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티푸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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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티푸난은 1892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의 비밀 결사 조직이다. 스페인 통치에 저항하며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했으며, 노동자, 농민 등 억압받는 계층을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1896년 보니파시오가 주도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내부 분열과 스페인 군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카티푸난은 필리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필리핀 독립 운동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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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푸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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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정식 명칭 | tl |
한국어 번역 | 민족의 자녀들의 최고 존경할 만한 모임 |
약칭 | KKK |
별칭 | 카티푸난 |
창립일 | 1892년 7월 7일 |
해체일 | 1897년 3월 22일 |
창립 장소 | 칼레 아즈카라가, 산 니콜라스, 마닐라 |
전신 | 라 리가 필리피나 |
후신 | 필리핀 독재 정부 |
목적 | 필리핀 독립 |
사용 언어 | 타갈로그어, 필리핀 스페인어 |
지도부 | |
최고 의장 | 데오다토 아렐라노 (1892년–1893년) |
기타 | |
주요 기관 | 《칼라얀》 (1896년) |
2. 배경
19세기 후반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다. 스페인 총독부는 필리핀 민중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고된 노동을 강요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필리핀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스페인 여론이 확산되며 스페인 통치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필리핀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변화를 모색했다. 호세 리살과 같은 인물들은 스페인 유학 중 필리핀이 처한 착취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필리핀 내 스페인 통치의 개혁과 자치권 확대를 주장했다. 그는 언론인이자 민족주의 시인, 소설가로서 필리핀 민족의 계몽과 평화적인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반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은 호세 리살의 점진적인 개혁 노선과는 다른 길을 주장했다. 보니파시오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장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1892년, 호세 리살이 조직한 라 리가 필리피나(필리핀 연맹)는 지식인 중심의 비폭력 개혁 운동 단체였으나, 스페인 당국의 탄압으로 주요 회원들이 체포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 조직의 일원이었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해 마닐라에서 비밀결사 조직인 카티푸난을 결성했다. 카티푸난은 프리메이슨의 조직 체계와 의례를 일부 본떠 만들어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타갈로그족을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결성 당시 약 10만 명이었던 회원 수는 4년 만에 40만 명까지 증가할 정도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카티푸난이라는 이름은 타갈로그어로 'Kataastaasang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 (Kataastaasang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카타아스타아상, 카가랑가랑간, 카티푸난 낭 마가 아낙 낭 바얀tl)의 줄임말로, "조국의 아들딸들의 가장 높고 존경받는 모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KKK'라는 상징 문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보니파시오는 무력 투쟁 노선을 분명히 하며 카비테 주, 바탕가스 주, 불라칸 주, 누에바에시하 주 등 타갈로그어를 사용하는 여러 주로 카티푸난 지부를 확대해 나갔다. 마침내 1896년, 카티푸난은 스페인을 상대로 전면적인 필리핀 독립 혁명을 일으켰다.
스페인 당국은 이 혁명을 빌미로 호세 리살을 체포하여 총살했다. 리살 자신은 무장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티푸난 회원들 사이에서 독립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리살의 처형은 오히려 필리핀 민중의 분노를 격화시켜 독립 운동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카티푸네로스'라고 불린 카티푸난의 전사들은 "호세 리살 만세!"를 외치며 스페인과의 전투에 더욱 용감히 나섰다.
3. 결성
19세기 말,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 필리핀 민중은 과중한 세금과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곳곳에서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과 반스페인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 운동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필리핀의 미래를 모색했다.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호세 리살은 스페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필리핀 내 스페인 통치의 문제점을 알리고 개혁과 자치 운동을 주장했다. 반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리살의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 투쟁을 통한 완전한 독립을 역설했다.
호세 리살이 주도하여 비폭력 개혁을 추구했던 라 리가 필리피나(필리핀 연맹)는 스페인 당국의 탄압으로 1892년 해체되었고, 리살은 민다나오의 다피탄으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하던 이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리살이 체포된 직후인 1892년 7월 7일 밤(일부 기록은 같은 해 1월 초 결성을 주장하기도 한다[14][15][16]),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데오다토 아레야노, 테오도로 플라타, 발렌틴 디아스, 라디슬라오 디와, 호세 디존 등 라 리가 필리피나의 급진파 회원들과 함께 마닐라 산 니콜라스의 아스카라가 거리(현 렉토 애비뉴)에서 비밀 결사 조직인 카티푸난을 결성했다.[12] "KKK"라는 약칭으로도 알려진 이 조직의 목표는 라 리가와 달리, 스페인 식민 당국에 대한 무장 혁명을 통해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5] 창립자들은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자치권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5]
카티푸난은 조직 운영 방식과 입회 의식 등에서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초기 회원 다수가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7] 저명한 필리핀 프리메이슨인 마르셀로 H. 델 필라르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조직의 규약을 승인했다는 주장도 있다.[18]
비록 무장 투쟁 노선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민족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호세 리살은 카티푸난의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1872년 카비테 반란 이후 처형된 곰부르자 신부들과 함께 조직의 암호로 사용될 정도로 큰 존경을 받았다.[13]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한 카티푸난은 주로 타갈로그어를 사용하는 노동자, 농민 등 스페인 식민 통치하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결성 4년 만인 1896년에는 회원 수가 10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급증했으며, 카비테 주, 바탕가스 주, 불라칸 주, 누에바에시하 주 등 타갈로그 지역 여러 주로 지부가 확대되었다. 이는 필리핀 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침내 1896년, 카티푸난은 스페인을 상대로 한 독립 투쟁의 봉화를 올리게 된다.
