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잔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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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디잔 학살은 2005년 5월 13일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시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정부군의 시위대 무력 진압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건 배경에는 경제난, 사회 불평등, 정치적 억압, 종교적 극단주의, 지역 클랜 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2005년 5월 13일, 안디잔 시의 형무소 습격과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생하자 정부는 경고 없이 시위대에 무력 공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미국 등 서방 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우즈베키스탄은 친러시아 노선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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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잔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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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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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2005년 5월 13일 |
발생 위치 | 안디잔, 우즈베키스탄 |
원인 | 부패 경제 및 사회적 불평등 권위주의 및 시민 자유의 부족 경찰 및 군대의 잔혹 행위 정치적, 종교적, 민족적 갈등 |
방법 | 시위 비폭력 저항 시민 불복종 대량 학살 폭동 |
결과 | 시위의 폭력적인 진압 유럽 연합의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 K2 공군 기지에서 미국 군대 추방 |
교전 세력 | |
시위대 (안디잔) | 히즈브 우트-타흐리르 (추정 지원)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운동 (추정 지원) 아크로미야 |
정부군 (우즈베키스탄) | 국가안전보위부 내무부 우즈베키스탄 인민민주당 우즈베키스탄군 우즈베키스탄 지상군 |
주요 인물 (시위대) | 중앙 집중식 지도자 없음 |
주요 인물 (정부군) | 이슬람 카리모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카디르 굴랴모프 이스마일 에르가셰프 루스탐 이노야토프 조키르 알마토프 |
사망자 | 187–1,500명 |
체포 | 다수 |
2. 사건의 배경
안디잔 학살은 우즈베키스탄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둘러싼 지역 클랜 간의 갈등, 특히 타슈켄트 클랜과 사마르칸트 클랜 간의 권력 다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65]
2. 1. 지역 클랜 간의 갈등
우즈베키스탄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둘러싼 지역 클랜 간의 갈등은 안디잔 학살의 배경 중 하나로 지목된다. 특히, 타슈켄트 클랜과 사마르칸트 클랜 간의 권력 다툼이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3][65]2004년 5월, 안디잔 지역 정부는 페르가나 클랜 출신 주지사 코빌존 오비도프를 탄핵하고, 사이둘로 베갈리에프를 새 주지사로 임명했다. 오비도프는 여러 정치 스캔들로 인해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고, 카리모프는 그의 탄핵 절차에 직접 참석했다. 익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오비도프는 지역의 지배자였으며 그의 지원을 받는 사업체는 모든 면에서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2004년 말, 카리모프는 베갈리에프의 뒤를 이어 이크롬혼 나즈미디노프를 페르가나 지방 주지사로 임명했다.[14]
오비도프 행정부의 많은 구성원들이 형사 절차를 밟게 되었다. 새로운 주지사는 지방 사업을 재분배하기로 결정했고, 오비도프의 지원을 받던 기업가들을 탄압했다. 그들은 사업체를 헐값에 넘기거나 법적 절차를 밟아야 했다.[14]
안디잔 학살 이전, 사마르칸트 클랜은 자키르 알마토프의 지도 하에 내무부를, 타슈켄트 클랜은 루스탐 이노야토프의 지도 하에 국가보안국(SNB)을 장악했다. 카리모프의 건강 악화로 인한 사임 루머는 두 지도자가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하게 만들었다. 두 지도자 모두 2004년, 2005년 초, 2005년 중반에 쿠데타를 고려했다.[3]
사태 동안 경찰 역할을 한 것은 국방부의 지휘를 받는 치안 부대였다. 내무부 병력은 해체되었고, 대테러 부대는 국방부 또는 타슈켄트 클랜이 운영하는 국가보안국(SNB)의 지휘 하에 놓였다. 카리모프는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해임하고, 알마토프를 SNB 부국장으로 교체했다. 이는 타슈켄트 클랜에게 보안 통제권을 크게 넘겨주는 것이었다.[3][66] 과거 내무부가 1999년 타슈켄트 폭탄 테러를 조직했을 가능성과 SNB가 2004년 타슈켄트와 부하라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67]
오비도프는 가택 연금 후 타슈켄트에 수감되었고, 카리모프는 2006년 베갈리에프를 아흐마드 우스마노프로 교체했다.[69] 이슬람 전문가 이크볼 미르사이토프는 재판과 소요 사태가 모두 클랜 간 갈등 때문이라고 말했다.[70]
3. 사건의 전개
2005년 5월, 안디잔에서는 "극단주의, 근본주의, 분리주의" 혐의로 기소된 지역 사업가 23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14][15] 이들은 테러리스트로 지정된 조직인 아크로미야 회원이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혐의를 부인하며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14][15]
