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오 아기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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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1869년 카비테에서 태어나 스페인에 대항하는 혁명에 참여하여 이무스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카비테를 해방시켰다. 1897년 테헤로스 협약에서 혁명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비악나바토 조약 체결 후 홍콩으로 망명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후 필리핀으로 돌아와 독립을 선언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했으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체포되었다. 이후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운동을 중단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과 협력하기도 했다.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국부로 존경받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1964년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일병의 군복 차림으로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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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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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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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밀리오 아기날도 이 파미 |
별칭 | 카피탄 미옹 헤네랄 미옹 카 미옹 엘 카우디요 막달로 에르마노 콜론 |
출생일 | 1869년 3월 22일 |
출생지 | 카비테엘비에호, 카비테 주, 필리핀 총독부, 스페인 제국 |
사망일 | 1964년 2월 6일 |
사망지 | 케손 시티, 필리핀 |
안장 장소 | 아기날도 신사, 카윗, 카비테 주, 필리핀 |
배우자 | 힐라리아 델 로사리오 (1896년 결혼, 1921년 사망) 마리아 아곤실로 (1930년 결혼, 1963년 사망) |
자녀 | 5명 |
학력 | 산후안 데 레트란 대학교 |
직업 | 정치인 군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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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국가사회당 (1935–1936) 무소속 (1935년 이전) |
대통령 직함 | 필리핀 대통령 필리핀 혁명 정부 대통령 비악나바토 공화국 대통령 테헤로스 혁명 정부 대통령 |
필리핀 대통령 임기 시작 | 1899년 1월 23일 |
필리핀 대통령 임기 종료 | 1901년 4월 19일 |
혁명 정부 대통령 임기 시작 | 1898년 6월 23일 |
혁명 정부 대통령 임기 종료 | 1899년 1월 23일 |
비악나바토 공화국 대통령 임기 시작 | 1897년 11월 2일 |
비악나바토 공화국 대통령 임기 종료 | 1897년 12월 14일 |
테헤로스 혁명 정부 대통령 임기 시작 | 1897년 3월 22일 |
테헤로스 혁명 정부 대통령 임기 종료 | 1897년 11월 1일 |
초대 총리 |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1899년 1월 23일 – 5월 7일) 페드로 파테르노 (1899년 5월 7일 – 11월 13일) |
혁명 정부 총리 |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1899년 1월 2일 – 23일) |
전임 필리핀 대통령 | 직책 신설 |
후임 필리핀 대통령 | 미겔 말바르 마누엘 L. 케손 |
혁명 정부 전임 대통령 | 직책 신설 |
혁명 정부 후임 대통령 | 직책 폐지 |
비악나바토 공화국 부통령 | 마리아노 트리아스 |
테헤로스 혁명 정부 부통령 | 마리아노 트리아스 |
군사 경력 | |
소속 | 필리핀 혁명군 |
복무 기간 | 1896년–1901년 |
계급 | 원수 |
전투 | 필리핀 혁명 카윗 반란 이무스 전투 탈리사이 전투 비나카얀 전투 1896 파테로스 전투 사포테 다리 전투 나익 전투 푸라이 산 전투 알리아가 전투 미국-스페인 전쟁 알라판 전투 마닐라 전투 필리핀-미국 전쟁 마릴라오 강 전투 |
훈장 및 상 | |
수상 내역 | 케손 봉사 십자훈장 필리핀 레지옹 오브 아너 필리핀 대통령 공로 훈장 리잘 기사단 훈장 |
기타 | |
로마자 표기 | Emilio Aguinaldo y Famy |
출신 가족 성 | 파미 |
2. 생애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69년 3월 22일 스페인령 필리핀 카비테 엘 비에호(현재의 카윗)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 부왕령 행정부에서 임명한 고베르나도르시요(지방 행정관)를 역임하여 아기날도 가문은 부유했다.[6]
아기날도는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1882년 콜레라 발생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895년 마우라 법에 따라 바랑가이장이 되었고, 25세에 카비테 엘 비에호의 초대 고베르나도르시요 카피탄 무니시팔(지방 행정관 겸 주장)이 되었다.
1896년 1월, 아기날도는 히라리아와 결혼했다.[54] 같은 해 8월, 마닐라에서 시작된 혁명이 확대되면서 이무스 전투에 참여하여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였다.[9] 9월 3일에는 비나카얀-달라히칸 전투에서 승리하여 필리핀 독립 투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895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비밀 조직 카티푸난에 가입하여 마갈달로라는 전쟁 이름을 사용했다.[7] 1896년 8월, 필리핀 혁명이 시작되자, 카윗 봉기를 시작으로, 이무스 전투와 사포테 다리 전투 등에서 스페인군에 맞서 승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897년 3월 22일, 테헤로스 협약에서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보니파시오는 이 결과에 불복하고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혁명 정부의 지도권을 확립했다.[16][17][18]
스페인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비악나바토로 후퇴하여 비악나바토 공화국을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페드로 파테르노의 중재로 스페인과 비악나바토 조약을 체결, 망명길에 올라 홍콩 준타를 조직하고 혁명 정부를 재편했다.
1898년 4월 25일,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1898년 5월 1일, 마닐라 만 해전에서 미 함대는 스페인 해군의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고 마닐라를 봉쇄했다. 며칠 후, 듀이는 USS ''McCulloch''함에 아기날도를 태워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수송하는 데 동의했다. 5월 19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에 도착하여 즉시 혁명군 지휘를 재개하고 마닐라를 포위했다.
1898년 5월 24일 아기날도는 암브로시오 리안자레스 바우티스타의 조언에 따라 선포문을 발표하고, 독재 정부를 수립하여 스스로 독재자가 되었다. 1898년 5월 28일, 카비테주 이무스의 알라판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필리핀 국기를 처음으로 펼쳐 카비테 누에보(현재의 카비테 시티)에서 게양했다.
1898년 6월 12일, 카비테 비에호(Cavite El Viejo)에 있는 자신의 저택(아기날도 사당)에서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898년 6월 18일, 독재 정부를 공식적으로 수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898년 6월 23일,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권고에 따라 독재 정부를 혁명 정부로 대체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후, 듀이 제독은 아기날도에게 모젤 소총 등 무기를 제공했다.[70] 아기날도는 1898년 5월 24일 필리핀 독립 전쟁 재개를 선언하고, 1898년 5월 28일 스페인 해군 상륙대를 제압했다. 1898년 6월 12일 카우이트 자택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포했다.[72]
1898년 6월, 미국은 듀이 제독 요청의 3배인 1만 5천 명의 미국 육군 부대 파병을 결정했고, 7월 말에는 1만 명이 넘는 미국 육군 부대가 마닐라에 도착했다.[74] 1898년 8월 13일 미국군은 마닐라에 단독으로 입성했고, 스페인 식민 정부는 미국군에 항복했다.[76]
미국군과 스페인군의 밀약으로 마닐라 입성에 실패한 필리핀 혁명군과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898년 9월 9일 말롤로스로 이동하여 혁명 의회를 개최했다.[77] 1899년 1월 21일 말롤로스 헌법을 공포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899년 1월 23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78]
1899년 1월 4일, 마닐라 주둔 미군 오티스 총사령관은 필리핀 영유를 선언했고, 아기날도를 비롯한 필리핀 국민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월 5일 산후안 다리 사건으로 필리핀 측에서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필리핀 혁명 정부와 미국 사이에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했다.[84]
필리핀군은 미국군에 계속 패배했고, 내부 갈등까지 겹치면서 안토니오 루나 준장을 숙청하여 내부를 정비했다. 1899년 11월 11일 패주 중 바얀반에서 게릴라전으로 전환을 지시하고, 1900년 8월 마지막 거점인 이사벨라 주 팔라난에 도착했지만, 1901년 3월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85]
1901년 3월 23일, 프레드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마카베베 정찰대의 도움으로 이사벨라주 팔라난에 있는 그의 본부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19일, 미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였고, 이로써 공식적으로 제1공화국은 종식되었으며 미국의 필리핀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14][15]
1935년, 필리핀 코먼웰스가 되었고, 1935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누엘 케손에게 패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 미국의 보호령이었던 필리핀 코먼웰스에 일본군이 진격해오자,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1943년 10월 14일 호세 라우렐 대통령 하에 필리핀 제2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했을 때, 독립 기념식에 참석했다.