3. 1. 명칭
"카티푸난"이라는 이름은 Kataastaasang,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카타아스타아상, 카갈랑갈랑강 카티푸난 낭 망아 아낙 낭 바얀tgl(국민의 자녀들의 최고 존엄 결사)의 약칭이다.[2] 타갈로그어 단어 katipunan|카티푸난tgl은 문자 그대로 "결사", "모임", "집회", 또는 "단체"를 의미하며,[9][10] "모임" 또는 "모이다"를 뜻하는 타갈로그어 단어 tipon|티폰tgl에서 유래되었다.[11]
4. 조직
카티푸난은 최고 위원회(Supreme Council)에 의해 운영되었다. 1892년 조직 창설 당시 최고 위원회는 데오다토 아레야노가 회장,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회계 감사, 라디슬라오 디와가 검찰, 테오도로 플라타가 서기, 발렌틴 디아스가 재무를 맡았다.[27]
1893년에는 최고 위원회가 개편되어 라몬 바사(Ramón Basa)가 회장, 보니파시오가 검찰, 호세 투리아노 산티아고가 서기, 비센테 몰리나가 재무를 맡았으며, 레스티투토 하비에르, 브리치오 판타스, 테오도로 곤잘레스, 플라타, 디와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다.[27] 이 시기에는 여성 보조 부서가 조직되었는데, 초기 회원으로는 보니파시오의 아내인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와 호세 디존의 딸인 마리나 디존 등이 있었다. 또한 1893년, 바사와 디와는 카비테에 지방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카티푸난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위원회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필리핀 학자 막시모 칼라우에 따르면, 1894년 라몬 바사는 서기 의식의 유용성과 보니파시오의 기금 관리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회장직을 보니파시오에게 넘겨주었다. 바사는 보니파시오가 회원들에게 약속 어음을 받고 기금을 빌려주는 관행에 반대했으며,[28][29] 자신의 아들을 조직에 가입시키는 것도 거부했다.
같은 해,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에밀리오 하신토가 카티푸난에 합류했다. 그는 카티푸난의 목표를 체계화하고 그 원칙을 담은 ''카르티야''라는 안내서를 작성했다. 타갈로그어로 쓰인 이 문서는 모든 신입 회원이 가입 전에 암기해야 했다. 하신토는 이후 '카티푸난의 두뇌'로 불리게 된다. 또한 하신토는 조직의 공식 신문인 ''칼라얀''(Kalayaan, 자유)을 편집했다. 스페인 신문 ''마닐라 일간지''(Diario de Manila)의 인쇄기를 이용해 발행되었으나, 단 한 호만 발행되고 조직이 발각되면서 준비 중이던 두 번째 호는 인쇄되지 못했다.[19][20]
1895년, 보니파시오의 친구인 호세 투리아노 산티아고는 카티푸난의 암호화된 메시지가 산토 토마스 대학교의 스페인 사제에게 넘어갔다는 의혹으로 추방되었다. 이 사제는 산티아고 여동생의 친구였기에 산티아고와 그의 이복형제 레스티투토 하비에르가 의심받았으나, 두 사람은 조직에 대한 충성을 지켰고 산티아고는 이후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혁명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하신토가 산티아고의 뒤를 이어 서기직을 맡았다.
1895년 초, 보니파시오 주도로 회의가 열려 바사가 해임되고 새로운 최고 위원회가 선출되었다. 보니파시오가 회장, 하신토가 검찰, 산티아고가 서기, 몰리나가 재무를 맡았으며, 피오 발렌주엘라와 판탈레온 토레스가 의사, 아게도 델 로사리오와 도레테오 트리니다드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30] 같은 해 12월 31일에 열린 선거에서도 이 구성은 대체로 유지되었다.[31] 이 시기 최고 위원회는 보니파시오(회장), 발렌주엘라(검찰 겸 의사), 하신토(서기), 몰리나(재무)를 중심으로 엔리코 파체코, 판탈레온 토레스, 발비노 플로렌티노, 프란시스코 카레온, 에르메네길도 레예스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31]
1896년 8월, 혁명 발발 직전 마지막으로 최고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직책이 변경되었다. 보니파시오는 여전히 회장(Pangulo)이었으나, 다른 직책들은 국무 장관(하신토), 전쟁 장관(플라타), 법무 장관(브리코 판타스), 내무 장관(아게도 델 로사리오), 재무 장관(엔리코 파체코) 등으로 개편되었다.[31]
4. 1. 회원
카티푸난의 초기 회원 대부분은 라 리가 필리피나 회원이기도 했다.[12] 그러나 라 리가 필리피나가 스페인 의회에 필리핀 대표를 요구하며 평화적 개혁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카티푸난은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무장 혁명을 목표로 삼았다.[5] 창립자들은 스페인 식민 당국이 필리핀의 자치를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억압할 것이라고 판단했다.[5]이후 4년 동안 카티푸난의 창립자들은 새로운 회원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조직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존재한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르 로이는 조직이 발각될 무렵 회원 수를 10만 명에서 40만 명 사이로 추산했다.[32] 필리핀 역사가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1896년까지 회원 수가 약 3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보았다.[33] 일로카노 작가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는 회원 수를 1만 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로 추정했다.
