서명했다. 4월 19일 나이그 군사 협정이 작성되었는데, 41명이 서명했다.[107][108] 회의는 아기날도와 델 필라르에 의해 중단되었다. 마리아노 노리엘과 참석자들은 아기날도 편으로 돌아섰다.[88][109]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에게 협력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보니파시오는 거절하고 인당, 카비테로 향했다.[110]

4월 말, 아기날도는 대통령직을 완전히 맡았다. 보니파시오의 ''마그디왕'' 지지자 대부분이 아기날도로 충성심을 바꿨다.[111] 아기날도 정부는 보니파시오 체포 명령을 내렸다.[112][113]

1897년 4월,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의 체포를 명령했다. 4월 25일, 아기날도의 군인들은 보니파시오를 따라잡았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보니파시오는 부상을 입었다. 시리아코는 총에 맞아 죽었고, 프로코피오는 구타당했으며, 그레고리아는 강간당했을 수도 있다. 보니파시오는 나익으로 옮겨졌다.[114]

보니파시오 일행은 카비테 마라곤돈으로 이송되었고, 1897년 5월 5일 재판을 받았다.[111][115] 배심원은 아기날도의 군인들로만 구성되었고, 보니파시오의 변호사조차 유죄를 선언했다. 보니파시오는 증인과 대면하는 것이 금지되었다.[116][117]

보니파시오 형제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처형이 권고되었다. 아기날도는 사형을 추방형으로 감형했지만, 피오 델 필라르와 마리아노 노리엘은 철회를 설득했다.[118] 보니파시오 형제는 1897년 5월 10일 마라곤돈 산에서 처형되었다.[118][119]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보니파시오의 죽음이 반군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기록했다.[85] 에밀리오 하신토와 마카리오 사케이는 카티푸난을 계속 이어갔고 아기날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80]

역사학자들은 보니파시오 형제에 대한 재판을 부당하다고 비난했다.[120][121]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보니파시오의 권력 선언이 혁명에 위험을 초래했다고 썼다.[118] 레나토 콘스탄티노는 보니파시오가 혁명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카비테 지도자들에게 위협이었기 때문에 제거되었다. 콘스탄티노는 비악나바토 조약을 언급하며, 타협한 카비테 지도자들과 달리 보니파시오는 타협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22]

역사학자들은 보니파시오를 교체하려는 카비테 정부의 동기와 권리에 대해 논의했다. 아기날도의 고문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아기날도가 ''카티푸난'' 수장에 대한 불복종에 책임이 있다고 썼다.[85] 보니파시오가 탈출했다면, 그는 아기날도를 반역죄로 기소할 권리가 있었을 것이다.[126] 콘스탄티노와 비야누에바는 테헤로스 회의를 상류층이 중하류층으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한 운동으로 해석한다.[125][127] 지역주의 또한 보니파시오 교체 동기로 제시되었다.[128][129][130] 마비니는 처형을 범죄로 간주했다.[131]

1948년, 아기날도는 처음에 사형 선고를 감형했지만, 전쟁 평의회의 압력으로 감형을 철회했다고 설명했다.[132][133]

보니파시오의 처형 방식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설명이 존재한다. 라사로 마카파갈은 보니파시오 형제가 총살되었다고 말했다. 마카파갈은 보니파시오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134]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보니파시오는 칼로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너무 쇠약하여 해먹에 엎드려 옮겨지는 동안 행해졌다고 한다.[135] 기예르모 마상카이는 이 정보를 마카파갈의 부하로부터 얻었다고 주장했다.[134] 역사학자 밀라그로스 게레로는 보니파시오가 총검으로 찔렸고, 형제가 매장되지 않았다고 말한다.[136] 1918년 보니파시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된 후, 마상카이는 법의학적 증거가 자신의 사건 버전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134] 작가 아드리안 크리스토발은 보니파시오가 치료받지 못한 상처로 쇠약했다고 언급했다.