미군의 필리핀 반격전 이후, 다시 미국이 코먼웰스 정부와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오자, 대일 협력자로 체포되어 팔라완섬의 이와히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6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에 의해 사면을 받고 석방되었으며,[93] 같은 해 7월 4일 필리핀 제3공화국이 독립을 달성했을 때, 독립 기념식에서 필리핀 국기를 높이 게양했다.
1964년 2월 6일, 95세를 일기로 마닐라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했다.[36] 그의 유해는 카비테주 카윗에 있는 그의 거주지에 안장되었다.[39][40][4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69년 3월 22일 스페인령 필리핀 카비테 엘 비에호(현재의 카윗)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는 카를로스 아기날도로, 스페인 부왕령 행정부에서 임명한 고베르나도르시요(지방 행정관)를 역임하여 아기날도 가문은 부유했다.[6]아기날도는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1882년 콜레라 발생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895년 마우라 법에 따라 바랑가이장이 되었고, 25세에 카비테 엘 비에호의 초대 고베르나도르시요 카피탄 무니시팔(지방 행정관 겸 주장)이 되었다.
1896년 1월, 아기날도는 이무스 출신의 히라리아와 결혼했다.[54] 같은 해 8월, 마닐라에서 시작된 혁명이 확대되면서 카윗에서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무스 전투에 참여하여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였다.[9] 9월 3일에는 비나카얀-달라히칸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필리핀 독립 투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2. 1. 1. 출생과 유년기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69년 3월 23일[5] 스페인령 필리핀 루손섬의 카비테에서 카를로스 아기날도와 트리니다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성 금요일이었으며, 카윗 마을은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3일째 계속되는 진통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아이에 대한 기대가 어려워지자, 아버지 칼로스는 폭죽을 터뜨리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놀란 트리니다드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낳았다.필리핀인과 중국인, 타갈로그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으나 아기날도의 집안은 필리핀 카비테주(州)의 명문가였다. 그가 3세가 되었을 때 홍역을 앓은 직후 1872년 카비테 지역에 반스페인 폭동으로 혼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소요에 당황한 친척들은 그를 작은 나무 아래 방치해놓은 채 피신했다. 후에 에밀리오를 찾았을 때는 개미에 물려 온몸이 부어 올랐으며 너무 울어서 목소리도 완전히 쉰 상태였다. 야생 늑대와 호랑이, 들개 등이 다녔는데도 방치된 상태에서 그는 극적으로 생존했다. 그는 홍역이 재발하여 빈사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후일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대학에서 공부했다.
아기날도 가족은 상당히 부유했는데, 그의 아버지 카를로스 아기날도는 스페인 부왕령 행정부에서 임명된 고베르나도르시요(지방 행정관)였다.[6] 그는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1882년 콜레라가 발생하여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1895년 지방 정부 개편을 촉구한 마우라 법에 따라 바랑가이장이 되었고, 25세에 민도로에서 사업 여행 중에 카비테 엘 비에호의 첫 번째 고베르나도르시요 카피탄 무니시팔(지방 행정관 겸 주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렸지만 회복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마닐라의 산 후안 데 레트란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1882년 콜레라로 인해 고등학교가 폐쇄된 후 복학하지 않고 13세에 학업을 마쳤다.[51] 이후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업을 도왔고, 그 후 형 베니그노 아기날도가 병사하자 연령 제한에 대한 특례가 인정되어 17세에 형이 맡았던 카우이트의 비나야칸 지역 바랑가이의 장을 계승했다.[52]
2. 1. 2. 청소년기
에밀리오 아기날도 이 파미(Emilio Aguinaldo y Famy)는 1869년 3월 22일 카비테 주(Cavite) 카비테 엘 비에호(Cavite el Viejo, 현재 카윗)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카를로스 아기날도 이 하미르(Carlos Aguinaldo y Jamir)와 트리니다드 파미 이 비야누에바(Trinidad Famy y Villanueva)였다. 그는 여덟 명의 자녀 중 일곱 번째였고,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ism) 세례를 받고 자랐다.[5] 아기날도 가족은 부유했는데, 아버지 카를로스는 스페인(Spanish) 부왕령(Viceregal) 행정부에서 지역의 임명된 고베르나도르시요(gobernadorcillo, 지방 행정관)였다.[6]어머니 트리니다드는 그에게 글을 쓰고 읽는 법을 가르쳤고, 여러 전설과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 중에는 필리핀의 오래된 전설인 나방과 호롱불 이야기가 있었다. 훗날 호세 리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불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이를 위해 죽는 것이 영예로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기날도는 밝은 불빛은 위험한 것이며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Colegio de San Juan de Letran)에서 공부했지만, 1882년 콜레라(cholera) 발생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1878년 아버지 칼로스가 사망한 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과 잡역부로 일했다. 어머니를 도와 작은 농장을 일구었으며, 돈을 모아 작은 공장을 경영했다. 작은 배를 구입하여 민도로와 비사야 지역으로 소금과 볼로 등을 운반하는 운송업을 하였으며 카비테로 등나무, 왁스, 섬유, 탠 껍질 등의 상품들을 운반했다. 그는 또한 마닐라로 가축, 물소 등을 판매하러 다니기도 했다.
성인이 되자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그가 스페인 군인에 강제 징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의 세금 징수 등을 하는 마을 공무원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후에 그는 카윗 지방관으로 승진했다. 1895년, 그는 바랑가이장(Cabeza de Barangay, 바랑가이 우두머리)이 되었다. 25세에 아기날도는 민도로(Mindoro)에서 사업 여행 중에 카비테 엘 비에호의 첫 번째 고베르나도르시요 카피탄 무니시팔(gobernadorcillo capitan municipal, 지방 행정관 겸 주장)이 되었다.
2. 2. 필리핀 혁명
1895년, 아기날도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비밀 조직 카티푸난에 가입하여 마갈달로라는 전쟁 이름을 사용했다.[7] 1896년 8월, 카티푸난 주도의 필리핀 혁명이 산 후안 델 몬테에서 시작되자, 아기날도는 카윗 봉기를 시작으로, 이무스 전투와 사포테 다리 전투 등에서 스페인군에 맞서 승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897년 3월 22일, 테헤로스 협약에서 아기날도는 부재중임에도 불구하고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이 결과에 불복하고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혁명 정부의 지도권을 확립했다.[16][17][18]
스페인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아기날도는 비악나바토로 후퇴하여 비악나바토 공화국을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페드로 파테르노의 중재로 스페인과 비악나바토 조약을 체결, 망명길에 올라 홍콩 준타를 조직하고 혁명 정부를 재편했다.
