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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지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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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하지야 왕국은 8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흑해 연안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현재 조지아 북서부 지역에 해당한다.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던 공국에서 시작하여, 8세기 후반 레온 2세 때 독립하여 왕국으로 발전했다. 압하지야 왕국은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며 번성했으나, 10세기 말 내전과 봉건 세력의 약화로 쇠퇴했다. 978년 바그라트 3세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조지아 왕국에 통합되어 멸망했다. 압하지야 왕국의 역사와 민족 구성에 대한 해석은 조지아와 압하스 학자들 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역사

압하지야 왕국의 역사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비잔티움, 무슬림의 연대기와 금석학,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왕국의 기원과 민족 구성에 대해서는 조지아와 압하스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는데, 자료 부족으로 인해 논쟁이 확대되기도 한다. 압하스 역사가들은 왕국이 고대 압하스 부족들의 통합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조지아 역사가들은 왕국이 완전히 조지아인이 세운 국가라고 주장한다.[13][14]

대부분의 국제 학자들은 "압하지야"와 "압하스인"이라는 용어가 당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조지아어의 자매어인 카르트벨리아어족 언어를 사용했던 밍그렐리아족, 라즈족, 스반족을 포함한 다양한 인구 집단의 민족적 정체성을 평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조지아어가 문학과 문화의 언어로 그리스어를 대체한 것은 비잔티움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압하스 왕들의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5]

11세기 후반,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으로 조지아 대부분이 점령되었으나, 압하지야는 산악 지형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1099년 말, 조지아의 다비트 4세는 셀주크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조지아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1105~1124년, 조지아 군대는 군사 작전을 통해 조지아의 나머지 지역과 서부 시르반, 아르메니아의 상당 부분을 해방시켰다.

2. 1. 배경

비잔티움의 통치를 받던 공국이었던 압하지야는 오늘날 압하스 공화국 북서부 흑해 연안을 따라 위치했으며, 북쪽으로는 오늘날 러시아의 크라스노다르 지방 영토까지 확장했다. 수도는 아나코피아였고, 비잔티움 태수 임무를 수행하는 세습 아촌이 통치했다. 기독교 국가였던 압하지야는 피티우스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직접 부속된 대주교좌를 두었다.[4]

736년, 에그리시의 미르와 카르틀리의 아르칠을 뒤쫓던 아랍인들이 압하스로 밀려들어왔다. 레온 1세의 완강한 저항과 이질, 홍수가 겹쳐 침략자들은 후퇴했다. 레온 1세는 미르의 딸과 혼인했고, 후계자 레온 2세는 770년대에 에그리시(라지카)를 획득하여 왕조를 통합했다. 새로운 정치 형태는 조지아아르메니아 연대기에서 계속 에그리시라고 불렸을 것으로 추측된다.[5]

2. 2. 독립과 발전

786년경, 레온 2세는 하자르족의 도움을 받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그는 압하스 왕의 칭호를 받고 수도를 동조지아의 도시인 쿠타이시로 옮겼다.[16] 조지아 연보에 따르면, 레오는 그의 왕국을 추후미, 베디아, 구리아, 라차, 타크베리, 스바네티, 알그베티, 쿠타이시의 여덟 공작령으로 세분했다.

압하지아 왕국의 전성기는 850~950년 사이였다. 10세기 초반, 비잔티움 자료들에 따르면, 왕국은 캅카스를 등지고 칼데아 테마의 접경에서 니코프시스 강의 입구까지 3백 그리스 마일의 흑해 연안을 따라 영토를 늘렸다. 왕국의 팽창주의적 경향은 왕국의 영역을 동부로 확장하게 했다. 압하스의 게오르게 1세(872/873~878/879년) 때부터 압하지아 왕은 카르틀리(조지아의 중앙과 동쪽 부분)도 통제했고 조지아아르메니아 바그라티조의 공무에 간섭했다. 약 908년경 콘스탄티네 3세(898/899~916/917년)는 카르틀리의 중대한 부분을 합병하여, 인접한 아랍 통제 트필리시를 그의 왕국으로 가져왔다. 게오르게 2세(916/917~960년) 통치 하에서 압하스 왕국은 세력과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단기간 동안, 동조지아의 카케티와 조지아-알바니아헤레티도 압하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비잔티움과의 일시적인 동맹으로, 게오르게 2세는 아라니아에서 미콜라스 미스티코스의 선교 활동들을 후원했다.[16]

2. 3. 쇠퇴와 통합

압하스의 레온 2세는 770년대에 에그리시(라지카)를 획득하여 왕조를 통합했다. 조지아아르메니아 연대기에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계속 에그리시라고 불렸다.[16]