3. 사후

보니파시오의 시신과 동생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게는 합당한 장례조차 치러지지 않았다. 보니파시오가 죽은 뒤 그의 부인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는 30일간 산 속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이는 훗날 영화화되어 <위대한 행방불명자>라는 영화의 소재가 된다.

1946년 필리핀 독립 이후, 보니파시오는 필리핀의 독립 영웅이자 독립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1969년1978년 필리핀 지폐 5페소의 주인공으로 도안되었다. 2007년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그의 생일인 11월 30일을 보니파시오 데이(보니파시오의 날)로 정하고 공식 필리핀 국경일로 제정하였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몇 가지 논쟁점을 포함한다. 그의 죽음은 반역죄에 대한 정당한 처형으로, 또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합법적인 살인"으로 번갈아 평가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신 필리핀의 정당한 초대 필리핀 대통령으로 여긴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은 보니파시오가 호세 리잘과 필리핀의 국민 영웅 지위를 공유하거나 심지어 그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보니파시오의 유해 발견 주장 또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밀라그로스 게레로, 엠마누엘 엔카르나시온, 라몬 빌레가스, 마이클 찰스턴 추아 등 일부 역사가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아기날도가 아닌 보니파시오를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필리핀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보니파시오가 혁명 비밀 결사 ''카티푸난''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1896년부터 1897년까지 ''카티푸난''을 통해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이끌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아기날도가 이끄는 혁명 정부가 테헤로스 협약에서 구성되기 전이었다. 게레로는 보니파시오가 ''하링 바양 카타갈루간''("주권 타갈로그 국가")이라는 필리핀 국가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아기날도의 ''필리피나스'' 개념으로 대체되었다고 기록한다. 테헤로스와 1899년 제1 필리핀 공화국 이전 문서에서 보니파시오는 "주권 [타갈로그] 국가"와 "타갈로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불린다.[59][70][135][137]

''타갈로그''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민족, 언어, 문자를 지칭한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보니파시오의 필리핀 국가 개념이 루손, 비사야 제도, 민다나오(현대 필리핀 구성)에 대한 아기날도의 견해와 비교하여 루손의 타갈로그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제한되었다고 본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다른 마글달로 사람들이 작성한 회고록에는 보니파시오가 마그디왕의 수장이 되어 마리아노 알바레스를 부관으로 하여 ''하리 닝 바얀''("국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주장한다.[88][138][2] 카를로스 키리노, 마이클 찰스턴 추아 같은 역사가들은 이러한 주장이 보니파시오의 신조어 ''하링 바얀''("주권 국가")을 국가 개념이 아닌 보니파시오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잘못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보니파시오의 칭호는 ''하링 바양 카타갈루간''의 팡울로("주권 타갈로그 국가의 대통령")였고, 때로는 ''팡울로 닝 하링 바얀''("주권 국가의 대통령")으로 줄여 쓰이기도 했다.[139][2] 산티아고 알바레스(마리아노의 아들)는 ''마그디왕'' 정부와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카티푸난'' 최고 의회 사이를 구별한다.[56]

역사가 추아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문제는 필리핀 역사 기술에서 보니파시오를 "최고 지도자"로 지칭하고 이를 "최고 지도자"로 받아들여, 그를 이후의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필리핀 대통령들과 달리 독재적 또는 군주적 야망을 가진 인물로 여기는 경향 때문에 혼란을 야기했다. "최고 지도자"는 스페인어 ''Presidente Supremo''의 축약형이며, 보니파시오의 타갈로그어 칭호인 ''Kataas-taasang Pangulo''(최고 대통령)를 번역한 것이다. 보니파시오는 "최고 지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팡울로", 즉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추아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카티푸난 내부에서도, 보니파시오는 하링 바얀에 대한 그의 개념을 개인이나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이해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링 바얀은 실제로 국왕, 즉 권력이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하링 바얀).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권 국가"이다... 그래서 그가 1896년 8월 24일 이후에 팡울로 닝 하링 바얀으로 서명했을 때, 그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 혁명 정부의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2]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기념비가 있는 칼루칸은 국가에서 가장 상징적인 기념물로 여겨지며, 모토 스텔라보다 더 웅장하다. 국립 예술가 기예르모 톨렌티노가 조각했다.