2. 2. 1. 스페인에 대한 초기 저항
산토 토마스 대학을 졸업한 아기날도는 호세 리잘의 금서 '놀리 미 탕게레'를 소지하고 프리메이슨 조직에 가담하는 등 스페인에 대한 저항 의식을 키웠다.[7] 1894년 필리핀 총독부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도 비밀결사 카티푸난(Katipunan)에 가담, '막달로'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했다.[97] 1895년에는 카비테 시장에 당선됨과 동시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조직한 카티푸난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896년 8월, 필리핀 혁명이 발발하자 아기날도는 카티푸난의 지역 책임자로서 카윗 봉기를 이끌었다. 그는 볼로맨 군대를 이끌고 카윗 마을 중심부를 기습 점령, 무기를 탈취하고 마갈달로 깃발을 게양하며 봉기의 성공을 알렸다.[8]
아기날도는 이무스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승리하고,[9] 사포테 다리 전투에서는 에딜베르토 에반헬리스타(Edilberto Evangelista)가 전사하는 와중에도 스페인군을 격퇴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전투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파송 산톨(Pasong Santol)에 부대를 배치하여 스페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테헤로스 협약(Tejeros Convention)에서 아기날도는 부재중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크리스풀로 아기날도(Crispulo Aguinaldo)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파송 산톨에서의 전투 지휘를 위해 취임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아기날도는 대통령직을 수락하고 최고사령관(Generalissimo)으로 취임 선서했다.[10][11]
16세기 이후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던 필리핀에서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를 중심으로 카티푸난(Katipunan)이 결성되었다. 아기날도는 호세 리살(José Rizal) 등이 참여한 프리메이슨(Freemason)에 참여했고,[55] 1895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만나 카티푸난에 가입했다.[56]
1896년 8월, 카티푸난의 봉기 계획이 발각되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푸가드로인의 함성'을 외치며 무장봉기를 선언했다.[57] 그러나 보니파시오군은 스페인군에 패배했고,[58] 아기날도는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이무스 전투와 비나야칸 전투(Battle of Binakayan)에서 승리하며 카비테(Cavite)주를 해방시켰다.[59]
1897년, 스페인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아기날도는 파손산톨 전투에서 형제인 크리스풀로 아기날도(Crispulo Aguinaldo)를 잃고, 거점을 나이크(Naic)로 이동했다.[62] 이후 카티푸난 내부 갈등 속에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처형하고 지도권을 장악했다.[64]
2. 2. 2. 보니파시오와의 갈등
1896년 8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루손에서 반스페인 봉기를 일으켰으나 스페인 군대에 패배했다. 그러나 그의 부관 중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계속 저항했다.[58] 필리핀 총독 프리모 데 리베라가 반란자들을 색출하면서 보니파시오의 군사적 무능함이 드러났다. 1897년 3월 테헤로스 협약에서 보니파시오 대신 아기날도가 필리핀 공화국 혁명정부의 새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보니파시오는 이에 반발했다.아기날도는 혁명군을 이끌고 1897년 3월 22일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고 혁명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가 독자적인 활동을 하려 하자, 1897년 4월 아기날도는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5월에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생을 분티스 산에서 처형했다.[64]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 형제를 사면하고 유배 보낼 것을 명령했지만, 피오 델 필라르와 마리아노 노리엘 등 다른 혁명 장군들이 단결을 위해 명령 철회를 강요했다.[64] 아기날도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면 명령 철회가 즉각적인 사형 집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노리엘이 이를 잘못 해석하고 성급하게 행동했다고 밝혔다. 그는 감정이 가라앉을 시간을 갖고 보니파시오 형제가 용서받기를 바랐다고 말한다.[64]
마닐라 근처 카비테 주에서 마갈달로와 마그디왕 파벌 간의 갈등으로 회의가 열렸다. 보니파시오는 이미 카티푸난을 정부로 간주했지만, 이에 동의하여 1897년 3월 22일 테헤로스 협약을 주재했다. 아기날도는 군사 문제에 몰두하여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마리아노 트리아스는 부통령, 아르테미오 리카르테는 육군 원수, 에밀리아노 리에고 데 디오스는 전쟁 국장,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내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보니파시오의 자격에 대한 다니엘 티로나의 의문 제기로 결과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보니파시오는 모욕감을 느껴 회의 해산 및 무효를 선언했다. 무효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기날도는 3월 23일 최고사령관(Generalissimo) 직책을 취임 선서했다.[10][11]
2. 2. 3. 혁명 정부 수립과 망명
아기날도는 임시 혁명정부를 전국적인 정부로 구상했지만 필리핀 총독부의 세력이 강했다. 그는 필리핀 용병들에 의해 계속 보강되던 스페인 군대를 무력으로 타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1897년 12월 초 아기날도의 혁명정부군은 필리핀 총독부와의 교전에서 패하고 마닐라 남동쪽 산악지역으로 밀려났다. 그는 결국 필리핀 총독 프리모 데 리베라의 회유책을 받아들여 한때 홍콩으로 출국하였다.[66]1897년 12월 15일, 필리핀 총독 프리모 데 리베라와 비아크나바토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의해 필리핀 혁명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스페인이 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는 대신 아기날도는 스페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필리핀을 영구히 떠나기로 했다. 아기날도와 다른 혁명 지도자들은 무력투쟁 포기 대가로 홍콩 망명과 및 스페인의 실질적인 정치개혁과 자치 운동 허락 약속을 수용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폭압적으로 통치했다.
사포테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기날도는 카비테 대부분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스페인의 위협에 주의를 돌렸다. 그는 이무스(Imus)로 가는 길목인 페레스 다스마리냐스(Perez Dasmariñas)의 병목 지점인 파송 산톨(Pasong Santol)에 그의 부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스페인군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자연 방어 지형을 통해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월 19일, 필리핀군의 방어 및 탈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랑(Silang)은 스페인의 맹공격에 함락되었다. 9일 후, 스페인군은 다스마리냐스(Dasmariñas)로 진격하여 마을을 탈환했다. 일주일 후, 스페인군은 아기날도의 수도인 이무스(Imus)로 이동하면서 포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다시 공격했다. 한편, 3월 22일 테헤로스 협약(Tejeros Convention)에서 아기날도는 부재중에 개편된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비센테 리에고 데 디오스(Vicente Riego de Dios) 대령이 아기날도를 데리러 파송 산톨(Pasong Santol)로 파견되었으나, 아기날도는 이를 거부했다. 크리스풀로 아기날도(Crispulo Aguinaldo)가 그와 대화하러 갔지만, 아기날도는 다스마리냐스에서 스페인의 곧 있을 공격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것을 주저했다. 크리스풀로는 3월 7일부터 교착 상태에 빠진 전투에서 아기날도의 지휘권을 넘겨받았고, 아기날도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기 위해 산프란시스코 데 말라본(San Francisco de Malabon)(현재 헤네랄 트리아스(General Trias), 카비테)으로 이동했다.[11]
마닐라 근처 카비테 주에서 마그달로(Magdalo)와 마그디왕(Magdiwang) 파벌 간의 갈등으로 카비테 주 이무스(Imus)에서 보니파시오(Bonifacio) 주재로 회의가 열렸다. 카비테의 반군들은 카티푸난(Katipunan) 대신 혁명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니파시오는 이미 카티푸난을 정부로 간주했지만, 이에 동의하여 1897년 3월 22일 카비테주 산프란시스코 데 말라본(San Francisco de Malabon)의 테헤로스(Tejeros)에서 열린 협약을 주재했다. 아기날도는 이무스에서 군사 문제에 몰두하고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마리아노 트리아스(Mariano Trias)는 부통령, 아르테미오 리카르테(Artemio Ricarte)는 육군 원수, 에밀리아노 리에고 데 디오스(Emiliano Riego de Dios)는 전쟁 국장,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는 내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보니파시오의 자격에 대한 다니엘 티로나(Daniel Tirona)의 의문 제기로 결과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보니파시오는 모욕감을 느껴 "나는 이 회의의 의장이자 여러분 모두가 부인하지 않는 카티푸난 최고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이 회의를 해산하며, 승인되고 결의된 모든 것을 무효로 선언한다."라고 선언했다. 무효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기날도는 몰래 산프란시스코 데 말라본(San Francisco de Malabon)으로 이동하여 3월 23일 저녁 필리핀 제도의 최고사령관(Generalissimo)으로 선출된 직책을 취임 선서했다.[10]
스페인군의 공격으로 아기날도 지휘하의 혁명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897년 6월 24일, 아기날도는 불라칸 주 산미구엘의 비악나바토에 도착하여 현재 비악나바토 국립공원의 "아기날도 동굴"이라 불리는 곳에 본부를 설치했다. 1897년 10월 말, 아기날도는 비악나바토에서 장군 회의를 소집하여 헌법 공화국 수립을 결정했다. 쿠바 헌법을 본떠 이사벨로 아르타초와 펠릭스 페레르가 작성한 헌법은 대통령, 부통령, 전쟁부 장관, 재무부 장관으로 구성된 최고 의회 설립을 규정했고,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97년 3월, 스페인 필리핀 총독 페르난도 프리모 데 리베라(에스텔라 후작)는 저명한 필리핀인들에게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아기날도와 접촉하도록 장려했다. 8월 9일, 마닐라 변호사 페드로 파테르노는 개혁과 사면을 기반으로 한 평화 제안을 가지고 비악나바토에서 아기날도를 만났다. 그 후 몇 달 동안 파테르노는 데 리베라와 아기날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셔틀 외교를 수행했다. 1897년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아기날도는 비악나바토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 조약에서 아기날도는 사실상 적대 행위 종식과 정부 해산에 동의하고, 그 대가로 사면과 배상금 80만 멕시코 페소를 받기로 합의했다. 12월 23일, 아기날도와 다른 혁명 관리들은 자발적 망명을 위해 홍콩으로 떠났다. 배상금의 첫 번째 할부금인 가 홍콩 은행에 예치되었다. 망명 중 아기날도는 그의 혁명 정부를 "홍콩 준타"로 재편하고 "국가 최고 의회"로 확대했다.