아랍에 대한 성공적인 방어와 새로운 영토 확장은 압하스 왕자에게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주었다. 대략 786년경, 레온은 하자르족의 도움을 받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그는 압하스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수도를 동조지아의 도시인 쿠타티시(오늘날 쿠타이시)로 옮겼다. 조지아 연보에 따르면, 레오는 그의 왕국을 압하스령 추후미, 베디아, 구리아, 라차, 타크베리, 스바네티, 알그베티, 쿠타이시의 여덟 공작령으로 나누었다.[16]

압하스의 게오르게 1세(872/873~878/879년) 때부터 압하지아 왕은 카르틀리(조지아의 중앙과 동쪽 부분)를 통제했고 조지아아르메니아 바그라티조의 공무에 지장을 주었다. 약 908년경 압하스의 콘스탄티네 3세(898/899~916/917년)는 인접한 아랍 통치 지역 트필리시를 왕국으로 가져와 카르틀리의 중요한 부분을 합병했다. 그의 아들 압하스의 게오르게 2세(916/917~960년) 통치 하에서 압하스 왕국은 세력과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동조지아의 카케티와 조지아-알바니아헤레티는 압하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게오르게 2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아라니아에서 미콜라스 미스티코스의 선교 활동을 후원했다.[16]

압하스의 바그라트 2세(바그라티오니 가의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


하지만 게오르게의 후계자는 왕국을 강하고 온전하게 보존할 수 없었다. 압하스의 레온 3세(960~969년) 통치 기간 동안 카케티와 헤레티는 압하스의 통치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 데메트리우스 3세(969~976년) 통치 때 시작된 쓰라린 내전과 봉건 반란은 맹인 테오도시우스 3세(976~978년) 통치 때 왕국을 완전히 무정부 상태로 빠뜨렸다.

그 당시 남캅카스의 패권은 마침내 조지아의 바그라티드 왕조에게 넘어갔다. 978년, 바그라티드 왕자 바그라트는 조카(누이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없는 테오도시우스를 대신하여 양아버지 타오의 다비드 3세의 도움으로 압하지야 왕위를 차지했다. 바그라트는 바그라티드 왕조와 압하지야 왕조 양쪽 모두의 후손이었기에 끊임없는 내분으로 지쳐가던 왕국의 귀족들에게 수용할 만한 인물이었다. 1008년, 바그라트는 생부 이베리아의 구르겐이 죽자 "이베리아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두 왕국은 왕위 계승을 통해 통합되었고, 사실상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당시 공식적으로는 조지아 왕국으로 불렸다.

3. 통치자

압하지야 왕국의 통치자는 세습 아르콘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 역할을 수행했다. 786년경, 레온 2세는 하자르족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선언하고 왕을 칭했으며, 수도를 쿠타이시로 옮겼다.[17]

압하지야 왕국의 역대 통치자 가문과 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다.

재위 기간왕조
레온 2세780년 ~ 828년안차바제 가문
테오도시우스 2세828년 ~ 855년안차바제 가문
데메트리우스 2세855년 ~ 864년안차바제 가문
게오르기 1세864년 ~ 871년안차바제 가문
요한 (찬탈자)871년 ~ 873년샤블리아니 가문
아다르나세887년 ~ 893년샤블리아니 가문
바그라트 1세882년 ~ 894년안차바제 가문
콘스탄틴 3세894년 ~ 923년안차바제 가문
게오르기 2세923년 ~ 957년안차바제 가문
레온 3세957년 ~ 967년안차바제 가문
데메트리우스 3세967년 ~ 975년안차바제 가문
테오도시우스 3세975년 ~ 978년안차바제 가문
바그라트 3세978년 ~ 1008년바그라티오니 왕조



대부분의 압하지야 왕들은 안차바제 가문 출신이었으나, 요한과 아다르나세는 샤블리아니 가문 출신이었다. 바그라트 3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 출신으로, 978년부터 1008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했다.

3. 1. 아노스조 가 (안차바제 가)

키릴 투마노프 공은 아노스라는 이름을 훗날 압하지야 귀족 가문인 안차바제 가문과 관련시킨다.[8] 관례상, 압하지야 왕들의 재위 기간 번호는 아바스기아의 아르콘들의 것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또한 재위 기간에 대한 일관성이 부족한 부분도 있다.

ანჩაბაძეka는 압하스인과 조지아인의 성씨이며, 압하스어로는 아차바(А́чба)라고 표기한다. 안차바제 가문은 중세 초기부터 압하스 지역을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중 하나이다. 그들은 압하스의 레온 1세와 비잔티움 제국 황제 사이의 혈연 관계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기원을 아나코피아의 아노스 가문에서 찾았다.

다음은 투마노프의 견해에 따른 아노스조(안차바제 가) 출신 압하지야 왕들의 목록이다.