재판 과정에서 법원 앞에서 시위가 자주 일어났고, 5월 10일에는 최소 1,000명이 참여했다.[1] 5월 11일까지 4,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판결을 들으러 모였으나, 정부는 예정된 선고를 연기했고, 5월 12일 늦게 일부 시위대와 피고인들의 친척들을 체포했다.[1][17]
5월 13일 새벽, 무장 세력이 안디잔 교도소를 습격하여 수감자들을 석방시키고, 지방 행정 건물을 점거했으며,[1][2][17][18]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20] 같은 날, 빈곤과 정부 부패에 항의하며 바부르 광장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1][17][22][23] 오후 5시 또는 6시경, 정부는 경고 없이 광장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고,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인권 문제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3. 1. 사업가 재판과 시위 발발
2005년 5월, 안디잔에서는 "극단주의, 근본주의, 분리주의" 혐의로 기소된 지역 사업가 23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14][15] 이들은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조직인 아크로미야 회원이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혐의를 부인하며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14][15]재판을 맡았던 타슈켄트의 미국 변호사는 "이것은 [사업가들이] 경제적 영향력을 얻고, 아마도 지역 당국에 뇌물을 거부한 것과 관련이 있지 종교적 신념과는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16] 독립국가연합 연구소의 중앙아시아 및 카자흐스탄 부서장은 당국이 재판을 "명백히 조작된 구실로 여러 기업가의 사업을 빼앗기 위해" 이용했다고 말했다.[16]
재판 동안 법원 앞에서 시위가 자주 일어났다.[1] 5월 10일에는 최소 1,000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주로 피고인들의 친척이었던 시위대는 시위를 비디오로 촬영했고, 경찰은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5월 11일까지 4,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판결을 들으러 모였다. 검찰은 피고인 20명에게 3년에서 7년의 징역형을 구형하고 나머지 3명은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정부는 예정된 선고를 연기했다.[1] 정부는 5월 12일 늦게 일부 시위대와 피고인들의 친척들을 체포했다.[1][17]
3. 2. 교도소 습격과 정부 건물 점거
2005년 5월 13일 새벽, 무장 세력이 안디잔 교도소를 습격하여 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을 석방시켰다.[1][2][17][18]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교도관이 사망했다.[1][2][17][18] 23명의 피고인을 포함한 무장 세력은 안디잔의 지방 행정 건물을 점거하고, 검찰청장과 세무 감사원장을 포함한 최소 20명의 법 집행 및 정부 관계자를 인질로 잡았다.[1][12] 이들은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으며,[20] 도시의 국가안보국(SNB) 본부를 점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9]3. 3. 대규모 시위와 정부의 무력 진압
2005년 5월 13일, 안디잔 시의 교도소를 습격한 무장 세력은 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 인사들을 석방하고,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1][2][17][18][20] 같은 날, 빈곤과 정부 부패에 항의하며 바부르 광장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1][17][22][23]오후 5시 또는 6시경, 정부는 경고 없이 광장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1] 정부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 IWPR의 기자 갈리마 부카르바예바는 "수많은 시신과 부상자를 목격했다...그들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자비 없이 총격을 가했다."라고 증언했다.[25]
몇몇 외신은 안디잔에서 400명에서 600명 사이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으며,[1][26] 일부 보도에 따르면, 군대는 첫 번째 총격 이후 부상자들을 체계적으로 사살했다.[17][27] 무함마드 살리흐 우즈베키스탄 에르크/자유민주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는 이 학살로 1,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31]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테러리스트"만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책임을 돌렸으나,[9][11]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인권 문제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4. 정부의 대응과 국제사회의 반응
2005년 5월 13일, 안디잔 시에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치안 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에게 발포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72]