2. 3. 미국-스페인 전쟁과 필리핀 제1공화국
1897년 사포테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스페인의 새로운 위협에 맞서 카비테 대부분을 탈환하고자 했다. 그는 이무스로 가는 길목인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파송 산톨에 부대를 배치하여 스페인군의 이동을 막고,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다. 그러나 1897년 2월 19일, 실랑이 스페인의 공격에 함락되었고, 9일 후 스페인군은 다스마리냐스를 탈환했다. 3월 22일 테헤로스 협약에서 아기날도는 부재중에 개편된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기날도는 다스마리냐스에서 스페인의 공격이 임박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형인 크리스풀로 아기날도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자신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위해 산프란시스코 데 말라본(현재의 헤네랄 트리아스, 카비테)으로 이동했다.[11]1898년 4월 25일,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주로 쿠바에 집중되었지만, 미국 해군의 아시아 함대는 홍콩에 있었고, 조지 듀이 준장의 지휘 아래 필리핀으로 향했다. 1898년 5월 1일, 마닐라 만 해전에서 미 함대는 스페인 해군의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고 마닐라를 봉쇄했다. 며칠 후, 듀이는 USS ''McCulloch''함에 아기날도를 태워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수송하는 데 동의했다. 5월 19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에 도착하여 즉시 혁명군 지휘를 재개하고 마닐라를 포위했다.
1898년 5월 24일 아기날도는 암브로시오 리안자레스 바우티스타의 조언에 따라 선포문을 발표하고, 독재 정부를 수립하여 스스로 독재자가 되었다. 독재 정부는 평화 수립과 자유 획득까지 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 딘 우스터는 아기날도가 '대통령' 칭호를 사용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봉건 영주로 여겼다고 기록했다.[12]
1898년 5월 28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주 이무스의 알라판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는 필리핀 국기를 처음으로 펼쳐 카비테 누에보(현재의 카비테 시티)에서 게양했다. 국기의 날은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 28일에 기념된다.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는 카비테 비에호(Cavite El Viejo)에 있는 자신의 저택(아기날도 사당)에서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898년 6월 18일, 그는 독재 정부를 공식적으로 수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898년 6월 23일, 아기날도는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권고에 따라 독재 정부를 혁명 정부로 대체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후, 듀이 제독은 아기날도에게 모젤 소총 등 무기를 제공했다.[70] 아기날도는 1898년 5월 24일 필리핀 독립 전쟁 재개를 선언하고, 1898년 5월 28일 스페인 해군 상륙대를 제압했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필리핀 깃발을 게양했고, 1898년 5월 31일부터 스페인군 공격에 나섰다.[71] 1898년 6월 12일 카우이트 자택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포했다.[72] 독립 선언에 앞서 아기날도는 훌리안 펠리페에게 독립식에 사용할 곡 작곡을 의뢰했고, 펠리페는 「필리핀 행진곡」을 작곡하여 필리핀 국가로 채택되었다.[73]
1898년 6월, 미국은 듀이 제독 요청의 3배인 1만 5천 명의 미국 육군 부대 파병을 결정했고, 7월 말에는 1만 명이 넘는 미국 육군 부대가 마닐라에 도착했다.[74] 아기날도 군은 스페인 식민 정부를 인트라무로스로 몰아넣었다.[75] 1898년 8월 13일 미국군은 마닐라에 단독으로 입성했고, 스페인 식민 정부는 미국군에 항복했다.[76]
미국군과 스페인군의 밀약으로 마닐라 입성에 실패한 필리핀 혁명군과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898년 9월 9일 아기날도는 말롤로스로 이동하여 혁명 의회를 개최했다.[77] 1899년 1월 21일 말롤로스 헌법을 공포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899년 1월 23일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78] 아기날도는 1898년 일본에 마리안 폰세를 파견했다.[79] 폰세는 일본 정부 요인들과 친분을 맺었고, 일본 육군이 청일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를 필리핀 혁명 정부에 보내려 했으나, 부인키마루 사건으로 실패했다.[80]
2. 3. 1. 독립 투쟁 재개
아기날도는 홍콩에서 무기 구입 자금을 마련하고, 미국 영사관과 미군 사령관 조지 듀이가 파견한 대표들을 만나 필리핀으로 돌아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미군을 돕기로 했다.1898년 5월 1일 미 해군 사령관 조지 듀이가 마닐라 만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자, 아기날도는 즉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해 5월 19일 그는 스페인과의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다. 1898년 여름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아기날도는 미 해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스페인군에 대항했다.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는 마닐라 카비테에서 필리핀 국기와 필리핀 국가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카비테에서 독립을 선언한 후 말로로스에 임시 수도를 설치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적 헌법 제정을 위한 혁명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어 필리핀인들의 과도 정부를 수립하면서 아기날도는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9월 혁명 의회가 소집되어 필리핀 독립을 인준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혁명 정부에 넘기지 않고 괌,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미국에 양도했다. 이로써 미국이 필리핀 통치권을 갖게 되었고, 아기날도는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포테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기날도는 카비테 대부분을 탈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무스로 가는 길목인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파송 산톨에 부대를 배치하여 스페인군의 이동을 막고, 자연 방어 지형을 활용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1897년 2월 19일, 실랑이 스페인의 공격에 함락되었고, 9일 후 스페인군은 다스마리냐스를 탈환했다. 3월 22일 테헤로스 협약(Tejeros Convention)에서 아기날도는 부재중에 개편된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기날도는 다스마리냐스에서 스페인의 공격이 임박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형인 크리스풀로 아기날도(Crispulo Aguinaldo)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자신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위해 산프란시스코 데 말라본(현재의 헤네랄 트리아스(General Trias), 카비테)으로 이동했다.[11]
1898년 4월 25일,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주로 쿠바에 집중되었지만, 미국 해군의 아시아 함대는 홍콩에 있었고, 조지 듀이 준장의 지휘 아래 필리핀으로 향했다. 1898년 5월 1일, 마닐라 만 해전에서 미 함대는 스페인 해군의 태평양 함대를 격파하고 마닐라를 봉쇄했다. 며칠 후, 듀이는 USS ''McCulloch''함에 아기날도를 태워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수송하는 데 동의했다. 5월 19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에 도착하여 즉시 혁명군 지휘를 재개하고 마닐라를 포위했다.