카티푸난은 마닐라를 중심으로 바탕가스, 라구나, 카비테, 리잘, 불라칸, 팜팡가, 타를라크, 누에바에시하 등 주변 지역에도 상당한 규모의 지부를 두었다. 또한 남일로코스, 북일로코스, 팡가시난, 비콜 지방에도 소규모 지부가 존재했다. 창립자들은 자신의 시간을 활용하여 회원 모집에 힘썼다. 예를 들어, 법원 서기였던 라디슬라오 디와는 팜팡가의 치안 판사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해당 지역뿐만 아니라 불라칸, 타를라크, 누에바에시하에서도 회원을 영입했다.
회원의 대다수는 평민 계층이었으나, 일부 부유한 애국자들도 조직에 가입하여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지도력을 따랐다. 카티푸난의 남성 회원은 '카티푸네로'(Katipunero, 복수형 'mga Katipunero')라고 불렸으며, 여성 회원은 '카티푸네라'(Katipunera, 복수형 'mga Katipunera')라고 지칭되었다.
카티푸난의 공식 언어는 타갈로그어였다. 필리핀 작가이자 역사가인 에르메네힐도 크루스에 따르면, 카티푸난은 문서 작성 및 서명 시 스페인어 알파벳을 변형한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사용했다.[75] 스페인어 알파벳과의 비교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어 알파벳 | A | B | C | D | E | F | G | H | I | J | K | L | LL | M | N | O | P | Q | R | S | T | U | V | W | X | Y | 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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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푸난 알파벳 | Z | B | K | D | Q | H | G | F | N | L | K | J | J | V | LL | C | P | K | R | S | T | X | M | W | U | Y | - |
스페인어 알파벳의 F, J, V, X, Z는 불필요하다고 여겨 사용하지 않았다.[75]
카티푸난은 조직 구조와 입회 의식 등에서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초기 회원 중 다수가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17] 저명한 필리핀 프리메이슨이었던 마르셀로 H. 델 필라르는 조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카티푸난의 규약을 승인하는 등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17][18]
주요 회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
- 에밀리오 아기날도
-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 그레고리오 델 필라르
- 에밀리오 하신토
- 마리아노 라네라
- 안토니오 루나
-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 미겔 말바르
- 알테미오 리카르테 - "독사"(Víbora)라는 별명으로 불림
- 마카리오 사카이
5. 활동
카티푸난 창립 이후 4년 동안 창립자들은 비밀리에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며 조직을 확장해 나갔다. 조직의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이 존재한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르 로이는 카티푸난이 스페인 당국에 발각될 무렵 회원 수가 10만 명에서 4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았다.[32] 반면 필리핀 역사가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1896년까지 약 3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추산했으며,[33] 일로카노 작가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는 1만 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로 추정했다.
카티푸난은 마닐라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주변 지역으로도 세력을 넓혀나갔다. 주요 활동 지역과 지부는 다음과 같다.
카티푸난 창립자들은 본업 외 시간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예를 들어, 법원 서기였던 라디슬라오 디와는 팜팡가의 치안 판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해당 지역뿐만 아니라 불라칸, 타를라크, 누에바에시하에서도 회원을 영입하는 등 조직 확장에 기여했다.
회원의 대다수는 평민 계층이었으나, 일부 부유한 애국자들도 카티푸난에 가입하여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지도 아래 활동했다. 카티푸난의 남성 회원은 '카티푸네로'(복수형 'mga 카티푸네로'), 여성 회원은 '카티푸네라'(복수형 'mga 카티푸네라')라고 불렸다. 이는 필리핀 민중을 기반으로 성장한 혁명 조직으로서 카티푸난의 성격을 보여준다.
5. 1. 저항

1896년 8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루손에서 오랜 계획 끝에 반란을 일으키고, 스페인에 대한 봉기를 선언하며 필리핀 독립 혁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한 의용군은 스페인 군대와의 교전에서 거듭 패배하여 북부의 몬탈반으로 퇴각해야 했다. 보니파시오의 부관 중 한 명인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
스페인 당국이 반란 세력을 체계적으로 색출하고 이들의 계획을 미리 파악하면서, 보니파시오의 군사적 지도력 부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는 카티푸난 내부 회의에서 점차 부관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한편, 스페인 당국은 봉기를 계기로 호세 리살을 체포하여 총살했다. 리살은 직접적인 무력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카티푸난 회원들에게는 독립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독립 운동의 열기를 더욱 지폈고, 회원들은 "호세 리살 만세!"를 외치며 전투에 임했다.