미국, 영국, 독일 등 서방 국가들은 안디잔 시위 진압에 대해 항의했고, 유럽 연합(EU)은 "과도하고, 불균형적이며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과 사건에 대한 국제 조사를 거부한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대해 무기 금수 조치 및 우즈베키스탄 고위 관리들의 비자 발급 거부를 결정했다.[52][53] 잭 스트로 영국 외무 장관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명백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말했고,[55] 리처드 바우처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우즈베키스탄 군의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으로 매우 많은 수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말했다.[62]
상하이 협력 기구는 안디잔 학살을 테러 음모로 규정했으며,[58][59]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우즈베키스탄은 집단 안보 조약 기구(CSTO) 회원국이 아니며, 우리는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1]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안디잔 학살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었다.[71][72] 구미 각국과 일본 등은 국제적인 틀 안에서 조사를 요구하고 있으나, 우즈베키스탄 측에서는 사건 경위와 결과를 상세히 공표하지 않아 인권 문제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정부는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지지하여 국제 조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31]
4. 1.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입장
2005년 5월 13일, 무장 세력이 안디잔 시의 교도소를 습격하여 수감자를 석방하고 정부 건물을 점거했으며, 같은 시기에 시내에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71]。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치안 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에게 발포했고, 수백 명의 사망자(실제 수는 불명)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72]。4. 2.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재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안디잔 시위 진압에 대해 항의했고, 같은 해 11월 우즈베키스탄 내의 미군들이 철수하였다.[37] 유럽 연합(EU)은 2005년 10월 3일, "과도하고, 불균형적이며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과 사건에 대한 국제 조사를 거부한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대해 무기 금수 조치를 부과하고, 우즈베키스탄 고위 관리들의 비자 발급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52][53] 2006년 11월, EU는 제재를 갱신했지만, 낮은 수준의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54]영국 외무 장관 잭 스트로는 5월 15일에 우즈베키스탄에서 "명백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말했다.[55]
독일 외무부 장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는 2007년 3월에 우즈베키스탄 외무 장관 블라디미르 노로프와 만났다. 그는 EU가 부과한 제재를 종료하는 대가로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국제 적십자 위원회가 우즈베키스탄의 교도소를 방문하고, EU 관리들과 안디잔 학살에 대한 회담을 갖고, EU 관리들이 인권 사건을 재검토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56]
상하이 협력 기구는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디잔 학살을 테러 음모로 규정했다.[58][59]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우즈베키스탄은 집단 안보 조약 기구(CSTO) 회원국이 아니며, 우리는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1]
미국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는 미국 정부가 우즈베키스탄의 인권 상황, 특히 안디잔에서의 폭력 사태를 우려하며, "우즈베키스탄 군의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으로 매우 많은 수의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말했다.[62] 크레이그 머레이 주우즈베키스탄 영국 대사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역겨운 반응"이라고 비판했다.[22]
미국 상원의 양당 의원들은 국무부의 반응을 비판하며 유엔 조사를 촉구했다.[63] 안디잔 학살 이후 미국 국무부 관계자들은 우즈베키스탄과의 모든 관계를 종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국방부는 미국이 각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사안별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 장관은 이 사건에 대한 국제 조사를 반대했다.[64]
구미 각국과 일본 등은 국제적인 틀 안에서 조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우즈베키스탄 측에서 상세한 경위가 공표되지 않아 인권 문제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4. 3. 국제기구의 조사 노력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안디잔 학살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었다.[71][72] 구미 각국과 일본 등은 국제적인 틀 안에서 조사를 요구하고 있으나, 우즈베키스탄 측에서는 사건 경위와 결과를 상세히 공표하지 않아 인권 문제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정부는 우즈베키스탄 정부를 지지하여 국제 조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31]5. 사건의 여파와 영향