아기날도는 1898년 5월 24일 카비테에서 군사 고문 암브로시오 리안자레스 바우티스타의 조언에 따라 선포문을 발표하고, 독재 정부를 수립하여 스스로 독재자가 되었다. 독재 정부는 평화 수립과 자유 획득까지 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 딘 우스터는 아기날도가 '대통령' 칭호를 사용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봉건 영주로 여겼다고 기록했다.[12]
1898년 5월 28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주 이무스의 알라판에서 스페인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는 필리핀 국기를 처음으로 펼쳐 카비테 누에보(현재의 카비테 시티)에서 게양했다. 국기의 날은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 28일에 기념된다.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는 카비테 비에호(Cavite El Viejo)에 있는 자신의 저택(Aguinaldo Shrine)에서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898년 6월 18일, 그는 독재 정부를 공식적으로 수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898년 6월 23일, 아기날도는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권고에 따라 독재 정부를 혁명 정부로 대체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후, 듀이 제독은 아기날도에게 모젤 소총 등 무기를 제공했다.[70] 아기날도는 1898년 5월 24일 필리핀 독립 전쟁 재개를 선언하고, 1898년 5월 28일 스페인 해군 상륙대를 제압했다.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필리핀 깃발을 게양했고, 1898년 5월 31일부터 스페인군 공격에 나섰다.[71] 1898년 6월 12일 카우이트 자택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포했다.[72] 독립 선언에 앞서 아기날도는 훌리안 펠리페에게 독립식에 사용할 곡 작곡을 의뢰했고, 펠리페는 「필리핀 행진곡」을 작곡하여 필리핀 국가로 채택되었다.[73]
1898년 6월, 미국은 듀이 제독 요청의 3배인 1만 5천 명의 미국 육군 부대 파병을 결정했고, 7월 말에는 1만 명이 넘는 미국 육군 부대가 마닐라에 도착했다.[74] 아기날도 군은 스페인 식민 정부를 인트라무로스로 몰아넣었다.[75] 1898년 8월 13일 미국군은 마닐라에 단독으로 입성했고, 스페인 식민 정부는 미국군에 항복했다.[76]

미국군과 스페인군의 밀약으로 마닐라 입성에 실패한 필리핀 혁명군과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898년 9월 9일 아기날도는 말롤로스로 이동하여 혁명 의회를 개최했다.[77] 1899년 1월 21일 말롤로스 헌법을 공포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899년 1월 23일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78] 아기날도는 1898년 일본에 마리안 폰세를 파견했다.[79] 폰세는 일본 정부 요인들과 친분을 맺었고, 일본 육군이 청일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를 필리핀 혁명 정부에 보내려 했으나, 부인키마루 사건으로 실패했다.[80]
2. 3. 2. 필리핀 제1공화국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는 카비테 비에호(Cavite El Viejo)에 있는 자신의 저택(Aguinaldo Shrine)에서 스페인으로부터의 필리핀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72] 그는 이 선언이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에 맞서 싸울 것을 고무할 것이라고 믿었다. 독립 선언에 앞서 아기날도는 군악대장 훌리안 펠리페에게 독립식에 사용할 곡의 작곡을 의뢰했고, 훌리안 펠리페는 「라 마르세이예즈」를 염두에 두고 「필리핀 행진곡」을 작곡하여, 독립 선언과 함께 새롭게 제정된 필리핀 국기와 함께 필리핀 국가로 채택되었다.[73] 현재도 6월 12일은 필리핀의 독립 기념일로 기념된다.
6월 18일, 아기날도는 독재 정부를 공식적으로 수립하는 법령을 발표했으며, 이 법령에는 지방 정부의 조직과 혁명 의회의 설립 및 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6월 23일, 아기날도는 그의 고문인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권고에 따라 자신의 독재 정부를 대통령인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혁명 정부로 대체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 법령은 중앙 정부의 조직과 혁명 의회 대의원의 선출 및 설립, 그리고 혁명 정부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내용을 규정했다.
필리핀 제1공화국은 1899년 1월 21일, 불라칸주 말로로스에서 말로로스 헌법이 선포되면서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으며, 1901년 3월 23일 미국군에 의해 이사벨라주 팔라난에서 아기날도가 체포됨으로써 사실상 해체될 때까지 존속했다.
아기날도는 필리핀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혁명 의회에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1899년 1월 21일 말롤로스 헌법을 공포하고,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했다.[78] 1898년 일본에 마리안 폰세를 파견하여, 오쿠마 시게노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누카이 츠요시 등 일본 정부 요인들과 교류했다.[80]
2. 4. 필리핀-미국 전쟁
1898년 10월 1일,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필리핀 혁명 정부 대표로 페리페 아곤실료를 미국에 파견했으나,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의 비공식 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월 10일, 미국과 스페인은 파리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필리핀의 영유권을 2000만달러에 미국에 양도했고, 1899년 2월 6일 미국 상원은 이 조약을 비준했다.[81]1899년 1월 4일, 마닐라 주둔 미군 오티스 총사령관은 필리핀 영유를 선언했고, 아기날도를 비롯한 필리핀 국민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월 5일 산후안 다리 사건으로 필리핀 측에서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필리핀 혁명 정부와 미국 사이에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했다.[84]
필리핀군은 미국군에 계속 패배했고, 내부 갈등까지 겹치면서 아기날도는 안토니오 루나 준장을 숙청하여 내부를 정비했다. 6월 6일 수도를 타락으로 옮기고, 7월 7일 새로운 혁명 의회를 개최했으나, 미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1899년 11월 11일 패주 중 바얀반에서 게릴라전으로 전환을 지시하고, 1900년 8월 마지막 거점인 이사벨라 주 팔라난에 도착했지만, 1901년 3월 아기날도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85]
미국-필리핀 전쟁은 2년 1개월 동안 필리핀군 전사자 12,000명, 미군 전사자 4,000명, 필리핀 민간인 희생자 20만 명을 내고 끝났다.[86]
야마다 미묘는 아기날도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1902년 『필리핀 독립전 이야기――아기날도』를 간행했다. 이 책은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 사회에 필리핀 독립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며, 히라키 하쿠세이는 "아기날도"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오시카와 슌란의 모험 소설 『동양무협단』에는 아기날도를 모델로 한 "아키 나루토"가 등장한다.[88]
2. 4. 1. 미국과의 전쟁
1899년 1월 23일, 아기날도는 말롤로스에서 혁명정부를 다시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아시아 최초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같은 해 2월 4일 밤, 필리핀을 점령하려는 미국에 대항하여 마닐라 외곽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필리핀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장비 부족과 많은 전사자를 내고 2월 5일 새벽에 섬멸되었다.[11]미국이 필리핀을 영유하게 되자, 아기날도는 미국에 대항하는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투가 계속되던 중 아기날도는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은 즉시 필리핀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필리핀 정부는 북쪽으로 피신했고, 그는 1899년 11월에 혁명군을 해체하고 무장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 필리피노 게릴라를 소집하여 미국에 대항했으나, 항전은 2년 만에 진압되었다.[11]
1901년 3월 23일, 프레드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 보병의 과감한 작전으로 루손 북부 팔라난의 야산 비밀 사령부에 은신해 있던 아기날도는 미군 병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미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기로 하고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군에 체포된 이후 필리핀인들에게 미국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미국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11]
1898년 8월 13일, 미국군은 "모의" 마닐라 전투에서 마닐라를 점령했고, 8월 14일에는 웨슬리 메릿 소장을 초대 미국 군정 총독으로 하는 필리핀 제도 미국 군정을 수립했다. 1899년 2월 4일 밤, 필리핀인 한 명이 미군 보초병에게 총에 맞았다. 이 사건은 필리핀-미국 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지며, 1899년 마닐라 전투로 이어졌다. 우월한 미국의 군사 기술로 필리핀군은 도시에서 쫓겨났고, 패배가 거듭됨에 따라 아기날도 정부는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마릴라오 강 전투에서 아기날도는 미국군의 강 건너기를 막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직접 지휘를 맡았다. 미국은 치열한 전투와 강에서 사용된 군함이 필리핀 군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후에야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1899년 11월 13일, 아기날도는 필리핀 국군 잔여 병력을 해산하는 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게릴라전 전략을 수립했다. 이후 아기날도는 계속해서 지휘권을 행사하며 북부 루손으로 도망쳤다.[13]

안토니오 루나는 혁명에서 명성이 높았던 장군이었으나, 아기날도와 종종 의견 충돌을 빚었다. 1899년 6월 2일, 루나는 아기날도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6월 4일, 루나는 아기날도에게 도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6월 5일 카바나투안에 도착한 루나는 혼자 대통령과 소통하기 위해 본부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는 펠리페 부엔카미노 (외무장관 겸 내각 구성원)와 페드로 야놀리노 대위를 만났다. 루나는 아기날도가 누에바 에시하주 산 이시드로로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격분한 루나는 회의가 취소되었다는 말을 왜 듣지 못했냐고 물었다.