독립 투쟁 과정에서 카티푸난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보니파시오 측근인 알바레스 장군이 이끄는 마그디왕 파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형인 바르톨로메 아기날도가 이끄는 마그달로 파가 대립했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열린 테헤로스 회의에서 마그달로 파는 보니파시오의 학식 부족을 문제 삼으며 그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보니파시오는 회의장에서 이탈하며 의결의 무효를 선언했고, 결과적으로 카티푸난 내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후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의 지도권을 장악한 아기날도의 지시에 따라 체포되었고, 1897년 5월 10일 숙청되었다.
1897년 비악나바토 조약을 통해 아기날도는 스페인 정부와 휴전 협정을 맺고 다른 지도부와 함께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평화 협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필리핀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미서 전쟁이 발발하자 아기날도는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는 1898년 6월 12일 마닐라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영토적 야심이 파리 조약에서 드러났다. 필리핀 대표단은 회의 참석이 거부되었고,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에 2000만달러에 할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아기날도와 필리핀 지도자들은 즉시 미국에 대한 독립 투쟁을 시작했다. 1899년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며 미필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는 이사벨라 주 파라난에서 미군에 체포되었고, 동지들에게 투쟁 중지와 항복을 호소했다.
아기날도의 호소에 따라 많은 멤버들이 항복했지만, 마카리오 사카이 등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여 저항을 이어갔다. 사카이는 1902년 '타갈로그 공화국' 건국을 선언하고 반미 투쟁을 계속했으나, 1906년 미국의 계략에 의해 체포되어 1907년 처형되었다. 이로써 카티푸난 주도의 저항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으며,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은 1946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5. 2. 독립 선언과 임시 정부
스페인에 대한 혁명이 진행되면서 카티푸난 내부에서는 카비테 지역을 기반으로 한 두 파벌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하나는 마리아노 알바레스 장군이 이끄는 마디왕(Magdiwang) 파벌이었고, 다른 하나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장군의 사촌인 발도메로 아기날도 장군이 이끄는 마갈로(Magdalo) 파벌이었다.이러한 내부 분열을 해소하고 통합된 혁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897년 3월 22일, 카비테의 테헤로스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기존의 카티푸난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화국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94] 회의에서 진행된 선거 결과, 당시 전선에서 스페인군과 싸우고 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카티푸난의 창설자이자 최고 지도자였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내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갈로 파벌의 일부 인사들이 보니파시오의 학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자격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자, 모욕감을 느낀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한을 발동하여 회의의 모든 결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아기날도 측은 보니파시오의 선언을 무시하고 다음 날 카비테의 산타 크루스 데 말라본(현재의 탄자)에서 보니파시오를 제외한 채 대통령 취임 선서를 진행했다.[95] 이에 반발한 보니파시오와 그의 지지자들은 테헤로스 칙령을 발표하여 회의가 "무질서하고 속임수로 더럽혀졌다"고 비판했으며, 이후 나이크 군사 협정을 통해 테헤로스 회의의 결정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기날도 측은 보니파시오의 이러한 행동을 혁명 정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다. 결국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생 프로코피오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가 보낸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1897년 5월 10일, 아기날도 장군의 최종 승인 아래 보니파시오 형제는 카비테주 마라곤돈의 분티스 산에서 처형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표식 없는 무덤에 묻혔다. 이 사건은 필리핀 혁명 지도부 내의 심각한 갈등과 권력 투쟁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보니파시오가 제거된 후 아기날도는 혁명 세력 내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필리핀 제1 공화국 수립 과정으로 이어졌다.
5. 3. 미국과의 관계
카티푸난은 스페인과의 독립 투쟁 과정에서 외부의 지원을 모색했다. 초기에는 서구 열강에 맞서 아시아의 해방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 일본에 접근했다. 1896년 5월, 피오 발렌수엘라가 호세 리살을 방문한 후, 에밀리오 하신토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대표단은 마닐라에서 일본 영사 및 일본 군함 '콩고'의 함장과 만나 필리핀 혁명에 대한 지원과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전달하고자 했다.[81][79] 탄원서에는 "일본을 비추는 자유의 빛이 필리핀에도 그 빛을 비추도록" 요청하는 내용이 담겼다.[82] 카티푸난은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탄약 구매를 시도했으나 자금 부족과 조직의 발각으로 실패했다.[83]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변했다. 홍콩에 망명 중이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지지할 것이라 믿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으로 귀국했다.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는 카비테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며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는 달랐다. 1898년 파리 조약에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2000만달러에 구매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필리핀 대표단의 참석은 거부되었다.[58] 미국의 식민 지배 야욕이 드러나자 아기날도와 필리핀 민중은 크게 분노했고, 이는 곧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독립 투쟁으로 이어졌다.