호세 리잘은 일반적으로 필리핀의 가장 뛰어난 국민 영웅으로 간주되며,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종종 "국민 영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혁명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더 가치 있는 후보로 제안되었다.[114]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필리핀의 국민 영웅은 다른 국가의 영웅과 달리 "해방군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언급한다.[140] 레나토 콘스탄티노는 리잘이 미국 점령기 동안 아기날도가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패한 후 가장 위대한 필리핀 영웅으로 홍보된 "미국이 후원한 영웅"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평화로운 정치적 옹호를 대표하는 리잘을, 미국의 통치에 저항할 수 있는 생각을 가진 더 급진적인 인물 대신 홍보했다.[141] 리잘은 "너무 급진적"으로 여겨진 보니파시오와 "개선되지 않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대신 선택되었다.[142]

역사학자 암베스 오캄포는 리잘이 아닌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혁명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보니파시오를 "더 나은" 영웅으로 주장하는 것은 리잘이 보니파시오, 카티푸난, 그리고 혁명에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다피탄으로 추방되기 전에도 리잘은 이미 필리핀 국민들로부터 국민 영웅으로 여겨졌으며, ''카티푸난''에 의해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14] 다른 역사가들은 보니파시오가 리잘의 라 리가 필리피나 추종자였다고 설명한다. 레온 마리아 게레로는 리잘이 시기상조라고 믿었기 때문에 카티푸난에 축복을 주지 않았지만, 독립의 목표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고 언급한다.[143]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보니파시오가 국민 영웅으로 리잘을 대체해서는 안 되며, "나란히" 존경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140]

리잘이 "''필리핀 국민 영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 이 칭호는 현재 필리핀 법에 명시적인 법적 정의가 없다. 그러나 리잘과 보니파시오는 매년 전국적으로 기념되기 때문에 국민 영웅으로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 12월 30일 ''리잘 데이''와 11월 30일 ''보니파시오 데이''.[144] 국가 문화 예술 위원회 웹사이트에 따르면:

> 어떤 공식적인 선언도 그들을 국민 영웅으로 명시적으로 선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리잘과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역사에서 그들의 역할로 인해 여전히 존경받고 숭배받고 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영웅은 법으로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 대한 감사는 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다. 영웅에 대한 갈채는 충분한 인정이 될 것이라고 그들은 느꼈다.[144]

1918년, 필리핀 주둔 미군 정부는 마라곤돈에서 보니파시오의 유해를 찾기 위한 수색을 벌였다. 정부 관계자, 전직 반군, 보니파시오의 하인으로 알려진 한 남자로 구성된 일행은 3월 17일 사탕수수 밭에서 보니파시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했다. 이 유골은 항아리에 담겨 필리핀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유골은 보니파시오의 서류 및 유품과 함께 마닐라 에르미타에 있는 입법부 건물에 보관되었다. 유골의 진위는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암베트 오캄포에 의해 2001년까지 이의가 제기되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1935년 필리핀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의 경쟁자였던 마누엘 L. 케손(결국 승리)은 보니파시오를 기억하며 그를 비판했는데, 유골은 아기날도가 이끄는 혁명 정부의 사법부에 의해 처형된 보니파시오의 결과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필리핀은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유골은 1945년 2월 연합군의 마닐라 탈환 동안 광범위한 파괴와 약탈로 인해 분실되었다.