루나가 떠나려고 하자 장군과 대위는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광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루나는 야놀리노와 카윗 대대 일부 병력을 만났다. 야놀리노는 루나에게 보로를 휘둘러 머리를 다치게 했다. 야놀리노의 부하들은 루나에게 총을 쏘았고, 다른 부하들은 그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는 광장으로 비틀거리며 나왔고, 로만과 루스카가 그의 도움을 위해 달려왔지만, 그가 죽어가는 동안 그들도 공격받아 총에 맞았고, 로만은 죽고 루스카는 중상을 입었다. 루나는 30개가 넘는 상처를 입었고 "반역자! 암살자!"라고 외쳤다.
루나의 죽음 직후, 양측 모두 혼란에 빠졌다. 미국인들은 심지어 루나가 아기날도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루나의 죽음은 6월 8일에야 공개적으로 발표되었고,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공문은 6월 13일에 발표되었다. 루나의 죽음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단 한 명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판탈레온 가르시아 장군은 1921년에 아기날도로부터 카바나투안에서 루나를 암살하라는 구두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병 때문에 암살에 참여하지 못했다.[22] 아기날도는 루나 암살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고수했다.[23]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필리핀 혁명 정부 대표로 페리페 아곤실료를 미국에 파견했고, 아곤실료는 1898년 10월 1일에 비공식적으로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같은 해 12월 10일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체결된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스페인은 미국에 필리핀의 영유권을 2000만달러에 양도하는 것을 인정했고, 이듬해 1899년 2월 6일에 미국 상원은 파리 조약을 비준했다.[81] 미국 상원은 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2월 4일까지 몬로주의에 기초하여 식민지를 갖는 것에 반대하는 관점에서 파리 조약 비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2월 4일 밤 필리핀 혁명군과 미군의 산후안 다리 발포 사건이 2월 5일의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에 보도된 것이 계기가 되어 2월 6일의 비준이 실현되었다.[82]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필리핀 제도는 합중국의 자유로운 깃발 아래 놓여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 해군은 마한의 대해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더욱이 공화당의 매킨리는 명백한 운명의 이름으로 필리핀 영유를 원했던 것이다.[83]
미국 정세 이전에 필리핀 현지에서는 이미 1899년 1월 4일, 주 마닐라 미국군 오티스 총사령관이 필리핀 영유 선언을 발표했고, 아기날도를 비롯한 필리핀 국민은 일제히 강하게 항의했지만, 필리핀 혁명 정부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월 5일의 산후안 다리 사건으로 필리핀 측에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필리핀 혁명 정부와 미국 사이에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필리핀 전쟁)[84]. 필리핀군은 미국군에 패배를 거듭했고, 내분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기날도는 안토니오 루나 준장을 숙청하여 내부를 다진 후 6월 6일에 수도를 타락으로 이전하고, 7월 7일에 새로운 혁명 의회를 개최했지만, 미국군의 추격은 더욱 진행되어, 1899년 11월 11일 패주 중 바얀반에서 게릴라전으로의 전환을 지시하고, 1900년 8월에는 마지막 거점 이사벨라 주 팔라난에 도착했지만, 이듬해 1901년 3월 아기날도 대통령은 미국군의 포로가 되어, 미국군의 아서 맥아더 2세 군정 장관에 대한 "충성 맹세"와 전군에 대한 휴전을 지시했다.[85] 미·필 전쟁은 2년 1개월에 걸쳐 필리핀군 전사 1만 2,000명, 미국군 전사 4,000명, 필리핀 비전투원 희생자 20만 명을 내고 종결되었다.[86]
2. 4. 2. 안토니오 루나 암살
안토니오 루나는 혁명에서 명성이 높았던 장군이었으나,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종종 의견 충돌을 빚었다. 1899년 6월 2일, 루나는 아기날도가 보낸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나머지 두 통은 받지 못했다). 암베스 오캄포에 따르면, 아기날도가 보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펠리페 부엔카미노가 사건 진행 명령 없이 구금되어 있습니다. 저의 이전 전보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전보에서 저는 당신의 혐의에 대한 근거를 요청했습니다. 긴급히 회신해 주십시오."[19]루나는 세부의 군 사령관인 아르카디오 막실롬에게 전쟁에서 굳건히 버티라는 편지를 썼다. 그는 바얌방에서 먼저 기차를 타고, 그 다음 말을 타고, 결국 세 대의 마차를 이용하여 25명의 부하와 함께 누에바 에시하로 향했다.[20][21] 여정 중 두 대의 마차가 고장나서, 그는 프란시스코 로만 대령과 에두아르도 루스카 대위와 함께 한 대의 마차만으로 이동했고, 이전에 기병 호위병들을 보냈다. 6월 4일, 루나는 아기날도에게 도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6월 5일 카바나투안에 도착하자, 루나는 혼자서 대통령과 소통하기 위해 본부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는 두 사람, 펠리페 부엔카미노 (외무장관 겸 내각 구성원)와 페드로 야놀리노 대위를 만났다. 카윗 대대 사령관이었던 야놀리노는 루나가 복종하지 않아 무장 해제시켰던 옛 적이었고, 한때 미국 자치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던 인물이었다. 루나 장군은 아기날도가 누에바 에시하 주 산 이시드로로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는 타락 주 밤반으로 갔다.) 격분한 루나는 회의가 취소되었다는 말을 왜 듣지 못했냐고 물었다.
루나가 떠나려고 하자 장군과 대위는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광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여전히 격분하고 분노한 루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야놀리노와 카윗 대대 일부 병력을 만났다. 야놀리노는 루나에게 보로를 휘둘러 머리를 다치게 했다. 야놀리노의 부하들은 루나에게 총을 쏘았고, 다른 부하들은 그가 공격자 중 한 명에게 권총을 발사하려고 할 때조차 그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는 광장으로 비틀거리며 나왔고, 로만과 루스카가 그의 도움을 위해 달려왔지만, 그가 죽어가는 동안 그들도 공격받아 총에 맞았고, 로만은 죽고 루스카는 중상을 입었다. 루나는 30개가 넘는 상처를 입었고 "반역자! 암살자!"라고 외쳤다. 그는 서둘러 교회 묘지에 묻혔고, 아기날도는 루나의 장교들과 병력을 전장에서 해임했는데, 여기에는 앙헬레스에 본부를 둔 베나시오 콘셉시온 장군도 포함되었고, 아기날도는 루나가 암살된 날 콘셉시온 장군의 본부를 포위했다.
루나의 죽음 직후, 양측 모두 혼란에 빠졌다. 미국인들은 심지어 루나가 아기날도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루나의 죽음은 6월 8일에야 공개적으로 발표되었고,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공문은 6월 13일에 발표되었다. 루나의 죽음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단 한 명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판탈레온 가르시아 장군은 1921년에 아기날도로부터 카바나투안에서 루나를 암살하라는 구두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병 때문에 암살에 참여하지 못했다.[22] 아기날도는 루나 암살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고수했다.[23]
2. 4. 3. 체포와 투항
마닐라 전투에서 미국군이 승리한 후, 1898년 8월 14일 미국은 군정을 수립하고 웨슬리 메릿 소장을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1899년 2월 4일, 필리핀인이 미군에게 총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필리핀-미국 전쟁이 시작되었고, 마닐라 전투에서 필리핀군은 패배했다. 아기날도 정부는 계속해서 패배하며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13] 마릴라오 강 전투에서 아기날도는 직접 지휘를 맡았지만, 미군은 치열한 전투와 군함 사용으로 필리핀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우위를 점했다.1899년 11월 13일, 아기날도는 필리핀 국군 잔여 병력을 해산하고 게릴라전 전략을 수립한 후, 북부 루손으로 도망쳤다.[13] 1901년 3월 23일, 프레더릭 펀스턴 장군이 이끄는 마카베베 정찰대의 도움으로 아기날도는 이사벨라주 팔라난에서 체포되었다.