1899년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나, 미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수적, 물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카티푸난 세력을 포함한 필리핀 군대는 카비테 주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저항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 육군 대위였던 데이비드 페이건과 같이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필리핀 측에 합류한 외국인들도 있었다. 또한, 메이슨 단원이었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는 대조적으로, 같은 메이슨이 이끌던 미국 정부가 카티푸난과 연계된 필리핀 제1공화국과 전쟁을 벌이는 모순적인 상황도 발생했다.[58]
전쟁은 필리핀에게 큰 희생을 안겼다.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가 이사벨라 주 팔라난에서 미군에게 체포되면서 저항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아기날도는 미군의 압력 하에 다른 지도자들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항복했지만, 마카리오 사카이와 같은 일부 지도자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1902년 "타갈로그 공화국"을 선포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그러나 사카이 역시 1906년 미국의 계략에 빠져 체포되었고, 이듬해 처형당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카티푸난의 직접적인 활동은 끝났지만, 그 정신은 필리핀 독립 운동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필리핀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이었다.
6. 필리핀 혁명
1896년 8월, 스페인 식민 당국에 의해 카티푸난의 존재가 발각되면서 필리핀 혁명의 막이 올랐다.[85][86][87]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즉각 무장 봉기를 결정했고, 발린타왁에서 개인 세둘라(신분증)를 찢는 '발린타왁의 외침'을 통해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90]
혁명 초기 카티푸난은 산후안 델 몬테 전투 등에서 스페인군과 맞섰으나, 준비 부족과 무기 열세로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 당국은 주요 8개 주에 계엄령을 선포하고[90] 강경한 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호세 리살이 혁명 배후로 몰려 1896년 12월 30일 처형당하자, 필리핀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하며 혁명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77]
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카티푸난 내부에서는 지도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특히 카비테 지역의 마그디왕 파벌과 마그달로 파벌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897년 테헤로스 회의에서 통합 혁명 정부 수립이 시도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카티푸난의 창립자 보니파시오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결국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94][95]
보니파시오 사후 혁명군의 최고 지도자가 된 아기날도는 스페인과 비악나바토 조약을 맺고 잠시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아기날도는 미국의 독립 지원 약속을 믿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진정한 의도는 필리핀 지배에 있었다.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2000만달러에 필리핀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미국의 배신에 분노한 아기날도와 필리핀 민중은 1899년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미국에 맞서 미국-필리핀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필리핀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1901년 아기날도가 미군에 체포되면서 제1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96] 이후 마카리오 사카이 등이 저항을 이어갔으나 미국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 통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카티푸난이 추구했던 완전한 독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었다.
6. 1. 발린타왁의 외침
카티푸난 지도자들은 조직 발각과 회원 체포 소식을 듣고[85][86][87], 보니파시오는 무장 봉기의 시작을 결정하기 위해 모든 지방 의회를 소집했다. 회의는 발린타왁의 캉콩(Kangkong)이라는 지역에 있는 아폴로니오 삼손(Apolonio Samson)의 집에서 열렸다. 약 1,000명의 카티푸네로가 회의에 참석했지만,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그들은 다음날 발린타왁의 다른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멜초라 아키노의 집에서 일어났는지, 아니면 그녀의 아들 후안 라모스(Juan Ramos)의 집에서 일어났는지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 회의는 1896년 8월 23일 또는 8월 24일에 열렸다.[90] 이 회의에서 참석한 카티푸네로스는 무장 봉기를 시작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혁명에 대한 약속의 표시로 자신들의 "세둘라"(cédula, 거주 증명서 및 신분증)를 찢었다. 이 상징적인 행동은 '발린타왁의 외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티푸네로스는 또한 8월 29일에 마닐라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90]
그러나 스페인 민간 경비대가 회의를 발견했고, 파송 타모 전투에서 첫 번째 전투가 일어났다. 카티푸난이 초반에는 우세를 보였지만, 스페인 민간 경비대가 증원되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보니파시오와 그의 부하들은 바라라(Balara, 현재 케손 시티)를 거쳐 마리키나로 후퇴했다. 그들은 그 후 산 마테오(San Mateo, 현재 리잘 주)로 가서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3일 만에 그것을 되찾았다. 재정비 후, 카티푸네로스는 마닐라를 직접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의 스페인 화약고와 수비대를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8월 30일, 카티푸난은 산후안 델 몬테 전투(피나글라바난 전투라고도 함)에서 화약고를 방어하던 스페인 군대를 공격했다. 전투에서 약 153명의 카티푸네로가 사망했고, 스페인 증원군의 도착으로 카티푸난은 철수해야 했다. 2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거의 같은 시기에 칼루칸, 산 페드로 데 투나산(San Pedro de Tunasan, 현재 마카티), 파테로스, 타기그와 같은 마닐라의 다른 교외 지역의 카티푸네로스들도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같은 날 오후, 스페인 총독 카밀로 데 폴라비에하는 마닐라, 카비테, 라구나, 바탕가스, 불라칸, 팜팡가, 타를라크, 누에바 에시하 등 8개 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필리핀 혁명이 시작되었다.