재위 기간왕조
레온 2세780년 ~ 828년안차바제 가문
테오도시우스 2세828년 ~ 855년안차바제 가문
데메트리우스 2세855년 ~ 864년안차바제 가문
게오르기 1세864년 ~ 871년안차바제 가문
바그라트 1세882년 ~ 894년안차바제 가문
콘스탄틴 3세894년 ~ 923년안차바제 가문
게오르기 2세923년 ~ 957년안차바제 가문
레온 3세957년 ~ 967년안차바제 가문
데메트리우스 3세967년 ~ 975년안차바제 가문
테오도시우스 3세975년 ~ 978년안차바제 가문


3. 2. 샤블라니 가

요한과 아다르나세는 샤블리아니 가문 출신이었다. 키릴 투마노프는 샤블리아니 가문이 스반 출신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샤블리아니 가문은 현대 역사에서 첫 번째 왕 레온의 이름을 따서 레오니드 왕조, 또는 왕가가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아노스 공의 이름을 따서 아노시드 왕조로 알려져 있다. 투마노프는 아노스라는 이름을 훗날 압하지야 귀족 가문인 안차바제 가문과 관련시킨다.[8]

재위 기간왕조
존 샤블라니878/879년~880년경샤블리아니 가문
아다르나세 샤블라니880년경~887/888년샤블리아니 가문


3. 3. 바그라티오니 가

바그라트 2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 출신으로, 978년부터 1014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했다.[8] 남캅카스의 패권은 조지아의 바그라티오니 왕조에게 넘어갔다. 978년,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왕자 바그라트는 후계자가 없던 테오도시우스 3세를 대신하여 양아버지 타오의 다비드 3세의 도움으로 압하지야 왕위를 차지했다. 바그라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와 압하지야 왕조 양쪽 모두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내분으로 지쳐가던 왕국의 귀족들에게 환영받았다. 1008년, 바그라트는 생부 이베리아의 구르겐이 죽자 "이베리아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두 왕국은 왕위 계승을 통해 통합되었고, 사실상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한과 아다르나세를 제외한 대부분의 압하지야 왕들은 샤블리아니 가문 출신이었다. 키릴 투마노프는 아노스라는 이름을 훗날 압하지야 귀족 가문인 안차바제 가문과 관련시킨다.[8]

재위 기간왕조
레온 2세780년 ~ 828년안차바제 가문
테오도시우스 2세828년 ~ 855년안차바제 가문
데메트리우스 2세855년 ~ 864년안차바제 가문
게오르기 1세864년 ~ 871년안차바제 가문
요한 (찬탈자)871년 ~ 873년샤블리아니 가문
아다르나세887년 ~ 893년샤블리아니 가문
바그라트 1세882년 ~ 894년안차바제 가문
콘스탄틴 3세894년 ~ 923년안차바제 가문
게오르기 2세923년 ~ 957년안차바제 가문
레온 3세957년 ~ 967년안차바제 가문
데메트리우스 3세967년 ~ 975년안차바제 가문
테오도시우스 3세975년 ~ 978년안차바제 가문
바그라트 3세978년 ~ 1008년바그라티오니 왕조


4. 역사 기록과 민족 구성 논쟁

조지아, 아르메니아, 비잔틴 제국, 무슬림 연대기에서 기술된 왕국의 역사는 현대 금석학과 고고학적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압하스 왕국의 왕가 뿌리와 민족 구성에 대한 문제는 현대 조지아와 압하스 학자들 간의 주된 논쟁점이다. 이 논쟁은 관련 자료 부족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대부분의 압하스 역사가들은 이 왕국이 고대 압하스 부족들이 인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통합된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조지아 역사가들은 그 왕국이 완전히 조지아 왕국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국제 학자들은 "압하지야"와 "압하스인"이라는 용어가 이 시기에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조지아인(조지아어의 자매어인 카르트벨리아어족 언어를 사용했던 밍그렐리아족, 라즈족, 스반족 포함)들과 현대 압하스인(아바스고이족, 압실라에족, 지기족)[13] 모두를 포함한 왕국의 모든 인구에게 널리 퍼졌다는 점을 들어 다양한 인구 구분[14]의 민족적 동일성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조지아어를 사용하는 상당수 인구는 비잔티움의 정치, 문화적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스어 대신 조지아어를 문학과 문화의 언어로 채택한 압하스 왕들의 노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5]

참조

[1]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Reaktion Books
[2]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Reaktion Books
[3] 문서 REDIRECT template
[4] 간행물 Annuario Pontificio 2013 Libreria Editrice Vaticana
[5] 논문 Abkhazia's status as part of Georgia: historical perspective https://cyberleninka[...]
[6] 문서 The History of Egrisi, Abkhazeti or Imereti
[7] 서적 The Blackwell Companion to Eastern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2-05-11
[8] 문서
[9] 서적 Conflict Resolution in De Facto States Taylor & Francis 2022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The History of Egrisi, Abkhazeti or Imereti
[1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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