1901년 4월 19일, 아기날도는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제1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며 미국의 필리핀 주권을 인정했다.[14][15] 그는 필리핀 국민 대다수가 미국을 지지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평화를 명백히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적대 행위의 완전한 종식과 지속적인 평화"가 필리핀에 필수적이라고 밝혔다.[14][15]
2. 5. 미국 통치 시대
1901년 3월 23일, 프레더릭 펀스턴 장군이 이끄는 마카베베 정찰대의 도움으로 아기날도는 이사벨라주 팔라난에 있는 그의 본부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19일, 아기날도는 미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였고, 이로써 공식적으로 제1공화국은 종식되었으며 미국의 필리핀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필리핀 국민들이 미국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평화를 명백히 지지한다"고 말했고, "적대 행위의 완전한 종식과 지속적인 평화는 필리핀 제도의 복지에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라고 밝혔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필리핀 전역에 걸친 미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14][15]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 미국의 보호령이었던 필리핀 코먼웰스에 일본군이 진격해오자, 아기날도는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필리핀으로 귀국한 아르테미오 리칼테 장군의 귀국을 자택에서 축하하고, 과거 자신을 체포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의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섬에 고립되어 있는 것에 대해, 필리핀인의 독립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맥아더의 친구로서 항복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91] 또한, 바탄 반도 전투 당시 라디오를 통해 맥아더에게 필리핀 병사들의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연설까지 했다.[92]
1943년 10월 14일 호세 라우렐 대통령 하에 필리핀 제2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했을 때, 아기날도는 리칼테와 함께 독립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리칼테와 달리 그 이상의 대일 협력을 하지는 않았다.[92] 그러나 미군의 필리핀 반격전 이후, 다시 미국이 코먼웰스 정부와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오자, 아기날도는 대일 협력자로 체포되어 팔라완섬의 이와히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6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에 의해 사면을 받고 석방되었으며,[93] 같은 해 7월 4일 필리핀 제3공화국이 독립을 달성했을 때, 아기날도는 독립 기념식에서 필리핀 국기를 높이 게양했다.
그 후, 일본의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가 1962년 11월 5일부터 5일간의 일정으로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93세가 된 아기날도는 일시적으로 병원 치료에서 퇴원하여 11월 7일 황태자 부부를 카비테 자택으로 맞이하여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악화되었던 필리핀인들의 대일 감정을 완화시켰다.[94] 1963년 말경 아기날도는 유일한 정통 자서전으로서 『회상록』의 출판을 결심했지만, 95세 생일을 한 달 앞둔 1964년 2월 6일, 『회상록』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95] 타갈로그어로 쓰인 『회상록』은 비서 펠리사 디오크노가 출판을 이어받아, 이스턴 대학교의 루츠 콘드리노 교수에 의해 영역판이 1967년에 출판되었다.
아기날도의 유해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장군의 군복이 아닌, 일병의 군복 차림으로 매장되었다.[96]
2. 5. 1. 은퇴 생활과 독립운동 지원
미국 통치 시대 동안 아기날도는 공직에서 대체로 물러났지만,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들을 계속 지원하고 독립 운동 참전 용사들을 도왔다. 그는 회원들의 연금을 확보하기 위해 '혁명 참전 용사 협회'(Asociación de los Veteranos de la Revolución)를 조직하고, 정부로부터 할부로 토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1907년 반란죄 법(Sedition Act)에 따라 필리핀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불법이었지만, 1919년 10월 30일 수정되었다. 그 후 아기날도는 카윗에 있는 자신의 집을 국기, 혁명, 그리고 독립 선언을 기념하는 기념비로 바꾸었다. 아기날도 사후, 정부는 1964년 6월 그의 저택을 국립 사적지로 지정했다.[24][25]
미국-스페인 전쟁 패배 후인 1901년 4월, 매카더로부터 석방된 아기날도는 고향인 카비테로 돌아가 전직 혁명군 병사들의 생활 지원을 하면서 농업과 연금 수령을 중심으로 한 긴 은퇴 생활에 들어갔다.[89]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7월 29일, 특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 장관은 일본 제국의 가쓰라 다로 내각총리대신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영일동맹을 배경으로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우선권과 조선에서의 일본 제국의 우선권이 상호 인정되었고, 필리핀에서의 미국 제국주의와 조선에서의 일본 제국주의가 미일 양국에 의해 보장되었다.
2. 5. 2. 1935년 대통령 선거
1935년 필리핀은 필리핀 코먼웰스가 되었고, 완전 독립을 위한 10년 간의 과도기의 일환으로 1935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아기날도는 정계에 복귀하여 필리핀 국민사회당(National Socialist Party)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이 당은 독일의 나치당과는 무관하다. 그의 상대는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던 국민당(Nacionalista Party)의 후보 마누엘 케손과 공화당(Republican Party)의 후보 그레고리오 아글리페이였다. 그러나 1901년 미군에게 체포되었던 사실과 보니파시오와 루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서 그를 인기 없는 인물로 만들었고, 케손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하여 전체 득표율의 17.5%만을 얻었다.[26]1935년 9월 17일에 실시된 필리핀 코먼웰스 대통령 선거에는 마누엘 케손, 그레고리오 아글리페이와 함께 필리핀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도 출마했지만, 케손이 69만 7천 표, 아기날도가 17만 9천 표, 아길파이가 14만 8천 표를 얻어 아기날도의 국정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90]
결정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기날도는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믿었다.[26] 그가 승리한 유일한 주인 카비테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케손의 취임식을 방해하고 심지어 암살하기 위해 마닐라에서 집회를 계획했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기날도는 케손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그를 비판했으며, 홀로코스트에서 도망치는 유대인들을 보호하려는 케손의 계획에 반대하면서 반유대주의적인 견해를 표명했다.[27] 1939년 아기날도는 유대인들이 "위험하고" "이기적으로 물질만능주의적"이라는 편견 어린 생각을 반복하며 그의 반유대주의를 강력하게 표명했다.[28]
두 사람은 1941년 케손이 필리핀 독립 선포를 기념하여 국기 게양식을 6월 12일로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2. 6. 제2차 세계 대전
1935년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승인하고, 독립 준비 단계로 필리핀 연방 정부를 수립했다. 아기날도는 초대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마누엘 케손과 경쟁했으나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1년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기 전까지 은거하였다.1946년 7월 4일 마닐라 조약을 통해 미국 정부가 필리핀 독립을 인정했을 때, 아기날도는 77세였다.