6. 2. 산후안 델 몬테 전투 (피나글라바난 전투)
1896년 8월 29일로 예정되었던 마닐라 총공격 계획은 파송 타모 전투에서의 패배와 스페인 군의 반격으로 인해 변경되었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 지도부는 마닐라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후안 델 몬테에 위치한 스페인 군의 화약고와 수비대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90]
1896년 8월 30일, 카티푸난은 산후안 델 몬테 전투(Battle of San Juan del Monte) 또는 피나글라바난 전투(Battle of Pinaglabanan)로 알려진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였던 14명의 스페인 군인(필리핀 군인 12명과 스페인 장교 2명)이 지키던 화약고를 공격했다. 그러나 정오가 되기 전에 베르나르도 에찰루체 이 자우레기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제73 "졸로" 연대 소속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뒤바뀌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약 153명의 카티푸네로가 목숨을 잃었고, 200명 이상이 스페인 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수적, 화력적 열세와 증원군의 도착으로 카티푸난은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90] 비록 전투 자체는 패배했지만, 이 사건은 필리핀 독립을 향한 열망을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 칼루칸, 산 페드로 데 투나산(현재 마카티), 파테로스, 타기그 등 마닐라의 다른 교외 지역에서도 카티푸네로들이 봉기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스페인 총독 카밀로 데 폴라비에하는 당일 오후 마닐라, 카비테, 라구나, 바탕가스, 불라칸, 팜팡가, 타를라크, 누에바 에시자 등 8개 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필리핀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90]
6. 3. 카카롱 데 실리 전투
불라칸 주 판디는 필리핀 독립 투쟁에서 중요하고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판디는 불라칸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가 벌어진 곳으로, 3,000명 이상의 카티푸네로 혁명가가 목숨을 잃은 레알 데 카카롱 데 실리 신사(이나 릴리피나 신사)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1896년 필리핀 최초의 혁명 공화국 중 하나인 ''레알 데 카카롱 데 실리 공화국''이 수립된 곳이기도 하다.
푸가드 라윈의 외침(일명 "발린타왁의 외침") 직후, "마에스트롱 세비오" 또는 "디마붕고"라고도 불린 에우세비오 로케 준장이 이끄는 불라칸 여러 마을 출신의 약 6,000명의 카티푸네로들이 카카롱 데 실리에 모여 "카카롱 공화국"을 조직했다. 카티푸난 역사 연구와 필리핀 국립 역사 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카카롱 공화국"은 스페인 통치를 전복시키기 위해 필리핀에서 조직된 최초의 혁명 정부 중 하나로, 유명한 말롤로스 공화국이나 비약나바토 공화국보다 앞선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여, 불라칸 주의 문장에는 이 세 개의 "공화국"이 포함되어 있다.
전 필리핀 국립 도서관 관장 테오도로 칼라우가 저술한 그레고리오 델 필라르 장군의 전기 ''소년 장군의 생애와 죽음'' 등 기록에 따르면, 카카롱 데 실리에는 마치 작은 도시와 같은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 요새에는 거리, 독립 경찰력, 악대, 소형 포병대, 볼로 나이프 공장, 소총 및 탄약 수리소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카카롱 공화국'은 카누토 비야누에바를 최고 지도자로, 에우세비오 로케('마에스트롱 세비오')를 육군 준장으로 하는 완전한 정부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1897년 1월 1일, 호세 올라게르 펠리우 사령관이 이끄는 대규모 스페인 군대가 요새를 공격하여 완전히 파괴했다.[92] 당시 중위였던 그레고리오 델 필라르에게 카카롱 데 실리 전투는 그의 "첫 실전 경험"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부상을 입고 인근 바랑가이 '마나탈'로 후퇴했다.
1897년 전투에서 희생된 1,200명의 카티푸네로들을 기리기 위해, 1924년 '레지오나리오스 델 트라바호'의 카카롱 로지 168은 불라칸 판디의 카카롱 바리오에 ''이나 필리피나'' 신사(어머니 필리핀 신사) 기념비를 세웠다. 카카롱 데 실리 전투가 실제로 벌어졌던 장소는 현재 레알 데 카카롱 바랑가이의 일부이다.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자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이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50년대 후반 이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했다.