안디잔 시위 진압에 대해 미국 등 서구 세계는 항의했고, 같은 해 11월 우즈베키스탄 내 미군이 철수했다.[33] 반면 러시아, 중국 등 상하이 협력 기구는 안디잔 학살을 테러 음모로 규정했다.[58][59]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안디잔 사태 이후 권위주의 통치를 더욱 강화하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5]
이 사건은 샤랄리 조라예프의 노래 "Anda Jonim Qoldi Mening" (Over There Remains This Soul of Mine영어)과 첫 무굴 제국 황제 바부르의 시 "Andijonim qoldi mening"(내 안디잔은 남아있다)이라는 구절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44][45][46][47][48][49]
5. 1. 우즈베키스탄의 국제적 고립 심화
미국 등 서구 세계는 안디잔 시위 진압에 대해 항의했고, 같은 해 11월 우즈베키스탄 내 미군이 철수했다.[33]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음에도 다음 날 수천 명이 다시 시위에 참여했고, 군중들은 "살인자, 살인자"를 외치며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33] 평화 봉사단 우즈베키스탄 지부는 미국 대사관의 안전 수준에 따라 보안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지부를 폐쇄했다.[40]휴먼 라이츠 워치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비무장 시위대를 살해한 것은 학살에 해당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정당성이 없었다고 밝혔다.[43]
반면,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구성된 상하이 협력 기구는 안디잔 학살을 테러 음모로 규정했다.[58][59] 상하이 협력 기구는 2005년 7월 각국에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안디잔 출신 우즈베크 난민에 대한 망명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60]
안디잔 시위대는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집단 안보 조약 기구(CSTO) 회원국 외무장관 회담 후 "우즈베키스탄은 CSTO 회원국이 아니며, 우리는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1]
튤립 혁명을 겪은 키르기스스탄은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경을 폐쇄했다.[24] 우즈베키스탄은 사건 전에는 러시아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친 서방 노선을 걸었으나, 사건 발생으로 인해 고립 상태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자국 내 미국군 철수와 함께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수립하며 외교 노선을 크게 전환했다.
5. 2.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안디잔 사태 이후 권위주의 통치를 더욱 강화하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5] 비밀경찰 출신 이크롬 야쿠보프는 카리모프 대통령이 직접 정부군에게 시위대에 발포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5]봉기 진압에는 내무부 소속 군대가 관여했다.[30] 관련 병력에는 우즈베키스탄군 동부 군관구 특수 작전 대대, 내무부 내무군의 특수 부대 '바르스' 등이 포함되었다.[3]
폭력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에도 수천 명이 시위를 이어갔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33] 5월 14일에는 수천 명이 코라수프에서 정부 건물을 습격하고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으려 시도했다.[34]
휴먼 라이츠 워치는 5월 13일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비무장 시위대를 살해한 것은 학살에 해당한다고 밝혔다.[43]
이 사건은 샤랄리 조라예프의 노래 "Anda Jonim Qoldi Mening" (영어: Over There Remains This Soul of Mine)과 첫 무굴 제국 황제 바부르의 시 "Andijonim qoldi mening"(의미: 내 안디잔은 남아있다)이라는 구절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44][45][46][47][48][49]
5. 3. 주변국과의 관계 변화
미국 등 서구 세계는 안디잔 시위 진압에 항의했고, 같은 해 11월 우즈베키스탄 내 미군이 철수했다.[58][59] 반면,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구성된 상하이 협력 기구는 안디잔 학살을 테러 음모로 규정했다.[58][59] 상하이 협력 기구는 2005년 7월 각국에 키르기스스탄 내 안디잔 출신 우즈베크 난민 망명을 거부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60]안디잔 시위대는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집단 안보 조약 기구(CSTO) 회원국 외무장관 회담 후 기자 회견에서 "우즈베키스탄은 CSTO 회원국이 아니며, 우리는 다른 국가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1]
튤립 혁명을 겪은 키르기스스탄은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폐쇄했다.[24] 사건 전 러시아 영향을 배제하려는 친서방 노선을 걷던 우즈베키스탄은 사건으로 고립되었고, 같은 해 11월 자국 내 미국군 철수와 함께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수립하며 외교 노선을 크게 전환했다.
6. 한국의 입장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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