2. 6. 1. 일본과의 협력
1942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고 마누엘 케손 등 내각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일본은 아기날도에게 정권을 준다고 회유하여 반미(反美) 선전에 이용했다. 일본은 아기날도에게 연설을 시키고 여러 조약에 서명하게 했으며, 일본군 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꽃 같은 필리핀 젊은이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코레히도르섬에 상륙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방송에 출연시켰다.[4]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 육군이 필리핀을 침공했다. 이 침공은 미국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시킨 진주만 공습 10시간 후에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일본을 존경해 온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단체들을 이전에 지지했던 것처럼 일본 편에 섰다. 그는 일본이 필리핀을 미국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1942년 1월, 아기날도는 친일 임시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자신의 카비테 저택에서 마에다 마사미 장군을 만났다.[4] 2월 1일, 아기날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바탄 전투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미국과 필리핀군에게 일본군에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

미군이 후퇴한 후에도 아기날도는 일본과의 협력을 계속했다. 그는 임시 국무원과 필리핀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임무를 맡은 필리핀 독립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의 괴뢰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아기날도는 또한 헌병대의 반일 저항 세력 탄압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게릴라 전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일본에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29]
1943년 10월 14일 제2 필리핀 공화국 취임식에 참석하여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온 아르테미오 리카르테와 함께 깃발을 게양했다. 일본은 아기날도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했고, 아기날도 자신도 이 제안을 지지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전 대법원 판사 호세 P. 라우렐이 선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날도는 국가 배급 공사(NADISCO)의 책임자가 되어 일본의 전쟁 노력을 위한 주요 상품 배급을 담당하게 되었다.[30]
제2차 세계 대전으로 1941년 미국의 보호령이었던 필리핀 코먼웰스에 일본군이 진격해오자, 아기날도는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하여 필리핀으로 귀국한 아르테미오 리칼테 장군의 귀국을 자택에서 축하하고, 자신을 과거 체포했던 아서 맥아더 2세의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섬에 고립되어 있는 것에 대해, 필리핀인의 독립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맥아더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91] 또한, 바탄 반도 전투 당시 라디오를 통해 맥아더에게 필리핀 병사들의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연설까지 했다.[92]
2. 6. 2. 체포와 사면
1941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자, 아기날도는 일본 편에 섰다. 그는 일본이 필리핀을 미국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1942년 1월, 아기날도는 자신의 카비테 저택에서 마에다 마사미 장군을 만나 친일 임시 정부 수립을 논의했다.[4] 1942년 2월 1일에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바탄 전투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미국과 필리핀군에게 일본군에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미군이 후퇴한 후에도 아기날도는 일본과의 협력을 계속했다. 그는 임시 국무원과 필리핀 독립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아기날도는 헌병대의 반일 저항 세력 탄압에도 협력하여 게릴라 전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일본에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29] 1943년 10월 14일 제2 필리핀 공화국 취임식에 참석하여 도조 히데키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온 아르테미오 리카르테와 함께 깃발을 게양했다. 아기날도는 국가 배급 공사(NADISCO)의 책임자가 되어 일본의 전쟁 노력을 위한 주요 상품 배급을 담당하게 되었다.[30]
1944년 10월 미군이 필리핀으로 돌아온 후, 아기날도는 체포되어 마닐라 전투 중에 마킹 게릴라 저항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미 육군 방첩대의 조사 동안 가택 연금되었으며, 일본과의 협력 혐의로 반역죄 11개 혐의로 기소되었다.[31]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에 협조했던 인사들을 체포할 때 함께 체포되어 빌리비드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1년 만에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48년 1월 28일,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록사스는 일본 제국과 협력한 모든 필리핀인들에게 사면을 발표했고, 그 결과 아기날도에 대한 혐의는 취하되었다.
2. 7. 말년과 죽음
아기날도는 1962년 10월 5일 케손 시티의 재향군인 기념 의료 센터(Veterans Memorial Medical Center, VMMC)에 입원하여 469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1958년, 필리핀 언론인 기예르모 고메스 리베라가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있는지 질문했을 때, 아기날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32]
2. 7. 1. 독립 이후 활동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에 협조했던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빌리비드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1년 만에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32] 1950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아기날도를 국가 원로회의 의원으로 특별 임명했다.[32] 만년에는 칼럼, 저술 활동을 하며 주로 재향군인, 필리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의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4년 2월 6일 95세를 일기로 마닐라에서 사망하였다.[32]1953년에는 필리핀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Honoris Causa)를 받았다.[32]
1962년 5월 12일,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은 미국의 필리핀 제도의 도서정부 수립이 아닌 아기날도와 1898년 혁명을 기리기 위해 독립기념일 기념일을 7월 4일에서 6월 12일로 변경했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날도는 1962년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했다. 1964년 8월 4일, 공화국 법률 제4166호는 6월 12일을 필리핀 독립기념일로 공식 선포하고 7월 4일 휴일을 "필리핀 공화국 기념일"로 개명했다.

아기날도는 두 번 결혼했다. 1896년 1월 1일 첫 번째 부인인 힐라리아 델 로사리오(1877~1921)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힐라리아는 192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30년 7월 14일, 아기날도는 바라소인 교회에서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아곤실로(1879~1963)와 결혼했다. 그녀는 1963년 5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필리핀 정치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계 | 이름 | 직책 및 활동 |
---|---|---|
손자 | 에밀리오 B. 아기날도 3세 | 카비테주 카윗 시 시장(2007~2016) |
손자 | 레이날도 아기날도 | 카비테주 카윗 시 부시장 (3선) |
손녀 | 아메우르피나 멜렌시오-헤레라 | 필리핀 대법원 대법관 (1979~1992) |
증손자 | 조셉 에밀리오 아바야 | 필리핀 하원의원 (카비테주 제1선거구, 2004~2012), 교통통신부 장관 (2012~2016) |
증손자 | 에밀리오 "오렌지" M. 아기날도 4세 | 베르나데트 세엠브라노 (ABS-CBN 뉴스 기자)와 결혼 |
증손녀 | 리지 아기날도 | 스타 뮤직 소속 가수[33] |
스페인에 대한 반란과 그 후 미군과의 갈등 동안 아기날도는 필리핀 독립 교회를 지지했다.[34] 그는 오랫동안 신도였지만, 후에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왔다.[5]
2. 7. 2. 사망
1964년 2월 6일, 아기날도는 95세를 일기로 마닐라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했다.[36] 그는 스페인 통치에 맞서 싸우는 동안 가톨릭 신앙을 버렸지만, 죽기 전에 교회와 화해하고 최후의 성사를 받았다.[5] 사망 1년 전, 그는 자신의 토지와 저택을 정부에 기증했는데, 현재 이 부지는 "1896년 혁명의 정신을 영속시키기" 위한 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필리핀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아기날도의 사망을 애도하며 1964년 2월 6일부터 20일까지를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37] 그의 유해는 아기날도 사당과 말라카냥 궁전에 안치되었으며, 마닐라 대성당에서 추도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마닐라 국립미술관(구 의회 건물)으로 옮겨져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조문객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카비테주 카윗으로 돌아와 철야 미사를 지낸 후, 카윗 성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에서 마지막 추도 미사를 지냈다. 마지막으로 그의 유해는 카비테주 카윗에 있는 그의 거주지에 안장되었다.[39][40][41]

아기날도의 저서 ''Mga Gunita ng Himagsikan''(''혁명의 회상'')은 1964년에 출판되었다. 1998년에는 필리핀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두 번째 판이 출판되었다.
''마닐라 스탠더드''의 래리 M. 헤나레스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에는 아기날도가 필리핀 혁명의 승리와 필리핀-미국 전쟁 중 국가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에서 그의 실행 역할로 인해 필리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42]
3. 유산과 평가
필리핀의 국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마누엘 케손의 정부를 정식 정부의 시발점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그를 필리핀 초대 대통령으로 보기도 한다. 훗날 필리핀 화폐 5페소 지폐(현재는 동전) 도안에 그의 모습이 들어갔다.
아기날도는 1964년 2월 6일 (PHT) 오전 3시 5분에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했다. 이는 그의 95번째 생일 한 달 전이었다. 필리핀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그의 사망을 애도하며 1964년 2월 6일부터 20일까지를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37] 아기날도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38] 그의 유해는 카비테주 카윗에 있는 그의 거주지에 안장되었다.[39][40][41]
아기날도의 저서 ''Mga Gunita ng Himagsikan'' (''혁명의 회상'')은 1964년에 출판되었다. 필리핀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1998년에 두 번째 출판이 이루어졌다.
''마닐라 스탠더드''(Manila Standard)의 래리 M. 헤나레스(Larry M. Henares)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에는 아기날도가 스페인에 대한 필리핀 혁명의 승리와 필리핀-미국 전쟁 중 국가 독립 유지를 위한 그의 역할로 인해 필리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42]
그는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
4. 기타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스페인과 미국에 맞서 싸웠으며, 아시아 최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1898년 6월 30일, 3만여 명의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기 전, 그는 '미국 헌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는데 식민지를 두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니 겁낼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했고,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897년 선거 | 필리핀 대통령 | 1대 | 국립사회당 | 57.03% | 146표 | 1위 | |
1935년 선거 | 필리핀 대통령 | 2대 | 국립사회당 | 17.54% | 179,349표 | 2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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