6. 4. 스페인의 탄압
카티푸난 봉기 준비 과정에서 스페인 당국은 조직의 존재에 대한 여러 정보를 입수했다. 1896년 7월 5일, 파시그 주둔 시민 경비대 소속 스페인 소위 마누엘 시티야르는 총독 라몬 블랑코에게 특정 원주민들이 무기를 모으고 불분명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는 의심스러운 활동을 보고했다.[83] 1896년 8월 13일에는 산 페드로, 마카티의 아우구스티노회 사제 아구스틴 페르난데스가 마닐라 시민 지사(시장) 돈 마누엘 루엥고에게 자신의 교구 내 반스페인 회합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83]카티푸난의 존재는 페르난데스 신부가 편지를 보낸 지 6일 만에 스페인 당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발각되었다. 1896년 8월 초, ''마닐라 일보'' 인쇄소에서 일하던 테오도로 파티뇨와 아폴로니오 데 라 크루스 사이에 임금 문제로 다툼이 발생했다.[84] 데 라 크루스는 파티뇨가 ''칼라야안'' 인쇄에 사용된 용품을 분실했다고 비난하려 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파티뇨는 만달루용 고아원의 수녀인 자신의 누나 호노리아 파티뇨에게 카티푸난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1896년 8월 19일 오후, 호노리아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이를 본 고아원의 문지기 수녀 테레사 데 헤수스는 파티뇨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톤도 수도원의 아우구스티누스회 교구 사제인 마리아노 힐 신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라고 조언했다.[85]
파티뇨는 힐 신부에게 카티푸난의 회원 가입에 사용된 석판이 ''마닐라 일보'' 인쇄소에 숨겨져 있으며, 회원들의 피로 서명된 서류, 호세 리잘 박사의 사진, 그리고 신문사 내 카티푸난 회원들을 위한 단검들도 있다고 고백했다.[85] 힐 신부는 즉시 스페인 당국과 함께 인쇄소를 수색하여 증거물을 찾아냈고, 단검과 회원 명단을 소지하고 있던 데 라 크루스도 체포했다.[85][86] 체포 후 힐 신부는 블랑코 총독에게 카티푸난의 혁명 음모를 보고했다.[87] 스페인 당국은 대대적인 단속을 시작하여 수백 명을 체포했으며,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산티아고 요새에 투옥되었다.[77]
파티뇨의 고발은 1896년 혁명 발발의 표준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다른 주장들도 존재한다. 호세 투리아노 산티아고는 보니파시오가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티뇨에게 비밀을 누설하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으며,[88] 역사학자 테오도로 아곤실로는 파티뇨와 데 라 크루스의 개인적인 갈등이 누설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기술했다.[89]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파티뇨는 데 라 크루스와의 임금 분쟁에 대한 보복으로 총괄 관리자인 라 폰트에게 직접 카티푸난의 존재를 폭로했다고 한다.[90]
카티푸난 발각 직전, 호세 리잘은 스페인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쿠바의 스페인군에서 의사로 복무할 것을 신청하여 승인받았다. 1896년 8월,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마닐라에 도착했으나 출항 후 카티푸난 발각 소식이 전해졌고, 전보를 통해 필리핀으로 소환되어 봉기의 배후 혐의로 기소되었다. 결국 리잘은 1896년 12월 30일, 바굼바얀(현재의 루네타)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리잘의 처형 외에도 스페인 당국은 카티푸난 관련자들에 대한 탄압을 이어갔다. 다음은 주요 처형 사례이다.
날짜 | 장소 | 처형자 |
---|---|---|
1896년 9월 6일 | 바굼바얀 | 산초 발렌주엘라, 라몬 페랄타, 모데스토 사르미엔토, 에우제니오 실베스트르 (피나글라바난 전투 체포자) |
1896년 9월 12일 | 카비테 산 펠리페 요새 | 카비테의 13 순교자 |
1897년 1월 4일 | 바굼바얀 | 비콜 순교자들: 마누엘 아벨라, 도밍고 아벨라, 이노센시오 에레라 신부, 가브리엘 프리에토, 세베리노 디아스, 카미오 야콥, 토마스 프리에토, 플로렌시오 레르마, 마카리오 발렌틴, 코르넬리오 메르카도, 마리아노 멜가레호 |
1897년 1월 11일 | 바굼바얀 | 프란시스코 록사스, 누메리아노 아드리아노, 호세 디존, 도밍고 프랑코, 모이세스 살바도르, 루이스 엔시소 비야레알, 브라우리오 리베라, 안토니오 살라자르, 라몬 P. 파디야, 파우스티노 비야루엘, 파우스티노 마냐락, 베네딕토 니자가 (스페인군 중위), 헤로니모 크리스토발 (스페인군 상병) |
1897년 2월 6일 | 바굼바얀 | 아폴로니오 데 라 크루스, 로만 바사, 테오도로 플라타, 비센테 몰리나, 에르메네길도 데 로스 레예스, 호세 트리니다드, 페드로 니코데무스, 펠리치아노 델 로사리오, 게르바시오 삼손, 도르테오 도밍게스 |
이러한 처형, 특히 필리핀 민족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리잘의 처형은 오히려 필리핀 민중의 분노를 촉발시켜 혁명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카티푸난 회원들은 "마부하이 앙 카타갈루간!"(타갈로그 민족 만세!)과 "마부하이 시 닥터 호세 리잘!"(호세 리잘 박사 만세!)을 외치며 스페인에 맞서 싸웠다. 리잘은 카티푸난의 명예 회장으로서 혁명가들에게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6. 5. 내부 분열과 아기날도의 지도력
스페인에 대한 혁명이 진행되면서 카티푸난 내부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특히 카비테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두 파벌, 즉 마리아노 알바레스 장군이 이끌던 '''마그디왕'''(Magdiwang) 파벌과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사촌인 발도메로 아기날도 장군이 이끌던 '''마그달로'''(Magdalo) 파벌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다.이러한 내부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된 혁명 지도부를 세우기 위해 1897년 3월 22일, 카비테의 테헤로스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테헤로스 회의에서는 기존의 비밀결사 카티푸난을 해체하고 공식적인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94] 이어진 선거에서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당시 스페인군과의 전투로 회의에 불참한 상태였다. 카티푸난의 창립자이자 최고 지도자였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내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지만, 마그달로 파벌의 다니엘 티로나 등이 보니파시오의 학력이 낮다는 이유를 들며 그의 자격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크게 모욕감을 느낀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회의 결과를 전부 무효라고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나 아기날도 측은 보니파시오의 선언을 무시하고 다음 날 산타 크루스 데 말라본(현재의 탄자)에서 보니파시오 없이 대통령 취임식을 강행했다.[95] 보니파시오와 그의 지지자들은 테헤로스 칙령을 통해 테헤로스 회의가 불법적이고 사기였다고 비판했으며, 이후 나이크 군사 협정을 맺어 별도의 정부 구성을 시도했다. 이는 아기날도 측에게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결국 아기날도의 명령으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생 프로코피오 보니파시오는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결과 사형이 선고되었고, 아기날도의 최종 승인 아래 1897년 5월 10일, 카비테 마라곤돈의 분티스 산에서 형제가 처형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들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 없이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