스페인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을 목표로 하는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이 혁명은 유럽의 식민지 정부에 반대하는 아시아 최초의 혁명이었으며, 보니파시오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탓도 있어) 현재에도 동시대의 민족 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호세 리잘과 함께 많은 필리핀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1951년 발행된 20 필리핀 페소 지폐에 자주 초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생일인 11월 30일은 보니파시오의 날로서 필리핀의 공휴일이 되었으며, 정치적인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148]

4. 유산과 논쟁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러 논쟁점을 포함한다. 그의 죽음은 반역죄에 대한 정당한 처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정치적 동기에 의한 "합법적인 살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신 보니파시오를 필리핀의 초대 필리핀 대통령으로 보기도 하며, 호세 리잘과 동등하거나 그를 대체하는 필리핀의 국민 영웅으로 칭송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니파시오는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 맞선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이 혁명은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 정부에 대한 반란이었다. 비극적인 최후에도 불구하고, 보니파시오는 동시대 민족 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호세 리잘과 함께 많은 필리핀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초상은 1951년 발행된 20 필리핀 페소 지폐에 사용되었으며, 생일인 11월 30일은 '보니파시오의 날'로 필리핀의 공휴일로 지정되어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148]

20세기 초, 미국 연구자들은 필리핀 혁명의 주역을 부유한 엘리트 지식인 계층으로 묘사했지만, 1956년 테오도로 아곤실로의 저서 『대중 봉기 -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의 이야기』 출판 이후 필리핀에서는 보니파시오가 민중을 이끈 국민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이러한 역사 해석의 차이 속에서, 1997년 오리건 주립 대학교 교수 글렌 앤서니 메이는 『영웅의 날조 - 사후 만들어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상』을 통해 보니파시오에 대한 평가가 불확실한 사료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핀 연구자 레이날도 일레토는 1998년 『필리핀인과 혁명』에서 메이의 주장에 반박하며, 미국이 필리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리핀 혁명을 엘리트 중심의 봉기로 왜곡하려 했다고 비판했다.[149][150][151]

보니파시오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연도작품명배우
1964《안드레스 보니파시오(앙 수프레모)》에디 델 마르
1992《바야니》훌리오 디아스[147]
1995《바야니》 (TV 시리즈)훌리오 디아스[147]
1995《1896》 (뮤지컬)로디 베라
1998《호세 리잘》가르도 베르소자[147]
2010《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재판》알프레드 바르가스[147]
《루팡 히니랑》 뮤직 비디오마크 앤서니 페르난데스[147]
2012《수프레모》알프레드 바르가스[147]
《엘 프레시덴테》세자르 몬타노[147]
2013《인디오》 (TV 시리즈)졸로 레빌라[147]
2013《카티푸난》 (TV 시리즈)시드 루세로[147]
2014《일루스트라도》 (TV 시리즈)시드 루세로[147]
2014《보니파시오: 앙 우낭 팡울로》로빈 파딜라[147]
2015《헤네랄 루나》니코 안토니오[147]
2018《언리 라이프》종 힐라리오[147]
2021《퇴역 대령 로드리고 보니파시오 이야기》에릭 데이비드
2021《[https://arete.ateneo.edu/2bayani 2바야니: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게 바치는 록 오페라]》 (뮤지컬)불렛 듀마스
2023《곰부르자》게리 구아리노
2024《핑키안: 이스앙 무지카》 (뮤지컬)파우 카스티요


4. 1. 역사적 논쟁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논쟁적이다. 그의 죽음은 반역죄에 대한 정당한 처형으로 보기도 하고, 정치적 동기에 의한 "합법적인 살인"으로 보기도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신 필리핀의 초대 필리핀 대통령으로 여기기도 한다.[120][121] 또한 보니파시오가 필리핀의 국민 영웅으로서 호세 리잘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그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보니파시오의 유해 발견 주장 역시 의문을 제기받고 있다.

역사가들은 보니파시오 형제에 대한 재판이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배심원단은 아기날도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었고, 보니파시오의 변호사는 오히려 유죄를 인정하고 선처를 호소했으며, 보니파시오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과 대질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 증인은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검찰 측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120][121]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아기날도에 반대하는 보니파시오의 권력 주장이 혁명에 위험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반군 세력이 분열되면 연합한 스페인군에게 패배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118] 반면, 레나토 콘스탄티노는 보니파시오가 스페인과 계속 싸울 계획이었고, 카비테를 떠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혁명을 장악하려는 카비테 지도자들에게는 위협이었기 때문에 제거되었다. 콘스탄티노는 스페인과 타협하지 않은 보니파시오와 타협한 카비테 지도자들을 대조하며, 결국 비악나바토 조약으로 혁명이 중단되고 지도자들이 망명했지만, 많은 필리핀인, 특히 보니파시오와 가까웠던 ''카티푸난'' 지도자들은 계속 싸웠다고 지적한다. (아기날도는 비공식적으로 미국과 동맹을 맺고 미국-스페인 전쟁 동안 혁명을 지휘하기 위해 돌아왔다.)[122]

역사가들은 보니파시오를 교체하려는 카비테 정부의 동기와 권한에 대해서도 논쟁한다. 마그달로 지방 의회는 기존 카티푸난 정부의 여러 의회 중 하나일 뿐이었다.[123][124] 콘스탄티노와 알레호 비야누에바는 아기날도와 그의 파벌 또한 보니파시오의 권위를 침해했다는 점에서 반혁명적이라고 주장한다.[123][125] 아기날도의 고문이었던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아기날도가 "''카티푸난'' 수장에 대한 불복종에 주로 책임이 있다"고 썼다.[85] 아기날도의 권위는 즉시 인정받지 못했다. 보니파시오가 카비테에서 탈출했다면, 그는 ''카티푸난'' 지도자로서 아기날도를 반역죄로 기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126] 콘스탄티노와 비야누에바는 테헤로스 회의를 상류층이 중하류층을 대표하는 보니파시오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는 운동의 정점으로 해석한다.[125][127] 콘스탄티노가 "카비티스모"라고 칭한 카비테 반군 사이의 지역주의도 보니파시오 교체의 동기로 제시되었다.[128][129][130] 마비니는 보니파시오의 처형을 "''진정한 애국심보다 개인적인 야망의 첫 번째 승리...''"라고 썼다.[131] 그는 또한 테헤로스 회의의 선거인들이 아기날도와 마리아노 트리아스의 친구였으며, 보니파시오는 성실했지만 출신 지역 때문에 불신을 받았다고 언급했다.[85]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48년에 회고하면서, 처음에는 사형 선고를 감형했지만, 마리아노 노리엘, 피오 델 필라르 등 전쟁 평의회의 압력으로 감형을 철회했다고 설명했다.[132][133]

보니파시오의 처형 방식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있다. 처형 지휘관 라사로 마카파갈은 두 기록에서 보니파시오 형제가 총살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정설이다. 마카파갈의 두 번째 기록에 따르면, 형제가 총에 맞은 후 보니파시오는 탈출을 시도하다 살해되었다. 마카파갈은 형제를 얕은 무덤에 묻고 나뭇가지로 표시했다고 기록했다.[134]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보니파시오는 칼에 찔려 난도질당해 죽었다고 한다. 그는 너무 쇠약하여 해먹에 엎드린 채로 처형 장소로 옮겨졌다고 한다.[135] 이 정보는 마카파갈 부하로부터 얻었다고 주장한 기예르모 마상카이가 유지했다.[134] 한 농부도 해먹 안의 남자가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135] 역사학자 밀라그로스 게레로는 보니파시오가 총검에 찔렸고, 형제가 매장되지 않았다고 말한다.[136] 1918년에 보니파시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골절된 두개골 포함)이 발견된 후, 마상카이는 법의학적 증거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134] 작가 아드리안 크리스토발은 보니파시오가 치료받지 못한 상처로 매우 쇠약했기 때문에, 마카파갈의 주장처럼 자유를 위해 돌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135] 역사학자 암베스 오캄포는 보니파시오의 유골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며, 따라서 보니파시오의 사망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한다.[134]