보니파시오가 처형된 후, 아기날도는 명실상부한 혁명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897년 말, 스페인과의 비악나바토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휴전을 맺고 지도부와 함께 홍콩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으로 돌아왔고, 1898년 6월 12일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진정한 의도는 필리핀의 독립 지원이 아닌, 새로운 식민지 확보에 있었다. 1898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은 스페인에게 2000만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을 넘겨받았다. 미국의 배신에 분노한 아기날도와 필리핀 민중은 이제 미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여야 했다. 1899년 1월 21일, 말롤로스 헌법이 승인되고 필리핀 제1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며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국 중 하나가 탄생했다.
하지만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필리핀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1901년 3월 23일, 아기날도 대통령은 이사벨라 주 팔라난에서 미군에게 생포되었다. 아기날도는 미국의 강요에 의해 다른 지도자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로써 제1공화국은 사실상 와해되었다.[96] 이후 미국은 필리핀 전역에서 저항 세력을 소탕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마카리오 사카이와 같은 일부 지도자들이 저항을 이어갔지만, 그 역시 1907년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카티푸난에서 시작된 독립 투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필리핀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이었다.
7. 유산
카티푸난은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되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맞서 무력 투쟁을 전개한 비밀결사였다. 비록 미국의 개입과 내부 분열 등으로 인해 단기적인 독립 쟁취에는 실패했지만, 필리핀 민족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하며 후대 독립 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했다.
호세 리살이 주도한 비폭력 개혁 운동인 라 리가 필리피나가 스페인 당국의 탄압으로 좌절된 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무력 혁명을 통해서만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카티푸난을 창설했다. 카티푸난의 무력 투쟁 노선은 필리핀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으며, 특히 스페인 당국이 민족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리살을 처형하자 독립 투쟁의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카티푸난 대원들은 "호세 리살 만세!"를 외치며 스페인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카티푸난 내부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따르는 마그디왕 파와 에밀리오 아기날도 중심의 마그달로 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테헤로스 회의에서 아기날도 파는 보니파시오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를 권력에서 밀어냈고, 결국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의 지시에 의해 1897년 5월 10일 처형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독립 운동의 역량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지도권을 장악한 아기날도는 비악나바토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일시적인 휴전을 맺고 홍콩으로 망명했으나, 미서 전쟁 발발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 약속을 믿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1898년 6월 12일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진정한 의도는 필리핀의 독립 지원이 아닌 새로운 식민 지배에 있었다. 파리 조약에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2000만달러에 사들였고, 필리핀 대표단의 회의 참석조차 거부하며 그들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분노한 아기날도는 1899년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미국에 맞서 미필 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결국 1901년 체포되어 항복을 선언했다. 아기날도의 항복 이후에도 마카리오 사카이와 같은 일부 지도자들이 "타갈로그 공화국"을 선포하며 저항을 이어갔으나, 이들 역시 미국의 공작으로 체포되어 1907년 처형됨으로써 카티푸난의 직접적인 활동은 막을 내렸다.
카티푸난의 무장 투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필리핀 민중에게 민족 자결 의식을 심어주고 독립을 향한 열망을 강력하게 분출시킨 중요한 계기였다.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시도의 실패와 내부 분열의 비극은 후대 독립 운동가들에게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카티푸난이 뿌린 독립의 씨앗은 필리핀 민중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끈질긴 저항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46년 필리핀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카티푸난은 오늘날까지 필리핀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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