밀라그로스 게레로, 엠마누엘 엔카르나시온, 라몬 빌레가스, 마이클 찰스턴 추아는 아기날도가 아닌 보니파시오를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필리핀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보니파시오가 ''카티푸난''을 통해 1896년부터 1897년까지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이끌었다고 강조한다. 게레로는 보니파시오가 ''하링 바얀 카타갈루간''("주권 타갈로그 국가")이라는 필리핀 국가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아기날도의 ''필리피나스'' 개념으로 대체되었다고 기록한다. 테헤로스와 1899년 제1 필리핀 공화국 이전 문서에서 보니파시오는 "주권 [타갈로그] 국가"와 "타갈로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불린다.[59][70][135][137]

''타갈로그''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민족, 언어, 문자를 지칭한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보니파시오의 필리핀 국가 개념이 루손, 비사야 제도, 민다나오를 포괄하는 아기날도의 견해와 달리 루손의 타갈로그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제한되었다고 본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마글달로 사람들의 회고록에는 보니파시오가 마그디왕의 수장이 되어 ''하리 닝 바얀''("국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주장한다.[88][138][2] 카를로스 키리노와 마이클 찰스턴 추아는 이러한 주장이 보니파시오의 신조어 ''하링 바얀''("주권 국가")을 국가 개념이 아닌 보니파시오 자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보니파시오의 실제 칭호는 ''하링 바얀 카타갈루간''의 팡울로("주권 타갈로그 국가의 대통령")였고, 때로는 ''팡울로 닝 하링 바얀''("주권 국가의 대통령")으로 줄여 쓰였다.[139][2] 산티아고 알바레스는 ''마그디왕'' 정부와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카티푸난'' 최고 의회를 구별한다.[56]

역사가 추아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 문제는 필리핀 역사에서 보니파시오를 "최고 지도자"로 지칭하고, 이를 "최고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야기했다. "최고 지도자"는 스페인어 ''Presidente Supremo''의 축약형이며, 보니파시오의 실제 칭호인 ''Kataas-taasang Pangulo'' (최고 대통령)를 번역한 것이다. 보니파시오는 "최고 지도자"라는 용어 대신 "팡울로", 즉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추아는 보니파시오가 ''하링 바얀''을 국왕이 아닌, 권력이 백성에게 있다는 "주권 국가"로 이해시키려 했다고 덧붙였다.[2]

1918년, 필리핀 주둔 미군 정부는 마라곤돈에서 보니파시오의 유해를 찾기 위한 수색을 벌였다. 정부 관계자, 전직 반군, 보니파시오의 하인으로 알려진 남자로 구성된 일행은 3월 17일 사탕수수 밭에서 보니파시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했다. 유골은 항아리에 담겨 필리핀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유골은 보니파시오의 서류 및 유품과 함께 마닐라 에르미타의 입법부 건물에 보관되었다. 유골의 진위 여부는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고, 암베트 오캄포에 의해 2001년까지 이의가 제기되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1935년 필리핀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마누엘 L. 케손은 보니파시오를 기억하며 그를 비판했는데, 유골은 아기날도가 이끄는 혁명 정부에 의해 처형된 보니파시오의 결과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필리핀은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유골은 1945년 2월 연합군의 마닐라 탈환 동안 분실되었다.

20세기 초부터 미국 연구자들은 필리핀 혁명의 주역이 부유한 엘리트 지식 계급이라고 주장했지만, 필리핀에서는 1956년 테오도로 아곤실로의 저서 『대중 봉기 -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의 이야기』 출판 이후 보니파시오가 민중의 지도자로서 국민 영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필리핀 혁명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미국과 필리핀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는 가운데, 1997년 오리건 주립 대학교 교수 글렌 앤서니 메이는 『영웅의 날조 - 사후 만들어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상』을 저술하여, 보니파시오에 대한 평가는 학문적인 사료 고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사료나 인터뷰 기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필리핀 혁명이 "지방 권력자층의 지도력 아래 민중을 이끈 독립 혁명이며, 민중이 독자적인 혁명 사상 아래서 싸운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필리핀 연구자 레이날도 일레토는 1998년 『필리핀인과 혁명』에서 메이의 주장에 반론하며, 미국은 필리핀 식민 지배 정당화를 위해 필리핀 혁명을 엘리트층의 봉기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대중층인 보니파시오가 혁명의 영웅이어서는 곤란하다고 비판했다.[149][150][151]

4. 2. 대중문화 속의 보니파시오

호세 리잘은 필리핀의 국민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필리핀 혁명을 시작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역시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114]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필리핀의 국민 영웅이 다른 나라와 달리 "해방군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언급한다.[140] 레나토 콘스탄티노는 리잘이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패배한 후 미국에 의해 홍보된 "미국이 후원한 영웅"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은 평화적인 개혁을 주장한 리잘을 무력 투쟁을 주장한 보니파시오보다 선호했다.[141]

암베스 오캄포는 리잘이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에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보니파시오를 "더 나은" 영웅으로 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다피탄으로 추방되기 전에도 리잘은 이미 필리핀 국민들에게 국민 영웅으로 여겨졌고, ''카티푸난''은 그를 명예 회장으로 추대했다.[114] 레온 마리아 게레로는 리잘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카티푸난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독립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143]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보니파시오가 리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경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40]

리잘과 보니파시오는 모두 필리핀의 국민 영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매년 전국적으로 기념된다. 12월 30일은 ''리잘 데이''이고, 11월 30일은 ''보니파시오 데이''이다.[144] 국가 문화 예술 위원회는 공식적인 선언은 없지만, 리잘과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국민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144]

보니파시오는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연도작품명배역배우비고
1964《안드레스 보니파시오(앙 수프레모)》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디 델 마르
1992《바야니》안드레스 보니파시오훌리오 디아스[147]
1995《바야니》 (TV 시리즈)안드레스 보니파시오훌리오 디아스[147]
1995《1896》 (뮤지컬)안드레스 보니파시오로디 베라필리핀 교육 극장 협회 제작
1998《호세 리잘》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르도 베르소자[147]
2010《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재판》안드레스 보니파시오알프레드 바르가스[147]
《루팡 히니랑》 뮤직 비디오안드레스 보니파시오마크 앤서니 페르난데스[147]GMA
2012《수프레모》안드레스 보니파시오알프레드 바르가스[147]
《엘 프레시덴테》안드레스 보니파시오세자르 몬타노[147]
2013《인디오》 (TV 시리즈)안드레스 보니파시오졸로 레빌라[147]
2013《카티푸난》 (TV 시리즈)안드레스 보니파시오시드 루세로[147]
2014《일루스트라도》 (TV 시리즈)안드레스 보니파시오시드 루세로[147]
2014《보니파시오: 앙 우낭 팡울로》안드레스 보니파시오로빈 파딜라[147]
2015《헤네랄 루나》안드레스 보니파시오니코 안토니오[147]
2018《언리 라이프》안드레스 보니파시오종 힐라리오[147]
2021《퇴역 대령 로드리고 보니파시오 이야기》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릭 데이비드
2021《[https://arete.ateneo.edu/2bayani 2바야니: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게 바치는 록 오페라]》 (뮤지컬)안드레스 보니파시오불렛 듀마스탕할랑 아테네오 제작
2023《곰부르자》안드레스 보니파시오게리 구아리노
2024《핑키안: 이스앙 무지카》 (뮤지컬)안드레스 보니파시오파우 카스티요탕할랑 필리피노 제작



보니파시오는 스페인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을 목표로 한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현재에도 동시대의 민족 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호세 리잘과 함께 많은 필리핀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1951년 발행된 20 필리핀 페소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의 생일인 11월 30일은 보니파시오의 날로서 필리핀의 공휴일이며,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148]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897년 선거필리핀 대통령1대카티푸난31.25%80표2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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